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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상식

내 마음이 병을 만든다

by Healing New 2020. 3. 20.

자신이 믿는 대로 경험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가 믿는 대로 경험하기'입니다. 세상만사와 우리들 각 개인의 어떠
한 일도 `믿는 대로 경험한다'는 원리와  공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든 종교,  철학, 정치 
이념도 실은 뛰어난 지도자의 신념체계이며 `믿는 대로 경험한다'는 공식 내에 있습니다. 의
학이나 과학도 신념체계이므로 `믿는 대로 경험한다'는  원리가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최고의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괴롭고 슬픈 신념이나 상념은  질병이나 고통을 경험하게 하
고, 밝고 고운 신념이나 상념은 건강과 행복을 경험하게 합니다. 즉 내가 평소에 믿는  바가 
나의 육신과 생활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몇 년 전 중국의 기공교사로부터 기공
수련을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기란 우주에 가득 찬 에너지란 뜻입니다. 기는 신념, 즉 내가 믿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기
가 전력이라면 내 마음이 발전소입니다. 신념에서 기가 나오고  기는 육신이나 물질의 모습
으로 전환됩니다. 신념에서 에너지가 나오고 그 에너지 기운이  우리 몸에 변화를 일으키는 
실험을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해볼 수 있습니다. 
  이 실험은 여러분이 더 아름다워지고 싶거나 생활의 변화를 원할 때도 응용할 수 있습니
다. 이제 여러분의 두 손 안쪽의 굵은 주름을 서로 포개서 손바닥과 손가락을 맞대보십시오. 
양쪽 손가락 끝의 길이가 꼭 같지요? 길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기억
해 두십시오. 이제 눈을 감고 여러분의 한 쩍 손을  들고(여자는 오른손, 남자는 왼손) 자신
의 주의를 들고 있는 손가락에 모으고 그  손가락이 하늘을 향해 쭉 늘어나고 있다고 믿고 
늘어나고 있는 느낌을 느끼십시오. 어떠한 의심이나 다른 생각은 접어두고 오로지 손가락이 
길게 늘어난다고 믿으세요. (약3분 후) 이제 눈을 뜨고 앞서와 같이 두 손목의 주름살을 포
개어 양쪽 손가락의 길이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쪽  손가락의 길이가 더 길어졌습니까? (아
마 길어졌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눈을 감고 늘어났던 같은 손을 들고  이번에는 반대로 손
가락이 어린애 손처럼 작아지고 있다고 믿고 점점 작아지는  느낌을 가지세요. 의심하지 말
고요. (약3분 후) 이제 눈을 뜨고 손목의 주름을 포개어  손가락 길이를 견주어보십시오. 길
었던 손가락이 오히려 더 짧아졌습니까? (아마 짧아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최면을 걸
고 있거나 독자 여러분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는 것입
니다.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이나 질병의 해결을 위해서 나의 온 주의를 모으고 신념의 파
장을 보내면 믿는 대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불치병이라는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을 만진 후 즉석에서 회복되었지요.  예수는 "너의 믿음이 낫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대로 경험한다'는 원리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화가 나거나 
괴로운 심정일 때는 음식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손 끝에서 독이 나올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음식에 손을 댈 때는 항상 감사하고 좋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음
식점에 가서 주인이나 종업원의 비위를 거슬러서 화가 나게 만들면 누가 손해일까요.
  중국의 과학 기술원과 기공협회가 공동으로 실험한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오
늘밤 손님들을 대접해야하는데 사업상 술을 마셔야 하지만 취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술잔에 
술을 받을 때 "알코올은 날아가 버리고 물만 남으라"고 나의 모든 주의를 술잔에 모으고 그
렇게 믿습니다. 술잔을 앞에 놓고도 계속 그렇게 믿고 알코올이 날아가고 있는 것을 상상합
니다. 술을 조금씩 마시는 순간에도 목구멍에 물만 넘어가고  알코올은 입으로 불어내서 나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렇게 믿고 있으면 취하지 않는답니다. 실제로 피를 뽑아 혈중의 알
코올 농도를 검사해 보면 현저하게 낮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념은 내 몸뿐만 아니
라 물질적 대상에도 변화를 일으킵니다. 
              
    건강과 행복을 부르는 신념
  어떤 신념이 고통과 질병을 부를까요? 교통사고나 끈질긴 난치병의 배후에는 고통을 부르
는 신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병에 걸리고 사고를  내고 싶은 신념을 가지고 있
겠느냐고요?
  나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통해 많이 확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모든 것을 곱게 보
고 늘 편안한 마을을 가지고 있으면 병원 신세를 질 일이 없게 됩니다. 오늘날 병원이나 의
학은 질병 그 자체만을 좇는  좁은 시각의 한계가 있습니다. 오염된  한강물이 서울 시내를 
통과할 때 강물을 정화시키고 약을 뿌리는  것이 의학적 방법이라면 오염을 일으키는  한강 
상류를 해결하는 것이 신념 다스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 가운데 '믿는 대로 경험
한다'는 원리를 믿지 않는 분은 자신이 믿는 대로 경험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믿는 대로 경
험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실은 그것도 믿는 대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
니다. 
  실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부인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사내아이를 두었는데  이 아이가 늘 자기 머리털을  뽑고 
있습니다. 머리 한쪽에 소 눈깔 만하게 탈모가 되어 있어서 보기가 흉했습니다. 아무리 못하
게 말려도 소용없습니다. 손에 장갑을 끼워 놓아도, 매로  때려도 계속 뽑고 있어요. 피부과 
병원에 가서 치료해도 심지어 정신과에서 치료를 해도 효과가 없어요. 이 부인은 평소 시어
머니를 미워해서 시어머니를 볼 때마다 "저 노인네 머리채를  뽑아 버렸으면 시원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왠지 머리채를 뽑고 싶은 마음이 늘 들었습니다. 이 엄마의 상념이 아이를 
통해서 경험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엄마의 마음을 바꾸게 했습니다. 당신을  걱정하게 
만드는 이 아이는 누구와의 사이에서 낳았는가? 남편과 좋아해서 낳았지요. 그 남편은 누가 
낳았는가? 머리채를 뽑고 싶은 시어머니가 낳았지요. 시어머니가  없는 데서 혼자 앉아 "어
머니,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하루종일 반복해서 외웠습니다. 처음엔 저항감이 생겼으나 며칠
이고 계속하는 동안 뜨거운 눈물도 많이  흐르고 차츰 시어머니가 좋게 느껴지게  되었습니
다. 이 엄마의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지자 아이가 머리에 손도 대지 않게 되었습니다. 
  건강이란 약이나 식이요법, 운동 같은 것으로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마음 
다스리기를 통해서 좋아집니다. 요즘에는 건강법 홍수시대라고  할만큼 수많은 건강법이 소
개되고 있습니다. 신문 잡지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로 따라가려면  정신을 못 차릴 지경입
니다. 이런 것에 너무 휩쓸릴 필요가  없습니다. 곱고 밝은 마음을 가지게되면 몸에  해로운 
음식을 싫어하게 되고 자연히 나의 건강과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
러므로 좋은 신념과 상념을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현대 서양의학은-근래에는 일부 동양의학에서까지도 그러한 경향이 있습니다만-히포크라
테스의 전체적 생명관과 자연관을 망각해 버리고 분석적이며 세분화된 의학으로 발전해  왔
습니다. 사람 몸을 기계 부속품처럼  분해하는 이른바 기계론적 발상이 지난  수백 년 동안 
서양의학을 지배해온 결과입니다. 따라서 생체와 환경을 둘로 나누고 몸과 의식을 이분화시
켜서 보는 경향이 팽배해졌고, 질병이란 곧 몸의 생물학적 기능의 이상이며, 건강이란  다만 
병이 없는 상태인 것처럼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인류는 오랫동안 기계적인 서양문
화에 세뇌되어 오다보니 이렇게 주입된 신념과 관점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데 익숙해지고 말
았습니다. 
  그러나 참으로는 자연이나 인체는 기계와 같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한 순간도 머무름
이 없이 변화해 가는 역동적인 흐름입니다. 자연과 인체는 많은 요소가 통합되어 이루고 있
는, 그것자체가 하나의 단위이므로 이를 분해, 분석하자마자 그 특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무+나무+....=숲이 아니며 뇌+심장+위+간+....=사람이 아닙니다.  요소와 요소를 연결하는 
마음, 정보, 기 등을 매개로 하여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전일적인 에너지 째로 인체를  보아
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건강과 질병을 규정할 때 일직선을 그어 놓고 한쪽  끝은 건강이고, 반대 쪽 끝은 
질병이라는 식의 일차원적인 해석은 본질을 비껴선  발상입니다. 건강이든 질병이든 그것은 
생리와 심리, 생활양식, 자연환경, 사회환경, 문명구조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차원과 
요인이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나타내 보이는 다차원적인  현상입니다. 이러한 다차원성이 이
해가 될 때 질병이란 곧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부조화와 불균형의 반영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게 느껴지게 됩니다.
  불건강, 질병의 상태란 이러한 복합적인 부조화가 회복되지 못할  때 생체가 그러한 부조
화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탈출수단으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
다. 그러므로 단순히 병증에 대한  물리적 제거가 꼭 건강으로 가게  하는 최선의 조치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생체가 조화와 균형을 회복할 목적으로  어떤 질병을 통해서 탈출구를 
모색했는데, 그것이 차단되면 또 다른 탈출구를 모색해야만  합니다. 이를테면 알코올, 마약 
중독, 정신질환, 사고, 반사회적 행동, 자살, 기타 수많은 개인적, 사회적 고통의 모습으로 말
입니다. 그러니 질병이나 사고, 개인적인 삶의 고통이나 환경파괴, 사회적 죄악, 이것들은 모
두 같은 근원에서 나오는 서로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환자에 대한 완벽한 치료를 위해서는 그 질병이나 사고와 관련되어 있는 요
인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차원, 모든 관점을 통해서 총체적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이 책에서 
건강을 이야기 할 때 다만  생물학적인 육체의 상태만이 아니라  의식, 생활양식, 사회환경, 
문명구조 등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려고 시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의학은 병원 중심의 질병치료 의학으로부터 생활중심의 건강 증진 의학으로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계론적인 종래의 치료방식으로는 현대적인 만성질환
들을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우며 특히 불건강 내지 반건강 상태에 있는 절대 다수의 질
병 예비군을 병원 중심의 의학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사랑으로 감싸라
  고통과 질병을 가져오는 신념의 뿌리는 욕망과 저항입니다. 무엇을 너무 좋아해서 가지려
는 욕망, 무엇을 너무 싫어해서 배척하려는 저항, 이 둘이 병통 입니다. 욕망은 지나치게 음
식, 이성, 재산, 명예, 권력 같은 것을 확보하려는 욕심입니다. 저항은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
는 마음, 인생은 고통이고 슬프고 불안하고 투쟁이라고 믿는 마음, 상대를 늘 배척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념과 신념을 지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거나, 남을 미워했거나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고 더러는 배신도 했
지요. 여러분 가운데 그렇지 않은  분이 있습니까? 과거에 우리가  품었던 어두운 마음이나 
말과 행동은 하나도 빠짐없이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되듯이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습
니다. 녹음된 테이프는 어느 땐가는 재생되어 나타나듯 과거의  어두운 신념 덩어리들은 기
회 있는 대로 고개를 들고일어나 고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녹음테이프를 의도적으로 재
생시켜 공 테이프로 만들든지 밝은  내용으로 다시 녹음해야합니다. 그런데  나의 잠재의식 
가운데는 너무 많은 녹음 테이프가 저장되어  있으므로 보통 속도로 지우려면 세월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고속 녹음기로 짧은 시간 내에 풀어서 지우고 좋은 내용으로 녹음하는 방법
이 있습니다. 해리 팔머라는 심리학자가 개발한 강력한 자기 진화 방법입니다. 이 책을 읽어 
나가면 뒷부분에서 보다 자세히 소개를 해놓았습니다만 간략히 그 요령을 말씀드립니다. 
  그 첫째 방법은 '화해와  축복의 산책'입니다. 
 혼자서 목표를 정한 후 산책을  나가는데 목표지점까지는 화해, 즉  어두운 녹음을 지우는 
작업을 하고 목표에서 돌아올 때는 축복, 즉 밝은 내용을 새로 녹음하는 작업을 합니다. 자, 
이제 실제로 '화해와 축복의 산책'을 떠난다고 상상하고 같이  해보실까요? 여러분 기억 가
운데 몹시 미워하거나 원한을 기지고 있는   대상, 또는 공포나 슬픔의 대상이나 사업실패,   
퇴직, 배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사별, 등의 사건을 하나 떠올려  보십시오. 아직도 화
가 나거나 미운 생각이 있다면 의도적으로 그 느낌을 강하게 확대시켜 느끼고 자신의 귀에 
들리만큼 소리를 내서 다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또 다음   상대나 대상을 떠올려서 같은 
방식으로 합니다. 어릴 때 이후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의 모든 기억을 되살려 냅니다.  아
마 여러분은 놀라실 것입니다. 내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했나 하구요.  목표
에서 돌아갈 때는 반대로 저절로 떠오르는 대상들에게 내 귀에 들릴 만큼 축복하는 말을 속
삭입니다. "아무개 씨,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즉   내 마음의 테이프에 밝은 내용을 
녹음시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남을  대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많습니까?  더 높은 자기가 
육신의 자기에게 화해를 하고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개야, 너는 사랑스럽고 훌륭하다"
고 말해줍니다. 이 산책을 진심으로 하시는  분은 눈물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미운 마음, 
질투심이 안 나올 때까지 자꾸 반복해서 완전히 지워야 합니다.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밑바
닥에 더러운 것들이 남아 있지요? 이  더러운 쓰레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돌멩이 하나만  물 
속에 던져도 다시 흙탕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산책을 자꾸 하다  보면  모두가 다 곱
고 좋게 보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욕망과 저항을 떠나 큰사랑으로 받아들이기'입니다.           
 우리는 보통 거리를 지날 때 예쁜 꽃과 쓰레기,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등과 같이 매사에 
좋다, 나쁘다, 선이다 악이다로 구별시비를 합니다. 이러한 분별시비 하는 마음이 고통의 씨
를 녹음하는 꼴입니다. 분별시비를 멈추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보든지 싫다(저항), 좋
다(욕망)는 생각을 떠나서 한 걸음 물러나 모두를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듯이 경탄하
며 큰 자비심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훈련이  마음속에 밝은 내용을 녹음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연습을 하나 해보실까요?
  눈을 감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마음속에 떠올리세요.  그 대상을 아름다운 경치
를 보듯이 큰사랑으로 감사하며 바라보십시오. (약 1분 후) 이제 다시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리세요. 이 사람도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보듯이 큰사랑으로 감사하며 바라보십
시오. (약 1분 후) 이제 다시 건강하고 잘 생긴 젊은 사람을 떠올리세요. 아름다운 경치처럼 
감탄하며 바라보세요. (1분 후) 병에  걸려 죽어가는 환자의 모습을  떠올리세요. 이 사람도 
아름다운 경치를 보듯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세요. (1분 후) 좋아하는 동물이나 꽃을 떠올
리고 감사하며 큰사랑으로 바라보세요. (1분 후) 혐오하는 동물이나 물체를 떠올리고 아름다
운 경치처럼 감동하며 바라보세요. (약 1분 후) 이제 눈을 뜨십시오. 옛날의 느낌과 조금 차
이가 있습니까?
  좋다 싫다를 떠나 내 주변의 모두를 큰 자비심으로 받아들이면 우선 내가 편해집니다. 내
가 편안하고 즐거워지면 작은 아파트에 살아도, 남편이 돈을 적게 벌어도, 아이의 학교 성적
이 떨어져도 그냥 행복할 뿐입니다. 실은 내가 편안해지면 건강과 번영, 행복이 저절로 따라
오게 됩니다. 내가 성인군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끼실지 모르나 이러한 생각이 옛
부터 의학의 핵심이었지요. 
  오늘날의 의학이 너무 물질의학 쪽으로 치우쳐 있는 셈이지요. 독자 여러분이 `욕망과 저
항을 떠나 큰사랑으로 바라보기'를 계속하고 있으면 병원에  갈 일이 안 생길 것입니다. 항
상 이 마음을 유지하고 있으면 늘 편안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방법을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문제들에 응용해보십시다. 일상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것들을 몇 가지
로 분류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내용은 건강에 대한 바른 신념 갖기, 상대와 자신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기,  배우자에 대한 좋은 신념 갖기, 자녀에 대한  밝은 신념 갖기, 돈에 대
한 바른 신념 갖기, 죽음에 대한 편안한 신념 세우기, 자유롭고 편안함을 얻는 길 등입니다. 
       
    건강에 대한 바른 신념 갖기
  내 건강은 나쁘다, 내 몸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언젠가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할 지 모른다, 병원에 입원해서라도 조용히 쉬고 싶다와 같은 어두운 신념을 지워야 합니
다. 그러한 신념을 지우지 않으면 기필코 현실로 경험할 날이 있습니다. 
  작년에 두 명의 젊은 여성이 교통사고로 입원한 일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고교 3학년 때 
취업을 하여 지난 5년간 매우 바쁘게 살았습니다. 친구들은 여행도 다니며 즐기는데 자신은 
휴가 한 번 제대로 못 가 늘 불만이었습니다. 통근버스를 타고 출퇴근할 때 이 차가 전복되
어 교통사고라도 나면 쉴 수가 있겠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결국 승용차를 몰고 가다 차
가 전복되어 폐에 구멍이 나고(기흉)갈비뼈가 골절되는 사고를  입고 오랫동안 병원에서 쉬
게 되었습니다. 
  다른 아가씨는 외국을 다니며 조그마한 무역업을 하였는데 늘 쉬고 싶다고 염원을 하였습
니다. 이 사람도 역시 교통사고로 어깨뼈가 골절되어 몇 달  동안 입원하여 쉴 수 있었습니
다. 대개 조용히 쉬고 싶다는 생각은 욕망과 저항에 치우쳐  살아온 탓으로 지쳐 있음을 보
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욕망과 저항을 떠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절대로 지치지 
않고 특히 병원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습니다. 건강에 대한 부정적인 신념을 `
화해와 축복의 산책`과 같은 방법으로 그 느낌을 확대하여 느끼고 말로 풀어버리며 이제 그
런 어두운 상념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믿으면 좋습니다. 그 다음  아름답고 건강한 자신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림으로 그려 벽에 붙여도 좋습니다. 가족 모두의 건강도 같은  방법으로 
신념을 세우면 좋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또 불안한 생각이  떠오르면 같은 방법을 반복해
서 밝은 신념만 남을 때까지 계속합니다. 
  간단한 방법입니다. 어두운 녹음 테이프를 고속으로 재생하여 지우고 밝은 내용의 신념을 
녹음해두자는 것입니다. 고통의 신념이 잔뜩 녹음된 마음의 테이프를 고속으로 지워놓지 않
으면 앞으로 끈질기게 고통을 당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처럼 묵은 신념을 지우고 자신의 밝
은 모습을 떠올리고 이것이 나의 참모습이라고 믿고 속삭이면  밝은 신념이 녹음됩니다. 그
렇게 되면 밝은 생활을 경험하겠지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잠깐 자신의 밝은 
모습을 떠올리며 속삭이는 습관도 좋습니다. 자기가 자신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감사하며 바
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과 일상  생활에 밝은 신념만을 가지면  이러저러한 건강법을 
쫓아다닐 필요가 없게 됩니다. 
       
    상대와 자신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기
  우리는 가끔 한 자리에 같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싫은 사람, 미운  사
람, 경멸하고 싶은 사람, 천하게 여겨지는 사람, 추하게 여겨지는 사람 등. 그러나 실은 우리 
마음의 필터(Identity)를 통해서 우리가 그러한  인상으로 지어내서 보는 것이지, 그것이  그 
사람들의 참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싫은 사람이 보이면 싫어하는  마음의 색안경을 내가 끼
고 보는 것이므로 그 색안경을 벗고 바로 보면 모두가 다 곱고 좋은 대상인 것입니다. 필터
와 색안경이란 자신이 지닌 신념입니다. 사람과  사물을 볼 때마다 좋다 나쁘다, 예쁘다  밉
다, 선/악으로 분별시비를 하다보면 나의 주의가  분산되고 따라서 생명 에너지가 고갈되어 
지쳐버립니다. 나는 결국 불안과 고통만 맛보게 됩니다. 이런 분별시비를 떠나서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한결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듯 의도적으로 존경하며 바라보면 내가 우선 편해
집니다. 이것은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매우  이기적
이지요?
  우리는 가끔 몇 사람이 모이면 그 자리에  없는 어떤 사람의 흉을 보거나 비난하는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흉을 보기 시작하면 좌중의 이 사람  저 사람이 덩달아 흉보기 경쟁을 
합니다. 한 사람을 몹쓸 사람으로 만들게  되지요. 남을 칭찬할 때도 정도 이상으로  높여서 
말하기 일쑤고 주변을 웃기기 위해서 농담을 할  때에도 이 소리 저 소리로 꾸며보려 하기 
일쑤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은 자신을 잘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더 재치있게 보이기 위해
서,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을 잘 꾸며대고 가끔은 남을 가혹하게 매도하기도  합니다. 
대개 사람들 마음은 한시도 쉬지 않고 이런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성인
들은 사람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했습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 나무 저 나무로 방
정맞게 옮겨 다니는 것이 원숭이 아닙니까? 우리 마음이 원숭이와 꼭 같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나 늘 자기가 남에게 잘 보이려고, 능력 있게 보이려고, 혹은 인기를 
얻기 위해서 자신을 꾸며대고 있는 가를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
이에 내가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는 금방 중단하려 하지 말고 더 높은  내가 
내 마음의 원숭이가 까불어 대는 것을 보고 "너  참 잘한다, 어서 계속 까불어라"하며 주시
하고 있으면 스스로 부끄러워서 꼬리를 내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내 원숭이뿐만 아니라 남
의 원숭이도 늘 살펴보고 있어야 합니다. 원숭이들 놀음 속에 덩달아 휩쓸릴 필요가 없습니
다. 이런데 휩쓸리다 보면 나는 뒷날 고통을 맛보아야합니다. 
  상대와 대화를 할 때도 대개는 상대를 잘 설득해 보려는,  내가 잘 보이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재주를 부리거나 겸손한 척하거나, 머리를 이리저리 쓰게 되지요. 이런 식의 대화
는 상대와 나를 하나로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두 사람의 내면에서 모두 감동이 일어나지 않
습니다. 상대에게 진정으로 관심과 주의를 모으고 존경하며 바라보면 내가 편안함을 느끼게 
되고 상대도 따라서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존경하는 척이 아니고, 존경하도록 노력해야지 
하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존경심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실은 이렇게  쓰고 있는 나도 잘 안
됩니다. 내가 지금 독자 여러분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재치있는  말재주를 부리거나 
인기를 끌어볼까 하고 머리로만 생각을 짜내면 우선은 재미있어할지 모르지만 그런 식의 대
화는 향기 없는 조화와 같아서 빛깔만 현란할 뿐 생명과  혼이 없습니다. 감동을 주지 못합
니다. 
      
    배우자에 대한 좋은 신념 갖기
  주변에서 남편의 외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부인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러한  경우 
가정이 파탄하거나 부인의 건강이 크게 상하는 일까지도 있지요?
  얼마 전 내게 50대 후반의 부인이 찾아왔는데 이 부인 지난 3년 동안 자궁암으로 어느 대
학 병원에서 치료했지만 이제 병원  치료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선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나는 이 부인처럼 끈질긴 고통을 당하는  배경에는 반드시 어떤 저항하는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조사해보기로 했습니다. 이 부인의 어린 시절, 친정 아버지가 본처
한테서 두 딸을 낳고 나서 아들을 낳겠다는 이유로 첩을 얻었습니다. 이 때부터 어린 마음
속에는 아버지와 첩에 대한 심한 원망과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남자들이란 배신자이며 
믿을 게 못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 분이  커서 시집을 갔는데 이제는 남편
이 춤바람이 나서 사흘 걸음으로 외박을 합니다. 이 버릇을 잡으려고 백방으로 애를 써봤지
만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버릇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인의 오랜 마음고생이 
자궁암을 낳게 한 뿌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이 분이  어릴 적부터 마음 가운데  새겨 놓은 
"남자는 도둑이고 믿을 게 못된다"는  신념을 친정 아버지에 이어서 남편의  모습을 통해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인에게는  의학적 치료도 필요한 것이지만  아버지와 남편에 
대한 뿌리 깊은 저항의 신념을 떠나 그들을 감사하고 존경하며 큰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우선 되어야할 치료법입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쉽게  가질 수 있겠냐고들 합니다만 
자신이 진정으로 건강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꼭 그렇게 해야 하겠지요. 이런 일은 그 대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편해져야 하기 때문에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외도를 하거나 허튼 짓을 하고 있다고 할 때 남편을 공격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
이 아닙니다. 이런 일로 고통받는 부인들에게는 과거에 어떤  사람이나 자기 남편을 배척하
고 원망했던 신념이 꼭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지워야 합니다.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은 채 남편만 고치려고 하는 것은 고통의 영화 필름을 바꾸어 놓지 않고서 스크린에 비치
는 고통의 화면을 지우려고 덤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어두운 신념을 지우면
서 이제 이것은 나의 남편의 모습이 아니라고 다짐합니다. 밝고 훌륭한 남편의 인상을 마음 
가운데 새겨 항상 큰사랑으로 존경하고 바라보면서 이것이야말로 내 남편의 진짜  모습이라
고 믿는 것입니다. 조그만 의심도 없이 확고한 신념으로 `남편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훈련을 
계속하고 있으면 사랑하는 척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마음이 우러나오면 남편은 외도를 하라
고 해도 안 하게 됩니다. 
  부부간의 갈등이 질병이나 사고를 불러온 사례가 많습니다만 남편에게서 어떤 허물이  눈
에 띄면 그것을 고치려고 우기지 말고 남편에 대한 나의 부정적 신념을 먼저 지우며 이  허
물은 내 남편의 참 모습이 아니라고 스스로 선언합니다.  훌륭하고 사랑스런 남편의 인상을 
떠올려 `존경하며 바라보기`를 계속하다 보면 남편은 서서히 바뀌어 질 것입니다. 남편 눈에 
부인의 허물이 보일 때도 남편은 똑같이 이렇게 해야겠지요.  배우자의 잘못을 물리적 힘으
로만 바꾸려고 덤비지 말고 자신의 상념을 밝은 쪽으로 먼저 바꾸는 것이 해결의 열쇠입니
다. 
    
    자녀에 대한 밝은 신념 갖기
  어린 자녀의 건강 상태나 운명은 부모가 평소 먹는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
다. 앞서 시어머니 머리채를 뽑아놓고 싶었던 부인의 아이가 제 머리털을 뽑은 사례가 좋은 
예입니다.
  갓난아이를 둔 한 아기엄마가 남편이 바람을 피워 속을 썩인다고 남편을 상대도 하지 않
고 말을 안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랫동안 남편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아이가 
다섯 살이 넘도록 말을 못합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아도 신체에 특별한 이상은 없는
데도 말입니다. 
  요즘은 자녀를 적게 두는 시대라서 아이들을 과잉보호하는 나머지 우리 아이가 건강이 나
쁠지 모른다, 무슨 사고라도 당할지 모른다고 늘 불안해하는 부모들이 상당히 있는 것 같습
니다. 멀쩡한 자녀에 대해서 걱정하는 마음, 불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아이를 도와주는 것
이 아니라 아이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 아이는 밝고 완전
하다는 인상을 상상하고 늘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갈 때 뒷모습을 
보며 이러한 신념의 파장을 보내면 좋을 것입니다. 남편이 출근할 때도 이처럼 하면 좋겠지
요. 
  다 그럴 바는 아니겠습니다만 아이들이 화상을 입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심하게  아파 
병원에 오는 경우 특히 아이엄마의 마음상태와 관련되는 경우가  상당히 있는 것 같습니다. 
사례를 일일이 다 들 수 없지만 엄마가 시부모님이나 남편 또는 주변과 갈등을 반복하는 상
태에 있는 경우 아이의 건강이나 운명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밝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원한다면 부모 마음 가운데 어두운 그림자가 없는지 찾아서 
지우고 밝은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부모 마음이 밝고 행복해야만 그 파
장으로 자녀도 밝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좋은 신념 갖기
  약 2년 전 30대 후반의 젊은 부인이 자주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병 때문에 병원에 온 일
이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결혼한 지 10년 가량 되었는데 결혼 전까지는 건강했으나 첫아이
를 낳은 뒤부터 자주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증세가 간질발작과는 아주 다릅니
다. 멀쩡한 사람이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처럼 몇 시간이고 깨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일로 
병원 입원을 스무 번  이상했고 뇌신경계통에 유명하다는 의사,  한의사를 찾아가 진찰하고 
각종 검사를 해봐도 별 이상 소견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떤 의사는 간질병으로 진
단하고 간질병을 처방해 주어 여러 해 동안 먹고 있으나 그 증세가 호전되지를 않았습니다. 
이 부인은 장남 되는 사람과 연애 결혼하여  잠시 시댁에 함께 살게 되었는데 시집오던 날 
기독교 교화 권사인 시어머니가 "너 이제 우리 집 식구가 되었으니  교회에 다녀라"는 것입
니다. 그런데 이 며느리는 불교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늘 절에  다니며 기도하는 데 
익숙해 있었습니다. 도저히 교회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게 되면 부처님을  배신
하는 것 같아서였겠지요. 이 부인이  좀 트인 여자 같았으면 불교나  기독교나 표현만 다를 
뿐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알고 시어머니 명령을 들어주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몇 차례 경고를 했음에도 며느리가  꿈쩍도 않자 어느 날 
시어머니가 극도로 화가 나서 "너 뱃속에 있는 애기 지워 버리고 우리 집을 나가라"하며 엄
청난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이때가 첫아이 임신 8개월로 몸이 무거웠을 때입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며느리는 1주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며느리  눈에 시어머니가 무서운 독사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마주치면 꼭 소름끼치는 독사를 보는 듯 가슴이  뛰었습니다. 따라서 이 부인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증세는 항상 시어머니와 충돌을 하고 난 후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며느리의 병은 '시어머니 공포증'이고 그 원인은 시어머니에  대한 지독한 저항이었지요. 나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지금 시어머니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세상
의 도리로 보자면 아주머니께 잘못이 없지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에 종교를 강요하
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학대하는 시어머니가 잘못이지요. 그러나  당신이 믿고 있는 불교의 
도리에 비추어 본다면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과거에 그만한 고통의 씨를 심은 결과
가 아닌가요?
  당신은 이 집에 시집올 때 갚아야 할 고통의 부채 장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고통의 부
채는 당신이 고통을 맛보아야만 갚아질텐데 시어머니가 악역을 맡아가면서까지 당신의 부채
를 갚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시어머니는 독사가  아니고 당신이 우러러 모셔
야 할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이 때부터 부인의 심경에 큰  변화가 온 듯 눈물을 흘렸습니
다. 집에 돌아가서 남편이 출근하고 혼자 있을 때 방에 홀로 앉아서 또는 산책을 하면서 시
어머니가 살고 계신 쪽을 향해  "시어머니, 당신을 독사로 잘못 보았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관세음보살입니다"를 되풀이해서 귀에  들릴 만큼 외우십시오.  시어머니 듣는 데서 
직접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방법이 어째서 심신에 강력한 변화를 일으키는가는  `화해와 축복의 산책`을 이야
기할 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 부인이 일주일 가량을  온종일 시어머니 쪽을 향해서 그렇
게 시키는 대로하였습니다. 뜨거운 눈물도 많이 흐르고 시어머니가  차츰 좋게 느껴지기 시
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시어머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는데 말입니다. 적대감으로  꽉 
차있던 부인의 눈꺼풀이 편안히 풀리게 되었고 얼굴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 
방법이 맘에 드신다면 매일매일 아주머니가 완전히 편안해질 때까지 몇 달이고  계속하라고 
권했습니다. 
  서너 달쯤 후에 이 부인이 아파트 이웃들이랑 같이 내게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밝아져 있
어서 딴 사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 부인에게 놀라운 이변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제 수면제 같은 약을 먹지 않아도 푹 잘 수 있고 몸도 편해졌지만 그보다도 오늘 아침 시
어머니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는데 "너희들 사는 아파트가 너무 작으니까 좀더  큰 곳으
로 옮기거라. 내가 돈을 대줄 테니까"했다는 것입니다. 종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
니다. 너무도 놀랍고 기뻐서 이웃 사람들이랑 내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이 부인이 시어
머니를 독사로 보았던 신념을 빨리 경험하여  끝내고 밝은 관세음보살로 신념을 바꿔  가진 
결과 시어머니가 관세음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16세기의 위대한 의학자 파라켈수스는 이 부인 같은 경우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몸이 아파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의 반 이상은 각종 검사를 해도 별 이상 소견이  찾아지
지 않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약물 같은 치료가 큰 효험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가 하면 과학혁명 이후 지난 1백년 동안 현대의학이 물질의학 쪽으로만 빠진 탓
입니다. 요즘 현대 의학에서도 이런 데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  아이오아대학 
웰레스 교수 같은 이는 <깨달음의 신경생리학>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신념 및 정서와  건강
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코올-마약  중독, 자살 기도 같은 심리적 문제
뿐만 아니라 암과 에이즈 같은 끈질긴  난치병의 배경에도 어두운 신념과 감정이  파괴적인 
에너지 소스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하면  건강의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암 환자의 의학적 치료결과가 좋은  경우 대부분 그 치료과
정에서 어두운 신념, 감정, 생활 태도가 바뀐 사람이 잘 치료되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돈에 대한 바른 신념 갖기
  돈은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항상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대개는 나한테 돈이 부족하니 
더 많이 있으면 좋겠다고 갈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돈이란  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 있
을 때, 내가 하는 일이 즐거울 때 자연히 따라오는 에너지라고 합니다. 따라서 돈을  몇백만 
원 몇천만 원과 같이 수량적인 단위로만 보지 말고 좋은 일과 좋은 감정에 따라 다니는  에
너지 흐름으로 바라보는 것이 돈에 대한 가장 좋은 신념인  것입니다. 돈을 대할 때도 사람
이나 다른 사물을 대할 때와 같이 배척하는 저항도 갖지 말고 반대로 그것을 집요하게 쥐려
고 하는 욕망도 떠나서 자연스런 흐름으로 이해하고 감사하며 바라보면 돈으로부터  비롯되
는 돈으로부터 비롯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빚을 주었다가 떼인 후 고민하여 몸에 병을 만든 분들이  가끔 병원에 옵니다. 이런 분들
은 빚을 준 내게는 잘못이 없고 빚을 떼먹은 상대만  나쁘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 고통
은 공동창조이며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내가 지어낸 것입니다.  내게는 책임이 없고 상대에
게만 책임이 있다고 잘못 보는 데서 고통이 비롯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책임을 지는 것이고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화병을 만든 분들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것은 내 책임이라고 인정하며 상대를 원망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어떤 
약으로도 듣지 않던 병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서  경제적 어려움도 차츰 풀리겠지
요. 내게는 책임이 없다고 끝끝내 고집하며 원망하고 있으면  병도 깊어지겠지만 여러 모로 
경제적 고통이 가중될 것입니다. 
  내가 겪고 있는 모든 현실은 나의 신념과 생각의 반영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 책임이지
요. 이 원리는 돈에 대해서도 틀림없이 적용된다고 봅니다. 다른 현실과 마찬가지로 돈도 나 
자신의 신념과 생각의 반영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싶다고  갈망하여 돈을 벌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데도 돈이 생기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잘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시 오래 전부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돈에 대해 저항하고 있지나 않은지 말입니다. 
  돈은 더러운 것이다, 부자들은 양심이  불량하다, 돈이 모든 부정의  근원이다, 나는 항상 
돈이 없어 쩔쩔매고 있다, 돈은 절대로  쉽게 벌리지 않는다, 청빈한 삶이 아름답다....  등과 
같은 믿음을 한 편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돈이 안 생긴다고 한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
겠습니까? 돈은 선과 악의 잣대로 저울질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가난하고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는 대중신
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착하고 선한 일에는 반드시  번영과 행복이 뒤따를 때 그
러한 일들이 오래 지속되고 더욱 확대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음에 대한 편안한 신념 세우기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일과 함께 가장 큰 사건입니다. 그래서 생사대사라
고 하지요. 따라서 일생에 가장 큰 일이 생사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
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 대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현대의학이나 병원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시켜주지 못합니다. 각자의 종교나 철학적 관점에 따라  죽음에 대한 견해가 다
르겠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죽음 같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몸이 사라
지는 것을 보고 죽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평소  `몸이 나다'라는 착각과 환상을 가졌던 탓이
지요. 우리의 몸이란 이를테면 우리가 입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날마다 똑같은 옷을 계속 입고 있다면 어느 땐가는 싫증이 나지 않겠습니까? 자연히 그 옷
을 벗게되고 새 옷으로 갈아입게 되겠지요. 묵은 옷을 벗는다고  해서 내가 끝나는 것은 아
니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특정종교의 윤회설을 옮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란 우리 생명의 근원인 의식이 새로운 단계의 경험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의  본체를 바로 알고 그 본질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면 그의 삶은 어떤 성취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큰 성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이란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의 한정 없는 바다 위에 파도가 떠
올랐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천파만파 수없는 파도가 모습을 보였
다가 사라졌다를 계속할 지라도 바다라는 하나의 큰 생명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생명의 근원에서 보면 생사가  없으며 `참 나'는 바다라는  하나의 큰 생명으로서 
영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의 파도로서의 내 몸의 모습은 나의 신념대로 나타났
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지요. 
  몸이 내가 아님을 바로 알고 그 몸을 품고 있는 한정 없는 의식의 바다가 `참 나'임을 안
다면 의식의 바다 위에 잠시 떠올랐던 파도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죽음이라
고 애석하게 여길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자유롭고 편안함을 얻는 길
  불편한 감정이 내 몸의 병으로, 내 생활의 고통들로 현실화됩니다. 어떠한 원리 때문에 불
편한 감정은 불편한 몸으로 표현되며, 불편한 감정을 지우면 어째서 즉시 몸에 변화가 일어
나는가?
  근원의식에서 나온 개체의식은 `내가 있다'라는 첫 번째 신념에 이어 대상을 좋다, 싫다로 
구분하여 판단하는 두 번째 신념을 대체로 갖게 됩니다. 어떤 현실을 나쁘다고 판단하여 그
렇게 믿으면 불편한 감정, 불편한 생각이  나오겠지요. 이 불편한 감정과 생각이 몸의  모든 
세포가 저항의 파동으로 공명진동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질병을 일으키는 최초의 씨가 되지
요. 현대물리학은 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생각, 감정은 아무런 힘도 없는 허무가 아니라  진동
수를 지닌 파동이며 에너지가 있는 물질입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통스런 감정의 파동이 
저항의 전기적 성질을 띤 구체적인 물질입자가 되어 몸의 세포를 이루는 질료가 되지 않겠
습니까? 
  그러므로 "화해와 축복의 산책"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 불편한 감정을 짧은  시간 동안에 
경험시키고 나면 몸이 그것을 오랫동안 끈질기게 다시 경험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돌이켜보아 다른 대상에 대해서이든 자기자신에 대해서이든 불편한 감정이나  생
각이 있다면 불편한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때까지 이런 실천방법을 계속할 필요가 있
습니다. 정말로 불편한 감정이 다 사라진다면 우리 몸과  생활이 틀림없이 편안해질 것입니
다. 
  이어서 `모든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잘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묻기를 어떻
게 나쁜 일이나 악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들  합니다. 어떤 것을 나쁘다거나 
악이라고 보는 것은 판단입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판단은 거의가 빗나간 것입니다. 설사  어
떤 사람이 나쁘고 악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공동창조한 것이며 실은 나의 현실에  비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악을 범한 사람이 따로인 것 같
지만 앞서 말한 대로 파도와 파도가 따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원에서는 하나의 큰 바다이
듯이 나를 하나의 파도로 간주하여 다른 파도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너 따로 나 따로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요. 아무튼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결정적  열쇠는 특히 싫어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저항 쪽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마음
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로 풀어내어 자유롭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그것이 생겨 나온 최초의 바탕인  의식에서 해결되어야 하듯이, 몸
의 고통들도 그것이 만들어진 최초의 바탕인 의식에서 다룰 때 뿌리째 해결될 것입니다. 질
병에 대한 치료와 예방 그리고 건강증진에 대한 근본목표, 밝은 세상과 생명의 문명으로 진
화하는 데 대한 근본 목표는 결국 각자가 자기 삶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삶에서 균
형을 이룬다함은 자신이 현실과 자기 우주의 절대적 책임자임을 자각하고 새로 깨어나는 입
장에서 삶을 운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책 가운데 어떤 내용은 다소 전통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인상으로 비쳐질는지  모르겠
습니다. 과학적인 신념체계의 관점에 사로잡힌 사람의 눈에는 더욱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
지요. 어떤 관점 하나만이 옳다고  고집하게되면 사물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리고 맙니다. 사물을 다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을 억제하다 보면 다차
원화하고 통합시키고 예측하는 능력 또한 제한됩니다.    
  주입된 신념과 관점들이란 일시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개는 
힘을 잃게 됩니다. 
  나는 한때 미국 위스컨신대학 의과학센터에서 연구교수로 지낸 적이 있었는데, 이때 도서
관에 소장된 여러 종류의 의학잡지를 창간호부터 두루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개 1백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저널이었는데 당시 내가 느낀 바는 1백년 전이나 50년 전의  의학의 
모습이란 현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우스운 골동품 같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늘 시간과 공간의 한계 너머
로 나아가 사물을 바라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훈련들이 가능하며 또한 유익하다는  것을 이 책 속의 여러 
가지 사례들이 보여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여러 차원, 여러 관점에서  사물을 융통성 있게 보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이 
관점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식의 신념을 주입시키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관용과 자비심이 커지게 되고 사물을 바로 보는 지혜와  능력도 개발됩니다. 있을 수 있
는 모든 관점에서 진실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인생의 근본목적은 생명의 본성을 자극하고 체득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
나 그것은 지식이나 학문처럼 머리로 알기를 통해서는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경험하
기를 통해서만 깨달아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성인들의 위대한 생명의 메시지가 가슴으로부터 자각되도록 하
기 위해서 되도록 감성이 깨어날 수 있는 언어를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 책은 어떤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학술서적이  아닙니다. 머리로 따져 생각하
는 것을 그만두고 가슴으로 느껴 경험하는 길로 가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자연계 우주만물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인 당신의 생명에 대하여 어떠한 한계나 제약도  상상하지 마십시오. 온 우주
가 당신의 품에 들어오도록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삶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기  위해 일생동안 기다려 왔던 바로  그 
시간입니다. 
      
      
      첫째 마당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위한 생활의료 5단계
  질병을 치료하고 심신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는 다양한 관점의 치료법과 건강법이  있지
만 이들은 결국 다음 세 가지 범주에 귀속됩니다. 
  그 첫째는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이고, 둘째는 기- 생명에너지 다스리기, 셋째는 몸 다스
리기입니다. 서양의학과 동양의학 내에도 이 세 가지가 어느  정도씩은 두루 갖추어져 있지
만, 서양의학은 주로 몸 다스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동양의학은 기 다스리기에 많은 비
중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정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대체의료나 민간의료의 내용들도 대개는 이  세 가지 범주 안에 속합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한정된 자아의식의 표현입니다. 자아의식의  한정된 틀에 묶여 있는  방법들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만 가지고는 심신의 완전한 건강과 편안함이 보장되
기 어렵습니다. 이 세 가지에다 다른 두 가지의 범주가  더 보태짐으로서 보다 풍부한 건강
법의 체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확인하였습니다. 덧붙여진  두 가지 항목은 바로 생명
의 근원과 하나되기, 죽음 다루기입니다. 이들은 자아의식의 한계너머로 의식이  확장되도록 
해주며 심신의 불편함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의학체계들에서는 뒤의 이 두 가지 범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거나 혹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의학체계나 치료법들은 그 효력에 있어서 한계가 있으므로 의사나 치료가라면  마땅
히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건강의 모든 원리가 집약된 치료체계를 개발할 수는 없을까 하는 
소망과 의지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 책에서 앞으로 소개하게 될 '편안한 마음과 건강한 몸을  위한 생활의료 5단계'는  바
로 나의 이러한 소망과 의지의 소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활의료란 생활이 곧 의료가 될 수 있는 내용들을 고통과 질병이 창조되는 흐름의 수순
에 따라 다섯 단계로 정리한 것인데, 일상생활을 통해서 누구나 손쉽게 실천할 수 있으면서
도 심신의 편안함과 건강의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생활방법입니다. 
  그 다섯 단계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1)고통과 질병의 청사진인  어두운 신념, 상념, 
감정을 가지기 위한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  2)병적인 에너지를 정화하고 자연치유력의 
통로를 확대시키기 위한 `기- 생명에너지 다스리기'   3)물질적 모습으로 굳어져 보이는 몸
의 병적인 세포들을 정리하고 면역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몸 다스리기'  4)나의 불안과 두
려움의 근본인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죽음 다루기'  5)질병도 죽음도 없는 내 생명의 본
성을 자각하기 위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의 순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각 단계의 내용들이 건강의 회복과 심신의 편안함이라는 목표를 위해 일관성있고  통일된 
원리가 되도록 의도했습니다.  또한 각 단계들마다 누구나 일상생활을  통해 손쉽게 실행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천 방법들도 체험사례와 함께 설명해 놓았습니다. 
  나는 이 다섯 단계 속에 특히 대체의학과 민간요법의 원리들이 적절하게 수용될 수 있도
록 노력했는데, 잘 활용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질병이나 불건강의 상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생활  속에서 쉽게 실행할 수 있는  일종의 생활방법이므로 
어떤 의료 기관이나 치료가로부터 전문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하더라도 그것과 결코  모순되
거나 대립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병행할 경우 그 치유 효과가 더욱 상승할 것임에 틀림없습
니다. 
  또한 이 다섯 단계 속에는  심신의 건강과 질병, 나아가서는 생사와  관련되는 여러 가지 
요소와 원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것을 절실하게 믿고 실행
한다면 생사를 해결할 만큼 깊고도  큰 체험을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직 받아들이고 
믿는 만큼, 실천하고자하는 의지만큼, 그리고 실천하는 정도만큼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질병이 맨 처음 시작되는 곳 
  질병이나 불건강이 맨 처음 시작되는 곳은 그 사람의 의식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원래 질병도 노화도 죽음도 없는, 어떠한 한계도 없는 순수한  의식입니다. 
이 순수한 의식 가운데서 문득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서 `나'의  신념의  렌즈를 통해서 
내 밖의 대상을 판단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판단이란 결국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서 무엇이 
좋다, 싫다 입니다. 이 좋다, 싫다는 생각,  다시 말해 욕망과 저항이 만병을 일으키는  최초
의 원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고 좋다, 혹은 싫다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아주 흔
히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무 주저 없이 무엇을 좋아하기도 하고, 혹은 싫어하기
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요.  그런데 어던 사람에게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나 
감정이 온전히 사라졌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에게 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장담하건대 그 
사람에게는 절대로 병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그나마 있던 병도 곧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욕망, 저항의 신념 렌즈를  통과한 나의 마음이 같은 성질을  띤 에너지(기)가 되고, 
이런 에너지가 입자화하여 불건강한 세포들의 물질적 질료가 됩니다.  어떤 병으로 이름 지
어 나타나든지 간에 질병과 불건강은 바로 이렇게 해서 출발합니다. 
  질병의 원인을 밝혀주는 수많은 의학이론들이 있습니다. 세균이 병을 일으킨다,  발암물질
이 암을 발병시킨다, 잘못된 섭생이 병을 부른다.....  등등 발병의 원리와 메카니즘을 설명하
는 수많은 관점의 다른 이론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론들은 연극에 비유하자면 몇 개의 중간 
장면을 보여줄 뿐 그 주제와 전체 줄거리를 모두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론들의 상위 개념은 "욕망과  저항의 자아의식이 만병의 시초이며 불편한  생각과 
감정이 불편한 몸으로 표현된다"이며 이것이야말로 으뜸가는 병리학적 관점이라고  나는 믿
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욕망과 저항의 신념을 붙들고 있어서 불편한  감정 한가운데 있다고 합시다. 
심한 분노나 두려움, 비탄, 피해의식 같은 것들은 그의 세포들을 그러한 신념체계대로  변성
시키고 재배열시킵니다. 현대 물리학은 의식이나 생각은 에너지 파동이며 그것은 곧 물질입
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식과 에너지와 물질은 하나입니다. 사람의 의식은  물질입자로 
굳어져 몸의 모양을 나타내며 역으로 몸을 구성하는 물질입자는 분해되어 의식으로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지금 몸에 병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가 몸을 되돌
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즉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를 잘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
로도 그는 병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가 유일한 의학적 대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몸을 치료하는 다양한 의학적 방법들이 대부분의 환자들에게는 필요할 것입니다. 다만 병을 
지어내는 원형인 신념, 상념, 감정을 잘 처리하는 일이 모든 환자에게 꼭 요구됩니다. 이 일
을 소홀히 하면서 몸의 치료만 할 경우 얼핏 보기에는 몸의 병증이 완화되거나 치유된 것으
로 보이겠지만 어두운 신념이 끊임없이 지어내고 있는 병적 기운은 곧 U-turn하여 또 다른 
병의 모습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한 번 둘러 보십시오. 이런 병, 저런 병, 온
갖 종류의 병을 끼고 다니는 사람, 사고도 내는 사람이  낸다는 말처럼 잊을 만하면 한번씩 
꼭 교통사고를 내는 사람 등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20세기 미국의학의 대부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오슬러 교수는 존스홉킨스대학 퇴임  고별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의사들이 환자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대학에서  배운 과학적 지식은 삼 분의 일  정도 
만큼만 유용하고 나머지는 환자의 감정이나 신념 같은 다른 측면들도 잘 살펴 볼줄 알아야 
합니다."
  환자는 의학교과서의 지식만으로는 바로 이해될  수 없는 많은 변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환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과학 지식 외에도 다양한 관점을 통해서 두루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건강과 질병을 최초로 규정짓는 의식에 대한 이해가 제일 중요
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그것이 맨 처음 시작되는 출발점인 의식에서 해결되어야 하듯이 몸
의 고통들도 그것이 만들어지는 최초의 바탕인 의식을 다룰 때만이 뿌리째 해결할 수 있습
니다. 
       
    화해와 축복의 산책
  어두운 신념, 상념, 감정이 모든 질병과  고통의 씨앗입니다. 따라서 어둡고 불편한  신념, 
상념, 감정을 지우고 밝고 편안한 신념, 상념, 감정을 심는 일이 질병에서 풀려나게 하는 결
정적 열쇠가 됩니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나의 경험사례를 소개합니다. 
  58세 부인 S씨. 1993년 봄, 부인은 한쪽 유방에  만져지는 몽우리를 진단 받기 위해서 찾
아 왔습니다. 암이 아닌가 싶어서 지난밤을 뜬눈으로 샜다는 것입니다. 알밤 만한 크기로 딱
딱하게 만져지는 것이 암이 의심될 만했습니다. 조직검사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검사를 포
함하여 여러 가지 검사를 시행하였는데 결과는 본인이 걱정하던 대로 악성 종양이었습니다.  
환자와 가족들은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현대의학에
서는 그 동안 암에 대한 최선의 치료법으로 조기진단,  조기수술이라고 줄곧 홍보하고 있으
니까 수술을 재촉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이 환자에게는 수술에 앞서 더 우
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환자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인상도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과거의 병력 때문이었
습니다. 
  1. 약 15년 전부터 심한 두통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여러 병원에서 뇌에 대한 정밀 검사를 
받았으나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해 편두통으로 알고 치료하고 있다. 양, 한방간에서  장기간 
치료하였으나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지금은 특정한 진통제에만 의존하고 있는데 이 약을 매
일 서너 차례씩 먹은 지가 10년이 넘는다. 
  2. 13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심한 하혈로 쇼크 상태에 빠져 산부인과에 입원, 기능성  자궁
출혈이라는 진단 하에 자궁절제술을 받았다. 
  3. 9년 전 갑상선 종양으로 한쪽  갑상선 절제술을 받고 수술 후  2년간 갑상선 호르몬을 
투여받았다. 
  4. 4년 전 허리에 디스크 탈출증으로 디스크 수술을 받고 그 후 장기간 물리치료, 지압 등
으로 치료하고 있지만 심한 요통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5. 약 10년 전부터 고혈압과 당뇨 때문에 병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치료받고 있다. 
  6. 이외에도 지방간, 만성위염, 만성방광염, 견비통 때문에 가끔 양, 한방을 왕래하며 치료
를 받고 있다. 
  사정이 이쯤 되고 보니 주변 사람들은 이 부인을 병보따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런 판
에 또 유방암이 생긴 것입니다. 그 동안 두통이나 요통에는 진통제로, 자궁출혈에는  자궁절
제술로, 갑상선 종양에는 갑상선 절제술로, 디스크에는 디스크 절제술로, 고혈압에는 혈압강
하제로, 당뇨에는 혈당강하제로, 지방간에는  간장약으로, 만성위염에는 제산제나  소화제로, 
방광염에는 항생제로... 이런 식으로 치료해 왔습니다. 이제 또 유방암이 생겼으니 유방을 절
제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이 부인에게는 왜 이처럼 수많은 질병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잇
따라 나타나고 있을까요?
  이 부인은 스무 살 때 결혼했는데 남편은 6. 25 때  혈혈단신 북에서 피난 온 청년이었습
니다. 남편은 건축청부업에 종사했는데 결혼 초 고생도 많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럭저럭 
먹고 지낼 만큼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도 큰 어려움이 몰려왔습니다.  큰 
공사를 따내려고 돈을 무리하게 동원하여 어느 건설 회사에  투자했는데, 그 회사가 부도를 
내고 도산해 버린 것입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더군다나 남편은 북에서 홀로 내려온  사람
이라서 어려움을 나눌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살고 있는 집마저 압류되어 
셋방으로 옮겨가야 했고 생존을 위해 남편은 막노동판으로 부인은 바구니 장사로 나서야 했
습니다. 
  당시 중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아이들의 학비를 제대로 댈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고통
이었습니다. 도산한 건설회사에 찾아다니며 아무리  사정을 하고 원망해도 돈을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해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고 밤이면 단칸방에 누워 자
고 있는 자식들을 볼 때마다 서글퍼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부인은 불면증
과 두통으로 시달리기 시작했고 얼마 후 남편은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오
랫동안 병원에 입원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수족마비 때문에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는  처
지가 되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약2년 후 부인은 자궁출혈 때문에  수술을 받게 되고 그후 계
속해서 이 병 저 병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부의 의식에는 삶에 대한 두려움, 피해의식, 분노와 같은 어둡고 고통스런 신념이 깊
게 자리 잡고 있어서 이것으로부터 같은 성질의 상념과 감정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정의 불편함이 표현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억눌렸던 탓으로 그  불편한 감정이 
몸의 불편함으로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표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긴 세월 눈물겨운 고생 끝에 자녀들이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얻게 되었고 집안 살림도 다
시 안정을 되찾았지만 부인의 마음 속 깊은 상처는 계속해서 몸에 병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
니다. 
  자식들은 서울의 어느 유명한 암센터에 입원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부인은 내 병원에 입원
했습니다. 입원 첫날부터 그녀의 의식 속에 뿌리 박힌 두려움, 원한, 분노, 슬픔의 감정을 소
멸하고 특히 자신이 희생자라고 하는 신념을 지우도록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낮
에는 주로 산책을 하면서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15년 전의 충격적인 사건을 떠올려 다시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그 동안 뼈아픈 기억이 되살아날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늘 외면
하려고 애써 왔지만 이제는 그 사건과 관련된 온갖  고통스런 감정들, 억압해왔던 느낌들을 
의도적으로 꺼내서 크게 확대하여 표현하도록 했습니다.
  산책길에서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원망과 분노의 대상들,  일체의 고통스런 감정들을 낱
낱이 떠올려가며 그 감정 그대로를 크게 표현하며 다시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을 줄곧 
희생자로 여겨왔던 신념, 자신을  비천한 사람으로 보아왔던 생각들도  노출시켜 큰 소리로 
표현했습니다. 산책길에서 돌아올 때는 원망의 대상들과 자기 자신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축복했습니다.  밤에는 전깃불을 끄고 촛불 하나만 밝힌 채 촛불을 바라보
면서 "아무개 씨,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가장 원망했던 대상들에게 수없이 반
복하여 축복을 보냈습니다. 그 촛불이 다 타서 저절로 꺼질 때까지 너댓 시간씩이나 계속했
고 촛농이 녹아 내릴 때마다 원망과 서러움이 녹아 내린다고 상상하며 마침내 촛불이 꺼질 
때는 그것이 모두 사라졌다고 믿기로 했습니다. 
  이 일들이 심신에 얼마만큼의 변화를 가져다주는가는 이처럼 실제로 해보지 않은  사람의 
머리로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 분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편한 생각과 감정을 다루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녀는 입원한지 6일째 되던 날 밤  뜨거운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며 온
몸이 전기로 감전된 것 같은 어마어마한 전율을 경험했습니다. 그날 밤 오랜만에 깊고도 편
안한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심신이  완전히 이완되어 너무도 편안해진 자신
을 발견했습니다. 이날부터는 매 식후 30분 이상씩 거울을 보며 일부러 미소지어 웃는 연습
도 병행했습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하
다"고 자기 암시를 했습니다. 
  십 수년 동안 한 주먹씩 먹던 약을 모두 끊었습니다. 이제 그 끈질긴 두통도 완전히 사라
지게 되어 하루도 먹지 않고는 못 배기던 두통 약까지 끊게 되었습니다. 그 후 퇴원하게 되
었는데 나는 이 부인에게 며칠간의 단식과 몇 달간의 생식을 하도록 권유하였고 그는 이에 
충실하게 따라 주었습니다. 내가 이처럼 권유한 이유는 단식과  생식이 장기간의 정신적 스
트레스와 약물중독으로 오염된 세포들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물리적 효과를 가져올 뿐  아니
라 빠른 시간 내에 몸의 균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퇴원 후 석 달만에 환자와 가족들이 다시 찾아왔는데 지금까지의 치료방법을 전적으로 신
뢰하고 있지만, 그래도 종양만은 수술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환자도 그렇게  하고 
싶어했으므로 나는 다시 입원시켜 유방암 절제술을 시행했습니다.
  이제 수술 받은 때로부터 만 5년이 되었습니다. 이 분은 그 동안 어떠한 약물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그녀의 마음은 고요하고 편안해졌으며  지방간, 위염, 요통, 두통, 방광
염 등 모든 병증도 다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 분이 편안한 마음을 계속 간직해 간다면 유방
암도 재발하지 않을 것이고 몸을 괴롭히는 어떠한 병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
신하고 있습니다. 
  이 부인이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를 하지 않은 채 종래와 같이 단순히 약물과  수술로만 
치료했다면 지금 어떤 건강상태에 있을까요? 

    촛불 감사행
  74세 할머니 K씨. 
  이 할머니는 3년 전부터 심한 변비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면서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병원이나 한의원에서 줄곧 치료를 받아왔는데  약을 먹을 때만 조금 나아질  뿐, 별 차도가 
없다가 근래에 와서는 이런 약조차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병력을 알아보
니 젊은 시절에는 대체로 건강했으나 5년쯤 전부터 심한 요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한 대학 병원 척추센터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가벼운 골다공증 외에는 별다
른 이상이 발견되지 안았습니다. 그런데도 몸은 아프니, 별 수 없이 오랫동안 입원해서 치료
를 받았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서 이제는 허리 아픈 문제는 아예 포기해 버렸다고 합니
다. 최근에 와서는 변비마저 심해져서 배는  터질 지경이지, 허리는 아파 제대로 누워  잠을 
잘 수가 없지, 밤마다 날이 새기를 기다리느라 죽을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 분은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시골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의 유일
한 낙이란, 자식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를 한 푼 두 푼 아껴 저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근 10년
동안 그렇게 모은 돈이 3천 만원 가량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신도 한 분이 사업자금이 급하다며 돈을 좀 빌려달라
고 했던 모양입니다. 2부 이자 정도면 은행에 넣어두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할머니는 그 돈
을 몽땅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빌려간 사람이 이자는커녕, 몇 달 동안 얼굴조차  내
밀지 않아  할머니는 은근히 불안해 졌습니다. 수소문 끝에 그 사람의 집을 찾아가 보니 형
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돈 받기는 다  틀렸다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하도 억울한  마음에, 
큰 소리도 쳐보고 사정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주변 사람들이 보다 못
해 이제 그만 돈을 포기하라고 설득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생
각할수록 그 여자가 원망스럽고 분해서 밤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빚을 떼인 1년 가량 후부터 갑자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허리가 아파도 보통으로 
아픈 게 아니고 너무 심해서 안절부절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 사정을 자식들이 알고 척추센터에 입원시켜 장기간 치료를 받게 하였지만 크게 호전되
지 않고 고통은 계속될 뿐이었습니다. 여기에다 변비까지 겹쳐  고통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
었습니다. 교회에 나가 늘 기도하고 있지만 심신의 불편함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습
니다. 
  나는 이 할머니에게 '화해와 축복의 산책'이나 '촛불 감사행' 같은 방법을 통해서 불편하
고 어두운 신념, 상념, 감정을 지우도록 하였습니다.  "돈을  떼먹은 부인에 대한 원망과 배
신감을 다시 떠올려 크게 표현하십시오.  그동안 억압당했던 감정들을 모두  드러내서 철저
하게 다시 느끼고 큰 소리로 표현하십시오"하고 안내했습니다. 5년 전의 충격적인 일로부터 
그후의 분노와 절망감을 철저히 다시 경험하게 했습니다. 
  이 분도 밤에는 촛불을 켜놓고,
 "아무개 씨, 당신을 원망했던 나를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
해서 외며 축복을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저항감이 생겨서 하고 싶지 않았지만 며칠째 되던 밤에는 돈을 떼먹은 그 여자
가 정말로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싫다는 생각은 모두  사라지게 했습니다. 차츰 그 
여자의 얼굴이 천사처럼 보이더니 나중에는 그녀의 얼굴이 눈부신 빛으로 빛나며  거룩하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감사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분이 돈을 
떼먹는 악역을 맡아가면서까지 나의 영혼을  구원하고 있다고 느껴지니까 너무도  감사해서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할머니도 며칠간의 단식과 몇 달간의 생식을 했는데 단식과 생식기간에도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를 계속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웃는 연습을 하면서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하다"고 상상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후 할머니의  요통과 변비는 거짓말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은 여생을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 바치겠다며 자원봉사로 즐거운 나날
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항과 갈등이 병을 부른다
  60세 부인 H씨. 
  중증 자궁경부암 때문에 수술도 받을 수  없어서 어느 대학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지만 점점 나빠지고 있다며 나를 찾아왔습니다
  이 부인의 남편을 청상과부의 외아들이었는데 시집가서 보니 시어머니가 마흔 살도  안되
어 보일 정도로 아주 젊었습니다. 한 집에서 모시고 사는데  잘 모시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데도 괜히 질투를 하고 학대를 합니다. 남편에게 자꾸  고자질을 하니 남편은 분노하여 "어
떤 어머니인데 네가 그런 짓을  하느냐"며 사흘이 멀다하고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시어머니와 남편에 대한 원한
이 뿌리깊게 새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인의 암의 심리적 배경은 지난 40년간의 끈질긴 스트레스라고 느껴졌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우선적으로 분노, 비탄, 피해의식과 같은 시어머니와 남편에 대해 저항하는 상
념, 감정을 철저하게 경험하여 지우도록 했습니다. 입원한 지 일주일쯤 될 무렵부터  시어머
니와 남편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특히 '감사의  마음 회복하기'를 할 
때는 "내가 시어머니를 더 잘 모시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죄책감이  크게 일어나 눈
물을 많이 쏟았습니다. 이렇게 되면서부터 가슴이 후련해지고 시어머니가 점점 좋게 느껴지
기 시작했습니다. 내 마음이 편해지니까 암에 대한 걱정도 별로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 환자는 생식을 주식으로 하면서 일본의 민간요법 연구가 다데이시가 개발한  야채수프
를 음용하고 이 수프의 희석액에 몸을 담그도록 하는  방법을 병행하였습니다. 약 2주 동안 
입원한 후 퇴원해 집에 돌아가서도 이 방법을 계속했는데 한 달쯤 후에는 악취와 분비물이 
잡히고 3개월 후부터는 등산도 다닐 만큼 좋아졌습니다. 
  이제 4년이 지났는데 암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건강한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남편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바뀌어지니까 그들과의 관계도 현저히 개선되어  지
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상 세 분 환자의 성공사례를 소개했습니다만 이렇게 좋아진 것은 내가 치료를 잘 해서 
좋아졌다기 보다는 이 환자들이 훌륭해서 좋아진 것입니다. 이 분들이 이런 방법을 잘 믿고 
받아들여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결과입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어떤 치료법을  따르든지 환자가 건강의 회복에 실패하게  되는 
배경은 크게 보아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환자와 가족이 그 방법을 믿지 않거나 잘못 이해한 나머지 제대로 실천하지  않
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질병의 정도가 물리적으로 너무 굳어 있거나 진행되어 있어서 회
복할 수 있는 자기치유력의 문턱을 넘어선 경우입니다. 
  앞의 사례를 통해서 내가 배운 바는 어떤 병이나 그 병을 치료할 때는 의학적 치료도  잘 
해야 하지만 환자는 어두운 신념과 감정을 밝은 쪽으로 꼭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적된 저항과 갈등이 건강을 파괴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모든  질병이 시작되는 
최초의 단서는 저항의 신념, 상념, 감정입니다. 
              
    암 발병의 심리적 배경
  암 역시 그 발병의 심리적 배경은 대립과 분노, 슬픔, 두려움, 좌절, 피해의식 따위의 어둡
고 불편한 상념이나 감정들입니다. 사례에 앞서 암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주목할 필요
가 있습니다. 
  미국 텍사스 사이먼튼 암연구소의 의사 칼 사이먼튼이 개발한 암에 대한 이론과 치료방법
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한때  오레곤 대학 병원 치료방사선과 교수로  재직하며 주로 암을 
치료하는 일에 종사했는데 얼마 후부터 수술이나 항암제, 방사선  치료와 같은 물리적인 치
료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96년 일본  게이오 대학 치료방사선과 곤도 교수가  <암을 
건드리지 말라>는 책을 낸 것도 사이먼튼처럼 물리적 치료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이먼튼은 정신과 의사인 부인 스테파니와 함께 마음의 상태와 암 진행과의  상관관계를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암의 발병과정에서 심리적 배경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현대의학은 대체로 암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  무엇이 암세포를 유발시키는가와, 무엇
이 신체의 면역체계를 약화시키는가의 두 가지 방향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람 몸이 건축물이라면 세포의 DNA(유전자)는 그 청사진입니다.  어떠한 정보와 메시지
가 DNA에 작용하여 암세포의 청사진을 만들게 하는가를 연구하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사이먼튼은 암이란 단순히 발암물질 같은 특정한 물리적 요인이 생물학적 메카니
즘에 작용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물리적 사회적  문화적 제조건 속에 가
득 찬 부조화와 불균형이 암  발병의 주요 원인이며, 특히 이러한  환경의 영향에 대응하는 
개인의 심리상태가 핵심적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마음과 육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변화하는가를 보여주는 일종의 정신신체 상관모
델을 개발했습니다. 즉 정신적 스트레스가 면역체계를  약화시키고 내분비계의 균형을 파괴
시킴으로써 암세포가 발생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암 치료
의 목표는 스트레스가 암을 일으키고 진행시키는 통로를 추적하여 그 통로를 역으로 활용한
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앞으로 내가 소개할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사이먼튼의 정신신체 상관모델이 처음 발표될 무렵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의사들은 여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국  암학회에서까지 사이먼튼의 방법을 주목
하고 있고, 95년부터는 암에 관한 권위있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점차 그 영향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자, 이제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번 사례는 암의 치
료에 실패한 경우입니다. 
  
  94년 겨울 20대 후반의 아주 젊은 부인이 말기 위암 진단을 받고 임종 직전에 병원에  입
원했습니다. 이 부인은 가족들에 대해 무척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자기 아버지가 가정에 무책임해서 어머니가 많은  고생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
서 아버지에 대해 심한 불만과 분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로 여기고 싶지 않을 만큼 
싫어해서 최근 6년 동안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아예 상대조차 안 했습니다. 결혼한 후에
는 또 웬일인지 시부모들이 그렇게 싫어지더랍니다. 그 분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
는데 농사철이면 억지로 내려가 일을 거들어야했지요. 그런데 이 부인은 그게 너무 싫은 나
머지 농사철이 되면 차라리  아파서 병원에 입원이라도  했으면 하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결국 이 부인은 소원대로 병원에 지겹도록 입원해 있었지요. 
  
  같은 해 봄 32세의 부인이 위암이 재발되어 입원했습니다. 이 부인은 입원 당시로부터 약 
반 년 전에 어느 대학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고 항암제 투여를 받고 있었지만 곧바로 재발
되어 임종을 눈앞에 둔 상태였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이 부인은 지난 5년간의 결혼생활은 남편과의 전쟁이었다면서 
남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이들은 얼굴도 선하게 생기고 마음씨도 착해  보였는데 어쩌다가 이와 같이 어두운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되었습니다. 뿌리 깊은 반목과 분노의  상념, 
감정을 해소하지 않은 채 암 덩어리만 잘라낸다고 해서 암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이 두 분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두운 신념에서 밝은 신념으로
  같은 암 환자라고 하더라도 의학적인 치료 결과가 좋은 경우는 대부분 치료과정에서 어두
운 신념이나 감정, 생활 태도가  밝은 쪽으로 바뀐 환자에게 그  생존율이 현저하게 높다는 
연구 보고가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의학 잡지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두 환자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아무
리 심각한 암이라고 하더라도 환자의 신념과 감정이 완전히 바뀌고 삶에 대한 태도에 변화
가 일어나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본 구리바야시에 살고 있는 한 중년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병은 중증 위암으로 물도 마시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어
린 시절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 심한 불만과 거부감이 늘 마음 속에 자리  잡
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한 인성개발단체인 `생장의 집  수련코스'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부
모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저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를 반복해서 외치
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말과 생각의  힘을 이용한 일종의 자기 
암시법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것은 매우 쉽고 단순한  방법이지만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
게 하는 뛰어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 남자는 며칠 밤을 새워가며 부모감사행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지며 아버지를 원망했던 자신에 대해  깊은 참회가 일어났습니다. 용서를  비는 마음이 
생기고 이어서 아버지가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에 타르 같은 검은 물질이 대변을 통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후 
사흘동안 가벼운 출혈이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나흘째가  되면서부터는 음식을 먹어도 부
담스럽지 않더니 결국 그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도쿄에 사는 50대의 한 부인은 병원에서 담낭암이라는 진단과 함께 앞으로 반 년 정도밖
에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어차피 반 년밖에 못 살고 죽을 몸인데 이렇게 누워 있으면 뭘해. 차라리 그동안 은혜입
은 분들게 뭐라도 보답을 하고 죽자."  이 환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에게 도움 준 사람
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가진  돈이 없어서 물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약하니 노력 봉사를 할 처지도 못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가 생각해낸 방법은 자기가 믿는 종교의 경전을 들고 다니며 좋은 구절을 읽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경전을  읽어주자 상대방들은 한결같이 환자의 
모습에 놀란 나머지 마땅찮아 했습니다. "저는 이제 6개월밖에 살지 못해요.  제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은 이것뿐입니다.  제발 받아주세요."  얼마나 간절히 설득했는지 
사람들은 차마 거절을 못했습니다.   
  죽기로 예정된 6개월이 지나고 일년이 넘도록 이 일을 계속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는 사이
에 암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시의원으로서 13개 봉사  단체를 통해 정력적으로 봉
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위의 두 분은 날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결의를 가지고 자기 마음을 조절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분들처럼 의학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특별한 체험을 하고  있는 
환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들이  한계가 있는 의학이론으로 설명이  잘 안된다고 
해서 이를 부정하거나 우연한 일쯤으로 돌리는 분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이런 기적 같
이 보이는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아주 자연스런 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신념, 상념, 감정
의 변화 때문에 이렇게 됩니다. 이런 치유가 일어나는  원리와 메커니즘이 과학적으로 설명
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분노와 대립의 감정을 넘어서
  93년 여름 40대 남자 한 분이 심한 류마티스성 관절염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농사를 짓는 
분이었는데 두 무릎 외에도 여러 군데의 관절이 굳어 있어서 농사일은 물론 다른 일상생활
을 해나가기에도 무척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분을 힘들게 한 것은 형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었습니다. 이 분은 
형의 빚보증을 서주었는데 형이 사업에 실패하자 모든 재산이 압류되고 말았습니다. 논밭까
지 다 날리고 나니 별수  없이 날품을 팔면서 살게 되었지요.  억울했지만 그래도 형이니까 
어쩔 수 없이 견뎌낼 수  밖에요. 그런데 이 형은 동생에  대해서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네가 바보 같은 놈이다"라는 식으로 힐난을 했다는  것입니다. 동생은 배신감과 분노 때문
에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결국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힘든 생활 때문에  삶 
자체에 대해 심각한 두려움과 피해의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난 5년여 동안 양약, 한약은 물론 심지어는  고양이탕 등 수많은 치료법을 써봤지
만 병세는 조금도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관절들은  점점 굳어져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약물 부작용으로 얼굴은  심하게 부어있었고 간기능과 소화장애 
때문에 어떤 약물투여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는 이 환자를 보면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희생자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 한, 
그리고 형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지우지 않는 한 어떠한 물리적 치료도 그의 병을 낫게  하
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이 환자는 며칠간의 단식  후에 고오다 식 생식과 보
조적 자연요법을 실행했습니다. 입원 첫날부터 그에게 화해와 축복의 산책, 묵은 감정  지우
기, 감사의 마음 화복하기, 큰사랑으로 받아들이기와  같은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를  계속 
철저히 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그는 의외로 잘 따라 주었습니다. 형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
뜨리고 자신이 희생자라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밤낮 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틈나는 
대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에 마음을 집중하였습니다. 
  마침내 형에 대한 섭섭한 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극도로 움츠렸던 의식이 확대되면서 가슴  
속에 따뜻한 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통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거의 1년만에 그는 다시 옛날처럼  건강한 몸을 회복했습니다. 삶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비슷한 경우가 또 있습니다. 
  50대 초반의 부인이었는데 관절염이 너무  심한 나머지 화장지를 쥘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니 용변 뒤에는 남편이 뒤를 닦아주어야 했습니다.
  남편은 명문대를 나와서 교사로 재직하고있었고, 부인은 초등학교를 나왔는데, 땅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인은 점점 남편을 깔보고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대학까지 나온 남편이 겨우  선생 노릇이나 하는 게 여간  한심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남편에 대한 불평 불만 때문에 한시도 가정이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돈은 많았기 때문에 그동안 외국에까지 다니며 좋다는 치료는 원없이 받아본 모양입니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고 결국은 그렇게 무시하던 남편에게 뒤를 보여야 할 지
경에까지 이르른 것입니다. 이 부인의 발병 역시 마음 상태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었습니다. 
나는 다른 환자들에게 적용했던 것처럼 이  부인에게도 남편에 대한 신념과 감정을  바꾸게 
하였고 단식과 생식을 비롯한 자연요법을 병행했습니다. 크게 참회를  하고 눈물도 많이 흘
리더니 결국은 다시 남편을 존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바뀌고 나니 어떤 
약물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병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인은 지금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상 두 환자가 난치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두운 상념과 
감정을 지우지 않고 마음의 평화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좋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
합니다. 이런 난치병이 발병하는 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
고 있겠지만 무슨 병이 생기는 데나 그것이 다시 치유되는데 작용하는 결정적 요인은 그 환
자의 신념입니다. 어떤 의학적 치료를 받든지 간에 어두운  신념을 밝은 신념으로 돌려놓는 
것이 건강의 문을 다시 여는 최상의 열쇠임에 틀림없습니다. 
  
  교통사고와 같은 사고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 중의 하나입니다. 사고의 
배경에도 어두운 신념, 상념, 감정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94년 교통사고를 당해 장기간 입원해 있었던 한자의 경우입니다.   30대 후반의 부인이었
는데 평소 시어머니와 사이가 무척 나빴던 모양입니다. 사고  당일 역시 시어머니와 부딪치
게 되었는데 그 날은 마침 제사를 모시는 날이었습니다. 단  둘이 있는 자리 같으면 말이라
도 좀 했겠지만 온 가족이 다 모여있는 자리라서 이 며느리는 한 마디도 못한 채  고스란히 
그 면박을 다 당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도가 너무 심해지자 결국 이 며느리는 화를 참
지 못한 채 제사도 모시지 않고 그 집을 뛰쳐나와 버렸습니다. 그  길로 차를 몰고 가다 사
고가 난 것입니다. 대퇴골 분쇄 골절을 비롯하여 다발성 외상을 입은 중상이었는데 평생 장
애를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95년 가을 30대 남자가 작업장에서 일을 하던 도중 위에서 무거운 짐이 떨어지는 바람에 
깔려서 크게 다쳤습니다. 바로 응급실에  실려 왔지만 간, 비장,  췌장이 파열되고 갈비뼈도 
여러 개 부러지는 등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수술 후 장기간 입원해 있었는데, 이 환자가  퇴
원을 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그의 부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습니다. 부부가 나란히 입
원실에 누워 있게 된 것이지요. 
  이 부부는 결혼 직후 홀어머니와 한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얼마 안 가 부인이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게 싫다며 분가하자고 남편을 몰아 세웠습니다.  형편도 형편이거니와 그 어머니
는 자식과 함께 살기를 간절히 원했으므로 이 아들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렇지만 아내
의 성화는 줄어들지 않고, 나중엔 차라리 혼자라도 나가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분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섭섭해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부인의  친
정 동네로 이사를 해서 막노동을 하던 중 이런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이 부부가 당한 사고와 고통에는 어머니에 대립하는 며느리의 감정과 아들의 죄의식이 어
느 정도 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사고와 당사자의 심리적 배경과는 아주 큰 관련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혹자는 너무 의식적인 해석이 아니냐고 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어두운 신념, 감정을 가진 사람은 모두 병에 걸리든지 사고를 당하게 된
다는 얘긴데 안 그런 사람도 있지 않은가, 또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린 사람들 가운데도 마
음이 밝고 대인관계도 원만한 사람들이  많은 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의문이 당연히 일어날 것입니다. 
  사실 어떤 하나의 사건에는 한두 가지의 요인만이 아니라 수많은 요인이 여기에 작용합니
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의 사건이 생기기 위해서는 중중무진으로  얼키고 설켜서 온 우
주가 여기에 다 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직, 간접적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입니다. 그래서 사고와 심리상태가 상호 관련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한다면 누구도 
어떤 증거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경험과 신념과의 관계를 추정하는 것 말고는 말입
니다.   
  다만 나는 확신하건대 모든 사고의 배경에는 그만한 사고를 스스로 불러들일만한 어떤 신
념이나 감정이 꼭 있다고 봅니다.  대립과 부도화의 신념은 저항의  에너지를 창조함으로써 
주변에 있는 같은 성질의 에너지체를 배척하고 밀어내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고
를 일으키는 배경입니다. 사고를 내는  사람이 비슷한 사고를 자주 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이런 데에 연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자동차보험회사들에서는  사고를 끌어들이는 
경향의 운전자 리스트를 만들어서 관찰하다가 어느 기준 이상의 사고를 내는 사람과는 보험
계약을 취소하기도 합니다. 
  만일 어떤 분이 생명의 근원과 온전히  하나되기를 하고 있어서 대립과 부조화의  감정이 
소멸되고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느끼고 있다면, 그러므로 모두를  내 생명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에게는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런 분이 단 
한 명만이라도 비행기나 배나 버스에 타고 있다고 할 때는 아무리 어려운 위기에 직면하더
라도 거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모두 화를 모면할 것입니다. 보통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니 
모르고 지나가겠지만 깊은 평화와 자비심으로 충만해 있는 한 존재 때문에 그 주변 사람들
이 사고와 같은 어려움에서 벗어난 경우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원
리는 `기- 생명에너지 다스리기'장에서 보다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구상 어디
라도 교통사고와 같은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지역에는 대립과 부도화의 집단신념이  대중의
식의 배경에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은 현실의 청사진 
  자, 이제는 자기가 품고 있는 생각이 어떤 결과를 낳게 하는가를 한번 살펴봅시다. 
  30대 초의 한 여성은 무역회사 영업사원이었는데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늘 그만 두고 싶
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을 그만 둘 처지가 못됐기 때문에 마지못
해 끌려 다니듯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성은 결국 교통사고로 어깨뼈에 골절상을 입고 
몇  달 동안 입원해서 쉴 수 있었습니다. 
  대개 조용히 쉬고 싶다는 생각은 그동안 과로한 탓도 있겠지만 그 심리적 배경에는 욕망
과 저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히 저항의 신념과 상념은 생명에너지를 누수시킴으로써 심
신을 지치게 만듭니다.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를 잘해서 저항과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결코 육신이  지치는 
일은 없을 것이고, 특히 병원에서 쉬고 싶다는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늘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의 경우입니다.  30대 후반의 한 남
자는 6개월 사이에 무려 세 차례나 중상을 입고 입원을 되풀이했습니다. 처음에는 쇠뭉치가 
머리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두 번째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고, 세 번째
는 작업장에서 일하던 도중 심한 화상을 입고 입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느 공단지역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시어머니와의  불화로 
가출을 한 상태이고 나이 든 어머니가 두 아이를 기르며  따로 살고 있었습니다. 몇 안되는 
식구가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으니  얼마나 딱한 일입니까? 이 남자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30대 후반의 한 남자는 약 1년 사이에 오토바이  사고를 세 차례나 내고 입원하였습니다. 
마지막 사고는 워낙 크게 나서 간이 파열되고 흉부 손상도  심했습니다. 이 사람은 십여 년 
전 음독 자살한 할머니의 시신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 늘 죽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려  왔습
니다. 밤에는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어서 항상 술에 취해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가족
들은 결혼이라도 시켜서 마음을 잡게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한 마
디로 집안의 골칫거리가 되었던 것이지요. 나중에는 가족들까지도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여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환자를 보면서 받은 인상은 손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할머니의 영혼이 어떤 식으
로든 안식을 되찾게 되고, 또한  가족들이 깊은 사랑으로 이 환자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이 
고통이 끝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교통사고나 각종 산재 사고를 비롯한 다양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물리
적, 제도적 안전 장치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 모든 사고에는 그 사고를 
당하고 있는 당사자의 심리적 상태, 그 공동체의 집단 신념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
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사고에 흔히 노출될 수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평소에 어둡고 불편한 상념, 감정들을 잘 지우고 그것을 밝은  쪽으로 되돌릴 줄 알아야 합
니다. 
     
    내 마음을 먼저 바꾸어야
  조화롭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
느냐 못하느냐의 책임은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잘 깨
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 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간의 부조화입니다. 가까운 
사람끼리의 섭섭함, 질투심 등이 큰 병통 입니다. 특히 여성들의 집합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
는 고부간의 갈등은 일종의 사회적인 고질병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마음속에 부모나 시부모를 배척하고 원망하는 신념과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
다면 지금 당장 그것을 지우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위해서, 당신이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부모에게 불만을 품고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편안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
을 것입니다. 설사 부모가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더라도, 더러는 부당하게 억압하고  있다
고 할 지라도 그것은 결국 내가 지어낸 것입니다. 내가 한 발짝 물러나 그것을 이해하고 의
도적으로 감사하며 바라보면 얼마 안가 부모는 틀림없이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장이론(Field theory)에 의하면 어떤 물리적 입자가 생성될 때 그  입자 주
변에는 역동적 에너지와 운동력의 장이 형성되는데 이 장은 그 주변의 다른 입자의 장이나 
그 입자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신념, 상념, 감정은 허상이 아니라 물리적 입자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자마자 그것은 입자화되고 그 입자 주변에는  그 생각이나 감정의 의도와 정보가  실린 
에너지(기)와 운동력의 장이 형성됩니다. 즉 내 생각의 에너지 장이 상대의 에너지 장에 파
장을 일으키게 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 생각과 감정은 틀림없이 상대의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내 생각과 감정을 바꾸지 않고 어떻게 상대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결
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음의 사례들은 모두 부부나 부모, 자식 등 가족간의  부조화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몇 년 전 같은 식당에서 동업을 하던  두 부인이 가스폭발로 심한 화상을 입고 응급실로 
실려 왔습니다. 한 부인은 남편과 방금 이혼한 상태였고 또  한 부인은 남편과 별거 중이었
습니다. 두 부인의 남편들은 모두 다른 여자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참다 못한  부
인들이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것입니다. 부인들은 평소 자기  남편들에 대해서 원한이 사무쳐 
있었고 항상 화가 나있는 마음이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감정이 화상을 입게 한 불씨
가 되었으리라고 여겨졌습니다. 
  남편이 외도를 하거나 허튼 짓을 하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를 공격하고 우격다짐으로 
고치려고 해서는 아무런 해결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먼
저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배척과 원망과 저항의 감정들을  지워내야 합니다. 이것을 
지운 다음 상대의 인상을 의도적으로 밝고 훌륭한 것으로 바꾸어 감사하고 존경하며 바라보
면, 감사하고 존경하는 척이 아니라, 혹은 감사하고  존경하도록 노력해야지가 아니라, 진정
으로 그런 마음이 우러나는 때가 되면 그  상대는 외도나 부정한 짓을 하라고 해도 안하게 
됩니다. 배우자를 물리적인 힘으로만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신념과 감정을 밝고 조화
로운 쪽으로 먼저 바꾸는 것이 해결의 열쇠입니다. 

    현실은 마음의 반영
  6.25 전쟁 무렵, 군대 징집을 피해 살던 한 청년이 숨어사는 생활이 고통스러워서 늘 자신
의 한쪽 팔을 잘라버리고라도 징집을 모면하고 싶다는 충동에  늘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작두에 팔을 넣어 자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차마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이 청
년의 마음 한 가운데 팔 없는 상태를 그리워하는 상념이  깊게 새겨지게 되었지요. 그후 결
혼하여 낳은 아이가 자기가 그렇게 그리던 대로 한쪽 팔이 없는 기형아였습니다. 
  "내가 체험하고 있는 현실은 내 마음의 반영이다"라는 말이 아직도 긴가  민가 하게 느껴
지나요?  내가 당하고 있는 현실은 틀림없이 내가 믿고 있는 마음이 밖으로 모양을 나타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자신의 믿음대로 경험하기입니다. 세상만사와 우리들 각자의 어떠한 일
도 '믿는 대로 경험한다'는 원리와 공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경험이란 신념의  결과가 아니고, 반대로 신념이  경험의 결과라고 느껴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개별의식, 자아의식의 한정된 틀에 꽁꽁 묶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에고(Ego)를 떠난 우주의식, 순수의식의 차원에서 볼 때는  경험이 신념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명중하게 느껴집니다. 신념이란 영화의 필름에 해당하고 경험이란 스크린에 비친 활동
사진입니다. 따라서 어둡고 조화롭지 못한 신념, 상념은 질병이나 고통을 경험하게 하고, 밝
고 조화로운 신념, 상념은 건강과 행복을 경험하게 합니다. 내가 평소에 믿는 바가 나의  몸
과 생활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희생자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자신을 희생자로 
보게 될 것이고, 따라서 자기가 희생을 당하는 비극을 항상 끌고 다닐 것입니다. "나는 사람
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해 고독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를 고독한  사람으로 여기
면서 어디를 가나 고독하게 지낸다는 증거들을 보여 줄 것입니다. 

  93년 가을 나의 진찰실에는 심한 흉통과 복통을 호소하는  40대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부
인의 부축을 받고 있었는데 환자의 얼굴은  오랫동안 병에 시달린 흔적이 뚜렷해  보였습니
다. 당시 그는 어느 대학병원에 입원예약이 되어있는데 부인에  의해 억지로 끌려온 눈치였
습니다. 
  이 환자에게 지난 15년간은 병원과 함께한 생활로 병원이란 지긋지긋한 곳이었습니다. 15
년 전 뇌출혈로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한 것을 시작으로 그 뒤 뇌졸중으로 한번 더  입
원한 적이 있고 이어서 수십 회나 심근경색증 때문에  응급실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동안 
국내의 심혈관 계통의 유명한 의사, 한의사를 많이 만나 보았고, 좋다는 민간요법도 많이 써 
보았지만 좋아지지 않고 있어서 이제는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였습니다. 
  이 환자가 뇌출혈을 일으키기 약 1년 전 지금의 부인과 결혼할 날을 받아 놓고  있었는데 
한때 좋아지내다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갔던 옛 여자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는 자
기 남편과 맘이 맞지 않아 도저히 못살겠으니 당신과 함께 지내자는 것입니다. 혼인날을 앞
둔 채로 불륜의 관계가 시작되었고 이 관계는 결혼식을 치룬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여관에서 같이 지내다가 이 남자가 발작을 일으키고 혼수에 빠졌습니다. 인근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시켰는데, 여자의 눈에 남자는 곧 사망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뇌출
혈이었습니다. 남자 가족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조용하게 살고 있는 나
를 이 남자가 자주 불러내서 만나다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모든 책임을 환자에게 떠넘기고
는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신혼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처가 쪽의 항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환자의 부친은 평소에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안돼 곧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몇 개월 후 환자는  가까스로 회복되었으나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달아난 
그 여자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감, 세상을 뜬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
다. 특히 처와 처가 쪽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괴로워 가슴이 터질 지
경이었습니다. 얼마 후 정말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흉통발작이  일어났는데 심근경색증이 
발병한 것입니다. 그 뒤 또 한 차례 뇌졸중으로 입원하게 되고 이어서 심근경색으로 수없이 
병원 신세를 지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항상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고 말 그대로 지옥이
었습니다. 
  이 환자의 신분은 기술직 공무원이었는데 직장에서도 대인관계가 좋을 리가 없었고  항상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자살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예약된 병원의 입원을 잠시 미루고 먼저 어두운 마음지우기부터 하도록 권했
습니다. '화해와 축복의 산책'과 '감사의  마음 회복하기'를  통해서 누적된 어두운  생각과 
감정을 다시 경험하여 지우게 하고 밝은 신념과 감정을 가지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
니다. 그는 불면증으로도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잠도 안  오고 하니 오늘 
밤 날이 샐 때까지 가르쳐 준 대로 계속하시고 내일 아침 다시 오십시오."
  이튿날 오전 그 부부가 다시 찾아 왔습니다. 
  환자의 얼굴이 밝아져 있어서 나도 놀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시키는 대로 방에 홀로 앉아 그 여자, 아버지, 처의 얼굴을 번갈아 상상하면서 '사랑합니
다, 감사합니다'를 계속 소리내서 외웠더니 뜨거운 눈물이 많이 쏟아졌어요. 평소 같으면 도
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다섯 시간쯤 계속하니까 몸이 축 늘어지고 저도 모르게 쓰러져 
깊이 잠들어 버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흉통과 복통이 현저히  좋아지고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이 날이 
금요일이었는데 일요일까지 이 방법을 밤낮없이 계속하고 다음 월요일에 다시 오도록  했습
니다. 월요일 아침 전화가 왔습니다. 예약 병원에 입원할 필요도, 나에게 다시 올 필요도 없
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아주 편안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두 달 후 연하장과 함께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내가 의사가 된 후 환자로부
터 이처럼 절실하게 감사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약 
3개월 후에 그는 진찰실로 다시 찾아 왔습니다. 혹시 통증이 재발한 것은 아닌가 하고 얼굴
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직접 드리지 않고는 안되겠기에 직접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을 뵌 후 제 건강만 좋아진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지난 10년 가까이 시골에서 한직에 근무하고 있어서 늘 불만이었는데 그동안 도
청소재지로 전근하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지만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원망과 죄책감의 대상이었던 세 사람에 대한 어두운 생각과 감정을 지우
기 위해 줄곧 노력한 결과 세 사람에 대한 감정만 좋아진 것이 아니라 그토록 밉게  보이던 
직장동료들이 다 곱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근래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 얼굴이 너무 좋
아졌고 또 많이 변했다고들 한다는 것입니다. 이쪽 마음이  좋아지니까 상대편이 좋게 보이
고 따라서 상대도 나를 좋게 대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도 갈망하던 도청소재지로 전근발령이 났고 그것도 제일 
원하던 부서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뜻밖의 놀라운 일이 생긴 것입니
다. 따라서 집을 팔고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그가 살던 아파트는 평소에 잘 팔리지 않던 지
역에 있었는데 아파트 주변 전봇대에다 '아파트 급매도'라고 종이에 써서  몇 장 붙여 놓았
더니 곧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기대하던 가격보다 더 높게 팔렸습니다. 이것도 상상 밖의 일
이었습니다. 또 전학한 딸아이는 그 도시에서 제일 좋다는 학군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뿐  아
니라 집을 새로 사기에는 돈이 부족해서 전셋집이나 얻을까 했는데 엉뚱한 일이 생긴 것입
니다. 전에 알던 은행직원을 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사정을 듣더니 자기은행에서 
관리하는 미분양 아파트가 있는데 장기할부로 입주할 수 있는데 장기할부로 입주할 수 있으
니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새 아파트에 입주하고도 돈이 남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에 정말 놀라운 일이  계속 일어난 것입니다. 주변 사람과  세상만물이 다 곱고 
좋게만 보였습니다. 여섯 달 전만 해도 지옥 같았던 자신의 처지가 천국으로 바뀐 것입니다. 
마음 한 번 바꾸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앞의 사례들에서도 보았듯이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의 하나는 사람들끼리의  부조화
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상대가 나쁘게 보이고 밉게 보이고 싫게 보이더라도 그것은 내 마음
의 필름이 비추고 있는 나의 화면입니다.  그러니 화면을 먼저 고쳐야 할까요, 필름을  먼저 
바꾸어야 할까요?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데도 갑은 그를 밉게 보는가 하면 을은  그를 곱게 보기도 하고, 같
은 대상을 같은 사람이 볼 때도 어제는 곱게 보였는데  오늘은 밉게 보이기도 합니다. 같은 
달을 볼 때도 내 마음이 슬플 때 보면 울어 보이고 내 마음이 기쁠 때 보면 미소지어  보인
다고 하지 않습니까?

      서로 다른, 그러나 서로 같은
  우리가 날마다 쓰고 있는 마음이란 참으로 미묘하고도 복잡한 것입니다. 누구나 순수의식
의 존재로 있을 때는 '나'라는 생각도 욕망이나  저항도 어떠한 한정도 없으나 "내가 있다"
는 생각을 지어내는 순간 '나'는  내 밖의 대상들을 좋아하거나(욕망)  싫어하게(저항) 됩니
다. 
  일시적으로 우리가 갖는 마음을 대별하면 욕망하는 마음과 저항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마음은 분리되어 따로 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신발의 같은 짝처럼  동
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붙어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 악독해 보이고, 부정직해 보이고,  밉게 보이고, 천하게 보이고, 미련해  보이
고, 무능해 보이고, 아무튼 내 눈에 싫게 보인다고(저항)합시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볼 만한 
충분한 증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나의 저항의  신념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
다.    
  이와 같이 드러난 저항의 신념 뒷면에는 반드시 드러나지 않은 욕망의 신념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가령 "저 놈은 악독하다"라고 상대에게 내가 투사한 신념(저항)의 뒷면에는 "나는 
선량하다"라고 내가 스스로 차지하는 신념(욕망)이 함께 있습니다.  "그는 부정직하다"를 밖
으로 투사하자마자(저항), "나는 정직하다"를 내가 차지합니다(욕망). "그는 불친절하다"에는 
"나는 친절하다"가 "그는 무능하다"에는 "나는 유능하다"가 한짝으로 옆에 있습니다. 
  내가 만일 "나는 이것이다"라고 생각하자마자 자동적으로 "나는 저것이 아니다"라는 생각
을 동시에 지어냅니다. "나는 잘났다"는 생각에는 "다른 사람은 못났다"는 생각이, "나는 영
리하다"는 생각에는 "다른 사람은 미련하다"는 생각이 함께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는 늘 내가 좋아하는 욕망의 자아상을 내가 차지하려 하고 내가 싫어하는 저항의 상을 
내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들씌우려고 합니다. 
  좋아하는 옷은 내가 입고 싫어하는 옷을 남에게 입히려고  합니다. 좋아하는 배역은 내가 
맡고 싫어하는 배역을 남이 맡게 합니다. 
  내 눈에 어떤 사람의 양심이 불량해 보인다고 합시다. 양심이 불량한 증거도 틀림없이 있
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연중에 "나는 양심이 바르다"는  신념을 내가 차지하면서 나도 모
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은 양심이 나쁘다"는 신념의 짝을 동시에 창조하여  저 사람에게 투
사한 결과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당신은 불친절하고 건방지다"고 비판하며  공격하고 있다고 합시다. 당신
은 그런 비난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으니까 화가 나겠지요.  공격하는 대상에게 더 
이상 친절을 베풀며 겸손하게 대할 마음이 안 나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평소에 "나는 친절하고 겸손하다"는 생각을  스스로 차지하면서 나
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은 불친절하고 건방지다"는 생각의 짝을 동시에 지어내서 상대
에게 들씌워 놓은 결과, 당신의 신념의 필름대로 상대가  불친절하고 건방진 모습의 화면을 
당신 앞에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싫어해서 밖으로 투사한 것이 반작용으로 다시 
되돌아 온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자기 배신입니까?
  이러한 배경을 바로 보지 못할 때는 내가 지어낸 욕망의 신념과 저항의 신념의 양면성에 
속아넘어가, 나는 내 밖의 잘못된 대상과 투쟁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사실은 자기자신과의 
내부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대립하여 투쟁하였던  대상들이란 다름 아닌 내 마음의  반쪽 면, 즉 
내가 싫어하여 밖으로 내팽개친 저항의 신념의 투영이라는 것을 꼭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경험하는 대립과 갈등은 내 의식 가운데 있는 요망과 저항의 대결이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대상을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내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를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보아주기를 원하며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애
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매우 이기적이고 허황된 발상
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자신을 정의롭고 선량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동
시에 내 밖에다가 부정하고 악독하고 무능한 사람들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가장 좋지 못한 경우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옳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을 가지고 있는 동안 나는 외부에 옳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게 되고, 따라서 옳지 못한 
사람들의 홍수 속에서 일생동안 허우적거리다가 생명을 모조리 소모시켜 버릴 것입니다. 이
것은 자기 삶을 어두운 비극으로 마감하게 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부에서 갑자기 욕망의 신념이 저항의 신념으로, 저항의 신념이 욕망
의 신념으로 자리바꿈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제까지  "나는 이것이고 저것이 아니
다"라고 했던 사람이 "나는 저것이고 이것이 아니다"로 뒤집힌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좋아할 것인가(욕망), 또는 싫어할 것인가(저항)를  다시 생각한 나머지 욕
망과 저항의 자리를 서로 뒤바꾼 것입니다. 어떤 종교의 광신자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종교
를 매도하고 나선다든가, 이데올로기의 극좌 추종자가 극우로 변신되는 배경이  이것입니다. 
역사 가운데 종종 애국자가 매국노 짓을 하거나, 포악한 정권 찬탈자가 집권 후에는 성군으
로 바뀌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성간이나 친구간에 첫눈에 반해서 처음에는 미친 듯이 좋아하다가 그후 사랑이  미움으
로 바뀌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이것은 욕망이 저항으로, 저항이 욕망으로 자리바꿈을 한 결
과입니다. 지성인이 저지르기 쉬운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는 자신을 위대한 지도자나 스승
으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대한  지도자나 스승으로 자처할 때는  동전의 앞뒤처럼 
두 개의 신념을 동시에 지어냅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잘났다"는 내가 차지하
고(욕망), "다른 사람은 나보다 열등하고 못났다"는 내 밖의 사람들에게 투사합니다(저항).
  나를 숭배하고 아첨하며 따르던 추종자들 속에서 얼마 후에 나를 배신하고 비난하는 이단
자가 틀림없이 나옵니다. 그 배신자는 다름아니라 내가 내 밖의 사람들에게 들씌워 놓은 나
의 반쪽 신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지도자와 스승으로 자처하기란 얼마나 기묘
한 함정이며 자기 자신과의 얼빠진 투쟁인가요?  
  그러므로 여기에 자신이 참으로 위대해질 수 있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우월하고 
잘 났다는 신념도(욕망), 내가 열등하고 못 났다는 신념도(저항), 다 그만 두는 것입니다. 내
가 좋아해서 차지하고 있는 욕망의 신념도, 내가 싫어해서 남에게 들씌워 놓은 저항의 신념
도 모두 밑에 내려놓는 것이 인간 관계를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입니다. 
  "나는 내 평생 불쌍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라는 신념을 내가 가지게 되면 나
는 내 밖에 불쌍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계속 창조하고  있는 것이고, "나는 일생동안 불의
와 맞서 싸운다"는 신념을 떠맡으면 나는 세상 속에 맞서 싸워야 할 불의를  동시에 창조하
고 있는 것이, "나는 성자와 같은 사람이다"를 맡게  되면 내 밖에 악인들을 동시에 창조하
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자기자신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이란 자신을 좋
게 여기든 나쁘게 여기든 그 생각이 욕망과 저항에서 나온 것이라면 궁극적으로 다 잘못입
니다.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나는 "나는  무엇이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의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근원은 자기편도 반대편도 없습니다.   욕망과 저항이 없으며 좋아함도 싫어함도 
사랑도 미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욕망과 저항, 좋아함과  싫어함, 사랑과 미움에서 벗어나
는 것이 너와 나 모두를 자유롭고 해방된 삶으로 가게 합니다.         
  내가 공격하고 쳐부수어야 할 적은 나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공격해야할 진짜 원수는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양면성의 신념인 욕망과 저항이며,  욕망과 저항의 뿌리인 "내가 따
로 있다"는 무지입니다. 
  만일 고치고 싶거나 공격하고 싶은 대상이 당신 밖에서 보일 때는 먼저 자신의 마음속의 
무지와 착각을 공격하여 항복 받아야 하고, 그렇게 한 후에도  여전히 그 대상이 적이나 원
수처럼 보이는가 다시 살펴본다면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음의 필름을 바꾸지 않은 채 밖의 화면만을 고치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와 같은 
무의미한 일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의  마음의 필름은 끊임없이 고쳐야 할  대상을 
당신의 외부에 창조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결국 여기저기 고쳐야 할 대상
을 쫓아다니느라 일생을 허비하고 말 것입니다. 고쳐야 할 대상이란 다름 아닌 자신이 창조
한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채로.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
  파라켈수스(1493-1541)는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의사이자 의학사상가입니다. 
  그는 기존의 의학사상과 지식체계를 과감히  던져 버리고 혁신적인 의학이론과  방법론을 
제시했습니다. 바젤대학에서 첫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1천년 동안이나  서양의학을 지배해 
왔던 갈레누스 의학의 교과서를 학생들 앞에서 불태우면서 "의사들이 보고 배울  유일한 교
과서는 오직 환자뿐이다. 낡은 고정관념과 전통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사실과 진리에만 접
근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정통적인 의학지식들이 의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
애가 된다고 간주하였으며 오로지 '자연의 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갈파하였습니다.
  파라겔수스는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원리 하에 다양한 관찰과 경험을 토대
로 매우 독창적인 의학체계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대부분의 의사들은 그의 의학사상
과 이론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몇 백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현대에 와서 여러 의학자들이 그의 의학 사상을 다시 평가하고 있습니다.  
  파라켈수스의 광범한 의학이론 가운데서 '상념체, 감정체'에 대한  관점과 이론은 이 주제
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의학자들로부터 오늘날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상념체, 감
정체를 엘리멘타리(Elementary)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확실히 어떤  에너지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어떤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 분노, 비탄, 절망, 공포 
따위와 같은 어둡고 부정적인 상념, 감정을 오래 품고 있으면, 마치 어미새의 품 안에 든 알
이 부화되듯이 분리된 상념체, 감정체가 태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그 모체인 창조자에
게서 기운을 얻어 더 강력해지면 독립체가 되어 그 모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결국은 
건강과 행복을 파괴하거나 그릇된 습관에 빠져들도록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두운 상념체, 감정체는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지닌 무리들과 접촉함으로써 집합적 
상념체가 되어 그 에너지가 더욱 확대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병균이나 종양 같은 것
은 힘이 강력해진 집합적 상념체가 물질적 모양을 나타낸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전
염병을 일으키는 세균은 인간의 파괴적인 분노의  폭발을 따라다니는데, 전쟁에는 어김없이 
전염병의 창궐이나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뒤따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어두운 집합적 상념체들이 심령적 독소를 뿜어낼 때 이 지구 에너지 장에는 그러한 독소
가 증대되어 생명력과 도덕성이 저하되고 인류  전체의 건강과 밝은 에너지가 무너져  결국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게 되는가 하면 자연 환경 전체가 병적인 상태에 빠
지게 된다는 것이 파라켈수스의 견해입니다. 
  파라켈수스는 이런 어두운 상념체들의 침범을 막아낼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바로 밝은 지
혜와 밝은 생활 태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상념체, 감정체들이 현실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그의 이론을 증명할 만한  사례가 있습니다. 다음은 아바타  프로그램을 의학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한 의사가 경험한 일입니다. 
  
  한 남자 대학생이 심한 요통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장기간의 약물 치료와 물리
적 요법을 계속하고 있는데도 통증과 운동 장애가 완화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본인의 표현
에 의하면 척추가 마치 콘크리트 기둥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좌절에 빠져 있을 무렵 아바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환자는 9일간의 
전 프로그램을 다 마치기도 전에 완쾌되었습니다.  전형적인 상념체의 작용으로 추정되었습
니다. 
  이 청년은 그 동안 자신을 배신한 옛 애인에 대한 극심한 분노와 그에 따른 좌절  때문에 
오랫동안 어두운 감정에 빠져 있었는데, 이것이 부정적인 상념체와 감정체를 지어냈고 결국 
그것이 엘리멘타리가 되어 청년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이 분노와 좌절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자 엘리멘타리는 이제 더 이상 작용할 수 있
는 바탕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 청년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바타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나도 이와 비슷한 일들을  여러 번 경험했는데, 그 
가운데 상념체의 작용으로 추정되는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합니다. 

  불안신경증, 우울증 등으로 진단 받고 어느 정신과에서 3년 째 치료를 받고 있던 30대 남
자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이 청년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어
머니, 동생까지 일가족 4명이 모두 똑같은 증세를 보여  같은 병명으로 같은 정신과에서 함
께 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허리가 아프고 불안하고 우울해 보였
는데 그런 증세가 시작된 시기조차 서로 비슷했습니다. 
  이 청년에 대한 안내 과정에서 그의 가족 모두가 같은 상념체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
이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상념체가 창조된 발단은 청년의 아버지가 당한 교통사고와 거기
에 대응한 아버지의 태도가 그  배경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큰 기업을 경영하는 
사업가였는데,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차에 치여 요추와  골반뼈가 골절되는 큰 부상
을 입게 되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길바닥에 쓰러졌는데 이때 그는 "내가 지금 죽어
가고 있구나, 나는 이제 마지막이다, 기업도 파산이고 가족들도 큰일이다"라는  심각한 절망
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수 개월 간의 입원 치료 끝에 골절상은 회복되었지만 허리
의 통증은 몇 년이 되어도 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항상 두렵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입니다. 텔레비젼이나 신문을 통해서  교통사고나 기업의 부도 사건  같은 보도를 
보고 나면 안절부절못하고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자신과 직접 상관없
는 조그만 일에도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고 불
안, 공포의 증세가 생길 무렵 남은 세 가족에게도 같은 증세가, 특히 허리 아픈  증세까지도 
같이 나타났습니다. 아마 사고 당시 아버지의 공포와 좌절이 합성해낸 어두운 상념체, 곧 엘
리멘타리가 온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지요. 프로그램의 과정에서 청년은 심한 
요통과 불안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하였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결국 그의 고통스런  증세는 
현저하게 완화되었습니다. 
  아바타 프로그램의 상급과정인 위저드 코스에는 상념,  감정체를 효율적으로 다루고 처리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바타 프로그램이란 건강문제의 해결과 같은 제한된 분야를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성개발, 영적인  진화, 궁극적으로는 순수의식을 완전
하게 체험하도록 하는 의식 탐구의 체계로 짜여져 있습니다. 다만 이 프로그램을 거치는 과
정에서 병증과 같은 고통들이 부수적으로 해결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 속에는 자
신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신념과 감정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기법이 들어 있습니다. 
  사례로 든 이 청년의 경우도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 신념과 감정을 찾아서 이를 소멸
시킴으로써 이차적으로 상념체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프
로그램이 끝난 후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청년뿐만 아니라 교통사고 당사자인 아버지와  가족
들까지도 약물치료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호전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전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던 상념체가 프로그램  과정에서 저항하던 감정에서 벗어나  순수의식으로 
통합된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파라겔수스는 말합니다. "상념체는 대체로 자기와  유사한 감정의 혼란에 빠져있는  사람, 
비슷한 사건의 충격 가운데 있는  사람의 부정적 파장에게 끌려 들어간다.   부정적 감정과 
충격적 사건에 대해 상념체, 감정체가 가지고 있는 영상적  이미지가 의식의 어떤 차원에서 
서로 만나 뒤섞이게 되는데 이러한 의식적인 교란이 상념체,  감정체와 사람이 연결되는 계
기가 된다. 이런 감정체들은 알코올이나 마약중독자들처럼  좌절과 피해의식에 빠져있는 사
람들에게 쉽게 끌려가는 경향이 있다."
  결국은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지어내서 스스로 받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것을 
보더라도 사람이 어두운 생각과 감정에 빠지지 않고 밝은 마음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참
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엘리멘타리가 술이나 마약 같은 쾌락적 물질의 탐닉에 빠져 있거나  비뚤어진 성욕
이나 도박 같은 욕망에 빠져 있는 감정체라면 이것은 유사한 파장을 가진 사람에게 달라붙
어 그 사람이 더욱 파괴적인 습관에 젖도록 욕망을 강화시켜 결국은 자기통제력을 마비시키
도록 만든다. 이 엘리멘타리는 물질 육신이 없으니까 감각의  쾌락을 물질 세계에서는 경험
할 수 없으므로 몸을 가지고 있는 유사감각 추구자에 기생하여 그 감각을 빨아먹고 산다"  
  한 정신과 의사가 쓴 <조용하지 않은 죽음>이라는 책에는 끊임없이 섹스 파트너를  바꾸
는 변태적인 성욕추구자, 상습적인 도박꾼,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들은 대부분 이 엘리
멘타리의 작용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남을 잔혹하게 밟고서라도 기어코 출세를 하려는  사람, 남에게 인정을 못받을까봐 항상 
노심초사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 넣고도 끝끝내 자
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예를 들어 사이비 종교 교주, 전쟁 범죄자, 포악한 독재자 따위
-들은 엘리멘타리와 흔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권력이나 명성이나 부에 대한 병적인 추구자는 사실 그 자체로써 이미 병을 가지
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 따뜻한 사랑과 동정심으로 그들 상념, 감정체들을 풀어내서  평화
의 길에 들게 하는 일은 세상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도 정말 좋은 일입니다.   
     
    지고의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묘약
  텔레파시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겠지요.
  의식을 가진 한 존재가 의식을 가진 다른 존재와 감각경로를 통하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
로 정보전달이나 통신을 하는 것을 바로 텔레파시라고 합니다. 일종의 이심전심이지요. 
  한 자아의식과 다른 자아의식 사이에는 그들의 배후에 있는 순수의식을 전달 매체로 해서 
에너지와 정보가 전달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의  파도와 다른 파도 사이
에 그 주변의 바닷물을 통해서 파장이 전달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텔레파시라는 말은 소설가 마이어즈가  19세기에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엘리멘타리와 
같은 몸 없는 의식체와 사람 사이의 에너지 또는 정보 전달이 이러한 텔레파시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엘리멘타리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다"라든가, 어깨가 칼로 찔리는 것 같다"와 같은 
감정의 메시지를 송신하고 있다면 그 엘리멘타리와 유사한 감정의 파장 한가운데 있는 사람
의 감각이 이를 수신하고 여기에 반응하여 그 메시지와 같은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망치나 칼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발산해 오는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는 
사람의 감각이 이에 반응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머리나 몸의 통증이 외부의 
엘리멘타리가 보내오는 텔레파시적 메시지에 자신의 감각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할 때는 그것을 자기 머리나 몸의 어떤 병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이처럼 엘리멘타리의 텔레파시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만성적인 통증을 어떤 약물이나 물리
적 방법만으로 치료하려 드는 것은 마치 옆에 있는 친구가 자기 다리가 가렵다고 호소할 때 
내가 안타까운 나머지 내 다리를 긁고 있는 것이나 같지요.  내 다리를 긁는다고 해서 친구
의 가려움이 멈춰지는 것은 아닙니다. 
  편두통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적인 고통들은 대부분 이러한 엘리멘타리의  텔레파시
적 메시지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의사들이 있습니다. 최근의 자료에  따르면 몸이 아파서 병
원에 와 진찰을 받고 각종 검사를 해 보지만 특별한 이상 소견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전
체 외래환자의 반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환자들에게 의사들은 대개 신경증이나 정신신체 
장애와 같은 진단을 붙이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라고 격려하며 진정제 같은 약물을 주
게 됩니다. 이런 환자들일수록 이곳 저곳 병원을 옮겨 다니며 방황하기 일쑤지요. 남 보기에
는 멀쩡해 보이지만 본인은 정말 괴롭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사람이 엘리멘타리
의 영향을 받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이나 에이즈처럼 몸에 분명한 물리적 이상소견을 나타내는 질병도 최초에는 어떤  텔레
파시적 메시지의 반응에서 시작되었을 거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래서 암의 경우, 어떤  텔
레파시적 메시지가 사람의 세포로 하여금 미분화된 이상세포를 그처럼 무차별하게 증식시키
는 반응을 하도록 작용하는가, 또 에이즈의 경우, 어떤 텔레파시가 사람의 면역체계와  면역
력을 그처럼 무참하게 붕괴시키도록 반응하게 하는가와 같이 그 환자의  DNA에 어떤 내용
의 의도와 정보가 담긴 메시지가 작용하는가를 찾아내려는 의학 연구가 지금 실제로 진행되
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의 질병 가운데 많은 것이 의도와 정보가 담긴 텔레파시적 메시지에 
반응하여 나타난 것이라면 미래의 의학은 도대체 그런 질병을 발생시키는 최초의  씨앗이라
고 할 수 있는 이 의도와 정보의 메시지가 어디서 오며 그 내용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쪽
으로 연구를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텔레파시적 엘레멘타리, 즉 합성된 상념, 감정체에 대해 
주목을 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자기 몸의 세포가 자기 몸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인공적인 엘리멘
타리를 합성하고 있겠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무지와 어리석음에 깊이 빠져 
잇는 많은 인류가 날마다 하고 있는 짓이 이런 엘리멘타리를 창조해내고 또한 그 엘리멘타
리가 달라붙도록 수용체를 만들고 있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엘리멘타리의 작용으로 의심되거나 이것은 틀림없는 엘리멘타리의 작용이라고 느껴지더라
도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미약하고 불쌍한 존재입니다. 
나의 사랑과 동정을 받고 싶어하는 딱한 존재인 것입니다. 
  엘리멘타리가 의심될 떄는 그 고통의 감각에  저항하지 말고 큰사랑으로 이를 감싸고  잘 
받아들여 느껴야 합니다. 그 통증이 싫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식으로 반응을 하면 엘
리멘타리로 하여금 더 오래, 더  끈질기게 내게 저항하도록 만들어 계속  내 몸에 달라붙게 
만들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통증을 받아들여  잘 느끼되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내가 그것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그 고통의 감각을 더 이
상 지어내지 말고, 그 감각의 메시지를 더 이상 보내지 말라" 이렇게 말입니다. 일종의 텔레
파시적 송신 방법이지요. 
  여기서 끝내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행복의 근원인 순수의식으로 돌아가라!"라는  의도를 
마음의 메시지로 그 대상에게 보냅니다. 이때는 사랑스런 마음, 보살피는 마음으로 해야  합
니다. 
  엘리멘타리 역시 생명의 근원에서는 나와 더불어 하나의 생명이며 그 본성은 밝고 순수한 
의식입니다. 
  엘리멘타리를 대하고 처리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의 명상'과 
'질병을 통한 생명의 메시지 자각하기'의 방법을 응용하는 것입니다.
  '행복의 명상'을 통해서 나의 전신을 행복감으로 충만시킨  다음 엘리멘타리를 하나의 대
상으로 놓고 그것을 밝은 생명으로  바라보면서 그것에게 큰사랑과 행복의  파장을 보냅니
다. 그리고 그 통증을 잘 음미하면서 그 속에 어떤  생명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가를 찾아봅
니다. 이때 생명의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면 고통은 즉시 해결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 공격적이고 과격한 태도, 알코올이나 마약 같은 파괴적인 습관이 
엘리멘타리를 끌어들이는 바탕을 제공합니다. 사랑과 관용, 신뢰의 마음가짐과 밝은  생활태
도. 그것이 내 몸에 엘리멘타리가 달라붙는 것을 사전에 예방해줍니다. 따라서 지고의  사랑
이야말로 나와 엘리멘타리 모두를 살리는 최고의 묘약인 것입니다. 성인들이 한결같이 사랑
과 자비를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이런  깊고 오묘한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신념 바꾸기
  신념이란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입니다. 
  상념이란 신념의 바탕에서 떠오르는 온갖 생각입니다. 
  신념과 상념이란 무엇이 좋다 싫다 또는 옳다 그르다처럼 선악시비를 가리는 판단 분별하
는 마음입니다. 신념과 상념은 자아의식의 욕망과 저항을 반영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들, 아니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고 옳다 그르다와 같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마음은 필요한 
일이 아닌가? 또한 "좋은 것을 볼 때는 좋다고  하고 싫은 것을 볼 때는 싫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 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새겨 두어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이 내리고 있는 옳다 그르다와 같은 판
단은 생명의 본성에서 볼 때는  거의 다 빗나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학식이 높고 
위대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만일 옳다 그르다와 같이 선악시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생명의 도리에 어긋난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 본성에는 어떠한 판단이나 선악시비도 없습니다. 
  
  세상 만사는 자신의 신념대로 경험합니다. 신념이란 영화의 필름에 해당하고 경험이란 스
크린에 나타난 활동사진입니다. 
  따라서 밝고 고운 신념과 상념은 건강과 행복을 경험하게 하고 어둡고 왜곡된 신념과 상
념은 건강과 행복을 경험하게 하고 어둡고  왜곡된 신념과 상념은 질병과 고통을  경험하게 
합니다. 경험하고 있는 겉모습이 질병이든, 사고든, 생활상의 여러 가지 고통이든 그것의 배
경은 똑같이 어둡고 부조화스럽고 불편한 신념 상념입니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믿고 있
는 바가 나의 몸과 생활에 그대로 투영됩니다.   
  고통과 질병의 신념의 뿌리는 저항과 욕망입니다. 
  무엇을 너무 싫어해서 배척하려는 마음-저항.
  무엇을 너무 좋아해서 소유하려는 마음-욕망.
  이 둘이 바로 병통인 것입니다. 이 둘은 겉보기에 양극단의  서로 다른 성질의 것처럼 보
이지만 실은 욕망이란 '무엇이 부족한 것이 싫다'라는 저항에서 출발한 것이므로 곧, 욕망이
란 저항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저항이란 무엇이 충족되면  좋을텐데 라는 욕망에서 출발
하며 그것이 충족되지 못한 데 반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항 또한 욕망의 다른 모습입
니다. 
  아무도 질병이나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누가  만일 위와 같은 욕망과 
저항의 마음을 꼭 붙들고 있게 될 때는 틀림없이 이런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감정이란 욕망과 저항의 신념이 어떤 대상이나 상태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기분으로서  기
쁨, 슬픔, 환희, 분노, 희망, 좌절, 쾌감, 불쾌감 따위의 마음의 현상을 말합니다. 감정은 크게 
사랑과 미움으로 나뉘어 집니다. 사랑의 배경은 욕망이며 미움의 배경은 저항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미움 또한 질병이나 고통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마음 작용입니다. 미
움은 나쁘겠지만 사랑은 좋은 것이 아닌가? 누군가 또 이렇게 묻겠지요.
  그렇습니다. 미움보다 사랑이 좋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될  때 
무조건적인 자비심이 아닌, 조건을 가진 집착된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랑은 그저 욕망의 
표현일 뿐입니다. 즉 조건을 가진 사랑이지요.
  부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편협되게 치우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언제든지 미움으로 뒤바뀔 수 있습니다.  욕망에서 출발한 조건부 사랑의  뒷면에는 반드시 
증오가 따라 붙어 있습니다. 욕망과 저항이 동전의 앞뒤처럼  하나이듯이 세속의 사랑과 미
움 또한 하나입니다. 이성간이나 친구간에 처음에는 정신없이 사랑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미
워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이물리적 우주를 탄생시키고 확대시
켜 나가지만 이 두 가지 마음이 모든 괴로움과 만병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듯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질병과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이
러한 감정의 작용은 신념과 상념의 작용을 완충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욕망과 저항의 신념, 상념의 파장 때문에 생체가 생명의 질서에 어긋나는 에너지 배열 가
운데 있게 될 때 이를 생명의 본성 쪽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자기 방어 메커니즘으로  감정
이 표출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인체는 호르몬 분비와 같은 생리 작용을 통해 생리의 항상성 유지를 도모하고 있는데 이
러한 항상성 유지를 위해서 감정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감정을 억압한 채 오래 담고 있을 수도 있고,  표현해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습니
다. 몸이 불편한 사람일수록 누적시켜온 불편한 감정을 의도적으로 크게 드러내서 철저하게 
다시 경험시키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와 같은 방법
을 통해서 짧은 시간 동안에 경험하고 나면 몸이 그것을 오랫동안 끈질기게 다시 경험할 필
요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불편한 감정은 불편한 몸으로 표현되며 불편한 감정을 지우고 편
안한 감정을 가지게 되면 그대로 즉시 몸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사례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편안한 몸을 가지고자 한다면  편안한 감정을 
가져야 하고, 불편한 몸을 편안한 쪽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저항하고 있는 모든 대상을 인정
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편안해져야 합니다. 
  심신을 변혁시키는 결정적인 열쇠는 특히 싫어하는 모든 것을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저항 쪽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고통의 마음을  욕망이나 저항의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한 중도로 풀어내어 자유롭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가 개발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그것을 실천할 것인가, 그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생활의료 1단계-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는 우선 편의상   두 부류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   어두운 
신념, 상념, 감정 지우기와 둘째, 밝은 신념, 상념, 감정 가지기. 이 두 개의 범주에는   실천 
방법들이 각각 4가지씩 들어 있습니다. 이 8가지 방법을 모두  실천할 수도 있고 필요한 대
로 몇 가지 선택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몇  가지를 하든  일단 끝까지 밀고 나가 그  
끝을 보는 것입니다. 
    
    어두운 신념, 상념, 감정 지우기
    방법 1. 화해와 축복의 산책
  이 방법은 아바타 프로그램 제1부에서 발췌한 것인데 제대로만 한다면 기적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지만 가급적이면 산길이나  숲 속의 언덕길이 좋습
니다. 이 방법은 그동안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대하지 못한 특정인, 혹은 불편한 어떤 상황에 
대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살펴보아 미움, 분노, 질투, 좌절,  두려움, 
피해의식 따위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실행하는 것이  좋습니
다.  이 방법은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합니다. 
 1. 걸어갈 방향과 목표 지점을 정한다. 
 2. 목표지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저절로 떠오르는 순서대로  분노나 두려움 때문에 자
기가 한 행동, 생각, 의도를  자기 귀에 들릴 만큼 말로써  표현한다. 어떤 내용의 감정이든 
떠오르는 대로 크게 드러내서 다시 느끼고 반드시 말로 표현한다. 
 3. 한 사람 또는 한 사건에 대하여 철저하게 경험한 다음,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자연히 
떠오르는 다른 대상이나 사건을 느끼고 표현하는 식으로 반복한다. 
 4. 더 이상 떠오르는 것이 없을 때에는 그 목표  지점에서 '시간의 길이'에 대해 깊이 살펴 
본다. 
 5. 이제 돌아오는 걸음걸음마다 떠오르는  순서대로 누군가를 축복하며 "사랑해요,  감사해
요, 행복하게 잘 사십시오"라고 속삭인다. 
 6. 출발했던 자리에 돌아오면 현재 순간의 모든 경치,  소리, 냄새, 모든 사람과 대상, 모든 
생각에 대하여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대하듯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감사하며 음미, 감상한다. 
    방법2. 묵은 감정 지우기 
  이 방법은 방법 1의  '화해와 축복의 산책'과  비슷한 체계이지만 무의식  속에 오랫동안  
담아두고 억압해온 묵은 감정을 다시 드러내 처리하는 데 강력한 효과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질병이나 고통은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묵은 감정들이 부패하여 밖으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이런 감정의 찌꺼기를 모두 처리하여 철저히 정화해  버리면 심신이 아주 편안
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실행할 수 있습니다. 
 1. 눈은 감아도 좋고 떠도 좋지만, 처음에 시작할 때는 잠시 감는 편이 좋을 것이다. 
 2. 두 다리를 어깨너비 만큼 벌리고 편안하게 선 다음(몸이 불편한 분은 앉거나 누운 상태) 
온몸의 힘을 빼고 긴장을 이완시킨 상태로 1-2분간 아랫배로 천천히 호흡을 한다. 
 3. 이제 호흡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온몸에 흐르는  어떤 기운, 에너지를 느낀다. 몸이 
움직여지는 대로 따라 움직이면서 저절로 올라오는 분노, 증오, 두려움, 질투, 피해의식 등을 
큰 소리와 함께 온몸의 몸짓으로 표현한다. 
 4. 억압된 감정이 충분히 표현되고 경험되었다면 이제는 반대로 미워하고 두려워했던 대상
을 내가 포옹하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며 그를 용서하고 축복해 준다. 이때 가슴으로부터 흘
러나오는 큰사랑으로 그를 어루만지며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준다. 
    방법 3. 묶여 있는 주의에서 풀려나기
  만일 어떤 환자가 자기의 병에 마음이 꽁꽁  묶여 있어서 자나깨나 이 병을 없앨 궁리만 
하고 있다면 큰 일입니다. 병에 주의가 묶여 있으면 생명에너지는 내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주의를 어느 쪽에다 보내고 있느냐에 따라 그 결과에는 큰 차이가 생깁니다. 주의가 바로 
기이며 생명에너지이자 자연치유력입니다. 
  늘 이런저런 건강법을 좇아 다니면서 신경을  쓰는 사람들 가운데서 의외로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나오는 이유는 병에 걸리지 말아야겠다고  늘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는 새  주의를 
병에다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병은 없다고 믿고 일체 병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
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기도나 축원을 할 때도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게 되면 잠
재의식 속에 어두운 병의식을 덧붙여 심는 결과가 되니까 오히려 "생명의 빛이 깨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의식과 주의를 일체  병이나 어두운 쪽에 두지 말
고 생명의 근원과 밝은 쪽에다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묶여 있는 주의에서 풀려나기'는 아바타 프로그램 제1부의 내용에서  발췌한 것인데  이
것을 평소에 늘 활용하면 육체적, 감정적 치유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1. 질병 또는 고통스런 일에다 모든 주의를 집중하여 질병이나  고통 그 자체가 되어 느낀
다. 자신의 주의가 온전히 여기에 머물게 한다. 
 2. 다시 주변의 어떤 대상, 예를 들면 나무, 돌, 꽃 등에게 자신의 주의를 집중하여 그 대상 
자체가 되어 느낀다. 자신의 병에서 주의가 완전히 떠나 오직 이 대상에만 머물게 한다. 
 3. 다시 1에서와 같이 주의가 온전히 자신의 질병이나 고통에 머물게 한다. 
 4. 다시 다른 대상에게 주의가 온전히 머물게 한다. 
 5. 질병이나 고통에 묶여 있던 주의가 완전히 풀려날 때까지 이와 같이 왔다갔다하기를 반
복한다. 
    방법 4. 생명의 메시지 자각하기
  내 생명의 근원은 나를 생명의 본성 쪽으로 이끌기 위해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습
니다. 즉 질병이나 고통을 수단으로 써서 "네가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그것을 
자각하라"는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나의 내면에서 가르침의 메시지
를 질병이나 고통 같은 겉모양으로 포장해서 나에게 보내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메시지를 알아차리게 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질병이나 고통이라는 어두운 에
너지가 영적인 생명에너지로 재활용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에 가능해 집니다. 
  그래서 질병과 고통 속에 내재하고 있는  생명의 메시지를 자각하는 일은 어둠에서  빛으
로, 좌절에서 승리로 가게 하는 비결입니다. 
  질병과 고난 가운데 담겨 있는 메시지는 예를 들어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나 무엇이 
좋다 싫다라는 생각이 착각이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몸
이나 물질세계가 허망하고 실체가 아니므로 여기에서 벗어나도록 일깨워 주는 것일 수도 있
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1. 눕거나 또는 편하게 앉은 자세로 몸의 긴장을 풀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2. 약 1-2분 동안 아랫배로 천천히 호흡한다. 
 3. 이제 호흡에 대한 생각은 잊어 버리고 자신의 질병이나 고통으로부터 오는 아픔, 불편한 
느낌을 거부하지 말고 잘 받아들여 그것을 느껴지는 대로 느낀다. 
 4. 모든 주의를 아픔이나 느낌 속으로 보내 온몸으로 그것을 경험하면서 이 아픔, 이  느낌
이 어디에서 오고 있을까 하며 그것을 찾아 주의를 넓혀 나간다. 
 5. 어떤 생각, 인상, 감정이 떠오르더라도 회피하지 말고 그것을 잘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
간 "아하! 이것이 내 몸에  병을 만들어낸 근원이구나"와 같은 통찰  내지는 가슴의 울림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치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통찰은 자신만이 
할 수가 있고 그것이 자신의 병과 고통의 근원이라는 확신도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 
통찰의 내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졌던 어떤 부정적인  신념, 상념, 감정일 수도 있고, 
슬픔 혹은 공포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연습을 통해서 내 생명의 근원에서는 질병이라는 고마운 선물을 통해 나로 하여금 이
와 같은 어두운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고 있구나 하는 자각을 일깨워줄 수 있
습니다. 
  질병이야말로 더 이상 재앙이 아니라 내가 생명의 빛을 따라가도록 안내해 주는 큰 축복
이구나 하는 자각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이내 커다란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방법을 여러 번 되풀이해 보았는데도 어떤 자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걱정할 필
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이런 자각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방법
을 통해서 고통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밝은 신념, 상념, 감정 가지기
    방법 1. 감사의 마음 회복하기
  이 방법은 <생명의 실상> 가운데  있는 '감사행'에서 힌트를 얻어 제가  조금  변형시킨 
것입니다. 
  낮시간에 해도 괜찮지만 이왕이면 밤에 전기불을 끄고 촛불 하나를 밝힌 가운데 그 촛불
을 바라보면서 이 방법을 실행한다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이 연습의 목표는 먼저 자신의 부모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고, 이어서 
배우자나 다른 가족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불편한 감정의 대상을 다시 사랑하고 감사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일단 시작하면 한 시간 이상을 계속하는 것이 좋습니다. 
 1. 편한 자세로 앉아 촛불을 바라보면서 먼저 자신의  부모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
버지, 감사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를 반복해서  큰 소리로 말한다. 만일  당신이 절실한 
마음으로 이 감사행을 하고 있다면 뜨거운 눈물이 쏟아질 것이다. 
 2. 부모에 이어서 배우자나 가족, 그리고 평소에 불편한 감정을 가졌던 대상에 대해서도 똑
같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무개 씨,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반복해서 큰 
소리로 말한다. 
  이 방법을 실행해보지 않고 머리로만 상상해서 "설마 그럴리가...."하고 의구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말과 뜻이 가져다 주는 힘은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방법 2. 큰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아픈 환자를 더욱 그르치게 할 수 있는 함정의 하나는 자신에 대한 패배감, 남에 대한 섭
섭함, 성공한 사람에 대한 질투심 따위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일단 몸이 아프면 자칫 외로움, 좌절, 피해의식, 두려움  같은 어두운 생각이나 감정에 빠
지기 쉽습니다. 물론 몸이 아픈 것은 자신의 어두운  신념, 상념, 감정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는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는 훨씬 밝고 위대한 면이 있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초점을 항상 자신의 밝은 면에다 맞추고 있어야 합니다. 
  건강할 때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몸이 아플 때는 섭섭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밉고 싫은 사람도 더 많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고 거부감이 들더
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분명히 나의 어두운 신념, 상념의 투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상대방도 나와 똑같이 자기의 삶에서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
으며 생명의 본성을 배워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밝은 
면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좌절, 피해의식, 두려움,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분노, 섭섭함, 질투심은 자신을 
살려내는 생명에너지가 못들어 오게 그  통로를 꽉 틀어 막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막힌 통로를 반드시 뚫어야 합니다. 
 1. 매일 빠짐없이 '칭찬과 감사의 일기'를 쓴다. 
  자신과 타인에 대해 감사하고 칭찬할 만한 내용을 찾아내서 하루 한 가지 이상씩 꼭 써나
가도록 한다. 
 2. 일기장을 항상 몸 가까이 준비해 둔다. 이 일기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만 쓸 것이 아니라 
자신이나 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빠지지 말고 즉시 알아
차려서 반대로 자신의 장점과 남의 장점, 밝은 면을 찾아내서 일기장에 적는다. 이 일은  의
도적으로 해야 한다. 
  
  자신이나 남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밝은 면, 희망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
견하여 하루도 빠짐 없이 일기장에 적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도 
상관 없습니다. 이 일을 꾸준히 나가다 보면 고통만을  준다고 생각했던 질병과 아픔까지도 
감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병상일기를 쓸 때 병을 적으로 생각하고  투쟁하는 결의를 다지는 내용으로 쓰기  쉬우나 
이렇게 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자신과 남의 장점과 밝은 면만을 보면서 늘 칭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키워 가다 보면 어
느 땐가는 자연스럽게 가슴에서 모두를 큰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감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대응해서는 밝아지지 않습니다. 오직 밝은 빛을  비출 때만이 그 어
두움이 밝아집니다. 
  이 방법은 환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삶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방법 3. 웃기 연습
  불치병으로 알려진 강직성 척추염(일종의 류마티스성 질환)에 걸린  환자가 6개월만에 완
치되어 세계 의학계의 주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엄청난 양의 웃음과 
비타민 C만으로 그 같은 결과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잡지 '세터데이 리뷰
'의 편집장 노먼 커즌즈가 바로 그 장본인인데 그는 자신의 체험을  <질병의 해부>라는 책
을 통해 소개한 바 있습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웃기는 코메디를 보든지, 아니면 재미있는 일을 상상하면서 매
일 몇 시간씩 큰 소리를 내서 웃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쑥스럽겠지만 일단 한 번 
웃음보가 터지고 나면 그 다음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당신은 아마 웃음과 행복감이 엔돌핀
이라는 호르몬을 분비시켜 건강이 좋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웃음
과 행복감이 가져다주는 생명력은 어떤 호르몬 한두 가지를 분비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상상
도 하지 못할 더 엄청난 일을 합니다. 이것들은 그 사람의 부정적 상념과 감정의 회로를 근
본적으로 돌려놓아 모든 세포를 재배열시킵니다. 마치 우리 몸의 DNA에 밝고 건강한 정보
를 엄청나게 퍼붓는 것과도 같습니다. 
  일본 오카야마에 있는 시바다 병원에서는  모든 입원환자에게 하루 3시간씩 웃기  연습을 
시키고 있다는 것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결과 말기암 환자가  자연 치유되거나 복수가 
심한 간경변 환자의 소변이 터져서 증세가 좋아진 사례들이 있다고 합니다. 
    방법 4. 행복의 명상
  이 방법은 '행복의 도' 프로그램에서 인용해 온 것입니다. 이 명상을 늘 하고 있으면 아주 
행복한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온몸을 항상  행복감에 충만하게 할 수만 있
다면 그는 자연 치유력의 욕조 가운데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와 이 연습을 병행하면 행복감이 더욱 상승될 것입니다. 
 1. 몸의 긴장을 풀고 아랫배로 천천히 호흡한다. 
 2. 약 1-2분 후 호흡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과거에 가장 행복했던 일, 혹은 가장 행복
할 것이라고 상상되는 어떤 일을 떠올린다. 그 행복한 일을 가슴으로 느낀다. 
 3. 잠시 후 행복한 일 자체는 잊어버리고 행복한 느낌만 남게 한다. 
 4. 이제 가슴속의 행복감을 최대로 크게 증폭시키며 그  극대화한 행복감을 온몸으로 확대
시킨다.  
 5. 전신의 모든 세포가 행복감으로 충만되어 몸 자체가  곧 행복덩어리라고 상상하며 그렇
게 느낀다. 이 느낌을 계속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문득 아픈 몸의 고통이나 걱정이 떠오른다면 나의 행복에너지로 충분히 감쌀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들을 가슴의  행복감으로 껴안습니다. 또한 거부감이  드는 대상이 
떠오를 때도 환하게 웃고 있는 대상의  얼굴을 상상하며 나의 행복에너지로 그를  포옹하며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속삭입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어떤 일이나 목표를 위해서도 이 행복의 명상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 일이나 목표가 성취되었다고 믿고, 그 성취된  느낌을 온몸의 행복감으로 느끼면서 
모든 세포에 그것을 각인 시킨다고 상상하면 됩니다. 
  이 방법의 목표는 결국 어떠한 부정적 생각이나 감정도 자신에게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데 있습니다.  
      둘째 마당   기-생명에너지 다루기
      <생활의료 2단계;  기-에너지 다스리기>
  누가 지금 중환자라고 할지라도 건강한 사람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그의 생명의 내면, 생
명의 근원에는 순수한 생명에너지가 충만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의 근원은 순수한 
기의 무한한 바다와 같습니다. 순수한 생명에너지, 순수한 기, 자연치유력은 같은 말입니다.
  이런 순수한 기가 '나'의 좋아하고(욕망) 싫어하는(저항) 마음의  필터를 통과하면서 욕망
과 저항의 정보가 담긴 에너지로 바뀝니다. 이 욕망, 저항의 에너지가 물질우주를  지어내는  
물리적 에너지이자 질병과 고통 같은 현실을 창조하는 기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의 근원에
서 나온 순수한 기가 내 신념의 렌즈를  걸치게 되면서 그 신념의 내용을 그대로 갈무리한 
물리적 에너지가 되며 이것이 물질 입자로 굳어져 내 몸과 현실에 모양을 나타냅니다. 
  욕망과 저항의 신념이, 특히 저항의 신념이 병적인 기를 만들며 이 병적인 기가 굳어져서 
질병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몸의 병을 치유하려면  의학적인 치료도 잘 해야
겠지만 병을 치유시키는 근본적인 힘인 자연치유력을  이끌어내는 일도 잘해야합니다. 자연
치유력이 잘 발현될 때  의학적인 치료효과도 상승합니다. 기-생명에너지  다스리기란 바로 
자연치유력을 최대로 발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자연치유력인 순수한 기를 많이 끌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와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를 잘 해야합니다. 이것을 잘 하고  있다면, 기-생명에너지 다스리기는 저
절로 잘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에 이미 굳어진 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는 굳어진 병적인 기를 중성화시켜 
순수한 기의 회로에 다시 통합시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때 기-생명에너지 다스리기로서, 
신념의 힘을 이용하는 의식적인 방법과 함께 몸의 병적인 기를 중성의 순수한 기로 재통합
시킬 수 있는 물리적 방법을 병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 다스리기를 의식적인 방법과 물리적인 방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이지 이 두 가지가 선명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적인 방법은 신념이나 상상과 같은 의식의 모드(mode)들을 매개로 하여 생명의 기를 
이끌어내며 물리적인 방법은 호흡이나 동작 같은  물리적 수단을 매개로 하여 생명의  기를 
이끌어 내지만, 의식적인 방법은 결국 몸에 물리적인 힘으로  나타내도록 작용하고 그 배경
에는 역시 신념과 상상의 힘이 에너지의 근원으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는 곧 신념의 힘
  약 20여 년 전 건장한 육체미를 자랑하는 바디빌딩 국제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한 선수
가 자신의 우승 비결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선수들처럼 하루 종일 강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만 훈련
을 하고 모든 시간을 오로지 건장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근육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고 아
름다운 내 모습에 모든 주의를 보내고 있습니다"
  책 앞부분에 소개한 손가락 길이 연습 때처럼 자신의 목표에다 1백 퍼센트 주의를 보냈다
는 뜻이겠지요. 
  <크리스천 사이언스>라는 잡지에 이런 기사가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70대 초의 영국인 할머니가 40살 정도의 아주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분은 나이가 50살이 될 무렵부터 "올해부터 나는 해가 바뀔 때마다 나이를 한 살씩 낮추
어 가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처럼  믿기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1년 후에는 
49살, 2년 후에는 48살, 3년 후에는 47살..... 이런 식으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계산법
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나이를 한 살씩 낮추면서 틀림없는 그 나이라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
들에게도 "내 나이는 47살이다"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일종의 강력한 자기 암시를 실행하고 
있는 셈이지요. 사회 활동이나 모든 행동들도 그 나이에  걸맞게 하고 옷차림이나 무엇이나 
그 나이에 맞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몇 십 년 그렇게 했더니 놀라운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70대 노파가 젊은 여성처럼 싱싱한  피부에 가끔 생리까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힘이란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믿음과 상상이 기-생명에너지를 이끌어내
고 그것을 크게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기공의학 연구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어떤 환자가 물을 마실 때마다 물잔을 앞에 놓고 우
주에 가득 찬 위대한 치유에너지가 이 물잔 가운데로 모두 모여들고 있다고 믿고 그렇게 상
상하면서 마셨더니 이것만으로 어려운 난치병이 스스로 치유되었다는 경험사례도 있습니다. 
특히 질병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라면 음료나 음식을 먹을 때 항상 이와 같
은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며 먹는다면 분명히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음식을 대할 때 짜증을 
부리고 불평을 하거나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로 음식을 먹는 경우하고는 몸에  미치는 
영향에 큰 차이가 날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음식을 들기  전에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는 것은 심신의 건강을 도와주는 어떤 보약보다도 값진 보약입니다. 
        
    기공은 초과학적인 의학  
  84년 일본 초음파의학회에서 나는 당시 중국의학회 부회장이었던 리 즈수이 교수와  사귀
게 되었습니다. 리교수는 모택동 사망까지  몇십 년 동안 그의 주치의를  지낸 인물인데 몇 
년 전 <모택동의 사생활>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리 교수와 그의 부인은 원래 서양의학  전공자였는데 말년에는 기공의학을 연구했습니다. 
나는 기공의학에 대한 자료를 이 분들을 통해서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기공의학의 다양한 
체계와 내용 가운데 한 가지 특징은 치료자와 환자의 신념 그리고 상상력을 활용하는 것입
니다. 
  기공의학의 내용 가운데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음료나 음식 속에 생명의 기가 온통 모
여들고 있다고 믿고 상상하는 것과  같이 염력을 이용하는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맹물 한 
잔을 놓고 "이 물 속에 내 몸의 병을 낫게 하고 나를 살리는 에너지가 많이 모인다"라고 믿
고 상상한다고 해서 그 물의 화학적 성질이 변할 것인가?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과학수준으로 성분의 가시적인 변화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이를 부정하면 곤란합
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 이론을  통해서 "확인된 과학적  지식보다도 상상력이 한층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상상(Imagination)이 바로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어떤 물질이나 그 물질을 나누고 나누어서 더 이상 나눌 수 없을 만큼 작은 알
맹이가 되었을 때 이것을 양자(Quantum)라고 부릅니다. 즉 물질의 성질을 띤 가장 작은 알
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물질의 알맹이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어
떤 에너지입니다. 
  물질과 에너지의 기본단위인 이 양자의 크기는 원자에 비해 백만 배 내지는 천만 배나 더 
작습니다. 어떤 물질이나 이 양자의 차원에서는 물질이 곧 에너지(기)로 될 수가 있고 에너
지(기)가 곧 물질로 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양자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 모양을 나타내기 위
해서 항상 대기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파동입니다. 양자 수준에서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질료로 있다가 이것들이 운동하고 서로 융합하여 물질입자의 형태로  바뀌면
서 물질이 되고 나아가서 사람 몸 같은 모양이 되기도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입자
가 되기 전의 에너지(기)가 바로 신념과 상상의 파동입니다. 
  우주 가운데 의식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무엇을 상상하고 생각할 때마다 그 하나의 생각
이 그대로 에너지가 되고 입자화됨으로써 이 물리적 우주가 조금씩 확대되도록 작용하고 있
을 것입니다. 마치 바다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면 그 한 방울만큼 바닷물이 불어나게 되듯
이. 
  그러니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킬 때마다 그 생각은 즉시 온 우주에 파장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믿음 가운데서 무엇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일이야말로 내 생명과 우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요. 
  나와 만났던 어떤 환자는 물이나 음식이나 약을 먹을 때는 언제나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
기'에서와 같이 이들을 내  몸과 차별  없는  평등한 생명의 빛으로  상상한다는 갓입니다.  
온 천지만물이 생명의 빛이므로 이런 음식이나 약  또한 생명의 빛이라고 보면서 먹고  있
으니 몸도 마음도 아주 편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통기공 '온살도리'의 신비한 효과 
  이번에는 기-생명에너지 다스리기를 위한 물리적 방법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호흡법, 요가, 기공 등과 같이 생명의 에너지를 증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수련법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방법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만이 제일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신이 선택한 방법의  수련을 통해서 지금 도움을 얻
고 있다면 그대로 계속하면 되겠지요. 다만 여기서는 심신이  불편한 환자들이 어느 장소에
서나 쉽게 실천할 수 있으면서도 에너지를 크게 증강시킬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소개합니다. 
  '온살도리'라는 이름의 수련법인데 이것은 옛부터 전승되고 있는  한국의 비전으로서  강
신무 선생이 이를 발견하여 다시 다듬어 소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온살'이란 몸과 마음을 이루는 최소단위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물리학에 
대응하자면 앞서 살펴본 양자수준의 단위,  즉 육체와 정신이 서로 전환될  수 있는 수준의 
생명단위라고 추정됩니다. 
  '온살도리'란 이런 최소한의  생명단위인 온살차원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하여 몸과  
마음을 가장 조화롭고 순수한 원래의 에너지  상태로 다시 배열시키는 일 또는  과정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온살도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몸도 고르게,  호흡도 고르게, 나아가서 마
음도 고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동안 이 방법을 규칙적으로 실행해 온 환자들에게서 예상 밖의 놀라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온살도리의 동작을 살펴보면 마치 무한대꼴의 운동을 계속 반복하고 있
는것으로서 궁극의 근원에너지에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게 합니다. 마치 원심력과 
회전력을 이용한 순환펌프와 같은 구실을 하여 인체 내에 잠재하는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도록 응축시키고 확대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수련을 통해서 도움을 받은 체험사례를 여기에 다 소개할 수 없지만 그 동안 변비, 만
성위장관 질환, 만성간, 신질환, 편두통, 협심증, 고혈압, 만성고관절통, 디스크 탈출증, 백납, 
만성피부질환, 불면증, 우울증, 불안신경증, 중풍속발증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만성퇴행성 
질환자들이 전문적인 치료와 병행하든지 또는 그렇지 않든지 간에 이 수련을 열심히 함으로
써 큰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건강의 증진을 위해서나, 특히 공부와  일에서 
비롯하는 심리적 억압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다리를 어깨너비 정도로 벌리고 서서 양발을 11자  모양으로 평행되게 놓는다. 온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시선은 눈높이에 둔다.
 1. 먼저 몸의 무게중심을 왼쪽  다리에만 두면서(이때 자연히 오른쪽  다리에는 힘이 가지 
않음) 오른쪽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오른쪽 발끝만 바닥에 댄 채로 좌측방향으로 90도 정도 
돌려(이때 상체는 자연히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발뒤꿈치를 바닥에 놓는다. 
 2. 다시 그 오른쪽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발 뿌리만 바닥에 댄 채로 원래의 자리로(발뒤꿈
치는 오른쪽으로, 상체는 왼쪽으로) 돌려놓는다.
 3. 이제 반대로 몸의 무게중심을 오른쪽 다리에만 두면서(자연히 왼쪽 다리에는 힘이 가지 
않음) 왼쪽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왼쪽 발 뿌리만 바닥에 댄 채로  우측방향으로 90도 정도 
돌려(상체는 자연히 왼쪽방향으로 따라 돌아간다) 발뒤꿈치를 바닥에 놓는다. 
 4. 다시 그 왼쪽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발 뿌리만 바닥에 댄 채로 원래의 자리로(발뒤꿈치
는 왼쪽으로, 상체는 오른쪽으로) 돌려놓는다. 
 5. 위의 동작을 좌우로 번갈아 가면서 계속 반복한다. 
  말로 표현하니까 조금 어수선하게 들리지만 알고 보면 매우  쉽고 단순한 방법입니다. 남
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 수련의  초기에 더러는 어지러움증을 느끼거
나 몸의 병증이 더 크게 드러나 불편할 수 있고 많은 생각이 떠오를 수 있으나  그렇더라도 
이 현상을 잘 받아들여 느끼면서 계속해 가면 결국은 다 사라지게 됩니다. 
  발을 돌리는 각도를 90도라고 했지만 꼭 여기에 맞출 필요는 없고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몸의 상태에 따라 자연스럽게 하면  되고 동작의 속도도 자신에게 편안한  대로합니
다. 다만 처음 시작할 때는 약간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것이 중심 축에 바로 서기가 쉬우며 
나중에는 곧 관성이 생겨 저절로 돌아갑니다.
  건강의 회복이나 증진을 목표로 하는 경우에는 아침에 한 시간, 저녁에 한 시간씩 하루에 
최소한 두 시간 이상 수련할 것을 권합니다. 몸이 허용하는 한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수
록 좋지만 그렇다고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방법이든지 한결같이 꾸준하게 실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토마토 농장의 기적
 일본의 한 시골에 우다 씨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토마토 농장을 운영하고 있
었는데, 토마토 수확을 올리기 위해 몇  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 수확을 거두지 못하자 그게 늘 불만이고 짜증스러웠습니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당연
히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는 이렇게 마음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수확이 적다고 토마토 나무만 탓하고 원망할 게 아니다. 오히려 토마토 나무를 하늘처럼 
높이 받들고 공경하기로 하자"
  이 농부는 바로 그날부터 토마토 비닐 하우스에 들어 갈 때는 언제나 두 손을 일일이  합
장하며 토마토 나무 앞에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감사합니다"라는 말
이 절로 가슴 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일본의 토마토 나무는 그 크기가 우리 나라 감나무만큼이나 큰 것도 있는데 나무 하나의 
생장 상태가 수확량의 증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우다 씨가 토마토 나무를 공경하
는 마음으로 돌보기 시작한 그 해는 기상 조건이 나빠서 주변 농장들의 토마토 농사가 모두 
형편없는 흉작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다 씨네 농장만은  평년작의 세 배 이상이나 
되는 대 풍작을 이루었습니다. 
  일본 농협에서는 어떻게 해서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현장으
로 특별 조사반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조사 보고서에는 별다른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지
요. 토마토 나무에 대한 관리법이나 물리적 노력은 다른 농부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으니
까요. 
  
  물리적 세계의 차원에서는 어떤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할 때 땀을 흘리며 물리적인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의식  세계의 차원에서 현실의 청사진인  신념을 다룸으로써 
보다 쉽게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의식에서 에너지가 창조되어 그 에너지가 물질 입
자화됨으로서 의식은 물질 현실로 굳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리적 현실을 지어내고 있는 
창조 에너지를 의식의 차원에서 끊어버림으로써 원하지 않는 현실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그와 반대로 원하는 현실의 청사진에 창조에너지를 집중시킴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창
조하고 유지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즉  물질현실에서는 변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현실의 근원인 의식의 차원에서 다룰 때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물질 세계의 현실을 물리적인 노력만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힘이 많
이 소모되는 만큼 효율적이지 못하지만 그러나 의식의 세계에서 창조에너지의 조절을  통해
서 현실을 바꾸는 것은 애쓰는 노력이 적은 만큼 얻는 효과는 훨씬 더 큽니다. 따라서 '기-
에너지 다스리기'는 물질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의식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입니
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결국  '신념 다루기'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어떤 생각을 품거나 말을 하게 되면 그  생각과 말의 파장이 주변뿐만 아니라 온 우주에 
퍼지게 됩니다. 따라서 항상 근원적인 입장에서 관용과 사랑의  파장을 실어 생각하고 말하
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과 말의 파장은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심지어는 무
생물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 최근 들어서는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과 말의 파장이 곧 창조에너지, 기인 것입니다. 
  
    먹어도 질리지 않는 초밥
  또다시 일본에서 화재가 되고 있는 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야마기마쓰라는 사람인데 그는 일본 전역에 걸쳐 1천 개 이상의 체
인점을 가지고 있고 해외에도 많은 체인점을 두고 있는,  초밥업계에서 크게 성공한 기업가
입니다. 
  이 분은 원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데다가 몸도 허약해
서 한때는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멘 일도 있었고 게다가 얼굴도  못 생겼지, 다른 특별한 재
주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아무튼 내놓을 만한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
니 늘 열등감에 빠져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러다보니 이 사람은 실패만 거듭
하다가 그저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어느  날 강물에 몸을 던지기 위해 다리 난간을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 때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자살을 포기하라
고 설득했습니다.  야마기마쓰 씨는 하도  답답한 마음에 이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모두 
털어놓았지요. 그랬더니 이 분이 딱하게 여긴 나머지 그에게 작은 초밥집을 하나 차려 주었
습니다. 
  그런데 막상 초밥집 문을 열기는 했지만 이  사람의 솜씨가 워낙 없으니 멋모르고 한 번 
다녀간 사람은 두 번 다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팔려고 만들어 놓은 초밥을 
늘 자기가 먹어야 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그런 맛없는 초밥을 먹어야 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어
느 날 눈물을 찔끔거리며 초밥을 먹고 있던 도중 야마기마쓰 씨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
랐습니다. 
  "먹어도 질리지 않는 초밥을 만들 수는 없을까?"
  "먹을수록 더욱 먹고 싶은 초밥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이었습니다. 달리 어디서 기술을 배울 처지도 못되고, 애초 그는  그 
방면에 아예 소질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초밥을 주무르면서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초밥이 되십시
오. 이 초밥을 먹는 손님이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하소서!"라는 마음의 기원만을 오로지 주먹 
속의 초밥에 보내었습니다. 정말 절실한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게에 손님이 끊이지 않고 밀려오
는 것입니다. 초밥의 재료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무슨 기술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
다. 달라진 것이라곤 오로지 혼신의 정성을 다해 그러한 마음의 파장을 보내면서 초밥을 만
들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결국 그는 이렇게 정성이 담긴 초밥 하나로 해서 눈부신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
는 말년에 자기 회사 연수원 책임자가 되어 연수생들에게 자기 방식을 전수하는 일에 전념
했다고 합니다. 
  이 분의 경우와 같이 돈을 많이 벌어야만 그것을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해서 아주 귀한 교훈을 하나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반드시 머리가 좋고 지식이 많고 학벌이 좋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는 사실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고 기쁘게 해주는 마음, 진실한 마음의 파장이 이렇듯 큰 창조 에너지
를 만들어 줍니다. 능력이 아무리 많더라도 이기적인 생각에만  젖어 있다면 결국에 가서는 
꼭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창조 에너지가  차단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마당-몸과 물리적 현실       
    몸이란 다만 하나의 생각
  우리는 대체로 몸을 단단한 살덩어리로 보기 때문에 마치 공원 가운데 서 있는 동상이나 
조각상처럼 좀체로 변화하지 않는 물체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몸은 한 순간도 그대
로 고정되어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해마지 않습니다.
  몸을 분수대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물기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몇 달 전에 본 물기둥이
나 지금 보는 물기둥이나 그 겉모양은 같아도  실제로는 1초 전의 물기둥의 물과 1초 후의 
것은 전혀 다른 물입니다.
  이와 같이 1초 전의 우리 몸과 1초 후의 우리 몸은 그  실질이 다릅니다. 사람의 위 점막
(음식물과 접촉되는 위장의 매끌거리는 안쪽  벽)은 1주일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조직으로 
교체됩니다. 사람의 피부는 약 한달 사이에 새로운 피부조직으로  교체되고 피부 밑의 지방
조직은 약 3주마다, 근육은 약 3개월을 주기로 새것으로 바뀝니다. 간세포는 약 2,3개월만에, 
단단한 머리뼈도 약 3개월 후에는 새로운 세포들로 교체됩니다. 그 때의 내 몸과 지금의 내 
몸은 완전히 다르다는 애깁니다. 
  이처럼 사람 몸이란 묵은 벽돌이 빠져 나가고 새 벽돌이 그 자리에 채워지는 벽돌집처럼 
한 순간도 멈추지 안고 묵은 세포는 사라지고 새로운 세포가 보충되는 과정의 흐름입니다.
  마치 강물의 흐름 같아서 겉 모양은 그대로인  것 같지만 그 실질은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변화해마지 않습니다. 1년 전의 내 몸의 전체 세포의  약 99%는 지금 새 것으로 교체
된 것입니다. 이런 연구 결과는 미국 캘리포니아  UCLA 오크리지 연구소에서 방사선 동위
원소에 의한 실험을 통해 얻어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강물이나 뜬구름이 흘러가
듯 한 순간도 머무름 없이 흘러가는  과정에 불과하므로 사실은 실존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몸의 흐름에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생각의 흐름입니다. 몸이 굳어 있
는 물체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의 굳어진 생각의 반영입니다. 
  얼핏 보면 몸이라는 것이 마치 수많은 감각기관들이 모여  있는 생물체로만 보입니다. 그
러나 이것은 다만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꼭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눈에 보이는 경치, 귀에 들리는 소리, 코로 맡은 냄새, 기타 느껴지는 느낌
들이 몸이라고 하는 고유한 실체에서 나오는  감각들인 것이지 그것들이 결코 자기  의식의 
반영이 아닌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다
고 상상하고 있을 뿐이요,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상상하고있을  뿐이며 무슨 냄새가 난다고 
상상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준들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만일 그런 사람에게 "당신의 
감각이란 사실은 당신 몸의 감각 기관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전기적 신호들을 당신 생각 가
운데서 번역한 결과"라는 사실을 확실한 증거를 들어서 보여준다고 해도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겠지요. 
  이처럼 어떤 생각과 오래오래 하나되어 있다보면 그것이 꼭 사실처럼 보이게 되고 마침내
는 고정불변의 현실이 되고 맙니다 뚜렷한 현실이 된 다음에는  그 현실을 지어낸 '맨 처음 
생각'을 찾아내 보려고 해도 현실과 너무나 친숙해 있어서  그것이 확실한 현실일지언정 생
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몸이란 생각의 흐름을 따라 쉴새없이 흘러가는 흐름이며 우리 생각이 오랫
동안 품어온 하나의 인상일 뿐입니다. 몸이란 시간적으로 한  순간도 고정되어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고유한 존재라고 볼 수가 없고, 공간적으로도 몸의  세포를 분석해 들어가 양자의 
차원에서 볼 때는 에너지만 진동하는 텅 빈 공간일 뿐이므로 물질적으로 실존한다고 볼 수
가 없습니다. 양자차원 이전의 순수의식의 차원 즉 생명의  근원에서 보자면 여기에는 어떠
한 파장도 물질도 모양도 없으므로 몸이란 흔적조차 없는 오직  텅 빔일 뿐입니다. 이런 의
식의 차원에서 볼 때 현상계의 몸이란 우리의 생각이 지어낸 환영에 불과합니다.  
  몸이나 몸의 감각 기관은 틀림없이 생각이 지어낸 인상이므로 몸은 당연히 생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미국에서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은 한  젊은이가 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햄버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수술 받은 후부터 갑자기 햄버거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콩팥을 제공한 사
람의 기호를 조사해보니 그 사람이 생전에 햄버거를 아주 좋아한 사람이었습니다. 증여자의 
생각과 인상이 증여 받은 사람의 몸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식 받은 사람의 몸 
한가운데 흐름 가운데 증여자의 생각의 흐름이 합류된 것이라고 보아야겠지요. 
  한쪽 신장을 이식 받은 30대 남자가  이식한 신장의 만성거부반응 때문에 정기적인  혈액 
투석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환자에게 콩팥을 제공한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는데 그는 평소
에 아버지를 강압적인 독재자라고 생각하여 아버지에 대해 심한 불만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
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콩팥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관여하고 있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어느 정도 여기에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왜 이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면 이 환자는 이식 받은 신장의 거부반응 때문에  줄
곧 2주만에 한 차례씩 혈액투석을 받아  왔었는데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마음  회복하기'
를 열심히 하면서 차츰 혈액투석의 주기가  연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3주, 4주만에  혈액투
석을 하다가 환자 마음속에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이 모두 사라지고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나서부터는 신장의 거부 반응도 개선되어 결국 혈액투석을 받을  필요
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장기이식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장기제공자의 얼굴을 알든지 모르든지 그  제
공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행을 한다면 거부 반응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겠구나  하
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이란 우리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몸을 단지 물질로 된 살덩어리의 모임이라고 믿을 수도 있고, 순수의식의 빛의 파동의 모
임이라고 믿을 수도 있을 것이며, 또다른 무엇이라고 믿을 수도 있겠지요.
  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믿느냐에 따라서 몸에 일어나는 변화도 서로 다르게 나타날 것
입니다. 같은 병이라도 몸을 굳어진 물질로만 보게 될 때는  약을 먹고 무슨 건강법이나 보
약을 쓰고 해서 아주 천천히 좋아질 것이나 몸을 빛과 같은 파동이라고 볼 때는 '생명의 근
원과 하나되기'에서처럼 마음먹은 대로  주파수나 진동 폭을 바꿈으로서  즉시 몸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몸의 병이 어느 기관이나 조직의  특정부위에 국한되어 나타나 보이더
라도 크게 볼 때는 신념, 생각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전신의  모든 세포가 그 병을 만드는 데 
함께 관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활의료 3단계- 몸 다스리기>
  내 생명의 근원에 충만한 순수에너지가 나의 신념, 생각의 필터를 통과하여 그 신념, 생각
의 정보가 담긴 물리적 에너지(기)로 변화되며, 그 에너지가 물질입자화되어 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  기- 생명에너지 다
스리기를 잘하게 되면 저절로 몸 다스리기는 잘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물질적인 몸을 가지고 있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이 바로 
나라고 하는 굳센 믿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몸  다스리
기가 필요하게됩니다. 
  사실 공식적인 의학이건 민간의료이건 대부분의 의학체계의 내용은 이 몸 다스리기에  집
중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고 있는가하면 대부분의 인류는  지금 물질육신이 하나의 실
체로서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고 그 육신이  바로 나라고 하는 생각을 의심할 바 없는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몸이 실존하며 그 몸이  바로 나다'라는 믿음이 강력하면  할수록 그 사람에게 
몸 다스리기는 그만큼 중요하게 보일 것이고 그 만큼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건강법이나 민간요법의 내용도 대개는  몸 다스리기에 관한 것입니다. 
무엇을 먹어야 한다, 무슨 운동을 해야 한다, 무슨 물리적 방법을 써야 한다와 같이 몸을 관
리하는 물리적 방법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공식적 의학의 내용이건  건강법에 관한 
내용이건 몸을 다스리는 일과 관련된 다양하고도 많은 정보를 모두 정리하여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생활의료 다섯 단계'의 체계를 위해서 필요로 하는 최소한
의 몇 가지 방법을 몸 다스리기의 내용으로서 대신하려고 합니다. 
  몸이 스스로 불러들이는 병은 대체로 식욕, 성욕을 비롯한  재산, 권력, 명예욕 같은 욕망
의 지나친 추구와 조화롭지 못한 생활 탓입니다. 
  동양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의 소문 편은 이런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느 날 황제가 왕사인 기백에게 묻기를, 
  "태고적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백 세가 지나도 여전히 그 동작이 쇠퇴하지 않았다고 하는
데 지금 백성들은 50살이 되자마자 벌써 동작이 쇠퇴하게 되는 것은 어찌된 까닭입니까?"
  스승인 기백이 대답하기를,
  "태고적 사람들은 자연의 기운에 조화를 맞추고 음식에 절도가 있었으며 몸도  마음도 다 
함께 조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래서 백 세의 수명을 다 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도리에 맞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절제할 줄 모르고 과즙
이라도 마시듯이 술을 마구 마시며 심신을 함부로 과로케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술에 취
해 여자를 찾아 정욕이 동하는 대로 그 정력을 소모하여 생명의 원천인 진기를 상실하고 있
습니다. 심신의 진기를 온존하려 하지 않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 욕망을 충족시키
며 장수의 도리를 모르고 생활태도가 무절제하기 때문에 50살만 되면 벌써 노화 현상이 일
어납니다." 
  이 문답은 2천년도 더 된 오랜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지금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최고의 교
훈입니다. 이 간단한 말 가운데 몸 다스리기의 원리와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음식 욕심과 성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욕망의 무절제한 추구가 몸을 잘못 다스리는 출발
점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먼저 음식에 대해서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은 몸이 건강해지려면 영양분이 많은 음식을 많
이 섭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이나 보약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추구 열기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각종 건강법들은 무슨무슨 음식을 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식으로 대부분 먹거리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한 음식과 영양에 관한 정보가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서 이것들을 따라
가려면 정신을 못 차릴 지경입니다. 이러한 정보들이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한정된 수준
일망정 사람들의 건강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겠지요.   
  그러나 어떤 특별한 음식이나 영양물질을 먹지 않으면 건강이 나빠질 테니까 이런 것들을 
꼭 먹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서 무엇인가를 먹고 있거나 무슨 건강법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건강이 나빠진 경
우를 흔히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먹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인가?
  한마디로 정리하라고 한다면 곡채식 위주의 소식, 절식입니다. 
  식생활과 건강의 상관 관계라는 주제는 늘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만 내가 살펴 
본 바로는 곡채식 위주의 소식이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없이  으뜸가는 양생법입니다. 
지리적 특성과 자연 환경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류에게는 이 섭생법이 
건강하고 조화로운 심신으로 가는 최적의 방법입니다.
  나는 86년 여러 나라의 장수학자들과 함께 일본의 전통적 장수촌인 유즈리하라를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여기는 세계보건기구가  공인하는 장수촌인데 전통적으로  노인 장수자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 그곳의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생활양식이 주목을 받아 왔습니다.
  야마나시 현의 깊은 산골이었는데 옛부터 주민들은 전통적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곡채식 
위주의 소식을 하며 낙천적으로 살아 왔습니다.  젊어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80. 
90이 넘도록 농업노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장수하며 살았는데 이 장수촌에 이변이 생겼습니
다. 50년대부터 고속도로가 뚫리고 산업문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젊은 세대들은 대도시
로 일자리를 찾아 나갔습니다. 이들은 장수촌의 전통음식 대신에 고기, 계란, 빵, 가공  식품 
같은 서양식 식생활과 도시문명의 생활 스타일에 젖어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 젊
은 세대들 속에서 난치병 환자가 생기고 일찍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장수촌 유즈리하라의 단명화의 교훈'은 국제  장수학회에서 WHO에 제출한 보고서의 제
목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는 "늙은 부모들이 젊은 자식들의 장례식에 참가하는 일이 빈번해
졌습니다"라는 뼈아픈 말이 있습니다.   
  
    칼로리 영양학에서 생태학적 영양학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 칼로리 영양학은 세계적으로 인류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
습니다. 성인의 경우 하루 평균 2,400 칼로리 이상의 열량을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등 각종 
영양소와 함께 골고루 섭취해야한다는 것이 칼로리 영양학의 골자입니다. 우리 나라 중,고등 
학교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지난 세기(19C)로부터 금세기(20C)초와 같이 영양의 절대적 결핍과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
기에는 칼로리 영양학의 가치가 크게 인정받을 수 있었고,  지금도 어떤 계층의 사람들에게
는 의미가 있겠지만 많은 인류들에게는 이 영양학은 이제 더 이상 신화가 될 수 없습니다. 
  칼로리 영양학을 가장 신봉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경우 전체 인구의 반에 가까
운 약 1억이 대부분 만성질환 때문에 병원을 이용하고 있어 의료비의 지나친 부담이 그  나
라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78년 미 상원 영양문제특별위원회가 "과잉의 단백질과  지방 위주의 고칼로리 음식이 암, 
심장병, 뇌졸중처럼 음식과 관련된  죽음의병을 유발시키고 있는 바  즉시 20세기초와 같은 
곡채식 위주의 식사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보고했던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음식의 섭생태도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 거리는 우선 잘 먹고 보자는 식의 지나친 과식과 
폭식 입니다. 특히 도시 생활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일을 마친 후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함께 어울려 밤늦도록 음식을 많이 먹는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 더러는 업무와 관련되
고 있거나 그 날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푼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2차, 3차까지 자리를 옮겨가
며 허리띠를 풀어놓고 술과 고기와 음식을 잔뜩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
할 지경입니다. 이런 과식 습관이 한국의  4,50대 남자의 사망률 세계 1위의 기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심리적  압박이나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겠지요. 
밤늦게까지 술과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 심신의 스트레스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피로를 풀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음식을 적게 먹고 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암, 뇌졸중 같은 어려운 병이  젊은 세대들에게도 늘어나고 있고 특히  한국 남자 성인들 
가운데 지방간과 같은 만성 간질환 환자가 많은 것은 이런 식생활 습관과 틀림없이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리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간은 태양이 정중에 있는 한 낮이므로 점심식사를 주
된 식사로 하고 아침과 저녁식사는 가볍게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도 맞고 심신에도 좋다
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옳은 섭생법입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거의 다 음식
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있고 거기에다 술이나 고기처럼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많이 취하고 
있습니다.
  내가 유즈리하라 장수학회에서 들었던 강의 중에서 히노 교수의 강의는 매우  인상적이었
습니다. 이 분은 치바대학 내과 교수를 지낸 분으로  당시 83세의 고령이었는데도 젊은이들
보다도 더 정력적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 3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 않는데도 피로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가 소개한 비결은 곡채식 위주의 소식법과 욕망을 줄이는 생활입니다. 
이 분은 고기는 일체 먹지 않고 채식만 하는데 그것도 하루에 점심 한 끼니만 먹는다는  것
입니다. 칼로리 영양학의 관점에서 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히노 교수가 관찰하고 실험한 내용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일본의 용택사라는 절의 승려 14명을 상대로 승려들이 섭취하는 음식물의 총칼로리와  매
일 소모하는 열량을 비교 조사하였습니다.  승려 한 명당 섭취 칼로리는 1일 평균 1,436칼로
리인 반면에 소모하는 열량의 합계는 1일 평균 2,204칼로리로서 하루에 768칼로리가 부족한 
셈이지요. 칼로리 영양학의 산술적인 계산법대로하자면 매월 체중이 6kg씩 감소되고 1년 후
에는 72kg이 마이너스되므로 1년 후의 체중은 0이 되어야 할텐데 1년 후에도 체중감소는커
녕 심신이 모두 건강하고 좌선과 노동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칼로리 영양학이 가장 과학적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사실은 생명현상의 무지에서  빚어진 
비과학이라고 히노 교수는 비판합니다. 생명현상이란 심신의 상호관계, 주변 환경과의  에너
지 교호관계와 같은 다차원의 생태적 관계  속에 있으므로 수학공식 같은 단편적인  척도로 
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히노 교수처럼 칼로리  영양학을 비판하는  의학자, 영양학자들은  세계적으로 '생태학적  
 
영양학'이라는 새로운 영양학의 이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생태학적 영양학이 권장하는 바는 
곡물, 채소, 과일, 해조류 같은 식품을 주식으로 하되 그것도 적은 양을 취하는 소식이 건강
에 좋다는 것입니다. 
    동서고금 최고의 양생법-절식과 소식   
  80년대에 미국 UCLA의 노인병 연구소장을 지낸 월포드 교수는 그의 명저 <인간의 최대 
수명>에서, "노화와 질병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고단백, 고지방, 고칼로리 음식의 섭생
이다. 저단백 저칼로리 음식과 체중을 낮추는 방법이야말로 무병장수를 위한 최고의 비결이
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영양상태가 불량하거나 소모성 질환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환자들의 건강회복을 위
해 이상적인 섭생법은 역시 곡채식 위주의 소식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성간염, 지방간, 간경변 같은 만성 간질환 환자들이 단백질을 많이 섭취해야 한다는  생
각의 노예가 된 나머지 입에서 잘 받지도  않는 고기를 매일 일정량 이상씩 무리하게 먹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참으로 딱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방식은 사람을 기계로 보는 무지입
니다. 이런 섭생법을 실천한 환자가 완벽하게 건강해진 사례를 본 일이 없습니다. 
  대신 식물성 단백질, 채식 위주의 소식, 야채수프, 부황과 같은 네거티브 요법을 응용하여 
만성적인 간질환에서 회복된 환자를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성인병 환
자의 대부분의 경우는 영양보충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단식이나 생식을 통해
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86년 일본 나고야 의사회관에서 열린 제 23회 국제  절식요법학회에서 내게 '한국의 자연
요법의 사정'이라는 주제강의를 요청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  학회에 처음 참석하게 되었는
데, 나는 그 자리에서 세계적으로  단식을 연구하는 의사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학회의 참석이 계기가 되어 단식이나 생식이야말로 위대한 치료법이며 건강
증진법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식이나 단식이나 같은 말이지만 동양권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목적으로 금식할 때는  단
식으로, 의료의 목적으로 금식할 때는 절식으로 그 용어를 구별하여 쓰기로 하고 있습니다. 
  이 학회에서 하이라이트는 오오사까 대학 고오다 교수의 단식과 생식의 체험례에 대한 특
강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고오다 교수의 도움으로  말기암에서 회복한 두명의 여성환자가 
같이 참석하였는데 한 사람은 전에 유방암을 앓았던 52세의 부인이고, 또 한 사람은 갑상선
암을 앓았던 48세 부인 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한  때 오오사까 성인병센터에서 더 이상 
현대의학으로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할 만큼 비관적인 상태였습니다.  고오다  교수의 치료 
방법은 절식과 함께 독특한 생식법 그리고 보조적인 자연요법이었습니다. 이 환자들을 위한 
식단의 처방을 보면 한 끼니 당 현미잡곡 생가루 70그램, 생야채의 잎 250그램, 뿌리  250그
램, 볶음소금 4그램, 생수와 감잎차가 그 전부입니다. 이것도 하루  한 끼니 내지는 두 끼니
만 먹는데 두 끼니를 든다고 해도 하루 칼로리 섭취 총량은 약 900칼로리밖에 안됩니다. 칼
로리 영양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용납할 수  없는 짓이라고 하겠으나 그렇지만 이  방법으로 
현대의학에서도 포기한 말기암 환자가 약 2년 후에는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이런 방법으
로 모든 말기암 환자가다 치유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 영양학과 의학의 눈으로 볼 때
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단식과 생식- 건강 문을 열어주는 황금열쇠
  단식과 생식의 과학적 원리와 방법 및 그 효능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의학자들의 권위있
는 관련 문헌들을 참고하면 알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단식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조직 
내의 노폐물을 청소시켜 줌으로써 생체를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고 나아가서  생명력을 
증강시켜 줍니다. 
  단식하는 동안 칼로리 섭취가 중단되므로 신체 구석구석의 각종 노폐물과 찌꺼기가  칼로
리로 재활용되기 위해 연소되니까 몸이 저절로 깨끗해지고, 단식 자체가 세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되므로 세포들이 더욱  활성화되고 젊어집니다. 단식은 몸의  정화뿐만 아니라 
심리의 정화에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동양의학에는 '만병일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독이란  오염된 피를 말합니다. 모
든 질병은 근본적으로 더러워진 피에서부터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피는 쉬지 않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영양소와 산소를 운반하고, 역으로 탄산가스나 노폐물
을 폐나 신장을 통해 배설시키며 독성 물질이 간에서 해독되도록 중심적 역할을 합니다. 이
처럼 피는 몸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피는 
오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피가 오염되는데 관여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심리적 스트레스와 오염된 음식의  섭
취 그리고 유해한 자연 환경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문제될 수  있는 음식으로는 농약이나 
화학약품으로 오염된 식품, 가공식품, 조미료, 고기, 술, 백설탕, 정제염 따위가  거론되고 있
습니다. 
  피를 오염시키는 최대의 원인은 불안한 마음, 즉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는  콜레스테롤
이나 지방산 등을 과잉 생성시켜  이들이 피를 오염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콜레스테롤이나 
지방산은 평소 인체에 꼭 필요하고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이들이 그때그때 연
소되고 이용되어야 할텐데 필요 이상으로 몸에 축적되면 피를 오염시키는 주요 원인이 됩니
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혈액이 오염되면 피의 점도가 높아지고 끈적끈적하게  찌꺼기가 
섞인 것처럼 되어 혈관 속을 수월하게 흐르지 못하고 마치 끈끈한 시궁창 물이 흐르는 것처
럼 됩니다. 또 이런 노폐물들이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으면 혈관벽에 달라 붙어서 혈관이 좁
아지고 피가 순조롭게 흐를 수 없게 됩니다. 이 정도가  되면 말초의 미세한 혈관들은 막혀 
버리게 되어 피가 흘러갈 수가 없겠지요. 자연히 동맥경화나 고혈압이 생기게 되고 더 심해
지면 뇌출혈이나 뇌혈전, 협심증, 심근경색 등을 일으켜 이른바 선진국형 사망 원인 제1위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스트레스나 과로로 피로할 때는 대개가 고기 따위의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많이 취하고 여러 가지 스테미너를 보강하는 약제를 쓰는 쪽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힌 착각입니다. 
  자동차 엔진이나 카뷰레터에 찌꺼기와 노폐물이 많이 쌓여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고  있
는데 여기에다 연료를 부어 보았자 소용없는 일입니다. 사람  몸의 조직과 혈액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에서 여기에 영양분을 많이 공급할수록 그만큼 혈액의 오염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영양분을 많이 취하려고 하기 전에 몸 안의 쓰레기를 청소하고 피를 깨끗이 하는 데 먼저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영양분을 섭취한들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피를 맑게 하고 몸을 정화하는 물리적 방법으로는 단식과  생식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보
통 단식 4, 5일 째부터 몸이나 대변, 내쉬는 숨에서 지독하게 고약한 악취가 풍기는 데 이것
은 몸 안의 쓰레기가 연소되기 때문이며 어떤 쓰레기 타는 냄새보다도 더 지독합니다. 단식
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조그만 지식을 가지고 머리로 상상하여 비
판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꼭  단식을 한번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번 
경험하고 나면 "아! 세상에 이런 위대한 방법도 있었구나!"하고 감탄할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만나 본 환자들 중에는 몸이 극도로 오염되어 무거워 보이고 성인병들을 앓
아서 "당신은 단식을 한 차례  하고 나면 만사가 해결되겠습니다"라고 일러주어도  꼭 이런 
저런 약만 찾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이렇게 답답하고 미련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라는 심정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 "저 분은 단식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단식은 탁월한 효과가 있는 반면에 원칙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부작용이 따를 수 있으므
로 주의해야 하는 데, 원칙대로만 한다면 가히 "홍로일점설"이라. 몸의  모든 독소와 불건강
의 요인이 뜨거운 화로에 눈 녹듯이 녹아 버립니다. 
  내가 이처럼 단식의 효과를 지나칠 정도로 극찬하고 있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앞서 말한 고오다 교수와 같은 단식 전문가들로부터  단식이나 생식의 원리와 방법
을 배운 후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단식과  생식
을 안내해 왔는데,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뛰어난 효과가 있었습니다. 특히 영양과잉이나  몸
의 오염 때문에 성인병을 초래한 경우에 단식이나 생식은 실로 극적인 효과를 보여 주고는 
했습니다. 단식과 생식은 이제 의학의 가장 주요한 연구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
니다. 
  나는 감히 장담하건대 매년 한 차례씩 일주일 정도 단식을 모든 국민이 하게 된다면 그리
고 하루 한 끼니는 생식으로 대신한다면 질병의 발생건수는 지금의 십분의 일 이하로 줄어
들 것이고 따라서 환자수나 의료비 소모도 그 수준만큼  떨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만일 
이런 이야기가 단지 꿈이 아니라 전체 국민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모든 국민
의 심신이 개조됨으로써 나라의 운명이 크게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일본의 어떤 시민운동 단체들은 특히  연말연시의 망년회나 신년회 따위로  과음과식하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후지산 같은 데 들어가 수백 명씩 그룹으로 단식을 한다고 합니다. 
직장인이나 학생은 휴가나 방학 때가  단식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단식은 
휴가나 방학 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 중노동자가  아니라면 직장인은 결근할 
필요가 없고 주부도 가사일을 하면서 실행할 수 있습니다.
  단식을 처음 할 때는 반드시 단식전문가의 안내를 받을 필요가 있고 사전에 단식의 안내
서를 읽어 단식의 원리와 방법, 주의할 점을 숙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근래에는 한국의 각급 
의료기관에서도 단식을 지도하는 의사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고 전국적으로 단식원이  많이 
있으므로 이 분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습니다.
  장기간 인슐린을 투여 받은 중증 당뇨병, 부신피질호르몬의 장기 사용자, 심한 위십이지장 
궤양, 진행성 폐결핵, 체력소모가 심한 악성종양 및 말기암, 중증도 이상의 간경화,  심한 위
하수, 중증매독, 치매 환자들은 단식을 주의해서 해야 되며, 만일 하게 될 경우는 단식 전문
가의 안내를 꼭 받아야 합니다.
  실은 단식이나 생식은 환자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할 때 꼭  해야 합니다. 건강할 
때 실행하면 질병의 예방과 건강의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나는 한 끼니만 굶어도 못 참는데 어떻게 일주일씩이나 굶고 참을  수 있겠
는가?"하며 겁부터 먹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단식기간 완전금식을 하는 것이 아
니라 계속 물이나 차를 마시게 되며,  변형된 단식법에서는 야채효소, 포도즙, 섬유제제,  한
천, 미음 따위를 대용식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하면 큰 불편이 없이 누구나 
잘 할 수 있습니다. 단식이나  생식을 하게 되면 영양이 결핍되어  큰일나지 않겠는가 하고 
걱정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양학자 윤옥현 교수가 우리나라의 생식인, 채식인, 잡식인의 세 집단을 대상으로 각  집
단의 영양상태와 건강상태를 비교조사한 논문이 있는데 그 결과는 매우 재미있는 사실을 보
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은 보통 사람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영양상태와 건강상태가 가장 좋은 
집단이 생식인들이고 가장 불량한 집단이 일반 잡식인들입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혈액검사 
결과 헤모글로빈과 혈중 단백질 농도가 생식인 집단이 제일 높고 일반 잡식인들이 제일 낮
습니다. 물론 생식인들의 칼로리 섭취량이 1일 1,700 칼로리로 가장 낮았습니다만. 시력,  혈
압, 혈당, 간기능 검사와 같은 건강지표에 있어서도 생식인들이 제일 좋고 일반  잡식인들이 
가장 좋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데 작용할 수 있는 다른 요인으로 심리상태, 노동조건, 주거환
경, 기호품 탐닉 따위가 있겠지만 식생활 내용만을 가지고 볼 때는 생식과 채식이 잡식보다 
훨씬 건강에 좋다는 결론입니다. 이 성적은 90년대 초에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직접 조
사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질병의 치료나 건강의 증진을 위한 몸 다스리기에 있어서 가장 좋은 섭
생법은 곡채식 위주의 소식이며 더 적극적으로는 단식과 생식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치유력을 이끌어내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몸 다스리기 방법으로서 여러 가지 운동과  물리
적 요법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것들  역시 몸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겠습니다만 이와 
관련된 정보가 너무나 많고 복잡해서 다 응용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재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계속 시행하는 것이 좋겠지요.  다만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
는 방법 한가지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규칙적으로 산길이나 숲 속을 산책하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도 휠체어에 의지해서라도  규칙적으로 숲 속을 산책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힘에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산길을 걷는 것은 심신을 환희롭게 해 줄 뿐 아니라  자연
으로부터 질 좋은 생명에너지를 공급받게 해 줍니다. 
  산길이나 숲 속을 거닐면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나 '화해와 축복의 산책' 같은 방법
을 병행한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산책을 할 때는 나문 여러 가지 자연 대상들에게 일일이 "너를 사랑한다, 고맙다"와 같이 
말을 걸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자신에게 생명의 기를 주고 있는 나무나 모든 환경을 나와 더불어 역동하는 하나의 생명
의 빛으로 느끼면서 모든 사람, 모든 대상에 대한 큰사랑과 감사함이 가슴에서 충만하게 될 
때 그 순간 엄청난 자연치유가 일어날 것입니다. 
    단식과 생식이 난치병을 낫게 한다
  93년 만성간염으로 고통받고 있던 30대 초반의 여성 환자가 입원했는데 이 환자는 지난 5
년 동안 꾸준히 병원치료를 받아 왔고 입원도 여러 차례 했으나 좋아지지 않고 오히려 간경
화로 진행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간의 문제보다도 간을 염려하는 불안신경증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간 기
능 검사 수치에 극도로 민감해 있어서 검사 결과가 조금만 좋지 않게 나오는 날이면 며칠간
이나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입니다. 단백질을 많이 섭취하고  잘 쉬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특히 고기종류를 많이 먹고 활동을 억제하다보니 비만해져서 몸이 몹시 무거워 보
였습니다. 
  나는 약 1주간의 단식과 3개월간의 생식요법 그리고 야채 수프 음용을 실행하도록 했습니
다.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 기 다스리기 그리고 발포부항요법을 비롯한 몇 가지 보조적 물
리요법을 병행하게 했습니다.  6개월 후에는 아주 건강해졌고 지금은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94년, 협심증, 부정맥, 불안신경증 등으로 고통받던 40대  후반의 남자 환자가 입원했습니
다. 군대 고급 장교에서 예편한 후 한 회사의 간부  사원으로 취업했는데 그는 회사 생활의 
적응이 힘들어 늘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날 가슴이 조이는 통증발작 때문에 인근 대학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결과는 협
심증과 부정맥이었습니다. 계속 병원치료를 받고 있으나 부정맥이 개선되지 않아 항상 불안
했습니다. "심장마비가 일어날지 모르니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가 뇌리에 꽉 
박혀 있어서 좋아하던 테니스, 수영 등을 일체 중단하고 방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지내
고 있었습니다. 부정맥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 자신의 맥을 짚어  보는 것이 일과 중 제
일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하는 말 한 마디, 표정 하나가 환자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됩니
다. 이 환자도 심장마비 가능성을 경고한 의사의 말 한마디에 포로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의사들이 환자에게 말을 할 때는 퍽 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어
떤 의사든 환자로 하여금 안정된 생활을 취하게 하여 빨리 회복하도록 좋은 뜻으로 어떤 말
이나 하고 있겠습니다만. 
  이 환자는 심장내과에서 3년 가량 치료하고도 부정맥이 개선되지 않자 더욱 불안해진 나
머지 정신과로 옮겨 치료하게 되었습니다.  정신과에서 불안신경증, 건강염려증, 건강염려증
의 진단을 받고 그후 3년 이상  약물치료를 받고 있던 상태에서 나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 기 다스리기 등을 통해 극도로 움츠
려 있던 환자의 의식이 크게 확대되도록 했습니다. 약 1주일간의 단식, 한달 간의 생식과 야
채스프 음용을 통해서 장기간 약물에 의존하던 몸이 정화되도록 했습니다. 단중혈의 쑥뜸과 
발포부항요법 같은 물리적 요법을 병행했는데 입원 약 1주만에 부정맥과 흉통이 완전히 사
라졌습니다. 그는 어두웠던 길고 긴  터널을 빠져 나와 지금은 밝은  생활을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이상 두 환자의 사례를 보면서  마치 서양의학의 치료는 잘못된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대체의료의 방법만이 옮은 것 같은 인상을 주고 말았지만, 나는 결코 서양 의학적인 치료를 
부정하거나 과소평가를 하지 않으며  현대의학의 과학적 진단방법과 약물치료의 훌륭한 장
점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날 성인병이라고 불리는 각종 만성 퇴행성 질환자들의 병증이 단식이나  생식이 
금기가 아니라면 몸을 근본적으로 정화시켜주는 이런 방법을 병행할 때 치유력이 크게 상승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의 약물치료에 반응이 없던 만성 질환자들이 
단식이나 생식 같은 자연요법을 통해서 건강상태가 극적으로 좋아진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
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심신을 개조시키고 면역체계를 강화시켜주는 이러한 대체의료의 
방법들이 미래의학의 주요 주제로 채택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많은 훌륭
한 민간요법들을 내가 모두 실행해 보지 못해서 그 효능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나의 
경험에 의하면 발포부항요법, 쑥뜸, 야채수프 음용법 등은 몸을 정화시키고 면역력을 증강시
켜주는 데 매우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이런 요법들의 뛰어난 효능을 경험하면서 공식의학권 밖의 대체의료나 
민간요법 가운데 여기저기 귀중한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대체의료나 민간요법 가운데는 확실히 우수한 효능을 발휘하는 방법들이 더러 있고  또한 
이들이 현실적으로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지만 공식의료권에서는 이들을 지나치게 무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몇 해 전 일본의 국립암센터 총장을 면담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일부 의
사들이 활용하고 있는 대체 요법들이 현대의학도 포기한 암환자를 치료한 사례가 가끔 있는
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일언지하에 "그런 것들은 어떠한 과학적
인 증거도 없다"고 일축하는 것입니다. 
  모든 의학적 원리와 치유의 힘이 꼭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꼭 증명되어
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의학은 과학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모든 의학적 원리와  방법들이 
과학의 체계로 정리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과학적인 증거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고 해서 경험적으로 그 가치가 확인되고  있는 것들을 편견으로 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성실한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공식의료권에서 대체의학이나 민간의료의 내용을 잘 탐색해본다면 뜻밖의 훌륭한  아이디
어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좋은 내용이 발견될  때는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하여 현대 의학의 체계로 세련시킨다면 공식의학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해줄  것입니
다. 장구한 의학의 역사 속에는 하찮은 민간요법이 공식적  의학으로 크게 부각된 사례들이 
흔히 있습니다. 
    성(Sex)- 욕망으로부터 영성으로 
  다음은 성적 욕망의 그릇된 추구가 몸에 가져올 수 있는 폐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주제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커다란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특히 우리 사
회의 일부 남성들의 성에 대한 시각과 태도는 비뚤어진 점이 많이 있습니다. 정력과 성욕을 
증강시키는 데 좋다는 각종 약제나 물리적 방법에 대한 탐닉은 어떤 경우 거의 병적인 수준
에 가깝다는 우려를 낳고 있는데 이는 대개  성의 본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행위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성간에 우러나오는 애정의 무위자연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배우자끼리도 사랑스런 마음이 아닌 상태에서 단지  욕망만으로는 행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욕망으로만 행위할 때는 피차간의  심신에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하물며 약제 같은 
것을 써서 성욕을 키우고 무리한 욕망추구의 길로 가는 것은 마치 지쳐있는 소나 말을 채찍
으로 때려서 강제로 몰아 세우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황제내경의 가르침에서 보았듯이 생명을 좀 먹고 노화를 재촉하는  원인은 
정욕이 동하는 대로 정력을 소모하여 생명의 원천인 진기를 소진시키는 데 있습니다.  
  특히 배우자가 아닌 다른 대상들과 외도가 잦은 사람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할 점은 그러한 
행위가 자신과 배우자 그리고 다른 대상들의 생명의 등불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한다
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가 성병만을 전염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가혹한 것은 성에 
대한 피해의식 속에서 살고 있는 성행위 대상자들의 어두운 상념체가 자신을 통해서 배우자
나 가족에게 전염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둡고 부정적인 상념체가 어떻게 창조되며 그것이 얼마만큼 파괴적으로 작용하는가는 앞
서 '신념, 상념, 감정 다루기'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성적 희롱의 대상자들에게 흔히 따라 다니는 삶과 성에 대한 어두운 상념체들, 예를 들어 
분노, 슬픔, 외로움, 좌절, 피해의식 따위가 자신과 배우자에게 전염될 떄에는 그것이 고통의 
카르마(업, 인과응보)를 증강시키는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외도가  잦은 사람의 배우자나 가
족에게는 거의 틀림없이 분노나 피해의식 같은 어두운 상념이나 감정들이 잠복하고 있을 것
입니다. 이런 것들은 대개 전염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어둡고 부정적인 상념, 감정이 질병
과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확인한바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본능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동물의식, 사려 깊게 분별하는 지성의식, 그리고 
생명의 본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영성의식의 세 차원이 한데  어울려 있다고 합니다. 누구
나 이 세 차원의 의식을 나름대로 부려쓰고 있으나 대개는 그 가운데서 어느 하나가 중심의
식이 되어 의식활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진화된 일부  존재들은 생명의 근원에 회
귀하고자 하는 영성의식이 중심이 되어 살고 있지만, 매우  불행하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인
류는 동물의식의 지배하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물의식이 추구하는 삶이란 내가 어떻게 좀
더 배불리 먹을 것인가 그리고 배가 부른 다음에는 누구와 교미를 한번 해 볼까 하는  수준
입니다. 
  인간세계란 동물의식을 뛰어 넘어 영성의식으로 진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식을 정화시켜
가는 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의식의 차원에서 머물러 있는 한 참다운 행복이란 절대
로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성과의 교감도 동물의식의 수준을 넘어 영성의식의 수준에서 
영적 바이브레이션(파장)으로 이루어질 때 봐 높은 차원의 행복감이 경험된다고 합니다. 사
실 동물적인 성관계는 인류가 참으로 추구할 바가 아니며 빨리 졸업하여 마쳐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높은 차원의 의식 가운데 있는 어떤 존재들은 이성간에 손만 잡아도, 더 진화된 존재들은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동물의식의 수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황홀한 행복감을  체험
하게 된다고 합니다. 
  내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성에 대한 동물적 탐닉이 생명력을  쇠진시키고 
나아가서 영적진화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쪽으로 작용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물리적 현실 다스리기
  개인의 신념과 집합의식이 창조한 개인적 현실과 공동현실을 받아들여 경험하는 것이  물
리적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사는 삶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자기가 창조한 현실을 받아들여 경험하기입니다. 현실을  1백 퍼센트 받아들여 완벽
하게 경험할 수 있는가 하면 받아들이는 둥 마는  둥 경험하는 둥 마는 둥 할 수도  있습니
다. 
  받아들여 경험하는 정도와 삶에서 책임을 지는 정도는 정비례합니다. 물리적 현실 다스리
기란 현실을 잘 받아들여 완벽하게 경험하기 위한 의도와 노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현실적으로 몸을 가지고 있고 날마다 먹고 마시고 숨을 쉬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현실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도서관을 가득 메운 수백만 권의 장서들은 대부분 이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소
산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잘  먹고 잘 입고 재산과 명예를  얻는 정도의 물질차원의 
행복에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도 떠나고 죽음까지도 떠나버린 무한한 행복과 영생의 생명자리인 생명의  근
원에 안주하여 내 뜻대로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완벽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
니다. 물리적 현실 속의 삶이란 그것을 잘 들여다보면 결국  이 길을 지향해 가는 수단이자 
방편입니다.  다만 내가 망각하고 있을 뿐 나는 바로 이대로  생명의 근원이므로 나의 내면
에서는 내가 이것을 자각할 때까지 이 길로 나를 인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한시라도 
빨리 자각하여 한정 없는 근원으로서 자기 뜻대로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짐승 같은  운명에
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물리적 현실세계에서 진정 자기 뜻대로, 자기의 의도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
을까요? 
  자기의 뜻과 자기의 의도가 아닌, 왜곡된 대중의식의 흐름 속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쉽쓸
리며 살아갈 때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좌절과 기진맥진뿐일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할 목표와 방향이 뚜렷하지 않을 때는 우와좌왕 하다가 그릇되거나 어긋난 길
로 들어서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벽을 자기가 스스로 지어
내고 결국은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왜 그렇게 되고 있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삶에서 목표와 방향이 없다면 의미없는 일과 의미없는 일에서 벗어나 있는 것과의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다가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맙니다. 
  "모든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와 같이 무기력해지거나 의기소침해진다면  그것은 곧 목표
와 방향을 다시 점검해보라는 신호입니다. 
    나에게 가장 맞는 목표는 무엇인가?
  대체로 사람들은 뚜렷한 목표를 갖는 것이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는 있지만 목표
에는 자기에게 맞는 목표가 있고  어긋난 목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목표를 정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바른 방법과 그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같은 일이라도 갑에게는 맞는 목표가 될 수  있으나 을에게는 그른 목표가 될 수 잇습니
다.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어긋나는 목표를 껴안고 다니면서 그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는
다고 불평만 합니다. 
  아바타 프로그램의 일부인 '다시 떠오르기(Resurfacing)'에는  '의도적으로  살기'라는 항
목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극장에 가고 싶은데 혼자 가기는 싫다,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으나 무엇 하나 
희생하기는 싫다, 돈을 벌고 싶으나 일은 하기 싫다, 몸무게를 줄이고 싶지만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포기하기는 싫다. 학교에는 가고 싶지만 공부하기는 싫다. 
  이렇게 앞뒤가 어긋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 혼란을 지어낸다. 혼란은 압
도적으로 커지게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 결과는 곧 제약된 성취, 한정된 
성공, 나쁜 건강 그리고 불행이다."     
  길거리에 있는 카 센타의 광고판에서 휠 얼라인먼트(Wheel Alighnment)라는 안내문을 보
신 적이 있나요?
  이것은 네 개의 자동차 바퀴가 오로지 정면으로 향해지도록 같은 방향으로 바로잡는 일을 
말합니다. 자동차 바퀴들의 방향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게 배열되어 있다면 자동차가 
주행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나의 깊은 내면에서 지향하는 요구와 삶의 목표가 한 방향의 자동차 바퀴들처럼 어긋나지 
않게 정합 되어야 바른 목표입니다.  따라서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는  것은 기분 내키는 
대로 또는 되는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땅투기하는 식으로  일이 되어가는 분위기를 보아 
가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에게 맞
는 목표를 정하는 바른 방법은 머리로 계산하고 따져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 깊은 곳
에서 강하게 요구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직관을 통해서 전달되는 일종의 메시지와 같은 것입니다. 
  맞는 목표란 그 일을 생각만 해도 신이 나고 힘이 솟아 오르며 그 일을 할 때는 시간  가
는 줄도 모를 만큼 뜨거운  환희심이 일어나는 목표입니다. 이런 목표는  그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넘치기 때문에 저절로 몰두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목표
는 심신을 건강하게 해주고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어 줍니다. 
  어긋난 목표란 어쩔 수 없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끌려 가듯이 따라가야만 하는 목표입니
다. 속마음으로는 싫어하면서도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 추구하는 목표는 곧 바로 스트레스가 
따르고 대개는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일이란 참으로 재미있어야 하고 즐길 수 있
어야 하며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자아상(Identity) 즉 명예나 지위나 위신 따위를 드높이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은 
꼭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나는 몇 해 전 미국 아이오와주 페어필드에 있는 아유르베다 메디칼 센터에서 인도 전통
의학인 아유르 베다 의학에 대해서 몇 주 동안 연수 교육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이 교육에
는 약 40여 명의 의사들이 참여했는데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인들이었습니다.  이른 아
침부터 밤늦게까지 학생의 입장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사생활이나 속사정까지도  털어놓을 
만큼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모두들 자신의 삶에 대해 황
폐감을 느끼고 있고 또한 무척 지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조금  놀랐습니다, 
미국에서 의사라는 직업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상류직업이라고 알고 있으나 실은 많은 의사
들이 이처럼 자기 직업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있고,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으니 말
입니다. 미국 의사들의 평균수명이 전체  미국인의 평균 수명보다 약 10년  내지 15년 가량 
낮은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그 일이 재미있고 즐거워야 귀한 직업인 것
입니다. 
  
    신입 은행원이 10년만에 총재가 되다
  자신의 내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목표를 정한 다음 그것이 현실 세계에 틀림없이 창조되도
록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창조하겠다는 확실한 의도와 의지,  그것이 실현되는 데 대한 1백 
퍼센트의 믿음, 그리고 목표에 대한 주의의 집중이 있어야 합니다. 
  주의의 집중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다 마음의 주의
를 집약시켜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굳어진 주의 입자 곧  물리적인 노력을 집중하는 
일입니다. 
  즉 의식적인 주의(Conscious Attention)- 목표가 이미 성취된 상태의 영상적 이미지에 마
음을 집중하는 노력-를 집중하기와 물리적인  주의(Physical Attention)- 목표 실현의  끝을 
볼 때까지 물러서지 않고 지속시키는 물리적인 노력-를 집중하기의 병행이 거의 모든 일에
서 요구되는데, 이러한 두 종류의 주의는 결국 신념의 필터를 통과한 근원의 에너지입니다. 
  
  몇십 년 전 뉴욕 맨하탄의 한 은행에 신입행원으로 채용된 지 10년만에 그 은행의 총재가 
된 유태계 미국인의 경우가 성공적인 주의 집중의 한 본보기가 되겠습니다. 
  총재로 취임하던 날 기자들이 질문했습니다. 
  "신참 은행원에서 출발하여 10년만에 총재가 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인데 그 비결이 무
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나는 이 은행에 들어온 첫 날부터 총재였소"
  일반적으로 신입 은행원들의 주된 관심은 은행창구에서 고객에게 서비스를 잘 해주고  일
과가 끝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봉급을 많이 받는 것을 좋아하는 정도이겠지만, 이 사람
은 입사한 첫날부터 은행총재가 가져야 할 수준의 관심, 이를테면 은행 전체의 이윤의 증식
과 합리적인 경영, 미래의 세계 경제에 대한 예측 따위에 주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처음부
터 자신이 총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직원보다도 은행의 전체 사정을 잘 알고, 
총재다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고 따라서 뛰어난 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는 자신이 총재가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도 기적적인 일도 아니며 매우 당연하고도 자연스
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돈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물리적인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으로서 돈 만한 것도 없을 것입
니다. 돈이 필요한 만큼 항상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
한테 돈이 부족하니 더 많이 있으면 좋겠다고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이기
적인 문명구조는 남과 경쟁하고 싸워서 이길 때  명예와 힘과 돈을 얻을 수 있는 구조입니
다. 인류의 집합의식 가운데는 틀림없는 이러한 구조를 용인하는 신념이 있을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무척 애를 쓰고 있는 데도 돈이 생기지 않는다면 왜 그런가, 그 이유를 
잘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돈을 갈망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오
래 전부터 돈을 배척하고 저항하는 대중의식에 나의 의식이 한데 어울려 있지는 않은지 말
입니다. 
  만일 이와 같이 돈과 부자에 대해서 저항하고 부정하는 신념에 젖어 있으면서 돈이 안 생
긴다고 불평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의 실패를 은근히 좋아하여 이를  용인할 때, 또는 남의 성공을  은근히 싫어하여 이를 
시기할 때 자신의 마음속에 미래의 실패의 씨를 심어 놓게 됩니다. 어떠한 남의 실패도 맘 
속으로 허용하지 말며 모든 남들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받아들일 때 마음속에 미래의 성
공과 풍요의 씨를 심게 됩니다. 
  돈이란 나의 신념, 상념의 상징이며 나의 신념의 정보가 실린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돈을 
몇 백, 몇 천 만원 같은 수량적 단위로 환산하지 말고  나의 의식 속의 풍요와 행복의 에너
지로 보는 것이 돈을 바라보는 가장 무난한 관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돈 천 원을 주고 
받는 거래를 할 때도 그것을 보잘것없는 화폐단위로 여기지 말고 이것을 풍요와 행복이 충
만한 생명의 에너지로 느끼며 사용한다면 좋겠지요. 어떠한 다른  인상도 떠올리지 말고 행
복감과 사랑의 감정만을 돈에 실어서 주고받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돈은 선과 악의 잣대로 저울질할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사물도 얄팍한 지식으로 
좋다, 나쁘다 선악시비를 가릴 것은 없습니다. 요망과 저항을 떠나지 못한 사람이 내리는 판
단이란 거의가 다 도리에서 빗나간 것입니다. 
  사람이나 다른 사물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돈을 대할 때도 그것을 배척하는 저항도 갖
지 말고 반대로 그것을 집요하게 쥐려는 욕망도 떠나 자연스런 에너지의 흐름으로 이해하고 
이에 감사하며 바라볼 수 있을 때만 돈으로부터의 고통에서 항상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좌절을 뛰어넘는 위대한 사람들 
  미국 플로리다주 게인스빌에서 주로 아바타 코스와 같은 의식 탐구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암이나 에이즈 같은 난치병 환자들을 도와주고 있는 하녹 탈머(Dr. Hanock Talmor)라는 의
사가 있는데 그는 지난 10년 동안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
습니다. 
  "암 환자를 다루는 가운데서 나는 그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째 그룹은 '암은  낫기 어렵다'라고 믿고  있는 대중들의 집합의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나머지 자신의 병에 대한 그러한 신념을 바꾸지 못하는 환자들이다. 이 환자들은 죽을 때까
지 가장 심한 고통을 경험한다. 
  둘째 그룹은 그러한 집합의식을 한편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래도 자기는 치유될 수 있
다고 믿는 환자들이다. 이들은 어느  정도 정신적 및 감정적 개선을  경험하게 되며 임종할 
때까지 비교적 덜한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셋째 그룹은 암에 대해 암은 낫기 어렵다와 같은 절망적인 집합의식 자체를 결코 받아들
이지 않는 환자들이다. 그들은 암을 창조해낸 자신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파헤쳐 보고 이를 
발견하고 바꾸며, 자신의 병과 삶 전반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이런 환자들이 바로 어려움
을 극복하는 사람들이며 흔히 몸에서 암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치유를 경험한다. 
  마침내 나는 모든 질병의 최고의 치유는 자기의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을 배우는 데서부터, 
즉 자기가 바로 자시의 현실적 창조들의 근원임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결론짓게 되
었다. 자기가 자기의 삶과 건강의 근원이라는 신념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삶과 건강에 책임
을 질 때 기적과 치유는 예외의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거쳐 나는 환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의식을 다루는 것이 치유에 이르는 가
장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고 일러주기 시작했다."
  이 의사가 통찰하고 있는 바는 다만 질병의 치유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IMF 
관리체계이기 때문에 심각한 경제위기를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절망적인 집합의식을  뚫고 
나가 자기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기업인이나 정부 책
임자나 일반 시민이나 위의 세 가지 부류의 신념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가 첫째 그룹의 신념을 선택한다면 그는 "지금의  경제난국은 절망적이다"라는 집
합의식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나머지 자기 삶에서 심각한 고통을  경험할 것이나, 셋째 그룹
의 신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 그는 지금  같은 경제 위기에 대한 대중들의  지배적인 
신념 곧 "한국의 경제적 상황은 매우 어렵다"와 같은 절망적인 집합의식  자체를 결코 받아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창조한 자신의  신념을 탐색하고 발견하여 이
를 바꿀 수 있으며, 자신의 고통과 삶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고 보면서 모
든 책임을 자기가 지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용기있는 사람들이 바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
적 같은 번영을 다시 이루어 내는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삶에서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작용하는 세 가지 요소는 첫째 상념의 
힘, 둘째 말의 힘, 셋째 표정의 힘입니다. 
  매일 가장 많이 가장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랑과 조화 그리고 행복과 번영에 대해서
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매일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강조해서 하는 말이 사랑과 조화 그리고 행복과 번영에 대해
서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날마다 내 얼굴의 표정과 나의 몸짓은 사랑과 조화 그리고 행복과 번영의 모습을 보여주
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넷째 마당 - 죽음에서 벗어나기 
    죽음을 넘어 부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
니다. 부활의 가장 큰 의미는 몸이 죽더라도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음을 여실히 증거한 것
이 아닐까요? 달마대사가 부활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마대사
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포교활동을 하는데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고 위대한 사람은 꼭 시기심이나 박해의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달마를 독살
하려고 다섯 번이나 시도했지만 독약을 마시고도 몸에서 독이  받지 않아 죽지 않았습니다. 
여섯 번째는 "내가 중국에서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인연이 다됐다"고 생각하고 독을 받고
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시신을 입관해서 웅이산에 매장했습니다. 
  그 무렵 위나라의 송운이라는 사신이 인도에 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파미르 고원
을 넘어 오는데 웬 수염이 덥수룩하고 늙수그레한 승려가 긴 지팡이를 어깨에 걸쳤는데 거
기에 짚신 한 짝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송운이 수인사를 하며 물으니  그 유명한 달마라고 
합니다. 위나라에 돌아와 들으니 달마는 이미 독살되어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이상하게 
여겨져 묘소를 파 보았는데 관속에 시체는 간 곳이 없고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는  것입
니다. 
  예수님과 달마대사가 보여주고 있는 부활은 몸 너머에 영원히 죽지 않는 진짜 생명이 실
존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예수만 부활하고  달마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
라 우리들 모든 사람의 생명은 본래 죽음이  없으므로 누구나 다 부활한다고 볼 수 있습니
다. 부활한다기보다는 우리 생명은 처음부터 아예 죽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몸이 죽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겉모양만 바뀔  뿐 내 생명이 죽는 일은 결코 없습니
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육신으로서의 나만이 빛과 같은 
실체로서 존재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지배적인 신념은 "죽음은 내 생명의 끝이다,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쓸 데 없다, 죽은 다음에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잘 
먹고 잘 입고 즐기면서 살면 그만이다" 이런 식입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은 내 생명의 끝이다"라는 생각이 나오는 곳이나, 당신의 몸이 나오는 곳이나, 나무, 
산, 들, 우주 삼라 만상 모든 존재가 나오는 곳이나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면 모두 같은 곳, 
같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우주가 창조되어 나오는 근원이요, 내 생명의 근원입니다.  
  사실은 몸이 내가 아니라 그 자리가 바로 나입니다.  몸은 단지 그 자리에서 내가 조각품
을 만들어 내듯이 창작해낸 창작품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내가 만들어낸 조각품에 너
무 애착을 가진 나머지 그 속에 들어가 꽉 쳐박혀  지내왔습니다. 이것에 대한 애착이 너무 
지나쳐서 이젠 이 조각품이 바로 나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조각품을 지어낸 근원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객지에 나가 사는 동안  고향집을 깜빡 잊어버릴는 것처
럼 말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로 알게 될 때 비로소 내 몸의 죽음이 곧 내 생명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
실을 깨닫게 됩니다. 근원으로서의 내가 조각품을 창조해 보았듯이 근원으로서의 나는 언젠
가는 그 조각품을 버리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근원인 내가 조각품의 경험을 끝내고 조각품
을 버리는 경험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몸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몸의 죽음이  근원인 
나의 죽음은 아닌 것입니다.
  근원은 원래 죽음이 없습니다. 
  만일 근원으로서의 나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오직 '경험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신념대로 지어낸  몸이라는 창조를 내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
다. 
  나는 내 몸의 삶도 경험할 수 있고 내 몸의 죽음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나 철학, 사상, 이념 같은 다양한 신념체계들을 음미하고 감상할 수  있습니
다. 마치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듯, 그 중에 내 마음을 끄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푹 빠져 
버리듯이 말입니다. 
  신념체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념체계가  마음에 든다면 거기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신념대로 경험하게 되겠지요. 
  당신의 몸이 바로 당신이라는 신념에 빠지게 되면 당신은 몸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면서 
낳기도 하고 죽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몸을 하나의 창조물로 여긴다면, 그
리고 그것을 만든 존재가 바로 당신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다면 몸이 낳고 죽는데서 한 발짝 
떨어져서 당신의 몸을 작품을 감상하듯이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몸이라는 창조를 지어내는 근원이 바로 당신입니다. 이런 사실을 당신이 가슴에 사무치도
록 느끼고 있다면 당신에게 죽음이 찾아 올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죽으려 해도 당신의 몸
만 사라질 뿐 당신의 생명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는 그동안 병원에서 많은 사람들의 임종과 주검을 보았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죽을 
때 고통스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차마 보기 괴로운 단발마적 발악을 하기도 
합니다.  
  시신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시신이 보여주는 얼굴은 생전의 얼굴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이라도 일단 죽고 나면 대부분은  시체 옆에 있기를 싫어합
니다. 쳐다보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채  편
안하게 죽는 분도 있습니다. 
  과거의 많은 성직자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주검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찬란한 광명을 보여주는가 하면 더러는 자신의 시체를 광명의 불로 스스로 태워 소멸시키기
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그가 죽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생전에 아
무리 큰소리치던 영웅호걸도 죽어가는 모습을 위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욕망,  저
항,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관용과 자비심으로 충만해 있다면  죽을 때까지 그의 얼굴은 
결코 고통스럽거나 추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죽는 순간까지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아마 그는 고통스런 과정을 겪게 
되겠지요. 그런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곱게 잘 죽어야 겠다는 소망을 품
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즉 인생이라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준비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곱게 잘 죽기 위해서는 곱게 잘 살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잘 죽기 위해서는 임종 때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인생의 결산은 임종 때 먹는 마음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죽음 다루기니 생명의 근원과 하나
되기니, 말하고 있는 것은 임종 때 마지막 마음을 잘 먹기 위한 훈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
닙니다. 평소에 제법 양심도 바르고 의롭게 살았다하더라도 죽는  순간에 마음을 잘못 먹으
면 사후의 자신의 의식세계에 큰 혼란을 빚게 될 것입니다. 
  "천지만물은 나와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는 오직 하나의 생명이며 여기에는  무한한 행
복, 지혜, 자비가 충만해 있고 이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빛이다"
  이런 생각이 임종 때 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마음이 아닐까요? 평소에는 이런 생각을 안
하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갑자기 떠올리기는 힘든 일이겠지요.  그러므로 평소에 그런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늘 이런 생각이 자신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훈련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죽는 순간 오로지 이런 마음으로 충만해 있다면 그는 몸이 죽더라도 생명이 죽지  않음을 
경험할 것이고 그의 죽음은 편안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죽음에서 해방되기
  죽음이란 내 생명이 모두 끝나버리는 종착역이 아닙니다. 
  또한 죽음이란 내가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어떤 함정도 아닙니다. 
  흔히 삶이란 무상하다고 합니다. 
  삶만 무상한 것이 아니라 죽음도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이란 항상이 없는, 한 순간도 그대
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삶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듯이 죽음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리얼리티는 삶이라는 리얼리티와 마찬가지로 나의  의식의 차원에 따라, 나의 
신념의 내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가변성의 대상입니다. 
  삶이 하나의 한정된 창조이듯이 죽음 또한 하나의 한정된  창조입니다. 내 생명의 근원을 
한정없는 백지에 비유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한정된 창조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근원으로서의 내가 한정된 창조들을 지어낼 수도 있고 반대로 지어내기를 그만둘 수도 있습
니다. 나는 모든 창조들을 다 다루어 내고 조절할 수 있는 영원한 근원이자 배경입니다. 
  죽음이라는 창조 역시 내가 지어낼 수도 있고 내가 지어내기를 멈출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머무르는 의식의 차원, 혹은 의식의 수준을  의도적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
다. 모든 존재들이 따로 분리되고 독립되어 보이는 개별의식, 자아의식의 수준에 내가  머무
를 수 있는가 하면 모든 존재가 통합되어 하나의  생명으로 느껴지는 우주의식, 순수의식의 
차원에 내가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차원의 의식 중 어디에 머무를 것인가는 내기 의
도하고 결정할 일입니다. 
  현상계의 어떤 차원에서 볼 때는 우리 몸의 수십조 개의 세포 하나하나는 독립된 생명의 
단위입니다. 그러나 내 몸으로부터 세포들을 낱낱으로  떼어내서 분리시킨다면 그것들은 각
각의 생체들로서 존립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 가운데서 서로 분리되어 보이는 사람들, 동물들, 나무들, 별들........ 우주의 모든 존재
들이란 우리 몸의 세포들 같은 것이어서 이들은 낱낱으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너와 내가 서로 떨어져 존재하고 있다는 분리감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이란 세포 하나하나가 나서 죽고, 나서 죽고를 계속하고 있는 흐름인 것처럼 우
주 또한 낱낱의 존재들이 나서 죽고를 반복하고 있는 흐름입니다. 저 밤하늘에 반짝이는 아
름다운 별들도 나서 죽고 하는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나서 죽는 일을 계속
하고 있을지라도 우주라는 생명자체는 영생합니다. 
  나와 우주는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끝끝내 버리지 않기로 고집한다면 나는 나
고 죽는 일을 계속하고 있어야 하므로 항상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있게 되는 원인,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원인은  분리된 '나'라는 생각, '내가 따
로 있다'는 생각입니다. 반면에 죽음을 없애는 방법, 즉 내가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분
리된 '나'라는 생각,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소멸된 의식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
다. 
  내가 죽음을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이 환상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나는 꼼짝 못한다는 생
각이 바로 환상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거의 모든 인류에게 정서적으로 가장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의 실체를 알 수 없으니까 막연하게 그것을 두려운 대
상으로만 보게 되고 따라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시됩니다. 
  많은 임종 환자들이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어가는 과정과 죽는 방법에 대해서 더 두려움
을 느낀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해 탐구하는 의사들의 관찰에  의하면 모든 임종환자들은 자
신의 죽음이 임박해 올 때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임종환자들
은 얼마 안 가 자기가 죽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가족들 앞에서 그 얘기를 털
어 놓을 수 없으니 혼자서 마지막을 힘들게 보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문가들이 한결같
이 강조하는 바는 환자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처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죽음의 가능성을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환자의 불안과 두려움을 줄여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죽을 때의 육체적 고통도 훨
씬 적어진다고 합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다룰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병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에도 죽음을 원만하게 받아들이기 위
해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환자에게는 병과의 투쟁을 그만 두고 몸에 대한 집착에
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활의료 4단계- 죽음 다루기>
  미국 텍사스 사이먼튼 암 연구소에서 암환자들을 위해 개발한 독특한 심리 요법 가운데는 
일종의 죽음 다루기 훈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로 임종을 눈  앞에 둔 환자들을 돕기 위
해 개발한 것인데 이 방법의 중심 사상은 "모든 일은 자신의  신념대로 경험한다"는 것입니
다. 죽음과 사후세계도 자신이 믿는 그대로 체험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일종의 긴장이완과 상상법인데 환자의 신앙이나 신념 등을 참고하면서 그 연습 내
용을 조금씩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대체로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 장례식의 과정, 천국으로 가는  과정, 또는 인간 세상에 다
시 태어나는 과정 등을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선택하고 자신이 믿는 대로 상상하는 것
입니다. 이 훈련을 되풀이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이 훈
련을 되풀이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 전투기 조종사가 고엽제를 공중살포한 일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
난 뒤 그는 갑상선암이 걸렸습니다. 임종을 눈앞에 둘 정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그는 극적으
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죽음 다루기' 훈련을 열심히 한 덕분에 말입니다.  
  그러면 사이먼트의 죽음 다루기 훈련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살펴봅시다. 이 훈련은 마치 
죽음 예행 연습 같은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에 단지 죽음의 공포를 조금 경감시켜주는 정도
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훈련이 기대하는 궁극적 목표는 
몸은 죽어도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고 나아가 죽음에서 영원히 벗
어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내 생명의 본체는 죽음이 없는 영생
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처음에는 옆 사람이 천천히 읽어주거나 녹음기에 녹음해 두고 그것을 들으면서  연습하면 
되지만 자주 되풀이해서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그러한 도움 없이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됩니다. 
  1. 조용한 분위기에서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2. 긴장을 풀기 위해 1-2분간 천천히 아랫배로 호흡한다.
  3. 긴장이 풀렸다고 생각되면 이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4.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상상해 본다. 자기의 시신 옆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을  그려본
다. 그들이 자기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며 어떻게 느
끼고 있는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충분한 시간 동안 상상해 본다. 
  5. 자기 시신의 입관 절차와 이어서 장례의식이나 추도행사를 그려본다. 여기에는 누가 참
석하고 있는가?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어떤 느낌들을  가지고 있는가? 역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상상해 본다. 
  6. 자기의 몸이 죽은 후에 자기 의식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몸이 죽은 다음에 자
기 의식이 찾아간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의식을 보낸다. 그곳에서 조용히 머물면서 몇 분 동
안 그 곳을 느낀다. 
  7. 이제 자기의 의식을 우주 가운데로 떠나 보낸다. 우주의 근원이자 내 생명의  근원이라
고 생각되는 곳에 자기가 있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즉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는 순수의식의 
차원에 있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거기에 머문다. 
  8. 이제 여기에서 지난 인생을 회고해 본다. 자기가 즐겨서 한 일은 무엇인가? 생전에  꼭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무엇이었나? 무슨 일  때문에 분노했는가? 그 분노를 지금도 가지고 
있는가?
  9. 이제 당신은 생명의 근원에 안주하겠는가? 아니면  어떤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겠는가? 
그것도 아니면 다시 새로운 몸을 가지고 이 세상으로 돌아와 새 인생을 설계하겠는가? 생명
의 근원이나 천상에 안주하기로 결정한다면 그곳은 이러할 것이라고 당신이 이해하고  상상
하는 대로 그곳의 인상을 떠올려 충분한 시간을 들여 경험하라. 
  10. 만일 인간 세상에 다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면 지난 생과 같은 부모를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새로운 부모를 선택하겠는가? 새로운  부모의 모습은 어떠하며 어떤 인품을  지니고 
있는가? 형제 자매는? 그들은 지난 생과 같은 형제 자매인가? 직업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새로운 인생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새로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
엇인가? 새로운 인생 전반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본다. 죽음과 재생이 자기 삶 속에서 계속 
이어져 되풀이되고 있음을 음미해 본다. 
  11. 마음속으로 이미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경험했으니 인생의 과정에서 죽음과 재생이라
는 것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구나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라.  이 과정에서 충분한 
시간 동안 그것을 경험한다. 
  12. 천천히 눈을 뜨고 현실로 돌아와 완전히 깨어난다. 
  
  이 훈련을 경험해 본 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죽음을 상상해 보니까 지레 짐작으로 겁을 
먹고 있던 것과는 달리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두렵거나  고통스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장례식을 상상했을 때는 "아,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가족과 친구들은 그런 대로 잘 
살아 가겠구나" 싶어 마음이 편안해지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나 천상에 머물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내 몸이 죽더라도 내 생명 자체는 조
금도 훼손됨이 없이 영생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인간 세상에만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
간 세상을 떠나니 더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 있는 것을 자각하였다고 합니다. 
  재생을 결정한 환자들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자신이 원하는 인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을 상상해 봄으로써 내면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죽음이야말로 자기가 원하는  인간으로 
다시 나아가게 하는 새로운 길목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꼭 임종 환자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원할 경우 건강한 노인이나 심지어 젊은이들에게도 이 
훈련을 시켜보았는데 그들 역시 죽음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따라서 심
신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방법을 일상
생활에서 활용해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사관에는 대개 종교적인 신앙이나 철학적 신념이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죽
음 다루기를 안내할 때는 어느 특정 종교를 전제하거나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환자가 그 종교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믿게 된다면 상관이 없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는 오히려 환자에게 정신적 혼란과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결국 임종환자
를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빠뜨리는 셈이지요. 
  특정한 종교나 신념의 강요가 마치 폭력처럼 작용해서 환자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환자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념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몸은 죽더라도 생명은 죽지 않는다. 
  평소에 양심이 바르고 곱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죽을 때 마음 잘못 먹으면 사후의 의식의 
차원이 퇴락하겠지만, 평소에 조금 잘 못 살았다고 하더라도 "나와 더불어 천지만물이 하나
의 생명이며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빛이다"와 같은 마음을 놓지 않고 임종을 맞이한다면 그
의 의식은 높게 진화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 자기  몸이나 가족이나 자기  소유물 같은  
모든 물질적 존재가 실은 허상이고 착각이며 모두 텅 비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제일  좋
습니다. 이 텅 빈 허공 가운데  참 생명의 세계가 있는데 여기에 내  생명의 뿌리인 순수한 
빛이 가득 차 있다는 영상적 이미지를  관찰하면서 한시도 여기로부터 의식이 떠나지 않는 
것이 제일 편하고 좋을 것입니다. 
  몸이 죽을 때 자기의 의식만 떠나갈 뿐 가족, 재산,  권력, 명성 같은 일체의 소유는 하나
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생전에 내 것이라고 고집했던 소유가 내 것
도 네 것도 아닌 것이고 내가 한때 잠시 관리했을 뿐입니다. 
  내 몸도 실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몸도 바로 보면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며 내가 한 시절 
잠깐 관리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죽을 때  자기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임종 때 
마지막으로 먹고 있는 마음뿐입니다. 즉 의식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가지고 가는  마음
이 생전에 소유하던 하늘같은 부와 명성보다 훨씬 귀중한 것입니다. 
  생전의 부모도 배우지도 자식도 자신의 영원한 의지처가 못됩니다.  그들 역시 한정된 시
간 동안만 조금 의지가 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영원하고도 완전한 의지처야말로 내 생명의 
고향인 순수의식입니다. 순수의식이란 어떤 논리가 아니라 곧 생명입니다. 여기에는  무한한 
행복, 지혜, 자비, 능력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무한가능성으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떠나 영생하는 생명의 빛입니다. 
  누가 지금 임종의 문 앞에 있다고 합시다. 
  "당신은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오직 "그렇다"입니다. 두 번째 똑같은 질문에 대해서도 그의 유일한 답은 역시 
"그렇다"입니다. 백번 천번을 묻더라도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답은 오직 "그렇다"뿐입니다. 
  암이나 에이즈 같은 난치병도 내 생명과  더불어 평등 무차별한 영생하는 생명의  빛입니
다. 우주의 존재 가운데 생명의 빛이  아님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투철하게 믿고  느낀다면 
암세포까지도 조화로운 생명의 빛인데 어떻게 그 사람의 생명을 해치겠습니까? 가슴에 사무
치는 굳센 믿음은 천지우주를 움직여 그의 생명을 옹호할 것입니다. 설령 그의 몸이 죽는다
고 하더라도 이러한 믿음을 오로지 간직한 채  죽는다고 할 때 그의 신념대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기필코 얻을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자각하기 
  현실적으로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일과 함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생사대사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일생에 가장 큰 일이 생사를 해결하는 
것, 곧 생사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이와 같이 생사를 떠나 영생을 얻는 것과 같은 완벽하고도 구경적인 근본
에다 두지 않고 어정쩡한 어떤 중간 정도의 성취를 목표로 하게되면 그 중간 목표도 잘  이
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살아가는 동안 항상 어려움에 걸리고 맙니다. 
  가령 내가 몸이 아파서 낫고자 하더라도  생사를 뛰어넘어 영생을 얻겠다고 하는  최상의 
궁극적인 데다 목표를 두고 정진하면 몸이 아픈 정도는 부수적으로 저절로 해결되고 말 것
이나 겨우 몸 아픈데다만 마음을 두고 있을 때는 몸도 해결이 잘 안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평생동안 자기 몸뚱어리, 자기 가족 몸뚱어리 뒷감당만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어언간 문득 
죽음이 눈 앞에 다가섭니다. 그러므로 편안하고 아름답게 잘  죽기 위해서 나아가서는 생사
를 완벽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다루는 근본적인 방법이자 최상의 방법은 바로 생명의 근원을 자각하기입니다. 이 
방법을 온전히 잘 하고 있다면 이제껏 한 다른 말들은 다 군더더기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모양이 있으면 살아있고 모양이 없어지면 죽었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실
은 모양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내 몸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내 생명의 근원은 본래가 
죽음이 없는 영생의 생명이라는 것을 꼭 이해해야합니다. 
  들판에 세워진 집이 오래되어 허물어지면 집은 사라져 보이지 않더라도 들판이라는  근원
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듯이 내 생명의 근원은 내 몸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내
가 태어나고 죽는 것은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의 무한한 바다 위에 작은 파도가 하나 떠올
랐다가 사라지는 것이나 같습니다. 수백 억의  물거품이 떠올랐다가 꺼졌다를 계속하더라도 
그 본질인 바닷물은 영원합니다. 바다라는  하나의 생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파도  하나가 
내가 아니라, 전체 바다가 바로 나입니다.   
  물질 육신으로서의 나를 하나의 파도에 비유할 때 그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하
는 것은 바로 윤회를 의미하는가? 전생과 후생은 존재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전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생으로 안내
한다는 전생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서양의 어떤 의사들이나 치료가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전생을 보여줌으로써 병을 치유시키는 이른바 전생퇴행요법을 환자 치료
에 응용하고 있습니다. 
  시간도 물질도 어떤 한계도 없는 우주의식, 순수의식의 차원에서는 전생도 후생도 그리고 
현생까지도 없습니다. 이 차원에서는 과거나 미래를 지금 지어내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과
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별의식, 자아의식의 차원에서는 나는 한정된 시간 
가운데 있으므로 어제가 있으면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으면 내일이 있듯이 전생과 현생, 후
생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경험될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볼 때 현실이란 '분리된 나'의 착각이 빚어낸  환상이듯이 전생이나  후
생 또한 '분리된 나'가 지금 순간순간 지어내고 있는 환상입니다.  따라서 내 생명이 참으로 
추구해야 할 바는 전생, 현생, 후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환상들 너머의  영원한  
배경, 어떠한 한정된 창조도 없는 생명의 근원에 통합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현상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 분명히 있듯이  현상적 
생명의 나타남이 일회성이 아닐 것이고, 비물질적인 생명의 근원에서 보면 바다와 파도들이 
하나의 바다이듯이 모든 생명체들이 하나의 생명으로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통합적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몸이 죽더라도 생명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 몸이 한 번 태어
났다가 죽어 버리면 내 생명은  영원히 끝이다라는 생각, 그리고 반대로  내가 죽은 후에도 
이 몸과 이 마음은 이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는 생각, 이런 극단적인 견해는 모두 착각입니다. 
  이 우주에 단 하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뿐입니다. 모든 것은 
물 흐르듯 흘러가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야말로 이러한 변화의 양면성입니다. 만
일 누가 영원히 살고 싶다거나 또는 영원히 죽고 싶어한다 해도 이 두 가지는 모두 헛된 싸
움이며 환상입니다. 
  죽음 다루기의 목표는 몸이 내가 아니라 몸을 지어내고 있는 창조의 근원이 바로 나임을 
실감나게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몸이라는 겉모습에 속지 말고  생명의 참모습을 바로 보자
는 것입니다. 
  신라 시대의 부설거사는 우주와 생명의 본성을 깨닫고 생사를 초월한 성인으로 높이 추앙
받는 분입니다. 이 분의 사허부구게는 역대로 생명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구도자들에게 
큰 경책과 귀감이 되는 시입니다. 이  시에는 삶의 진정한 목표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생사를 떠나 영생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적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거느린 처자 권속 삼대밭 같고
     쌓여진 금은옥백 산더미 같아도 
     임종에는 홀로 외로운 혼만 떠나가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거품이요
     날마다 힘들여서 살아온 세상길에
     벼슬길 올랐어도 머리는 백발이라
     염왕은 벼슬과 영화를 두려워 않거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구름이요
     재주가 뛰어나서 말로는 요설변재
     천글귀 시를 지어 만호후를 경멸해도
     다생겁의 아만의 근본만 늘게 하나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구름이요
     가사, 비구름 몰아치듯 설법을 잘하여
     하늘꽃 감동하고 돌맹이 끄덕여도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를 못 면하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거품이로다
  처자 권속이 그렇게 많은 금은옥백의 재산이  산더미 같이 많다하더라도 임종 때는  결국 
혼자 외롭게 혼만 가는 것이니 생각해 보면 이것도 역시 허망한 뜬거품이라는 말입니다. 
  아침마다 날마다 하루 종일 애쓰는 세상길에서 벼슬이 가까스로 높이 좀 올라갈 때는 벌
써 센 머리가 되는 것이니,  염라대왕은 세상의 벼슬아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긴 대통령도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나 사람들이 조금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그 자리를 그
만 두거나 죽은 다음에야 누가 그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높은 벼슬아치가 되
는 것도 생각해보면 허망한 뜬거품 같은 것이지요. 시를 잘  쓰고 학문을 잘해서 명예가 높
고 학식이 훌륭해도 그래서 왕조차 가볍게 볼 정도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참다운 도리
에서 본다면 자만심만 더 키우는 꼴이니 이것도 참 쓸데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한테 존경도 받고 경륜도  화려하고 진리를 입으로는 잘 설명할  수 
있어도, 체험이 되지 않은 지혜로는 생사 문제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따라
서 이론만의 지혜, 머리로만  헤아리는 분별지혜로는 생사를 면할  수가 없으니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허망한 뜬거품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섯째 마당-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 
    생명의 근원- 완전건강, 완전행복의 자리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도쿄에 관상의 달인이 있었습니다.  이 관상가가 당신은 몇월 몇
일 몇시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면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60이 다 된 남자가 이 관상가에게 죽을 날을 받아 놀고 고민하고 있던 중 당시 큰 
깨달음을 얻어 영능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다니구찌 마사하루 선생(<생명의  실상>의 저
자)을 찾아갔습니다. 다니구찌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깜깜한 동굴 속에 촛불 하나만 있다면 그 촛불이 길을 인도해주는 유일한 길잡이겠지만, 
만일 동굴 안에 밝은 태양이 비추게  되면 그 촛불은 아무런 힘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더 
이상 촛불에 의지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촛불이 관상이나 사주팔자 같은 운명론이 안내해  주는 길이라면 밝은 태양은 내  생명의 
근본, 곧 신성으로 안내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어둠 속에서 절대적으로 촛불만을 의지하기로 할 때 그 촛불은  당신에게 절대적
인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당신은  관상가의 말대로 꼭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밝은 태양에 의지하기로 한다면 그 촛불은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므로 당신은 관상
가의 예언대로 경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니구찌는 실상관이라고 하는 일종의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
다. "나는 신성이며 바로 광명 자체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그러한 영상적 이미지를 관하
는 방법입니다. 이 사람은 결국 실상관을 열심히  하여 운명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
니다. 
  사주팔자나 관상 같은 운명론은 그저  하나의 신념체계일 뿐입니다. 뜬구름  같은 한정된 
창조입니다. 이것을 믿고 따르기로 한다면 역시 믿는 대로 경험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내 생
명의 본성은 뜬구름들의 저 너머에 있는 밝은 태양이자 푸른 하늘입니다. 
  내 생명의 근원, 본성은 본래  늙음도 질병도 죽음도 없는 순수한  생명인데 자신이 문득 
욕망과 저항의 신념을 지어냄으로써 이 욕망과 저항의 신념의 필터를 통해서 왜곡된 생명에
너지와 병적인 기가 창조되고 이 에너지가 물리적 입자화됨으로써 몸에 질병과 고통의 모양
으로 나타납니다.
  개인과 세상의 고통이나 불행의  근본원인은 바로 '나'라는 생각,  "내가 세계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라는 착각과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 밝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최상의 길은 이러한 무지와  왜곡된 신념에서 벗어나 나오 남
아 따로 없는 하나의 생명으로  통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실천 방법이  바로 앞으로 다룰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입니다.
  개인과 세상의 현상적 모습을 달에다 비유해 봅시다. 행복과 풍요를 보름달에, 고통과  불
행을 기울어진 달에다 말입니다. 달은 한 달을 주기로  기울어지고 찌그러지기도 하면서 모
양을 바꿔 갑니다. 더러는 아주 자취를 감추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듯 변화
하는 달의 모양이 진짜 달의  모양은 아닙니다. 달의 원래 모습은  둥글고 밝으며 원만하고 
풍요로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의 삶이 일시적으로 찌그러진 달과 같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본 모습은 아닙
니다. 그것은 다만 허상일 뿐입니다. 내 생명의 본 모습은 보름달처럼 완전무결하며  원만하
고 풍요롭다는 것을 인식하고 체험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입니다. 따라서 
이 방법을 전적으로 믿고 실천할 때는 내 생명은 한 조각 구름 같은 한정된 창조가  아니라 
구름 너머의 한정 없는 푸른 하늘이자 영롱한 광명임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을 가리고 있는 착각과 무지를 걷어내 줌으로써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 줍니다. 마치 하늘을 뒤덮고 있는 먹구름을 통과하여 푸른 하늘과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를 통해서 '내가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자각
하고, "모든 존재가 하나의 생명"임을 체험하게  된다면  개인적으로는 영생의 행복을 얻을 
것이며, 세상 가운데서는 밝은 세상을 창조해가는 강력한 에너지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 건강하든, 병에 걸려있든, 노인이든, 임종직전에 있든 병도 고통도 늙
음도 죽음까지도 없는 어떤 차원, 어떤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차원, 이 자리는 어떠한 
한계, 한정이 없습니다. 내 몸이 나라는 한계, 나는 병에 걸려 있다는 한계, 나는  늙어서 결
국 죽는다는 한계까지도 없습니다. 이 자리가 바로 완벽한 건강의 자리, 늙음도 죽음도 없는 
자리, 영원한 편안함과 행복의 자리입니다. 누구나 이 자리 이 차원에 들어가 안주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곳에 들어가는 방법이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라고 하니까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이 나하고 떨어져서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되는데 사실은 생명의 근원이 지금 여기와 떨어진 곳  어디
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가 그대로 생명의 근원입니다. 
  한정된 나의 환상에 가려서 지금 이대로가 죽음이 없는  생명인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따
라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란 그 환상에서 깨어나서 지금 이대로의 내가 생명의 근원임을 
자각하게 되기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근원과 내가 이원화되어 분리된 것처럼 느끼
고 있으니까 내가 근원으로 돌아가서 근원과  하나되어 안주한다고 말하면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갑이라는 사람이 건강하고, 을은  병에 걸려 있으며, 병은  몸이 죽었다고 합시다. 
갑, 을, 병 세 사람의 겉모습은 다르지만 사실은 모두 한결 같이 순수한 생명입니다. 질병도 
없고 죽음도 없는 영원히 살아있는 순수한 의식입니다. 
  어떤 분이 지금 심각한 병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몸이 나다"라는 한정된 신념에서 벗거나 "영원히 죽지 않는 순수의식이 나의 생명이다"라는 
생명의 본성을 1백 퍼센트 사무치게 믿고 느낄 수 있다면 그는 지금의 고통에서 즉시  풀려
날 것입니다. 
    되찾은 삶
  한때 위암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회복된 60대 후반의 남자 한 분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모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로부터 약 3년 
전에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하던 중 그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온 가족이 나서서 전국을 찾아 헤매고  다녔지만 1년이 넘도록 그의 흔
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가족들은  그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지요. 평소  워낙 
강직한 분인지라 가족들 생각에는 그가 남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주검을 보이기 싫어서 혼자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비감에 젖어 있던 어느날 그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
람이 집안에 들어서니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예전
과 같은 건강한 몸이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병원에서도  포기해 버린 생명인데 어떻
게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는 수술도 할 수 없을 만큼 암이 진행되어 이제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도
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 몰래 혼자  강원도의 어느 깊숙한 산 속으
로 잠적해 버렸습니다.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되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산 
속에서 그는 야생 동물들이 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뭇잎,  풀잎, 야생열매, 개울물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순간도 기도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  몸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와 같은 기도가 아니라 육신 너머에 있는 생명의 근본만을 믿고 성
령의 위대한 힘에 눈물로 경배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산 속에서 오로지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 수행을 했던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얼마만큼 간절히 하나되기
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또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세 분의 대학교수들 경우인데, 한 분은 위암으로, 다른 한 분은 무릎의 악
성 종양으로,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만성 간염으로 역시  모두 고통을 받고 절망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 역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를  통해서 성공적으로 질병을 이
겨냈습니다. 이 분들은 한결 같이 몸과 마음은 텅 비어 실존하지 않으며 물질 너머에 내 생
명의 본질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생명의  빛만이 우주천지에 충만하다고 투철하
게 믿고 자나깨나 그 빛을  향해 마음을 모았습니다. 야채수프를 먹고  채식 위주의 소식을 
한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물리적 치료를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만
을 거듭한 결과 약 1,2년 후에는 거의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오끼나와의 어느 화상센터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20대의 한 남자 대학생이 가스폭발 때문에 전신에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그 환자의 상태를 본 의사들은 모두 고개를 내젓고  말았습니다. 의료진은 물론이고 환자의 
가족들조차도 회생할 가능성을 포기해 버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단  한 사람만은 끝까지 희
망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로 그 환자를 돌봐주던 간호사였지요. 그녀는 의식이  혼
미한 환자에게 속삭였습니다. 
  "몸과 같은 물질은 실존이 아니예요. 몸 너머에 생명의 실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실상을 빛으로 여기고 그걸 느껴보도록 하세요."
  그 간호사의 염원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보호자들도 불에 까맣게 타버린 환자 옆에서 같은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지요. 환자, 간호사, 가족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생명의 근원과 하
나되기를 한 결과 이 환자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3주 째 접어들면서 환자
의 몸에서 서서히 피부가 재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도 외과 의사이니까 그동안 많은 화상환자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3도 화상의 피부
는 재생되기가 어렵고 따라서 피부이식 수술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 환자처럼 전신 3도 화
상이라면 의학적으로 절망이라고 밖에 할 수 없으나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가 이  환자
의 피부를 재생시키고 다시 살려냈다는 사실을 나는 확실히  믿습니다. 3도 화상 이상의 피
부는 재생이 안된다는 것은 과학적인 사실이지만 이것 또한 신념입니다.  후자의 신념의 힘
이 전자의 신념을 이겨낼 때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죽겠다는 신념으로 몸에 불을 질러 전신화상을  입은 환자들이 회생하는 경우를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죽겠다는 신념의 틈새로는 도저히 생명에너지가 들어설 틈이 없을 테니까요.
  환자와 치료자와 가족의 신념이 얼마나 간절한가에 따라 환자의 운명은 달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교통사고로 다리뼈가 분쇄 골절이 되고 근육에 심한 손상을 받은 30대 남자 환자
의 경우입니다. 대학 병원에 입원하여 전문적인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골절된 뼈는 골수염
이 되고 근육은 괴사되어 의료진을 힘들게 했습니다. 몇 차례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환자는 생명의 참 모습은 빛이다, 라고 믿고 오직 그렇게 상상하며  관
찰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무친 마음으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를 하고 있었는데, 
1주일 째 될 무렵 갑자기 미역국이 먹고 싶어졌습니다. 종전에는 미역국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미역국이 먹고 싶어진 것입니다. 며칠 동안 
미역국을 먹었지만 그래도 물리지 않아 계속 먹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골수염이 많이 좋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 환자는 나중에 약간의 장애가  남았
지만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 회복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왜 생기는가 하면 환자가 자신의 주
의를 절망적인 다리에다 두지 않고 불가능이 없는 생명의 근원에다 온통 주의를 모은 결과 
더 높은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직관의 지혜와 치유력을 보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상 몇 가지 사례를 소개했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얼핏 들으면  꼭 미신 같은 소리 정도
로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사실로 있었던 일이고, 또한 내가 모르고  있
는 이와 비슷한 사례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실증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부정하면 안됩니다. 이런 일을 비과학이라고 탓하기 전에 이것을 설명할 수 없는 현재
의 과학수준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의학은 과학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생활의료 5단계-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
  허준의 동의보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산란하면 병이 생기고, 마음이 안정되면 병이 저절로 낫는다"
  마음이 좋다 싫다라는 판단분별로 끊임없이 산란스러우면 그 마음이 병을 만드는  시초가 
되고, 마음이 욕망, 저항의 분별시비를 떠나 순수의식으로 고요해지면 있던 병도 곧  치유된
다는 뜻입니다.
  이 간단한 문장 속에 높은 차원의 병리학과 치료학의 요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가 가진 힘찬 생명력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고요한 정심 곧 순수의식은 평소에는 분별시비 하는 산란스런 마음에 가려서 잘 드러
나지 않습니다. 판단분별 하는 산심이 잠재워지거나 거두어질 때  그 배경에서 기다리고 있
던 고요한 순수의식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먹구름이  걷힌 뒤에 푸른 하늘이 
맑게 드러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순수의식이 바로 내  몸을 살리는 자연치유력의 무한한 
보고입니다.  
  순수의식을 의도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 아바타 프로그램 개발자인 해리 팔머는 자기  스
스로 감각박탈탱크 안에서 두 달 가량 지낸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한 폴리
스티렌 통 속에 체온과 같은 온도의 소금물을  채워 여기에 무중력 상태로 둥둥 떠서 누워 
지냈는데 전혀 덥거나 추운 느낌이 없고 어떤 감각적 자극도 일체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뚜
껑을 닫으면 탱크 속은 캄캄해서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분간이 안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일체 냄새도 없습니다. 모든 감각을 완벽하게 차단시킨 것입니다. 의도적인 무안이비
설신의 조건을 만든 셈이지요. 
  보통 사람들의 경우는 평소 감각 기관을 통해 유입된 감각 자극물이 마음이 집중됨으로써 
마음이 통제되는데 이와 같이 일시에 오관의 모든 감각 자극물을 차단시키니 마음이 집중할 
대상을 잃어버려 그걸 보상하려고 온갖 생각의 난장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정말 극도의 혼
란스런 생각의 폭풍을 경험한 후에 '생각하는 마음' 너머에 있는  섬세한 지각이 천천히 깨
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최대 음량의 나이트클럽 밴드가 연주해대고  있는 방 가운데 조
그만 휴대용 라디오가 있는데 거기서 클래식  음악이 아주 작은 음량으로 흘러나오는  것처
럼. 밴드가 잠시 쉬기까지는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이 거기 있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생각
하는 마음의 밴드'가 지쳐서 휴식에 들어가자 그때야 비로소  고요한  순수의식의 클래식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순수의식은 이처럼 판단분별하는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해리 팔머는 이때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물질육신이고 나는 세상과 따로 분
리되어 있다는 평소 생각이 엄청난 착각임을 똑똑히 경험했습니다. 
  '나'라는 생각들이 형언할 수 없는 순수의식의 바다 위에 거품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실은 
그 무공간으로부터 고요히 지켜보는 그 순수의식이 진정으로 나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누구나 이 감각박탈탱크에 들어가지 않고도 탱크에 들어간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
도록 하기 위해서 아바타 코스에는 '아바타 몸 다루기 런다운'이라는  연습이 준비되어  있
습니다. 
  이 연습을 통해 순수의식의 존재로서의 나는 그동안 자신이 몸이라는 인상의  상념체에다
가 불편한 감각을 심어 왔었던 결과가 질병과 고통이 되었음을 확인하게 되고 이제 자신이 
원하는 감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게 됩니다. 이때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아바타 프로그램을 안내하고 있는 여러 나라의 아바타 교사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놀
라운 치유들을 늘 경험하고 있지만 다만 의사단체들과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드러내
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치유가 일어나는 이유는  단순하고도 분명합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죽음도 
떠난 순수한 의식임을 자각함으로써 그동안 끈질기게 믿어 왔던 '몸이  바로 나다'라는  생
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을 통해서 가끔 난치병으로부터 풀려나는 배경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와 따로 
존재하는 어떤 절대자가 내 병을 치료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의 본성이 물질적 몸을 초
월하여 우주에 충만한 순수한 생명에너지 곧 신성임을 자각하게 될 때 기적 같은 치유가 일
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바꾼 결과일 뿐입니다. 자기가 붙
들고 있었던 어두운 신념을 밝은 신념으로 되돌려 놓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전에 내가 만난 한 부인은 온 우주를  하나의 영생하는 빛으로 여기면서 그 생명의 빛을 
향해 "사랑해요, 감사해요"라는 말을 하루에도 수만 번씩이나 했다고 합니다. 입으로 외기도 
하고 밥을 먹거나 말을 할 때는 가슴으로 그것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만나는 모든 대상, 일, 
음식까지도 포함해서 온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여기며 큰사랑으로 껴안아 감사했다는  것
입니다. 그후 그녀의 몸과 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는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잠자는  동안에도 
가슴에는 "사랑해요, 감사해요"가 자연스럽게 울려나올 정도가 되자, 이 말의 내용처럼 실제
로 모든 대상이 눈물이 날만큼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녀의 현실에는 그의 신념대로 정말 감사할 일만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구나!"하면
서 자신의 가슴 속 갚숙이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설마 그런 일이...."라면서 불신하
는 사람. 이런 감동은 머리로 따져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때만  가
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물질육신을 자기 몸이라고 믿고  있으며, 좋아하고 싫어하며 분별시비하는 
마음을 자기 마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주 전체를 내 몸으로 하고, 분
별시비가 사라진 순수의식을 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물질육신을 자기 몸으로, 분별시비를 자기 마음으로 하던 것을  그만두고 전체 우주를 자
기 몸으로, 순수의식을 자기 마음으로 하는 차원에 머물기로 내가 결정하고, 그렇게 되기 위
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금 심각한 병에 걸려 있거나 또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물
질육신이 자기 몸이라고 믿었던 그 낡은 신념을 바꾸어 온 우주가 자기 몸임을 실감나게 믿
고 그 차원에 안주할 수 있다면  모든 고통은 지금 이 순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동안 물질 육신이 나라는 생각에 끈질기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온 
우주가 나라는 생각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설령 머리로는 이해된다 하더라도  가슴으로 
확실하게 느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믿음과 사무친 감동의 체험을  얻기 위해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  공부를 
지속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순간도 놓지 않고 일종의 자기 암시를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 말고는 고통의 근원에서  해방되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습니다. 
  하나의 생명인 천지우주는 오직 찬란한 빛으로 충만해 있다. 이 생각을 한시도 놓치지 않
고 오로지 이와 같이 느끼고 있다면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는  잘 되고 있는 셈이지요. 내 
욕심 같아서는 어려운 환자일수록 하루 스물 네 시간 오로지 이 생각에 미치다시피 몰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의 근본 고통은 모두 사라질 테니까요.  이것이 
그가 할 일의 전부입니다. 
    빛의 명상법      
  프랑스 의사 고드프로이가 제안한 '빛의 명상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생명의 근
원과 하나되기에 연결하여 적용하였더니 이 방법을 아주 좋아하는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것은 일종의 긴장이완과 상상법 입니다. 환자, 가족, 치료자가  이 방법을 함께 한다면 공명
파장을 통한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환자와 늘 함께, 같은 곳에서 연습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서로 다른  장소에서 연습을 하더라도 자주 하되  연습이 끝난 직후의 
영상적 이미지를 계속 간직하려는 노력을 지속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편한 자세로 앉아도 좋고, 중환자의 경우는 누워서 해도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눈을  가볍
게 감는 것이 좋으나 숙달이 된 뒤에는 눈을 뜨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1. 심신의 긴장을 이완시킨 후 아랫배로 천천히 자연스럽게 호흡을 합니다. (약 1분간) 
 2. 이제 호흡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밝고 영롱한 빛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정수리를 
비추고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그 빛의 색깔은 자신에게 편안함을  주는 색깔이라면 무슨 색
이든 상관없습니다. (약 1분간)
 3. 이제 그 빛이 정수리를 통해서 머리 속으로 스며들어 옵니다. 머리 내부는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약 1분간)
 4. 이 빛은 목을 통해 양쪽 어깨로 흘러가 손가락 끝까지 가득 채우며, 다시 목을  통해 흘
러내리는 빛은 온 가슴을 가득 채웁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온통 빛뿐입니다.(약 1분간)
 5. 이 빛은 가슴에서 배로 천천히  흘러내려 복부를 가득 채웁니다. 머리에서 배까지  온통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약 1분간)
 6. 빛은 이제 양측 대퇴부를 타고  두 다리로 흘러내려 갑니다. 이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은 오직 영롱한 빛으로 충만합니다. (약 1분간)
 7. 빛만 존재할 뿐 이제 내 몸은 없으며, 내 몸이 없으니 자연히 병도 없습니다. 있는 것이
라곤 오직 빛뿐입니다. (약 1분간)
 8. 이제 이 빛은 모든 방향으로 확산되면서 밖으로 흘러 나갑니다. 한없이 멀리 퍼지는  빛
이 온 우주를 가득 채웁니다. 이제 우주는 오직 밝고 고요한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약 1
분간)
 9. 이제 내 몸도 어떠한 물질도 없으며 영원히 계속될  생명의 빛만 가득합니다. 자, 이 빛
이 바로 나의 참 생명입니다. (약 2분간)
 10. 이제 온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므로 모두를  다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제  온 
우주가 바로 나의 생명이므로 모두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큰사랑이 담긴 생
명의 빛이 온 우주로 한없이 퍼져 나가고 있는 인상과 느낌을 가집니다. (시간 제한 없음)
  눈을 뜬 후에도 연습하는 동안과 같은 빛의 영상적 이미지와 사랑의 느낌을 계속 간직하
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연습을 자주 되풀이하여 하루 24시간 한순
간도 놓치지 않고 이 느낌  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직후와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이 연습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잠들기 
전의 마음 상태는 아주 중요합니다. 잠들기 직전의 마음이 잠자는 동안의 의식의 흐름의 방
향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른  논에 물을 댈 때 물꼬  방향을 어디로 돌려놓는가에 
따라 물의 흐름이 달라지듯이 말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방법으로 환자들을  안내해 보았는데 거의 모든 환자들이 이 방법을 
아주 좋아했고 실제로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는 몸이 아픈  환자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있는 갖가지 형태의 고통들을 덜어주는 데도 이 방법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사실 몸의 질병이나 교통사고, 생활상의 다양한  고통들, 이것들은 겉모양만 다를 
뿐 한결같이 나의 어두운 신념의 서러 다른 투영에 불과합니다. 
  모두를 하나의 생명의 빛으로 간주하며 모두를 내 생명처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마련
된다면 그때부터는 고통에서 풀려날 수 있는 직관적인 지혜와 구체적인 방법이 현실로 나타
날 것입니다. 더불어 마음으로부터 저절로 우러난 사랑의 파장을 세상 한가운데로 확산시키
고 있을 때는 이미 행복한 존재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섯째 마당- 의학의 여러 가지 모습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는 의학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마음도 편하고 몸도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일생동안 한번도 
안 아프고 마음이 항상 편하게  지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늘 몸과 마음이 불편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낫기  어려운 병에라도 걸리게 되면 
환자와 가족들은 깊은 절망과 고통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쉽게 낫지 않는 만성적인 질병  때문에 장기간 불편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많습니
다. 
  의학이 이만큼 발전했으니 건강과 질병을 일관하는 확실한 법칙이 발견되어 모든 병이 병
원에서 척척 치료되었으면 좋을텐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질병이 의학을 앞질러  나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딱한 노릇입니다. 
  누구든지 일단 병에 걸리게 된다면 가장 좋은 치료법을 찾게 됩니다. 어떤 치료법이 최선
의 선택일 것인가? 그러나 병은 하나인데  치료법은 백 가지라는 말이 있듯이 병에  좋다는 
치료법이 너무 많아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틀림없이 치료되는 방법이 
하나만 있으면 참 편할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니까요.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치료법, 더 많은 건강 정보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어 정신을 못 차릴 지경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수천 년의 의학의 역사는 보건과 의료를 설명할  수 있는 단일 이론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한정된 능력으로는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완벽하게 이해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건강과 질병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일이론,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 같은 원리가 
개발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항상 논쟁하는 것이 의학의 역사입니다. 물론 이런 
논쟁을 통해서 의학은 발전해 왔습니다만. 
  사람의 생명이란 다차원적이고 중층적이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
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서 몇 개의 차원이나 관점만으로는  전체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차원이나 관점에서 보게 되면 같은 사람의 생명인데도 매우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진실이 아니게 보일 수 
있고, 어떤 차원에서 실제처럼 여겨지는 것이 다른 차원에서는 거짓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진실도 모두 상대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말하기 
전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만 이것은 진실이다라고 말해져야 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건강과 질병을 바라볼 때 그 관점에서 옳게  보이는 현상을 규명, 그에 합
당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도 꼭 찾아낼 수 있습니
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도, 또 또 다른 관점에
서도 가능합니다. 마치 하나의 주먹을 돌려가면서 여러 개의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때 주먹
의 모양을 서로 다르게 설명할 수 있듯이. 
  이처럼 사람의 생명이란 어떤 관점에서 보고 어떤 이론들을 창작해내든지 그 이론에 합당
할 만한 증거들을 되비쳐 줄 수 있을 만큼 무한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전공한 서양의학 내에서만 보더라도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경
우가 흔히 있습니다. 훌륭한 의학자들이 오랫동안 객관적인 검증과정을 거쳐서 다듬어온 과
학적인 의학이므로 의사들이 모두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동의할 것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실상인즉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지금 인류의 대부분이 진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신념  중에 '특정병인설'이라는 것이 있
습니다. 특정병인설이란 모든 질병에는 특정한  원인이 있으니 그 원인을  찾아내서 제거해
야 병이 낫는다는 이론입니다.  예를 들어 세균감염병의 경우,  그 병을 일으키는  원인균을  
찾아내서 그 균을 죽일 수 있는 항생제와 같은 화학약품을 써야 병이 낫는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이론은 일면 너무나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근래에 와서 여기에 반대하는 의
학자들의 움직임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세기 초 코호라는 의학자가  콜레라균을 발견하고, 콜레라는  콜레라균에 감염됨으로써 
발병한다는 세균 병인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때  코호 못지 않게 위대한  학자로서 인정받고 
있던 페텐코우퍼나 메치니코프 같은 의사들은 이 이론에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콜레라로 사망한 환자의 배설물에서 추출한 콜레라균 수백만 개를 컵에  담아가지
고 자기 동료들과 함께 대중  앞에서 직접 먹어 보이는 실험을  했습니다. 콜레라균이 몸에 
들어온다고 해서 꼭 발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신들의 몸
으로 생체실험을 했던 것이지요.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들 실험자 전원의 대변에서 콜레라균이 검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만 가벼운 설사
를 일으켰을 뿐 단 한사람도 콜레라 환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실험실 내의 연구와 현실세
계는 명백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파스퇴르나 코호가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결과가  자연계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된 셈이지요. 병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세균이 
하나의 부분적인 원인이 될 수는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심리상태, 영양상태,  노동조
건, 전신의 면역력, 체질적 요인, 나이 등 더 많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병의 감수
성을 결정한다는 것이지요. 
  콜레라균을 직접 먹어 보인 의학자들의  생체실험으로 코호나 파스퇴르의 세균  병인설은 
오류임이 증명된 셈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세균 병인설은  백년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서양의학의 중심사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오류를 증명한 학
자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반면 코호나 파스퇴르 같은 세균학자들은 위대한  의학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당시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
다. 당시 유럽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터라 계층간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따라서 소외받던 절대  다수 대중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과로에, 영양실조
에, 생활환경조차 너무 열악하여 영아사망율도 높았고 평균 수명은 40세가 채 못되었습니다. 
당연히 폭동 같은 대중 저항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났습니다.      
  '세균이 병을 일으킨다'는 세균 병인설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지
배계층의 통치논리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즉 정치나 경제가  잘못되어 질병이 생기는 것
이 아니라 세균이 병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병에 걸리는 것은 세균 탓이거나, 혹은 세균에 
노출된 개인에게로 그 책임을 떠넘기면 그만이었으니까요.
  의학이라는 것이 건강과 질병에 대한 생물학적인 진실들만 축적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으
로 발전해 왔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다른 학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의학 
역시 그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생활양식과 같은 사회적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한 시대의 의학을 잘 살펴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삶에 대한 모든 조건과 상황
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최근의 사례만 보더라도 같은  관상동맥협착증 환자에 대한 치료로
서 바이패스 수술을 미국의사들이 영국의사들에 비해 여섯 배나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자
궁질환에 대한 자궁절제술이 프랑스에서는 아주 드물게 하는 수술인 반면에 미국에서는  전
체 수술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이 하는 수술에 속합니다. 
  같은 시대의 같은 서양의학인데도 이런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의 의식, 문화적 특
징, 사회 경제적 조건 등에 차이가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의식, 문명, 사
회 경제적 조건들이 바뀌어감에 따라 의학의 모양도 그  조건대로 틀림없이 바뀌게 됩니다. 
오늘날 첨단 의료장비와 선진적인 의약품들이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새롭게 개발되어  나오
는 것은 의학자들의 순수한 의학탐구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제약회사나 의료장비 회사들의 자본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첨단 의료장비나 선진적 의약품의 등장이 꼭 참된 의학 발전의 지표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아무튼 근래에 와서 앞서 말한 특정 병인설에 반대하고 나서는 의학자들의 움직임이 갈수
록 커지고 있습니다. 예방접종에 대한 일부  의사들의 반대 운동이 그 하나의 예가  됩니다. 
특정한 세균이 병을 일으킨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므로 세균을 찾아내서 병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되었고, 따라서 세균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기 위한  예방접종은 불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특히, 이들 특정병인설 반대론자들은 세균 질환이 아닌 암,  고혈압, 심장병 같은 만성 퇴
행성 질환에까지 특정병인설을 적용하여 특정한  한두 개의 원인을 찾아내서  치료하겠다는 
태도에 대하여 크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체를 여러  개의 부속품들로 조립된 기계
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세포가 모여서  생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체 그대로가 하나의 단위이므로 이를 분해하고 분석하자마자 생체로서의 특질을 잃어버리
기 때문에 항상 생체 전체로서 관찰할 수밖에 없고,  설령 생체를 분해하고 분석해서 어떤 
뛰어난 생물학적 자료를 얻어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전체로서의 생명을 이해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간염환자의 간에서 감염 바이러스를 확인했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그 환자를  이해했다
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감염 바이러스의 검출이 부분적인 참고 자료는 될 수 있겠지만,  정
말 필요한 것은 그 환자의 심리와 생리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입니다. 
  요즘 가장 문제시되는 암 치료법에 대해서도 의사들 사이에는 서로 다른 견해가 맞서 있
습니다. 수술이나 항암제, 방사선 치료, 면역요법 같은  정통적인 치료방법에 동의하는 의사
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 서있는 의사들도 상당합니다. 몇 해 전 일본의 암 치료 전문
의사인 곤도 교수가 발표한 <암을 건드리지 말라>는 책은 그래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
습니다. 곤도 교수의 입장에서는 기계 부속품 수리하듯이 암을  잘라내는 일은 생체를 전체
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들이 바로 요즘 화재가  되고 있는 대체의료의 사상적  배경입니다. 정통의학을 
대신 한다는 뜻의 대체의학이라는 표현보다는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준다는 뜻의 보완의학이
라는 표현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전인요법 또는 전일요법이라고 부르는  사람
들도 많습니다. 
  대체의료가 나오게 되고 이것이 대중들의 선호를 받게 되는 이유는 기계론이나  특정병인
설의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들은 수술이나 
화학약품 같은 공격적인 방법을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런 방법을 써서  자연치유
능력을 발현시킴으로써 전체적 조화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질병만 치료한다기보다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치료한다는 개념이지요. 
  수술로 암을 치료하기 좋아하는 의사들은  수술과 항암제가 최선의 치료법이라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고, 대체의료를 추구하는 의사들은 대체의료의  방법이 보다 우월하다는 증거와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암 환자는 과연 어떤 치료법을 따르는 게 좋을까요?
  뿐만이 아닙니다. 심장의 기능에 대한 이해에서도 이들은 확실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습니
다. 많은 의사들은 심장이 압력펌프 역할을 함으로써 피를 전신에 보내고 있다고 믿는 반면, 
어떤 의사들은 결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한 주먹 크기의  심장의 힘만으로 수 백 킬
로미터 길이의 전신의 혈관에 피를 보낸다는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증거를  제
시하면서 말초혈관의 음압이 혈액순환의 기본 동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심장의 기능
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히 심장병에 대한 치료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양의사들은 몸에 열이 나면 해열제를, 통증에는 진통제를 써서 증세를 억압하거
나 제거하는 것이 환자를 도와주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어떤  의사들은 이와 같은 증세 억
압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증세의 나타남이 곧 병이 아니고 이는 병이 스스로 치유되
고 있는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오히려 증세가  더 잘 발현되도록 도와주는 치료법을  쓰기도 
합니다. 
     
    의학은 신념체계다
  서양의학의 영역을 벗어나 다른 여러 가지 의학 체계나 치료방법들을 두루 살펴보면 그야
말로 천차만별입니다. 물론 동양의학은 서양의학과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 출발하고 있으므
로 같은 질병에 대한 치료방법도 당연히 다르리라는 것을 우리는 대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동양의학인데도 중국의 전통의학과  인도의 전통의학은 그 내용이 상당히 다
릅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결국 어느  문화권이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전통의학을 가지고 있
고 이런 전통의학들은 현대에도 그 문화권의 틀 안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공식의료권 밖으로 한  번 나가 볼까요? 공식적인 정통의료  바깥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체의료 또는 민간의료 방법들이 있습니다. 
  홍채학이라는 일종의 대체의학이 있는데, 이것은 눈의 홍채를 통해서 간, 신장, 심장 같은 
전신의 각 장기의 상태를 읽을 수 있다는 신념체계입니다.  이 홍채학의 방법은 대체의학을 
탐구하는 서양의사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민간요법의 하나로 널리 유행되고 있는 수
지침은 전신의 건강상태가 그 사람의 손에 모두 반영되어 있으므로 각 장기에 상응하는 손
의 지점을 침구로 치료하면 건강이 회복된다는 건강법입니다. 아  수지침이 외국의 어떤 의
과 대학에서까지 활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나름대로 독특한 장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
겠지요. 손에다 침을 놓는 것뿐이 아닙니다. 귀나 발을 통해 전신의 건강상태를 이해하고 질
환을 치료한다는 이침이나 족침도 개발되어 있습니다. 
  눈, 손, 귀, 발과 같은 몸의 국소 부위를 통해서 온몸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 어
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을 이해하려면 몸의 국소 부위마다 일일이 조사하는 방식보다는 의식
과 신념의 탐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보다 빠르고 쉬울  것입니다. 이것들은 신념의 나타냄에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손이나 발, 눈이나 귀를 통해서 온몸을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
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치료가가 코를 통해서건 입을 통해서건, 아니면 배꼽을 통해서건 
어떤 국소 부위를 통해서 전신을 이해하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탐구해
가면 그는 결국 그럴듯한 신념체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거기에 합당할 만한 의학이론을 
개발해 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은 어떠한 신념의 내용도 되비쳐 줄 수 있을 만큼 
무궁무진한 정보와 모습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 몸의 세포 한 개를 통해서 
그 사람 전신의 정보를 다 파악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러한 관점에서 탐구하게 되면 
그 신념을 뒷받침할 만한 신념체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즉 사람 몸의 수 십  조 개의 세포 
하나하나에는 그 사람 전체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다 포함되어 있음이 밝혀질 것이라는 말입
니다. 사실 현대의학은 이런 것을 증명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티끌 작은 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모든 티끌마다 우주가 가득하네"
  의상조사의 법성게는 생명에 대한 깊고도 오묘한 이치를 바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체질을 사상, 팔상 같은 음양론으로 구분하여 그  체질에 맞는 섭생법이나 생활법
을 따라야 건강해진다는 이론이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체질 구분
의 건강법들이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효과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체질론은 오랫동안 인
류에게, 특히 동양권에서 집단신념으로 자리잡아 왔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체질 감별 치료법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을 하
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음양 체질론에서는 양성 체질은 음성 섭생을, 음성  체질은 양성 섭생을 취해야만 
음양조화가 이루어져 건강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양성 체질이 양성 섭생을,  음
성 체질이 음성 섭생을 취하게  되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지요.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이 
방법을 믿고 실천해서 건강이 좋아졌다는 사례와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치료가들은 그 반대의 처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양성 체질은 같은 양성 
섭생을, 음성 체질은 같은 음성 섭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요? 
어찌된 일인지 이 방법을 믿고 실천한 사람 가운데서도 병이 낫고 건강이 증진되었다는 사
례와 증거들도 많이 있습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요즘 생수를 마시면 몸에 좋다고 해서 생수 음용이 널리 유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건강법
에 따르면 성인의 경우 생수를 하루 2리터 가량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자주  마
시는 것이 좋다고 가르칩니다. 이 방법을 실천한 후 변비도 좋아지고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태양이 떠오르는  오전에 생수를 마시는 것
은 생명의 불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으므로 생수 음용을  피해야 하고, 식사 도중이나 식
사 전후 두 시간 동안은 일체 물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건강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을 믿
고 실천하여 병이 낫고 건강이 좋아졌다는 사례도 물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건강법이나 치료법들 가운데는 그 이론이나 실천 방법이 서로 상반되고 대립되
는 것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옳다면 다른  것은 마땅히 틀려야 할텐데 상
반되는 이 두 가지가 나름대로 효능을 발휘하고 있으니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
까요?
  이것은 한 마디로 신념의 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대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지요. 심신에 병을 만들어 내는 것도, 또는 병을 낫게 치료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신념이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  발견된 어떤 의학적 원리를  사람들이 
옳다고 믿게되어 많은 사람들의 신념이 여기에 보태어지게 되면 그 원리는 더욱 강력한 치
유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집단신념이 그 집단의 개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
국 사람들이 특별히 그 효능을 믿고 있는 산삼, 녹용, 웅담 같은 것도 이런 것을  별로 믿지 
않는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한국인들에게서처럼 큰 효험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동양인
과 서양인이라는 체질상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작용을 하리라는 것도 사실이겠습니다만.
  유럽에서는 옛부터 사혈요법과 거머리 요법이 대중들 사이에 널리  쓰여 왔고, 지금도 지
역에 따라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사혈요법이라는 것은 정기적으로 일정  양의 피를 뽑아 버
림으로써 세포의 재생력을 높여주고 노화를 방지해주며 만성질환을 치료하게 해준다는 것이
고, 거머리 요법이란 몸의 어떤 부위를 거머리에 물리게 하면 거머리 독이 병을 치료,  또는 
예방시킨다는 것입니다. 동양권에서 쓰는 부항사혈이나 벌침과도 비슷한 원리입니다. 이것은 
바로 지역에 따라서 문화권마다 다양한 요법들이 대중들의 믿음 속에서 형성되어 그 영향력
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례가 되겠지요.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든지, 또는 민간요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자기가 좋아서 일단 선택했
을 때에는 그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마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좋은 치료법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어떤 치료법을 쓰든지 환자와 가족 그리고 치료자 모드가 한결 같은 믿
음을 가지고 치료에 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지니는  간절함의 정도가 치료의 승패
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공 치료 가운데는 염력을 활용하는 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염력이란 신념의 힘,  상념
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암 환자가 단지 맹물 한 잔을 컵에 담아 놓고 바라보면서 우주 가운데 충만한  자연
치유력이 이 컵 속으로 모두 모인다고 믿으며, 또한 모이고 있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가  물 
한 잔을 먹을 때 이것을 온전히 믿고 염력을 사용할 경우 다른 치료법 없이 이것  하나만으
로 암이 치료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이런 사례
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염력침을 이용하여 환자 몸에 어떤 침해나  불편함을 주지 않은 치료하는 방법도  있는데 
치료자의 손가락 끝에서 기가 나간다고 믿고  훈련을 쌓으면 금속침을 쓰지 않고도  금속침 
이상의 치료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믿음의 힘만으로 말입니다. 
  어떠한 요법을 수단으로 하든지 간에 그것을  믿고 따르는 신념의 정도가 치유의  효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일본 도쿄 대학의 내과교수 출신으로서 명의로  소문난 오타라는 분에게 한 번은  시골의 
노파가 어렵사리 특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노파는 오랫동안 난치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
데 이 의사 선생을 만나면 틀림없이 좋아질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먹으면 꼭 좋아질 것입니다."라고 격려하며 처방전 종이 하나를 노파에게 건네주
었습니다. 정말로 이 노파는 몇 달 뒤에 병이 말끔히 나아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 다시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이 주신 종이를 불에 태워서 몇 차례 나누어 먹은 후 곧 좋아졌습니다."
  이것은 우스운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실제로 있었던 일로 그 교수의 회고록에 쓰여 있습니
다. 
  이처럼 믿음은 커다란 치유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치료자와 환자간의 신뢰관계가 중
요하다는 것입니다. 치료자가 환자에 대한 인간관계를  서투르게 하여 신뢰를 떨어뜨린다면 
그만큼 치유력도 떨어질 것입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좋아집니다"라는 의사의 말 한마디가 
어떠한 치료약보다도 더 큰 치유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의학도 만능이 아니다
  명상, 최면, 전생퇴행, 영성치료와 같은 정신적, 심리적 치료, 요가, 호흡법, 기공처럼 심신
의 조화를 꾀하는 수련법, 카이로푸락틱, 척추역학요법,  정골요법, 맛사지, 지압, 침구, 부항
요법 등과 같이 자연치유력을 증진시키는 방법, 단식, 생식과 같이 노폐물을 제거하고  세포
활성화를 도모하는 방법, 약용식물, 건강식품 등과 같은 영양조절요법, 그  외에도 물리치료, 
운동치료, 아로마 치료, 열치료, 물치료, 음악치료, 생활습관 조절요법....
  위에 나열한 것들은 지금 각종  치료에서 활용되고 있는 대체요법, 혹은  건강법들입니다. 
이외에도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치료법과 건강법들이 있으며 지금도 계속 새로운 
것들이 개발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어떤 
하나의 의학체계나 건강법만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질병과 불건강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
다. 
  앞에 열거한 것과 같은 다양한 치료법들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것들 나
름대로 독특한 효능과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식의료건 민간의료건 어떤 
의학 체계도 그 장점이 있는 만큼 효능에 있어서도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의 주먹을 바라보는 데에는 수많은 서로 다른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앞에서 상기시켜드
린 바 있습니다. 어떤 관점이나 시각도 정면에서 가장 잘  보이는 단면이 이 방향에서는 잘 
보입니다. 여러 가지 치료법들은 사람의 건강과 질병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가장 
잘 드러난 어떤 단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먹을 바라볼 수 잇는 관점이 이렇게 많듯이 사람의 건강과 질병을 비추어볼 수 있는 관
점 또한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사람의 생명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차원과 단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관점과 시각에서 보더라도 그 관점에 걸
맞는 정보를 되비쳐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볼 수  있는 관점의 수만큼이나 많은 의학
이론이나 치료법들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요. 
  있을 수 있는 모든 차원, 모든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종합할 수 있
다면 그것만큼 이상적인 것도 없겠지요. 모든  차원, 관점을 떠난 차원 없음과 관점  없음이 
제대로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관점이겠으나 한정된 차원의 세계에서는 이런 관점을 가지기
가 어렵습니다.   
  모든 의학, 모든 건강법은 다  한계를 지닌 창조입니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들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도 의사들 가운데는 자기가 전공한  의학만을 최선의 의학이라고 여
기고 여타의 다른 의학체계, 즉 대체의학 또는 민간의료들이  보여주고 있는 장점이나 효능
을 애써 과소평가 하거나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탐구해 보지도 안고,  그것
들의 관점에서 이해해 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공식의료권의 의사들 중에는 이런 편견을 가진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들 중의 일부는 은
근히 민간요법에 대해 무시하려는 듯한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이런 태도를 가
지게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일부 민간요법가들이 민간요법을 
오용 내지는 남용함으로써 환자들의 건강이 훼손되는 경우를 의사들이 자주 보고 있기 때문
입니다. 
  사실 환자에 대한 책임감만을 놓고 본다면 민간요법가들이 의사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그 
정도가 뒤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의사들은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거나 사망할 경우, 왜  이렇
게 되었는가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며 자신들에게  어떤 부족한 점은 없었는가를  습관적으로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민간의료 연구가들에게는 이런  태도가 조금은 부족한 편입
니다. 심지어 지극히 무책임하고 그릇된 태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 때문에 일
부 의사들은 민간요법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흔들게 됩니다.  
  말이 빗나갔는데, 어쨌든 현실적으로 민간의료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
을 의사들은 알아야 합니다. 지금 미국이나 영국 같은  현대의학의 선진국에서도 주민의 약 
80% 가량이 대체의료나 민간의료를 이용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지난 몇 
년 동안 공식의료권에 지불되고 있는 의료비의 총액은 년간 약 20조원 정도라고 하는데, 공
식의료권 밖에서 쓰여지는 간접의료비 역시 이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
다. 비용만 가지고 본다면 영향력은 서로 비슷한 셈입니다. 
  민간의료 연구가들이 탐구해낸 의학사상과 치료법들 속에는 의사들이 보고 배울 만한  귀
중한 자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의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공식의료의 많은 내용들이 민
간요법의 창고에서 꺼내져 의학의 옷으로 갈아 입혀진 것입니다.
  의료를 소비하는 대중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공식의료건 대체의료건 그런 구분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들로 보기 때문에 이들 모두가 잘 발전되기를 
바랄 것이지만, 제도권 내에서는 관점의 차이, 이해 관계의  대립, 법률적 제약 같은 현실적 
사정 때문에 이것들은 상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늘 대립적이고 서로를 
비판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서로 내 관점만 고집하지 말고 상대의 관점을 통해서 
보게 된다면 상대의 방법에서도 내가 배울 수  있는 많은 장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질병의 증상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을 비교해 볼 때, 관점마다  독특
한 장점이 있는가 하면 한계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학에서는 환자에게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면 그곳을 일종의 병증으로 여
기고 대증요법으로 증상을 제거하거나 억압하려고 시도합니다.  열이 나면 해열제나 냉습포
를, 통증에는 진통제를, 설사에는 지사제를,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반면에 대체의학이나 민간요법에서는 증상의 발현이라는 것을 독물, 세균, 물리적  침해와 
같은 인체를 위해하는 조건이 주어질 때 심신이 취하는 대응 수단이어서 생체를 정상화시키
는 치료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증상을 억압하는 것은 자기 치유 메커니즘을 방해하는 것이나 
같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체에는 수많은 평형관계가 있는데 어떤  원인으로 한두 개의 평형
관계가 손상을 받을 때 그 장해를 보상하기 위해서 다른 2차적인 평형관계를 희생시키는 기
전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증상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서양의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증세를 제거함이 옳다고 보고 증세를 없애는  치
료를 하는 반면, 반대쪽에서는 증세야말로 자기치유  과정이므로 억압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증세가 더 잘 발현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양의학의  증상 제거 위주의 치료
법은 반성해 볼 여지가 많다고 나는 늘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감기에 걸린다든지 해서 열이 나는 경우 나는 해열을 시키지 않고 
일단 하루나 이틀 정도 단식을 권합니다. 생수나 더운 차를  먹게 하고 하제나 관장을 이용
하여 장내의 대변을 모두 배설시켜 위장관을 비우게 합니다. 그리고 약 20분 가량 더운물에 
두 발을 담그고 담요로 온몸을 감싸 땀을 충분히 흐르게 한 후 몸을 닦습니다. 이것은 전통 
민간요법의 족탕법인데 동종요법에서 쓰는, 열이 나면 열이 더 생기는 물질을, 통증에는  통
증을 더 유발시키는 물질을 적은 양  씀으로써 질병의 근원을 해결한다는 원리와도  같습니
다. 이런 식으로 하면 하룻밤 사이에 대부분의 증세가 사라지고 바로 활기가 생깁니다. 증세 
억압 방법은 근본적인 치료를 더디게 하고 약물의 과용으로 몸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많습
니다. 그러니 모든 증세를 무조건적으로 억압하는 식은 다시 검토되어야 합니다. 서양의학은 
증세에 대한 대응 방법에 있어서 대체의료나 민간요법들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증상을 무조건 더 잘 발현되도록 내버려두는 방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
니다. 가령 몸에 열이 가벼울 때는 이열치열의 방법이 훨씬  좋은 것이 사실이지만 심한 고
열이 계속될 때는 해열이 되지 않으면 심각한 뇌손상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통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면 낫는다", "통증  자체가 자기 치유과정이다" 이 
말도 맞지만, 이것은 통증의 정도가 그나마  참고 견딜 만할 때의 얘기입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정도의 심각한 통증을 방치한다면 통증만으로 쇼크에 빠져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
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약을 써서 통증을 완화하는 것이 환자를 참으로 돕는 길입니다. 심한 
출혈이나 탈수, 호흡곤란 같은 증세를 완화시키지 않으면 환자를 곧장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증세를 무조건 제거하는  방법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고, 모든  증세를 제거하지 않는 방법이 항상 옳은 것은 것만도 아닙니다. 
이 두 가지 다른 방식은 각기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어떤 상황
에서 어떤 방식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모든 의사들이나 치료가들이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할 점은 지금 자신들이 
가장 옳다고 믿고 있는 의학지식이 훗날 우스꽝스러운 골동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의학 지식은 한 시대의 한계 내에서 힘을 행사합니다. 모든 것은 변화해 갑니다.  그
러니 자신이 지금 붙들고 있는 지식이 결코 영원한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
고 있는 것이나 남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이나 똑같이 한 발짝 물러나서 유연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암 환자 수술해서 얼마나 고쳤소?
  내가 여러 가지 의학체계와 치료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건강과 질병을  다차원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게 된  데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와 배경이  있습니
다. 나는 한 때 개인 클리닉을 열기도 했고 그 후 대학병원에서도 일한 적이 있지만 환자를 
보면서 수련의 시절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에 부딪치곤 하였습니다. 그동안 배운 지식
과 실제의 간극을 절감하며 서양의학의 한계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 전까지는 내가 
받은 교육이 서양의학이고 다른 의학은 배울 기회가 없었으니 서양의학만이 최고라고  생각
했지요. 수술 받은 암 환자가 재발되어 다시 병원을 찾는다든지, 우리 나라에 매우 흔한  골 
관절통 환자들에게 진통 소염제와 물리적 치료가 별 도움이 안된다든지, 만성 간,신장 질환, 
알레르기, 고혈압, 당뇨, 심장병 등 만성 퇴행성 질환에 서양의학의 치료가 근본적으로 해결
책이 되지 못함을 절감했습니다. 
  그러던 중 84년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서
양의학으로는 별 도움이 안되는 만성 난치성 질환자들을 위해 자연 환경이 좋은 곳에 작은 
규모의 요양원을 세워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단식, 물치료,  부항, 맛사지, 식이요법 등 다양
한 대체의료를 활용하고 있었는데,  공식적인 의료에는 의료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당시의 
내게는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서양의학의 치료법이 약과 수술 중심이라면 그 곳의 
치료법은 그러한 틀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체의료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
자 그 곳 관계자는 일본의 대체의학 전문가인 마나까 요시오 선생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당
시 이 분은 기따사또 대학 동양의학 종합연구소 주임 교수였는데 침술을 크게 발전시킨 공
로로 일본의 최고의학상을 세 번이나  받은 경력이 있었습니다. 이 분  역시 50대 초까지는 
외과의사로 일하다가 서양의학에 한계를 느끼고 대체의료와 동양의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
면서 특히 침구분야에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습니다. 
  나를 향한 마나까 교수의 첫 질문은 "외과 의사라는데,  그래 암 환자를 수술해서 얼마나 
많이 고쳤습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내가 크게 회의하고  있던 질문인데 그 역시 같
은 문제로 고민했다면서 나를 위해 특별히 대체의학과 동양의학의 개요에 대해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아주 흥미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자료용 슬라이드와  비디
오를 통해서 보여준 것 가운데는 귀에 침을 놓기 전과 후의 변화에 관한 것도 있었는데, 침
을 놓은 한 시간 후에 그 이전에 없었던 미세혈관들과 특별한 화학물질이 새로 형성되었으
며 혈구수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서양의학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가느다란 침을 하나 꽂은 것만으로 그런 변화가  일어난다
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하수 환자에게  침, 생약, 식이요법 등을 써서 
방광 부위까지 죽 늘어졌던 위를 약 4주만에 배꼽 위에까지 끌어올려 놓은 것을 비교한  엑
스레이 필름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하수는 서양의학적 방법으로는 특별한 
치료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완전 탈모나  난치성 안과 질환들이 대체의
학적 방법으로 치유된 데이터를 볼 수 있습니다. 
  마나까 선생은 자신이 원래 서양의학 전공자임에도 다소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  서양의학
의 맹점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질병을 전깃불이라고  비유할 때 그 전깃불을 
끄기 위한 방법에 있어서 서양의학은 보자기로 전깃불을 싸서  가리거나, 아예 몽둥이로 전
구를 깨버리는 것과 같다면 대체의학이나 동양의학은 시간이 더디더라도 스위치를 찾아내어 
살짝 누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증세 그  자체만을 억압하고 제거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전일적 통찰을 통해 증세의 근본원인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것입
니다. 
  나는 당시 마나까 선생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었으나 어쨌든 이 분을 만나면서 의
학을 바라보는 데는 여러 가지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체의
료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자 선생은 먼저 한국의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동양의학을 꼭  이
해할 것을 당부했고, 일본의 임상의사들 중에 대체의료를 활용하고  있는 여러 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대체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87년 봄부터 나는 모든 일을 미루고 몇 달 동안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주로 대체의학을 연
구하는 의사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자연요법 연구소를 운영하는 도쿄의 와타나베 쇼우 선생과 나고야의 가씨오 선생의  병원
에서 환자처럼 입원하여 단식을 직접 체험하면서 여러 가지 자연 요법의 원리와 실기를 배
웠습니다. 단식과 생식의 과학적 연구에  있어서 세계적인 개척자로 공인받고  있는 오사카 
대학의 고오다 교수의 연구소에 있는 동안 많은 환자들을 접촉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 단
식과 생식을 비롯한 자연요법의 탁월한  생명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참으로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오사카 대학의 예방의학 교수를 역임한 마루야마 히로시 선생은 당시 일본의 대체의학 연
구가들의 대부격이었는데, 이 분은 동양의 전통의학들 특히 인도의  아유르 베다를 꼭 공부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대체의학에 관한 이 분의 연구 가운데서도 특히 식
용 소금에 대한 연구는 아주 유명합니다. 마루야마 선생의 주장에 따르면 식용으로 널리 쓰
이고 있는 뽀송뽀송한 정제염은 화학약품과 같은 것이므로 사람이 결코 먹어서는 안되며 자
연 그대로의 천일염은 불에 구워 볶음 소금으로 먹을 경우는 입맛에 맞는 만큼 짜게 먹어도 
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개 서양의학에서는 짜게 먹는 것을 경계하고 있으나 이는 하얀 정
제염에 한해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요. 
  소화기 내가 의사로서 부항과 식양요법을 주로 해서 특히 간장질환의 치료에 명성을 얻고 
있는 후쿠오까의 안도오 선생, <생명의 의학, 생명의 농업>이라는 유명한  저서의 내용처럼 
인간의 생명을 하나의 우주로 보고 자연과의 전체성 속에서 관찰해야 한다는 나라의 생태주
의 의사 야나세 선생, 구마모토 대학 내과 교수로 재직 중에 본인의 만성간염을 대체요법으
로 극복한 뒤 교수직을 그만두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꾸찌 양생요양원을  운영하는 
다께구마 선생, 도쿄 대학 생리학 교수로 재직 중에 서양의학의 약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대
안의학을 제시한 모리시타 선생 등을 만났습니다. 지난 십여 년간 내가 활용해 온 대체의학
의 방법들 가운데 많은 부분은 주로 이 분들에게서 배우고 익힌 것들입니다. 
  87년 가을 IPPNW(핵전쟁 방지 국제 의사회)와 관련된  일 때문에 미국의 하버드 보건대
학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 단체의 공동의장으로서 노벨상  수상자인 로운 
교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분은 심장병 전문의였는데도 대체의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
었습니다. 나는 이 분을 통해 서양에서도 다양한 대체의학이 독창적인 의료분야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서양의학과 병행하여 단식과 다양한 식양요법, 명상, 최면, 카이로푸락틱, 동종요
법 등과 같은 대체의료를, 면허를 가진 의사들이 환자치료에 실제로 활용하고 있었고, 미 연
방정부와 의료보험 회사들이 대체의학의 연구를 지원하고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느꼈습
니다. 
  나는 이때 <자연 치료의 백과 사전>, <자연요법의  실제> 등을 비롯하여 과학적 검증을 
통해 연구된 다양한 대체의학의 문헌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양의학
만을 신봉했던 나는 의학 자체를 보는 고정된 시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학에는 서양의학 말고도 여러 가지 대체 의학이 있을 수 있으며 같은 질환에 대한 치료
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87년 한해 동안 일본, 미국의 방문, 그리고 국내의 대체의료 연구가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하여 그 후 다시 환자를 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나는 화학약품
이나 수술만을 치료방법으로 여기는 데서 상당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서양의학
을 도외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환자를 위해서 어떤 것이 최선의 치료법인가를 검토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요. 실제로 나는 자연요법과 같은 대체의학의 방법을 통
해서 새로운 차원의 치료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의학에는 독특한 장점이 있다
  내가 대체의학의 장점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활용하기 시작할  무렵인 87년, 50대 후반의 
간암 환자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암 덩어리가 두 주먹 크기로  만져졌는데 한 대학 병원 암 
센터에서 한 두 달 내에 사망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고  입원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이 환
자는 내가 근무하던 병원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통증이 심해지자 단지 진통을 목적으로 나
를 찾아 왔습니다. "꼭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으나 이 방법이 통증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
다"고 설명하자 환자와 가족은 내  방법대로 따르고 싶어했습니다. 생식을  위주로 몇 가지 
식이요법, 명상, 자기암시, 기타 자연요법의 방법들을 병행했는데  환자분이 이 방법을 믿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입원 일주일만에  통증이 거의 사라지고 식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약 40일 가량 입원했는데 이 사이에 많은 호전이 있었습니다.  퇴원 후 자가 치료를 꾸준히 
계속하다가 약 3개월 후 처음 진찰 받았던 암센터에서 재진을 받았는데 너무 호전되어 있어
서 의사들이 이상하게 여기더라는 것입니다. 약 6개월 후 이 환자의 암은 흔적도 없이 사라
져 버렸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심부전증을 앓고 있던 40대 초반의 부인에게서도 특별한 일이 일어났
습니다.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다가 곧 사망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고 귀가하
여 가족들이 장례를 논의하고 있던 상태에서 나를 만났습니다.  극도로 탈진되어 있어서 숨
만 쉬지 않고 있다면 그대로 시체라고 할 지경이었습니다. 이  환자는 내게 오기 전까지 한 
달 가량 대변을 보지 못한 상태였는데 하제와 관장을 통해서 장내를 비우게 한 다음 야채즙
과 생수, 유동식 등을 조금씩 들게 하고, 많은 시간을 사지의 모세 혈관을 미세진동  시키는 
물리적 방법과 족탕법을 시행하였습니다. 명상과 상상법, 그리고 여러 자연요법을 병행한 결
과 약 3개월 후 이 부인은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식사를 준비해줄 만큼 회복되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나 자신에게도 놀라웠습니다.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그대로 시도해 본 것
뿐인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서양의학 교과서에는 말기 암과 같은 난치병 환자 천명 중에 한 두 명이 이유는 알 수 없
지만 저절로 낫는 경우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체의학을 통해서 좋아지는 경우가  모두 
여기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의학에는 서양의학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뛰어
난 장점과 치유력이 있습니다. 마치 서양의학 가운데는 다른 어떤 의학적 방법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치료의 힘이 있듯이 말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특별한 경험들이 계기가 되어 나는 자연요법 같은 대체의학의 방법들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장점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의학의 근본은 의식의 탐구     
  91년 가을부터 그 이듬해까지 나는 미국의 위스컨신 대학 의과학 센타의 의사학과에 연구
교수로 가 있었습니다. 이름만 연구교수일 뿐 의학사와 의학철학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었으므로 학생과 같은 입장에서 공부했습니다. 
  내가 의학사와 의학사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그동안 수박  겉햝기식이기는 
했지만 동양의학이다, 대체의학이다, 민간요법이다 하여 이것저것 주워 얻은 정보들을  하나
의 실용적인 체계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이 분야에 대하 기본적인 소양이 있어야겠다고 느
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돌이켜본다고 할 때  오늘의 의학의 참모습을 바로 이해하고  미래의 
의학을 전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기간에 내가 얻은 소득 중의 하나는 인도의 전통의학인 아유르 베다(Ajur Veda)를 배
울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국제 아유르 베다 의학회 회장인 Dr. Chopra가 주관하는 이 교육
은 환자를 임상에서 직접 관찰하며 아유르 베다의 이론과 실기를 익히는 코스였는데 이 과
정을 이수한 의사들에게는 아유르 베다 치료법을 환자에게 사용해도 좋다는 라이선스가  주
어집니다. 내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아유르 베다 메디컬 닥터라는 라이선스를 얻은 셈이
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그 동안 그 실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유
르 베다를 통해서 가장 크게 배운 바는 순수의식의 힘이며,  의학이 포용할 수 있는 범위가 
한없이 광대하다는 점입니다. 
  아유르 베다는 고대 산스크리트어로서 생명이라는  뜻의 아유르와 지식 또는  과학이라는 
뜻의 베다의 합성어입니다. 아유르 베다라는  말의 의미가 표현하고 있듯이  이것은 한계도 
없는 무한한 생명의 탐구를 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유르  베다는 생명과 자연 
치유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의사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병을 치유시키
는 근본 에너지를 자연치유력이니, 생명력이니 하고 말들은 하지만 대부분의 의학체계는 이 
자연치유력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아예 탐구 대상으로 삼고 있지도 않은 것 같습
니다. 서양의학의 경우 병이 치유되는 현상적인 메커니즘만 설명하고  있을 뿐 현상 너머의 
치유력의 근원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치유력, 생명력의 실체는 
실증과학으로 탐구될 수 잇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유르 베다에서는 건강과 질병을 결정짓는 최초의 원인을  의식과 신념으로 보고 이
것을 다루는 데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본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고 지금과 같은 생명관과 의료관을 가지
도록 큰 도움을 주시 분은 청화대화상과 해리 팔머입니다. 
  이 분들은 생명과학이나 의학을 전공한 바는 없지만 내가 만난 가정 위대한 생명과학자이
자 의학자입니다. 이 두 분과의 조우를 통해서 나는 생명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전체적이고 
다차원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새로운 통찰과 메시지를 얻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의 금강선원에 주석하고 계시는 청화대화상께서는 모든  정통적
인 종교와 동서고금의 위대한 철학, 과학사상 가운데에 일관하는 생명관과 우주관을 하나의 
원리로 회통시켜 내보임으로써 생명의 실상, 생명의 본질이란 무엇이며 생명의 본질을 체험
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명징하게 비추어주고 계십니다.  이 분은 
모든 종교와 사상의 갈래를 초월하여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성자 가운데 한 분이
며 온 인류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신성의 빛  그대로입니다. 한 인간이 
마음을 닦고 인격을 완성해 갈 때는 이렇게까지도 아름답고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는 것을 영성을 통해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미국의 플로리다 올랜도의 해리 팔머는 원래 교육심리학자였는데 깊은 순수의식을 체험한 
후, 과거 성인들이 한결같이 증명하였던 우주와 생명의 근본원리를 현대인들의 의식 수준에 
맞도록 쉽게 풀어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바타 코스'라는 영적 
진화 및 의식탐구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짧은 기간 동안에 자기 생명의 본성
과 물질 우주의 창조의 배경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 분은 모든 존재가 
한결같이 무한한 생명의 근원임을 자가하게 함으로써 한정된 의식과 주입된 신념의 틀을 넘
어서 삶을 창조적으로 살 수 있게 하고 나아가서 인류가 밝은 문명을 함께 창조할 수  있도
록 그 방향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바타 프로그램의 직접 경험을 통해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생명의 근원은 한정지을  수 
없는 순수의식이며, 질병이나 고통 또는 건강이나 행복을 지어내는 최초의 원인이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
에서 나는 환자가 자신의 신념체계를 바꾸는 것만으로 질병에서 풀려나는 것을 여러 번 경
험했습니다. 
  여기에 일일이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책의 여기저기에서 나는 이 두 분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인용하고 있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나는 이제 환자의 몸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지 않으며 질병의 최초의 원인이 되는 의식
과 신념을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질병을 바라볼 때 종점에는 물
질적이고 분석적인 관점에 치우쳐 있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관점과 더불어 의식적이고  총체
적인 시각을 함께 갖게 되었다고 표현한다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한 개인이 질병이나 불건강 가운데 있게 되는 데나 또는 질병이 치유되어 건강을 회복하
게 되는데 있어서 그의 신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치료자나 환자나 신념의 위대한 힘
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치료자와  환자를 도와주는 가장 
큰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환자와 그 가족이 지금 만나고 있는 의사와 치료가를 신뢰하고 선택한 치료법을 믿고 있
다면, 또한 동시에 그 의사나 치료가가 자기 환자를 참으로 사랑하며 자신의 치료방법을 믿
고 있다면 반드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일곱째 마당-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길   
    우리 몸의 감각이 곧 진실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사물을 보고 듣고 맛보
고 냄새맡고 만질 수 있는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 몸을 엄연한 물체 
덩어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보고 만질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렇지만 몸이라는 것이 
감각이 지각하는 것처럼 물질로 꽉 차있는 것이 사실일까요? 
  사람 몸의 약70%가량은 물로 되어있습니다. 물은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로 구성되어있지요. 
수소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1개의 전자가 산소는  8개의 전자가 돌고 있는데 원자핵이 주먹 
크기만 하다고 할 때 원자핵으로부터 약 20km나 떨어진 곳에 좁쌀보다 작은 크기의 전자가 
돌고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은 모든 원자의  99.9%가 텅 빈 공간이며 이공간  가운데 진동하
는 에너지인 소립자가 빛의 속도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자들은 허공과 같아서 우리 몸은 사실 빈 것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몸이 텅 빈 허공으로 지각되지 않고 물질로 꽉 차 보일까요?  
  우리 눈은 빛의 파장을 통해서 사물을 지각합니다. 눈이 지각하고 있는 빛의 파장의 진동
폭이 원자핵과 전자사이의 거리보다 커서 눈의 빛이 몸의 원자들 속을 뚫고 지나가지 못하
기 떄문입니다. 이를테면 테니스 공의  크기가 테니스네트의 구명보다 크기  때문에 네트에 
걸려 통과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만일 우리 눈이 x선으로 지각한다면  딱딱한 뼈는 
통과하지  못하고 물렁물렁한 조직은 통과하므로  사람 몸은  해골과 뼈로만  보일 것입니
다. 더 짧은 파장인 감마선으로 지각하게된다면 사람  몸을 다 투과하여 몸은 흔적조차  보
이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고 다 통과하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눈의 지각능력은 상대적이며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
는 가시광선 너머에는 우리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주파수를 가진 빛의 영역이 가시영역과
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많은 대상들
을 우리는 지금 못보고 있습니다. 빛뿐만이 아니라 소리, 냄새 , 맛, 촉감들도 사람의 감각기
관은 극히 한정된 범위의 것만 지각할 수가 있고 그 범위 너머의 무한히 넓은 영역의  것들
은 다 놓치고있는 것입니다. 감각기관에서 보내오는 반응의 양과  농도가 너무 거칠고 크기 
때문에 이 거친 것이 섬세한 지각과 느낌을 제압한 나머지 우리의식이 감각기관의 거친 지
각에만 반응하는 꼴입니다. 
  내 감각기관으로 감지가 안되는 그 넓은  영역의 것을 없다고 주장하거나 감지되고  있는 
좁은 범위의 것만 사실이라고 고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마치 대롱을 통
해서 하늘을 내다보고 대롱 속에 비치는 하늘만 하늘이고 대롱 밖의 것은 하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우리 감각기관은 우주와 세계를 몇  만 분의 일도 감지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감각기관에만 의존하게 되면 환상을 실상으로, 가짜를 진짜로 잘못  보
게 되거나 거꾸로 보는 착오에 빠지게 됩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우리 
감각기관은 날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을 의심할 바 없는 사실로 받
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구의 자전현상에 대한 우리 감각기관의 착각입니다. 감
각기관을 믿지 말아야합니다. 이들은 모두 착각을 가져다주는 틀린 잣대입니다. 아무리 뛰어
난 과학기술과 도구가 개발되어 놀라운 정보를 알아낸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우리  감각기
관과 한정된 의식의 필터를 통해서 다서 번역하여 인식해야 하므로 결국은 한정된 정보만으
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한정된  이해와 체험밖에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생명과 우주의 
본질과 실상을  사실대로 알고자 한다면 우리의 오관과 한정된 의식의 울타리 밖으로 나아
가서 탐색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탐색의  여행이 가능합니다. 바로 직관의 통찰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은  나와 대상을 이분화  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감각기관의 한계만큼만 경험하게 해주지만 직관은 나와 대상이 하나되어 내가 바로 그 대상
으로서 전체적으로 경험하게 해줍니다. 이 직관의  개발이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보게  하
는 잣대를 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직관의 능력을 키워갈 수가 있습니다.
    과학은 절대진리인가?
  언제부터인가 인류의 대중의식 가운데는 과학이 아니면 진리가 아니라는 집단신념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증과학을 통해서 증명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는 태도입니다. 과학적인 증거가 있는 것만 진실이고 과학의 영역 밖의 것은 진실이 아니라
고 고집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과연 과학으로 증명된 것은 확실히 진리라고 믿어도 괜
찮을까요?
  과학 맹신자들은 과학이야말로 명백한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하지요. 그들은 이러한 객
관적 사실체계를 진리로 증명하기 위해 그 증거로서 또 다른 많은 사실들은 동원하기도 합
니다. 이 증거를  보아라. 그런데도 진실이 아니냐는 식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 사실
증거라는 것이 하나의 사물에 작용하는 어떤 요인이 그 밖의 다른 요인들과 얼마만큼의 관
계를 가지고 있다는 강한 믿음일 뿐입니다. 따라서 과학이란  세상의 여러 신념체계들 가운
데 돋보이는 하나의 신념체계일 뿐입니다.  과학자들도 대개는 자기 생의  말년에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그 믿음에 이의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증거로 써왔
던 사실이라는 것이 자신의 관점에 대한 강한 확신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다
른 패러다임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과학이란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다른 창조와 마찬가지로 한계와 제한을 가진 창조입니다. 
모든 창조물 등은 한결같이 집단 신념에  의해 창조되고 경험되며 경험의 한계에  도달하면 
소멸되는 사이클을 따라갑니다. 실증과학이라는 창조 역시 이 사이클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은 시간성과 공간성의 한계 내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세계를 빚어내는 생명과 우주의 근원, 본질은 한계가  없으며 시간과 공간 너머
에 있으며 물질도 모양도 차원도 없으며 말로 설명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다만 허무가 아니라 우주만유의 현상세계를  창조해내는 무한 가능성입니다. 따라서 
생명과 우주의  이 한계 없는 근원과 본성을 한정된 잣대로 잴 수가 없습니다. 
  10cm 짜리 잣대로 수만 km이상의 거리를 재려고 한다거나 1kg짜리 저울로 수 만  톤 이
상의 무게를 측정하려고 한다면 그 일이 가능할까요? 만일 누가 대롱을 통해서 하늘 전체를 
보겠다고 애쓰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과학의 성취는 대롱 구멍정도입니다. 
  위대한 과학자일수록 대체로 자신이 알고 있는 과학적 진실을 모래밭에서 주운 한두 알의 
모래 정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수준이 이러하다고 하여 과학의 발전성과나 과학적 
방법론을 과소평가하거나 폄하하는 신념 또한 한계를 지닌 창조입니다. 과학의 성과는 한계
가 있으나 인류의 삶과 문명의 진화에 큰  기여를 해왔으며 우주와 생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또한  현대물리학을 비롯한 선진과학은 우주가  곧 하나의 
생명임을 증명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전통적인 분석주의적 방법으로는 
이 한계를 넘어 직관적인 탐구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종래와 같은 분석주의 적인 실증과학만을 수단으로 하여 모두를 알려고 하거
나 만사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지닌 속성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고   맙니다. 확실히 
해둘 것은 과학은 단지 신념체계이며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과학은 절대진리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해마지 않습니다. 다만  변화하
지 않는 것 하나는 모든 존재가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한다는 사실뿐입니다. 
  오늘의 과학적 진실은 내일의 미신입니다. 과학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인류가 가지고 노
는 놀이이자 게임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지요.
 
    우주와 나는 하나의 생명
  우리 시대 대부분의 인류에게 익숙해 있는 우주관, 생명관은 이러한 것 같습니다. 
 1.절대시간, 절대공간, 절대물질이 존재하며 내 생명은 한정된  공간 가운데 살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죽고 마는 물질적 존재이다. 
 2. 나는 객관적 세계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며 세상의 다른  존재들도 서로 분리된 채 독
립되어 있다. 각각의 존재들은 우주의 한 부분이다.
 3. 의식과 물질, 마음과 몸, 주관과 객관, 신과 세계는 분리하여 존재하는 이원성이며  나는  
내 밖의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4. 의식은 물질우주로부터 진화되어 나온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의식은 
뇌라고 하는 물체의 생화학적 작용의 산물이다
 5.이 물질우주와 의식은 절대적 창조자에 의한 우연한 창조의 결과이다. 신념은 의식을  가
진 존재들의 물리적 현실에 대한 경험의 결과이다. 
  이러한 관점들은 대체로 고전 물리학의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낡은 
패러다임은 점차 퇴조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미래의 많은 인류는 이러한 가정을 더 이상 받
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한정된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의식을 자유롭게 확장시킬 때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책 속에서 내가 하는 이야기는 이러한 가정의 관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런 확장된 
의식의 관점은 전일적 우주관, 전일적 생명관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1.절대시간, 절대공간, 절대물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내 생명은  공간의 한정과 시간의 제약
을 초월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순수의식의 존재이다. 
 2. 나와 객관세계와의 분리는 환상이며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전체성
이다. 내가 곧 우주이며 우주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다. 
 3.물질이 곧 의식이고 마음이 곧 몸이며 신이 곧 세계이므로 어떠한 것도 둘로 나눌 수 없
는 일원성이다. 나는 결코 피조물이 아니고 내가 나의 몸과 물리적 현실을 지어낸다. 
 4.의식이 물질무주로부터 진화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의식이 물질우주를 창조한다.  따라서 
사람 몸의 생화학적 작용은 의식의 산물이다. 
 5.이 물질우주는 의식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집단신념이 공동 창조한 결과이다. 물리적  현
실에 대한 일체의 경험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의 신념의 결과이다. 
  어떤 분이 이것을 읽고 전자는 유물론에  근거하고 있고 후자는 관념론에 근거한  관점이  
아닌가 라고 평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가 맨 처음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철학체계를 창조해놓고, 세계를 이해하자면 
이 가운데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우주와 생명의 본질
을 참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물론이나  관념론의 한계 너머로 가야만  합니다. 유물론과 
관념론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한계를 가진 창조입니다. 한계도 끝도 없는 우주와 생
명을 한계 있는 창조로서 잴 수가 없습니다. 
  우주와 생명은 철학적 사고너머에 있습니다. 유물론이나 관념론 같은 철학적 사고를 도구 
하여 우주와 생명을 탐구하려는 것은 무리입니다.
  달밤에 내가 북쪽으로 가면 달은 나를 따라서 북쪽으로 오고 내가 남쪽으로 가면 달도 나
를 따라 남쪽으로 옵니다. 내가 빨리 가면 달도 빨리 가고 내가 멈추면 달도 멈춥니다. 달은 
나만 따라다닙니다. 이것은 나의 감각이 지어낸 착각입니다. 실제로는 달은 북쪽으로나 남쪽
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람들이 엄연한 진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이 이런 식의  착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논쟁이라는 것도 잘 살펴보면 갑은 달이 북쪽으로 간다고 주장하고.
을은 달이 남쪽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부분의 철학체계는 마치 연극이 중간에 들어간 관객이 한 두 장면을 보다가 그만둔 경
우와 같이 시작도 끝도 알 수가  없습니다. 결론은 잘 모른다 입니다. 세계와 인간의  본질
은 애당초 한정된 머리로 따져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주와 생명의 알맹이 본성은 어떠한 한계도 하원도 없으며 시간과 공간도 없으며 물질적 
질량도 물리적 에너지도 없으며 도대체 있다. 없다는 표현 너머에 있으며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보는 대로 물리적 우주와 생명체들을 지어내는 
무한한 가능성의 근원입니다. 이것은 사고와  토론에 중독되어 가지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분석할 수도 측정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을 분석하고 측정하고 상상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우주와 생명의 본체를 투철하게 하고자 한다면 철학, 심리학, 물리학, 의학과 같은 
상대유한적인 신념체계들의 벽을 뚫고 나가야만 합니다. 
  무엇을 아는 데는 지적으로 알기와 직접경험하기가  있습니다. 장미꽃 향기가 어떠하다는 
것을 지적으로 알기와 그 향기를 직접 맡아보기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과 맛을 머리
로 알기와 직접 먹어보기의 차이는요?
  경험하기란 경험자가 경험대상과의 분리를 그만둘 때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어떤 기대나 
판단이나 한정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험자의 지각이 경험대상과 온전히  하나되기 입
니다. 
  생명의 본성에 대한 탐구자가 탐구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여 이원화시킬 때는 머리로  알기
만 이루어집니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관찰자가 관찰대상인 우주가  나와 따로 있다는 생각
을 가지고 잇는 한에는 경험하기가 안됩니다.  나라는 생각,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의  거품 
속에 갇혀있는 한 탐구자가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탐구결과는 우주와 생명
의 도리에서 빗나가버립니다. 그는 결코 경험하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철학과 같이 지적으로 알기라는 것은 생각의 거품이 다른 생각의 거품들을  생각하기 입
니다. 나라는 자아의식이 다른 자아의식들을 탐구하기입니다. 지적으로 알기는 한정된  자아
의식으로서 알기이며 경험하기는 한정 없는 순수의식으로서 알기입니다. 
  어느 분이 이 책을 읽는 도중,  "당신의 이야기는 비약이 심하다. 이것은  비과학적인  사
변이며 신비주의가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곧 바로 "네, 당신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답
하겠습니다.
  우주와 생명은 기존의 낡은 세계관의 틀에서 비약해야만 알  수가 있습니다. 우주와 생명
의 본성은 과학 너머에 있으며 그 알맹이는 원래가 신비부사의한 무한가능성입니다. 
  "그래도 당신 이야기 가운데는 비상식적인 것이 많다"고 한다면, 나는 또 "맞는 말씀입니
다"라고 하겠습니다.
 우주와 생명은 우리가 붙들고 있는 상식 너머로 갈 때만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정이나 학교나 사회에서 보고  배운 주입된 신념들-물질은 내가 보는 그
대로 존재한다. 나는 객관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나는  몇십 킬로그램의 몸뚱어리이다. 나는 
태어났으니 언젠가는 죽고야 만다- 과 같은 허구의  최면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우주와 생
명은 끝끝내 알 수가 없습니다. 
  최면에 걸려있는 동안은 죽음의 문에서 죽음의 문으로 이어지는 캄캄한 여행을  계속해야
만 합니다. 나라는 생각의 협소한 거품 속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동안은 우주는 나와 분리
된 채 나의 밖에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의  거품을 깨버리면 우주와 나의 분리
는 사라지며 우주는 나와 더불어 하나의 생명입니다. 나라는  생각의 거품을 걷어내고 거기
에서 빠져 나오는 일이 가능합니다. 
 
    내 생명은 시공을 초월한 무한가능성
  나와 객관세계가 이와 같이 모양을 띠고 나타나게 되는  근본 바탕, 근원이 무엇이겠습니
까? 내 몸이나 온갖 물체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가들, 죽음  후에도 남는 다는 영혼들. 이
런 것들이 어디에서 창조되어 나오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물질과 정신현상이 비롯되는 근본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말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요?
 지금 당장 이 우주가 몽땅 파괴되어 내 몸이나  지구, 태양,  모든 별들, 모든 물체가 일시
에 다 사라졌다고 가정합시다. 텅 빈 허공뿐입니다. 물질적 존재뿐 아니라 일체의 정신적 현
상들도 다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합니다. 온갖 판단, 신념, 기억, 일체의 생각들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지막 생각인 '나', '내가 있다'는  생각까지도 없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무엇
입니까?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알 수 없는 텅 빈 허공뿐인가요?
  지금 텅 빈 허공뿐이라는 것을 누가, 무엇이 알고 있는 것입니까?  
  의식입니다.
  이 허공을 지켜보고 있는 앎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있으며, 판단, 생각이  없
는 오직 알고 있음인 곧 순수한 의식입니다.
  이물질 우주가 모두 사라져 버리더라도 그 사라짐을 알고 있는 허공 같은 의식의 세계가 
모든 것의 근원이자 뿌리입니다.
  이 근원의 질료로부터 당신의 몸, 별들, 물체들, 물리적 에너지, 판단과 생가들, 나라는 생
각이 지어져 나옵니다. 
  이 허공 같은 의식의 세계가  당신의 생명의 고향이요 근원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몸이 당신이 아니라 이 허공이 진짜 당신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우주의 중심, 세계의 중심입
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우주의 중심일 것인가 하며 자신을 축소시키고 움츠리며 빠져나가
려 해도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절대진리라고 말해도 됩니다. 그래도 당신이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거짓 겸손입니다. 허공  같은 순수의식인 생명의 근원은  시간도 한정된 
공간도 어떤 차원도 없습니다. 물질적 질량도 물리적 에너지도 없으므로 어떤 과학기술로도 
측정,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익혀온  무엇이 있다, 없다는 기준이나  감각 너머에 있으므로 
상상할 수도, 더구나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이것을 한정지어 정의를  내
리고 이름을 붙이고 문자로 표현하게 되면 곧 바로 그것에서 빗나가 버립니다. 
  묘사 불가능함입니다. 
  묘사 불가능함이라는 말 또한 그것을 한정지어  정의를 내린 말이므로 이것 또한  빗나간 
소리입니다. 이처럼 알 길이 없고  표현할 길이 없는 허공 같은  의식세계로부터 내 몸이나 
천지우주가 모양을 나타내며, 여기로부터 나라는 생각, 온갖 판단과 상념들이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미묘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과거의 앞, 미래의 뒤, 모든 공간들의 앞 뒤, 무수한 차원의 현실들의 일체의 배경
인 통일성입니다.
  이것은 무한 지혜의 본성이며 무한 능력의 근원입니다. 여기에는  죽음이 없는 무한 생명
력과 한없는 행복,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고의 사랑이자 자비심 
덩어리입니다. 모든 생명체와 창조물들의 본성인 신성의 정기입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거이 없고 없는 곳이 없는, 그리하여 신, 하나님, 부처와 
같은 영성의 개념이 나오게 되는 근원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신이라고 부르건, 하나님이라고 
부르건, 부처라고 부르건, 창조자라고 부르건,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르건, 또는 순수의식, 우
주의식, 절대의식, 절대자 ,유일자, 도, 하늘, 진리......무엇이라고 부르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순수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당신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마음 가운데 어디에 따로 있다기보다는 당신 마음의 가장  저변, 마음 밑바닥이 순수의식
입니다. 
  이 의식의 상태는 좋다. 싫다와 같은 판단이 없으며 내가 있다는 생각까지도 없습니다. 나
와남의 구분도, 신과 나와의 구분까지도 없는,  어떠한 기대난 의도도 없는 그렇지만  깨어 
있으며 알고 있는 의식의 상태입니다. 
  순수의식은 생각이나 말로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내가 순수의식 속에 녹아들어서 순
수의식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순수의식이 지닌 특성의 하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을 시간과 공간 너머로 확장시킬 수 있다면, 즉 시공을 초월하는 느낌 속에 잠길 수 있
다면 어렴풋이라도 순수의식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 너머로 가기
  우리 몸은 피부로 한정된 공간을 지니고 있고, 나서 죽을 때까지 몇 십 년 동안이라는 한
정된 시간 안에 있습니다. 몸이란 다른 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이 실존한다는 근
거 위에 존재합니다. 만일 시간과 공간이 실존하지 않는 다면 몸도 실제로 있다고 할 수 없
겠지요.
  시간과 공간이 사실로서 실존하는지 탐색해 보는 일에 호기심이 가나요?  우리에게는 대
체로 1년, 10년, 100년과 같이 한정된 시간의 길이가 꼭 사실처럼 있어 보입니다. 
  과연 한정된 시간이 확실히 있을까요?
  다음 내용을 옆 사람이 천천히 읽어주거나 녹음기에 녹음한 것을 들으면서 연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눈을 가볍게 감고 편안한 자세를 취합니다. 
  아랫배로 천천히 호흡을 합니다.(약 1분간)
 1. 이제 호흡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지나간 1신간을 느껴보십시오.(느끼는 시간은 약30
초 내지 1분간이 적당함)
 2.이제 지난 하루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3.이제 지난 한달 동안을 느껴봅니다. 
 4.이제 지난 1년 동안을 느껴봅니다. 
 5.이제 지난 10년 동안을 느껴봅니다. 
 6. 이젠 지난 100년간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7. 이제 지난 천년 동안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여기서부터는 필요하다면 조금 상상을  보태
도 됩니다.  
 8. 이제 지난 1만년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9. 지난 1백 만년을 느껴봅니다. 
 10.지난 1억 년을 느껴봅니다. 
 11.지난 100억 년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12. 이제 지난 1조년의 길이를 느껴봅니다. 
 13. 다시 그것의 백 배를, 또 백 배를.........
 14. 눈을 계속 감은 채로 자, 이제 과거라는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을 찾아봅시다. 여기서부
터 과거가 시작되었다고 결정할 수 있는  시점이 있습니까? 
 15. 눈을 계속 감은 채로 한도 끝도 없는 과거너머의 시간 없음을 느껴보십시오.(약1분간)
  이제 천천히 눈을 뜨십시오. 어떻습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의식이 넓게 확대된 느낌이
었습니까? 거기에 과거라는 한정된  시간이 존재하고 있었습니까?   위의 연습내용을 단지 
읽고 생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경험을 해본다면  특별한  느낌을 얻을 것입니다. 
여기서 얻은 느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미래의 시간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눈을 가볍게 감고 아랫배로  천천히 호흡을 합니다.(약 1분간)
 1.  이제 호흡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다가올 한 시간을 느낍니다.
 (약30 초 내지 1분 동안)
 2. 이제 다가올 하루 동안을 느낍니다. 
 3. 다가올 한달 동안을 느낍니다. 
 4. 다가올 1년 후를, 10년 후를 느껴봅니다. 
 5. 100년 후를, 천년 후를, 여기서부터는 필요하다면 조금 상상을 보태도 됩니다. 
 6. 1백만 년 후를 느낍니다. 일 조년 후를 느껴 봅니다. 그리고 다시 그 백 배의 시간의 길
이를 , 또 그것의 백 배의 길이를...........
한도 끝도 없는 미래도 쭉 나아가 무한한 미래 너머의 시간 없음을 잘 느껴보십시오.
 7. 눈은 계속 감은 채로 자, 미래가  끝나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여기서 미래가 끝난다고  
결정할 수 있는 시점이 있습니까? 지금 경험하고 있는 그 느낌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이제 천천히 눈을 뜨십시오. 어떻습니까? 거기에 미래라고  하는 한정된 시간이 존재하고 
있었습니까?
  
  과거라는 시간의 인상을 내가 지금 떠올리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라는 시간의 인상을 지금 지어내지 않는 한 미래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 가운데 과거를 허용하는 수준만큼 과거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며, 내가 허
용하지 않는 한 과거는 나에게 존재하지도 영향을 미치지도 않습니다.
  과거에서 시간이 시작하여 현재로 흘러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과거의 시작이자  미래의 
시작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시간은 영원한 지금일 뿐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다면 한정된 시간이란 없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가버려서 지금 없
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지금 없습니다. 현재 또한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으므로 지금  잡
을 길이 없으니 현재도 없습니다. 
  시간의 있음이란 오직 지금이라는 순간순간의 흐름일  뿐입니다. 순간순간의 지금 가운데 
내가 과거라는 생각, 현재라는 생각, 미래라는 생각을 지어 낼 따름입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중간 시점인 현재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진행형의 순간 속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뿐입니다. 
  한정 없는 시간이라는 바다 위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물거품이 들쭉날쭉 뛰놀고 있는 것
과 같습니다. 그러니 시간이란 나의 의식이 지어낸 하나의 생각, 하나의 인상에 지나지 않습
니다. 
    공간 너머로 가기 
  우리에게는 대체로 내 몸이 차지하는 공간, 내 집이 차지하는 공간, 지구가 차지하는 공간
처럼 한정된 크기의 공간이 꼭 사실처럼 있어 보입니다. 과연 이렇게 한정된 크기의 공간이 
참으로 존재할까요?
  이번에는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한번 알아봅시다. 
  먼저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아랫배로 천천히 호흡을 합니다. 
 1. 이제 호흡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당신의 몸에 대해 저절로 떠오르는 인상을 느껴보
십시오.(느끼는 시간에 제약을 받을 필요는 없으나 대강 1분 정도면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
은 처음에 선명했던 인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다음 단계로 가는 것입니다. )
 2. 이제 당신이 있는 방의 전체적 인상을 느껴보십시오. 방안의 이곳저곳을 애써서 또 올리
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상의 윤곽을 느끼면 됩니다. 
 3. 이제 다시 당신이 있는  동네의 전체적 인상을 느낍니다.(여기서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인상에다 흥미롭게 주의를 보내는  것입니다.) 
 4. 이제 당신이 있는 도시의 전체적 인상을 느낍니다. 
 5. 이제 당신의 나라 전 지역에 대해 저절로 떠오르는 인상을 느낍니다. 
 6. 이제 다시 이웃 일본, 중국,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남극과 북극 
등으로 주의를 확대하여 세계의 전체적 인상을 느낍니다. 
 7. 이제 지구를 하나의 풍선이나 공처럼 여기며 당신 앞에 띄워 놓고 눈은 계속 감은 채로 
바라봅니다. 
 8. 이제 당신의 태양계를 느낍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 달,  금성, 화성 등 행성들이 함
께하는 태양계의 전체적 인상을 느낍니다. 이때 필요하다면 조금 상상을 보태도 됩니다. 
 9. 이제 다시 더 확대하여 은하계에  대한 전체적 인상을 느낍니다. 이 은하계는  태양계와 
같은 별들이 약 천 억 개 가량 모여 있는  별들의 집합체입니다. 은하계는 나선형으로서 마
치 원반이나 빈대떡 모양으로 가운데가 볼록하고 변두리는 얇삭한 형태라고 합니다. 은하계
의 직경은 약 10만 광년으로서 은하계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에 도달하려면 빛의 속도로 
10만년 동안 날아가야 합니다. 빛은 1초 동안에 지구 둘레를 일곱  바퀴 반을 돌 만큼 빠른
데 이 빛이 10만년을 날아가야 끝이 보이는 은하계입니다. 애쓰지 말고 당신이 생각하는 은
하계의 인상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느껴봅니다. 
 10. 자, 이제는 당신의 우주 전체에 대한 인상을 떠올려 느낍니다. 이 물리적 우주는 천 억 
개 이상의 은하계의 모임입니다. 천문학이 추정하는 우주의  넓이는 약 1,500억 광년입니다. 
우주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는  빛의  속도로 1,500억 년을 날아가야 합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아무튼 떠오르는 대로 당신의 우주를 통째로 느껴보십시오. 
 11. 이제 다시 물질우주의 한계너머로 날아가 봅니다. 의식이 날아가는 속도는 빛의 속도보
다 더 빠릅니다. 물질우주를 뒤로하고 멀리 나아가 바라봅니다. 별들이 저 멀리  가물가물하
게 보이나요? 이제 더 멀리 이동합니다. 별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텅 빈 허공뿐입
니다. 이제 이것이 무엇이라는 생각, 좋다, 싫다는 생각도  접어두고 내가 허공 가운데 있다
는 생각까지도 의도적으로 내려놓은 채 이 끝없이 맑은 허공세계가 느껴지는 대로, 허공 그
것이 되어 맘껏 느껴 보십시오. 
  자, 어떻습니까? 한정된 크기의 공간이 존재합니까?
  이제 잠시 참으로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무엇인가? 느껴보십시오.
 12. 천천히 눈을 뜨면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연습 끝)
  어떻습니까? 지금 편안하십니까?
  이 연습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순수의식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나요?  순수의식과 완벽
하게 하나되는 경험이란 이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희롭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시
간과 공간의 실체를  살펴봄으로써 당신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절대시간, 절
대공간이 존재합니까?
  시간과 공간은 다만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서 절대시
간, 절대공간의 전제 이에 있는 절대물질도 있지 않으며 내 몸 역시 절대적 존재라고 할 수
가 없습니다. 
 
    순수의식- 일체 생명이 나오는 곳
  어떠한 한계도 없는 순수의식의 차원에 있을 때는 신가도 공간도 물질도 내 몸도 나라는 
생각까지도 없지만, 내가 따로 있다는 한계 내의 의식, 즉 자아의식의 차원에 있을 때는  시
간, 공간, 물질, 내 몸, 나라는 생각 등 한계 있는 창조가  꼭 실제처럼 있어 보입니다. 
  이 허공 같은 순수의식으로부터 문득 나라는 생각, 내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마치 
허공 중에 한 개의 비누방울이나 거품이 떠오르듯이. 이 생각이 나와 객관 세계가 분리되어 
따로 있다는 신념이 일어나는 최초의 계기입니다. 
  나란 이처럼 순수의식의 허공 가운데  물방울처럼 문득 떠오른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한없는 순수의식의 바다 위에 나라는 생각의 파도 하나가 불쑥 떠올라 그 한정된 파도 하나
를 나로 여기며 수많은 다른 파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파도들이 자아의식 또는 개별
의식들입니다. 
  이 물질우주 안에서 나와 구별되어 보이는 수많은 남들, 대상들은 순수의식의 바다(참 나, 
생명의 근원)위에 떠오른 나의 다른 모습들이자,  나이 분신들입니다 순수의식의 전체적 차
원에서 볼 때 이들은 본래 분리하려 해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된 생명입니다. 나라
는 파도, 너라는 파도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며 환상입니다. 내가 따로  있다
는 생각이 내 몸과 물질이라는 환상을 지어내는 최초의 단서입니다. 그러나 본래의 나는 한
정 없는 순수의식의 존재이며 시공을 초월한 무한가능성입니다. 
  자신과 물리적 우주가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모르는 무지가 나와 이 세계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가져옵니다. 모든 '나'들이 이것을 바로 깨닫는  순간 세상 가운데 있는 모든 
투쟁과 고통은 일시에 소멸될 것입니다. 
  순수의식은 순수의식 스스로를 대상으로 놓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순수의식 가운데
서 스스로를 의식하고자 하는 하나의 충동, 즉 스스로를 대상으로 놓고 보고 싶어하는 생각
의 일렁거림이 문득 일어납니다. 마치  고요한 바다 위에 파도 하나가  불쑥 올라와 바다를 
바라보고 싶어하듯이. 순수의식 스스로를 대상으로 여기고  그것을 관찰하고자 하는 주체를 
지어내는 생각, 그것이 나라는 생각을 지어내는 최초의 순간입니다. 관찰자인 나와 관찰대상
인 그것을 분리시킵니다. 
  이처럼 나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자마자 이것이 나이고 저것은 내가 아니라고  자동적으
로 한정짓습니다. 한정 없는 순수의식의 바탕에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의 울타리 한계를 그
어 놓습니다. 나라는 것이 알고 보면 이와 같은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  '나'가 한정된 존재감을 느끼면서 자연히 너와 나의 분리감을 지어내고 차츰 시간, 공
간, 에너지, 물질, 자연의 형태와 운동 같은 한정된 차원의 존재들을 지어냅니다. 이것이  이 
물리적 우주가 창시되는 원인입니다. 순수의식의 무한한 순수에너지가 '나'들의 필터를 거치
면서 한정된 물리적 에너지로 바뀌고 그것이 물질 입자화 되어  이 세계의 모습으로 나타납
니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가정은  이러한 이치에  생소한 사람들
에게만 가정일 뿐, 옛부터 순수의식 그것과 하나된 존재들은  한결같이 경험하기를 통해 통
찰함으로써 이것을 명백한 진실로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분리시킨  내가 이제 대상을 보며 가지는 생각은 그것이 좋다(욕망), 싫다(저항)
입니다. 이것이 나라는 첫 번째 생각에 이어 뒤따르는 두 번째 생각입니다. 이 좋다, 싫다는 
생각이 현실 세계에서'나'들이 쓰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생각하는  마음이 현실을 향해 내보
내는 주의에너지입니다. 나의 필터를 거치기 전의 마음이 순수의식  곧 순수한 주의 에너지
입니다. 순수의식에서 나온 주의가 나를 통과할 때 무엇이 좋다는 판단과 섞이면 욕망의 마
음으로, 어떤 판단도 섞이지 않으면 순수한 마음이 됩니다. 
  크게 나누어 욕망, 저항, 순수라는 세 가지 성질의 마음이 물리적 현실을 지어내는 기본에
너지입니다. 이 세 가지 마음은 결코 아무런 힘이 없는  허무가 아니며 주파수와 파동을 지
닌 창조에너지이자 정보가 담긴 물질입자입니다. 의식은 곧 파동이며 파동은 곧 물질입자입
니다. 
  이러한 마음의 창조에너지는 의지만으로 조절되고 변화 될 수 있으나 그것이  물질입자로 
응결된 후에는 그것을 조절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의지와 물리적 노력의 양쪽이  요구됩
니다.  이를테면 몸에 질병이 굳어져 있을 때 의지의 힘으로 마음의 치유에너지를 동원하는 
일과 함께 몸에 대한 물리적 치료도 요구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상 세 가지 성질의 마음 즉, 세 가지 성질의  주의에너지가 강하게 집중될수록 더욱 뚜
렷한 현실이 됩니다. 
  순수의식의 주의 에너지에 욕망이나 저항이 섞임으로서 물리적인 창조에너지가 되고 이 
에너지가 물질현실의 기초가 되는 파동입자가 됩니다. 
  좋다는 신념이 좋아하는 그것을 욕망하여 끌어당기는 양성 전기적 성질을 띤 물리적 에너
지가 되며, 싫다는 신념이 싫어나는 그것을 저항하여 밀어내는 음성 전기적 성질을 띤 물질
적 에너지가 됩니다. 욕망이나 저항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주의는 양성도 음성도 아닌 중성
의 성질을 띤 물리적 에너지입니다. 판단하는 마음과 순수의식이 서로 다른 점은,  판단하는 
마음은 대상을 욕망 또는 저항으로 지각하여 물질현실을 응결시키지만, 순수의식은  굳어진 
현실을 녹여서 텅 빈 공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입니다. 
  '나'가 순수의식과 판단하는 마음 사이에  끼어 있는 렌즈, 필터입니다. '나'가  순수의식
과 물질우주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이처럼 나와  우주는  같은 근원인 순수의식으로
부터 함께 나옵니다. 순수의식의 빛이 나라는 생각의 필름을 통과함으로서 몸이나 물질현실 
같은 그림자를 지어냅니다. 나와 우주는 그것들의 근원인 순수의식과 더불어  분리할 수 없
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기- 그 생명에너지
  지금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이고 있는 주제 가운데서 기만한 것도 드물 것
입니다. 기를 하나의 리얼리티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와 함께  그것의 실용화에 대한 정보
가 담긴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기는 의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창조에너지이며 이것은 굳어진 물질 같은 형상으로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의식이 물질입자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기는  물리적 에너지로서 교량 역할
을 합니다. 의식이 기가 되고 기가 물질로 됩니다. 
  기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에너지 즉  자연치유력이며 이것이 물질입자화 되어  몸의 
모양을 나타냅니다. 즉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이 눈에 보이는  몸으로 될 때 기는 에너지로서 
중간다리 역할을 합니다. 마음이 기가 되고 기가 몸이 됩니다. 
  우주와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으로부터 순수한 주의가 흘러나오며 이 순수한 주의는  나
의 렌즈를 통과하여 대상을 향해서 보내집니다. 이 순수한 주의는 '나' 속에 있는 욕망의 신
념과 저항의 신념의 필터를 통과하면서 욕망의 주의와 저항의  주의로 바뀌게 됩니다. 순수
한 주의 가운데 일부는 욕망과 저항의 신념과 섞이지 않은 채 순수성이 유지되어 보내집니
다. 
  나를 통과한 세 가지 성질의 주의 즉 욕망의 주의, 저항의 주의, 순수한 주의는  이제부터 
각각 나름대로의 정보를 가진 에너지 파동이며 물질입자입니다. 욕망의  주의는 +전기적 성
질을 띤, 저항의 주의는 -전기적 성질을 띤,  순수한 주의는 중성의 전기적 성질을 띤 물질 
입자입니다. 이세가지 성질의 주의가 물질우주와 현실을 창조하는 창조에너지입니다. 
  주의란 곧 마음이요 의식입니다. 주의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것은 다만 추상적인 어떤 
것이거나 아무런 힘이 없는 허무가 아닙니다. 주의는 구체적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 파동이
자 물질의 작은 알맹이입니다. 이것은 다만 추상적인 어떤 것이거나 아무런 힘이 없는 허무
가 아닙니다. 주의는 구체적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 파동이자 물질의 작은 알맹이입니다.  이
것은 물질의 기본단위인 원자를 구성하는 양성자, 전자, 중성자와 같은 소립자들의 모태입니
다. 주의가 그대로 물리적 에너지이며 주의가 그대로 물질입자입니다. 
  주의가 바로 기입니다. 
  마음. 주의, 기, 우주적 정기, 창조에너지, 생명에너지, 자연치유력, 프라나.....
  이들은 모두 같은 뜻의 말입니다. 
  우주에 충만한 기, 우주에너지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는데, 이 우주에너지란 특별한  절
대자가 높은 하늘 어디에서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우주 가운데 의식을 
지닌 모든 존재들이 공동창조한 결과입니다. 나의 현실적 삶은  이 우주에너지와 자신이 지
금도 지어내고 있는 에너지의 상호작용 가운데  잇습니다. 순수의식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기가 나의 신념의 필름을 통과함으로서 그 신념의 의도나 성질에 따라 기가 변화되고 그것
은 그 신념의 청사진에 부합되는 물질 현실로 입자화되어 모양을 나타냅니다. 
  
  대체로 한 개인이 통제하고 부려 쓸 수 있는 기의 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욕망과 저항이 없고, 내가 있다는 생각마저 사라진 상태 즉 완벽한 순수의식의 
차원에 있게 된다면 마치 무한한  기의 바다에 잠기는 거소가 같아서 그가 부려 쓸 수 있는 
기의 양은 무한합니다. 성자들이 보여주는 위대한 초능력의 배경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정 없는  순수의식의 차원이 아닌 한정된 자아의식의  틀에 갇혀 욕망, 저
항에 사로잡혀 있다면 내가 통제하고 부려 쓸 수 있는 기의 양은 매우 적은 양으로  한정됩
니다. 
  순수한 기의 양이 충분하게 뒷받침되지 않은 조건에서는 어떤 일을 하려고 해도 잘 이루
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려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겨우 
자기 밖에서 주의를 구걸하거나 강요해야만 삶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주로 자기 뜻대로 동원하고 조종할 수 있는 주의 
입자의 양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삶에서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는 창조의 비결은 부려 쓸 
수 있는 순수한 기를 충분히 보존하여 이 순수한 주의에너지를 창조의 목표에다 집중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자기의 통제하에 있는 주의의 양이 고갈되어  버리는 이유는 대개 주의가 욕망과  저항에 
묶여 있어서 주의 에너지가 낭비되어 버린 탓입니다. 이처럼  주의가 고갈될 경우 질병이나 
다양한 형태의 삶의 고통, 범죄와 같은 반사회적 행동의  모양으로 나타나 결국 밖으로부터 
주의를 빨아들여야만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주의가 욕망과 저항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주
의가 순수한 중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자기 삶을 자유롭게 하는 비결입니다. 
  주의를 순수한 중성으로 유지하려면 욕망과 저항을 떠나 모든 것을 큰사랑으로  무조건적
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순수의식의 본성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관용이기 때문입
니다. 기를 증강시키는 방법 가운데는 각종 호흡법이나 여러 가지 기공수련 등이  잇습니다. 
이런 방법들도 분명히 기를 증강시키는 좋은 효과가 있겠지만,  기를 회복하는 최고의 방법
은 자비심과 관용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어떤 기공수련도  수도꼭지를 잠근 
채 물을 빠는 것처럼 기의 갈증을 근본적으로 풀어주지 못 할 것입니다. 
  내가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지나치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마음을 가질 때  나의 
주의는 중성으로 회복될 순수의식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욕망과 저항 쪽에
서 소모되고 있었던 기가 순수한 에너지로 회수되어 나의 통제하에 부려질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순수의식의 차원과 하나되거나 가까워질 때 풍부한 기, 풍부한 창조력의 관리자가 
됩니다. 그러나 극히 제한된 자아의식의 차원에서 욕망과 저항에 끌려 다니게 되면 항상 에
너지의 고갈 상태에 있게 되므로 그는 기에 굶주린 사람들이 벌이는 기의 쟁탈전 가운데 있
어야 합니다. 돈, 권력, 명예, 인기와 같은 것은 기가 고갈된 존재들이 추구하는  인공적으로 
합성된 기입니다. 인조된 에너지는 그 효과가 오래가지 못하며 결국 기의 목마름을 더운 부
채질할 따름입니다.    
  기의 목마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아의식의 한계를 넘어 순수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없는 창조력 , 한없는 생명력의  주인이 되는 길이며, 심신의 질병
이나 삶의 온갖 고통에서 풀려나는 최상의 길입니다. 
 
    신념이 경험을 부른다
  내 마음의 원판 필름에 새겨져 있는 여러 신념, 상념, 감정들 가운데서 특별히 어떤  것에 
마음의 초점이 모아지면 자연히 그곳으로  주의가 보내집니다. 주의가 많이  가는 것일수록 
자기가 강하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의가 신념의 필름을 통과하면서 신념의 정보를 스
크린에 확대하여 비추게 될 때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나의 신념은 마치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수신기의 동조회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내가 
선택한 채널의 주파수만 통과시키고 그 주파수 이상이나  이하의 것은 모두 걸러냅니다. 이
렇게 되면 나는 내가 선택한 주파수의 화면과 소리를 보고 듣게 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무엇을 너무 좋아하여 욕망의 주의를 보내면 욕망의 대상에 보낸 주의
의 힘이 그 대상을 경험적 현실로 끌어들입니다. 그동안 인류가 이루어 놓은 과학, 예술  같
은 창조들은 이러한 원리와 메커니즘의 결과입니다. 욕망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싫어하여 저
항하면 그 저항의 주의가 에너지화하여 싫어하는 창조를 현실로 끌어들입니다. 인류가 겪어
온 전쟁, 범죄, 질병 같은 일체의 고통들은 인류의 집단적 저항신념이 불러들인 결과입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전쟁, 범죄, 질병 등에 저항의 주의를 많이 보내면 보낸 만큼 이들은 
더욱 증대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금 질병이라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질병을 지어낸 신념
이 꼭 있을 것입니다. 
  나의 주변에 모이는 사람, 대상, 일들은 나의 신념 곧 나의 에너지 파장에 감응하여  모여
든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대상, 상황들은 일 백 퍼센트 나의 반영입니다. 
  옛 비유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숫가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것이 암컷이라고 할 때,  물 속에 비친 제 그림자
를 수컷으로 알고 감응하여 열매를 맺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사실로 있답니다. 이것은 
나무의 욕망이 경험되는 사례이지만 저항이 경험되는 사례로서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 한 마리가 호숫가에 앉아 있습니다.  물 속을 들여다보니 물 가운데서  개  한 마리가 
자기를 쏘아보고 있습니다. 기분이 상해서 발길질을 하니 물 속의 개도 따라서 발길질을 합
니다. 화가 나서 으르릉 대며 짓어대니 물 속의 개도 화가 나서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상대를 물어뜯을 셈으로 물 속에 뛰어들어  결국은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반목과 투쟁이 모두 이런 식이라는 것이지요. 
  누가 지금 지독하게 밉게 보인다고 합시다. 대개는 저 놈이  미운 짓을 하니까 내가 밉게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원인제공을 상대가 하고 있으니까 내 잘못이 아니
라는 식이지요. 상대가 미운 짓을 하는 현실을 내가 경험한  결과 내가 미워하는 신념을 가
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신념이 경험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신념을 가져온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잘 살펴보고 신념들을 뒤져보면 거기에는 무엇인가를 싫어하고  배
척하고 저항하는 신념, 상념, 감정이  꼭 있을 것입니다. 순수의식의  차원에 있는 존재처럼 
저항의 신념이 모두 사라졌다고 할 때 아직도 그 미운 대상이 밉게 보일까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부터 악인과 같은 모습까지 두루 다 지니고 있습
니다. 한쪽 끝에서는 천사라는 가장 좋은 배역,  의상, 연기를 준비해 놓고 있으며, 다른  쪽 
끝에서는 악인이라는 가장 나쁜 배역, 의상, 연기를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이 양 극단 사이
에 무수한 종류의 역할을 빈틈도 없이 준비해 놓고 기다립니다. 나의 각본이 지정하는 배역
에 따라 상대는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서 연기를 보여줍니다. 각본이 나의 신념이며 상대가 
맡은 배역과 연기가 내가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상대가 밉게 보이는 순간 내 마음 가운데 어두운 신념이 있음을 바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가 끼고 있는 검은 색안경을 벗고 바로 보면 대상은 참으로 귀하고 그리운 존재인 것입니
다. 살인 강도나 독사나 어떤 악독한 대상도 검은 안경을  벗고 보면 악독한 존재가 아닙니
다. 밉게 보이는 사람이야말로 악역을 맡아가면서 나의 어두운  면을 되비쳐주는 고마운 대
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허물이 보이면 그 사람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 보는 
내 마음에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허물을 비쳐주는 선생님이시여.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나의 적이야말로  스승입니다. 너는 나를 머금고  있는 너/나이며 , 나는 
너를 머금고 있는 나/너입니다.
  경험이 신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신념이 경험을 가져옵니다.
  그렇지만 가끔 경험이 신념을 가져오는 일이 틀림없이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면 출근시
간에 이 길로 가면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경험을 한 후 나는 이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신
념을 가지게 되었다와 같은 경우입니다. 신념과 경험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모든 
것의 근원인 순수의식의 차원에서는 신념이 일체의 경험을 가져오지만  "내가 있다"는 한정
된 자아의식의 차원에서는 신념이 일체의 경험을 가져오지만 "내가  있다"는 한정된 자아의
식의 차원에서는 경험이 신념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 우주와 세계는 순수의식으로부터 모양지어져 나옵니다.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환상
은 세계로부터 의식이 나온다, 사람의 뇌의 작용에서 의식이 나온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세
계적으로 두뇌를 연구하는 붐이  일어나고 있는데, 두뇌의 생화학적  작용을 아무리 분석해 
본다 한들 거기에서 순수의식은 발겨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물질세계는 자연법칙과 물리적 
운동의 원리에 따라 생성 변화 발전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나'들의 자아의식의 창조에
너지가 물질입자화되어 굳어진 결과입니다. 곧 이 물질우주는 고형화한 자아의식입니다.  
  따라서 의학, 생물학, 물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 모든 학문적 분야를 계속  탐구해 들어갈 
때 마지막에는 틀림없이 의식이라는 주제와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과 신념체계에 대
한 탐구로부터 출발하여 학문의 연구를 시작한다면 근본원리를 훨씬 빠르게 발견할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나의 몸,  뇌, DNA는 자아의식의  신념에너지가 입자화되어 모양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경험하는 이 세계는 인류의 집단신념의 결과입니다.  사실 이 물리적 우주는 
우주 가운데 있는 의식의 존재들. 그들이 몸을 가지고 있든 없든 간에 사람으로부터 동물이
나 미물들까지를 포함하여 생각을 지어내고 있는 일체의 존재들이 함께 창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이 함께 겪는 공동현실은 그 구성원들의 신념의 평균치가  에너지화
한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인류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경쟁적인 산업문명, 환경파괴,  전쟁, 
난치병의 유행 같은 것이나, 어떤 지역에서의 경제위기, 교통문제, 대기오염 등의 원인을 추
적해 가면 틀림없이 그것을 가져올만한 집단신념이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가 당신의 삶과 이 세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은 무엇이 있는지 믿을 수 있고 믿는 대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을 까는 당신
이 결정할 일입니다. 이제 당신은 경험하기를 원치 않는  신념을 찾아내 지우거나 경험하기 
원하는 신념을 새로 지어내는 방법을 배워갈 수 있습니다. 
 어떠한 현실도 결코 당신의 마음  밖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결코 당신의 마음 
밖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계는 커다란 두 개의 에너지 축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축은 "내 
생명의 근원은 무한한 에너지로 충만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축은 "나는 믿는 대로 
경험한다"입니다. 이 두 개의 명제가 현실세계를 모형지어  창조해내는 씨줄과 날줄이며 평
면도 상의 x축과 y축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두 개의 에너지 축을 원만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될 때 그는 자기 삶에서 마술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 
이 우주에 창조할 수 잇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당신에게도 가능합니다.      
 
    우리 생명의 근본 목표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는 우리가 몇 만 생을 되풀이하여 산다하더라도 기필코  이루어야 
할 내 생명의 근본 목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야 할 단 한의 길,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는 외길입니다. 나머지 이런저런 세상일들이란 이 길을 바로  가는데 도움이 되는 수단일 
뿐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란 내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의 차원으로 온전히 돌아가
기입니다.  생명의 본성대로 일 백 퍼센트 사는 존재가 되기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가 왜 가야 할  외길이며 삶의 근본 목표일까? 이것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한마디로 불사의 길을 얻는데 있습니다. 
  죽음이란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인데 어디에 죽지 않는 길이 있단 말인가? 죽지 
않는 길이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환상은 바로 '내 생명은 꼭 죽고야 만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양이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죽음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참 생명, 
생명의 실상은 모양이 없습니다. 실상의 생명이 모양을 나타내면 가상이며 허상입니다. 그림
자 같고 꿈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몸처럼 모양이 있는 것은 생명의 빛, 생명에너지의  파동이 
지어낸 허상이자 그림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 몸의 죽음이 바로 내 생명의 죽음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내 몸의 죽
음=내 생명의 죽음이라는 등식을 믿기로 고집하는 한, 낳고 죽고  낳고 죽고를 끝없이 되풀
이하는 경험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등식은 진실이 아닙니다. 내 생명의  본성은 
원래가 죽음이 없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다만 생명의 근원과 분리된 내가 따로 있
다는 착각에 가려 그걸 바로 보지 못할 따름입니다. 
  '나', '내가 따로 있다'는 한정을 비롯하여 내가  자신에게 결박지어  놓은 한정들을 모조
리 다 풀어버리는 것이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 즉 순수의식으로 돌아가기입니다.
  지금 인류의 절대다수는 불행과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참으로 행복하고  편안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어느 누가 나는 지금 행복하다, 편안하다고 말한다면 정말로 그러한지 맟
추어 볼 만한 기준이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는가? 죽지 않을 영생을 얻었는가? 이 질문에 조금이라도 
망설임이 있다면 아직은 아닌 것입니다. 당신에게 지금 욕망과 저항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가?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지혜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가? 당신이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걱정과 두려움이 없겠는가? 모든 사람, 모든 존재를 볼 
때 내 몸을 사랑하듯 조건없는 자비심이  일어나는가? 이러한 질문에 주저함이 없이  "그렇
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당신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행복하다고 자처하고 있다면  스스로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보한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행복하도록 노력해야지의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닌지, 정직하게  살
펴 보아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편안함에 이르지 못했다면 참으로 안심입명이 되는 길을 가
야만 합니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억압, 인종차별, 자원부족, 환경파괴, 군비경쟁 같은 외부적인 
요인이 현실적으로 인류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큰 원인이지만,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인류가 
함께 노력해서 꼭 풀어야 할 과제이지만, 그보다도 인류가  고통을 경험하는 근본원인은 욕
망과 저항의 집단 신념입니다. 이런 집단 신념의 뿌리는 나라는 생가, 내가 따로 있다는  생
각입니다. 먼저 나라는 이기심을 나부터 다루어야 하며 이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
제입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굶주림, 전쟁, 질병  같은 것이 가장 무서운  고통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가장 무서운 고통의 원인은 이 '나', '내가 따로 있다'는  환상의 믿음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고통의 총대명사입니다. 인류의 근본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깨어나는 문명의 전사들
이 쳐부수어야 할 최고의 타겟은 인류를 꽁꽁 묶고 있는 그 이기적인 '나'입니다. 
  이것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우리는 무지와  무식을 구별해야 합니다. 어떤 삶이  박사이고 
교수라고 하더라도 나를 못 떠나고 있으면 무지이고, 어떤 사람이 학교도 못 나오고 일자무
식이라고 하더라도 나를 떠나 나가 없는 차원에 있다면 그는 무지가 아닙니다.
  '나'가 없는 일자무식의 지혜를 태양에다 비유한다면 '나'를 못 떠난 박사의 지식은 반딧
불만도 못한 것입니다. 어떤 위대한 학자가 '나'를 못 떠난  채 '너 따로 있고 나 따로 있다
'는 차원에서 인류의 번영과 행복을 도모하는 화려한 이론을 지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
본적으로 도움이 안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 의학자라 하더라도 분리된 '나'를 통해서
는 나무의 잎만 보고 뿌리는 못보고 맙니다.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이론으로 분석하고 비추
어본다고 할지라도 생명의 본질고 성품은  끝끝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근본을  볼 수 
있는 능력은 나를 버리고 나 없는 차원인 생명의 본성과 온전히 하나되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많은 정보와 지식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옮기는 얄팍한 
지식들은 사실 힘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대부분 얼마 안 가서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머
리로 헤아리기가 아니라 가슴에 사무쳐 체험한 앎, 직접  경험하기를 통해서 얻은 지혜만이 
참 행복을 가져다주는 생명력이 있으며 생사를 해결하는 힘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개다, 나는 몇 살이다, 나는 남자다 또는 여자다, 나는 동양인이다 또는 서양인
이다, 나는 잘났다 못났다, 나는 운이 좋다 나쁘다, 나는 무엇을 좋아한다  싫어한다, 무엇이 
나에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 나는 선생이다, 교수다,  박사다, 사장이다, 내 재산은 얼마이
다, 내 고향은 어디이고 이런  집안 출신이다, 나는 어느 학교를  나왔고 내 경력은 이렇다, 
누구는 내 친구이고 누구는 내 경쟁자이다, 나는 이런 비밀을 가지고 있다....."  
  '나'에다 덧붙여 놓은 한정된 생각들을 모두 나열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까요?
  이 '나'라는 생각에다 무수하게 많이  한정지어 붙여 놓은 생가들의  총화가 곧 스스로가 
자기라고 여기는 자아상입니다. 나는 누구이다는 생각과 동일화 시켜놓은 아이덴티티  입니
다. 내가 있다는 생각의 뼈대에다가 수많은 나는 무엇이다. 라는 생각의 살덩어리들을  덕지
덕지 붙여서 '나'라고 하는 조각품을 창조해 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생각의 뭉치들을 항상 지니고 다니며 관리를 하고 있어야 하니 삶이란 도
대체 얼마나 고달프고 괴로운 것입니까?  이것은  마치 달리는 열차 속에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끙끙대는 꼴과 같습니다. 이것을 몽땅 내려 놓으면 얼마나 편하고 후련하겠습니까? 내
가 짐을 내려 놓는다고 해서 달리는 열차가 멈추지는 않을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무엇이다라고 한정을 짓게 되면 근원의 나인 한정 없는 순수의식의 바탕에다 한정된 
경계선을 그려서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나란 근원의식이 임시로 사용하는 하나의 생각일 뿐이며 그 생각을 통해서 다음 생각들을 
탐사하고 경험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따로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바다 위에 
솟아오른 하나의 파도나 허공 중에 떠다니는 물방울을 끝까지 보존하고자 하는  몸부림입니
다. 
  어떤 사람이 원한다면 자신의 근원의식을  자꾸만 작게 나누어 매우 작은 물방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치 누에가 스스로 작은 고치 속에 잠기듯. 나는 이것이고 나는  저것
이 아니다라는 한정을 계속 지어갈 때 생명의 근원과 따로 떨어져 있다는 환상 가운데 머물
게 됩니다. 이것이 나의 자아상을 지어내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한정 없는 근원으로서의 느낌을 잃기 시작하며 의식도 지각능력도 오므
라들게 됩니다. 분리된 나와 생명의 근원과의 통로가 좁아지게 되고, 근원에서 보내지는  생
명에너지는 점점 고갈되어 갑니다. 나는 결국 근원과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됨으로써 그 근원
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니 늘 불안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내가 어떤 한정된 위치나 실질 속에 따로 있다는 환상이 끈질길수록 몸이 죽어 몸이 사라진 
뒤에도 그 환상을 못 버리고 환상의 상념체로 떠다니기도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매우 작게 한정지은 의식의 차원에 머물기로 결정한다면 온 우주가 자
기의 밖에 있어 보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 품속에 안고 있을 만큼 확대된 의식의 차원에
서 머물기로 결정한다면- 이를테면 공간 너머   가기 연습을 할 때 경험했던   텅 빈 허공 
같은 의식의 상태처럼---우주는 자기의  품안에 있게 됩니다.  온  우주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확대하면 천지우주를 감쌀 만큼  넓어질 수 있
고 좁히자면 바늘구멍보다 더 좁아질 수 있습니다. 바로 보면 천지우주는 나의 근원의 마음
인 순수의식 가운데 있는데 말입니다. 
  우주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우주가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나는 물질적인 몸이 아니고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며 떠돌아다니는 영혼이 아닙니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지어져 나오는 배경입니다. 모양도 실질도 한계도 없는 그 배경이 바로 나입
니다. 이 배경은 시공도 차원도  물질도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살아 있는 영생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길
  생명의 현상과 생명의 실상을 구분하여 말하고 있으나 이 둘은 바로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는 일합상입니다. 물질과 정신은 둘이 아니며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쇠붙이와  나무
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재료가 합해져 가구가 되는 것처럼 물질과 의식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모여 내 생명이 된 것이 아닙니다 물질 그대로 의식이고 의식그대로 물질입
니다. 몸 그대로 마음이며 마음 그대로 몸입니다. 근원에서 바로 보면 온 우주는 오직  의식
이요 마음뿐입니다. 내 마음의 안과 밖이 따로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 . 마음과 몸이 따로 
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말이 빚어낸 착각입니다. 
  근원의 생명은 모든 존재들 가운데 빈틈도 없이 골고루  머금어져 있는 무엇입니다. 이것
은 논리적 차원 너머에 있습니다. 이것은 개별적 존재들 가운데 내포된 것이 아니므로 낱낱
으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분리된 세속의 나는 따로  떨어져 보이는 다른 대상들
을 싫어해서 배척하거나 좋아해서 욕망해야 합니다. 대상들로부터 자기 이익을 쟁취하기 위
해 끊임없이 계산하고 있지만 만족은 끝끝내 얻어지지 않습니다.  항상 불안하고 외롭고 두
려움 가운데 잇게 됩니다. 따라서 분리된 세속의 나는 아지랑이를 좇다가 지쳐 넘어진 사슴
처럼 환상에 속아 에너지만 낭비해 버리게 됩니다.   
  이 분리된 나가 환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보기 시작할 때 세
계를 판단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욕망과 저항의  투쟁 속에 휩쓸리지 않으며 
모두를  동정과 이해로만 바라봅니다. 그에게는 거절하는 마음도 바라는 마음도  없으므로 
부족함도 소유욕도 없습니다. 그가 스스로에게 들씌워 놓은 한계와 제약들을  벗기 시작할 
때 분리감도 사라져갑니다. 우주 전체를 품에 안고 있는 느낌을 회복하게 됩니다.  조용하게 
참고 견디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으로만 바라봅니다.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는 온 세상 모든 존재의 공동이익을 위해서만 합니다. 무한한 지혜와 한없는 자비로 충만한  
존재가 되어갈 때 그에게는 분리된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소멸되기 시작합니다. 그에게
서 무한한 지혜란 모두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이요.  한없는 자비란 
모두를 내 생명으로 여기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의 찌꺼기가 남김없이 사라질 때  나는 물방울이기를 그만 둡니다. 
물방울이 사라지므로 허공이 곧 나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내 생명입니다. 
  우주로서의 나, 근원으로서의 나는 이제 어떠한 한계도 제약도 없습니다. 이제 죽음이  없
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세상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복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지혜이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일체의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지
므로 고요함과 편안함 그대로입니다. 오염됨이 전혀 없는 무한한 순수함과  아름다움입니다. 
한마디로 생명의 빛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차원에 들고 싶은가요?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미 
우리의 본성은 이러한 차원 가운데 있습니다. 다만 망각하여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에 대한 바른 견해와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감각기관들의 한계 즉 사실대로 바로 보니 못하는 한계가 빚어낸 
허상과 착각의 세계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는 이러한 그릇된 지각의 한계를 뛰어 넘
어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기입니다.  이 우주와 세계의 참모습 곧 
실상을 실상대로 꼭 그대로 보고 경험하는 차원에 들어가기입니다. 
  우리 나라 정월 대보름 때는 횃불이나 불깡통 돌리기 놀이를 하는 풍습이 잇습니다. 불깡
통 돌리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불동그라미만 실제처럼 있을 뿐 불깡통은 안 보입니다. 사실
로는 불깡통만 있는 것이고 불동그라미 모양은 우리 눈이 지어낸 허상이자 착각현상인데 말
입니다. 사람들 몸이나 불깡통에 해당하는 생명의 근원이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참으
로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물질만능, 과학만능 시대라서 눈에 보이는 것만 진실이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미
신 취급당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무엇이 눈에 안보이기거나 과학적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다 
하여 사실로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이나 결과에만 눈이 팔려 
참모습이나 원인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중에 연기가 솟아오를 때 연기만 보이고 불은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불이 없는 것은 아닙
니다. 전깃불만 보이고 전류를 보내고 있는 발전소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발전소가 없는 것
이 아닙니다. 바다 표면에 떠 있는 수많은 파도와 물거품을 보면서 파도가 높다 낮다,  물거
품이 크다 작다는 생각에 빠져 한없이 넓고 깊은 바다 전체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생명의 실상을 실상대로 보기란 불동그라미를 지어내는 불깡통을, 연기를 피워내는  불을, 
전등불을 볼 수 있게 하는 발전소를, 파도들의 근원인 전체 바다를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몸을 지어내고 있는 생명에너지의 근원이 우리 눈에 여실히 안 보인다고 하더라
도 꼭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허상이고 눈에 안 보이는 생명에너지가  실상입니다. 우리 눈이 보는 
것은 대체로 거꾸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나 자연계의 만물들을 지어내는 근원이란 별개로 잇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근
원, 하나의 뿌리입니다. 다도해상의 수면 위에 보이는 여러 섬들이 따로 떨어져 별개로 보입
니다. 이것은 바닷물에 가려서 별개의 섬들로 보일 뿐이지  바닷물 밑바닥에서는 같은 개펼
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 섬들이란 개펄 위에 여기저기 솟아있는 언덕 같은 것으로서 실
은 하나의 땅덩이입니다. 
  이 사람 몸이나 저 사람 몸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돌이나 무엇이나 따로따로의 섬과 같
아서 모양만 다를 뿐 그 밑뿌리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닷물에 가려 
개펄이 눈에 안보이듯이 생명의 근원이 눈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명백히 하나의 생명 덩어
리로 존재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생명의 근원이  진짜 나이며 눈에 보이는 내 몸, 저  사람 
몸, 동물, 식물 등 모든 존재들은 내 생명의  근원에서 솟아난 나의 분신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가 근본적으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다라는 견해를 놓치지 않는 것은 순수의식의 차원에서 세계를  바라
보고자 노력함인데 이 순수의식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매우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옛부터 순수의식의 차원에서 우주가 하나의 생명임을 투철하게 체험한 성자들이  한
결같은 표현을 참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온 우주는  생명의 빛으로 충만되어 있다는 표
현이 그것입니다.  태양 빛 같은 가시광선이 아니라 고요하고도 영롱한 맑음인 마음의 빛이 
천지에 빈틈없이 충만해 있음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을 떠나지  않으니 누구를 보든지 큰사랑으로 대할  수 
잇게 되고 생명의 빛의 충만 가운데 있으니 늘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방법
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상의 처세술이며, 환자에게는  자연치유력 가운데 잠길 수 
있는 최고의 자기 치유법입니다. 
  우리가 생명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의식이  정화되고 생명의 광명에 가까워질수록  모두가 
하나의 생명으로 느껴지며 의식은 크게 확대됩니다.  분별시비가 줄어들고 모두가 사랑스럽
고 귀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되니 고통은 점점 줄어들고 행복감이 커집니다.
  반대로 우리 의식이 광명과 멀어질수록 물질세계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고 의식은  오므라
들며 모두가 분리되어 있으므로 항상 두렵고 불안합니다. 
  생명의 빛에 가까워진 만큼 정비례하여 편안하고 행복해지며 여기에서 멀어진 만큼  고통
스럽고 불행해집니다. 
  '미련한 새는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고, 지혜로운 새는 바람 따라 간다'는 가르침이 있습니
다. 생명의 빛 쪽으로 가게 되면 생명의 본성과 같은 방향이므로 순풍에 돛단 듯 무리 없이 
쉽게 살아 갈 것인데 생명의 빛과 등지게 되면 생명의 본성과 어긋나게 되어 항상 힘에  겹
고 고통스럽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며 온통 생명의 빛으로 가득하다"는 신념이 아무런 힘이 없는 허무
한  생각이 아니라 무한한 생명에너지를 창조해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가슴에 사무치게 
이 느낌을 유지하고 있다면 무서운 암 세포도 그를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
게 있어서는 암세포까지도 그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여실하게 체험된 순수의식 그 자체가 된다면 죽 않는 영생의 
존재가 됩니다. 죽음이 있게 되는  원인은 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순수의식의  차원에서는 
이런 생각이 없으므로 죽음이나 낳음이 나타날 이유가 없습니다. 
  이차원은 세상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한행복이며  모든 것을 다 알고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다 떠나 버린 티없이 맑고 순수한 아름다움입니다.  무조
건적인 받아들임과 자비심 그 자체입니다. 
  온통 지고의 사랑 덩어리입니다. 
  
      여덟째 마당- 삶을 위한 명상
    이 세계는 집합의식의 반영
  지금 당신의 정원에서 장미꽃 한  송이가 피어나려고 합니다. 그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데에는 어떤 요인들이 작용하게 될까요?
  당신의 노력? 물론입니다. 장미나무를 심고 가꾼 당신의 노력이 장미꽃을 피우는 데에 가
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테지요.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요?  잘 살펴보면 여기에는 더 많
은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장미나무의 묘목부터 살펴봅시다. 그 묘목은 어미나무로부터 절지한 것이고, 그 어미
나무는 또 그것의 어미나무에게서, 이렇게 따져가다보면  지구상의 맨 처음 장미나무에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겠지요.
  그리고 당신에게 묘목을 건네준 묘목상 주인, 그 집주인을 이 세상에 있게 해 준 그의 부
모, 당신의 부모도 빠뜨릴 수 없겠지요. 그 부모의 부모까지.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 존재했던 사람들이 모두 직, 간접적으로 이 장미꽃 하나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장미나무가 뿌리박고 있는 흙은 지구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하나
의 땅입니다. 싹을 틔우고 자라기 위해 필요한 공기, 햇볕, 물....... 그 밖의 알 수  없는 여러 
요인들에 의해 장미꽃이 지금 꽃망울 을 터뜨리려 합니다. 온 자연계 전체가 끝없이 겹치고 
겹쳐서 이 순간에 한 송이 꽃망울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장미꽃 한 송이에도 온 우주의 정기가 응축되어 있다는 말입
니다. 장미꽃 하나가 곧바로 우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코 생각의 비약이 아닙니다. 사실
을 사실대로 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모든 티끌마다 우주가 가득하네"라고 노래했습니다. 사실 하나의 작
은 먼지일지라도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 전체가 빠짐없이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 아기가 태어나고 있다면 거기에는 부모의 결합뿐만 아니라 온 우주가 가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강도니 뇌물수수니 하는 사건들이 언론에 보도되면 나와 그 범죄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범인을 욕하고 비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틀림없이 그 범
죄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직, 간접적인 관련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 미국에서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 지금도  지구 
어느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전쟁이나 환경파괴 하늘의 오존층 파괴, 그런 모든 위
기 상황들은 내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우리가 모두 관여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직접적이고도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대중들의 집합의식, 다시 말해 집단신념의 결
과입니다.
  개인의 현실적 경험의 배후에는 그 사람의 신념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집단이 함께 경험하는 공동 현실에는 그 구성원들의 집합의식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
니다. 모든 집단들의 각각의 공동 현실은 각 집단의  구성원들이 형성한 대중의식의 평균치
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란 개별적 의식의  편린들이 창조해낸 신념들이 모여서  체계가 세워지고, 그 
체계가 진화하여 온 신념체계의 반영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현실세계의 배후에는 반드시 신념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러한 신념이 현실세계를 움
직이는 중심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개인이 상황 속에서 최초로 지어낸 신념이 삶에서 유용한 역할을 하면 주변 사람들
의 주의를 끌게 되고, 이것이 전파되면서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져 하나의 지식의 자격을 얻
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신념체계(지식)는 사람들 사이에 거래가 되기도 하고 더러는 집단
간의 대립의 원인이 되어 충돌이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환경오염, 경제위기, 집단간의 분쟁과 전쟁의 배경을 잘 살펴보면 그러한 
공동현실에 부합되는 집단신념이 반드시 자리하고 있습니다.
    집합의식의 두 얼굴
  한반도의 남북분단이 반세기가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데는 온 세계가 다 이에  관련되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북의 대중들의 집단신념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
을 것입니다. 양체제는 한결같이 자기체제의 정통성과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러한 신
념을 완강한 공격성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신념의 저변에는 양쪽 거의 다 병적인 수준의 
공포와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피해의식은 무엇인  척하기와 같은 부정을 
낳아주며 이것은 상대적인 우월감으로 위장되면서 잔혹한 공격성으로 표현됩니다.
  한국인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이러한 집단적인 피해의식과 공포는 장구한 시련의 역사  속
에서 증폭되어 왔다고 보여집니다.
  같은 민족끼리의 분열과 대립이라는 뼈아픈 고통 속에는 공포와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
도록 가르치고 있는 생명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자존심과 우월의식, 속으로는 공포와 피해의식이라는  이와 같은 집단적인 이중 
감정의 필름이 완전히 소멸되기 전에는  현실의 스크린은 모양만 바꾸어가면서 분열과 대립
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나라가 없다라는 충무공의 글귀는  호남지방의 많은 가정집, 공공
기관 등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호남사람 치고 이 글귀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
을 것입니다.
  임진, 정유 양난을 통해서 온 나라가 외적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을 때 "호남이 아니었더
라면 나라를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충무공은 진심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호남인의  구국항전의 높은 기개를 찬탄하여 이런 글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호남인들은 이 글을 호남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고 또한 이 글의 정신이 후대
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호남인들 그리고 일부  비호남인들의 대중의식 가운데에는 이 글귀의 내용과 같
이 나라와 세상이 위태로울 때는 호남이 아니면 이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집단신념이 새
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호남인들은 호남을 의향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고 세상이 어려울 때는 다른  지역
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로운 헌신성을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호남은 의향이며 호남이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대중의식은 나라를 구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를 했겠지만, 이것은 한편 지난 역사 속에서 주로 호남지역에 집중되었던 
기가 막힌 고통을 불러들이는 데도 일정한 정도의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지난 한 세기를 돌아다보면 우리 민족 모두에게 혹독한 수난기였지만 그 과정에서도  거
의 모든 비극은 호남지역에서  일어났고 따라서 자연히  호남민중들이 가장 엄혹한  시련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백년 사이에 호남지역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시련의 주요 사건을 돌이켜 보면, 
 1894년 동학농민운동
 약 15년 후 의병호남 대토벌
 약 20년 후 광주학생 항일운동
 약 20년 후 여수 순천군인사건
 이어서 그 연장선상에서 지리산 토벌
 약 25년 후 5.18 광주민주항쟁
  지난 1세기에 걸쳐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고 있는 뼈아픈 사건들은 지금 입으로 쉽게 나열
하고 있지만  당시 고통을 경험했던 민중들, 특히 피해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은 비극의 참
혹성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나 그 사건이 있게 되기까지에는 그 책임이 무겁고 가볍고의 차이가 
잇고 그 원인이 직접적인가 간접적인가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여기에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요인이 얽히고 설켜서 관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하
는 당사자들의 집합의식이 그 사건의 배후에서  가장 큰 원인인자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호남인들, 특히 호남의 자라나는 세대들은 "호남은  의향이며 호남이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 없다" 는 신념을 이제 더 이상 자랑으로 여기며 끼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호남은 의향이며 호남인은 정의로운 민중이다." 라는 신념을 계속 떠맡기로 한다면 그 신
념은 외부에 정의롭지 못한 세력을 동시에  창조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호남인들은  언제나 
자기가 창조한 불의의 세력과 맞서 있어야만 합니다.
  호남인이건 비호남인이건 "호남인 의향이다"라는 집단신념을 끝끝내 버리지  않는다면 대
중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호남인은 외롭다." 는 반쪽 신념(욕망)과 이  신념이 밖으로 투
사한 "호남의 외부에는 의롭지 않은 세력이 있다."라는 다른 반쪽의 세력의 신념(저항)의 내
부투쟁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러한 신념의 양면성에 속아넘어가 끊임없이 현실 속으로 호
남이 의향임을 과시하는 비극적 사건들을 끌어들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의 함정이요 덫입니다.
  이제 호남인들은 다같이 충무공의 거룩한 뜻을 역사 속에 묻어 두고 그 글을 벽에서 내려 
장롱 속에 깊이 넣어 두어야 합니다. 모든 인류가 조화롭게 하나로 어우러지는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릎 꿇고 노예로 사느니 일어나 싸우다 죽겠노라"
  이 섬뜩한 신념을 누가 맨 처음 지어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신념을 버리지 않기로 한
다면 무릎 꿇는 노예가 되던지 일어나 싸우다 죽던지  둘 중의 하나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집합의식 속의 신념들을 잘 탐색하여 다루게 될 때 무릎 꿇는 노예의 경험
도 싸우다 죽는 경험도 피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호남의 비극은 영원히  그 막을 내려야 
합니다.
  지구상의 여기저기에는 지금 잠재적인  위기상황이 도시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인류의 집합의식의 반영입니다.
  위기상황들을 물리적 대응으로만 타개하려는 종래와 같은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인 
효과가 없습니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 아닙니다.
  개인과 세계의 문제들은 그것들이 맨 처음 비롯되는  원전인 의식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
을 사람들이 차츰 깨우치고 있습니다.
  개별의식과 집합의식을 탐구하여 신념을 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현실을 통제하고  조절해 
갈 수 있는 길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100마리 째의 원숭이 
  혹시 1백 마리 째의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일본 큐슈에서 조금 
떨어진 코시마라는 섬에  원숭이들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1952년부터 일본의 학자들이 이 섬의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어떻게  학습해가며 그
들의 의식은 어떻게 진화 되가는가를 관찰했습니다.
  그들이 나눠준 먹이에는 진흙이 묻은 생  고구마가 있었는데 이것을 처음 본  원숭이들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몰라서 궁리만 하다가 드디어 한 원숭이가 물에 씻어 먹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이 원숭이는 자신이 발견한 방법을 다른 원숭이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차츰 
많은 원숭이들이 이 방법을 알게 되었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원숭이가 그 고구마를 민
물이 아니라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닷물에 씻어 먹으니 맛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원숭이들도 차츰 바닷물에  씻어 먹는 법을 배워 갔는데  놀라운 일은 그 
숫자가 1백 마리에 이르자 갑자기 하루만에 섬 전체의 원숭이가 이 방법을 알아버린 것입니
다. 더 신기한 일은 서로 만날 수도  교류할 수도 없는 다른 섬의 원숭이들, 심지어는  내륙 
지방의 원숭이들까지도 일시에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얘기가 있습니다.
  영국에 살고 있는 박새가 우유병의 뚜껑을 주둥이로 쪼아서 우유를 먹는 방법을 알게 되
자 얼마 후 곧 바다 건너 전 유럽에 이것이 전파되어 온통 박새들이 우유병을 쪼아먹는  것
이 발견되었습니다. 
  박새의 행동 반경은 겨우 15km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국의 박새가 바다 건너 대
륙까지 날아가 그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속합니다. 
   자연계에는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많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정보들은 어떻게 전달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통해서 
의식을 가진 존재들끼리 시공을 초월하여 어떤 통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의식에 변화가 일어날 때 그것은 곧 하나의 파장이 되어 다른 사람의 의식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각이 온 우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말은 그래
서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다만 현재의 생물학의 수준이 이와 같은 생체간의 연결고리를 미
처 증명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집합의식과 창조에너지
  사람들의 의식이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과 생명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미래의 '생명의 문명'에 대한  밝은 전망을 바라보고 있
습니다. 기존의 낡은 문명의 축을 흔드는 일들이 지구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실은 
인류의 진화된  집합의식의 투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념체계들의 차이를 넘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통합될 수 있는 생명의  문명을 창조하려는 
기본적인 목적이 인류의 집합의식 속에 하나의 싹으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양과 표현은 다르더라도 같은 방향, 곧 생명의 본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져 가고 있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종교나 철학, 사상, 이념, 제도 이런 한정된 신념체계들의 벽을 뛰어넘어야만 마침내 하나
의 생명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구 위의 여러 곳에서 영성과 의식을 진화시키는 다양한 방법들이 개발되어 나오고 있습
니다. 이런 것들은 모든 인류의 집합의식을 하나의 생명의식으로 진화시키는 데 나름대로의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하든지 간에 '하나의  생명의식, 곧 생명의 근원'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그 숫자가 일정한 수준에 이른다면 1백 마리째  원숭이의 경우처럼 우리들의 집합
의식에 폭발적인 진화가 일어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사회 개혁과 대중 구원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
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대중 앞에  나가 목소리를 높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한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무슨 감투를  써야만 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감투를 쓰려고 애쓰다
가 대개는 허물만 잔뜩 저지르고 맙니다.
  그 사람이 입으로는 별소리를 다 하더라도 바른 지도자인가 아닌가는 이기심을 떠났는가, 
나나 내 가족, 내 정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대서 벗어났는가, 탐욕과 분노가 없는가를 잘  살
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도자로 자처하고 나선 사람들 중에는 자신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대중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한 채 결국 에너지만 낭비해 버리고 마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따라서  만인 
앞에 얼굴을 내미는 지도자가 되려고 지나치게 애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대중을 구원하고 세상을 밝게 하기 위해서 대중들의 등뒤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큰 역
할을 하고 있는 진짜 지도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당신조차도 진실
한 사랑과 관용의 파장을 우주 전체로 내보낼 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지도자인 것입니
다.
  서산대사와 진묵대사는 당대의 위대한 성인이요 지도자로 추앙 받던 분들입니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눈에 보이게 사회참여를 했지만 진묵대사는  산문
밖에 한 걸음도 안 나왔습니다.
  나라와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잇는데 이를 외면한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얼핏 겉만 
보면 진묵대사는 무책임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밖에 모르는 짧은 소견입니다.
  우주는 한 덩어리의 생명이므로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지 직간접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잇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시비를 하고 있지만 
세계와 우주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
니다.
  우주와 생명의 근원적인 힘, 그 창조의 에너지를 당신은 지금 눈으로 볼 수 있습니까? 
 사회참여란 생명의 본성에 안주하여 생명의 도리에 맞도록 참여해야만 그것은 올바른 사회 
참여라고 할 수 잇습니다. 이런 입장에 설 때라야 제대로 책임질 수 있습니다.
  자신과 더불어 모든 대중이 생명의 본성에 가까워지도록 하고 결국 생명의 본성에 합일되
는 쪽으로 인도하는 것만이 최상의 사회 참여인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의 문제,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잇는 
총체적이고도 포괄적인 대안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 험난한 IMF 시대를 경제학자들의 이론만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여집니까?
  세간의 학문이나 지식들이  아무리 그 깊이가  심오하다 하더라도 '우주는  하나의 생명'  
이라는 근본도리에서 벗어나 있으면 별로 힘이 되지 못합니다.   상대적인 차원의 지식들은 
대개는 얼마 안 가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 동안  애쓴 것들이 모두 헛수고가 되기 
일쑤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는 표현은 흔히 쓰이고 있지만 적절치 않습니다. 우주의 근본
도리에 정통한 성인이 아닌 이상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릇된 편견을 지니기 쉽고 그래서 늘 갈팡질팡합니다.
  어떤 학자가 이런 이론을 내놓으면 여기에 경도 되고, 어떤  사회 개혁자가 저런 말을 하
면 거기에 혹하여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는 식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또 
이런저런 말을 끌어 모아 자기 식대로 체계를 세워 그것을 가치 기준으로 삼고 그것만이 옳
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주가 평등 무차별한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떤 이론이나 가치관도 
상대적인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참다운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우주에는 범부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차원의 세계가 복합적이고도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를 알 건 모르건, 경제를 알 건 모르건 그런  문제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념으로 
생명의 근본도리를 추구하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세상을 밝혀주는 강력
한 에너지가 됩니다.
  이 세계의 모습은 대중들의 집단신념의 반영입니다.
  한 집단이 함께 겪는 공동현실의 배후에는 대중의식 속의 집단신념이 하나의 에너지 장으
로써 틀림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살인무기를 하루아침에 모조리 폐기한다면 모든 전쟁이 끝이 날까요? 약간은 도
움이 되겠지만 결코 그렇게는 안 될 것입니다.
  싸우겠다는 의도와 신념을 가지는 순간 무기는 곧 바로  개발됩니다. 인류의 집합의식 가
운데 싸우고자 하는 생각과 신념이 소멸되기 전에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범죄, 마약, 굶주림, 질병 등과  같이 많은 사람이 함께 겪는  고통의 배후에도 그럴 만한 
집단 신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통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노력도 잘 해야겠지만 고통을  지어내는 
집합의식을 잘 탐사하고 이를 다루는 일이 꼭 병행되어야 합니다.
  최선의 길은 대중의식의 중심을 '하나의 생명의식'의로 가꾸는  일입니다. 성자와 같은 순
수의식의 존재들이 대량배출 됨으로써 이러한 존재들이 대중의식에 파장을 미쳐 그것을  정
화시키는 것이 가장 강력하고도 근본적인 해결방법입니다.
  그래서 엘리트일수록 대중구원의 서원자일수록 군더더기를 털어 버리고 순수의식의  존재
가 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기업주가 근로자들의 집단적인 저항을 단지 물리적인 수단만으로 무마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원시적인 방법입니다.
  정부가 국민들의 욕구불만을 단지 물리적 조건을 개선시켜 주는 것만으로 해결하려고  한
다면 이것은 비효율적인 대응방법이며 이것만을 통해서는 욕구불만이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
다.
  환경파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일일이  몸으로 부딪치며 물리적 수단만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다면 이것은 비능률적인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환경오염을 이야기할 때 공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 같은 눈에  보이
는 물질세계의 오염만을 문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분노나 탐욕심 같은 의식세계의 오
염이 온 우주를 오염시키고 있는 근본원인입니다. 
  물질세계의 환경오염은 의식세계의 정신오염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물리적 환경의 정화나 
자연보호도 잘 해야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탐욕과 분노와 같은 의식의 오염을 정화시
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마른논에 물을 담기 위해서는 양동이에 물을 떠서 일일이 옮겨 부을 수 있는가 하면  물
꼬를 돌려놓음으로써 수로의 물이 자연스럽게 논으로 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능
률적으로 성공적으로 처리하는 데는 전략과 꾀를 쓸 필요가 있습니다.
  대중이 원치 않는 공동현실을 바꾸어 놓기 위해서는 그러한 공동현실을 지어내고 있는 대
중의식 속의 집단신념을 돌려놓는 것이 가장 훌륭한 전략입니다.
  대중들이 함께 경험하고 있는 고통스런 상황들, 지구상의 여러  가지 위기적 상황들의 배
후에는 불관용, 부조화의 집합의식이 에너지 원천으로서 작용하고 있을  것이므로  이를 정
화하여 관용과 조화의 신념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효율적이고도 근본적인 해결 방법입니다.
  의식이 진화된 사람들은 대중의식과 하나되어 대중의식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는 일이  가
능합니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지금도 그러한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특별한 존재들에게만 가능한  것은 아니며 누구나 의식
이 개발된 정도에 따라서 개체의식이나 대중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의식의 힘을 현실의 변화에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의견을 탐사하고 개발하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가 그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대중의식의 근
원과 만나게 해주고 대중의식을 도울 수 있게 해줍니다.
  아바타 프로그램에는 '우주 다루기'  와 '집합의식 다루기'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각자의 
개인적인 갈등을 해결한 후에 대중들의 집합의식을 돕고자 할 때 이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지닌 신념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신념이 "나는 무엇이다."라는 신념을 덧
붙여 놓은 것이 각 개인들입니다.
  "나는 무엇이다."라는 생각들을 자꾸자꾸 많이 붙여  놓을수록 나는 순수의식으로부터 더 
멀리 갈라지게 되며 뚜렷한 개인들, 즉 수많은 개체의식들이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체험됩니다. 이 차원에서 볼 때는 분리된  개체의식이란 없는 것이며 개체의
식이란 실은 집합의식의 조각들, 부분들일 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의식이 진화되어 이런 차원의 집합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차
원에서 집합의식을 탐사하고 그것을 바꾸어 놓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원하지 않는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될 때는 그가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무엇
을 믿고 있었는가를 찾아내 이를 바꿀 수 가 있듯이 대중이 원하지 않는 어떤 공통적인  현
실을 경험하게 될 때는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대중들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 그 집단신념
을 찾아내서 이를 바꿀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비록 방안에 않아 있다 하더라도 생명의 본성과 합치된 사무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면 그 에너지의 파장은 세계와 우주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전쟁, 재난, 굶주림, 질병 같은 물리적인 세계의 고통의 배경에는 탐욕, 분노, 투쟁심 따위
로 오염된 의식세계가 버티고 있습니다.
  자연계에 혼재하고 있는 이런 오염된 상념체들이 정화되지 않는 한 인류는 이런 고통들로
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차별성을 초월하여 오로지 생명의 근본 진리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존재들
이 내보내는 진실한 마음의 파장이 바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중심에너지인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 대중을 한없이 사랑하는 자비심, 생명의 본성과 하나되는 마음, 이러한 마음들이 강력
한 치유에너지가 되어 흐트러진 이 세상을 바로잡아 줄 수 있습니다.
  서산대사가 옳은가? 진묵대사가 옳은가?
  그 우열을 가릴 바 없이 다 옳습니다.
  다만 후대인 들의 의식수준이 위대한 성인들의 높은 뜻을 짐작하기 어렵고 대중구원의 공
덕의 높이를 헤아릴 수 없을 따름입니다.
    참된 지도자란...
  숲 속의 원숭이들이 호수 가운데 비친 보름달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달은 물에서 건져서 높은 나무에 매달아 두자. 그러면 어두운 밤에도 아무 불편 없이 
다닐 수 있을 거야."
  우두머리 원숭이가 먼저 호수 가운데로 늘어진 나뭇가지를 타고 물 속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호수 속의 달을 건너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다음 원숭이가 그의 꼬리를 잡
고 매달렸습니다. 숲 속에 있던 많은 원숭이들이 꼬리를 이어 줄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우
두머리 원숭이가 호수 가운데 잇는 달 가까이  다가갔을 때 원숭이 떼들이 무게에 못 이겨   
 
 
그만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달을 건지려던 원숭이들은 모두 물에 빠져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원숭이들이 어리석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은 이보다 더 어리석은 사
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스스로를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 중에 
이런 어리석은 경우가 않습니다.
  장님이 장님들을 인도하다가는 모두 물구덩이에 빠뜨릴 수 있는 것처럼 지혜와 능력은 없
으면서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때문에 모두가 고통  속에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이 비유 담은 사리분별도 제대로 못하는 지도자가 자기 분수도 모르고 대중과 세상을 구한
답시고 경거망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대중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할 때 우선 그 사람 자신이 먼
저 편안하고 행복해지기에 유능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고 싶으면 우주와  생명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하고 자신을 먼저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는 자신을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나'라
는 생각과 이기심에서 벗어났는가,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요망과 저항이 떠났는가를 스스로
에게 물어보면 잘 알 것입니다. 자칫하면 없는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죽는 원숭이가 될 
테니까요.
  '나'라는 생각과 이기심을 못 떠나 보내고서는 그가 아무리 학식이  많고 경륜이 높다 하
더라도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과 지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조차
도 사물을 제대로 못보고 거꾸로 보는 주제에 "나를 따를라, 내 말을 들으라" 고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몇 년 전 (건강의식) 이라는 미국의 한 월간잡지에 어는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국민의 대표가 되기 위해 공직에 출마하려는 욕망을  가질 경우 , 그러한 욕망
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충동, 또는 어떤 이기적인 결함을  위장하려는 충동에서 비롯되기 
마련인데 그런 사람은 공직을 수행할 자격이  없는 것으로 판정 받는 사회구조에  도달해야 
한다.
  대학이나 사회 각 분야의 전문기구들로부터 유능한 두뇌들을 데려다가 지도자가 되거나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자질을 판정해 주는 시험을 치르게 한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원하는 만큼 자주 시험을 치를 수 있으며, 그 점수에 근거하여 대통령이나 국회위원이나 무
슨 대표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판정한다. 자격권에 드는 사람은 모두 컴퓨터에 입력
시켰다가 무작위로 한 명을 선출한 다음 그가 만일 그 공직에서 일하기를 원하다면 정해진 
액수의 급료를 주고 일하게 만든다..... 정부의 전체 조직을 무작위 선출에 의해 알맞는 자격
자를 선택하여 만들면 모든 정치적 대립투쟁과 술수는 사라질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가 
다소 황당한 면도 있고 그 실현 가능성에 있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지
만 선거제도를 없앨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공감이 갔습니다.  우리 나라만 보더라도 선
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대중의식이 얼마나 심각하게 오염되는가를 충분히 경험해 오고 있으
니까요.
  선거 때만 되면 한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분들까지 그 대권이라는 것을 
한 번 잡아 보려고 우왕좌왕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면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치인이건 경제인이건, 교육자이건,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생명의 본질, 인간성의  근본, 
그리고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를 모르고서는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일체 존재는 나와 더불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임을 확실히 알고 투철하게 느낄 수 
있을 때 대중을 진정으로 구제하는 마음이 나올 것이고 지도자로서의 지혜와 능력이 저절로 
흘러나올 것입니다.
  남에게 베풀고 사랑을 나누고 사회봉사를 한다는 사람들도 생명의 근본 도리를 모르고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나' 라고 하는 찌꺼기가 거기에 남
아 있는 한 그것은 사이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져 갔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중의 구원과 사회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이나 사회적 죄악
이나 도덕적 타락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사회는 더 혼탁해졌습
니다. 지금이야말로 관점의 대전환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플라톤은 철인이 정치가가 되어야 하고 정치인은  반드시 철인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철인이란 철학을 전공하는 철학자라는 뜻이 아닙니다.'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이라
는 근본 도리를 바로 알고 깨달은 성인을 말합니다.
    행복한 삶, 밝은 세상
  우리는 길거리에서 대기오염의 정도를 측정한 표지판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의식의 오염
을 측정할 수 있는 계기를 개발하여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자연계의  의
식의 오염정도는 어느 수준일까요?
  만일 세계의 공간 속의 관용과 자비심의 양을 측정하는 저울과 대립과 투쟁심의 양을 측
정하는 저울이 따로 있다면 어느 쪽 저울의 바늘이 더 높이 올라가 있을까요?  인류 각자가 
날마다 먹는 마음은 조금도 에누리없이 이러한 두 개의 바늘 중 어느 쪽인가를 조금씩 높여
주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겠지요. 지금 대부분의 인간들은  관용과 자비심의 양을 높여주는 
쪽보다는 대립과 투쟁심의 양을 높여주는 쪽으로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
니다.
  지난 1백년 동안의 산업문명의 발전은 20세기 이전의 일류문명 발전의 총화보다도 더 크
다고들 말합니다. 산업문명이 가져다준 보상은 물질적 풍요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다 준 
폐해는 생명에 대한 훼손과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현대적인 기술개발은 돈벌이와 지나친 소비를 강요하여 왔고 증권과 은행으로 발전했습니
다. 세상은 가진 자와 가지고 싶어하는 자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무분별한 환경파괴, 핵무기를 비롯한  살인무기의 개발, 끊임없는  전쟁과 집단간의 충돌, 
도대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란 사람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단체
나 어느 곳이나 원만한 화합과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갈등보다 더 깊은 갈등이 있습니다. 마음의 갈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의 끊임없
는 투쟁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와 관계없이 참으로 행복하고 편안한 사람은 거
의 없습니다. "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 동안 인간성의 존중, 경제적 풍요와 평등,  민주주의와 평화의 실현, 도덕성 회
복과 같은 위대하고도 화려한 이념과 사상을 가슴에 안고 의지와 힘을 합쳐 불의를 무너뜨
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회가 제대로 건
설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위대한 이념과  사상을 끼고 다니면서 불의와  악을 
비난할 수 있으며 자신이 대중과 세상을 구한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인류 역
사 가운데 흔히 있어 왔습니다.
  누구나 인류를 구제한 수 있는 이념이나 사상이나 그럴 듯한 신념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
으며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도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반만년 동안 인류가 거듭해 온 실패는 종래와 같은 이념과 사상, 종래와 같은 실
행방법으로는 어떠한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밝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큰 장애는 사상, 이념, 제도, 종교 등의 차이에서 오는 
대립과 반목, 개인간, 집단간 이해관계의 첨예한 대립입니다. 
  이러한 대립과 반목의 배경은 신념의 차이, 관점의 차이입니다. 내 관점과 내 신념만이 옳
다고 고집하는 불관용입니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데는 서로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밝은 세상으로 가
게 하는 출발점입니다.
  세속적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 때문에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
도 세상을 밝게 해주는 등불의 역할을 한다는 종교들까지도 자기종교만 옳고 ,같은 종교 내
에서도 내 교파만 옳고, 같은 교파 내에서도 내 방식만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종교나 교파
를 비방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정파간의 대립과 충돌이 불행을 안겨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간, 교파간의 편견이 
부른 갈등과 대립반목이 역사적으로 많은 불행을 초래했습니다.
  종교까지도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대립하고 반목할 바에는 그런 종교는 차라리 없는 것
만도 못할 것입니다.
  어떤 종교인이 자기 종교만 옳다고, 자기 교파만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 자
기가 믿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의 본질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꼴입
니다.
  '하느님은 계란 전부를 하나의 바구니에 넣지 않는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
은 어떤 절대적 진리가 특정 종교나 철학  같은 어느 하나의 신념체계에만 들어 있고 다른 
신념체계에는 진리가 없다는 식의 편견을 경계하는 가르침입니다.
  우주와 생명의 근본자리, 진리의 본체는  완벽한 신성이며 거기에는 '나'라는  생각도, 내 
편도 네 편도 없으며 어떠한 판단이나 선악시비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부처와 알라신이 하늘 어디에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명 호들은 우주와 생명의 하나의 근원, 하나의  진리에 대한 서로 다른 대명사일 뿐입니다.
  산중턱까지밖에 못 간 사람들이 보는 견해는 십인십색이나 산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이 보
는 견해는 십인일색입니다. 진리와 신성을 체험하고 있는 수준도 이와 꼭 같을 것입니다.
  종교간, 교파간의 표현의 차이, 겉모습의 차이에서 오는 편견과 아집을 뛰어넘어 하나의 
진리로 통합하는 길이 그리고 사상, 이념, 제도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반목을 뛰어 넘고 
개인간, 집단간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해소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회복하는 길이 밝은 세상으
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나의 문제, 세상의 문제들은 그것들이 맨 처음 시작되는 원점 곧 사람의 의식으로부터 풀
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법률, 제도, 교육, 의료와 같은 현실적인 대안들은 흙탕물의 하류에 빠져 전전
긍긍하고 있는 꼴입니다. 흙탕물의 원류인 상류를 정화하지 않는 한 하류는 결코 정화되지 
않습니다. 원류와 상류가 곧 의식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불행,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들이 결코 밖에
서 해결할 수 없음을, 그리고 '물질의 풍요를 통한 몸의 행복'이라는 환상적인 경험이  참된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결국은 망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새로 깨어나는 사람들의 수가  충분한 수로 늘어날 때  '행복한 삶'에  대
해 그 동안 지녀왔던 꿈들이 다름 아닌 생존에 따른  공포와 불안감이 지어낸 환상이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깨어남이란 내가 지금 움켜쥐고 있는 생존방법 말고도 다른 선택의 가능성들이 또 있다는 
것을 통찰하기입니다.
  밝은 세상이란 '모든 존재의 하나의 생명'이라는 '생명의 문명'이 가치의 중심이 되는 세
상입니다.
  남과 세상을 고치려 들기 전에 먼저 나의 의식이  '모든 존재는 하나의 생명'이라는  '생
명의 문명'이 가치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남과 세상을 고치려 들기 전에 먼저 나의 의식이 '모든 존재는  하나의 생명' 임을  자각
하는 일이 밝은 세상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산업문명은 가속도를 제어하지 못한 채 마지막 한계선을 향해서  달
려가고 있습니다. 기존문명이 퇴조하고 잇는 조짐이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연계와 현상세계의 어떠한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모든 사물은 한 순간도 머무
름 없이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돈과 물질세계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으
며 자신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
려 깊게 숙고하며 관조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서 그들은 생명의 근원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이
고 그렇게 될 때 불안과  두려움이 차츰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밖에서 행복을 쟁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줄어들게 되고 경쟁을 통해 승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이 줄어들게 됩니다. 인정
받을 필요도 무엇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세상을 오직 관용과 자비심으로만 보게 
됩니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두 하나의 생명이다'라는 생명의 본성을 온전히 느끼고 체험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생명은 하나'라는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이 기초가 되는 사회입니다. 이것뿐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삶과 밝은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좋든 싫든 단 하나의 외길. '나'를 떠
나 하나의 생명감으로 통합하는 것뿐입니다. 곧 '생명의  근원과 하나되기'를 체험적으로 성
취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다른 길도 없습니다.
    내가 밝아지면 세상도 밝아져
 세상을 밝게 하려면 우선 내가 밝아져야 합니다. 내가  밝아진다 함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생명으로 투철하게 자각됨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완벽하게  정직해지
는 것, 분리와 한정짓기를 그만두는 것, 모든 판단과 분별시기를 그만두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정직해지기입니다.
  정직이라는 주제만큼 삶 속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제도 드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대중 앞에서 자기의 정직함을 주장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은 채 습관적으로 자신의 정직함
을 강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부정직을 가리고 정당화하기 위한 속임수로서 끊임없이 정직히 주장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부정직에서는 충분한 이유-삶에서의 혹독한 시련과 좌절의 경험-가 있다는 것을 알
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부정직을 참으로 동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정직이란 살아남기의 두려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끈적끈적한 접착제  같은 것입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큰 만큼 부정직은 커지며, 부정직이 큰 만큼 자존심은 완강해지고 공
격성은 포악해집니다. 그러니 정직이야말로 참으로 용기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깊숙
이 박혀 있는 그 두려움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정면으로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이것은 삶 
가운데서 가장 가혹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부정직한 행위를 똑바로  쳐다보면
서 "내가 부정직하게 된 것은 두렵고 무서워서 그랬다."라고 자백해버린다면 얼마나 홀가분
하고 마음이 편해지겠습니까?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애써 감추어 놓고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는 공포와 불안은 얼마만
큼이나 될까요?
  자기가 감추고 잇는 두려움을 찾아내는 것이 정직한 세상을  만드는 기초가 됩니다. 용기
를 가지고 자신의 부정직 뒤에 숨어있는 공포의 신념은 찾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러한 용기가 회복될 때는 더 이상 자신의 정직함을 주장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부정직은 보통 '무엇인 척하기'와  '무엇이 아닌 척하기'로 표현됩니다.  날마다 밥먹듯이 
하고 있는 이 습관적인 척하기는 내면의  공포와 숨겨놓은 의도를 위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은 날마다 척하기와 아닌 척하기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가? 척하기의 중
독은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 버리듯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온통 고갈시켜 버립니다. 그 결
과는 스트레스와 분노와 심신의 질병입니다.
  세상의 부정직을 자기 탓으로 돌려서 자신의 내면을 바로 보지 않는 한 세상의 부정직은 
끝끝내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소인은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군자는 모든 일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라는 공
자의 말씀은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이  간단한 말속에 세상을 밝게 하는 이치가 모두 들
어 있습니다.
  세상의 부정직을 고치기 위해서 그것을 폭로하거나 처벌하는 따위의 우격다짐으로 다스리
는 것은 매우 원시적이고 유치한 방법입니다. 그와 같은 방법을 써서 부정직을 사라지게 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최선의 방법은 세상의 부정직을 관용과 이해로 바라보면서 각자가 자신의 정직함을  회복
하고 정직한 모습의 본보기를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척하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냉
소와 핀잔에 대해 어떤 반응도 하지 말고 말입니다.
  각자가 더욱 정직해질수록 대중의 집합의식도 더 정직해지기 시작할 것이고 이것이  밝은 
세상의 밑거름이 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  말, 생각이 대중의 집합의식을 정직한 
쪽으로 가게하고 있는가? 이것이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둘째로 내가 밝아지기 위해서는 분리와 한정짓기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내가 자신을 세계와 분리시켜 편협한 에고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한
정된 틀에 갇혀 있으므로 자연히 외롭고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큰사랑과 동정심으로 세상 속의 나를 바라보면서 한정된 나를 풀어내야 합니다. 구속에서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척하기'의 중독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며, 따라서 "나는 무엇이다"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고 한정짓는 일을 계속하고 있어야 합니다.
  분리와 한정짓기의 완벽한 소멸이 나로 하여금  무한한 힘을 부려쓰게 하고 행복한  삶과 
밝은 세계를 창조하는 강력한 리더쉽을 부여받게 해줍니다.
  셋째로 내가 밝아지기 위해서는 이기심으로부터 일어난 욕망을 줄여야 합니다. 분리된  
'나'가 자기 이익을 계산할 때 자연히 욕망이 일어납니다.
  세속적인 행복에 나의 이기심과 욕망의 주의가 묶이게  되면 근원적인 지복으로 가는 기
회를 놓치게 됩니다. 돌멩이나 석붙이에 눈이 팔려  황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최고의 
보석을 구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지복이란 세속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행복이며 완벽한 충족성과 영원한 지속
성이 보장된 무한한 행복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이 지복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근본 장애
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에 갇혀 있게 되면 직관의 문이 닫혀 버립니다.
  직관이란 행복한 삶과 밝은 세상으로 들어서게 하는 지혜의 관문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이 줄어들 때 비로소 직관의 통찰력이 회복되고 밝은 지혜가 열리기 시작합
니다.
  넷째로 내가 밝아지기 위해서는 모든 판단과 분별시기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무엇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곱다 밉다와 같은 일상적인 판단과 시비는 생명의 근본
에서 볼 때 모두 빗나간 것입니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 가운데 사람들이 내린 현실적인 판단들이 생명의 본성과 우주의 도리
에 맞는 것이란 거의 없었습니다.
  판단과 분별시비에 젖어 있는 동안 나는 생명의 본성에서  멀어지게 되며, 그만두고 있는 
만큼 나는 생명의 본성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어떤 대상이 나쁘고 악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함께 관여하여 공동창조한 결과이며, 
사실은 나의 현실에 비치는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 내  책임입니다. 내가 판단과 분별시비에
서 벗어난 만큼 분리감이 줄어들고 하나의 생명감이 회복되어 생명의 밝은 본성에 가까워지
게 됩니다.
    밝은 세상을 위한 삶의 모델
  어떤 사람이라도 세계를 보는 관점에 있어서 자기의 관점만이  옳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관점이나 신념도 더욱 위대하고 정의롭게 보이도록 꾸며대고 세련시킬 수 있습니다. 
지난 5천년 동안의 인류의 역사 가운데는 화려하고도 정의로운 신념들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의 신념들은 위대한 문명과 위대한 세계의 건설이라는 슬로건 아래 집
단간의 피흘린 투쟁의 무기가 되어 결국은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무감각한 동물적 행
위를 정당화시키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정의로운 신념의 깃발 아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이것
은 이제 더 이상 인류가 되풀이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감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말입니다.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들 각자는 어떠한 인종주의도 민족주의도  어떠한 한정된 이데올로기도 아닙니다. 
각자는 어떤 물리적 존재도 어떤 아이덴티티도  무엇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
다. 각자는 이러한 모든 것을 지어내는 영원한 배경이자 창조의 근원입니다. 그러니 모든 존
재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나쁘고 악하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를 증오하고 공격하자마자 상대에게 피해
를 주기 전에 곧바로 자신의 가슴을 상하게  하며 자기의 마음 가운데 고통의 씨앗을 심어 
놓게 됩니다.
  이런 식의 대립과 투쟁의 방식을 통해서 사회 개혁을 할 때는 피차간에 이익됨이 없습니
다. 설사 이런 방식을 써서 개혁이 조금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별 것도 아닙니다.
  사회개혁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과거의 역사를  살펴볼 때 진실로 어떤 이익이  있었으며 
과연 남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대상이든 겉모습이 악독하게 보이더라도 그  본질을 바로 보면 나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귀한 생명입니다.
  누구나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해주면 좋아하고 강압적으로 꺽으려고 하면 기필코 반발합니
다. 피차간에 충돌하다 보면 결국 사회를 정화하고 개선하는  쪽으로 쓰여질 에너지가 맞서 
싸우는 쪽으로 낭비되고 맙니다.
  남는 것은 대중의식 가운데 증오와 투쟁심의 양만 증대시켜 놓은 꼴이 되며 그렇게 될 때 
그러한 어두운 대중의식이 새로운 불씨가 되어 사회는 모양만 바꾸어질 뿐 두고두고 반목대
립과 싸움만 계속됩니다.
  아무리 악독한 상대라고 할지라도 상대를 바로 움직이려면 좋은 말과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하고 지극정성으로 자비심을 보일 때 바른 쪽으로 움직여집니다. 조금 더디고 힘들더라도 
이렇게 해야만 어려운 고비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대립과 피흘린 투쟁을 통해 얻은 결과는 어느 땐가는 반드시 불행으로 연결
되고 말았습니다. 강도나 독재자나 어떤  악독한 대상이든지 당신은 원래  신성의 근원이요 
위대한 성자이니까 당신을 존경한다고 합장하면서 공경하는 방법, 이것이 우습게 보일지 모
르나 제일 확실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우선 나부터 생명의 본성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면서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살도록 권
유하는 것, 그렇게 하여 집합의식을  정화시키는 일, 이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아무리 성과
가 없고 힘들더라도  그 실행이 힘들더라도 이것 말고는 다른 묘안이 없으며 이것만이 나와 
전체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길입니다.
  가난이나 병고와 같은 고통들의 배후에는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수많은 복합적인 원인들이 
다차원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가난하게 되었다면 우선 사회적 모순이
나 제도적 불평등이 가난하게 된 한편의 이유가 되겠지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신
의 심층의식 속에 심어 놓은 고통의 신념, 곧 가난을 경험할  만한 어떤 원인 인자가 꼭 있
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만나더라도 배신하는 사람만 만나게 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꼭 손해나는 일만 가려서 하게 되고, 늘 여기저기서 뜻밖의 재난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책임이 사회나 정부나 부자한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모두를 똑같이 평등하게 만들어 놓는다 해도 절대로 그대로 유지되지  않으며 
만인이 다같이 행복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된  나라 사람들은 고통이 없
고 다 행복한가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자살과 같은 불행한 
일들이 복지제도가 취약한 나라보다 월등하게 많아서 아무리 제도적으로 잘 하려고 해도 일
률적으로 행복하게 만들 길이 없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체 국민의 모든 삶을 사회가 보장한다는 스위스에서도 몇 년 전 고
등학생 수십 명이 집단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삶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
습니다.
  사람들이 겪고 잇는 가난이나 여러 가지 고통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고 다차원적이어서 아
무리 뛰어난 학자나 정치가라도 이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바로 본다면 지금 가난하고 괴로운 것이 꼭 나쁜 것만도 불행한 것만도 아
닙니다. 오늘의 고통이 미래의 행복의 시가 될 수도 잇습니다. 마이너스 요인을 꼭 부정적으
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의식을 진화시키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여 생명의 본체를 바로 알게 하는 학교라
고 할 때 이런 고통들이 오히려 복스러운 공부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만사는 새옹지마
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되는 것이 꼭 좋기만 할까요?
  옛 가르침에 부자나 왕은 3생 원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나 왕은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쉽고 남도 무시하고 더러는 남의 생명을 해치기도 합
니다. 왕이나 부자 자식들은 자칫하면 방종하고  그릇된 길로 가기 쉽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사례를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인생의 참 목표는 생명의 본성을 자각하여 우주의 도리대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자나 왕이 되면 대개는 이런 길에서 멀어지게 되고 그 자식들은 더욱 멀어지게 되고 맙니
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날에는 인간세상의 고통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지옥과 같은 고
통을 받기가 쉽습니다.
  과거생에 어지간히 선업을 쌓고 좋은 일을 했던 결과로 이번 생에 부자가 되고 왕이 되었
는데, 이번 생에 우쭐대고 참된 길로 못가다 보면 다음 생에는 큰 고통의 나락에 떨어질 것
이므로 3생 원수라는 얘기입니다.
  마땅히 정부나 경제인들은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주들도 근로
자들을 경영에 참여시키고 이익을 고루 나누어 불만의 소지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렇게는 안되고 있다고 해서 불만을 품고 지나치게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은 삼
가야 합니다. 자금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요즘 명예퇴직자나 실직자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퍽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그렇더라도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돈이나  직업이나 
직장이 없으면 당장은 괴롭겠지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그런 것들이 삶에서 별것도 아닙니
다.
  못 먹고 못 입고 조금 못 살아도 내 생명에는 별 손해가 없는 것입니다. 근본행복을 추구
하다 보면 이런 정도는 저절로 다 보상이 됩니다. 인생의 전 과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추
구해야 할 목표는 생명의 근본 진리와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나야만 언젠가는 사라질 이 허망한 육신이 허물어진다 해도 죽지 않는 길을 얻
을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찾는 것과 같이 급하고도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누가 일류학교에 가고 못 가고, 더러는 상급 학교에  진학을 못 한다해도 걱정할 것
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삶에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실은 학교공부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내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공부인 생명의 진리
를 잘 알아서 그 본성을 자각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 길은 차원이 높아서 또는 눈
에 보이지 않는 신비스런 목표여서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되는 길, 사회가 안정되고 민
족이 화해하는 길, 인류복지와 세계평화를 얻는 길과는 상관없지  않은 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나 민족의 화합을 위해서나 세계평화를 위해서나 이 길
만이 가장 확실하고도 효과적인 결과를 보장해 줍니다..
  부자한테나 폭군한테나 가난한 사람한테나 투쟁가한테나 누구한테나 너와 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이며 우주가 바로 평등무차별한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자각하
게 하는 것만이 문제를 정확하게 풀어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려면  '나'라는 생각이 끊어져야 비로
소 이웃도 내 몸 같이 사랑 할 수 잇고 진심으로 위할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입니다.
  생명운동, 환경운동, 자연보호운동, 한마음 운동, 민족동질성 회복 운동 같은 사회 운동을 
하더라도 이기적인 '나'를 떠나 생명의 본성을 바로 알고 할 때 제대로 될 수 잇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명을 이야기 할 때는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생명만을 염두에 두기 쉬우나, 
따로따로 분리되어 보이는 현상계의 생명들이란 하나의 생명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에
너지의 서로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대개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어서 신과 나, 객관과  주관, 
너와 나, 선과 악, 흑 과 백, 좌뇌와 우뇌 따위로 모두를  둘로  나누어 보는 경향이 있습니
다. 따라서 하나가 좋게 보면 다른 하나를 나쁘게 보기가 쉬워서 조화를 이루거나 통합되기
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집착한  나머지 모든 대상을 물질로만 이해하
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물질이 많으면 좋고 적으면 나쁘고, 어떻게든 물질을 많이 생산해서 많이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젖어 있어서 물질만을 행복의 척도로 보는  경향이 팽배해 있습니다. 따라서 
남이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고 내가 적게 가지고 있으면 질투심을 느끼고 똑같이 가지고 싶
어합니다. 사실을 물질을 조금 많이  가지나 적게 가지나 별 문제도  아닌 것인데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있다 보니까 서로 더 가지려고 싸우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도 합니다. 
  물론 정치나 경제를 경영하는 지도자들은 재화의 효율적인 생산과 균등한 분배를 위해 최
선을 다해야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이런  것에만 집착하게 되면 참으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물질보다도 내 생명의 본성을 바로 알고 여기에 접근하는 것이 몇백 배 몇천 배나 더  귀
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의 본성대로 살고자 할 때는 사실 
이런 것이 큰 문제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치원부터 대학가지 보고 배운 것이 물질에  대한 집착을 가지도록, 경쟁
심을 가지도록, 더 많이 지배하도록 하는 따위의 생명의 도리에 어긋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 동안 좋다 나쁘다식으로 끊임없이 분별시비하도록 세뇌되었습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보고 배운  것들이란 대개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보다는 
고통의 짐만 잔뜩 짊어지게 만들어 놓은 것들뿐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깊게 주입되어진 이
러한 고통의씨앗을 지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교육이라는 것이 이처럼  행복으로 가는 교육이라기 보다는  고통으로 
가는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잇습니다. 잠재의식 속에 심어져 있는 고통의 씨앗을 소멸하기 위
해서는 이원론적인 분별시비, 물질지상주의와 같은 집합의식을 근본적으로 허물어버려야 합
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완전무결한 생명이다."라는 깨달음과 
함께 "나는 바로 이 세계의 근원이며 따라서 이  세계에 대한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자각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자각 자체가 모든 인류의 하나의 큰 선물이 될 것이고 이
러한 집합적인 자각의 에너지가 강력해질 때 미래의 선진적인 문명의 중심이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집합적인 자각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의 생명감을 증폭시킬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내 몸처럼 돌보고 싶은  진심이 우러나오게 되며, 환경
보호나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한 마음으로 참여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끼리의 차이란 다만 가지고 있는 신념의 차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종교나 철학, 
사상과 이념 같은 신념체계들의 장벽을 초월하여  하나의 생명감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때 
그러한 조화가 생명의 문명과 밝은 세상을 창조하는 반석이 됩니다.
  자신이 생명의 근원임을 자각하고 생명의 본서에 맞게 살아가는 진화된 존재들이 그러한 
조화의 정점에 서서 집합의식이 함께 진화하도록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화를 향해 나아가는 삶, 곧 생명의 문명과 밝은 세상을 지향해 가는 진화된 
존재들의 삶의 모델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요?
  1. 나는 이기심과 경쟁심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남과의 경쟁에서  내가 이긴다는 목표를  
갖지 않는다.
  2. 나는 욕망을 줄임으로써 작고 소박한 것에 만족하며 어느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3, 나는 세상의 부정직과 타인의  악을 분노로써 대하지 않고  오직 관용과 자비심으로만  
바라본다.
  4. 나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문명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며 오직  나의 뜻대로 그리고  
의도적으로만 행위한다.
  5. 나는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나 자신의 일부로 간주하며 모든 존재를 나와 더불어  평  
   등하게 대한다.
    행복의 조건
  몇 해 전 어느 의과대학 정신과에서 한국의 중년층 주부들을 대상으로 행복도에 대한 설
문조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느끼고 있는 행복감이 어느 정도인가를 조사한  것인데, 재미있는 결과는 학
력이 높을수록, 재산이 많을수록,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행복도가 낮았
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밖에서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본래 성취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설사 행복이 밖으로부터 성취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불만족이 따르게 되고  나아
가서 그것은 곧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학문분야든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들 중 어느 것도 인간의 행복과 안락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란 것들이 내 생명의 근원에서 참으로 지향하고 있는 행복의 본질을 바로 
통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재산, 지위, 명예, 이성 따위의 추구를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 하나 그런 정
도를 가지고는 만족스런 행복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 사람의 마음의 맨 밑바
닥은 언제나 완전무결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산, 지위 따위로는 절대로 완전한  행복을 없기 때문에 결국은 또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지구 땅덩어리를 통째로 다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정도의 상
대적이고 제한된 범위를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됩니다. 완벽한  행복이 되려면 충족도가 완전
무결해야 되고 지속성이 시간적으로 영원해야 합니다.
  원래 내 생명은 무한하여 한정되어 있지 않고 완벽하여 부족한 점이 없으므로 완전한 행
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한 항상 불안과 불만족
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꼭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기대했던 목표가 이루어 진  다음에 "이제 
이것으로 만족하고 더 바랄 것이 없다"라고 생각되었습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한정 지으면(예컨대 이것이 이루어지면  행복할 것이다) 곧 행복
에서 빗나가고 맙니다. 왜 한정지어 가지고는 행복이 안 되는가  하면 내 생명의 본성은 한
정지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본디 한정 없음입니다.
  한정을 놓아 버리는, 한정을  지워버리는 순간 행복해집니다. 그러므로 한사코 한정 없는 
상태로 가야 합니다.
  한정 없는 상태란 무엇인가?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소중한 행복의 덩어리이자 영원
히 변치 않는 행복의 고향입니다. 누구라도 그의 내면에는  생명의 고향인 순수의식으로 돌
아가고자 하는 향수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당장 잘 먹고 잘 입고 아름다운 이성과 사귀며 즐기는 것이 잘 사는 것 같지만 이런 것을 
통해서는 끝끝내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내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에 온전히 안주하기 전
에는 항상 불안하고 불만족스럽습니다. 순수의식이란 다만 어떤 논리가 아니며 무한한 가능
성이란 충만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일상적인 세간살이란 이쪽으로 가는 데 필요한 수단이자 방편이어야 하며 물질적인  삶이 
행복의 목표가 되어서는 끝끝내 행복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마음 박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나 자신이 더 없이 행복의 근원이자 행복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나는 항상 행복
의 파장에 자신을 맞추어 행복의 느낌 속에 잠겨 잇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확실하게 될 
때는 외부적인 풍요나 행복의 모습은 저절로 여기에 모여들게 되고 자신에게 따라다니던 고
통도 내가 행복의 파장 가운데 있기만 한다면 행복의 에너지로 리사이클링(재활용)됩니다.
 따라서 행복하고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면 무턱대고 밖으로부터 행복과 풍요를 쟁취하려들
기 전에 자신의 마음 가운데 행복과 풍요를 받아들여 담을 수 있는 그릇, 즉 행복의 수용체
를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이 수용체를 만들어 놓지 않은 상태에서는 행복과 풍요가 들어오더라도 그냥 흘러가 버립
니다. 이 수용체를 만드는 일이 자신을 무한한 행복과 지고한 사랑의 느낌 가운데로 잠기게 
하는 것, 나의 심신의 전체가 행복과 사랑의 덩어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세속적 쾌락을 떠나면 떠날수록 세속의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고도 큰 행
복이 밀려온다고 합니다.
  세속의 쾌락이란 이러한 행복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못 됩니다. 우리가  행복을 얻으려면 
황금 같은 보석을 얻어야 할텐데 겨우 쇠붙이나 돌맹이 정도를 행복이라고 알고 거기에 안
주해 버리기 쉽습니다.  
  마땅히 근본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행복같이 보이는 것들은 대개가 행복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얼마 안 
가 곧 행복을 억압하는 쪽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고통같이 보이는 것
도 바로 보면 고통이 아니라 그것은 곧 고통을 해소하는 쪽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세속적인 행복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들의 배후에는 깊고도 미묘한 이치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눈에 고통으로 보이는 질병, 사고, 가난 등에는 대개  내 생명의 근원이 나로 하여금 
생명의 본성으로 돌아오도록 가르침을 주는 생명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처럼 보이는 것이 꼭 고통이라고만 할 수는 없고 행복처럼 보이는 것이 꼭 
행복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생명의 본성에 가까울수록, 내 의식이 창조자  의식에 가까울수록 편안하고 행
복해지며 내 마음이 생명의 본성에서 멀어질수록, 내 의식이  피조물 의식에 가까울수록 불
안하고 불행해집니다.
  몸에 병이 생기고 사고를 당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도 그 뿌리에서 보면 생명의 본
성과 멀리 떨어져 살았던 결과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쨌든 생명의  근원, 
생명의 본성 쪽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리한 새가 바람따라 
가는 길입니다. 
  개인도 행복하게 해주고 세상도 밝게 해주는  개인적인 삶의 조건은 다음처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마음 밖에서 행복을 구하지 말라.
 2. 마음을 항상 생명의 본성에 맞추라.
 3. 생명의 본성에 맞는 삶을 살아가라.
  첫째로, 근본행복은 마음 밖에서는 성취될 수 없고 오직 마음 안에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재산, 지위, 명예 따위와 같이 밖에서 얻어진 행복 같은 것은 곧바로 행복을 억압하는  조
건으로 변하고 맙니다. 마음 안에서 순수한 행복감이 충만할 때 실은 행복의 외부적 조건도 
마치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둘째로, 행복의 무궁무진한 보고인 생명의 본성에서 한 시도  마음이 떠나지 말아야 합니
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생명이며 나는 그러한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순수의식의 자각상태
를 지속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분별시비가  줄고 고요해지며 관용과 자
비심이 커지게 됩니다. 이러한 자각상태가 바로 최상의 행복입니다. 
  셋째로, "모든 존재는 하나의 생명이며 나는 그러한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온 세계는 
내 책임이다."라는 근원적인 자각상태에서 살아버리면 어떠한  고통의 씨도 생명의 빛에 끼
어들지를 못합니다. 어두운 문명구조 속에서 움츠려들어 노심초사할 것이 아니라 백 퍼센트 
생명의 본성대로 용기있게 살아갈 때 기성문명도 밝은 쪽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자연히 항상 웃는 얼굴과 사랑스런 말씨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언제나 타인의 이익
과 공동이익을 앞세우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수준에 내가 맞추어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결코, 결코 좌절하지 말라
  우리는 누구나 따로 떨어져 있다는 분리된 의식의 조각들 위로 솟아올라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통합되어 있는가를 확실히 이해하고 통찰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에 가까워지거
나 근원 그 자체가 될 수 있습니다.
  갈수록 넓어진 의식을 통해서 생명과 창조의 세계를 탐사하고 경험함으로써 현실세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의 중심이 될 있습니다.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각자가 따로 떨어져 
있다는 무지와, 그리고 욕망, 저항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풀어주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게  되
며 미래의 밝은 공동체 사회의 기초가 됩니다.
  헛된 꿈이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때만  헛된 꿈입니다. 일단 현실세계
에서 이루어지면 훌륭한 사실이 됩니다.
  미래에 밝은 세상을 창조할까 말까는  모든 존재의 집합의식이 결정할  일입니다. 위대한 
헛꿈으로만 영원히 남을지 생명의 문명과 밝은 세상으로 나타날지는 집합의식의 간절한 믿
음의 정도와 대중들의 공동 노력의 끈질긴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생명의 문명이란 "우리는 하나의 생명이다"를 다 함께 인식하고 경험하는 세상입니다. 생
명의 문명과 밝은 세상, 너무나 원대하고도 의욕적인 과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그만 입을 벌리거나 고개를 젓고 말겠지요. 
  "그것은 망상이다. 그런 일은 인간 세상에서는 불가능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게 
박혀 있는 신념은 "문명과 세계의  창조는 가능하지 않다" 입니다. 바로 이 "가능하지 않다"
라는 집합의식이 개선된 세상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입니다.
  만약 당신이 한 때 잘못된 세상을 개선하여 밝은 세상을 만드는 꿈을 가지고 그것의 실현
을 위해서 애쓴 적이 있었다면 그 시절에 같은  길을 갔던 옛 동료들을 다시 한 번  찾아가 
보십시오.
  그들에게 지금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대개 몸만 살아남아  자기가 한정 지은 공간  속에 안주하여 내린 결론은 
"밝은 세상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입니다.
그들은 오래 전에 벌써 옛꿈을 다 잊어버리고 절망과 좌절의 덫에 걸려 철들고 성숙한 어른
답게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더욱 철이 깊이 들수록 밝은 세상을 꿈꾸는 사
람들에게 전해주는 선물이란 바로 그 죄절의 덫입니다. 그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이란 "현실
은 좀체로 변화하지 않는다"입니다.   
  밝은 세계를 지향하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이 하는 말이란 이런 식입니다.
  "여보게, 세상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네. 나도 한 때는 불같은 이상주의자였고 애도 
많이 썼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항상 간격이 있기 마련이었네." 그들은 역전의 용사로서
의 자신의 무용담을 팔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사회의 실현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는 
패배주의의 좌절을 전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밝은 문명과 밝은 사회의 실현은 절대로  간여하지 않다고 믿는다." 이  신념이 밝
은 세상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입니다.  이 세계를 좋은 세계로  만들어  보려다 실패한 
많은 사람들의 좌절과 패배의식이 이 장애물의 높이를 더욱 높아지게 하고 잇습니다.
  사람은 누구한테나 세상을 좋게 만들어 보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내가 없다고 믿는 신념과 남이 옳다고 믿는 신념이 대립하게 되
면 갈등이 생기게 되고 그 갈등의 과정을 견디지 못할 때는 무엇이 옳다는 신념 그  자체가 
짐이 되어 결국 나에게 남는 것은 오직 살아 남아야겠다는 절박한 충동뿐입니다. 따라서 생
존이란 사람에게서 삶의 근본목표나 동기는 아닌 것이며 다만 나의 용기가 고갈됨으로써 자
신의 꿈이 후퇴할 때 남기고 간 쓰레기 같은 부산물인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어떤 사람의 좌절과 절망을 용인하게 되면 그것은 곧 자신의 마음에 미래의 
좌절과 절망의 씨를 심게 됩니다. 
  밝은 세상을 위한 가장 큰 기여는 당신이 그것을 꼭 이루어진다고 믿는 마음까지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뛰어난 도구와  힘은 당신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
과  파장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중의 집합의식에 커다란 에너지로서 보탬이 
될  것입니다. 오직 그 믿음에 대한 0%의 의심을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좌절과 절망이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게 몰려오더라도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
은 요지부동의 믿음과 불퇴전의 결의와 물러서지 않는 끈질김입니다.
  다음에 기록한 사람의 인생의 역정을 보면 좌절과 절망을 돌파할 수 있는 이러한 해답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잇습니다.
 22세, 사업에 실패
 23세, 주 의회 의원선거에서 패배
 24세, 다시 시작한 사업에서 또 실패
 25세, 주 의회 의원에 당선
 26세, 애인의 사망으로 좌절
 27세, 신경쇠약 증세로 건강악화
 29세, 하원 의장선거에 출마하여 패배
 31세, 대통령 유권자 선거에 출마하여 패배
 34세,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
 37세,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
 46세,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
 47세, 미국 부통령 선거에서 패배
 49세,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 또 패배
 51세, 미국 대통령의 당선
  이처럼 길고도 지루한 좌절을 딛고 마침내 성공을 이룩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이 기록이 전하는 메시지는 누구든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밀고 나가면 무엇이
든지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되거나, 무슨 
감투를 얻는 것과 같은 따위의 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어려움, 어떠한 폭풍이 몰아쳐 오더라도 결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결의와 끈질김이 생명의 문명과 밝음을 세상을 탄생시키는 근본동력입니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오직 하나 "이루어  낼 수 있다"뿐입
니다.  

    일상의 가운데서
  음식의 단식, 생각의 단식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가 먹는 많은 음식과 숨쉬는 공기는 화학 물질로 오염되어 있습니
다. 이러한 오염이 우리의 건강에 위협적으로 작용되어 있습니다. 어떤 생태주의자들은 이렇
게도 설명합니다. "현대농업은 주로 화학비료에 의존하고 있는데 화학비료는 토양을 산성화, 
황폐화 시켜서 지력을 감퇴시키고 농작물에 대한 병충해가 만연해지고 농약사용의 증대라는 
환경파괴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이롸  같은 바자연적인 사슬을 깨뜨리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농약과 의약품을 개발해 낸다고 하덜라도 농작물의 병충해와 인류의  고질병은 
해결될 수가 없다." 현대인들은 지금 화학물질의 오염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개
인적, 집단적으로 무엇인가 자구책을 써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화학비료와 농약에 
오염되지 않은 곡물, 채소, 과일 같은 유기 농산물을 취하고, 화학물질이 포함된 가공식품은 
될수록 피하도록 하여 결국은 전사회가 이러한 생태주의적 구조에 도달하도록 노력할  필요
가 있습니다. 내가 그 동안 관찰하고 경험한 바로는 몸에 축적된 화학물질을 배설시키고, 정
화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정기적인 단식입니다. 내가 다른  나라의 단식 전물 의학자
들로부터 단식의 과학적 원리와 실행방법을 익힌 후 지난 십여 년 동안 많은 분들에게 단식
을 안내하고 있고 나 자신도 가끔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단식을 할 때는 나의 일상활
동을 하면서 하는 데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있지만 
심신은 더 경쾌해집니다. 단식은 일절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이나 차를 
충분히 마시면서 행합니다. 다양한 종류의 단식법이 있지만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법
은 효소 단식입니다. 여러 가지 약초나 채소를 발효시킨  효소원액을 물에 희석시켜 조금씩 
마시고 생수나 감잎차를 곁들여 늘 마시고 있으니까 하루에 2리터 이상의 물을 먹는 셈입니
다. 공복감이 생기면 섬유세제(예를 들어 '콜론파이버'와 같은)를 먹기도 하고 죽염을 소량씩 
섭취합니다. 이런 식의 단식은 엄격히 말하면 단식이라기보다는 절식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
지요. 아무튼 나는 단식을 고행이나 극기 훈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여행이나 탐험
쯤으로 생각하며 즐겁게 합니다. 단식기간도 처음부터  꼭 며칠간이라고 확정하지는 않으며 
3일이나 5일이나 또는 일주일, 그때그때 느낌이나 상태에 따라서 탄력성있게 조절합니다. 그
러나 나에게는 일주일정도가 가장 적당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다른 분에게 권할 때
도 단식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아 가면서 까지는 하지 말고 본인이 무리없이 할 수 있을  때
까지만 하도록 일러줍니다. 단식은 끝난 다음이 중요합니다. 단식 후에 분출하는 식욕을  조
절할 자신이 없어서 회복식의 원칙을 못 지킬 것 같으면 처음부터 단식을 안 하는 것이  좋
습니다. 주의를 요하는 회복식의 기간은 최소한 단식기간 만큼 해야 합니다. 기간도 7일  정
도이겠지요. 단식을 끝낸 직후 2내지 3일간은 미음을, 그후 약 3일간에서 4일간은  부드러운 
죽을 그리고 이어서 적은 양의 밥을 먹는 식으로 점진적으로 본인의 상태에 무리함이 없이 
늘려 가면 됩니다. 단식이 끝난 후 약 한 달 가량은 술, 담배, 고기와 자극성이 있는 향신료 
등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단식이야말로 과식, 폭식의 버릇을 소식으로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단식기간에는 누워서 쉬는 것보다는 무리가 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산길이나 숲 속을 산책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나는 이  기간에 
전통기공인 '온살도리'를 하루에 2시간씩 합니다. 또 매일 목욕을 하는데 온탕 냉탕을 1분씩 
교대로 왔다갔다하는 이른바 '냉온욕'을 하지요.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단식 기간에 힘이 빠
지는 일이 없고 심신이 더욱 경쾌해지며 일상적인 업무에 조금도 지장이 없습니다. 나는 이
와 같은 방법으로 단식을 매년 두 차례정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한 ' 생활의료 2단계 
기 다스리기' 와 '3단계 몸다스리기'를 나는 위와 같은 식으로 합니다. 우리 가족들도 단식을 
좋아합니다. 아내는 아바타 프로그램 안내교사와 문인화 화가로서 바쁘게 지내고 있는데 가
사 일까지도 다 돌보면서 즐겁게 단식을 합니다. 열일곱살짜리  아들도 지난 여름방할 동안
에 7일간의 단식을 했습니다. 나는 가족들에게 단식을 강욯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해 보라는 식이지요. 내가 가끔 단식하는  것을 보고 가족들도 자연스럽게 따
라서 하는 것 같습니다. 실은 누구나  단시의 묘미를 한 번 맛보고 나며  정기적으로 안 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 가족들이 하고 있는 장식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안심하고 단식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단식은 처음 할  때는 단식 전문가로부터 안내를 받
을 필요가 있게지만, 두 번째부터는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습니다. 일상 생활을  원만
하게 처리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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