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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발견

제2장 인간관의 양상

by Healing New 2020. 5. 16.

    1. 기독교인, 고대 그리이스인, 중국인

  인간관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즉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학적 인간관, 고대
그리이스인의 이교도적인 인간관, 그리고 중국인의 도교적, 우교적 인간관이
이것이다(불교적 인간관은 너무나 슬픈 것이어서 여기에는 넣지 않기로 한다)  이 세
가지가 내포하고 있는 우화적인 의미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 생각하면 이 세 가지는
모두 본디 서로 틀리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진보된 생물학적, 인류학적 지식을 가진
현대인이 이것을 좀더 널리 해석하면 한층 더 그 차이는 없어진다. 그렇지만 그
원시적 형태에 있어서는 각각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전통파 기독교인의 사고 방식으로는 인간은 완전하고 천진난만한,
어리석기는 하지만 행복한 것으로 창조되어 에덴 동산에서 벌거벗고 살았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에 지식과 지혜가 왔으며 또 그 다음엔 타락하여 낙원을 잃게 되어
인간의 고난이 시작된다. 그 고난은 주로,
  1. 남자는 이마에 땀 흘리며 일해야 하고,
  2. 여자에게는 분만하는 고통이 지워졌다.
  인간은 본디 천진난만하고 완전한 것이었는데, 오늘날 이 불완전한 꼴로 타락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요소가 하나 더 여기에 덧붙여졌다. 말할 것도 없이
악마라는 것이 이것이다. 인간의 보다 높은 천성은 영 속에서 움직이는 것인데,
악마는 주로 육체를 통해서 움직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영)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학사에서 언제부터 발명되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영)은
인간의 기능 이상의 것이 되었다. 조건이 아니라 실체가 되었다. 그러나 동물은
신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영을 갖지 못했으므로 이 영이 있고 없는 것으로 동물과
인간을 뚜렷하게 구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윤리는 여기서 그만 딱 막혀 버리고
말았다. 악마의 기원을 설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자들이 예의 스콜라
철학적인 윤리로 이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다가 그만 진퇴 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신이 아닌 악마가 신 그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말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이고,
또 우주의 창세기에 있어 신이 아닌 악마가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영겁적 존재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된 결과
악마는 타락된 천사였음이 틀림없다는 의견에 일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악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속인 것이다(왜냐하면 이 타락된 천사를 유혹한 다른 악마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각에서 영혼과
육체라고 하는 기묘한 2분법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신화적 관념은 오늘날 매우 널리
그리고 유력하게 행세하고 있어서 인생과 그리고 그 행복에 관한 철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속죄라는 생각이 생겼다. 여기서 오늘날 흔히 쓰이는 속죄의
어린양이라는 근대적인 관념을 빌어 오고 있는데, 옛날로 거슬러 올라 가면 군고기의
냄새를 좋아하여 (희생을 바치지 않으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신)이라는
관념에까지 이른다.이 속죄라는 관념에서 죄라는 죄가 다 한꺼번에 용서받는 수단이
발견되고, 교리를 완성하는 방법이 또다시 발견된 것이다. 기독교 사상의 가장 기묘한
생각은 이 (완성)이라는 사상이다. 이것은 고대 세계의 쇠퇴기에 발생한 것이어서,
죽은 뒤의 생명을 강조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고 행복론이나 또는 평범하게 산다는
문제 그 자체가 구세의 문제로 바뀌었다. 분명히 부폐와 혼란 속에 가라앉아 마지막
파멸 속으로 떨어져 가고 있는 이 현세로부터 어떻게 하면 산 채로 빠져나갈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이 구세사상이라는 관념이다. 여기서 압도적인 중요성이 불사라는
문제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인간의 영생을 바라지 않았다는
창세기의 이야기에 대해 모순되는 이야기가 된다. 창세기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 것처럼 지혜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은 아니다. 만일 그들을 내쫓지 않으면 또다시 신의 명에
거역하여 이번에는 생명의 열매를 따먹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나 않을까, 신은
이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처럼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다. 그는 팔을 뻗어 생명의 나무에서도 열매를 따먹어 영원토록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이신 하느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 내어 사람이 만들어진 흙을 갈게
하시었다. 하느님은 사람을 쫓아 내어 에덴 동산 동쪽에 케루빔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지헤의 나무는 에덴 동산 한복판 어느 곳엔지 있었던 모양이나 생명의 나무는 동쪽
어귀 가까이에 있었다. 그곳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도 천사
케루빔이 버티고 있어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망을 보고 있다.
  요컨대 모든 것을 타락이라고 믿는 생각이 아직 오늘날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즉
인생의 즐거움은 죄이며 사악이다. 불쾌한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이 훌륭한 행위이다.
또 사람은 대체로 커다란 타력에 의지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죄의 교의는 아직도 여전히 기독교의 근본적
가정이며, 개종자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기독교의 선교사는 개종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죄의식과 인간성이 사악하다는 의식을 머리에 심어 주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그것은 물론 선교사가 포켓 속에 준비하고 있는 기성적인 구원이 필요해지기
위해서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전제이다)  요컨대 우선 첫째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믿도록 만들어 놓지 않으면 그를 크리스찬으로 만들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조금
과격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 일까지 있다.
  (우리나라의 종교는 너무나도 편협하여 죄에 대한 생각만 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점잖은 사람은 이젠 교회에 나오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고대 그리이스의 이교도적인 세계는 독특한 별세계여서 인간에 대한 그들의 사고
방식 또한 매우 다른 것이다.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기독교가 인간을
신처럼 만들려고 애를 쓰는 데 비해 고대 그리이스인은 신을 인간처럼 닮게 만든
것이다. 저 올림피아의 신들은 확실히 쾌활하고 여자를 좋아하며 사랑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싸움도 하는가 하면 맹세도 어기고, 성도 잘 내는 패들이다.
그리이스인 자신처럼 사냥을 좋아하며 전차도 타고 창던지기도 한다... 아니 결혼까지
하는 패들로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생아를 가지고 있다. 신과 인간의 차이를
들자면, 신들은 다만 하늘에 천둥을 울리며 지상의 초목을 무성하게 하는 신력을
가지며 죽지 않고 영생하는 패들로서 포도주 대신으로 신주를 마실 뿐이다. 술을
만드는 열매는 대체로 똑같은 것이었다. 그리이스인은 이 신의 무리들과 사이좋게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폴로 신이나 아테네 신과 함께
배낭을 등에 지고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또는 도중에서 머퀴리 신을 불러 세워 웨스턴
유니온 회사의 심부름군 아이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에 흥이 나면 머퀴리 신이 (야아, 알았어.
그런데 좀 미안하지만 내가 얼른 뛰어가서 이 편지를 72번 거리에 전달하고 와야겠어)
하고 수작을 붙일 것 같은 모양을 상상할 수 있다.
  때로는 참혹한 운명에도 따라야 하는 한정된 인생이라는 생각이 고대
그리이스인들의 머릿 속에 있었다. 일단 이러한 생각을 시인하게 되면 인간은 그
있는 대로의 상태를 달게 받게 되어 매우 행복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이스인은 인생과 이 우주를 사랑했으며 자연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기에 몰두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진, 선, 미를 이해하려는 데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이스에는 에덴 동산과 같은 신화적 황금시대는 없고 따라서 인간 타락의 우화도
없다.
  그리이스인 자신은 대홍수 뒤에 들판으로 내려온 데우칼리온과 그 아내 퓌라가
손으로 집어들어 어깨 너머로 던진 작은 돌로 만들어진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질병과 고생에 관한 설명은 더 우습다. 질병과 고생은 어느 보석 상자, 즉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하는 젊은 여자의
욕망에서 나왔다고 한다. 고대 그리이스인의 공상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넓게 보았다. 기독교도들의 안목으로 볼 때에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산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체념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왔다.
즉 그곳에는 이해력과 자유로운 사색적 정신을 구사할 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궤변 학자들 가운데는 인간의 본성을 선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고 악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지만, 거기에는 대체로 근세의 홉즈 대 루소와
같은 심한 모순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에 와서는 인간은 욕망과 정서와 사상의
혼합물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이상적인 인생이란 예지 즉 참된 이해력이 가르치는 대로
이들 3자의 조화 속에서 살아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이념)은
불멸이나, 인간 개개의 영은 그것의 정의, 학문, 절제, 아름다움 따위를 사랑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천하게도 되고 고상하게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페도 편)에 있듯이 영혼도 또한 독존 불멸의 존재를 차지하고
있다. 즉 (영혼이 단독으로 존재하여, 그것이 육체에서 떨어져 있다면 또 육체가
영혼에서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라고 했다. 인간의 영혼
불멸에 관한 신앙은 분명히 기독교도, 고대 그리이스인, 노장 철학자 그리고 유교도의
견해에 공통되어 있는 점이 있다. 물론 이것은 근대의 영혼 불멸 신자가 덤벼들 만한
것이 아니다. 영혼 불멸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신앙은 아마도 현대인에게는 무미한
것이리라. 왜냐하면 재생설과 같은 영혼 불멸설을 지지하는 소크라테스의 모든 전제가
현대인에게는 수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의 인간관도, 인간은 창조주(만물의 영장)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유교가
생각하는 바에 의하면 (천지인삼재)에 있어 인간은 천지와 격을 같이 한다. 그 배경은
정령설이다. 즉 만물은 살아 있으며 또는 정령을 가지고 있다. 산이나 강이나 또는
태고에서부터 오늘까지 내려오는 것에는 모두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바람이나 우뢰는
정령 그 자체이며 어느 큰 묏부리나 큰 강도 이것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정령의
지배를 받고 있다. 어떤 종류의 꽃이고 간에 꽃은 모두가 그 계절과 번영을 주재하고
있는 작은 정을 하늘에 가지고 있다. 만화여제라는 것이 있어서, 그 탄생일은 음력
2월 12일로 되어 있다. 어느 버드나무건 소나무건 향나무건 여우건 거북이건 몇 백 년
이상이라는 많은 나이에 이르면 이 불멸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두 정령을 갖게 된다.
  이 정령설의 배경이 있기 때문에 인간도 또한 영이 나타난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영은 우주 전체 속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능동적,
적극적 즉 양의 원리와 여성의 수동적, 소극적 즉 음의 원리와의 결합에 의하여
생긴다. ... 이것은 실제로는 후세의 양전기, 음전기의 원리를 빈틈없이 상상한 것이
교묘하게 들어 맞는 데 불과하다. 이 영이 인간의 육체에 깃들면 백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육체에 머물지 않고 영의 상태인 채로 떠돌고 있으면 혼이라고 불린다(강렬한
개성, 즉 (영)을 가진 사람은 백력, 즉 백의 에너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이 혼은 죽은 뒤에도 계속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그 영은 보통은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는 것이지만, 사자를 매장한 뒤 공양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떠돌아다니는 망령이 된다. 물에 빠져 죽은 자나 타향에서 횡사를 하여 묻어줄 사람도
없는 사람들의 영에 대해 널리 공양하기 위해서 7월 15일을 우란분(망령 제일)로
정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생긴 것이다. 또는 암살을 당했거나 억울한 죄로
원통하게 죽었거나 하였을 경우에는 그 망령은 억울하게 죽은 것을 분하게 여기는
나머지 허공을 떠돌며 그 부정에 대한 원한이 풀리어 원령이 만족할 때까지는 남에게
화를 준다. 원령이 만족하면 성화는 그만 풀리고 만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은 영혼이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이니까 사람은 아무래도
어떤 종류의 번뇌, 욕망 즉 (활력의 흐름, 좀더 알기 쉬운 말로 할 것 같으면 마치
(정신력))에 해당되는 것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지만 그저 인생의 특질로서 갖추어져 있으며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남녀는 정렬, 자연적인 욕망, 고상한 야심, 또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 성, 굶주림,
두려움, 노여움을 가지고 있고 질병, 고통, 오뇌,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수양이란
이러한 번뇌와 욕망을 조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교적인 사고 방식으로,
우리가 갖추고 있는 이러한 인간성과 조화하여 생활함으로써 제6장의 끝에 인용한
바와 같이 인간은 천지와 동격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도는 인간의
육의 욕망을 본질적으로 중세의 기독교도와 똑같이 본다. 즉 쫓아버려야만 하는
번뇌의 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머리가 좋아서 지나치게 생각하는 남녀는
이따금 이 사상에 물들어 그만 중이 되어 버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유교의 상식은
대체적으로 이것을 금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다소 노장 철학의 영향에서 오는 것이긴
하지만, 박명하다고 고민하는 가인, 미녀는 인간적 망념을 품었다거나 또는 천상의
의무를 게을리 했다거나 하는 죄목으로 처벌을 받아 이 지상으로 쫓겨 내려와서
인간적 고난의 숙명 속에서 살아가는 (타락된 선녀)라고 보여지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 정신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정의 신) 즉 정신으로, 이 (정)이라는 말은 본질적으로는 여우의 정이니,
바위의 정이니, 소나무의 정이니 하는 의미로 쓰인다. 영어로 가장 뜻이 가까운
말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vitality(활력) 또는 nervous energy(정신력)라는 말로,
하루 동안 때를 달리 하여 바닷물처럼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떠한 종류의 번뇌와 욕망, 그리고 이 활력으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장년 시절, 노년 시절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그러한 것들은 여러 가지로 다른 주파를 가지고 빙빙 돌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에는 싸움을 경계하고, 청년 때에는 색을 경게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이득을  경계하라.

  이 말은 다만 소년은 싸움을 좋아하고, 청년은 이성을 좋아하고, 노인은 돈을 좋아
한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인은 이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인 것의 혼합물에 당면할 때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태도를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도 갖는다. 그것은 (적당히 해
나가자)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것이다. 결국 이것은 무슨 일이고 간에 너무도 많은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또 너무 적은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다.
  인간은 말하자면 하늘과 땅,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숭고한 사상과 비천한 번뇌
사이에 끼여 있다. 이렇게 끼여 있다는 것이 본디 인간성의 본질인 것이다. 지식에
대한 목마름, 물에 대한 갈증도 있고 훌륭한 사상도 좋아하지만 한 접시의 맛있는
돼지고기 요리도 또한 좋아한다. 훌륭한 말도 좋지만 미인도 버리기 어렵다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다. 이것이 실제의 상태니까 이 세상은 아무리 해도 불완전한
세상이라는 것이 된다. 인간 사회를 상대로 하여 그것을 여러 가지로 개선할 기회는
물론 있겠지만 중국인은 완전한 평화니 완전한 행복이니 하는 것은 그다지 탐내지
않는다. 다음에 드는 우화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사나이가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 태어나려고 할 때에 염라대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왕께서 저를 사람으로서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다고 해도 제가
희망하는 조건이 아니면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대왕은 물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러자 그 사나이는 대답하여,
  (이번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제상의 아들로서 태어나거나 또는 장래의
(진사: 국가 시험 합격자)의 아버지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싫습니다. 집 주위에는 1만
정보의 땅과 물고기가 있는 연못과 모든 종류의 과일과 선량하고 애정이 두터운
아내와 아름다운 첩들이 없다면 싫습니다. 천장까지 황금과 진주로 꾸민 많은 방과
곡식이 가득 들어 있는 곳간과 황금이 꽉찬 가방도 없으면 싫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은 왕후 장상이 되어서 명예와 번영을 마음껏 누리고 백살까지 오래 살지 못하면
싫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대답했다.
  (사바 세계에 그런 인간이 있다면 이 내가 다시 태어나서 사바로 가겠다. 너 같은
것을 보낼 것 같으냐!)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인간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생을
출발하자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인 것이다. 어쨌든 인간성으로부터 도피할
길이라곤 그 밖에는 없다 번뇌니 본능이니 하는 것은 본시 선이니 악이니 하고
이러쿵저러쿵 해 본댔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도리어 인간이 그 때문에 질질
끌려다니게 될 위험성이 있다.
  의젓하게 길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춰라. 이러한 중용적인 태도에서 일종의 관대한
철학이 생긴다. 적어도 중용적 정신을 신봉하면서 살아 나가는 교양있는 너그러운
철인의 눈으로 보면, 이 철학은 법률적이건 도덕적이건 정치적이건 가릴 것 없이
(인간의 공통성)(좀더 알기 쉽게 말하면 (정상적인 인간적 번뇌))의 부류에 드는 모든
인간적 과실이나 또는 옳지 못한 행실은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했다. 하늘, 즉 신 그 자체는 중용적인
존재여서 인간은 자기가 최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중용적 생활을 해 나간다면
무서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에 가장 큰 선물로 오는 것이 양심의 평화이며 마음을
흐리지 않는 사람은 명령까지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합리적인 것과 불합리한
것을 둘 다 주관하는 중용적인 신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 일은 모두 순조롭게 되어
나가는 것이다.
  결국 폭군은 죽고, 반역자는 자살하며, 욕심 많은 사람의 재산은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노력가로 돈이 많은 골동품 수집가의 아들들(부친의 탐욕스러운 이야기와
권세를 부리던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은 부친이 매우 고생하여 모은 수집품을
다 팔아먹어 버려서 그 골동품은 이제는 사방으로 흩어져 남의 소유물이 되어 있다는
것 따위다. 살인자는 시체가 되어 발견되고 욕을 당한 여자들은 복수를 하게 된다.
좀처럼 없는 일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학대받은 사람도 외친다.
  (하늘은 눈도 없단 말이냐!)(정의는 장님)  결국 도교, 유교 할 것 없이 어느 것에
있어서도 이 철학의 결론과 그 최고의 목적은 자연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 또는 자연과
완전히 조화하는 것으로서, 이 사상을 분류하는 알맞은 용어가 필요하다면
(중용주의적 자연주의)라고나 해 두리라.
  이 중용주의적 자연주의는 일종의 동물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이 인생을 살아 가게
된다. 어떤 무식한 중국 부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누군가가 우리를 낳았고, 또 우리들은 눈군가를 낳는다. 그밖에 우리더러 무엇을
하란 말이냐)
  (누군가가 우리들을 낳았고, 또 우리들은 누군가를 낳는다)
  이 말에는 무서운 철학이 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인생은 한낱 생물적 과정이 되어
버리며 불멸론이니 하는 따위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도 없게 된다. 그것은 틀림없이
손자의 손을 잡고 과자를 사러 가는 중국인 할아버지의 생각인 것이다. 이때 이
할아버지의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은 5년이나 10년만 지나면 나도 무덤 속으로 들어가
조상님들의 앞으로 가는 것이다 하는 정도의 생각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바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남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나 손자를 두는 것이다. 중국인적 생활
방식은 모두가 이 한가지 생각에서 짜여져 나온 것이다.



    2. 이 지상의 것

  결국 이러한 결과가 되고 만다. 산다는 것은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이 지상에서의 삶이다. 천국에서 산다고 하는 문제는 일체 집어치우기로 한다.
영에 날개를 달아서 신 앞으로 날려 보내어 지상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자. 한정되어
있는 목숨이 아니냐? 언젠가는 죽고 말 인생이다. 주어진 수명은 길다고 해도 겨우
70년, 영이 너무나도 불순한 생각을 일으켜 영생을 바란다면 이 70년은 너무나도
덧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영이 자신을 안다면 이것으로 족하다.
70년이나 살면 웬만한 것은 다 알 수 있고 웬만한 즐거움은 다 맛볼 수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바라보고 인간의 슬기를 몸에 저축하려면 아버지, 아들, 손자의
3대란 세월로도 충분하다. 이 3대에 걸친 세상의 추이를 통해서 이 세상의 풍습과
도덕 정치의 변천을 친히 목격할 수 있었던 현자라면 인생의 막이 내렸을 때
마음속으로부터 만족감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 참 재미난 구경거리였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영원히 가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지상의 것이다. 지상에서 태어나 지상에서 자란다. 말하자면 70년의
과객으로서 이 아름다운 지상에 태어난 것은 조금도 불행이랄 것이 없다. 비록 그것이
컴컴한 토굴이라 할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토굴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토굴도 아니고 한 세기의 대부분인 육칠 십년을 이 아름다운 지상에서 살 수
있으면서도 즐겁게 살아나갈 수 없다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이야기이다.
  때로는 야심이 지나치게 많아서 겸손하고 관대한 지구를 얕보는 수도 있겠지만,
정신의 조화를 언제까지나 보존하고 싶다면 이 육체의 정신이 임시 머물고 있는 이
지상에 대해 (어머니인 대지)라는 생각과 참된 애정과 집착감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상의 생명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널리 바라보는
동물적 회의로노 갖지 않으면 안된다. 또 자기를 흙과 똑같은 것으로 느끼고 겨울에는
봄의 태양을 고대하는 흙처럼 끈질긴 참을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저 숲의 시인
도로우와 같은 순박함을 잃어서는 안된다.
  도로우는 제아무리 풀이 죽었을 때에도 (영혼을 찾아서 헤매는) 것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 자기를 찾는 일이 영혼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그의 행복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산다람쥐의 행복과 비슷한 것이었다. 결국 하늘은 실재가
아니지만 지구는 실재다. 실재인 지구와 실재가 아닌 하늘 사이에 우리들이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은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적어도 훌륭한 실천 철학이라면 인간에게는 육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요즈음 인간은 동물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야 할 때가 바야흐로 온 것이다. 이미
진화론의 기본적 진리가 수립되고, 생물학 특히 생물 화학이 굉장히 진보되고 있는
오늘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들의 스승이나 철학자들이 지성이라는 것에 학자다운 직업적인 긍지를 가지고
있는 이른바 인텔리 계급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구둣방 주인이
가죽을 자랑하듯이 정신, 정신 하는 사람들은 정신을 자랑한다. 정신이라고만 해서는
아직 유현하고도 추상적인 느낌이 부족하다 하여 그들은 (본체)니, (영혼)이니,
(관념)이니 하는 말을 써서 우리들을 놀라게 할 생각으로 대문자로 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이 (현학)이라고 하는 기계로 증류되어 일종의 정기로 변하였고, 이
정기는 또다시 일종의 진수로 압축되었다. 알코올 음료를 만드는데도 조금이라도 맛이
있는 것으로 만들려면 맹물을 섞어서 하나의 (형체)를 갖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이 불쌍한 우리들 속인들은 압축된 정신의 진수를 마실 수
있다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듯 영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 본능과 싸우게 한 것이었다. 따라서
내가 주로 비난하는 것은 그 때문에 완전히 원숙한 인간성의 이해가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생물학, 심리학이란 무엇인가. 감각, 정서, 특히 본능은 이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영으로 되어 있는 것이므로 그 정신과 육체가 조화되고 양자가
일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이어야 한다.



    3. 생리학적 인간관

  인간의 육체적 기능이나 정신적 과정을 좀더 깊이 알게 되면,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좀더 올바르고 좀더 넓은 견해가 생기게 되고, 나의 이른바 동물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엣날부터 품어온 좋지 못한 느낌도 얼마간은 적어질 것이다. (지는
유이다)라는 엣 속담은 우리들의 육체적, 정신적 과정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육체적
기능을 좀더 잘 이해하게 되면 육체를 그다지 경멸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이해하기
때문이며,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소화 작용은 고상한가 천한가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하기만 하면 소화 작용이라는 것이 어쩐지 까닭도
모르게 극도로 고상한 것으로 생각된다. 발한작용이나 불용문의 배설 작용으로부터
췌액, 담즙, 내분비선의 작용 그리고 이것들보다 섬세한 감정 작용이나 사색적 작용에
이르기까지 인체의 생물학적 기능과 모든 작용은 이해만 하면 고상하게 보인다.
그러면 이 이상 더 콩팥을 경멸하지 않게 되고 오직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게 된다.
충치를 보고는 이제는 육체가 썩어가는 증거라고 생각하거나 영의 안녕을 소중히
여기라는 알림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어지고, 다만 치과의사에게 가서 그 진찰을
받고 설명을 들어 알맞은 치료를 받는다는 것뿐이 된다. 아뭏든 치과의사의 치료실을
나온 사람은 이제 다시는 자기의 이를 경멸하지 않게 된다. 도리어 한층 더 이를
존경한다. 이제까지보다도 큰 기쁨을 가지고 사과며 닭의 뼈를 뜯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악마의 것이다, 하고 점잔을 빼는 형이상학자는 말하고, 신 플라톤 학파인
철학자는 하나하나의 이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철학자가 치통으로 고생을 하거나
낙천적인 시인이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 나는 항상 짓궂은 기쁨을
느낀다. 어째서 치통 같은 것에는 아랑곳 하지 말고 자랑스러운 철학적 논고를 계속해
나가지 못하는가. 어째서 여러분이 나나 이웃집 여자처럼 빰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가.
그리고 또 어째서 낙천주의는 소화가 잘 안되는 시인에 대해서 그렇게도 무력하단
말인가. 시인이라면 왜 좀더 시를 읊지 못한단 말인가. 그러니 뭐라고 했는가. 창자가
제대로 활동하여 인체에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는데 창자의 고마움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정신만을 노래하디니 무슨 배은망덕이란 말인가.
  인체의 작용에 관한 경이감과 신비감을 깊게 해서 인체를 한층 더 존경할 것을
인간에게 가르친 것은(만약 무엇인가를 가르쳤다고 하면) 과학이다. 우선 첫째로
동물 발생학에 의해서 인간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은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동물계통수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사실은 훌륭한 감격이어야 한다. 정신, 정신 하며 함부로 정신에 취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충분히 만족시키기에 족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두 다리로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
공룡은 이미 수백만 년 전 옛날에 살다가 죽었다는 말을 나는 아예 믿지 않는다.
인간이 걸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라고 하는 그런 불손한 말을 쓰지 않더라도,
생물학은 조금도 인류의 위엄을 손상시키고 있지 않으며 또 인류는 지구상의 생물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동물일 것이라는 점에 관해 조금도 의혹을 던져 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인류의 위엄을 주장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충분히 만족감을 줄 것이다.
  둘째로 우리들은 인체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해 일찌기 맛보지 못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인체의 내부 기관의 활동과 그 기관 사이의 놀랄 만한 상호작용을 알게 되면
우리들은 아무래도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러한 상호작용이
행해지는 것은 참으로 극도로 어려운 자연작용이지만, 더우기 그 작용이 수행되어
가는 과정은 극도로 단순하고 궁극적으로 신비로운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과학도 이 신비에 부딪히고 보면 인체 내부의 화학적 과정을 분명히 하여 그것을
단순한 원리로 설명할 수도 없으니까 도리어 점점 더 설명하기 곤란한 것이 되고
만다. 이 내부 기관의 화학적 과정은 생리학에 관한 지식이 없는 범인이 보통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인체 밖의
우주의 대비밀도 인체 안의 비밀과 똑같은 것이다.
  생리학자가 인체 생리의 생물리학적, 생물화학적 과정을 분석하고 연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놀라움은 점점 더 늘어간다. 너무나 큰 놀라움을 느끼는 결과 폭넓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생물학자까지도 때로는 생명 신비설에 항복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알렉시스 캐럴 박사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의 저서 (인간 불가지론)에서
언급한 박사의 의견에 대한 찬부는 어떻든 간에, 인체 내부 기능에 관한 여러 사실은
일찌기 설명된 일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하는 소론에는 찬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물질 그 자체 속에 내재하는 지성의 감각을 탐구하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인체의 모든 기관은 기관의 분비액과 신경 계통으로 해서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체의 각 요소는 자기를 다른 요소에 적응시키며 후자는 또 자기를 다른 요소에
적응시킨다. 기계론자나 생명론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각 조직 속에 우리들의 지력과
같은 성질의 지력이 있다고 하면 생리적인 모든 작용은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연합하는 모양이다. 유기체 속에 궁극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각 부분은 전체에 대한 현재 또는 미래의 필요성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모양으로
그것에 따라서 행동한다. 인체 조직에 있어서의 시간과 공간의 의의는 인간 정신에
있어서의 경우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체는 가까운 것도 지각하고 먼 것도 자각한다.
또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도 자각한다(인간 불가지론 p197)

  일례를 들면, 창자를 다쳤을 때 우리들이 전연 치료에 힘을 쓰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저절로 그 창자가 낫는다고 하는 것은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다친 장관은 우선 움직이지 않게 된다.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것이지만 이렇게 해서
분변이 뱃속으로 흘러 나가는 것을 막는 막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다른 장관 또는
장망막의 표면이 상처로 접근하여 이미 알려진 복막의 고유성에 의하여 상처에
밀착한다. 그러면 네댓 시간 내에 상처 어귀는 막힌다. 비록 외과 의사의 바늘이
상처의 어귀를 꿰매 놓았다 하더라도, 상처가 낫는 것은 복막 표면의 자연적 유착의
결과이다(인간 불가지론 p200)

  육체 그 자체가 이와같은 지력을 나타내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는 육체를 경멸하는
것인가. 결국 우리들에게는 이런 육체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며, 이 육체는 손수
영양을 보급하고 손수 조정하고 손수 수리하고 손수 기동하고 손수 재생산하는
기계다. 출생할 때 한 번 장치해 놓으면 훌륭한 추가 달린 큰 구식 괘종시계처럼
조금 밖에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1세기의 4분의 3이나 간다. 그것은 무선 시각과
무선 청각을 갖춘 기계이며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전신 전화의 조직보다도 더 복잡한
신경과 임파조직을 가지고 있는 기계다.
  인체에는 아주 복잡한 신경 조직에 의하여 여러 가지 보고를 정리하는 조직이 있다.
그 일하는 품이 매우 능률적이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서류는 다락방에 보존해
두고 다른 서류는 좀더 가까운 책상에 보존해 두지만, 다락방에 보존해 둔 서류로
30년 동안이나 거의 쓸데가 없어서 그냥 두었던 것도 막상 필요할 때에는 번갯불과
같은 속도와 능률로 찾아낸다. 인체는 또 제동이 완전한, 절대 소리가 안 나는
자동차처럼 운전할 수가 있다. 만일 그 자동차가 사고를 일으켜 유리나 핸들이
파손되면 자동차는 자동적으로 분비 작용을 일으켜 유리의 대용품을 만든다. 또는
타륜을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하거나 또는 적어도 타륜축의 불룩한 끝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운전이 가능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인체에 대해 말하면 우리들은 한쪽
콩팥을 떼어 내더라도 남은 콩팥이 비대해져서 오줌의 정상량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기능이 증대해 가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체는 또한 화씨 1도의 10분의
1정도의 오차밖에 없도록 정상 체온을 유지하고 음식물을 생리 조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자기에게 필요한 화학 약품을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도 영묘한 것은 인체가 생명의 율동감과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우기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의 감각뿐만 아니라 수십년의 감각도 가지고 있다. 즉
유년기, 발정기, 성년기를 조정하며, 성장을 이 이상 중지해야 할 때에는 성장을
중지시키고, 아무도 생각이 미치지 못할 때에 사랑니를 나게 한다. 우리들의 의식적인
지혜는 사랑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또 인체는 독소에 대한 특수한
해독소를 만들어 내는데 대체로 그것은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인체가 이러한 모든 작용을 영위할 때에는 절대로 소리를 내는 일이 없고 공장에
으례 따르는 소음도 없다. 그러나 덕택에 예의 지나치게 점잔을 빼는 형이상학자는
소음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랑인 자기의 (정신)과 (진수)에 관해서 마음껏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것이다.



    4. 인생은 한 편의 시

  생물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생은 한 편의 시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생에는 인생의 독특한 리듬도 있고 맥박도 있고 성장과 노쇠의 내부적 주기도 있다.
그것은 천진난만한 유년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성년자가 사회에 적응해 가려고 조바심
하는 서툰 청춘기가 그에 이어진다. 그 뒤 거기에는 청춘의 번뇌와 어리석음이 있다.
이상과 야심이 있다. 얼마  뒤에 격렬하게 활동하는 성년기에 이르러 경험을 이용하여
사회와 인간성을 더욱 깊이 배운다. 이  중년기에 들면 얼마간 긴장이 풀려 과일이
무르익고 술이 익듯이 성격도 성숙해진다. 그리고 이제까지보다 좀더 배짱이 커지고
좀더 냉소를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점점 따뜻함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들게 되면 내분비선의 분비는 활발성을 잃는다. 만일 이
황혼기에 우리가 진정한 노년 철학을 가지고 그것에 따라 생활하는 방식을 정해
나간다면 그것은 평화, 안심, 한적, 만족의 시대가 된다. 마지막에는 생명은 소멸하여
영원한 잠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 인생의 리듬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야만 한다. 대교향악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주악상, 그 난파조, 그 마지막 대협화음을 맛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인생의 주기 운동은 평범한 인생의 생애에서는 모두 같은 것이지만, 음악은 각 개인에
의하여 작곡되어 가야만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불협화음이 점점 더 심해져서
나중에는 메로디의 주조를 압도하거나 없애버리거나 하는 수가 있다. 또 어떤 때에는
불협화음이 너무 강하게 되어 이상 더 음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권총 자살을
하거나 강에 뛰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중한 자기 교양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본디의 주조악이 흐려져서 절망적이 된 결과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지만
않다면 정상적인 인생은 엄숙한 행진이나 행렬처럼 순순히 마지막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단음이나 조단음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수가 가끔 있다.
이러한 때에는 템포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음악은 귀에 거슬린다. 밤낮으로
유유히 흘러 영원히 바다로 들어가는 대 갠지스 강의 장중하고도 웅대한 리듬과
템포야말로 우리가 동경하는 바다.
  유년 시대, 성년 시대, 노년 시대가 스스로 갖추어지는 이 인생이 아름다운 자연의
배치가 아니라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하루에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일몰이
있으며, 1년에 봄 가을의 게절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좋은 것이다.
  인생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계절에 따르면 무슨 일이고 다 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생물학적인 인생관에 의하여 인생의 4계절에 순응하여 살아 나가려고만
한다면 자부심이 강한 바보거나 터무니없는 이상주의자가 아닌 한 인생은 한 편의
시로서 살아나갈 수 있는 것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의 7단계에 관한 문장에서 이 생각을 좀더 뚜렷하게 나타낸 바
있었다. 많은 중국인 문인들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그다지
종교적인 점이 없었고 또 그다지 종교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이것은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넓게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린 희곡
가운데의 인간이 모두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지상
만물의 섭리에 대해 아는 체하는 주제넘는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대자연 그 자체와 같은 것이었다. 이 말이야말로 세상의 문인이나 사상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이다. 그는 그저 살았고 인생을 보았고 그리고 죽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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