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의 권위에 대하여
앞장에서는 인간이 동물로부터 이어받은 유전, 즉 인간과 짐승에게 공통되는 부분과
인간 문명의 성질에 미친 그 영향에 관해서 고찰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성과 인간의 권위 전반에 걸친 완전한
사고방식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다. 옳지, 인간의 권위... 이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인간의 권위라는 것에 대해서는 좀더 역설해 둘 필요가 있다.
또 그것이 무엇으로 해서 성립되어 있는가를 알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점이
혼란되어 알 수 없게 되며, 인간의 권위 그 자체를 놓쳐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20세기, 특히 현재와 앞으로 수십 년 동안에 인간이 그 권위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극히 뚜렷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간도 동물이라고 자네가 주장하는 것은 좋다고 치고 자네는 인간이 동물 중에서
가장 놀랄 만한 동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대답한다.
(그야 두려워 할 나위도 없지요) 문명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 뿐이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동물계에는 인간 이상으로 훌륭한 것들이 여러
가지로 있다. 말처럼 생김새도 인간보다 훌륭하고 고상한 모양을 하고 있는 놈도
있고, 또 사자처럼 늠름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놈, 개처럼 후각과 양순함과 충성하는
정신에 뛰어난 놈,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시력을 가지고 있는 놈, 전서구처럼 방향의
감각이 예민한 놈, 개미처럼 검소하고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능률적으로 일 잘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놈, 비둘기나 사슴처럼 기질이 순한 놈, 소처럼 강한 인내력과
만족감을 가지고 있는 놈, 종달새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 앵무새나 공작처럼
몸차림이 아름다운 놈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물들보다는 원숭이가 내 마음에 든다.
내 마음에 드는 무엇인가가 원숭이에게는 있다. 그러나 그 원숭이보다는 인간인 편이
더 좋다. 그것은 인간 속에 있는 원숭이의 영리함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개미는 인간보다도 이성적이어서 인간보다 훈련된 동물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안 가지고 있지 않은가. 개미나 코끼리가 거대한
잠망경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변광성을 발견하거나 일식을 예언하거나 할 수 있다면,
또는 물개가 미적분학을 발견하거나, 바다표범이 파나마 운하를 뚫을 수가 있다면,
나는 언제라도 그들을 세계의 주인공 또는 창주주로 모시고 그들에게 선수권을
넘겨줄 생각이다. 그렇다. 분명히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랑해도 좋으나 그럻다면
자랑해도 좋도록 해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권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을
발견해 내는 일에 우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 인간의 권위라는 것은 이 책의 첫머리에서 이미 암시한 것처럼, 중국 문학의
찬미의 대상인 자유인의 네 가지 특징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유희적 호기심,
꿈꾸는 능력, 그 꿈을 정정하는 유우머 감각, 마지막으로 행위의 변덕스러움과
분방함이다. 이 네 가지를 합하면 이른바 미국식 개인주의의 교의를 중국식으로
뼈대를 바꾸어 놓은 것이 된다. 중국 문학에서 자유인을 그려낸 이상으로
개인주의자의 생생한 모습을 그려낼 수는 없다. 미국의 개인주의를 대표한 최대의
문학적 선수인 월트 휘트먼 자신이 (위대한 한인)이라고 불리어진 것은 확실히
우연한 일이 아니다.
2. 유희적 호기심에 대하여
__인류 문명의 발생
하릴없이 빈들거리고 떠돌아다니는 상태로부터 인간은 어떻게 해서 문명으로의
진보를 시작했는가? 장차 진화한 끝에 훌륭한 생물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할
만한 맨 처음의 징후, 또는 발전성이 있는 지성의 맨 처음의 징후는 어떤 것이었는가?
이 물음에 대해 그것은 인간의 유희적 호기심이라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가 있다. 즉 손으로 무엇을 이리저리 뒤지거나 닥치는 대로 뒤집어 조사해 보려는
맨 처음 노력이 그것이다. 이것은 원숭이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원숭이는 한가할
때에는 친구 원숭이의 눈꺼풀이나 귀를 뒤집어 보며 무엇인가를 조사하고 있다.
이라도 찾고 있는 것인지, 별로 아무런 것도 찾는 것이 아닌지 어쨌든 그저 뒤집기
위하여서 뒤집고 있다. 동물원에 가서 두 마리의 원숭이가 서로 귀를 잡아 당기고
있는 광경을 보라. 그 곳에야말로 장차 아이작 뉴우튼이나 알베르트 아인쉬타인이
나타날 기미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의 손이 그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한 모양으로 장난삼아 무엇을 뒤적거리는
이러한 정경에는 단순한 정경 이상의 것이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인 진실이 있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기초 그 자체는 인간이 두 다리로 서서 똑바로 선 자세를
취하게 된 결과 두 손이 지상으로부터 해방된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유희적
호기심은 고양이에게도 있다. 앞다리가 걷는 의무와 몸을 지탱하는 의무로부터 해방
되었을 때의 고양이의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해
왔다고 한다면 고양이로부터 진화해 왔다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원숭이의 경우는 언제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손가락이 이미 충분히
발달되어 있지만, 고양이의 경우는 발은 아직도 발일 뿐이며 살이나 연골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만 제외하면 고양이로부터 진화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전문적인 생물학자는 아니지만 그 점만은 잠시 그대로 두기로 하고 여기서는
손의 해방에서 시작된 인류 문명의 발생에 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누군가가 벌써
논의했을지도 모르고 또는 논의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나는 조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똑바로 서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 그 결과로서 손이 땅
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의 두 가지 사실은 극히 평범한 결과를 인류 진화사에
가져다 주었다. 우선 도구를 쓰게 되었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여성을 거느리고
따르게 하도록 하였으며, 그에 관련하여 아마 언어도 발달되었을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유희적 호기심과 물건을 찾아다니는 본능이 생겨났다.
인류 문명이 도구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되고 또 도구를 발견한 것은 손의 발달에서
왔다고 하는 사실은 대체로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거대한 유인원 한 놈이 나무에서
땅으로 내려오려 했을 때(아마 몸이 너무 무거워서 그랬을 것이다) 취할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즉 언제나 네 발로 걸어다니는 비비처럼 하거나 뒷다리로 걷기를
배우기 시작한 성성이처럼 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인류 조상이 네발짐승(또는 네손
짐승)인 비비로부터 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비의 앞발은 너무나 할
일이 많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하고 못하고는 어떻든 간에 성성이가 곧잘
똑바로 서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기 때문에 앞발은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자유가
모든 문명에 그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벌써 이때 유인원은 그 큰 입으로
열매를 따지 않고 손으로 따는 방법을 알았을 것에 틀림없다. 유인원이 높은 절벽
위의 동굴에서 살게 된 뒤로 돌이나 잔 돌을 집어 들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향해서 굴렸다는 것은 나무열매를 손으로 따는 것과는 거의 한걸음 차밖에 안된다.
인간이 사용한 최초의 도구는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유인원이 무엇인가 물건을 손으로 붙잡아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손을 놀리는 광경을
우리는 상상해 보지 않으면 아니된다. 무언가 목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윽고 끝이 뾰족한 부싯돌이나 꺼칠꺼칠한 돌조각이 그들의 생활 속에 나타난다.
그것은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그저 만지작거리는 동안에 적을 죽이기에는 둥근
돌보다는 뽀족하고 꺼칠꺼칠한 편이 낫겠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저 조금
물건의 방향을 바꾼다는 행위, 예를 들면 귀바퀴의 앞쪽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뒤쪽도 본다는 행위를 하게 되면 이때에는 벌써 사물을 전체로서 이해하는 힘을 늘인
것이 되고, 따라서 머리 속에 그려져 있는 여러 가지 영상의 수도 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 두뇌의 전두엽의 발달에 자극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성적 수치감의 기원의 비밀도 또한 이 똑바로 서는 자세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성적 수치감이라는 것은 다른 동물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자연이 그 창조를 계획하는 데 있어 아마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똑바로 선다는
새로운 자세를 인간이 취하게 되었으므로, 본디 몸의 뒷부분 속에 있었던 어떤 부분이
한꺼번에 몸의 중앙부를 차지하게 되어 등 뒤에 있어야 할 것이 앞으로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놀랄 만한 새로운 사태와 더불어 주로 여성에게 곤란을 주는 여러 가지
불편함이 생겼다. 즉 유산이 많아지고 월경이 불순하게 된 것이다. 해부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근육은 본디 네 다리의 자세로 설계되고 그에 따라서 발달해온 것이다.
이를테면 이미 돼지는 그 뱃속의 태아를 수평의 척추에다 매달고 있는 이치가 된다.
그것은 마치 세탁물이 그 중량을 적당히 분산하여 한 개의 빨랫줄에 매달려 있는 것과
마찬자지이다. 인간의 임부에게 똑바로 서라고 하는 것은 빨랫줄을 수직으로 세워놓고
빨래더러 그 본디의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배의 근육은
똑바로 서는 자세를 위해서는 매우 형편이 나쁘게 되어 있다. 만일 인간이 본디 두발
동물이었다면 이러한 근육은 어깨 위에 보기 좋게 달려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일을 유쾌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자궁과 난소에 관한 해부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어떻게든지 그 위치를 유지하고 그 작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과 전위증이나 월경이 곤란이 이 정도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랄 것이다. 월경에 관한 모든 비밀은 오늘날까지도 아직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난소의 주기적 갱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월경이라는 것이
그 기능을 다하는 데 있어 극히 비능률적이며 필요도 없이 기다랗게 소용도 없는
고통을 여성에게 주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무능함이
두 다리로 똑바로 서는 자세에 유래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이 사실은 또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예속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아마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인간사회의 발달도 초래했다. 모계가 만일 네 발로 걸을 수가
있었다면 부계에게 완전히 예속되게는 되지 않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 가지의
힘이 동시에 작용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벌써 그 무렵에는 여성도 남성도
빈들빈들 놀기만 하며, 호기심도 많고 놀기 좋아하는 동물이 되어 있었다. 색욕의
본능은 새로운 표현으로 발달했다. 그러나 키스 행위는 아직도 정말 유쾌한 것은
아니었고 또 아무래도 잘되지 않았다. 그 딱딱하고 뻣뻣한 삐죽이 나온 입으로 서로
입맞추는 두 마리의 침팬지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손이 종전보다
감각적이며 부드러운 동작을 서로 발달시켰다. 가볍게 툭 치거나 문지르거나
간질이거나 끌어 안거나 하는 동작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모두가 서로의 몸의 이를
잡아 주는 데서 생긴 우발적인 결과다. 만일 털이 많은 인류의 조상의 몸에 이가 꾀어
있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서정시는 발달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손의 동작은 색정의 본능을 발달시키는 데 있어 큰 힘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 반면에 두 발로 걷는 인류의 임부는 오늘날 상당히 오랜 세월을 통하여 슬프고
한심한 상태를 참고 견디어야만 했다. 인간이 아직 똑바로 서는 자세에 완전히
적응되지 못한 그 맨 처음 무렵에는 임부가 짐을 들고 걸어 다니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다리와 뒤꿈치가 적당하게 개선되고 몸 앞에 있는 짐과
균형이 잡히도록 골반이 적당히 뒤로 들어가게 되기까지는 한층 더 곤란한 일이었다.
훨씬 옛날인 맨 처음에는 두 발로 걷는 자세가 너무나도 거북하고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지질시대의 어머니는 아픈 척추를 쉬기 위해서 사람의 눈을 피해 가며 부끄러운 듯이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야만 했다. 이러한 매우 곤란한 일이 많았고 그 밖에도 여성
특유의 고통이 있었으므로 어머니들은 남성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꾀를 썼고 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여성의 독립 정신이 조금 없어지게 되었다. 신이여!
그녀들은 그 임신한 동안에도 애무가 필요했던 것이다.
똑바로 서는 자세는 또한 젖먹이의 걸음마를 배우기 어렵게 하며 자연히 유아
기간을 길게 했다. 소나 코끼리의 갓난이는 거의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설 수가
있는데 인간의 갓난 아이만은 똑같은 것을 배우는데 이삼년이나 걸린다. 더우기
그동안 젖먹이를 돌보아 주는 데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은 어머니 외에 누가 있겠는가!
인류는 그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발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성을 가장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그것이 인간의 일상생활을 다채롭게 하기 시작했다는 이 단순한
사실에서 인간 사회는 발달되었다. 여자는 더욱 의식적으로 끈질겨서 암컷에서부터
여자로 변해갔다.
암호랑이보다는 니그로의 여자로, 암사자보다는 백작 부인으로 상당히 개화된
의미로서의 남녀의 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얼굴이나 가슴의 털을 뽑는
일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여자가 먼저 그 몸을 꾸미기 시작했다. 동물계
일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성측에서 먼저가 아니라 여성측에서부터였다. 이것은 모두
생존을 위한 전술의 문제이다. 이러한 생존 전술이 동물계에는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호랑이는 공격하고, 거북이는 숨고, 말은 도망친다. 이 모두가 생존을 위한 노릇이다.
여성의 애정이나 아름다움, 또 그 부드러운 솜씨는 그야말로 생존 전술의 가치가
있다. 남성측은 아마도 팔심이 세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남성과 싸워 본댔자 소용이
없는 노릇이다. 어째서 남성을 매수하고 비위를 맞추어 주고 기쁘게 해주지 않느냐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인류 문명의 성질 그대로의 모습이다. 여성은
저항하고 공격하는 것을 배우지 않고 매혹하는 것을 배우고, 힘으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지 않고 보다 더 부드러운 수단에 의지하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러니까
결국 부드러운 맛이라는 것이 문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인류 문명은
남성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서 시작된 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오늘날 언어라고 불리어지는 수다스러움의 발달에 있어서도 여성은
남성보다도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수다스러운
본능은 너무나도 뿌리 깊은 것이어서, 인간의 언어를 창조할 때에 여성은 남성보다도
크게 공헌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원시인은 매우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동물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언어란 다음과 같은 광경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느 엣날에 유인원
수놈이 제 집인 동굴을 나와 먹을 것을 찾으러 간 사이에 이웃에 살고 있는 두 암놈이
동굴 앞에서, 윌리엄은 해럴드보다는 사람이 좋아요 하는 둥, 아니야, 해럴드가
윌리엄보다는 사람이 좋아요라는 둥, 해럴드는 어젯밤 징그럽도록 보채더군요라는 둥,
그 사람 너무나 심술이 사나와서 큰일이에요라는 둥 재잘거린다. 말하자면 이러한
식으로 해서 시작되었음에 틀림없다. 이 밖의 형식은 도저히 생각해 볼 수도 없다.
물론 손으로 먹을 것을 붙잡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제까지와 같이 먹을 것을
입으로 물어다가 먹는다는 턱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던 이중 부담은 가벼워졌지만 그
때문에 결국 또 턱이 점점 퇴화햐여 크기가 작아지고 그리하여 언어의 발달에도
도움이 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새로운 자세가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결과는
두 손의 해방이 원숭이가 이를 잡는 한가한 놀이에 상징되어 있는 것처럼 물건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뒤집어서 안을 조사해 보는 것과 같은 자유가 손에 주어진 것에
있는 것이다. 이 이잡기에서 지식을 자유로 탐구하는 정신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의
인류의 진보도 그 대부분은 인간 사회를 괴롭히는 그 어떠한 형태의 이를 잡는 데
있다.
인간 정신으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문제, 온갖 종류의 사회적 질병을 자유롭고도
유희적으로 탐구하게 하는 호기심이라는 본능이 발달되었다. 이러한 정신 활동은
먹을 것을 찾는 것과는 아무런 관게도 없다. 그것은 순수하고도 단순한 인간 정신의
작용이다. 원숭이는 먹기 위해서 이를 찾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재미있기 때문에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온갖 가치 있는 인간의 학문과 지식의 특징이다. 즉
사물 그 자체에 갖추어져 있는 재미이며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고 싶다는
유희적이며 마음 편한 욕망이다. 결코 지식이 직접이건 간접이건 뱃속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은 아니다(중국인으로서의 내가 여기서 자기 모순에 빠진다면 자기
모순에 빠진다고 하는 것이 중국인으로서의 행복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특히
인간적이며 또 인간의 권위에 공헌하는 바가 자못 크다고 생각한다.
지식 또는 지식 탐구의 과정은 유희의 한 형식이다. 가치가 있고 훌륭한 성과를
참으로 올릴 만한 힘이 있는 과학자나 발명가는 모두 다 반드시 이러한 것이다.
연구심이 강한 훌륭한 의사는 사람보다도 미생물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천문학자는
수억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먼 별의 운동을 기록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별이
이 유성에 사는 인간의 생활에 대해서 직접 어떠한 관계가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개의 동물은 특히 그 어린 시대에는 유희 본능을 가지고 있다. 유희적 호기심이
상당한 범위까지 발달한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내가 검찰관을 싫어하고 사상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모든 기관과 형식을 싫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검찰관이나 통치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인간의
지성을 모욕하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상의 자유가 인간 정신의 최고
활동이라면 자유에 대한 압박은 우리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명예롭지 못한 일이어야
한다. 옛날에 유리피데스는 노예를 정의하여, 사상 또는 의견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전제 정치는 모두가 훌륭한 유리피데스식 노예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이러한 실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라고 하는 이 시대에 문화의
본산이라고 하는 국가에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 형식 여하를 가릴 것
없이 전제 정치는 모두 지적으로 퇴보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유럽의 중세기가 그 실례이고 특수한 것으로는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가 그것이다. 소견이 좁은 정치가나 성직자들은 신앙과 사상의 획일성은 평화와
질서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언제나 인간 생활을 억누르고 약화시키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이들 전제자들은 국민의
외부적 행동을 취체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국민의 내부적 사상과 신앙을
지배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국민 전체를 몹시 경멸한 데서 나온 일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단순히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획일성에 견디어낼 수 있으리라, 정부의 선전반원이나 공보국의 그
장의 말처럼 책이나 협주곡이나 영화도 좋아지기도 하고 또 싫어지기도 하겠지, 하는
정도로 어느 전제정부도 선전으로 문학을 혼란에 빠뜨렸고, 정책으로 예술을
혼란시켰으며, 애국심으로 인류학을 혼란에 빠뜨리고, 현존한 통치자에 대한 숭배로
종교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단적으로 말하건대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사상을 통제하는 자가 인간성
그 자체에 너무도 배치된 행동을 하게 되면 스스로 몰락하게 되는 씨를 뿌리는 결과가
된다.
맹자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임금이 신하 보기를 손발처럼 한다면 신하가 임금을 가장 믿는 것으로 알 것이오.
임금이 신하 보기를 견마처럼 한다면 신하가 임금 보기를 국인처럼 알 것이며,
임금이 신하 보기를 쓰레기처럼 한다면 곧 신하도 또한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
인간의 자유와 사상을 훔치는 일보다 더 큰 도적 행위는 세상에 없다. 사상과
자유를 도둑 맞아 버리면 다시 네 발로 엎드려 기어다니게 되어, 두 발로 걸어다니던
시대의 경험은 모두 잘못이었다고 깨달아 적어도 3만 년 전 엣날의 자세로 되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맹자의 말을 빌어서 말하자면, 전제자가 민중을
경멸하는 것처럼 민중은 이 도둑을 미워한다. 더우기 양쪽이 다 같은 비율로. 도둑이
도둑질을 하면 할수록 민중은 점점 더 도둑을 미워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 지적,
도덕적, 종교적 신앙만큼 귀하고 소중하고 친밀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믿는 바를,
믿는 권리를, 우리들로부터 빼앗아 가는 자에 대한 증오보다 더 큰 증오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근시안적인 어리석음이 전제 정치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것은 전제주의자가 언제나 지적으로 퇴보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성에는 반발성이라는 것이 있고 양심에는 억제할 수 없는 자유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반발하여 전제주의적인 통치자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3. 꿈에 대하여
불만이라는 것은 신성한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어쨌든 불만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독특한 것이라는 것만은 뚜렷한 사실이다. 동물 진화 가운데서 원숭이는
맨 처음의 불평가였다. 침팬지 이외의 동물에서 참으로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나는 일찌기 본 적이 없다. 이러한 동물이야말로 철학자라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슬픔과 깊은 생각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표정을
보면 무엇을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소는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소는 언제나 자못 만족스러운 얼굴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코끼리도 무서운 분노를 마음 속에 지니고는 있겠지만 끊임없이 코를 흔들어
대고 있으면 사색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마음 속에 가득찬 불평을 털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완전히 생활에 싫증이 난 표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원숭이뿐. 위대하도다
원숭이!
요컨대 온갖 철학은 아마도 이 지루하다는 감각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떻든간에 어떤 이상에 대해서 슬픈 듯한 종잡을 수 없는 부러운 듯한 동경을
품고 있는 것은 인류의 특징이다. 현실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아직도 다른
세계를 꿈꾸는 능력과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원숭이가 다른 점은 원숭이는 다만
지루해 하고 있을 뿐인데 인간은 지루한 것 외에 상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구태를 벗어나고 싶어한다. 누구나 다 자기 이외의
무엇인가가 되어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즉 누구나 꿈을 꾸고 있다. 병졸은 하사가
되는 꿈을 꾸고, 하사는 대위의 꿈을 꾸고, 대위는 소령이나 대령의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대령 자신이 만일 사람이 된 사람이라면 자기가 대령으로 있는 것을 별로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는다. 좀더 점잖은 말투로 자기가 대령으로 있는 것은
동료들에게 봉사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정도인 것이다. 잘난 사람을 보고는 (훌륭하시군요) 하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말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정말 훌륭하다면 반드시 이렇게 대답하다. (훌륭하다니
도대체 무슨 말이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란 일품요리점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옆
테이블에서 주문한 음식이 자기의 것보다는 훨씬 잘 눈에 뜨이고 훨씬 더 맛있게
보이는 법이다. 현대의 어느 중국의 한 교수는 인간이 이 부러움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이러한 경구를 말한 적이 있었다. (아내는 남의 아내가 예쁘게 보이고, 책은 자기가
쓴 책이 가장 좋게 보인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도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라곤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어한다. 그
누군가라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한은.
이러한 인간의 특색은 확실히 그 상상력과 꿈꾸는 능력에서 온다. 상상력이 크면
클수록 한층 더 언제나 불만투성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가 언제나 다른 아이보다
다루기 힘들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은 소처럼 행복하고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보다는 원숭이처럼 슬픈 듯이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는 편이 많다. 그러니까 이혼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보다는 이상주의자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 사이에 많이 행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상적인 인생의 반려가 부럽다고
생각하는 환경은 상상력이 부족하고 이상주의적인 생각이 적은 사람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인류는 대체로 이상주의 덕택으로 향상도 하고, 또
사도로도 빗나가는 것이긴 하지만, 상상력 없이 인류가 진보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포부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포부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귀한 정신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사실 또 그렇지 않은가. 개인으로나 국민으로나
우리는 모두 꿈을 가지고 있고, 많건 적건 그 꿈에 따라서 행동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다소 그 꿈이 깊다. 그것은 어느 가정에서나 꿈이 많은 아이와 그다지
많지 않은 아이가 있는 것과 같다. 나는 여기서 자백하겠는데 실은 마음속으로 은근히
꿈을 꾸는 아이가 더 좋다. 꿈을 꾸는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 사람보다는 대부분
슬픔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래도 좋다. 슬픔이 많으면 많을수록 보다 더 큰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가 있고, 높은 황홀경에도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즉 라디오
세트가 공중에서 음악을 감수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사상에 대한
수신기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수력이 예민한 세트는 다른 세트가
감수할 수 없는 희미한 단파를 능히 감수한다. 멀고도 먼 곳에서 오는 희미한 음악은
좀처럼 감수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음악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렸을 때의 꿈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현실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어렸을 때의 꿈은 한 평생 남아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세계의 어느
작가라도 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이 되고 싶다. 인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 공상하기도 하고 좀더 크게 자라면 물 위로 떠올라오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인어의 이야기를 쓰거나, 자기 자신이 인어가 되어 본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사람의 마음으로 감득할 수 있는 가장 섬세하고도 가장 아름다운 기쁨의
하나를 느낀 것이 되는 것이다.
골목길에서나 다락방에서나 헛간에서나 또는 물가에 뒹굴면서 어린이는 언제나 꿈을
꾸고 있다. 더우기 그 꿈은 그대로 실현된다.
토머스 에디슨도 그렇게 꿈을 꾸었다. 이렇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도 꿈을
꾸었다. 월터 스콧 경도 그렇게 꿈을 꾸었다. 세 사람 다 어렸을 때 꿈을 꾸었다.
아런 요술과도 같은 꿈속에서 인간이 일찌기 본 일도 없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비단이
짜여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어린이들도 이러한 꿈을 꾼다. 꿈의 환상이나
내용은 다르지만 그들이 느끼는 기쁨의 크기에는 역시 다름이 없다. 어린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끊임없이 동경심을 안고 있다.
내일 아침에 잠이 깨었을 때 그 꿈이 정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든다.
누구에게도 꿈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꿈은 자기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마음 깊숙이 싹트고 이윽고 자라나려고 하는 자아의 일부인 것이다. 어린이의
꿈 가운데는 다른 꿈보다 분명하여 실현력이 있는 것이 있다. 한편 또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서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꿈은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모두 어렸을 때의
꿈 이야기를 남에게 하려고 하면서 인생을 보내다가 결국은 이야기할 말도 미처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마는 때도 있다.
혼란된 꿈 또는 현실과 일치되지 않는 꿈을 꾸면 위험한 일이 또 있다. 그것은 꿈은
또한 도피도 의미하는 것으로, 몽상가는 정처도 없이 이 세계에서 도피하는 꿈을 곧잘
꾸기 때문이다. (파랑새)는 언제나 로맨티스트의 공상을 끌어 당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현재의 자기와는 다른 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 또는 현재의 생활로부터
빠져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것으로, 무슨 일이라도 좋은 변화만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일반대중의 심리를 무서운 매력으로 끌어 당긴다. 전쟁에는 매력이 따른다.
전쟁이 되면 시청의 서기도 군복을 입고 각반을 두르고, 무전 여행을 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참호전이 삼사 년이나 계속되면 언제나 휴전이나
평화가 그리워진다. 왜냔하면 휴전이 되면 출정한 군인은 집으로 돌아와서 평복을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그
어떤 자극이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므로 만일 전쟁 놀이를 그만 두려고 한다면 모든
나라의 정부는 20세에서 45세까지의 국민을 징병제도 식으로 징집하여 10년에 한 번씩
유럽을 여행하게 하여 전람회나 무언가를 구경시켜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영국
정부는 그 재군비 계획에 50억 파운드를 투입하고 있는 중이다. 50억 파운드라면
모든 영국인을 리비에라(지중해 연안으로 프랑스의 니스로부터 이탈리아의 제노바만
라스페치아까지 경치 좋은 피한지)로 여행시키기에 족한 금액이다. 그러나 전젱
비용은 필요하지만 여행은 사치라는 반대론이 일어날 것이 뻔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찬성할 수 없다... 여행은 필요하나 전쟁은 사치가 아니겠는가.
이밖에도 꿈은 있다. 유토피아의 꿈, 불로장생의 꿈은 자못 인간미가 있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꿈이 없는 곳이 없다는 것에 주위하기
바란다. 그러나 불로 장생의 꿈도 유토피아의 꿈도 하찮은 것이어서 그 멸하지 않는
생명을 손안에 넣었을 때 이제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국 불로 장생에 대한 소원은 그 정반대인 자살의 심리와 매우 비슷하다.
어느 것이나 현세는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라고 멋대로 정하고 있다. 어째서 현세가
하찮은 것이란 말인가. 한번만 봄볕을 받으면 전원을 지팡이로 끌고 거닐면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대답은 커녕 그 물음 자체에 어이가 없어질 것이다.
4. 유우머 감각에 대하여
유우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까지 충분히 인정되어 왔는가.
유우머를 쓰기에 따라 인간의 모든 문화 생활의 질이니 성격이니 하는 것이 바뀔 수
있다는 것, 유우머가 정치, 학문, 인생에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들이
충분히 인정되어 왔는가. 나는 이것을 의심한다. 유우머의 기능은 생리적이라기보다는
화학적으로 사상과 경험의 기본적 조직을 번질시켜 버린다. 국민 생활에 있어서의
그 중요성은 재론할 여지도 없다. 웃을 수 없었던 탓으로 전 카이제르 빌헬름은
제국을 잃었다. 또 미국인 식으로 말하면, 카이제르가 웃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국민은 수십억 달러를 탕진한 것이다. 빌헬름 호헨쫄레른도 사생활에서는 웃을 수
있었겠지만 공적 생활에서는 언제나 누구의 일이 마음에 거슬렸던지 그 카이제르
수염을 빼쳐올리고 매우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카이제르의
웃음이 어떤 것인가, 또는 그 웃음의 대상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카이제르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만족하게 웃는 것은 승리의
웃음, 성공의 웃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났을 때의 웃음이었다. 빌헬름 호헨쫄레른이
언제 웃어야 하며 또 무엇을 웃어야 하는가를 몰랐기 때문에 독일은 전쟁에 패한
것이다. 카이제르의 꿈은 유우머의 웃음으로 해서 제어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들을 위하여 전쟁을 일으킨 자는 과연 누구인가. 양심가, 유능자, 재사,
계략가, 섬세한 자, 영리한 자, 거만한 자, 애국심이 지나친 사람들,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고 싶다는 열의에 불타는 사람들, (경력)을 쌓아 세계에 대하여서 (인상)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죽으면 어느 광장에 있는 청동마에 경쾌하게 올라
타고 있는 동상의 눈으로부터 길이 후세를 내려다 보겠다고 염원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유능하고 영리하고 야심적이고 거만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동시에 가장
겁장이고 바보고 유우머리스트의 용기와 깊은 생각과 명민성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쓸데없는 문제만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더
넓은 정신 영역을 가지고 있는 유우머리스트는 좀더 대국을 직시할 수가 있다. 그러나
현상은 보는 바와 같이, 낮은 목소리로 몰래 속삭이며 그럴 듯하게 겁을 내고 있는
듯한 모양으로 착실하고도 조심성 있는 태도를 취할 수가 있는 외교관은 전혀
외교관의 자격이 없다. 그러나 억지로 세계를 구제하는 유우머리스트 국제회의를 열
건 없다. 이른바 이 유우머 감각이라고 하는 우수품은 모두 사람이 누구나가 다
풍부한 재고품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에도 파멸적인 전쟁의 위기가
덮칠 것 같을 때에는 국제회의에 가장 나쁜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장 (경험이 많고), 확신적이고, 야심적이며, 또 가장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겁을
내고 그럴 듯하게 당황하고 있는 외교관, 게다가 인류를 위한 (봉사)에 가장 열심인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날마다 오전, 오후에 회의가
열릴 때 미키마우스의 영화를 10분 동안씩 강제로 구경시킬 수만 있다면 어떠한
전쟁도 일어날 리는 없다.
이것은 유우머의 화학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상의 질을 변화시키는
작용이다. 오히려 이 작용이야말로 인류 문화의 근간에까지 미치고 장래의 인류
사회가 중용시대에 이르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에 있어서
중용시대라는 이상보다 위대한 이상을 바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보다 더 위대한
이성적 정신을 가지고 있고 소박한 사고 방식과 평화적 기질과 문학적 견해를 오늘날
보다 광범위하게 갖추고 있는 인종이 출현하는 것이 결국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류 이상의 세계는 합리적 세계는 아니다. 또 어떠한 의미에서도 완전한
세계는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대번에 인식하고 뭇 싸움이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세계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이리라. 또 우리가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그다지 무리 없이 실현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꿈이다.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소박한 사고, 명랑한 철학, 중용 문화를 가능케 하는 섬세한 상식,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연히도 유우머의 특질이 되어 있는 것으로 유우머에서 발생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어서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체로 현대인의 생활은 너무나도
침울하며, 사상은 너무나도 착잡하다. 사상과 학문이 이토록 진지하고, 이토록
착잡하기 때문에 이 세계는 오늘날과 같은 불행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활과 사상의 단순성은 문명과 문학에 대한 가장 높고 가장 좋은
이상이라는 것, 문명이 단순성을 잃고 어려운 한 궤변이 순정한 철리로 돌아가지
않는 한 문명은 점점 더 곤궁하고 고달프며 퇴폐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시인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태가 자꾸만 계속되어 가면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 사상,
야심, 사회 조직의 노예가 된다. 이러한 개념, 야심, 사회조직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나치게 짊어진 인류는 그러한 것들을 지배하는 지위에는 설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러한 모든 개념, 사상, 야심을 초월하여 미소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 정신의 힘이 된다. 이 힘이야말로 유우머리스트의 묘미다. 골프나 당구 선수가
공을 잘 다루듯이, 카우보이의 선수가 밧줄 던지기를 잘하듯이, 유우머리스트는
사상이나 개념을 잘 다룬다. 거기에는 숙련에서 오는 마음의 여유와 확실성과
솜씨있는 경묘함이 있다. 결국 자기의 사상을 마음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사상의 주인공이며, 자기의 사상의 주인공인 사람만이 사상에 예속되지 않는
사람이다. 진지함이란 결국 노력의 표시에 불과하다. 노력이 있는 한은 아직 완전히
숙달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세상의 이른바 벼락부자라는 자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점이 있어서, 사회에 나가도 마음이 턱 놓이지 않고 언제나 자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인데, 지나치게 진지한 작가라는 것도 벼락부자와 마찬가지로 어쩐지 어색한
점이 있고 마음이 턱 놓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의 사상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기까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설처럼 보이지만 단순성이라는 것은 사상이 깊다는 외적 증거이며,
동시에 그 상징이다. 학문이나 저작에서 이와 같은 단순성에 이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상을 명철하게 나타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더구나 사상이 명철해질 때에만 단순성은 가능한 것이다. 저술가가 어떤 개념에
고생하고 있을 때는 그 개념쪽에서도 저술가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것에 틀림없다.
우등으로 대학을 갓나온 젊은 대학 강사의 강의는 대체로 알기 어렵고 복잡하기 짝이
없으며, 사상의 참된 단순함과 마음 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재간은 능숙하고 달변인
노교수들의 말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인데, 세상에서 흔히 보는 이 사실 하나만을
보더라도 내가 지금 말한 것은 수긍이 갈 것이다. 젊은 교수는 잘난 체하는 현학적인
말만 쓰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훌륭한 것으로 크게 기대할 만하다. 전문에서
단순으로의 과정, 전문가로부터 상식가로의 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말해 지식 소화의 과정이며 단연 몸의 신진대사 작용에 비할 만한 것이다.
아무리 학식이 많은 학자라 할지라도 그 지식을 스스로 소화하여 자기의 인생관과
관련시킬 때까지는 그 전문적인 지식을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가 열심히
지식(윌리엄 제임스의 이른바 심리학적 지식)을 탐구하고 있는 동안에는 장거리
여행의 피로 끝에 한잔의 시원한 냉수를 마시는 것처럼 몇 번씩 (어디, 한잔 할까)를
되풀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한잔 하는 동안에 참으로 인간적인 대부분의
전문가는 극히 중요한 이러한 자문을 해볼 것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논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하다는 것은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동시에 성숙이라는 것도
예상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우리의 사상은 점점 명료해지고 문제의 중요하지
않은 점이라든가 또는 잘못된 것 같은 점은 잘라 버려져서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는
일은 없게 된다. 관념은 점점 명확한 형태를 갖추어 가고 기다란 사상의 연속은
점차로 간편한 공식으로 정리되며(어느 맑게 개인 날 아침 그러한 공식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이른바 지혜라고 불리는 참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는 벌써 노력이라는 느낌은 없어지고, 진리는 이미 명확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독자는 진리 그 자체는 단순하니
그것을 공식으로 나타내는 편이 자연스럽다는 점을 개닫게 되어 비할 데 없는 기쁨에
잠길 수 된다. 사상과 그 표현 형식의 자연스러움은 중국의 시인이나 비평가들이 매우
찬미하는 바이며 점차 성숙해 가는 발전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곧잘 말한다.
소동파의 산문이 원숙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것을 평하는데, 소동파도 겨우 자연의
자연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말을 쓴다. 즉 젊었을 때에 즐겼던 과장이나
현학적이며 대가인 체하던 태도며 문학적인 쇼우맨쉽을 말끔히 씻어 버린 문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우머 감각이 이 사고 작용의 단순함을 조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론가들이 지나치게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데 반하여 일반적으로 유우머리스트는
사실 그 자체에 가까이 다가간다. 사상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착잡해지는 것은 사람이
개념 그 자체에 얽매여 있는 경우뿐이다. 유우머리스트는 그렇지가 않다. 개념과
현실과의 모순을 번갯불 같은 속도로 지적하며, 상식이나 기지의 번뜩임을 제
마음대로 구사한다. 이렇게 하여 문제를 매우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현실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으므로 유우머리스트에게는 탄력성이 있고 경쾌하고도 섬세한
묘미가 갖추어진다. 온갖 형태의 포우즈, 허위, 현학적 넌센스, 학구적인 어리석음,
사회적인 겉치레 따위들은 슬며시 요령있게 쫓겨나고 만다. 생각하는 바가 섬세헤지고
기지를 깨닫게 되는 까닭으로 저절로 현자의 풍격을 갖추게 된다. 모든 것이 단순하고
뚜렷하다. 생활과 사고의 단순함을 특징으로 한 건전하고도 분별있는 정신은 장차
유우머스러한 사고 방식이 이제보다 훨씬 넓게 행해지게 될 때만 오직 성취할 수
있다고 내가 믿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5. 인간성의 변덕스러움과 무궤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변명은 있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자유인을 찬미한다.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을 찬미한다. (매리여, 매리여, 천만에)라는 말에 절대 찬성이다. 일부러 남의
말을 거역하거나 반대되는 짓을 하는 인간의 성질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유일한
희망이다. 이유는 극히 간단하다. 인간은 소로부터 진화한 것이 아니라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 일부러 남의 말을 거스르거나 반대되는 짓을
하는 것은 인간이 원숭이가 진보한 것, 즉 보다 더 고상한 원숭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소는 소 나름으로 온순하고 무슨 일에나 만족하는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편이 좋다. 그러므로 인간의 명령이 떨어지면 타고난 거룩한 정신을
발휘하여 군소리 없이 무조건 복종하여 목장에도 가고 도살장에도 가는 것이 좋다.
오직 한결 같이 주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을 머리속에 새겨 두라.
인간으로서 나는 이러한 더없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몹시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소 같은 것이 되고 싶지는 않다. 소가 배반을
일으키고, 인간이 소보다 콧대가 세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오냐 그러면 좋다는
식으로 변덕스러운 행동을 하기 시작하고, 이제까지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면 그때야말로 나는 비로소 소의 소행을 인간적이라고 부르겠다. 대개
독재주의라는 것은 모두 나쁘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이유에 의한
것이다. 독재자는 소 하고라면 곧잘 같이 지낼 수 있겠지만 원숭이와는 같이 지낼 수
없다.
유럽에 싹튼 개인적 자유의 전통이 어떻게 해서 잊혀지고 또 어째서 오늘날 잘못된
방향으로 추가 움직이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집산주의를 지향하는 오늘날의 경제 운동의 결과이며, 둘째는
빅토리아 중기의 기계론적 관찰로부터의 유산이다. 모든 종류의 집산주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가 일어나려 하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는 인간이 인간적 반항성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잃어 개인의 위신마저 잃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형태의 인간적 사고를 누르는 경제 문제와 경제 사상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보다 더 인간미가 있는 지식과 개인적 생활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보다 더 인간미가
있는 철학에 대해서 우리는 완전히 아는 것이 없게 되고 무관심하게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위궤양인 환자가 하루 종일 위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는 것처럼 경제적 질환에 걸려 있는 사회는 언제까지나 경제에 관한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개인이라는 것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게 되고 자기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게 된다. 인간이 인간다운 점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물질적 법칙 또는 경제적 법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자동
인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지 않고
톱니바퀴의 톱니 하나로서, 또는 조합이나 계급의 일원으로서 이민 할당률에 의하여
입국이 허가된 외국인으로서, 경멸적으로 말하면 (시시한 부르조아)로서, (자본가)니
(노동자)니 하는 레테르 하나만 붙이면 그때는 벌써 훌륭히 인간을 이해한 것이 되어,
인간은 그 부류에 따라서 손쉽게 미움을 받게도 되고, 또는 동지로서 갈채를 받게도
된다. 벌써 이제는 개인은 아니다. 인간도 아니고 다만 한 계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다면 사물을 너무도 간단히 취급해 버리는 결과가 되어 버리지는
않겠는가. 이상으로서의 자유인은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리고 환경에
대해서 남에게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반응하는 훌륭한 자유인적 소질을 가진 사람도
없어지고 말았다. 인간 대신 계급의 일원이 있을 뿐이다. 사상과 개인적 성벽 대신
이데올로기, 즉 계급 사상이 있을 뿐이다. 개성 대신 맹목적인 힘이 있을 뿐이다.
개인 대신 모든 인간의 활동을 억제하고 예시하는 마르크스적 변증법이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가 개미처럼 되려고 희희낙낙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내가 케케묵은 구식 민주적 개인주의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또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카알
마르크스 자신이 1세기 이전의 헤겔 논리학과, 빅토리아 중기의 영국 정통 경제학파의
산물이라는 것을 상기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오늘날 헤겔 논리학이나 빅토리아
중기의 경제 사상의 정통학파만큼 구식인 것은 없다. 중국인의 인간주의적 견지에서
보아 이것만큼 납득이 가지 않고 거짓말장이고 물상식하기 짝없는 엉터리는 또 없다.
그러나 기계학이 그 공헌과 자연 정복을 뽐내던 시대에 인간 기계관이 어떻게 해서
출현하게 되었는가 하는 유래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결국 이 과학은 동용되고 만
것이었다. 그 기계적 논리는 자리를 옮겨서 인간 사회에 적응되었고, 또 (자연
법칙)이라고 하는 언제나 당당한 이름은 인간의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강하게
요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환경은 인간보다 위대하며, 개인 개인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방정식으로 바꾸어 버릴 수가 있다고 하는 학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훌륭한 경제학일는지는 모르지만 생물학치고는 좋지 못하다. 훌륭한 생물학이
인정하는 바로는, 외계에 대한 개인 개인의 반응력은 물질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생명
발전의 중요한 요인이다. 그것은 마치 현명한 의사가 환자의 기질과 개인적 반응이
병을 이기는 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의
의사들은 인간 개인의 힘이라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점점 인식하게 되었다. 이론과 선례로 생각하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죽게 되어 있는
많은 환자가 죽음을 간단히 모면하고 회복되어 의사를 놀라게 하고 있다. 똑같은 병에
걸린 두 환자에게 똑같은 치료를 하여 똑같은 경과를 기대하는 의사가 있다면 일종의
사회적 위협이라고 보아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의사에 못지 않은 사회적 위협은
개인을 잊어버리고, 사람은 각자가 서로 다른 개인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인간의 행동을 잊어버린
사회 철학자이다.
6. 개인의 존귀함
오늘날 인간은 여러 가지 사상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크건 작건
대사회 변혁의 위협을 받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민주주의의 이상에 자꾸만 다가가고 있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독재 체제 밑에서 살고 있다. (그 제도 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그
제도만이 남았는지 혹은 독재체제가 망하고 그 제도 밑에서 살던 사람만이 남았는지)
그 어느 경우건 인간의 개인 생활은 때의 흐름에 여러 가지 방향은 주어지겠지만
그러나 역시 개성을 보지하는 한 개의 완전한 실체로서 남는다.
철학은 개인에서 시작될 뿐 아니라 또한 개인에서 끝난다. 개인은 생명의 궁극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인간 정신이 다른 것을 창조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
대영제국과 같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도 서섹스(동남 잉그랜드의 주) 지방의
영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상당히 행복하고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만적인 철학은 서섹스의 영국인은 대영제국을 있게 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회 철학이라도 영국과 같은 통치국에서 살고 있으면 인간은 모두
제각기 행복된 개인 생활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정도의 것 이상으로 객관적인 이론을
전개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문명의 최종 목적으로서의 개인 생활의 행복을
부정하는 사회 철학이 있다고 하면 그러한 철학은 병적으로 뒤집힌 장신의 소산이다.
인간의 문화라는 점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여러 가지 형태의 문화에 대해서 최후적인
가치 비판을 내리는 것은, 그 문화가 만들어낸 남녀의 타입 여하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인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고 또 가장 통찰력이 있는 인물의 하나인
월트 휘트먼이 그의 논문 (민주적 전망)에서 모든 문명의 최종 목표로서 개성의 원리,
즉 (개성주의)를 밝히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뜻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면 풍요하고 윤택하며 변화 무쌍한
개성주의가 아니고 문명 그 자체는 도대체 무엇을 기초로 하여 서 있는 것인가.
... 종교, 예술, 학교 등을 가지고 있는 문명은 그것 이외에도 도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모든 일이 다 이 개성주의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주장이 다른 주장 보다 앞서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개성주의의
세상을 초래하려고 바라면서 민주주의만이 대자연의 섭리와 같은 장래의 계획 아래
인류의 무한한 황무지를 갈아 엎고 씨를 뿌리고 모든 사람에게 향하여 정정 당당히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문학, 시가, 미학 등이 무엇 때문에 중요한가.
그것은 주로 그러한 것들이 그 나라의 남성과 여성에 대하여 개성이 무엇인가를
알리는 재료와 암시를 주고, 허다한 효과 있는 방법으로 그 재료와 암시를 그들에게
역설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사실로서의 개성에 관하여 휘트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가장 건전한 심경에 있을 때에는 의식이 있고, 우뚝 솟아나는 사상이 있다.
모든 것이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유아독존이며 별처럼 고요하게 영원히 빛난다.
이것이야말로 본체론의 사상이다. ... 즉 네가 누구이든 네 것은 네 것, 내가
누구이든 내 것은 내 것.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
지상의 꿈 중에서 가장 심령적이고 가장 걷잡을 수 없이 막막하지만 그러나 가장
엄연한 기초적 사실, 모든 사실로 통하는 유일 무이한 문. 이러한 경건한 황홀감에
취하고 심원한 천지의 경이 속에 있으면 신조도 전통도 모두 힘을 잃고, 이 간단한
자아의 관념 앞에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만다. 참된 환상이 빛나는 곳에 자아의 사상은
홀로 존재하며 광채를 발한다. 우화에 나오는 난장이처럼 일단 자유를 얻어 지상을
떠나면 몽롱한 천지에 퍼져 하늘 꼭대기에 달한다.
이 전형적인 미국의 철인이 개인의 영광을 극히 웅변으로 말하는 말 속에서 아직도
여러 가지로 인용하고 싶은 유혹이 간절하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해 두기로 하자.
... 그리하여 마지막 결론과 요약은(이것이 없다면 모든 사물의 모든 운행은
무목적, 기만, 파멸이 되고 만다) 맨 끝의 가장 좋은 의지할 곳은 인간성 그 자체에
있다. 아무런 미신도 따르지 않는 인간 고유의 정상적이며 성숙하고 풍부한 소질에
있다는 이 간단한 자아의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목표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 모든 변질을 뚫고 나와 무한한 조소와
논의와 표현상의 실패를 돌파하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은 교의 또는
이론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다. (최고 최선의 자유 속에서 올바르게 훈련된
인간이야말로 한 개의 법칙, 일련의 법칙이 될 것이다. 아니 되어야만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의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에 대한 반응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고 미국은 모두 똑같은 기계 문명 속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 생활하는 방식과 기품은 모두 달라서 각국이 모두 그 정치 문제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많은 생활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또 똑같은 트럭을 운전하는 두 사람의 운전수라도
농담을 알아 듣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인간이 기계의 힘으로
누구나 다 균일한, 무익한 상태에 빠져야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여기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어, 두 아들에게 똑같은 교육을 시켜서
사회에 내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 두 아들이 각자 독자적인 내부적 법칙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그 생활을 형성해 가는 아들의 모습을 그 아버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같은 금액의 자본이 있는 은행장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생활 문제에
관한 것, 또는 행복을 형성하는 모든 사정은 둘 다 다르다. 주소며 액센트며 기질도
모두 다르다. 또는 그 책략도, 문제는 다루는 방법도 다를 뿐만 아니라 행원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행원들이 무서운 사람으로 보고 있는지, 따르는지, 또는 가혹하고
외고집장이인지, 또는 쾌활하고 마음이 태평한 사람인지의 차이가 있다. 돈을 모으는
방법, 돈을 쓰는 방법도 다를 것이고 도락, 친구, 사교클럽, 독서, 아내 등 개인
생활도 또한 각각 다르다. 신문의 사망자난을 보면 같은 시대에 생활하고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살았을 때에는 전혀 다른 생활을 보내온 사실에 누구나
놀란다. 결국 같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그만큼 풍부한 변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상하리 만큼 열성을 가지고 자기가 택한 직업에 정성을 다하여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어떤 사람은 다채롭고 변화 많은 경력을 가진 자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발명을 하고, 어떤 사람은 탐험을 하고, 어떤 사람은 농담을 지껄이고,
어떤 사람은 무뚝뚝한 편이어서 유우머라곤 전혀 없으며, 어떤 사람은 명성과 부귀를
향하여서는 로켓처럼 뒤어나가지만 결국은 로켓이 폭발된 차디찬 재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또 어떤 사람은 얼음 장사와 석탄 장사를 하여 금화로 2만 달러나 되는
돈을 모았지만 결국은 광 속에서 피살되고 만다. 인생이란 모두가 다 이렇다. 인간
생활은 이렇게 발달된 산업시대에 있어서도 놀랄 만큼 기묘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동안은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다른 것이 가지각색이고, 인생의 각기 다른 묘미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중요하다는 것은 오직 개인 생활이 모든 문명의 목적이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 생활, 정치 생활, 국제 관계의 개선은 한 국민을
구성하는 개인의 행동과 기질의 총화에서 온다는 사실, 따라서 결국 개인의 기질과
성질이 어떠냐 하는 것에 기초를 둔다는 사실에서도 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정치와,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국가의 진화를 결정하는 요인은 국민의
기질이다.
루소는 프랑스 혁명의 진로와 나폴레옹의 출현을 예지할 수는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카알 마르크스도 또한 자기의 그 사회주의 이론의 실제적 발전과 스탈린의
출현을 미리 짐작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 혁명의 진로는 자유, 평등, 박애의
슬로건으로 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인간성의 어떤 특색에 의하여,
특수적으로는 프랑스인 기질의 어떤 특색에 의하여 결정되었던 것이다. 카알
마르크스의 사회 혁명의 진로에 관한 예언은 그의 엄숙한 변증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하게도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가 예언한 것처럼 논리의
온갖 법칙에 의하여 산업 문명이 가장 진보하여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야만 할 일이었다. 첫째는 영국 또는 미국 어쩌면 독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예상이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유력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러시아와 같은 농업국에서 그 맨 처음의 실험을 할 기회를 얻었다.
카알 마르크스가 계산하기를 잊은 것은 영국인 그리고 미국인의 인간적 요인이었다.
그들의 일하는 방법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대체로 미숙한 경제학의 커다란
실수는 국민적 문제의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는 일종의 알 수 없는 요인을 탐구하는
데 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론이나 슬로건을 믿지 않는 영국인의 성질, 필요할
땨에는 느릿느릿 그 나아갈 길을 발견해 나가는 영국인의 그 방법, 개인적 자유를
사랑하는 앵글로 색슨의 성질, 자존심, 상식, 질서에 대한 사랑... 이러한 것들은
영국이나 미국에서의 사건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있어 독일인 변증법 학자의 모든
논리보다도 훨씬 강력한 요소인 것이다. 이와 같은 국민적 문제의 처리와 그 사회적,
정치적 발전의 진로는 국가 내의 모든 개인을 지배하는 일정한 관념에 의해 결국
한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기질, 즉 우리가 추상적으로 국민의 타고난
기질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결국 국민 전부에 걸친 개인의 총화이다. 대체로 민족적
기질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문제나 또는 위기에 직면할 때 행동하는 국민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고난 기질이 그 어떤 굳은 지조 이상의 것인 것처럼
생각하고는 중세 신학의 영혼과도 같은 신화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잘못된 생각이다.한 국민의 타고난 기질이란 나라의 일을 해나가는 그 태도와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한 나라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경우처럼 독자의
존재를 가지고 있는 추상물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다만 행동을 통해서만 안정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태 또는 위기가 다가왔을 때 국민의 최후적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일종의 선택 문제로서 어떤 것을 택하고 어떤 것을 버리며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한다는 문제에 귀착된다. 현학파의 역사가들은 헤겔이 하던 식으로
한 나라의 역사는 관념의 발전이며, 일종의 기계적 필연에 의한 진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것에 대하여 좀더 기미를 이해하는 현실적 역사관은
중대한 시기에 직면할 때마다 극민은 선택을 행했다. 그때마다 서로 반대되는 세력,
맞서는 정열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게 되는 법인데, 어떠한 감정이조금 많은가 어떠한
감정이 조금 적은가에 의하여 저울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일 수 있는 것이리라.
이러한 특정한 위기에 나타나는 이른바 한 국민의 타고난 기질이란 그 어떤 것이 좀더
갖고 싶다거나 또는 이만하면 넉넉하다는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는 국민의 결의인
것이다. 결국 모든 국민은 저마다 그 마음에 드는 것, 그 감정에 꼭 들어맞는 것을
가지고 전진하였고, 참을 수 없는 것은 내버리고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국민의 사조와 일련의 도덕적 감정과 사회적 편견에 기초를 두고 행해지는 것이다.
유교는 세계 평화의 문제를 개인 생활의 수양에 결부시켰다. 송시대로부터 유학자가
학동들이 배워야 하는 것으로 결정한 최초의 교훈에는 다음의 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고 꾀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린다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집을 다스린다. 그 집을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는다. 그 몸을 닦으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한다.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성실하게 한다. 그 뜻을
성실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슬기를 익힌다. 슬기를 익힘은 사물에 이르는
데 있다.
사물에 이르고 난 뒤에야 슬기로와진다. 슬기로와지면 그 뜻이 성실해진다. 뜻이
성실해진 뒤에야 마음이 올바르게 된다. 마음이 올바르게 되어야 비로소 몸을 닦을
수 있다. 몸을 닦은 뒤라야 집을 다스릴 수 있다. 집을 다스린 뒤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린 뒤라야 천하를 편하게 할 수 있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한 마음으로 몸을 닦기에 힘씀으로써 그 근본을 삼는다. 그 근본이
어지러워서는 그 끝이 다스려질 리가 없다. 나무 기둥이 가늘고는 그 가지가 무겁고
튼튼할 리가 없다.
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앞과 뒤를 알면 즉 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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