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건강의 중요성
우리 몸은 지배하고 총괄하는 것은 바로 정신이다.
우리는 육신의 불구자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이 정신 건강이 육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육신의 병은 열심히 고치려고 하면서도 정신의 병은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 일인가?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교육과 지위도 소용없는 것이다. 대학
교수가 돈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이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훌륭한 기술과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 해도
정신이 건강하지 못할 때는 이 모든 것이 무용 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만큼 정신 건강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참된 건강 상태를 모르고 자신의 육신이 진정한 자신이라고 생각하여
육신이 얼굴만 화장을 하고 마음의 화장은 하지 않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그리고 사람을 외형만으로 판단하고 진정한 내면의 모습을 등한시하는 요즘의
세태를 접할 때마다 참으로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외모와 학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고 방식, 습관, 행동거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참다운 건강은 정신 건강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건전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기 바란다.
모든 종교의 근본 취지는 참다운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정신 건강을 찾자는
것이다. 이러한 본연의 자세를 바로 가지지 못한 종교는 색깔은 있으나 향기가
없는 꽃과 같은 것이다. 진정한 자신을 찾아서 정신의 안정과 자유를 갖도록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시의
내면세계에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순간적 쾌락을 구하지 말고 대자유인이 되어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마음가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세상에 나의 뜻대로만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그 어떤 것도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만 생각할 때 감정의 대립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물이 주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물과 같은 마음을 먹는다면
참된 정신 건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물은 고집을 피우지 않는다.
고집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떤 변화에도 적응을 잘 한다는 것이다.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 모양이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모양이
된다. 그만큼 어떤 변화에도 적응을 잘한다는 것이고, 이는 자신의 고집을
버린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허상을 버리면 정신 수양이 한층 깊어진다고 한다.
우리도 자신의 고집과 독선을 버리고 어떤 환경의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부드러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미운 사람이 보기 싫어서 그를 피해 다른 곳에 가도 그곳 역시 미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내
자신이 그곳에 적응하는 지혜를 물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둘째, 물은 항상 아래로 흘러 내려간다.
물은 결코 위로 치켜 올라가는 법이 없다. 이 가르침은 항상 나를 낮추라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겸허한 마음은 우리를 평화와 안락에 들게 할
것이다.
불교는 하심공부다. 나를 겸손하게 낮추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상심은
중생의 마음이고, 하심은 불자들의 마음인 것이다. 스님이 되기 위해서 처음에
절에 들어오면 행자 교육을 시키는데, 출가하기 전에 아무리 자신이 대학
교수를 하였고 박사 학위가 몇 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기본부터 철저히 교육을 시킨다. 이는 물이 아래로 흐르듯 항상 자신을 낮추는
마음 씀씀이로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행자들의 수양 방법을 우리도 따를 필요가 있다.
셋째, 물은 원수를 만들지 않는다.
물은 흘러가다가 웅덩이가 있으면 고였다가 넘쳐흐르고, 큰 바위가 있으면
비켜 지나가며, 아무리 칼로 갈라놓으려고 해도 갈라지지 않는다.
쇠붙이가 물 속에 있어도 꾸준한 시간을 통해 녹이 쓸게하여 녹이는 것과
같이 우리도 나와 대립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더 괴로운 법이다. 물과 같이
원수를 만들지 않을 때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낄 것이다.
넷째, 물은 10년이나 2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물은 얼음에서 물로, 다시 수증기로 겉모습은 변할지 모르지만 그 본연의
모습인 H2O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도 역시 물과
같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물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으로 마음을 가다듬을 때 건강한 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물의 진리로 생각하고 노력하기 바란다.
몸가짐은 어떻게 하는가?
마음을 물과 같이 가진다면 만사가 평화롭기만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마음과 몸은 결코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물과 산의
관계와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물과 같이 한다면 행동은 산처럼
해야겠다.
첫째, 산과 같이 침묵을 지켜라.
산은 친구처럼 다정하고 스승처럼 준엄하다. 산은 요지부동이다. 물이
유동적인 존재라면 산은 그 반대이다.
왜적과 대전투를 눈앞에 둔 충무공은 진중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조용하고 무겁기가 산과 같다. 우리는 산처럼 신중한 마음으로 큰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는 곧 함부로 몸을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침묵을
지키라는 것이다. 옛 선현의 가르침이 바로 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같다.
둘째, 산은 우리에게 장엄함을 가르쳐 준다.
산 속에는 신선이 살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산 속에 사는 사람을 신선이라고 하고 골짜기에 사는 사람을 속인이라고
한다. 수도승도 산 속에 산다. 유수한 계곡이 있고, 바위가 있고, 맑은 샘물이
있고, 정정한 나무가 있고, 온갖 새와 짐승이 있다. 이처럼 우리의 몸가짐도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숭엄하고 아름답게 가다듬자는 것이다.
모난 행동을 보이지 말고 참답고 부드러운 행동을 할 때에 비로소 산처럼
크고 엄숙함을 지니게 된다.
셋째, 산은 의연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자연의 무궁무진한 계절의 순환 속에서도 산은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본연의
모습을 한 채 점잖게 지켜보고 있다.
깊은 산의 맑고 청정한 공기는 우리의 정신과 육신을 강하게 만들고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킨다. 산과 같이 우리는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경박함을
벗고 마음 속에서 가르치는 큰 도리를 따르는 의연함을 지녀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산이 가르쳐 주는 침묵과 장엄함과 의연함을 배워서 우리의
육신을 경솔히 움직이지 않고 무게있고 아름답고 태연한 생활을 해야 한다.
항상 산을 바라볼 때 이 가르침을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길 바란다. 그리고
이것이 정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첩경임을 명심해야 한다.
언젠가 성철 큰스님께서 화두로 말씀하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말씀처럼, 물같이 산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얼마나 자유롭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물의 가르침, 산의 가르침을 바로 알 때 우리는 참다운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요,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과욕은 정신을 병들게 한다
과욕은 사람을 망하게 한다. 과욕을 버려라. 이것이 참 지혜이다. 과욕은
반드시 눈을 멀게 하고 불행을 만들어 낸다.
개인이건, 가정이건, 사회건, 국가건 간에 과욕은 반드시 파멸을 가져온다.
우리는 노태우, 박정희 대통령의 지난 역사를 볼 때 과욕이 안겨다 준 비극을
보아왔다. 과욕은 비리와 무리를 낳고, 비리와 무리는 파멸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 또한 이 과욕이 완전히 마비시키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자가 생활의 만족을 아는 사람이며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다.
욕심은 재앙의 어머니다. 무슨 일이나 지나치면 좋지 않다. 술을 많이 마시면
두통이 오고, 음식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과로를 하면 허약하게 되고,
과색을 하면 몸을 망친다. 난로가 과열되면 화재가 생기고, 자동차가 과속하면
사고가 생기고, 돈을 낭비하면 빚을 지게 된다. 꽃에 비료를 많이 주면 뿌리가
썩는다. 우리 몸이 영양을 과다하게 섭취하면 비만에 걸려 질병과 죽음을
재촉한다. 과잉 보호는 어린 아이를 나약하게 만든다.
욕심을 버려라. 그래야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
인생 만사가 지나치면 반드시 실수가 뒤따르게 된다.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음식도 지나치게 먹으면 배탈이 나지만 적게 먹으면 병이 되지
않는다. 과욕을 버려라. 이것이 바로 인생의 지혜다.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욕망의 포로가 되지 말라. 욕심의
종이 되지 말라. 권력을 가지면 권력의 노예가 되기 쉽고, 돈이 많으면 돈의
노예가 되기 쉽고, 명예를 가지면 명예의 노예가 되고, 지위를 가지면 지위의
노예가, 색을 보면 색의 노예가, 도박을 하면 도박의 노예가 된다.
인간이 주인이 되어야지 도리어 사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인간성 상실이며 정신의 파멸이다.
내가 돈을 소유한다고 하면 나는 소유주요, 돈은 소유물이다.
내가 돈을 소유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돈을 관리하고 사용하고 지배하고
처분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소유의 바른 이치요, 질서인 것이다. 이렇게
사물에 대한 소유주의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내가 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소유하고, 돈이 나를 사로잡는 현상이 흔히 일어난다.
이것이 소유의 비극이다.
제도의 노예, 조직의 노예, 물질의 노예, 사상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라.
야망을 갖되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물건을 갖되 물건의 노예가 되지
말고, 돈을 갖되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 원효 대사께서는 모은 일에 막힘이
없는 자유자재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고, 이것이 인간의 이상적 경지다.
과욕을 버려라. 과욕은 패망의 어머니요, 불행의 원천이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분수에 만족할 줄 알아라.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다
시련이 없는 인생은 없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 보이고 참 행복한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대로의 고민과 어려움을 갖고 있다. 자식이 없거나
애정 결여 때문에 고민하는 부부, 고부간 갈등으로 번민하는 여성, 배우자의
부정한 행동에 괴로워하는 사람, 자식 때문에 속을 썩이는 부모, 몸의 질병
때문에, 사업의 실패, 인간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받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은 겪기 마련이다.
세상 일이 나의 뜻대로만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생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고, 슬픔의 절벽과 번민의 골짜기가 있고, 방황의
비탈길이 있다. 절망의 폭풍우와 불안의 안개에 휩싸여 갈 길을 몰라 헤매일
때가 많다. 이럴 때면 '왜 사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드는가?' 하고 비탄에 젖어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시련을 극복하는 것이요, 고난과 싸우는 것이요, 역경을
이겨내는 것이요, 운명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과 용기, 인내와
덕이 필요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지구력이 필요하다. 힘과 용기, 덕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숙련의 산물이요, 노력의 결과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생명력이 약하지만 들판에서 자란 야생 화초는 비바람과 온갖 고난
속에서 견뎌 왔기에 웬만한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갖고 있다.
쉽게 생각할 것이 못 된다. 무쇠가 강철이 되려면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이, 잔잔한 바다에서는 훌륭한 뱃사공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이,
용감한 장수가 되려면 수없는 전쟁을 치루어야 하듯이 인생은 노력과 인내
속에서 결실을 얻게 되어 있다.
시련에 금방 무너지는 나약함을 버리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강인함을 키워야 겠다.
누구 때문인가?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 한다.
'사업이 안 풀리고,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고, 삶이 무미건조해지는 것은 모두
누구누구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그러나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다른 누구에 의해서
잘못되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면 나 자신은
영원히 진정한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달성 공원 앞이나 영도 다리 아래, 심지어 부처님을 모셔놓은 사찰 내에서도
사주나 관상을 봐주면서 조상을 천도하라고 한다든지, 죽은 조상이 방해를 하기
때문에 일이 안 풀린다고 하는 등 어리석은 중생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작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노예도 되어서는 안되겠다. 모은 해결책은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결국은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기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고 결코
타인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갈등이 생기게 되면 그때는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세 가지 종류의 사람
가을에 곡식을 추수하게 되면 그 품질에 따라 상등품, 중등품, 하등품으로
구분을 한다. 그리고 종류별로 제각기 가격이 비싸게 또는 싸게 팔리는 것이다.
우리 인간도 그 생각과 행동하는데 따라서 상, 중, 하의 세 종류로 구별할
수가 있다.
먼저, 하품인은 물질과 자신의 육신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이다.
그저 자신의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려 하고, 어떤 옷을 입을까? 오늘은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을까? 어디가서 즐겁게 인생을 즐길까? 하고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가장 소중한 것은 돈이라고 생각하여
이것을 모으기 위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자신의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물질을 모으는데 보람을 느끼고 자신의
모든 인생의 목표를 부의 축적에 두고 살아가는 동물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바로 하품인이다.
둘째, 중품인이다. 이는 지식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고 지식을 배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을 말한다. 지식과 기술이 출세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그 한 예로 우리 나라의 지나친 교육 열풍을 들 수 있다. 부모된 입장에서
자식 잘 되기를 바라기에 교육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지 상정이겠지만,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쳐 학력과 지식 만능 주의에 빠지게 된다면 이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모든 것을 성적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며,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 초등 학교때부터 고액 과외를 하는 등 이미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벗어난
형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이의 적성과 관심 분야에 대해서는 묵살하면서 오로지 공부만을 강요하는
것은 지식과 학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 방식 때문이다.
그저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한 교육만을 시키다 보니
참다운 인간 교육은 자취를 감춰 버리게 되었다. 요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인륜을 저버리는 사건들은 바로 우리의 교육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 나갈 우리의 자녀들이 올바른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 풍부하고 다양한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기는커녕, 오직
일류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을 목표로 삼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처럼 올바른
가치관 교육이 등한시 되기에 대학 교수라는 사회적 명망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참변이 생긴 것이다. 결코 남의 일이라고 쉽게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자신과 학교 공부 외에 다른 사회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 어른이 된다면 그 사회의 앞날은 어떻게 될 지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지식이 전부일 수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셋째, 상품인은 정신적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인자한 마음, 온유한 마음,
용서하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으로 올곧게 지키는 사람이며,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항상 정신 수양을 하는 사람이다. 결코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동물적, 본능적 쾌락을 즐기지 않으며 항상 마음을 고요히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최근 방송을 통해 어린 아이 성폭행 사건을 자주 접하게 된다.
'어쩌면 사람으로서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상, 중, 하품의 세 부류가 있고 우리는 이를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하품은 손에 쥐어줘도 모르고, 중품은 가르쳐 주어야 알며, 상품은 운만
뛰워도 스스로 깨닫는 사람이다. 이것을 구별하여 거기에 맞게 대해야 한다.
불교에서 처음 절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책 중 (초발심 자경문)
이라는 곳에 보면, '나쁜 친구는 원수같이 멀리하라.'고 한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들 중에는 아무리 손을 써 봐도 바르게 인도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그런 사람과 함께 한다면 자신마저 그를 닮게 된다는 경계의 말이지
결코 사람을 차별하라는 것이 아니다.
품격이 낮은 사람은 아무리 제도하려고 해도 제도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마저 망치는 수가 많다. 부처님도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 사람의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경우엔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시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같은 칼이라도 의사가 들면 사람을 살리고 강도가 들면
사람을 죽인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를 만들고 뱀이 마시면 독을
만드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대화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화는 서로 오고가는 것이다. 쌍방 통행인 것이다. 결코 일방적이어서는
안된다.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말, 오기만 하고 가지 않는 말. 이것은 대화가
아니다.
비극이란 무엇인가? 대화의 단절이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대화의 결여다.
오해란 무엇인가? 대화의 부족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대화의 충만이다.
우정이란 무엇인가? 대화의 교류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대화의 완성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말은 많아도 대화는 적다. 이는 진정한 대화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대화를 위해서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먼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상대방의
참됨과 진실됨을 볼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남과 대화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을 보라.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고집 불통에다가 교만하기까지
하다. 반대로 남과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을 보라. 활달하고 너그럽고 개방적이며
이해심이 많고 협동적이다.
마음의 문을 먼저 열어야 말의 길이 보이고, 자신의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남의 입장, 남의 처지가 되어 보아야 한다. 즉,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나의 입장과 처지만 고집한다면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고, 아내는 남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며, 여당은
야당의, 야당은 여당의 처지에서 생각해야 한다. 나의 생각이 항상 옳고 남의
생각은 틀렸다고 여긴다면 대화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화에는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셋째, 남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의 생각과 처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 한창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데도 이를
듣기는커녕 다른 곳을 본다든지하여 상대방을 서운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바르게 듣는 법을 배워라. 그것이
대화의 기본 자세이다.
너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이 모든 만물은 만났다가는 다시 헤어진다. 그 헤어짐의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 헤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생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만남과 헤어짐을 불교에서는 인연이라고 한다.
인연은 결코 피할 수가 없는 것으로, 헤어지지 않으려 한들 안 헤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가시면 저희들은 누구를 믿고 따르며 의지해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너 자신을 믿고 자신의 가르침에 의지하라."
고 대답하셨다.
이 말은 바로 나 자신을 스승으로하여 바른 길을 찾아가라고 한 것이다. 즉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가르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돈을 신앙을 삼는다면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고,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노예가 되고, 부처를 믿고 부처를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곧 부처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결코 영원한
자유인이 될 수가 없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때 자유가 있고,
비로소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깨끗한 자신의 마음을 되찾고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살아 있다는 것은 시간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죽은 것은 시간이 없다.
생명은 시간이요, 시간은 곧 생명이다.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시간이야말로 인생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네 가지 지혜를 가르친다.
첫째, 시간은 만인에게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권력자나 귀한 사람, 농부나 공장 근로자에게 모두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 시간 앞에서는 그 어떤 특권도 있을 수 없다.
단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가 결정되는 것일 뿐이다.
지금 자신의 시간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라. 시간은 결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세월은 쏜살같이 달아난다. 시간이 늘 내 곁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의 젊음이 언제까지나 내곁에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
진정으로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인생의 승자가 된다.
둘째, 시간은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결코 살 수가 없다.
돈도 시간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이다. 황금이 만능일 수는 없다. 돈은
잃어버리면 다시 벌면 되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낭비하기 쉬운 것이 시간이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에
대해서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을 뜻한다. 여유있고 넉넉한 것을
미덕으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시간의 가치와 소중함을 잃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우리의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큰 일을 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는 데 마음을 쏟고,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은 가치있게 활용하는
데 마음을 쓴다.
셋째,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시간의 교훈은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다. 미래는 아직 나에게 오지 않은 시간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뿐이다.
과거의 지나간 시간에 미련을 두거나 매달리지 말아라. 또한,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공연히 걱정하여 지금 현재를 허망하게 보내지 말아라.
미래는 서서히 오고, 현재는 쏜살같이 지나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버린
것이다.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현재를 붙잡아 영원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
넷째, 시간은 모든 상처와 아픔을 깨끗이 치료해 주는 훌륭한 의사이다.
시간이 흐르면 오해가 이해로, 원한이 용서로, 고통이 위안으로, 슬픔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듯 시간은 우리에게 위대한 글이나
말보다고 더 가치있고 소중한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격한 감정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더라도 조용히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면 걱정도 가라앉고 마음의 평온은
되찾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길가는 나그네
인생을 산다는 것은 길 떠나는 나그네요 여행자며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이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왔다가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다. 이 육신과
물질은 이왕 이 육신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웃을 만나게 되고 서로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100년도 안 되어 조용히 떠나야 한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잠깐 머무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은 만물이 잠시 머무는 여관과 같고 흘러가는 세월은 나그네와 같은
것이다. 산다는 것은 저마다의 길을 가는 것이요,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가고
너는 너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밝은 길을 걸어가고, 어떤 이는 어두운 길을 걸어간다. 어떤
이는 수도자의 길을 걸어가고, 어떤 이는 위선자의 길을 걸어간다. 어떤 이는
고독의 길을 걸어가고, 어떤 이는 행복의 길을 걸어간다. 어떤 이는 절망의
길을 가고, 어떤 이는 희망의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것이
인생의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뭔가 남기고 떠나가야 한다. 나 혼자만
이 세상에 태어나고 존재했다면 몰라도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고 있는데,
이 역사 앞에 한 촛불로 커졌다가 꺼지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뭔가 주위에
도움을 주고 나아가 이 세상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보다 뒤에 오는 나그네들에게 샘물을 파 주던지
재미나는 이야기를 써 놓고 휴식 시간에 볼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남겨 놓고 가려고 하는가?
훌륭한 자녀, 좋은 작품, 아름다운 인생관, 고결한 인격, 자랑스러운 업적,
저마다 값있는 유산을 남기고 가야 한다. 이러한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가려고
한다면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확고한 뜻을 세워야 한다.
내가 가야 할 뚜렷한 목표를 확립해야 한다. 이 몸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한 사회나 국가 또는 내가 몸담고 있는 모든 주위에 대해 무엇으로 봉사를
하거나 한 분야를 맡아 도움이 되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정처없이 떠 다니는 방랑자는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뚜렷한
목표를 가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살이인지 모른다. 아무 곳이나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를 향하여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둘째로는 나와 함께 가는 동반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운 사람과는 잠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천 리를 걸어가도 고달프지 않다. 이와 같이 지금 나와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어떤 성격의 소유자이며 마음가짐과 행동, 사상, 습관 등을
정확히 파악하여 동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정다운 동반자가
없을 때 우리의 인생 여행은 고독하고 괴롭고 외로운 여행인 것이다. 목표와
이상이 같은 동지가 동행할 때는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가지만, 목표와 이상이
상반된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되면 충돌과 분쟁과 짜증이 나고 분열이 생기는
수도 있다. 우리는 동반자라고 말하면 배우자도 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고, 직장의 상사일 수도 있다. 서로의 인격을 바탕으로하여 열심히 발전되게
삶을 살아가자.
셋째로는 쉬지 않고 열심히 걸어가자는 것이다.
우리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가기로 하자. 나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정성을
다해 열심히 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은 새로운 길이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열심히 걸어가야 하는 시련의 길이다.
시련이 있기 때문에 승리의 기쁨도 우리의 여행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자유롭고 신선하고 정신이 해방된 순간이기도 하다. 새로운 경험과 견문을
넓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인생의 길을 쉬지 않고 걸어가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지상의 나그네임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야 한다. 탐욕과 성냄이 어리석음을
버리고서 말이다. 내 분수를 자각하고 순리에 어긋나지 않고, 겸손하게 나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라도 내 인생의 종말을 맞이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서 재미있게 나의
길을 가자꾸나.
인생은 연극이다
우리는 가끔 텔레비젼 드라마를 본다. 거기에 도취되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분노도 느끼고, 동정도 하면서도 남의 일 같이 생각해 버린다.
매일 뉴스에 나오는 사건 사고들을 남의 것으로 생각한다. 교통 사고, 살인,
강도, 강간 이 모두가 남의 것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인 것이다. 나 자신이 잘못된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나 역시 저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연극에는 삼대 요소가 있다.
첫째는 무대이다
우리가 사는 이 주위 전체가 무대인 것이다. 내가 지금 서 있는 무대는 어떤
무대인가! 뒷골목인가 아니면 밝은 거리인가 생각해 보라. 내가 지금 서 있는
전체, 다시 말해 주위 환경 전체가 내가 연극하는 무대인 것이다. 멋진 인생을
살려고 한다면 먼저 좋은 무대에서 서 있어야 한다. 나의 가정, 나의 직장,
나의 동료, 나의 거래 상대 이 모두가 좋은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스님들이 산 속에 들어가 수도를 하는가. 바로 좋은 무대를 찾아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른 땅으로 가야 불을 붙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시내에서 여러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서로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복수하고, 생존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서 불을 지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서 있는 무대가 과연 어떤 곳인지 생각해
보라.
둘째는 배우다.
배우라는 것은 연극의 주인공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이다. 나와 상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다 연극 배우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주인공인 내가 과연 어떤 연기를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깡패 노릇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사기꾼 노릇을 하고 있는지, 땅 투기꾼 노릇을 하고
있는지, 부모에게 불효하는 배우가 아닌지, 아내에게 악질적인 역을 맡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셋째로 이야기의 줄거리, 즉 대사를 말한다.
과연 내가 맡은 역의 대사는 어떤 것인가. 주위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부모에게, 자식에게, 직장 동료에게 좋은 대사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욕설을 하고 있는지, 혹시나 모함을 하고 있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잘못된 것에 대해 솔직하게 잘못 되었다고 사과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연기자는 명 연기자, 멋진 주인공으로 존경과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숨기거나 거짓으로 대사를
이끌어 간다면,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물론 악역을 맡았다고 할 것이다. 지금
당신이 맡고 있는 역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잘못된 역을 맡고 있다면
지금 바로 그 연극을 포기하고 다른 연극을 맡기 바란다. 만일 다른 연극으로
바꾸기 힘들 때는 무대를 바꾸든지 그것도 바꿀 수가 없을 때는 대사라도
바꾸기를 바란다.
명 배우의 연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며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우리는 좋은 연극을 보았을 때 영광과 칭찬의 박수 갈채를 아끼지 않는다.
연극의 명작은 하나의 기쁨이요, 감격이요, 축복이며, 생명인 것이다. 연극은
수 차례 연습을 하고 또 해서 무대에 올려졌다. 그리고 다시 재 공연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연극은 연습도 없고 재 공연도 없다는 것이다. 처음
공연이 바로 마지막의 공연인 것이다. 연극은 작가가 각본을 쓰고 내가 주인공
역을 맡지 않으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가 있지만, 우리 인생의 연극은
내가 각본을 쓰고 나만이 주인공이 되며 남이 절대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자신의 연극을 공연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저마다 어떤 역할을 맡는다. 교수, 학자, 기술자, 구멍가게 주인,
노가다(막노동), 종교인, 음악가, 농부 등 제각기 한 역할을 맡는다. 그 사람의
그릇과, 능력과, 노력에 따라서 맡는 역할이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인생은 대개 네 막으로 되어 있다.
첫째 막은 탄생이다.
이 탄생은 생명체의 탄생도 의미하겠지만 이보다 한 차원 높게 생각한다면
괴로움의 시발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자주 눈에 띄는 것이 괴롭고,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고, 하기 싫은 일은 해야 하는 것이 괴로운 것인데, 이 괴로운 것은
그럼 어디에서 발생했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요, 땅에서 솟아 올라 온
것도 아니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마귀의 장난도 아니요, 오직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욕심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길을 가다가 옷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원피스가 눈에 들어 올 때,
어쩐지 입고 싶어 충동이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감정의 강한 욕구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원피스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꼭 사 입고 만다는 강한 욕구로써 내가 지금 그 옷을 사 입을
돈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여유가 되지 않으니까 짜증도 나고 화가 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미움, 원망, 분노, 짜증, 복수 모두를 말하는
것이다. 감정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는 실천 활동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원피스를 사 입어 느끼는 즐거움을 말한다. 반드시 즐거움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도 말한다. 그 원피스를 못 사 입으니까, 내가 가진
돈이 없어지니까, 남편을 속인다거나, 아니면 남의 돈을 훔치는 일체의 행동을
의미한다.
넷째는 죽음이다.
육신의 죽음도 생각할 수 있으나 즐거움의 종말, 괴로움의 종말을 말하기도
한다. 원피스를 사 입을 때는 좋았는데 일 년을 지나고 보니까 유행도 지났고
색깔도 마음에 들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과거에 사두었던 물건들이
아직도 귀중하게 느껴지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살 때는 아주 최신형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고물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 살 때의 감정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죽음의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고, 많은 것을 이루고, 때가 되면 인생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해 내는 명 연기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맡은
역할에 대해 불평과 태만과 불성실한 태도를 가지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진지하게 하는 인생의 명 배우가 되자.
세 가지를 이겨라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누구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운데 싸움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이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문제는 싸움의
문제이고 내일의 문제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고 마지막 문제는 죽는 것이다.
과연 죽는 순간을 어떻게 멋있게 장식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누구나가 이
과정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차피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하는 것이 모든 날의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싸운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리고 이긴다는 것도 힘든 일이다. 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이 수레바퀴는 쉴새 없이 돌아가는 것이다.
첫째로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이다.
여름에는 더위와의 싸움이고 겨울에는 추위와의 싸움이다.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균과의 싸움도 있고, 질병과의 싸움도 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지게 된다면 우리의 생명은 죽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은 바로 과학에 의해서이다. 과학을 배우는 것은 이 자연과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이지 그 외에 다른 것을 어찌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자연을 역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을 버리고 과학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과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나는 중국 사람들이 더위를 이기고 추위를 이기는 방법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하 섭씨 20도에서 30도까지 내려가는 데도 방에 불을 많이 때지
않는다. 방안에 얼음이 얼어도 조금도 춥다고 외면하지 않는다. 이렇게 추운
방에서도 갓난 아니가 자라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돈을 절약하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 자연에 순응하는 지혜가 있는 것을 느꼈다. 겨울에 얼음이
얼면 봄까지 치우지 않고 그냥 둔다. 온 길바닥이 얼음판이 되어도 차에 체인을
감고 다니는 차가 없다. 그래서 차가 없다. 그래도 자전거도 잘 타고 다니고,
차들도 아무 사고없이 잘 간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바로 자연과의 싸움을 잘
이끌어 가는 지혜라고 나는 생각한다.
둘째는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이다.
이 말은 잘못 이해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종교적 측면에서 본다면 굳이
싸움이라 표현하는 자체가 모순이라 생각할지도 모르나 내가 전하고자 하는
뜻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 우리는 치열한 생존 경쟁의 무대에서 살아간다.
개인과 개인간에, 집단과 집단간에, 국가와 국가간에, 계급과 계급간에
싸움이 시작된다. 강한 자는 이기고 약한 자는 패한다. 승리자에게는 영광과
환희와 긍지가 따르고 패배자에게는 수모와 고통과 비애가 따른다. 싸우면
이겨야 한다. 이기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패배의 설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력이 우리의 내부 사정에 의해 완전히
망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안타까운 일이다.
초등 학생까지 외제 상품에 물들었고, 온 국민이 외국 물건에 현혹되어
외화를 낭비하니, 아무리 근로자들이 피땀 흘려 돈을 벌어들인들 무엇하리.
그러니 결국은 외국에 경제력을 빼앗기고만 것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싸우는 전쟁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정신차리지 못한다면 영원히 외국의 속국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모두들 정신차리고 열심히 경쟁자와 싸워 이기자.
마지막 세 번째의 싸움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이 가장 어렵고 힘드는 싸움이다. 남을 이기기보다는 내가 나를
이긴다는 것이 더욱 어렵다. 내 마음 속에는 항상 두 가지가 싸우고 있다.
하려는 욕구와 하지 말자는 생각이 끊임없이 싸운다. 선한 자기와 악한 자기,
고귀한 자기와 비열한 자기, 부지런한 자기와 게으른 자기, 성실한 자기와
불성실한 자기, 용감한 자기와 나약한 자기, 참된 자기와 거짓된 자기가 나의
마음 속에서 항상 싸운다. 어느 자기가 이기든지, 남이 대신 싸워 줄 수가
없다. 그것은 고독한 싸움인 것이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진정한 인생의 용사인 것이다.
인간의 최대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 남을 이기는 것은 내가 그
사람보다 힘이 조금 세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참으로 강한 사람이다. 우리는 참으로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산다는 그 자체가 싸운다는 것이고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정신적 부패와 도덕적 부패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사정의 칼날은 날카로웠다. 온 국민의 지지
속에서 부패자들은 그 과보를 속속 들추어냈다. 그렇게 정부의 잘못을 지적해
내던 야당마저도 그 존재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여당도 할 말이 없어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있는 실정이었다. 국민들은 흥분했고 건국이래
최대의 박수 소리가 전국에 메아리 쳤다. 그러나, 막바지에 이르러 어떠한
문제들이 발생했는가. 한보 비리, 정책 전반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증언대에 선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결백만을 주장했지만 검찰에
문을 나설 때는 모두가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들이 나온다. 어찌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단 말인가.
대통령의 아들이, 매주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기도 올리는, 신앙인 임에도
국민들 앞에서 이중적인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의 아버지가 집권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정치적 보복이라는 말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신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 다시 말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데서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자신의 자리를 바로 잡아야 한다.
물기가 있는 땅에서는 불이 타지 않는다. 마른 땅을 찾아서 그곳에서 불을
지피면 잘 타는 원리이다.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물그룻이 있는데 그 안에 물이 가득 들어 있다. 여기서
물은 우리의 정신이요, 물그릇은 우리의 육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의
정신을 맑게, 다시 말해 물그릇 속에 있는 물을 깨끗하게 맑게 하려면 물그릇이
흔들리지 않게 반듯하게 놓아야 한다. 울렁울렁 그릇이 흔들리게 되면 그 안에
있는 물이 흔들려서 물이 더러워지게 된다. 우리의 몸을 함부로 움직이면
정신이 산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항상 몸가짐을 바로 하는 습관을 가지길
바란다.
둘째는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도록 해야 한다.
물그릇이 제자리에 바로 자리잡히게 되면 그 속에 있는 물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삿된 욕심, 허영심, 갈등, 미움, 원망 등의 감정이 줄어드는 원리가 바로
물 속에 있는 찌꺼기가 가라 앉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마음이 고요히 안정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고 설사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순간적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리를 바로잡고 난 후에 마음이
고요해 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셋째로 마음이 안정되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다.
물그릇을 바로 하고 물 속에 흔들림이 없어지게 되니 물이 맑아지고, 달이
비치니 달 모습이 물에 나타나고, 별이 비춰지니 별이 물 위에, 나무가 비치니
나무의 모습들이 다 나타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지혜가 살아나게 되어 참된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주인이 정상적인 사고와 인격을 지니고 있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바로 불구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교육은 지식만 가르치고 있지 지혜는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에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만 생기게 되고 인간미가 상실되고 개인 주의, 이기
주의, 한탕 주의, 기회 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저 대학을 들어가게
하는 교육만 가르치고 있지 인격을 갖추게 하는 교육은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인생은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 단 하나의 기회밖엔
없다. 과연 이대로 살 것인가!
멋있게 살아보자!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열심히 살아가자. 재미있게 정신이 부패하지 말고 말이다. 교육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주위에 위선자들을 봄으로써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한다. 그들을 욕하기에 앞서 나 자신도 정신이 썩으면 저렇게 될 수가 있다
하는 마음을 가져라.
양서는 가까이하고 악서는 멀리하라
인간의 만남 중에서 책과의 만남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른다. 사람이
책을 만들었고 책 또한 사람을 만들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중에 중요한 시기,
다시 말해 결정적인 순간에 감동적인 책을 읽으면 큰 도움이 된다. 한 권의
책이 한 인간의 운명을 만들기도 한다.
인간이 이처럼 발전하고 만물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은 책에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에 석가모니는 갔지만 그의 가르침은 경전 속에 부처님의 냄새가
배여 있지 않은가. 역사와 정권과 인간은 사라졌지만 책은 남아있는 것이다.
요사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책들이 나온다. 먼저 우리는 책이 우리에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점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다.
첫째로 책은 간접 경험을 통해 나의 삶을 바로 선정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이 매일 경험하는 모든 것은 직접 경험이다. 내가 몸소 체험하는 것이
직접 경험이다. 이 직접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구한 세월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경험한 바를 기록한 것을 우리는
읽어봄으로써 간접 경험을 하게 되며, 나 자신의 처지에 비춰 참고도 할 수
있고 새로운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정신적 만남과 대화이다.
수천 년 전의 부처님과의 대화, 맹자, 공자, 예수, 원효 등의 스승들과의
정신적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뛰어난 인물들과의 만남과 같이
기쁜 일은 없다. 지식의 향기가 있고, 진리의 광명이 있고, 지혜의 맛이 있고,
교훈의 말씀이 있고, 사상의 대화가 있다. 책 속에서 동서 고금의 수천 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독서는 정신의 목욕이요, 영혼의 세탁이며, 진리의 정화다.
우리가 참된 정신을 지니지 못할 경우, 오욕락(음식에 대한 욕심, 오래 살고
싶은 욕심, 색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에 헤매다가
몸과 마음이 지쳐 버리고 기진 맥진하게 된다. 이 때 우리는 좋은 책을 읽어
생명을 세탁하고, 정신을 정화시키고, 마음의 밭을 가고, 생활에 싱싱한
활력소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인생은 아무리 길다 해도 백 년도 넘지 않는다.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이 무제한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악서와 잡서로써 이
귀한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가. 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어리석음은
없다. 인간의 생산적인 행동이라면 양서를 읽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명저를
읽는 시간처럼 창조적인 시간은 없다. 책을 멀리하는 사람은 어두움 속에서
사는 사람이요,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밝은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양서와 명저를 읽어야지,
악서와 잡서는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정신을 병들게 하고 영원히 파멸의
길로 빠지게 한다.
우리는 먼저 책을 읽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고전파, 명저와, 양서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은
수백 년, 수천 년의 풍파를 견디어 온 책이다. 그래서 고전은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은 이웃을 선택해야 하듯이 좋은
책을 선택해 읽어야 함은 자명한 이치이다. 독서야말로 지혜로운 선택인
것이다. 양서는 우리의 마음을 심화시키지만, 악서는 정신을 타락시키고
마비시킨다.
둘째로 우리는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편독하지 말라는 것이다. 편식이 우리의 몸을 해롭게
하듯이 편독 역시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아니 불구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를 유지함에 있어 종합적인 영양소가 요구되듯, 우리의
정신도 역시 종합적인 영양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편독만을 해서 한구석만
바라보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철학, 문학, 종교, 과학, 예술, 정치,
경제 등의 다방면의 책을 다독하자는 것이다. 자신의 전공 분야만 고집한다든지
취미가 있는 곳으로 편중되지 말라는 점이다. 책 속에 우리의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비법이 있고 우리 인생을 즐겁게 살찌울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명저로 마음의 밭을 갈도록 하자. 양서로 정신의 세계를 살찌게 하자.
그리고 악서로 우리 정신 세계를 불구자로 만들지 말도록 하자.
말하기 전에 먼저 들어라
우리의 귀는 둘이고 입은 하나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하는 것은
듣는 것의 반만 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불필요한 말을 한다. 이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고 심할 경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요사이는 말 한 마디에 회사가
쓰러지고, 말 한 마디에 한 사람이 매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미리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데서 발단이 시작되어 한 사람을 거쳐
지나감에 따라 눈덩이같이 불어난 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먼저 듣는 것을
배워라. 경청의 덕을 가져라 남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지혜를 가져라.
나의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남의 말을 더 많이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남과 대화할 때 몇 가지 기울여야 하는 것이 있다.
첫째, 나의 몸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남이 하는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신의 몸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다른 곳을 보고 있으면서 말을 듣는 수가 있다. 이는
경솔한 행동이다. 상대로 하여금 불신을 갖게 한다.
둘째,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 마디 한 마디 귀를 기울여서 듣는 태도가 중요하다. 대수롭지 않게 가벼이
듣는 태도는 얼마나 나쁜 버릇이고 이것이 오래 지속되면 습관이 되는 수가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참으로 고치기 어려워지고 습관이 되어 버린다.
셋째,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나의 마음의 문을 닫고서 상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대화의 의미가 사라지고
의견 차이나 생각이 바로 전달될 수 없고 이해가 없고 진실이 뭔지 상대의
입장이나 정확한 정보도 전달받지 못하게 된다.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를 대할
때 발전된 관계가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정성을 기울이지 않을 때는 한 마디, 한 구절도 정확하게 전달받지 못하게
된다. 남이 말을 할 때에는 한 마디, 한 구절을 놓칠세라 온몸이 귀가 되어
열심히, 정성껏 경청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남을 깊이 이해할 수가 있다. 정신을 집중하여 한 마음으로 열심히
듣는 것이 중요하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 태도를 가지고 상대방의 소리를 들을
때에 무성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깊이가 있는 소리는 소리가 없다. 양심의
소리, 지혜의 소리, 역사의 소리, 부처님의 소리, 영혼의 소리, 진리의 소리,
우주의 소리, 이 모든 무성의 소리는 정성을 기울이지 않고는 들을 수가 없으며
육신의 귀로서도 들을 수가 없고 마음의 귀와 영혼의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깊은 물은 소리가 없어 흐르듯이 깊은 소리 역시 소리가 없는
것이다. 무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지혜가 밝은 사람이다. 바로 성인이라 할
수도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서 입을 연다.
지혜로운 이는 먼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역사의 소리, 진리의 소리를 조용히
듣는다. 다 듣고 난 후에 입을 열어 말을 한다. 듣는 것은 먼저요, 말하는 것은
나중이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많은 이해와 체험과 지혜의
사색이 필요하다.
지혜와 사색과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피상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귀만 있다고 모든 것을 들을 줄 아는 것은 아니다.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입을 열기 전에 귀를 열어 말하기
전에 먼저 귀로써 들어라. 마음과 정성의 몸가짐의 모든 성의를 다하고서.
인생은 한 번밖에 기회가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생명으로, 단 한 번의 기회로써, 한 번의 삶을
살아간다. 두 생명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했다. 이 세상에서 나만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도 이 세상 모든 것을 너에게 다 준다고 해도 너의 생명과는 바꿀 수
없다고 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 하나밖에 없는 기회를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은 일 회전으로 끝나는 엄숙한 경기이다. 이 회전이나 재 시합은
주어지지 않는다. 운동에는 연습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는 연습 경기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생은 매일 매일이 엄숙한 경기이다. 그리고 매일 매일이 엄숙한 결승전인
것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내 친구가 많아도,
내 친척이 많아도, 나를 지극히 사랑해 주는 아내가 있어도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가야 하는 이 길은 그 누구도 대신 가 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인생은 내가 준비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이지,
어떤 각본에 의해 대역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고
그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져야한다.
인생은 자기 원칙이 지배해야 한다. 인생은 술을 마시며 노는 향락의
놀이터가 아니고, 흥겨운 무도장도 아니며, 허황된 꿈도 아니며, 심심한
드라마도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단순하게 보내는 것도 아니다. 엄숙하고
진지한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저 무의미하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해 버리고 낭비함으로써
불쌍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에서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는 모든
것이 바로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멋진 인생, 행복한 인생, 보람있는 인생, 후회없는 인생, 아름답고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그 지혜와 철학을 먼저 배워야 한다.
요사이 우리 자녀들의 교육을 보자. 컴퓨터, 피아노, 운동, 영어, 기술 등의
여러 가지 학문을 시간을 쪼개 가며 코피가 나오도록 열심히 배우고 있다.
그러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한다. 배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생을 사는 지혜와 슬기를 더 중요하게 배워야 한다.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은 절대 안된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가 매국노가 되든, 살인범이 되든, 배신자가 되든,
투기꾼이 되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인생은 모두가 다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자녀들을 무조건 대학에
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관념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아야 하기에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확고한 인성 교육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교육을 시키면 불구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인성 교육이 되지 않은 상태의 교육은 인간
자체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한탕 주의, 개인 주의, 기회 주의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코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저마다 삶의 길목에 서 있다. 내 앞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나는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인생에는 길잡이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상관이 없다. 바른 인생을 사는 길을 가르쳐 주는 곳이면 된다. 물질과 맹목적
믿음을 요구하는 종교는 피해야 한다. 현실 속에 마음의 편안과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종교를 가져라. 여기에서 인생을 바로 사는 지혜를 배울 수 있고
인생을 보람있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고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철학을 배울 수
있다.
간곡히 부탁하나니 한 번밖에 없는 우리 인생, 걱정 근심없이 멋있게 살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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