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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발견

제7장 우유론

by Healing New 2020. 5. 16.

    ... 때로는 빈둥빈둥 놀며 지낼 필요도 있음을 논한 장


  1. 인간, 즉 유일하게 일하는 동물

  인생의 향연은 그러므로 우리의 눈앞에 있다. 오직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식욕을
느끼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요는 식욕이 당면한 문제이지 향연 그 자체는 아니다.
결국 인간 생활에 관해서 가장 난처한 문제는 인간은 일을 해야 한다는데 과연
그런가 하는 문제, 또 인간이 자신에게 과하고, 문명이 인간에게 과해 온 노동의
분량이 과연 타당한 분량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자연계의 생물은 모두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이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한다. 왜냐하면 문명의 진보에 따라서 의무나
책임이나 두려움이나 구속이나 야심 따위에 사로잡혀서 인생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이러한 것들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 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다.
  지금 나는 여기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창문 저쪽에 보이는 교회의 첨탑 주위를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고 있다. 그러나 비둘기는 점심에 먹을 것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비둘기의 점심보다는 내 점심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 또 내가
먹는 몇 가지 물건 중에는 수천 명이나 되는 노동대중의 노동과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물건을 실어 나르며, 배달하고, 조제하는 등의 고도로 착잡한 조직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짐승보다 먹을 것을 얻기가 힘든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한 마리의 야수가 도회지 안에서 풀려나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을 구하려고 저렇게 아둥바둥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조금이라도 생각을
한다면 이 인간 사회에 대해서 깊은 회의와 곤혹을 느낄 것이다.
  이 야수가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인간은 모든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일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리라. 물레방앗간에서 일하는 소수의 연자매 끄는 말이나 물소를
제외하고는 가축조차도 일할 필요는 없다. 경찰견은 때때로 일이 있을 때에만 일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집을 지키기로 되어 있는 개라 할지라도 대개는 놀고
있으며, 화창한 햇빛이 비치는 곳에서 아침 시간에도 곧잘 잠을 자고 있다. 뽐내기를
잘하는 고양이는 생활을 위해서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몸이 날쌔게
태어났기 때문에 옆집 울타리 따위는 아랑곳 없이 가축이라는 자기의 신분도
잊어버리고 나다니고 싶은 곳은 어디나 나다닌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아둥바둥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인류만이 우리 안에 갇혀
사육되고 있으면서도 먹을 것도 얻어먹지 못하고 문명과 복잡한 사회에 강요되어
일하고, 먹을 것을 위해 골치를 썩여야만 한다. 물론 인간 생활에도 좋은 점이
있기는 있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바 아니다. 지식의 기쁨, 이야기를 주고 받는
즐거움, 연극을 구경할 때 공상하는 재미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 생활은
너무나 복잡해져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활동의 90p가 먹는다는 문제 만으로
차지되어 있다고 하는 근본적 사실만은 여전히 확고부동한 것이다.
  문명이란 주로 먹을 것을 찾는 일이고, 진보란 먹을 것을 얻기가 더욱 곤란해져
가는 일이다. 먹을 것을 얻는 일이 이처럼 곤란하게 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이
오늘날처럼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할 이유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위기는 인간 시회가
지나치게 문명화 되었다는 데에 있다. 먹을 것을 얻는 노동이 너무나도 격심해져서
그 때문에 노동을 하는 동안에 식욕을 잃어버리게 되는 데까지 문명이 와 있다는
데 위험이 있다. 그런데 마침내 그러한 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야수가 보건,
철학자가 보건, 그다지 고마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대도회를 내다보고, 잇대어 늘어선 집의 지붕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놀란다.
참으로 기가 막힌 광경이다. 두서넛의 급수탑이 솟아 있고 건축중인 어음 교환소의
두서너 개의 철근의 광고판 뒷면이 보이고, 그 속에 몇 개의 첨탑이 우뚝 솟아
있으며, 아스팔트의 지붕과 벽돌 건물이 죽 이어져 있고, 모양이나 질서도 없이
네모진 것이며, 뾰죽한 것이며, 깎아 세운 듯한 것 등이 늘어서 있고, 빛이 바랜
더러운 굴뚝이나 빨랫줄이나 안테나의 교차된 선이 그 사이로 여기저기에 보인다.
거리 속을 내려다보면 거기에도 회색이나 아니면 퇴색한 붉은 벽돌집의 담이 죽
이어져 보인다. 조그마하고 컴컴한, 모두 다 같은 모양의 창문이 똑같은 줄을 지어
죽 늘어서 있고 반쯤 열린 창문은 그 절반이 커어튼에 가려 있다. 창틀에는
우유병이라도 놓여 있을 것이다. 그밖의 다른 곳에는 조그마한 싱싱한 꽃을 꽃병에
꽂아 놓아 두었을 것이다. 한 어린이가 개를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지붕
계단 있는 데에 걸터 앉아서 아침마다 조금씩 햇볕을 쬔다. 다시 눈을 들어 바라보면
몇 마일이나 되는 저쪽에서 지붕은 줄을 지어 늘어서 있고 아득히 먼 저쪽 하늘에
보기 흉한 네모진 외곽을 나타내고 있다. 아직도 수많은 급수탑도 있고 벽돌집도
있다.
  실로 인간은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한두 개의 컴컴한 창 뒤에서 어느
가족이나 어떻게 날마다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생활을 위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두서너 개의 창 뒤에서는
비둘기가 제집으로 돌아가듯이 부부는 밤마다 잠자리로 들어가고,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면 아침 차를 마시고 남편은 거리로 나가서 가족을 위해 뾰족한 재주도 없이
빵을 구해 돌아다니고 아내는 죽어라 하고 열심히 끈기있게 일하며, 먼지를 털어내고
좁은 자기집을 말끔히 치운다. 4시나 5시경이 되면 문간 계단이 있는 데에 나가서
이웃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그 사람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조금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기도 한다. 이윽고 밤이 온다. 그러면 녹초가 되도록 지친 몸으로
또다시 잠자리에 들어간다. 이렇게 그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좀더 훌륭한 아파트에서 살며, 좀더 유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방이나 전등갓도 좀더 예술적이다. 모든 것이 보다 더 질서정연하고 깨끗하다! 방도
다소는 넓다. 그저 다소 넓을 뿐이다. 방 일곱 개 짜리 플랫(공동 주택에서 한 가족이
쓰는 같은 층 위에 한 세트의 방)을 세 얻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를 얻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생활이 보다 더
행복해졌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은 돈 걱정이나 빛 걱정은 비교적
적기는 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더욱 귀찮은 분규가 있고, 이혼이 있고,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바람둥이 남편도 많으며, 그 어떤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부부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행복이 어떠니 하는 문제는 전혀 이러한 훌륭한 아파트에 사는
남녀의 소질과 기분에 달려 있다. 실제로 유쾌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말하면 심한 노동 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런 사람들보다는 한층 더
권태를 느끼고 무료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동차도 있고
또 시골에는 별장도 있을 것이다. 오! 시골집, 그것이 곧 구원의 길인가! 그리고 보면
사람들이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우선 엄청난 돈벌이에 마음이 끌려서 도회지로
나가고 싶기 때문이며, 큰 돈을 번 다음에는 또다시 시골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도회지의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거닐 때 미용원이나, 화원이나, 선박
회사가 있는 큰 거리의 뒤에는 약방, 식료품점, 철물점, 이발소, 세탁소, 대중 식당,
신문 잡지의 매점 등이 즐비해 있는 다른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한 시간쯤 더 거닐어 보라. 만일 그것이 대도시라면 여러분은 암만 가도
똑같은 곳에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에는 거리의 모습이 차례로 비칠
뿐으로, 어디까지 가도 여전히 약방, 식료품점, 철물점, 이발소, 세탁소, 대중 식당,
신문 잡지의 매점 등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게에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런 곳에
온 것일까.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세탁소 사람은 이발소와 식당의 급사의 옷을
세탁하고, 식당의 급사는 세탁소 사람과 이발사의 식사를 나르고, 이발사는 세탁소
사람과 급사의 머리를 깎는다. 이것이 문명이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확실히 이들
세탁소 사람이나 이발사나 급사 가운데는 그 일생 동안에 그 일하는 장소에서 단
5리도 다른 곳에 가보지 못한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라는 오락이
하나 있다는 것이 그들게는 천만다행한 일이다. 스크린에는 새도 울고 울창하게
흔들리는 나무도 보인다. 터어키도, 이집트도, 히말라야도, 안데스도, 폭풍우도,
난파선도, 대관식도, 개미도, 송충이도, 사향쥐도, 도마뱀과 지네와의 싸움도, 언덕,
파도, 모래, 구름도 그리고 또 달까지도 모두 스크린 위에 나타난다!
  오, 현명한 인류여, 무서울이만큼 현명한 인류여! 기가 차누나, 머리에 희끗희끗
흰 머리가 섞일 때까지 조금도 쉴새없이 꾸준히 먹기 위해 죽도록 일만 하고, 끝내
논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는 이 문명이야말로 참으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2. 한가로움에 대한 중국인의 소설

  중국인이 위대한 빈들빈들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미국인은 위대한 활동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양극은 서로 칭찬하게 마련이라면 중국식 빈들당이 미국식
활동가를 찬미하는 것처럼, 미국식 활동가는 중국식 빈들당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양자는 이른바 국민적 특질로서 저마다 좋은 점이 있다. 동서가 결국 합류할
것인지 어떨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명료한 사실은, 동서는 점차로 합류해
가고 있다는 것과, 근대 문명이 진보하고 교통편이 증대해 감에 따라 점점 합류의
경향을 띠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중국에 있어서 우리는 이 기계 문명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이 두 형태의 문화, 즉 중국의 옛부터의 인생
철학과는 근대적 기술 문명과를 어떻게 융합시키느냐 하는 방법과 그것을 완성시켜서
어떻게 하면 일종의 살아나가는 방법이라고도 할 만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방법과 그 문제를 구명하는 일일 것이다.
  이 문제는 옛부터 동양 철학의 영향을 받았던 동양인의 생활에 관해 특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무도 장래를 예언할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결국 기계 문명은 급속도로 우리를 몰아세워 한가로운 시대로 접근시키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싫건 좋건 노는 일이 많고 하는 일이 적어지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나 다 환경 여하에 달린 문제로서, 만일 한가함이 눈앞에 매달려 있어서
언제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게 되면 오히려 생각밖에 얻어진 그 한가함을
어떻게 즐기면 되겠는가 하는 방법을 아무래도 생각해야만 될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또 손쉽게 하는 방법도 서둘러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결국 다음 세기에 관해서는 아무도 에언할 수 없다. 앞으로 30년 뒤의 인간 생활을
예언하려고 한다 해도 무모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문명이
급격한 발전을 해나가면 언젠가는 그럭저럭 문명에 지치고 말 때가 올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인간은 물질 문명의 세계에서 얻은 물건을 다시 조사해 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인간 생활의 물질적 조건이 이제보다 좋아져서 질병이 없어지고, 가난이 줄고,
오래 살게 되어 먹을 것이 풍부해질 때가 온다면 현재와 같이 인간이 아둥바둥해야
한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 아래 우리가 놓인다면 그 결과로서
현재보다 더 게으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는 결코 단언할 수 없다.
  오늘날의 미국은 기계 문명에 있어 가장 진보한 나라다. 그리고 기계가 지배하는
미래의 세계는 오늘날의 미국에서 보는 바와 같은 생활형이나 규범의 영향을 띠어
가리라고 세상에서는 생각되어 왔다.
  나는 이에 대하여 이론을 내세우고 싶다. 왜냐하면 미국인의 기질이 앞으로 어떠한
모양으로 바뀌어갈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작 바뀌어가는 국민의
기질로서 말할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저 반 와이크 브룩스의 신간(1936년 출간의 Elowering New England를
가리킨다)에 논의되어 있는 바로는 뉴잉글랜드(미국의 동북 주. 즉 메인, 뉴우햄프셔,
버어몬트, 메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의 총칭으로 미국 문화의 발상지)
시대의 문화가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찌기 꽃처럼 활짝 피었던 뉴우잉글랜드 문화가 전형적인 미국 문화가 아니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저 월트 휘트먼이 그 (민주적 전망)(휘트먼은 이 책
가운데서, 장래 자유로운 남성과 완전한 어머니들이 나타날 것을 지적하고 있다)에서
펴나간 이상이 미국의 민주적 진보의 이상이 아니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현재의 미국으로서는 조금 휴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의미에서 그 황금열(19세기 말의 캘리포니아의 황금열. 이 때문에
뉴우잉글랜드의 문화는 시들게 된다) 때문에 꺾여지고만 미국의 고대 문화(즉 19세기
중엽의 뉴우잉글랜드 문화가 다시 꽃필 때가 온다면 그때야말로 제2의 휘트먼, 제2의
도로우, 제2의 로우웰(1819 __ 1891, 미국의 시인, 비평가)이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때가 오면 아메리카 기질이라는 것은 현재의 그것과는 훨씬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이며, 오히려 에머슨이나 도로우에 매우 가까운 것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인간의 교양이란 본디 한가로움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중국인식 사고 방식에 의하면 한적을 사랑하는 현자가 가장 교양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 된다. 바쁜 생활과 현자의 생활 사이에는 아무래도 철학적인 모순이 있는 것
같다. 현자는 바삐 서두르지 않는다. 바삐 서두르는 인간은 현자의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란 가장 우아하게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중국인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한적한 생활의 기술이며 변화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지 않으련다.
  오히려 옛부터 전해온 중국인의 한적한 생활에 대한 신성한 소망을 북돋우고
중국학자들이나 정도는 낮지만 일반 중국인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그 무애 무우, 한적,
유유자적의 기분(때로는 시적 기분이 되기도 한다)의 원천인 중국 철학에 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영달과 성공을 싫어하고 생활로서의 생활을 강렬히 사랑하는 그러한
중국인적 성격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우선 18세기에 나타난 비교적 이름 없는 저작가 서백향(무명 속에 파묻혀 있으니
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의 말을 빌어 보면, 중국인적 한가 원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시간이 유용함은 그 유용하지 않음에 있다... (시간을 방 안의 마루라고
하면 한가함은 가구를 놓지 않은 부분과 같은 것이다)  한 치 사방의 조그마한 작은
방에 세들어 있는 직업 부인은 방 안을 서성거릴 수도 없기 때문에 누구나 다
불쾌하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월급이 좀 오르면 그 즉시 좀더 넓은 방으로
이사하려고 한다. 그러면 새로 이사한 방에는 싱글베드며 화장대며 파이프가 두 개
달린 가스 장치에 점령되어 빈틈없이 유효하게 쓰여지고 있는 공간 외에 얼마간의
놀고 있는 마루가 있다. 방이 아늑하게 보이는 것은 이 놀고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럭저럭 어떻게든지 이 인생을 살아 나갈 수 있는
것도 생활에 한가함이 있기 때문이다.



    3. 한적생활의 예찬

  중국인이 한적함을 사랑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결합해서 생긴 것이다. 우선
중국인의 기질에서 출발하여 다음은 문학적으로 예찬되었고, 끝으로 철학 속에서
그 타당성을 발견했다. 즉 강렬한 생활애에서 발생하여 역대의 문학적 낭만주의의
저류를 따라서 강화되었고, 끝내는 주로 도교라고 불리는 생활 철학에 의하여 (바르고
현명하다)고 단정된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도교적 인생관을 중국인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중국인의 기질 속에 도교적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한 가지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만 한다. 이미 우리가
한가함의 산물이라고 규정한 한가한 생활의 낭만적 예찬은 흔히 세상에서 말하듯이
부유한 계급을 위한 것은 단연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문제의 진로를
가로막는 터무니 없는 오해인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한적한 생활을 구하고, 또는
할 수 없이 그 생활로 들어간 빈곤하고 때를 만나지 못해 불우하며 청빈한 선비를
위한 것이다.
  중국 문학의 걸작을 읽으면서 청빈한 대철학가가 가난한 선비들에게 소박하고
한적한 생활을 찬미한 시문을 가르치고 있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볼 때, 나는 이들
스승은 그 시문 속에서 강한 개인적 만족과 정신적 위안을 발견하였음에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명성을 얻는 데도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며
또 벼슬길에서 떠남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스승이 남기고 간 그 많은 시문은
과거에 실패한 선비들의 마음을 그 얼마나 위로했겠는가. 또 (시장이 반찬)이라는
격언은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일 수 없었던 불우한 사람들의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해주었으리라. 중국의 청년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은 소동파나 도연명 또는 그
밖의 그들이 싫어하는 유한 지식계급에 속하는 시인들을 비난하지만, 도대체 문학사상
이보다 더 심한 오인은 없다. 생각해 보라. (강상의 청풍이요, 산간의 명월이라) 하고
읊은 소동파, (석로점아의(밤 이슬은 나의 옷자락을 적시고), 계명상수지전(닭이
우노매라 뽕나무가지 위에서)) 하고 읊은 도연명을 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비난한다.
마치 강상의 청풍이나 산간의 명월이나 뽕나무의 닭이 자본 게급의 독점물인 것처럼!
이들 지난날의 위대한 시인들은 농부의 생활 상태에 관해서 논하고 있다는 정도를
지나서 그들 스스로가 직접 가난한 농부 생활을 하였고 그 속에서 평화와 조화를
발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고도의 감수성과 자유인적인 성질을 타고난 중국의
낭만주의자들은 세속적인 재산을 가진 것이 별로 없지만 정감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한 생활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결 같이 관직생활을 싫어하고,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하기를 엄하게 거부하는 태도 속에 그것은 잘 나타나 있다. 한적한
생활이 부유한 사람, 권력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들(미국의 성공자들은 그 얼마나
아둥바둥하는가!)의 특권이라는 것은 실로 가당치 않으며, 중국에서는 이른바 고결한
경지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지는 유럽인이 생각하는 방랑자의 기품이라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호의를 구걸하기에는 너무나도
자존심이 강하고,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남에게 메이지 않고, 자주적이며 세속적인
성공을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지나치게 현명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고결한
정신은 인생에 대한 일종의 초연한 정신에서 오는 것이며, 또 필연적으로 이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 야망이나 어리석은 행위나 부귀와 명성의 유혹을
꿰뚫어보는 능력에서 생긴다. 어쨌든 자기 인생의 영달보다는 마음에 갖추어진 소질을
존중하고 부귀나 명성보다는 정신을 존중하는 이들 고결한 선비들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바에 따라 중국 문예의 최고 이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훌륭하게 소박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세속적 성공을 고고하게 백안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층의 위대한 문인들, 도연명, 소동파, 백낙천, 원중랑, 원매 등은 대개 잠시
관직에 있었으나, 하찮은 일에 머리를 쓰고, 밤낮 머리를 조아리거나 동료 관리들을
보내고 맞는 생활에 그만 진절머리를 내다가 끝내는 깨끗하게 관직 생활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고 현명하게도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원중랑은 소주의 태수직에 있을
때 상사에게 일곱 통의 진정서를 연거푸 내어 1년 내내 변함없는 머리를 조아리는
생활을 탄식하면서, 자유롭고 근심없는 한낱 인간으로 돌아갈 것을 허용해 달라고
간청했다.
  다소 난폭하다고 생각될 만큼 한적한 생활을 찬미하고 있는 한 예는 이들 시인 외의
또한 시인  백옥섬이 스스로 나재당이라 일컬은 서재를 찬미하여 쓴 비문 속에 있다.

  게으르면 노자를 읽지 않는다. 도는 서중에 없음이다.
  게으르면 경도 보지 않는다. 경은 도보다 깊지 못함이라.
  도의 본질은 허에 있고 맑음에 있으며 차가움에 있다.
  그러나 나는 날이 다하도록 바보스러운 마음이니, 또 어디서 허를 구하랴.
  게으르면 시서도 읽지 않는다. 놓으면 시신이 떠남이라.
  게으르면 금도 잡지 않는다. 노래가 현 위에서 죽음이라.
  게으르면 술도 좋아하지 않는다. 강호 스스로 술잔 밖에 있음이라.
  게으르면 장기에도 대하지 않는다. 승패는 판세 밖에 있음이라.
  게으르면 산하도 보지 않는다. 화취는 마음 속에 있음이라.
  게으르면 풍월도 대하지 않는다. 선경은 스스로의 품 속에 있음이라.
  게으르면 속세를 끊는다. 갈건과 모든 것이 내 마음 속에 있음이라.
  게으르면 춘추도 모른다. 천행이 마음 속에 있음이라.
  소나무는 죽으리, 바위는 삭으리, 그러나 나는 나, 영원한 나.
  이 집을 나는 부르리라. 나재당이라고.

  그러므로 한적한 생활을 예찬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 매이지 않고 근심없는 심경,
자연 생활을 마음껏 열렬히 즐기는 것과 언제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시인과
학자들은 모두가 이상야릇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강호객인 두보)이니
(동파거사 소동파)니 (노호일인)이니 (하외각노옹)이니, 그 밖의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데에 돈은 필요하지 않다. 전혀 필요하지 않다. 한적한
생활의 참다운 즐거움은 부유한 계급이 독차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부귀를
가장 냉소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버는 일을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윤택한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생활은 언제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평범한 그날 그날의 생계에 빠지는 것을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노자는
인간의 실생활에 적의를 나타냈다고 해서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일에만 떨어지는 것을
목과하기에는 노자의 인생애는 너무나도 정이 깊은 것이어서 속세의 생활을 버릴 것을
가르친 것이다.
  원래 사랑이 있는 곳에는 질투가 있기 마련이다. 열렬하게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훌륭한 한적한 한때가 남에게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질투심에 차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방랑자에게 언제나 특유한, 품위와 긍지를
보존하고 있어야만 한다. 낚시질을 하는 잠깐 사이도, 업무에 종사하는 몇 시간도,
다같이 신성한 것이어야만 한다. 마치 영국인이 스포츠를 할 때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듯이 일종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과학자가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남이 방해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한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스포츠에 정신을 팔고 노는 사람이 골프
클럽에서 다른 사람들이 주식 시장의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또 상인이 하루에 많은 물건을 팔지 못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쏜살같이 가버리는 봄의 얼마 남지 않은 날을 헤아리고는 봄빛을
찾아 들과 산으로 나가지 못했던 일을 반드시 한탄할 것이다.



    4. 이 지상이 그대 천국

  이 강렬한 인생애가 생명은 반드시 죽는다는 인생의 실상이 마주칠 때 시적인
애조를 띠게 된다.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슬프게도 이 인생의 무상에 눈뜨게
되면 중국의 시인이나 철인들은 보다 더 강하게 보다 더 격렬하게 인생을 즐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 지상의 생명이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라면, 그 생명이 계속되는
한 보다 더 열렬하게 인생을 즐기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헛되이
영원을 바라면 이 지상 생활의 건전한 즐거움이 깨지고 만다. 아아더 키이드 경이
전형적인 중국인다운 느낌으로 말한 다음의 한 마디가 바로 그것이다. (이
지상이야말로 유일한 천국이다. 이 일을 세상 사람들이 나와 더불어 믿는다면 이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점점 노력하게 될 것이다)  소동파는 말하였다.
(인생은 봄꿈이 끝나고 흔적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해서 그는 이 인생을
흠뻑 사랑한 것이다. 중국문학을 읽고 우리가 여러 번 당면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인생의 무상과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감상이다. 중국의 시인이나 철인이
가끔 기꺼이 환락을 다할 때 언제나 그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은 인생의
무상과 속절없음을 느끼는 이와 같은 비애감이다. 이 생각이야말로 만월과 아름다운
꽃을 벗삼고 있는 것을 우리가 바라볼 때 늘 영탄하는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피면
지나니)라는 싯귀에 담겨 있는 비애감이다. 이백의 유명한 시 (뜬 세상은 꿈과도
같으며 환을 이루어 봄이 몇 번이리)가 지어진 것은 춘야도이원에서 잔치를 베풀고
술잔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생자필멸, 즉 인간은 결국 무로 돌아가며 촛불의 불꽃처럼 꺼져 없어지는 것임을
믿는 것은 나로서는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면 마음이
냉정해지고, 비애감까지도 다소 느낀다. 대다수의 사람은 시적인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렇게 믿음으로써 비로소 처세의 결의도 굳어지고, 사려 깊고
진실하게 또는 일정한 체관을 가지고 살아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또한
평화가 있다. 왜냐하면 참된 평화는 최악의 것을 받아들이는 심경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정력의 해발(심리학적인 용어, 자극에 의해 저축된
힘을 발산하는 것)이라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의 시인이나 서민이 생활을 즐길 때에는 환락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잠재의식이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즐거운 연회가 끝났을 때 (천리나 계속되어 장이
서 있는 아무리 번화한 장거리도 언젠가는 쓸쓸해질 때가 온다)고 중국인이 가끔 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인생의 향연은 저 느부갓 네살(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인을 바빌론에 잡아 가둔
왕, B.C 605 __ 572)의 향연이다. 이 세상이 꿈과 같다는 생각은 우리들 이교도에게
어떤 정신적인 것을 불어 넣어 준다. 본디 이교도의 인생관은 송대의 풍경 화가와
매우 비슷한 데가 있어, 이러한 화가들이 신비의 안개 속에 누워 때때로 구름과
안개에 잠긴 산의 경치를 바라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생자필멸이라는
것이 없다면 인생이라는 명제는 하나의 간단한 명제가 되고 만다. 반드시 죽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이 지상에서 살아야 할 일정한 수명이 주어져
있다. 더우기 그것도 겨우 인생칠십 고래회이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만은 주어진
여러 가지 조건 아래에서 되도록 즐겁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자기의 생활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된다.
  본시 유교라는 것에는 현실적인 경향 즉 엄청나게 세속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조오지 산타야나가 말한 바 (동물적 신앙)이라는 것이 다분히 담겨 있는 어떤
종류의 상식, 다시 말해서 인류의 과거는 하등 동물이었다는 상식을 가지고 끈덕지게
인생의 일을 해 나간다.
  다아윈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 동물적 신앙의
덕택으로 인간은 본시 동물계의 일족이라는 총명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은 모두가 동물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본능이 정상적으로
충족되었을 때에만 참된 행복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믿음으로써 이 인생,
본능과 관능의 인생에 집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은 인생의 모든 면의 즐거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물론자인가? 이 문제의 답변은 중국인에게는 매우 곤란한
문제다. 중국인의 정신성은 일종의 물질적, 현세적, 생존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므로
정신과 육체와의 구별을 중국인은 잘 모른다. 물론 중국인은 동물적인 즐거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동물적인 즐거움 그 자체는 관능적인 문제로 정신과 육체의 구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다만 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은 앞
장에서도 논한 바와 같이 영과 육의 두 개의 문을 갖추고 있다. 음악도,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정신 세계를 높여 주는, 인간이 가진 예술 가운데서 가장 영적인
예술이지만 그것은 청각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중국인에게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공감(sympathy)이 음의 교향(symphony)과 어째서 다른지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현실적인 의미에서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애인의 정신과 육체를
구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한 여성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용모의 기하학적
정확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의 몸가짐이나 몸짓을 사랑하고, 그 여자의
표정이나 미소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표정이나 미소가 육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 아무도 대답할 수 없지 않은가.
  인생의 현실성에 관한 이와 같은 중국인의 느낌 속에는 중국인의 인간주의 또는
실제에 있어서 중국인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법의 영향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인의
철학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진리를 안다는 것보다는 인생을 알려고 하는 일에 더욱
열중하고 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형이상학적인 사색 같은 것은 인간이
산다는 일에 대해서는 방해물이며, 또 인간의 지성 속에 생겨난 창백한 반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러한 것들은 말끔히 일소해 버리고 인생 그 자체에만 매달려 언제나
처음이며 동시에 영원한 문제에 자문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므로 서구적 의미의 철학이 중국인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극히 한가한 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유럽의 철학자는 언제나 논리에 열중되어 있고,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이나 지식의 가능성의 문제를 설정하는 인식론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
인생 그 자체를 안다는 문제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고 쓸데없는 것으로, 말하자면 다만 사랑을 구할 뿐 결혼하여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전쟁에도 나가지 않고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는 영국군처럼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독일의 철학자야말로 가장 하찮은 것으로,
그들은 열렬한 연인처럼 진리에 구애는 하지만 일찌기 청혼을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5. 운이란 무엇인가

  한적을 사랑하는 성질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노자 철학은 특수한 공헌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행운이니 불운이니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위대한 노자의 가르침은 행위보다는 무위, 영달보다는 인격, 행동보다는
평정을 강조한 데 있다. 그러나 마음의 평정은 운명의 변동에 조금도 마음이 교란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위대한 노장파 철학자인 열자는 유명한 새옹의 이야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변방인 요새에 사는 사람으로 마술을 잘하는 자가 있었다. 그 말이 까닭없이 달아나
호 나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달려와서 이를 위로 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이것이 어쩌면 갑자기 복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그 뒤 며칠이 지나
그 말이 호나라의 준마를 끌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또다시 와서 이를 축하했다.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이것이 다시 화가 될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집에는 좋은 말이
많고 그 아들이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 사람들이
모두 또다시 몰려와서 이를 위로했다.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이것이 갑자기 복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그런지 1년 뒤 호인이 크게 요새로 침입하니 젊은이들은 다
나가 싸웠다. 요새에서 죽은 사람은 열에 아홉이었다. 그러나 혼자 절름발이가 된
까닭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므로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어
그 변함은 끝이 없다.
  이러한 철학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인생은 다소의 역운에도 참아 나갈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행운을 동반하지 않은 불운은 없다는 것을 믿는 데 있다. 메달
모양으로 인생의 비운에는 언제나 뒷면이 있다. 냉정을 유지하고 막연한 행동이나
공연히 소란을 피우는 것을 싫어하고, 성공 영달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의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에게는 개의할 아무것도 없다)는
철학이 있는 까닭이다. 성공욕은 실패한 두려움의 별명이라고 극히 총명하게 생각해
버리면 성공욕 그것은 소멸되고 만다. 크게 성공하면 할수록 사람은 실의의 경우를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명성에 대한 꿈이 일단 깨지면 커다란 도피의 이로움을 깨닫게
된다. 노자적 견지에서 보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선비란 성공을 성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패를 실패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반대로 거기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겉으로 본 성공이나 실패가 절대로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저 불교의 노장 철학의 다른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불교도의 목표는 일체 무욕이라는 점에 있고 노장 철학자의 그것은 누구나 나에게
아무것도 구하지 말라는 점에 있다. 사회 대중으로부터 아무것도 요구 받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능히 무애무우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을 따서 노장파
철학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인 장자는 너무 뛰어나게 훌륭해지지 말라, 너무
유능해지지 말라, 너무 남의 도움이 되지 말라 하고 경고하고 있다. 돼지가 잡혀 죽어
제단에 오르게 되는 것은 충분히 살이 쪘기 때문이며, 아름다운 새가 제일 먼저
포수의 목표물이 되는 것은 그 아름다운 깃털 때문이다. 장자는 이런 의미에서 무덤을
파내어 시체의 보물을 훔치는 두 사나이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두 사나이는 죽은
사람의 앞 이마를 망치로 때리고 턱뼈를 깨뜨린 다음 이를 부순다. 그것은 모두
어리석게도 입속에 진주를 물린 채 파묻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 방식을
좀더 진전시켜 가면 결론은 아무래도 이렇게 된다. 사람들이여, 어째 마음을 유유하게
갖지 못하는가.



    6. 미국인의 세 가지 결함

  그러므로 (개의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에게는 개의할 아무것도 없다)라는
훌륭한 철학을 갖고 있는 중국인과 미국인과의 사이에는 기묘한 큰 차이가 있다.
인생이란 정말 그와 같이 번거롭고 귀찮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할 만한 것일까. 중국인적 유유철학의 높은 정신성은 이것을 부정한다.
일찌기 내가 본 광고 가운데서 가장 미국 취미가 잘 나타나 있던 것은 어느 기계
회사의 광고였는데 (이만한 정도라면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Narly Rich Is
Not Enough))f라고 대서 특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 퍼센트의 능률을 바란다는 것은
거의 추한 느낌이 든다. 세상 모든 일이 대충 이 정도라면 이상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미국인의 고민인 것이며,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을 다시 개량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인은 이만한 정도라면 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미국인에게는 세 가지의 커다란 결함이 있다. 능률, 정확, 공명성공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야말로 미국인을 현재와 같이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이 미국인으로부터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한적한 생활의 권리를 빼앗고, 유쾌하고 한가롭고 아름다운 대부분의 오후
시간을 사취해 버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비극적 파국이라는 것은 없고, 사물을 완전히 수행한다는 훌륭한 기술
외에 이룩하지 못한 채 남겨둔다는 좀더 훌륭한 기술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체로 우리가 편지의 답장을 쓰는 데 있어서도
너무 지나치게 빨리 써 보내면 그 결과는 전혀 답장을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이 되고
만다. 결국 세상에는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다소 좋은 임명을 놓쳤다
하더라도 그 반면 불쾌한 임명에서 필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편지는 석 달쯤 서랍 속에 넣어 두면 대개 답장을 쓸 만한 일도 없는 것뿐이다. 석 달
뒤 이것을 읽으면 참으로 하찮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며, 일일이
답장을 쓰고 있었다면 꽤 시간을 낭비한 것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정말 죄를 짓는 일이라고 하겠다. 너무 편지만 쓰게 되면 결국
작가는 판매 외교원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며, 대학 교수는 능률이 높은 회사
중역님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우체국에 자주 왕래하는 미국인을
경멸한 도로우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일을 하더라도 솜씨 있게 해치우는 능률 그
자체를 논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인도제 수통 마개보다는 미국제 수통
마개를 믿는다. 왜냐하면 미국제 수통 마개는 물이 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또 인간은 모두 쓸모 있고 능률적이어야 한다느니, 모두
관리가 되어서 권력을 가져야 한다느니, 하고 옛부터 일부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데
대하여 또 다른 사람들은 세상에는 바보가 남아 돌아가고, 언제나 쓸모 있고 바쁘고
권력을 갖고 싶다고 원하고 있으니 세상 일은 그럭저럭 잘 되어 갈 수 있을 것이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기들의 입장을 고집하며 말다툼을 계속하고 있다. 오직
요점은 유유히 행동하는 사람과 아둥바둥 하는 사람과 어느쪽이 현명한가 하는
문제다. 능률을 논란하는 것은 그것이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기 때문이 아니다.
능률은 생활을 즐기는 한가로움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며, 모든 일을 완전하게
수행하고 싶은 나머지 우리의 신경을 닮게 하여 시간을 훔치는 도둑이 되기 때문에
괘씸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편집자는 자기가 편집하는 신문 잡지에 오식이 하나도 없도록 뼈를 깎아
가며 애를 쓴다. 중국의 편집자는 그보다는 현명하다. 독자 스스로 다소의 오식을
발견하여 혼자 회심의 흐뭇함에 취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좀더
철저하다. 중국의 신문 잡지는 연재물을 싣는 것은 좋으나 싣다가 도중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만일 미국에서 그런 짓을 하면 편집자는 그야말로 혼이 나는
판이겠지만 중국에서는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다. 이유는 다만 간단하다.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사가 다리를 놓으려면 세밀하고 정확하게 숫자를
산출하여 양쪽 기슭에서 뻗어나오는 다리가 한복판에서 1인치의 10분의 1도 오차가
없도록 한다. 그러나 두 중국인이 산 양쪽에서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고 하면 양쪽이
다 제각기 파고 말 것이다. 중국인은 굳이 이렇게 믿는 것이다. 터널만 파고 있었다면
양쪽으로부터의 코오스가 어긋난다 해도 그게 무슨 큰 일이란 말인가. 하나가 될 것이
둘이 되었다 하더라도 통로가 둘이 된 것이니 더욱 좋지 않은가. 급하지만 않다면
터널이 둘이거나 하나이거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아무 일 없이 그럭저럭 파기
시작해서 아무 일 없이 그럭저럭 끝내고, 기차가 그 속을 아무 일 없이 그럭저럭
통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중국인은 무언가 일을 하는
데 있어 충분한 시간만 준다면 아주 정확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인은 설계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제나 이 유장한 설계에 따라서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근대 산업 생활의 템포는 이러한 영광스럽고 위대한 유장함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러하 생활 템포는 중국인의 시간 관념과는 달리 시계 만능적인 시간의 관념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인간을 시계로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현장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면 20만 명의 노동자를 부리는
공장 따위가 그 좋은 예다. 20만 명의 노동자가 언제나 바쁘게 공장 문으로 드나드는
굉장한 광경은 그야말로 경탄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야말로 인생을
격심하게 만들며 열병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어느 일정한 장소에 5시
정각에 어김없이 가 있어야 한다면 1시부터 5시까지의 오후는 아무 일도 못하고 만다.
미국의 어른들은 다 학생의 본을 따서 자기 시간을 조절한다. 즉 3시에는 무엇무엇,
5시에는 무엇무엇, 6시 반에는 옷을 갈아입고, 6시 50분에는 택시를 타고, 7시에는
호텔 어느 방으로 들어간다... 이렇다면 정말 살아갈 맛이 나지 않는다.
  이렇듯 미국인은 대개 이러한 슬픈 상태에 이르러 있다. 참으로 그들의 행동은
내일을 위하여 에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주, 아니 다음 달에까지 걸쳐서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3주일간이나 앞일을 지정한다고 하는 따위의 일은 중국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다행히 중국인은 무슨 초대장을 받았을 경우 가겠다고도, 못
가겠다고도 답장을 내지 않아도 괜찮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갈 생각이라면 (출), 안 갈
생각이라면 (결, 다사) 하고 쓰는 것은 괜찮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다만 그저
(밍바이)라고 쓸 뿐이다. 그것은 초대의 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는 뜻이며, 참석하겠습니다 라는 뜻은 아니다.
  미국인이나 유럽 사람이라면 상해를 떠날 때 1938년 4월 19일 오후 3시에 파리의
위원회에 출석하고, 5월 21일 7시 기차로 비엔나에 도착하겠다는 말을 전할 것이다.
그러나 가령 어느 날 오후에 유죄 판결을 내려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형
선고를 그렇게 미리부터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마음에 내킬 때에 도착하여 마음에
내킬 때에 출발하고 자유로이 여행하여 천하에 거리낌없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결국 미국인이 중국인처럼 유유히 생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사업욕과
행동하는 것을 살고 있다는 것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점에 직접 유래하는 것이다.
미술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걸작이라면 그 작품에 품격이 있을 것을 우리는 요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에도 품격이 있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품격이라는 것은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술의 향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조용한 마음가짐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 가는 것을 기다려야만 한다. 미국의
노인 남녀가 오늘날 보는 것처럼 자존심을 획득하고 또 젊은 세대로부터 존경받기
위해서 활동하고 싶어하는 것은 동양인의 입장에 서면 실로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노인이 너무 지나치게 활동하는 것은 오래 되어 이끼가 낀 대사원의 지붕 위에서
재즈를 방송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노인들은 그저 나이를
먹었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노인은 언제나 무엇인가 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중년자들이 유유히 생활할 수 없다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닌데 하물며 늙은
사람에 있어서는 인간성에 위배되는 죄악이다.
  품격이라는 것은 늙어서 이루어진다고 할 만한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품격이 갖추어지기까지는 시일이 필요한 법이다. 그것은 중년자의 얼굴의 아름다운
주름살과 같은 것이다. 그 주름살이야말로 그 사람이 풍기는 품격이 끊임없이
새겨져서 완성된 것이다. 어중이떠중이가 모두 작년 형의 자동차를 버리고 새로운
형의 차로 바꾼다는 생활 방법으로는 품격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물건도 우리 자신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1937년에는 여자나 남자나
1937년 얼굴을 하고 있고, 1938년에는 1938년 얼굴을 하고 있다. 옛 사원이나, 오래된
은이나, 낡아빠진 사전이나 인쇄물을 우리는 귀중히 여기지만 노인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감상한다는 것은 인간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컨대 아름다움이란 늙고,
무르익고, 그을은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예언자다운 환상에 잠기는 일이 있다. 그것은 저 밀레니움(예수 부활
후 1천 년간의 이상 시대)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으로 그때가 오면 과연 그 분주
다사하던 맨해턴 거리의 사람들도 유유히 거리를 거닐 것이며, 미국식
(저돌주의자)들도 동양식의 천천히 걷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꿈꾸는 것이다. 그때에는
미국의 신사는 스커트와 슬리퍼 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을 것이고, 또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브로드웨이의 인도를 한가롭게 걸을 것이다. 반드시 중국인 식으로 양쪽
소매에 손을 찌르고 걸을 필요까지는 없다. 경관은 교차로에서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대할 것이고, 운전수들은 잠깐 차를 세우고 서로 인사를 하면서
길 가운데서 할머니의 안부를 묻기도 한다. 또 자기 가게 앞에서 이를 닦으면서
한가하게 이웃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무엇인가 멀거니
생각하고 있는 학자가 부드러운 책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돛처럼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식당 안의 주식 카운터는 없어질 것이고,
사람들은 자동 음식점의 부드럽고도 얕은 안락 의자에 편한 자세로 유유히 걸터 앉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다방에서 대낮부터 저녁 때까지 멀거니 시간을 보낼
것을 생각할 것이다. 한 잔의 오렌지 주우스를 마시는데 한 시간이나 걸리 것이며,
술도 단숨에 꿀꺽 마셔 버리지 않고, 유쾌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천천히 마시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병원의 환자 접수 명부는 쓰지 않게 되고, 비상 감시원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며 환자는 의사와 철학 이야기를 주고 받을 것이다. 기차는
달팽이 걸음으로 느릿느릿 달릴 것이고, 타고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차를 세워 놓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쳐다보면서 그 기러기의 수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할 것이다.
이러한 맨해턴 거리의 황금 시대가 도저히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좀더 많은 한적한 오후가 있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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