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낙원은 잃어버렸는가
지구상의 무수한 생물 가운데서 모든 식물에는 자연에 대한 (태도)라는 것은 없고,
모든 동물도 또한 사실상 (태도)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데, 인간이라는 한 생물이
있어 이것만이 자기와 자기의 환경을 의식하고 다라서 그 환경에 대해 하나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인간의 예지가 시작된 것은 우주에 회의를 품고
그 비밀을 탐구하고 그 의의를 발견하려고 한데서 비롯한다. 우주에 대한 태도에는
과학적인 것도 있고, 도덕적인 것도 있다. 과학자의 관심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구의
내부와 표피의 화학적인 구조, 지구를 둘러싼 대기의 두께, 대기의 맨 위층에
방사하는 우주선, 구릉이나 암석의 형성, 생명 일반을 규정하는 법칙 따위의
발견이다. 이 과학적인 태도는 도덕적인 태도와 관련은 있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안다는 것과 탐구한다는 것의 순수한 욕구다.
이에 반하여 도덕적 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연과 조화하는 것도 있고,
정복과 복종, 지배와 이용이라는 관계가 되는 것도 있고, 불손한 모멸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이 마지막 태도, 다시 말해서 불손하게도 지구를 모멸하는 태도는 문명, 특히
어느 종류의 종교에서 생긴 것이며 실로 기괴한 산물이다. 그 근원은 (실락원)이라는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는 원시종교 전설의 유물로
지금까지도 상당히 널리 믿어지고 있다.
낙원 상실성이라는 것을 믿을 만한 것인지 어떤지 의문을 품는 사람이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이야기다. 결국 에덴 동산이 얼마나 아름답고
이 우주의 실체가 얼마나 추하다는 것인가. 나는 물으리라. 이브와 아담이 죄를
저지른 뒤 꽃은 피지 않게 되었던가? 단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신은 능금나무를
저주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였던가? 꽃의 빛깔은 생기를 잃고 창백해져야 한다고
결정했던가? 황조나 꾀꼬리나 종달새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던가? 산꼭대기에는
눈이 없어지고 아름다운 호수 위에 빗긴 그림자는 간 곳이 없어졌는가? 새빨간 저녁
해와 무지개며 여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안개는 없어졌는가? 나무 그늘은? 떨어지는
폭포는? 흐르는 맑은 물은? 도대체 누가 (낙원)은 (상실되었다)느니, 오늘날 인간은
추한 우주에서 살고 있다느니 하는 신화를 발명해 낸 것일까? 참으로 인간이야말로
은혜를 저버린 방종한 신의 아들이다.
이 현실 세계가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자연계의 모양, 소리, 향기, 맛과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과의 사이에는 신비롭다고 생각되는 완전한 교감작용이 있다.
우주의 모양, 소리, 향기와 우리의 자각 기관과의 이 관계는 극히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저 볼테르에게 심한 웃음거리가 된 목적론의 논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목적론자가 될 것은 없다. 신은 이 향연에 우리를 초청할지도 모르며
또 초청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향연에 참석하는
것이 중국인의 태도다. 이제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미각을 돋구는데 손을 대지 않고
내버려 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자기가 다른 손님과 마찬가지로 향연에
초대받고 있는가 어떤가를 조사하거나 하는 것은 철학자의 형이상학에 맡겨둘 만한
일이다. 영리한 사람은 음식이 식기 전에 먹어 버린다. 배고픔은 언제나 건전한
상식과 함께 있는 것이다.
아, 지구야말로 참으로 아름답다.
첫째, 낮과 밤, 아침 저녁의 순환이 있다. 뜨거운 낮 뒤에는 서늘한 저녁이 있고,
바쁜 아침을 알리는 조용히 밝아오는 아침이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둘째, 여름과 겨울의 변화. 그 자체가 벌써 다시 없는 것이다. 봄은 여름으로,
가을은 겨울로, 저절로 옮아가는 완전무결한 4철의 모습,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세째, 삼엄하고 숭고한 나무숲이 있다. 여름은 녹음, 겨울은 따뜻한 햇볕.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네째, 달이 바뀌어 감에 따라 꽃은 피고, 열매는 익는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섯째, 구름이 몹시 두껍고 안개가 짙은 날과 하늘이 맑고 청량한 날과의 그때
그때의 변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섯째, 봄의 소나기, 여름의 뇌우, 가을의 상쾌한 소슬바람, 겨울의 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일곱째, 공작과 비둘기와 종달새와 카나리아의 묘한 노래 소리.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덟째, 동물원에 가 보라. 원숭이, 호랑이, 곰, 낙타, 코끼리, 코뿔소, 악어, 소,
말, 개, 고양이, 여우, 다람쥐, 산쥐, 그밖에 생각도 하지 못했던 갖가지 동물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홉째, 홍어, 황새치, 전기뱀장어, 고래, 큰가시고기, 홍합, 전복, 새우, 참새우,
거북, 그밖에 상상에 넘치는 다채로운 종류의 물고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열째, 장대한 삼목의 우람한 줄기, 불을 뿜는 화산, 웅대한 동굴, 장엄한
산꼭대기, 들쑥날쑥한 언덕, 고요한 호수,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 새파란 둑길.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각자의 미각을 돋구는 메뉴는 실제로 끝이 없다.
가장 영리한 유일한 방법은 우선 몸을 일으켜 향연에 참석하여 인생의 단조로움을
한탄하지 말 것이다.
2. 두 중국 부인
자연을 감상하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어서, 사람의 기분과 개성에 좌우되는 수가
많다. 그래서 다른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그 기교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솟아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하나의 나무, 하나하나의 바위,
또 어느 특정한 때의 하나하나의 경치를 감상하기란 어렵다. 어떠한 경치라도
정확하게 같은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칙을 세우기도 어렵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에게서 배우지 않더라도 능히 자연을 즐기는 길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해브룩 엘리스와 반 데르 벨레는 부부간의 사랑의 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매우 현명하게 본 것 같다. ... 부부간의 사랑의 기술에서 어떤
것은 허용되고 어떤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또는 어떤 것이 쾌미가 있고 어떤 것이
쾌미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법칙으로 규정지을 것이 못 된다. ... 자연을 감상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연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길은 아마도 예술적 기질을 지닌
사람들의 생애를 연구하는 일일 것이다. 대자연에 대한 감회, 일년 전에 본 아름다운
산수에 대한 동경, 어딘가를 찾고 싶다는 급작스러운 소망, 이러한 것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떠오른다. 예술적 기질을 지닌 사람은 가는 곳마다 그것을
발휘하므로 진정하게 자연을 즐기는 문인은 이야기 줄거리나 구상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눈 경치나 봄 밤의 정취를 묘사하는 데 몰두한다.
저널리스트들이나 정치가들의 자서전에는 대개 회상록이 많이 실려져 있지만 문인의
자서전은 유쾌한 하룻밤의 회상이라든가, 여러 벗과 함께 어느 골짜기에서 놀던 때의
추억이 주로 담겨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R.키플링(1865 __ 1936, 영국의 작가,
시인)이나 G.K.체스터튼(1874 __ 1936, 영국의 작가이며 비평가)의 자서전은 뜻밖에
실망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생애의 중요한 일화가 어째서 그렇게도 중요시되고
있는 것일까?
인간, 인간, 인간, 가는 곳마다 인간 뿐이고, 꽃이며 새며 산이며 개울의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중국 문인의 회상록이나 서한은 이러한 점에서 그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
호수 위에서 놀던 하룻밤 이야기를 친구에게 편지로 써 보내기도 하고, 또 참으로
유쾌했던 그날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것을 자서전 속에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어 있다. 특히 중국의 문인은 적어도 그 몇 사람인가는 자기의 결혼 생활의 추억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었다. 그 중에서도 모벽강의 (영매암억어), 심복의
(부생육기) 및 장탄의 (추등쇄억)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처음의 두 저서는 처첩이
죽은 뒤에 남편이 쓴 것이며, 맨 끝의 것은 늙은 장탄이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쓴 것이다.
우선 자기의 아내인 추부를 여주인공으로 한 (추등쇄억)의 몇 절을 여기에
발췌하고, 다음은 운을 여주인공으로 한 (부생육기)의 일절을 소개하겠다. 이 두
부인은 모두 특별한 교육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훌륭한 시인도 아니었지만 모두
솔직한 기질의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느니, 훌륭한 시인이
아니라느니 하는 것들은 문제가 아니다. 대체로 인간은 불후의 명시를 지으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정취 깊은 한때와 그때의 자기의 기분을 기록하거나 자연을
관상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만 시작을 익혀야 할 것이다.
A. 추부
추부는 나에게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수명은 길어야 백 년 밖에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 백 년도 반은 잠과
꿈으로 보내고, 반은 병과 슬픔으로 보내고, 또 그 반은 요람과 노쇠 속에서
보냅니다. 남은 것은 겨우 1할이나 2할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들처럼
연약한 체질인 사람은 그 백 년의 수명조차 바랄 수 없습니다)
중추 8월의 달 밝은 하룻밤, 추부는 젊은 여종에게 금을 안고 따르게 하여 서호의
연을 헤치고 작은 배를 띄웠다. 나는 그때 서계에서 돌아오는 도중이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추부가 뱃놀이에 나갔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곧 수박 몇 개를 사들고 그
뒤를 쫓았다. 우리는 소제 제2교에서 만났다. 추부는 때마침 (한궁추원곡)이라는
서글픈 곡을 뜯고 있었다. 나는 장의를 걷어 올리고 앉아서 그 곡을 귀기울여
들었다. 때마침 주위의 산들은 저녁 안개에 싸이고 별과 달빛이 수면에 비치면서
여러 가지 풍악 소리가 은은히 울려왔다. 허공을 오고가는 바람소리일까, 혹은
경옥이 울리는 소리일까,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작은 배의 뱃머리는 벌써 근의원
남쪽 둑에 닿았다. 그 길로 우리는 여승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백운암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에 여승들은 새로 딴 연밥으로
국을 끓여 주었다. 연밥의 빛이라든가 향기라든가는 참으로 훌륭한 것으로 뱃속으로
스며들게 하기에 족하였다. 고기나 기름진 음식의 맛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조금 뒤
그곳을 떠나 단가교 옆에 배를 대고 땅 위에 참대 돛자리를 펴고 앉아서 장시간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도회지의 소음은 파리 소리처럼
오히려 귀찮은 느낌이 들었다. ... 그렁지렁 하는 동안에 어느새 하늘의 별들은
하나씩 둘씩 빛을 잃어 듬성해지고 호수는 부옇게 흰빛으로 싸이고 말았다. 거리의
성벽 위에서 북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도 밤도 벌써 4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금을 거두어 들고 작은 배를 저어 집으로 돌아왔다.
추부가 심은 파초는 벌써 커다란 잎이 피어, 발 저편에서 녹음을 던져주고 있다.
베개에 기대어 가을비가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까 적적하여 단장의
느낌이었다.
나는 어느날 한 잎의 나뭇잎에 3행의 시를 장난삼아 썼다.
누가 부지런하여 파초를 심었던가?
아침에 비가 적적하게 오고
저녁에 비가 적적하게 오누나!
그 다음날, 이러한 3행의 시가 그 뒤에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쓸쓸히 애태우는 그대의 마음!
파초를 심은 마음,
파포를 원망하는도다.
여자 솜씨의 아름다운 글씨, 틀림없는 추부의 희필임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
싯구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어느날 밤, 창 밖에는 비바람 소리가 들리고 잠자리에는 벌써 서늘한 가을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추부는 잠옷으로 갈아 입으려는 참이고, 나는 그 옆에 앉아서 그리기
시작한 백화도첩을 그리고 있었다. 마침 그때 몇 개의 물든 누런 잎이 나풀나풀
창문으로 날아들어 사뿐히 침상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추부는 거울을
돌아보고 이러한 시를 읊었다.
어제는 오늘보다 더 좋은 날,
올해는 작년보다 늙어가는 이 내 몸.
나는 추부를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백수를 다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서로가 다른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겨를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화필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밤이 점점 깊어 감에 따라 추부는
무언가 마시고 싶다고 한다. 살펴보니 아궁이에는 벌써 불이 꺼진 지 오래고,
여종들은 모두 머리를 수그리고 잠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책상 위의 등잔을 들어다
조그마한 찻주전자 밑에 놓고, 그녀에게 연밥 끓인 것을 한 잔 데워 주었다. 추부는
10년 전부터 폐를 앓고 있다. 늦가을에는 꼭 기침을 하여 높은 베개로 몸을 받치지
않고는 깊이 잠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는 다른 해보다도 튼튼하여 밤늦게까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일이 많았다. 아마 치료와 자양이 좋았던 모양이다.
온몸에 눈이 날리고, 그 속에 매화가 피어 있는 옷을 나는 추부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 옷을 입은 모습을 좀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니 인간 세계에 홀로 서 있는
매화 선녀처럼 보였다. 늦은 봄 어느날 추부가 녹색 옷소매를 팔랑거리며 노대 위에
나가 있노라니 동풍의 계절이 다 지나간 줄도 모르는 나비가 그 주변을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작년에는 제비가 예년보다 늦게 돌아왔다. 제비가 왔을 때는 발 밖의 복숭아꽃이
벌써 절반이나 지고 있었다. 어느날 제비 둥지에서 진흙이 떨어진 줄로만 알았더니,
제비 새끼 한 마리가 땅에 떨어졌다. 고양이한테 잡아 먹히기라도 하면 큰 일이라고
생각한 추부는 얼른 그것을 집어 다시 제비 둥지에 올려 주고 둥지를 참대로 받쳐
주었다. 올해는 작년과 똑같이 제비 떼가 다시 돌아와서 집 둘레를 재재거리며
날아 다닌다. 이 제비들도 작년에 새끼를 구해준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추부는 바둑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다지 잘 두는 편은 못된다. 그녀는 밤마다
(지담)이라는 놀이를 하자고 졸라 때로는 새벽까지 계속되는 일도 있었다. 나는
장난삼아 죽택의 문장을 인용하여 말했다.
(돈던지기나 풀잎따기 놀이에서 임자는 두 번 다 졌으니 그럼 오늘밤은 나에게 뭘
주지?) 그러면 추부는 내 말을 받아, (내개 못 이긴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실 거예요.
이 패옥의 범을 걸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바둑을 두기 시작했는데, 한 이삼 십 수 놓자 벌써 그녀의 형체는
점점 불리하게 되어갈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아기 고양이를 바둑판 위로
집어 던져 바둑판을 흐트러 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임자는 자기가
양귀비인줄 아는가 보군) 하고 나는 말했다(양귀비는 현종 황제에게 똑같은 짓을
하였다) 그녀는 잠잠히 말이 없었다. 다만 은촛대의 불빛은 복숭아 꽃빛으로 물든
그녀의 뺨을 비쳐주고 있었다. 그 후로는 우리는 다시는 내기를 하지 않았다.
호포천 옆에 나지막히 바위 위에 가지를 뻗고 있는 몇 포기인가의 강남차가 있다.
꽃이 필 무렵에는 노랑꽃이 돌층계를 덮어, 그 향기를 맡고 있으면 마치 선향에서
노는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꽃이 좋아서 곧잘 그 아래에서 차를 끓이곤 했다. 그녀는 꽃을
꺾어서 머리에 꽂았다. 때로는 늘어진 가지가 머리에 걸리기도 하여 모처럼 곱게
빗은 머리를 흐트려 버릴 수도 있었다. 나는 그 머리를 가려서 샘물로 추켜 가지런히
해 주었다. 돌아올 때는 꽃가지 몇 가지를 집 사람들에게 선물로 꺾어서 사람들에게
새 가을의 소식을 전하려고 수레 뒤에 달고 길을 달렸다.
B. 사랑스러운 여성 운
(부생유기)에는 중국의 어느 무명 화가와 그의 아내 운이라는 여성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회상기가 있다. 두 사람 다 단순한 예술가다운 기질의 인물로서 적어도
그들에게 찾아드는 행복이라면 어떠한 것이든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의
필치는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이 운이라는 여성은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생각된다. 두 사람의 생활은 비참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매우 명랑한 생활이었다.
그것도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명랑함이었다. 자연이 어떻게 하여 두 사람의 정신적
정험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제부터
드는 3장은 그 모두가 명절인 7월 7석과 7월 보름인 백중날을 이 두 남녀가 어떻게
즐겼으며, 또 소주에서의 한여름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기술한 것이다.
그 해(1780)의 7월 7일 칠석날 밤에 (아취헌)에서 함께 직녀성에게 예배하려고
운은 향과 초와 수박과 그 밖에 여러 가지 과일을 마련했다. 나는
(원생생세세위부부)라는 명을 새긴 인을 두 개 팠다. 그것은 우리들 사이에 주고
받는 편지에 쓰려고 새긴 것으로, 나는 주문으로 하고, 운은 백문으로 했다. 그날 밤
달은 아름답게 빛나고, 물굽이 저 아래를 굽어보니 잔물결이 비단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얇은 비단을 몸에 걸치고, 손에 작은 부채를 들고 강을 굽어보는
창가에 둘이 나란히 걸터앉았다.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은 갖가지 모습으로 변하면서
고요히 움직이고 있다. 운은 자못 흥겨운 듯이
(저 달은 이 세상 어디서 보나 같겠지요. 우리들처럼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오늘 밤 저 달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나는 이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음, 그야 저녁 바람을 쏘이며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겠지. 또한 그들의
안방에 들어 앉아 구름을 바라보며 시취에 젖어 있는 총며안 부인들도 많겠지.
그러나 부부가 함께 달을 바라보고 있을 때 구름이 그들의 화제가 되리라곤 난 거의
생각되지 않아)
얼마 지난 뒤 마침내 촛불은 꺼지고 달마저 기울어, 우리는 공양한 과일을 들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7월 보름날은 귀절이다. 운은 초촐한 음식을 장만하여 달을 벗하여 둘이서
마시려는 생각인 듯했지만 밤이 되고 보니 하늘은 갑자기 검은 구름으로 덮이고
말았다. 운은 이맛살을 지푸리며 초연히 말했다.
(우리가 둘 다 백발이 되도록 함께 사는 것이 신령님의 뜻이라면 달님은 반드시
또다시 나와 주실거예요)
나로서도 매우 실망되었다. 강 저쪽을 바라보니 무수히 많은 촛불처럼 반딧불이
떼를 지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벗들과 여뀌 사이를 누비며 불을 켰다 껐다 한다.
우리는 곧 연구 놀이를 시작했다. 이것은 서로 각자가 두 줄씩 시를 지어 뒤를
이어가는 놀이인데, 첫줄에서 상대편이 일으킨 구를 맺고, 둘째 줄에서 딴 구를
일으켜 상대편에게 뒤를 잇게 한다. 이렇게 몇 연을 계속하는 동안에 오래 끌면
끌수록 점점 형편없는 것이 나오게 되어 들판에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 되고 만다.
이쯤 되면 운은 내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지러지게 웃어대기도 하고 매어 달리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운의 머리에 꽂은 재스민 향기가 코를 찔렀다. 나는 운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이렇게 농조로 말했다.
(재스민은 진주처럼 둥글기 때문에 여자들의 머리 장식용으로 쓰이는 줄 알았는데,
여자의 머리와 분 냄새에 섞일 때 이렇게도 향기가 좋아지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소. 이런 향기가 나니 공양한 불수감 따위는 어림도 없겠구려)
그러자 운은 웃음을 뚝 그치고 말했다.
(불수감은 향중 군자랍니다. 향기가 어찌나 그윽한지 코로 느끼지 못할 정도예요.
그렇지만 그 향기의 일부를 다른 데서 빌어 오기 때문에 향중 소인이지요. 향기가
좋기는 하지만 재스민은 사철 생글거리며 아첨하는 사람 같은 냄새가 날 뿐인걸요)
(그럼 왜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친하는 거요?)
하고 내가 물은즉 운이 대답하기를,
(저는 군자가 속인을 사랑하는 그 점이 좋아요)
이런 식으로 말을 주고 받는 동안에 벌써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올려다보니
하늘을 덮었던 구름은 어느새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수레바퀴처럼 둥근 보름달이
중천에 나와 있으므로 우리는 매우 기뻤다. 그래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채 석 잔도 마시기 전에 갑자기 다리 밑에서 누군지 물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우리는 창문 너머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으나
습지를 달리는 오리 소리가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강물은 거울처럼
잔잔했다. 창랑정 옆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운이 큰 겁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 이야기는 아예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그러자 운은 한숨을 쉬면서 (아아! 저 소린 어디서 오는 걸까요?) 하고 말한다.
그래서 허둥지둥 창문을 닫고 술병을 방 안으로 옮겼다.
그때 등잔불은 콩알만하게 작아지고 창문에 친 커어튼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우리는 끊임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불을 끄고 침상 안으로 들어갔지만 운은
벌써 열이 높아 몸이 더웠다. 얼마 뒤에 나도 열이 나기 시작하여 우리 두 사람의
병은 20일이나 계속되었다. 행운의 술잔이 넘치면 재난이 온다는 옛말은 정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 인간이 백년 해로를 할 수 없다는 하나의 전조이기도 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넘칠 듯한 사랑으로 빛나며 매력과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장구로 엮어져 있지만, 다음에 인용하는 1절은 그들의 여름의 더위를 덜어 잊게 한
회상을 기록한 것이다.
창미 거리로 이사한 뒤 우리 둘의 규방을 (빈향각)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운의
이름과 아내를 언제나 손님처럼 존경하자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이 집은
담이 너무 높고 뜰이 너무 좁아서 그 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 뒤에는
서재로 가는 딴 채가 있었다. 딴 채 창문으로는 아주 황폐해진 육씨네 정원이
내다보였다. 운의 생각은 아직도 창랑정의 아름다운 경치 위로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그 무렵, 금모교의 동쪽이자 경거리 북쪽에 살고 있는 어느 농사 짓는 노파가
있었다. 작은 오두막 집 둘레는 온통 채소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버들가지로 엮은
문이 달려 있었다. 문 밖에는 한 30평 쯤 됨직한 연못이 있고 연못 둘레는 가득히
나무로 덮인 황무지였다... 오두막집 저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깨진 기왓장을
쌓아올린 더미가 있고, 그 위에 올라서면 주위의 경치가 한 눈에 보인다. 그 주변은
가득히 풀이 무성한 들판으로 되어 있다. 언젠가 그 노파가 그 오두막집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운은 언제나 그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 그래서 다음날 나도 그곳에 가보았더니 그 오두막집의 간수는 단지 두 간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넷으로 간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미닫이 창문이니 참대 침상이니
모두 서늘하게 기분이 좋아서 아주 살기에 편해 보이는 집이었다.
단 한 채 뿐인 이웃은 가꾼 채소를 시장에 팔아서 살고 있는 늙은 부부였다.
우리가 한 해 여름을 그곳에서 보낼 작정이라는 것을 안 그들은 연못에서 잡은
고기며 자기네 밭에서 가꾼 채소를 가지고 찾아오곤 했다. 우리는 그 값을 주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도무지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운이 그들에게 각기 신을
한 켤례씩 만들어 주었더니 그들도 이것만은 거절할 수가 없어 마침내 받아 주었다.
그때는 마침 온갖 나무들이 땅 위에 녹음을 던지는 7월이었다. 여름의 산들바람은
연못 위를 스치고 매미는 온종일 시그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이웃 노인이 우리에게
낚싯대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잘 나무 그늘에 앉아 낚시질을 하곤
하였다. 해질 무렵이 되면 둘이 기와 더미에 올라 저녁놀을 바라보기도 하고, 흥이
날 때엔 시를 짓기도 했다. 어느 때에는 이런 시를 지은 일도 있었다.
수운은 떨어지는 해를 삼키고
궁월은 흐르는 별을 쏘더라.
한참 뒤 달은 그림자를 수면에 떨구고 뭇벌레는 사방에서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참대 침상을 생울타리 가까이 끌어내어 걸터앉기도 하고 눕기도 했다. 그런 때
노파는 술 안주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달 아래에서 조촐한
주연을 즐기는 것이다. 목욕을 한 뒤에 여름 신을 끌고 손에 부채를 들고 거기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노인이 말하는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한밤이 가까와
잠자리에 들려고 집에 돌아오면 온몸은 기분좋게 서늘해져서 도시에서 산다는 것을
거의 잊어버릴 정도였다.
어떤 때는 이웃집 노인에게 부탁하여 생울타리 옆에 국화를 심게 하였다. 9월이
되어 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 운과 함께 다시 열흘 동안을 그곳에 머물렀다. 나의
어머니도 역시 기뻐하시며 그곳을 찾아주셨다. 그래서 축국연을 열게 되어 함께
국화 옆에서 게를 먹으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곳의 생활이 마음에 들어 버린 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꼭 여기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짓기로 해요. 땅을 한 열
이랑쯤 사서 집 둘레에 먹을 채소와 수박을 심도록 해요. 당신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수를 놓으면, 술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시를 지을 돈은 모자라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검소한 옷을 입고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가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아도 정말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진심으로 그 말에 찬성했다. 지금의 내 신분이라면 집 한 채쯤은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알아줄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는 없다. 아아, 이것이
인생인가!
3. 암석과 수목에 대하여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나로선 알 수 없다. 네모 반듯한 집을 짓고,
그것을 한 줄로 차례로 늘어놓고는 나무도 없는 똑바른 길을 만들어 나간다.
구부러진 길이나 옛날식 집은 이미 없어지고, 정원에 우물이 있는 집은 어디를 보나
찾을 길이 없다. 도시 한 복판에 내 사사로운 정원이 있다고 해도 그러한 것은
도리어 꼴불견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에서 자연을 쫓아내 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붕이 없는 집에서
살고 있다. 건물의 실용적 방면에 대해서만 까다롭게 늘어놓는 바람에 건축업자들도
넌더리를 내어 실용 이외의 일은 대강 아무렇게 해치워 버린다. 지붕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다. 옛날 모양대로 그냥 내버려 두고 만다. 오늘날 일반
건축물을 물건에 비한다면 나무토막 쌓기 놀이라고 할까. 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아이가 다 쌓아 올리기도 전에 그만 싫증이 나서 뚜껑도 해 덮지 않고 미완성인 채로
팽개쳐 두었다. 현대 문명인에게 자연의 정신은 완전히 떠나 버리고 말았다.
나무까지도 문명화하려는 모양이다. 큰 거리에 나무라도 심으려고 하면 우선 나무에
번호를 달고 소독을 하고 가지나 잎을 자르고 사람의 머리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양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동그라미나 별 모양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모양으로 꽃을 심는 일은 흔히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해서 심은 꽃이 조금이라도 줄이 흐트러지거나 하면
마치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의 생도들이 보조를 흐트러뜨린 것을 보았을 때처럼
이맛살을 지푸리고 당장 가위를 댄다. 베르사이유 정원에는 원추형으로 나뭇가지를
다듬은 한 쌍의 나무가 완전한 원형이나 직선형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다. 인간 세상의 영광과 권력이란 이런 것인가. 제복을 입은
병사처럼 나무를 훈련하는 인간의 능력이란 이런 것인가. 만일 한 쌍의 나무 중의 한
쪽이 너무 자라기라도 하면 그것만으로 균형과 영광과 권력이 손상된 것처럼 곧
머리를 잘라 버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래서 요즘은 자연을 회복하여 가정 안에 되찾으려는 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울적한 이야기다. 흙을 떠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처지로는 제 아무리 예술적 재능에
뛰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돈이 있어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얻었다 하더라도 작은 풀밭이나 우물이나 참대밭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모든 것이 다 잘못되어 있다. 이 정도까지 철저하게 잘못되었다면 이제는 다시
회복할 수가 없다. 높다란 마천루나 밤에 불 켜진 창문의 행렬 외에 관상할 만한
것이 어디에 남아 있는가. 마천루나 불 켜진 창문의 행렬을 우러러보면 인간은 더욱
그 문명의 힘을 자만하게 되어,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작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가망이 없는 것으로서 포기해
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게 땅을, 더우기 충분한 땅을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유는 어떻든 인간에게서 땅을 빼앗아 버리는 문명은 잘못되어 있다. 그래서 장래의
문명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1에이커의 땅을 소유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우선 무엇이든지 해내기 시작할 것이다. 나무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고, 돌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우선 주의하여 잘 자란 나무가 있는 땅을 선택할 것이다. 잘
자란 나무가 없다면 버드나무나 참대처럼 빨리 자라는 나무를 심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를 새장에서 기르지 않아도 된다. 저절로 새가 모여 든다. 더욱 더 주의하여
가까운 곳에 개구리나 또 될 수 있다면 도마뱀이나 거미 따위도 살 수 있도록 손질을
한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유리 상자에 넣은 자연이 아니라 천연적인 자연
그대로를 연구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오는 모양을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보스턴의 (선량한 가정)의 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과 번식에 대한 탄식할 만한 무지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도마뱀과 거미와의
싸움을 관찰하는 재미도 맛볼 수 있을 것이고, 진흙투성이가 되는 재미도 맛볼 수가
있을 것이다.
바위에 대한 중국인의 정감에 관해서는 이미 앞의 절에서 조금 말해 두었다. 그
설명에서 중국의 풍경화가가 바위로 된 산봉우리를 사랑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기초적인 해설에 불과하여, 돌로 만든 동산이나
암석 일반에 대한 중국인의 기호를 설명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바위는
거대하고 단단하며 유구함을 연상케 해 준다는 것이 그 근본적인 생각이다. 바위는
말이 없고, 움직이지 않으며 대영웅과 같은 굳센 성품을 지니고 있다. 속세를 떠난
학자와 같이 고고 초연한 기풍을 지니고 있다. 바위는 또 그 어느 것이나 고색이
창연하다. 그런데 중국인은 무엇이든지 옛것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다. 특히
예술적으로 보면 바위는 위대하고 장중하며 기이하고 기괴하다. 더우기 또 (위)라는
느낌이 든다. 이 말은 (험)에 통하는 말이지만 도저히 그 진의를 번역해 낼 수가
없다. 지상 3백척, 깎아지른 듯이 솟은 절벽은 (위)를 연상케 하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찰해야겠다.
날마다 산을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므로 바위를 가정에 가져다 놓을 필요가 생기게
된다. 바위 동산이나 석굴은 중국을 두루 돌아다닌 유럽인의 이해와 감상은
곤란하겠지만 역시 기초, (위), 장중한 바위의 산봉우리가 이어진 모습을 본뜨려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유럽인을 나무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위 동산이나 암굴의 대부분은 터무니 없는 취미로 만들어져서, 자연의 웅대하고도
장중한 정취가 옮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공적인 석굴은 몇 개의 돌을 시멘트로
이어 붙였다. 마치 시멘트로 만든 구경거리다. 참으로 예술적인 축산은 회화의
구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인공으로 된 암석 세공의 예술적 감상과 풍경화 중의 바위산의 예술적 감상과의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대의 문인 두관이 바위에 관한 (운림석보)라는 책을
저술하고 있고, 또 송대의 화가 미불이 연석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점은 능히 수긍이 갈 것이다. 이 책에는 축산에 쓰이는 각지의 바위 수백 종의
성질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있어 이 위대한 송대 화가의 시대에 축산술이 벌써
고도로 발달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산꼭대기의 웅대한 바위를 감상함과 병행하여 그것과는 다른 입장에서 정원석을
감상하는 일이 발달했으며, 바위의 빛, 촉감, 겉보기, 결, 때로는 두드려 보았을
때의 그 음색 등을 까다롭게 따지게 되었다. 바위가 작으면 작을수록 촉감과 돌결의
색깔을 까다롭게 따졌다. 이 방면의 발전을 크게 조장한 것은 가장 좋은 질의
연석이나 인재를 수집하는 도락이었다. 이 두 가지 물건은 중국 문인의 일상
생활과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아치, 촉감, 명암, 농담이 가장 큰 요점이
되었다. 후세에 나타난 돌이며 경옥이며 비취로 만든 담배갑에 있어서도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고급 인재나 담뱃갑 중에는 육칠 백 달러나 하는 것도 있었다.
집이나 정원용 석재의 효용을 철저하게 감상하려면 중국 서도까지 올라갈 필요성이
있다. 대체로 서도는 추상 세계의 리듬과 선과 구성의 연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로 좋은 돌은 장중함과 초탈함을 연상시켜 주는 것이어야겠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선이라 해도 직선이니 각이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선의 기초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올드 보이)인
노자는 그의 (도덕경) 속에서 (불각의 바위)라는 말을 언제나 강조하고 있다. 자연을
너무 부질없이 휘젓지 말라. 가장 좋은 예술품은 최대의 시나 문장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인공적인 흔적도 없이 굽이치는 냇물이나 뜬구름처럼 자연스러워 중국 문예
비평가가 가끔 말하듯이 (도끼나 끌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그대로 예술 전분야에 적응한다. 불규칙의 아름다움, 리듬과 움직임과 표정을
암시하는 선의 아름다움, 그 점에 감상의 대상이 있다. 중국 상류층인 사람의
서재에서 걸상으로 혹투성이의 떡갈나무 뿌리가 쓰여지는 수가 때로 있는데, 이러한
것을 소중히 하는 심리도 위에서 설명한 심리와 똑같은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정원에서 보게 되는 축산의 대부분은 자연 그대로의 돌로 되어
있다. 높이가 10피이트, 15피이트나 되고, 위인처럼 초연하게 고립하고 있는 나무
껍질로 된 화석도 있고, 호수나 동굴에서 발견된, 대개 구멍투성이고 외모가 극히
불규칙하게 생긴 것도 있다. 어느 문인의 말에 의하면 구멍이 지나치게 둥근
경우에는 잔돌을 끼워 넣어 원을 일그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상해나 소주 근방의 축산은 대개 태호의 돌로 되어 있어, 전시대의 바다 물결의
흔적이 보인다. 이런 바위는 호수에서 파낸다. 그 선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마음에 들도록 끌로 가공하여 다시 호수에 넣어 일 이 년 내버려 둔다.
물의 작용으로 끌 자국을 없애려는 것이다.
나무에 대한 감상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고 또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주위에 나무가 없는 집은 벌거벗은 남녀와 같다. 나무와 집과의 차이는, 집은
세워지는 것이지만 나무는 자란다는 점이다. 무엇이나 성장하는 것은 세워지는
것보다 보기에 더 아름다운 법이다.
실제상의 편의를 생각해서 벽은 수직으로 하고, 마루는 수평으로 만들게 되어
있지만, 벽은 고사하고라도 마루에 관한 한 여러 가지 방의 마루를 각기 다른
수평상에 두어서는 안된다는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직선과
정방형으로 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직선과 정방형은 나무가 여기에
사용됨으로써 비로소 그 무미한 맛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색채 계획에 있어서도
우리는 집을 녹색으로 칠하는 일은 전혀 없지만, 자연은 그렇게 하고 있다. 사실
나무는 모두 녹색이다.
무수히 많은 종류의 나무 중에서 어떤 종류의 나무의 특수한 선이나 윤곽에는
화제가 될 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한 나무는 특히 미적인 감흥을 일으켜 준다.
중국의 비평가들이나 시인들은 그렇게 느끼게 되었다. 즉 나무는 어느 것이나
아름답지만 어떤 종류의 나무는 특별한 표정이며 힘이며 기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나무는 많은 나무 가운데서 특히 선발되어 일정한 느낌과
결부되었다. 평범한 감람나무에는 소나무에서 보는 바와 같은 초연한 기품이 없고,
버들은 우아하지만 (장중)이니 (영감적)이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언제나 소수의
나무만이 그림이 되고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소나무와 매화나무와 대나무, 버드나무 등이며, 소나무는 그 장대한 기품 때문에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매화나무는 그 낭만적인 기품 때문에 사랑을 받으며,
대나무는 선이 청초하고 가정적인 기품 때문에 진귀하고, 버드나무는 가냘프고 고운
아름다운 사람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기품 때문에 모두가 좋아한다.
소나무가 주는 감흥은 그 중에서도 가장 특기해야만 할 것으로, 가장 시적인
의의가 두터울 것이다. 소나무에는 어느 나무보다도 숭고하고 단정한 기품이
엿보인다. 나무에는 숭고한 것도 있고 야비한 것도 있으며, 장대한 기품을 자랑하는
것도 있고 평범한 기품을 지니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매튜 아놀드가 웅대한 호머의
시풍을 말하듯이 중국의 예술가는 소나무에 갖추어진 늙고 큰 품격을 찬미한다. 이
웅대한 기품을 버들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시인 스윈버언에게서 웅대한
시풍을 찾는 것과 같아서 불가능한 일이다. 한결같이 아름답다고는 하더라도 그
중에는 섬세한 미, 우아의 미, 장중한 미, 준엄한 미, 괴기한 미, 불균형의 미,
힘찬 미, 오래된 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오래된 미 때문에
소나무는 여러 나무 중에서 각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헐렁한 옷을 입고
죽장을 끌며 산길을 걷는 세상을 등진 사람, 인간 최고의 이상으로서 존경받은
은자와도 같다. 이입 옹이 도리양유의 과수원에 앉아 있어도 옆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없다면 어린 자녀들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러러 볼 준엄한 늙은 선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논한 것은 이 때문이다. 소나무 중에서도 노송을 즐기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늙으면 늙으수록 더 운치가 있으며 노송이어야만 장중한
풍격을 띠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나란히 같은 풍취가 있는 것에 사삼이 있다. 특히
학명이 selaginela involven.로 알려져 있는 종류로, 가지가 꾸불꾸불 구부러져
환상을 이루고 있고, 희한한 모습으로 늘어져 있다. 하늘을 향해 곧장 뻗어 있는
가지는 청춘과 희망의 심벌로 보이며, 땅을 향하여 늘어져 있는 가지는 몸을 숙이고
소년을 쓰다듬는 늙은이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소나무는 침묵과 장중과 속세를 초월한 범상한 기품을 나타내며, 은자의 품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상한다는 것은 예술상 가장 의미 심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소나무를 감상하는 데 있어 반드시 따라 붙게 마련인 것은 중국의
그림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우암)과 나무 그늘을 거닐고 있는 인물이다. 소나무
아래에 설 때 사람은 장중함과 노성감을 느끼고, 그 고고한 모습에 이상한 행복감을
깨닫고 이것을 우러러 본다. 노자는 (자연은 말이 없다)라고 했다. 과연 노송은 말이
없다. 고요하고 태연하게 솟아 있으며, 높은 곳에서 말 없이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 소나무 아래에서 많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다. 그 어른들이 또 노인이
되었다.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겪은 늙은이처럼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거기에 신비와 장중이 있다.
매화나무가 아름다움을 칭찬받는 것은, 그 가지가 뻗은 맵시가 낭만적이기
때문이겠지만 그 향기가 맑고 고상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시적 감상을
위해 선발된 나무 중에서 소나무와 매화나무와 대나무가 겨울과 짝지어져
(세한삼우)라고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좀 우습다. 왜냐하면 대나무와 소나무는
상록수이고, 매화나무는 늦겨울 이른봄에 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화나무는 특히 밝고 고상함을 나타내는 셈이다. 상쾌한 겨울 기운이 담긴 맑고
고상한 심벌이다. 그 단정하고 고운 모습은 싸늘한 단려함이며, 세상을 버린
사람처럼 공기가 차면 찰수록 그 단려한 기품은 더해 간다. 도 난처럼 은일한 풍취가
깃들어 있다.
송대의 은둔 시인 임화정은 매화는 내아내, 학은, 내 아들이라고 하였다. 서호의
한복판에 외로이 있는 산에 남아 있는 그의 숨어 살던 유적은 오늘날 문인 묵객의
동경이 되어 있다. 그의 무덤 아래에는 그의 (아들)인 학의 무덤이 있다.
이 시인이 유명한 다음의 7언구에는 매화의 향기와 그 모습의 풍취가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암향부동월황혼
매화의 아름다움의 정수는 이 일곱 자로 끝나며, 그 중 한 자도 움직일 여지가
없다는 것은 모든 시인들이 누구나 다 시인하고 있는 바다.
대나무는 그 줄기와 잎의 화사한 풍격이 매우 좋다. 화사할수록 학자의 가정에서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대나무의 아름다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상냥하게 웃는
아름다움이며, 대나무에서 받는 기쁨은 온화하고도 고요한 기쁨이다. 몸매가 가늘고
날씬하며, 가지가 드문드문 솟은 기품이 죽취가 가장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생죽이나 화죽이나 두서너 그루의 대나무는 한무더기의 죽림 못지않게
귀여움을 받고 있다. 가지와 잎의 날씬한 기품을 좋아하는 것이므로 두서너 대라도
그림이 된다. 그것은 마치 매화 두 서너 송이가 훌륭한 그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찌된 셈인지 대나무의 날씬한 모습이 꺼칠꺼칠한 바위와 조화가 매우 잘 된다.
그러므로 몇 그루의 대나무에 곁들여 한두 개의 바위가 그려져 있는 수가 많다.
이러할 때의 바위는 언제나 앙상한 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려지는 것이다.
버드나무는 어디서나 자라기 쉬운 나무다. 특히 개울 둑 같은 데 많다. 이 나무는
무엇보다도 우선 여성적 나무다. 그러므로 장조는 우주 만물 가운데 인간의 심금을
가장 심각하게 울리는 네 가지 중의 하나로서 버드나무를 치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중국 부인의 가냘픈 허리를 (유요)라 한다.
중국의 무기는 긴 옷소매와 흐르는 듯한 긴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의 율동을 방불케 하려고 애쓴다. 버드나무는 잘 자란다는 데서 중국 도처에
1마일 사방에 걸쳐 이를 심고 있으며, 그 위를 바람이 스쳐갈 때의 모양을
(버들물결)이라고 한다.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에는 꾀꼬리가 즐겨 앉기 때문에
그림에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버드나무에 꾀꼬리는 꼭 붙어다니는 물건이다. 매미도
곧잘 그 가지에서 쉰다. 서호 십경의 하나인 (유랑문앵)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물론 이밖에도 다른 이유로 찬미되고 있는 나무는 얼마든지 있다. 한 예를 들면
오동과 같은 나무는 나무 껍질이 깨끗하고 그 표면이 매끄러워, 작은 칼로 쉽사리
시를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한다. 또 중국인이 매우 애호하는
견만초는 그 근경이 두세 치나 되며, 고목이나 바위 같은 데에 달라 붙어 있다.
곧은 나무 줄기와 이 줄기에 구불구불 감겨 있는 만초는 재미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품질이 좋은 만초는 영이 잠자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용초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다소 기웃한 고목은 그
줄기 때문에 크게 애호와 존경을 받고 있다. 소주에 가까운 태호와 목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네 그루의 사삼에는 각각 (청), (희), (고), (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청)이라는 나무는 줄기가 길고 곧게 솟아 있고, 잎이 꼭대기에 양산 같은 모양으로
퍼져 있다. (희)는 땅 위를 기며 지그재그로 Z형을 세 개 만들고 있다. (고)의
꼭대기에는 잎이 없고 굵고 뭉툭하게 생겼으며 가지는 드물게 나고 반은 말라서
사람의 손가락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기)의 줄기는 맨 위의
가지까지 나선형으로 비비꼬여 있다.
중요한 점은 나무의 관상은 다만 나무만의 관상이 아니라 다른 자연물, 예를 들면
바위, 구름, 새, 벌레, 인간 따위와 관련해서 비로소 그 참다운 가치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꽃을 심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 위함이요, 바위를 쌓는 것은 구름을 부르기
위함이요, 소나무를 심는 것은 비를 기다리기 위함이요, 파초를 심는 것은 바람을
맞기 위함이며, 버들을 심는 것은 매미를 청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새소리를 나무와 함께 즐기며, 귀뚜라미 소리를 바위와 함께 찬양한다.
새는 나무 그늘에서 노래하고 귀뚜라미는 바위 사이에서 운다. 중국인은 우는
귀뚜라미나 매미를 고양이나 개나 그밖의 다른 가축들보다 훨씬 사랑한다. 모든
집에서 기르는 동물이나 조류 중에서 다만 학만이 소나무나 매화 같은 종목에 들어
있다. 그것은 즉 학은 은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학은 물론이고 백로까지도 다
한적한 늪이나 연못에 새하얀 맑은 모습으로 늠름하고도 얌전하게 그리고 또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의 학자는 학이 되고 싶다고 한다.
시인의 심정이 자연 속에 녹아 들어가면 동물이 행복해야만 비로소 인간도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 동안의 심경은 정판교(1693 __ 1765)가 그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새를 새장에 넣어 길러서는 안된다고 한 글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새를 새장에 가둬 길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덧붙여 둘 말이
있다.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새가 싫기 때문이 아니다. 새를 사랑하는데 스스로의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새를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집 주위에 수백 그루에 나무를
심어 새의 왕국과 가정이 나무 그늘 사이에서 잘 보이도록 해두는 것이다. 그러면
날이 샐 무렵 잠이 깨어 그대로 침대 속에 있으면 하늘의 음악과도 같은 새의
지저귀는 합창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잠자리를 나와 옷을 입고,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아침 차를 마실 때 아름다운 새의 날개가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것이 보여
일일이 그것들을 눈여겨 볼 겨를이 없다. 한 마리의 새를 새장에 넣고 바라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즐거움이다. 대체로 생활의 즐거움이란 우주를 공원으로 보고,
호천을 연못으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생물은 모두 각자의 성질에
따라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이 다정함과
냉혹함, 세상에 즐거움이 많은 가운데 새를 새장에 가두거나 물고기를 어항에 넣거나
하여 기뻐하는 것과 이 나의 즐거움을 비교해 보라. 얼마나 큰 차가 있는가!
4. 꽃과 꽃꽂이에 대하여
꽃과 생화를 관상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다소 엉터리인 것 같다.
꽃을 관상하는 것은 나무를 관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꽃의 등급이나 순위를 잘
이해하고 일정한 정서와 환경을 일정한 꽃에 연결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선 처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꽃의 향기다. 향기에는 재스민처럼 강렬하고 분명한
것도 있고, 또 라일락처럼 미묘한 것, 또는 난초처럼 유례가 없을 만큼 기품이 있고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것도 있고, 가지각색이다. 그 향기가 그윽하고 미묘할수록
고상한 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은 꽃의 빛과 자태의 아름다움인데, 이것도 또한
실로 천태만상이다. 어떤 것은 풍만한 처녀 같고, 어떤 것은 초초하게 풍취가 깊은
고요한 숙녀와도 같다. 어떤 것은 그 매력으로 세상 사람들을 유혹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자기의 향기에 도취되어 꿈같은 날을 보내면서
만족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꽃도 있다. 또 화려한 빛깔을 즐기는 것도 있고,
얌전하게 조심성 있는 것도 있다. 꽃은 우선 외계의 환경과 그 꽃이 피는 시기를
언제나 연상케 한다. 장미는 맑게 개인 봄날을 연상케 하고, 연꽃은 연못 위의
싸늘한 여름 아침을 연상케 하며, 물푸레 나무는 가을 달과 중추의 명절을 연상케
하고, 국화는 늦가을에 먹는 게 맛을 연상케 해주고, 매화는 눈을 연상케 하며,
수선과 더불어 정월의 즐거움에는 없어서는 안 될 꽃으로 되어 있다. 모두가 저절로
일어나는 연상이다. 어느 꽃이나 다 자기에게 꼭 들어맞는 환경에 놓이게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철나무가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것처럼 꽃을 마음 속에
^4 246 5 135 4 136^ 여러 계절에 특유한 정경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쉬운
일이다.
난과 국화와 연꽃은 소나무나 대나무처럼 어딘지 모르게 고상한 취향이 있는 것을
찬양하며, 국문학에서는 군자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난은 특히 그
이국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평가되고 있다. 매화는 아마도 어떤 꽃보다도 중국
시인에게 애호받고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앞의 절에서 다소 말해 두었다.
매화는 새해와 더불어, 즉 4계절의 꽃 중에서도 제일 먼저 피는 데서 (제1화)라고
불리고 있다. 거기에는 물론 이설이 있어, 옛날에는 특히 당시대에는 모란이 (꽃의
왕)이라고 지목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란은 빛과 꽃잎이 요염하기 때문에 부귀와
행복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데 반하여 매화는 시인의 꽃, 고요하고 청빈한
선비의 상징이 되어 있다. 즉 모란은 물질적이지만 매화는 정신적이다.
일찌기 어떤 학자가 크게 모란을 칭찬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유래한 것이다. 옛날 당나라 무후가 예의 과대망상인 변덕을 일으켜 어원의
모든 꽃에 대하여 한겨울인 어느날 일시에 꽃피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없다. 다만 그렇게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모란만이 용감하게도 몇 시간 늦게
피었기 때문에 그것이 몹시 무후 폐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 그 결과 수천 분의
모란은 칙명에 의하여 모조리 서울 장안에서 낙양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임금의
은총을 잃기는 하였으나 모란을 예찬하는 소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으며 낙양은
모란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중국인이 왜 좀더 장미를 존중하지 않느냐 하면,
장미의 빛이나 자태가 모란과 동급에 들어갈 만하지만 모란의 호화로움에 그만
눌리고 말았을 것이다. 중국의 옛 기록에 의하면 모란의 종류는 90종이나 있어, 그
모두가 매우 시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난은 모란과 달라서 둔세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즉 사람이 사는
동리를 멀리 떠나 깊은 산골짜기에 피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난은 사람이 관상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스스로 고독의 미를 즐기는) 미덕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로 이식되기를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비록 억지로 옮겨 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난의 독특한 조건에 따라서 기르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을 어기면
당장 시들어 죽고 만다. 그러한 데서 우리는 깊은 방안에서 고이 자란 아름다운
처녀나, 권세나 명성을 싫어하여 산 속에 숨어 사는 큰 선비를 흔히 (유곡란)에
비유한다. 그 향기는 매우 엷어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별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일단 그 향기를 알게 되면 그 신성함에 감탄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난은 세상에 아부하지 않는 군자의 상징이 되고
또한 참다운 우정의 상징으로도 되어 있다. 그것은 옛글에 (난을 장식한 집에 들어가
오래 거기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 향기를 전혀 깨닫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며 그
까닭은 향기가 몸 속에 배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입 옹은 난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방마다 난을 두지 말고, 다만 한 방에만 놓고 그 방에 드나들 때마다 난의
향기를 즐길 것을 권하고 있다. 미국산 난에는 이러한 그윽한 향기가 없는 것
같은데, 그 대신 모양도 크고 빛깔도 훨씬 화려하다. 내 고향인 복건성은
(복건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국에서 가장 좋은 난의 산지로 되어 있다. 그
꽃은 엷은 녹색으로 자색 반점이 있고 매우 작으며 꽃잎의 길이는 1인치를 조금 넘을
정도다. 무엇보다도 귀염을 받고 있는 가장 좋은 품종인 진몽량은 그 빛이 물과
같으므로 물 속에 담그면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어 버린다.
매화는 시인 임화정의 꽃, 연꽃은 유교의 이론가 주무숙의 꽃, 이에 대해 국화는
시인 도연명의 꽃이다. 늦가을에 피는 이 꽃은 (냉향)이니 (냉수)니 하는 풍취를
띠고 있다. 국화의 냉수와 이를테면 모란의 화려함과의 대조는 누가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국화는 수백의 품종이 있는데, 그 품종마다 매우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는 유행의 선구 구실을 한 것은 내가 아는 바로는 송대의 위대한 유산자
범성대다.
국화의 생김새와 그 색채와 더불어 그 종류가 다양 다종인 것이 국화의 특징인 것
같다. 흰색과 노랑색이 국화의 (정통)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보라색과 빨강색은
변종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등급도 훨씬 떨어진다. 흰색과 노랑색은 (은분), (은령),
(금령), (옥반), (옥령), (옥수수)라는 여러 가지 품종의 이름을 낳았다. 또는
(양귀비), (서시)와 같은 유명한 미인의 이름을 붙인 것도 있다. 짧게 깎아올린
여자의 단발 같은 모양의 것도 있고, 꽃잎이 물결치는 곱슬머리 비슷한 것도 있다.
향기도 품종에 따라 모두 다르지만, 사향이라든가 또는 이른바 (용뇌)의 향기가 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연, 즉 수련은 다만 한 종류를 이루고 있지만, 수면에 떠 있는 그 줄기가 잎을
포함하여 꽃 전체로서 바라보면 모든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된다. 근처에 연이 없이는 여름을 즐길 수 없다. 만일 집 근처에 연못이 없다면
커다란 질그릇 수반에 옮겨 심으면 된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반 마일씩이나 연이어
피어 있는 연꽃의 아름다움, 대기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 향기, 진주와 같은
물방울이 구르는 연잎의 아름다움, 그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연잎 끝의 홍백으로
아롱진 그 꽃의 아름다움은 대부분 잃고 말게 된다(미국의 수련(Water lily)은 중국의
연과는 다르다) 송대의 학자 주무숙은 그의 수필 (애련설)에서 연을 사랑하는
까닭을 말하여, 연은 군처럼 흙탕물 속에서 자라나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일반 유가의 설과 다를 것이 없다. 공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연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연근은 청량음료를 만드는데 쓰이고, 잎은
과일이나 그밖의 음식을 찔 때 그것을 싸는데 쓰이고, 꽃은 그 모양과 향기 때문에
사랑받고, 마지막으로 연밥은 신선이 먹는 것으로서 존중되며, 까서 그냥 날것으로도
먹을 수 있고 말려서도 먹을 수 있고 설탕에 절여서 먹을 수도 있다.
사과꽃을 닮은 해당화는 다른 꽃과 마찬가지로 시인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다만 두보만은 자기의 고향인 사천의 명물인 이 꽃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그럴 듯한 설은 두보의
모친의 이름이 해당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모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피했다는 것이다. 향기가 좋은 점에서 난보다 윗자리에 올려놓고 싶은 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물푸레나무와 수선이다. 수선도 내 고향인 창주의 특산물로서,
구근으로 미국에 수출되는 금액은 한때 수십만 달러에까지 오른 일이 있으나,
농무성은 그 구근에 간혹 붙어 있는 병원균을 막기 위해서 이 하늘로부터 얻은
영묘한 향기를 가진 꽃을 미국 국민으로부터 빼앗아 버렸다. 그러나 선녀처럼 고운
수선의 흰 구근에 병원균이 붙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흙탕 속과는 달라서 물을 담은 유리그릇이나 사기그릇 속에 잔돌로 받쳐서 심고
최선의 주의를 다해 기르는 것이다.
진달래는 그 모습이 완연한 아름다움에 비해 보통 세상에서는 비극의 꽃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꽃은 두견새의 피눈물에서 싹튼 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두견새는 계모의 학대로 쫓겨난 형을 찾는 소년이 변신한 것이라고 한다.
꽃을 선택하여 그 순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꽃병에 꽃을 꽂는 기술도 또한
중요하다. 이것은 적어도 멀리 11세기부터의 예술이다. 19세기 첫무렵의
(부생육기)의 저자는 (한정기취)라는 장에서 훌륭한 구도의 그림 못지않게 꽃꽂이의
재주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마다 가을이 되면 나는 국화를 열렬히 사랑했다. 나는 국화를 화분에
심지 않고 꽃병에 꽂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화분에 심기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집에
뜰이 없었으므로 손수 손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구해 오는 꽃은
손질이 잘되어 있지 않아서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국화를 꽃병에 꽂을 때는 짝수가
아니라 홀수로 하고, 어느 화병에라도 한 가지 빛깔의 꽃만을 꽂아야 한다. 꽃병의
주둥이는 꽃을 함께 쉽게 꽂을 만한 넓이가 잇어야 한다. 꽃병 하나에 꽂은 꽃이
여섯 개가 되든 30개 또는 40개가 되든 그것은 모두 다같이 꽃병 주둥이에서 곧게
서도록 꽂아야 한다. 너무 많이 뭉쳐져도 안되고, 사방으로 흩어져도 안되며, 꽃병
주둥이에 기대어도 안된다. 이렇게 위치를 정하는 것을 (근채)라고 한다. 꽃은 품위
있게 똑바로 서 있는 경우도 있고, 사방으로 뻗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효과가
너무 단조로와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몇 송이의 꽃봉오리를 곁들여 일종의 멋을
살려 질서를 무시하여 꽂는 것도 좋다. 잎은 너무 배서도 안되고, 또 줄기가 너무
딱딱해도 안된다. 줄기를 세우기 위해 침봉을 쓸 경우에는 침봉 끝이 겉으로 나오면
보기가 흉하니까 긴 침은 잘라 버려야 한다. 이른바 (병주둥이는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이치다. 탁자의 크기에 따라서 셋 또는 일곱 개의 꽃병을 탁상에
늘어놓는다. 꽃병 수가 너무 많으면 너무 빽빽한 감이 들어 거리에서 팔고 있는
국화의 진열같이 보인다. 화병대의 높이도 서네 치에서 고작해야 두 자 다섯 치
정도로 하고, 통일성 있는 구성을 가진 그림처럼 높이가 각각 다른 꽃병이 서로
군형이 잡혀 각기 서로 조화를 이룬 것처럼 해야 한다. 높은 꽃병을 하나 가운데
놓고 낮은 것을 그 양쪽에 놓는다거나, 낮은 꽃병을 앞에 놓고 높은 것을 뒤에
놓는다거나, 또는 잘 균형을 취하여 한 쌍씩 나란히 늘어 놓거나 하는 방법은 흔히
말하는 (금회퇴)라는 나쁜 풍속이다. 적당히 간격을 취하는 방법과 그 배치하는
방법은 각 개인의 회화적인 구성의 이해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다.
사발이나 큰 접시를 쓰는 경우에는 꽃을 받치려면 정제한 송진에 느릅나무 껍질과
밀가루를 기름에 섞은 것을, 일종의 아교 모양으로 될 때까지 짚을 태운 뜨거운
재로 데워서 그것으로 동판에 못을 몇 개 거꾸로 박는다. 다음에 이 동판을 데워서
그 사발이나 큰 접시 바닥에 붙인다. 이것이 식으면 철사로 꽃을 몇 개의 다발로
묶어서 위로 향한 못에 꽂는다. 꽃은 옆으로 기울이게 하는 것이 좋고, 복판에
오똑하게 세워서는 안된다. 줄기와 잎이 너무 바싹 달라붙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사발에 물을 붓고 깨끗한 모래를 조금 넣어서 동판을
덮어 꽃이 직접 사발 바닥에서 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꽃이 달린 가지를 잘라서 꽃병에 꽂을 경우에는 꽂기 전에 가지를 어떻게 손질하면
좋겠는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항상 자신이 손수 나가서 가지를
꺾어올 수는 없고 남이 꺾어온 가지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 가지를 손에 들고 앞뒤 양쪽 옆으로 여러 가지 방향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어느 방향이 가장 모양이 보기 좋은가를 결정한다. 그것이 결정되면 그
가지를 날씬하고 고취가 풍기는 색다른 모양으로 만들기 위하여 여분의 작은 가지는
모두 잘라 버린다. 그 다음에 줄기를 어떠한 모양으로 꽃병에 꽂을 것인가. 줄기를
꽃병에 꽂았을 때 잎과 꽃이 가장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줄기를
구부리면 좋겠는가를 생각한다. 만일 닥치는 대로 한 개의 묵은 가지를 손에
집어들고 그 곧은 부분을 꽃병에 꽂았다고 하면 줄기는 너무 뻗어나고, 가지는 너무
빽빽하고, 꽃이나 잎은 엉뚱한 방향을 향하게 되어 매력도 표정도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곧은 가지를 구부리면 줄기 한가운데에 칼로 약간 상처를 내어 그
상처에 기와나 돌부스러기의 작은 조각을 끼워 넣는다. 그렇게 하면 곧은 가지는
알맞게 구부러진다. 큰 가지가 너무 약할 때에는 바늘을 두서너 개 박아서 든든하게
한다. 이 방법을 쓰면 단풍잎이나 대나무의 작은 가지나 그 밖의 보통 풀이나
엉겅퀴잎 같은 것까지 훌륭한 장식물이 된다. 몇 개의 중국 구기 열매에 파란
대나무의 작은 가지를 곁들인다든가, 품위 있는 풀잎에 몇 개의 엉겅퀴 가지를
배합해도 배치만 좋으면 참으로 아취 있는 서정을 풍겨 줄 것이다.
5. 원중랑의 (병사)에 대하여
꽃꽂이에 관한 가장 뛰어난 책은 아마도 원중랑이 쓴 책일 것이다. 이 사람은
16세기 끝 무렵의 사람으로, 다른 점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인의 한 사람이다.
꽃꽂이에 대한 그의 저서 (병사)는 일본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꽃꽂이에
(굉도류)라는 일파가 있는 것도 모두가 다 아는 바다. 그는 그 서문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 다행히도 꽃, 대나무, 산, 물은 명성과 권세를 얻으려는
싸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명성과 권세를 쫓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애를 태우며
산과 물, 꽃과 대나무를 즐길 겨를이 없다. 그러나 속세를 떠나 은거하는 학자는
그 처지를 이용하여 자연의 즐거움을 독차지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진 것이다.
그러나 꽃꽂이를 감상하는 것을 정상적인 즐거움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고작 도회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일시적인 대용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것 때문에
세상의 자연을 즐기는 보다 더 큰 행복을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는 또한 서재를 꾸미려고 꽃을 놓는 데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며, 종류에
마음을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꽃을 놓는 것보다는 전혀 놓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하고, 또 꽃꽂이에 쓰는 여러 가지 모양의 청동이나 도자기 꽃병의 설명까지도
했다. 모양은 크게 나누어 둘로 분류된다. 한대의 오랜 옛날의 청동 화병을 가지고
있고 큰 방이 있는 집에서 사는 부유한 사람들은 커다란 꽃병에 큼직한 꽃과 키가 큰
가지를 꽂아야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좀더 작은 꽃가지를 충분히 음미한 작은
꽃병에 꽂는 편이 학자다와서 좋다. 예외로 허용되는 것은 모란과 연뿐이며, 꽃이
크니까 큰 꽃병에 꽂아야 한다.
A. 꽃병에 꽃을 꽂으려면
너무 난잡하거나 너무 빈약해도 안된다. 꽃병에 꽂는 꽃은 많아야 두세 종류에
그치고, 높고 낮은 균형이나 배치는 명화의 구도를 목표로 해야 한다. 꽃병을 놓는
데는 쌍으로 하거나 똑같은 모양으로 하거나 똑바로 한 줄로 늘어 놓거나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꽃을 실로 묶는 것도 또한 좋지 못하다. 꽃의 청초한 아름다움은
제멋대로인 소동파의 명문처럼, 또는 연구에 구애되지 않는 이백의 시처럼
가지런하지 못하면서도 저절로 갖춰진 형용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청초한 아름다움이다. 단순히 지엽의 균형이 잡히고, 홍백이 섞여 있는 것만으로
어떻게 청초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으로는 시골 관리의 집 뜰이나 무덤으로 가는 돌을 깐 길같이 느껴진다.
가지를 골라서 꺾을 때에는 날씬하고 볼품있는 가지를 고르는 것이 좋고, 너무
복잡한 가지를 서로 한데 모으는 것은 좋지 못하다. 꽃꽂이에 쓰는 꽃은 한 가지
종류만이 좋으나, 많아야 두 가지 종류에 그치고, 두 가지 종류의 꽃이 같은
가지에서 난 것처럼 보이도록 맞추어주어야 한다... 대체로 꽃은 꽃병과 어울려야
하나, 높이는 꽃병보다 네댓치쯤 높은 것이 좋다. 높이가 두 척쯤 되고, 몸체와
바닥이 넓은 꽃병이라면 꽃의 높이는 꽃병 주둥이에서 두 척 예닐곱 치 정도가
알맞다. ... 가느다란 꽃병에는 되도록 길게 가지가 뻗고 약간 굽은 가지의 맵시가
좋은, 길고 짧은 두 개의 가지를 꽂는 것이지만, 이때 꽃이 꽃병보다 네댓 치 짧으면
한층 더 운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것은 꽃병에 비해서 너무도 꽃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복잡한 것도 또한 피해야 한다. 이를테면
꽃을 많이 묶어서 핸들처럼 만들어 버리면 멋이고 뭐고 모두 없어지고 만다. 작은
꽃병에 꽃을 꽂을 때는 꽃병 주둥이에서 꽃까지의 길이를 꽃병의 높이보다 두 치만
짧게 해야 한다. 이를테면 높이 여섯 치의 가늘고 긴 꽃병에는 고작 예닐곱 치의
꽃이어야 한다. 그러나 튼튼하게 생긴 꽃병이라면 꽃병의 높이보다 두 치쯤 긴
꽃이라도 괜찮다.
꽃이 있는 방에는 간소한 책상과 등의자를 놓는 것이 좋다. 책상은 넓고 두터우며,
좋은 나무를 써서 표면이 반들반들해야 한다. 가장자리에 장식이 붙은 옻칠한 책상,
황금빛으로 칠한 장의자, 색칠한 꽃무늬의 대 따위는 모두 쓰면 안된다.
꽃의 (탕욕) 즉 (세욕)에 관하여 저자는 꽃의 기분과 정서를 깊이 생각하며
관찰하고 있다.
꽃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고, 또 잠이 있다. 아침 저녁으로 적당한 때에 물을 주면
꽃에게는 정말로 고마운 비가 된다. 햇빛은 밝고 구름이 엷은 날, 저녁 해가
아름답고 달 밝은 밤은 꽃에게는 아침이다. 큰 태풍, 억수 같은 비, 지글지글 타는
더위, 지독한 추위는 꽃에게는 저녁이다. 화대가 햇볕을 받아 연약한 몸을
바람에게서 보호받고 있을 때는 꽃이 행복한 기분에 잠기어 있을 때다. 안개 깊은
날 꽃이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일 때, 또는 잠잠하여 나른하게 보일 때, 꽃은 슬픈
기분으로 있다. 몸을 꼿꼿이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가지를 늘어뜨리고 몸을 비스듬히
하고 쉬고 있을 때는 꽃이 꿈을 꾸면서 잠을 자고 있을 때다.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고 기쁜 듯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잠에서 깨었을 때다.
꽃의 (아침)에는 인기척이 없는 정자나 넓은 방에 두는 것이 좋다. (저녁)에는
조그마한 방이나 단채에 옮기는 것이 좋다. 슬플 때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고 싶을
것이겠고, 기쁠 때는 웃거나 떠들거나 까불고 싶을 것이다. 잘 때는 커어튼을
쳐주기를 바랄 것이고, 잠이 깨면 화장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모두 꽃의 성정을
만족시키고, 그 자고 깨는 시간을 조정하기 위해서 하는 짓이다. 꽃의 (아침)에
물을 주는 것이 가장 좋고 잠잘 때가 그 다음이고 기쁠 때가 맨 마지막이다. 꽃의
(저녁), 즉 슬퍼하고 있을 때 물을 주는 것은 꽃을 학대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꽃에 물을 주는 데는 술 취한 사람을 깨우게 하는 가랑비처럼, 또는 꽃의 온몸에
스며드는 정다운 이슬처럼, 샘에서 막 길어온 맑은 물을 조용히 조금씩 뿌려 주는
것이 좋다. 꽃에 손을 대거나 손끝으로 만져 보거나 하는 따위는 좋지 못하다.
그러한 일을 어리석은 하인이나 하찮은 하녀에게 맡겨서는 안된다. 매화는 세상을
등지고 고요히 사는 학자에게, 해당화는 아름다운 손님의 손으로, 모란은 아름답게
차려입은 젊은 처녀들에게, 석류는 아름답게 생긴 몸종에게, 물푸레나무는 영리한
아이들에게, 연꽃은 요염한 첩에게, 국화는 옛사람을 사모하는 이름 높은 선비에게,
납매는 여윈 중에게, 이런 식으로 저마다 그 맛을 따라서 물 주는 일을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추운 계절에 피는 꽃에는 물을 주지 말고 엷은 비단으로 보호해 주어야
한다.
원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종류의 꽃을 꽃병에 꽂으면 다른 어떤 종류의 꽃의
꽃의 컴비, 즉 (시녀)로서 잘 조화되는 것이 있다. 귀부인에게 한평생 봉사하는
시녀라는 것이 옛날 중국의 제도에 있었는데, 아름다운 귀부인은 필요한 부속물로서
아름다운 시녀들을 옆에 모시게 하여 섬기게 할 때 비로소 나무랄데 없는 귀부인이
된다는 생각이 옛날부터 중국에는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귀부인이나 시녀가
다같이 미인이어야 하지만, 어떤 형의 아름다움에는 어찌된 셈인지 주인
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녀 편이라는 것이 있다. 여주인과 조화되지 않는 시녀는
안채와 균형이 안 맞는 외양간 같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꽃에 옮겨 원은 꽃꽂이에
알맞은 (시녀)를 발견했다. 즉 매화에는 동백, 해당화에는 사과꽃과 라일락,
모란에는 육계색의 장미, 작약에는 양귀비와 해바라기, 석류에는 백일홍과 무궁화,
연꽃에는 백옥잠화, 물푸레나무에는 부용, 국화에는 가을 해당화, 납매에는 수선이
시녀로서 섬기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녀도 모두 갖가지 색으로 아름답고 그
주인 못지않게 저마다 뛰어나게 얌전한 것들이다. 시녀라고는 하지만 이 화비들을
우습게 보려는 것은 조금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상 유명한 시녀들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수선은 하늘의 직녀의 시녀 양옥청처럼 모습이 날씬하고 맑고
깨끗하며, 동백꽃과 장미는 금나라 시대의 석가와 양가의 시녀 현풍과 정완처럼
맑고 고우며, 산반화는 비극적인 여승 시인 어현기의 여종처럼 깨끗하고 낭만적이며,
라일락은 화사하지만 백옥잠화는 냉정하며, 추해당은 정강성(한대의 학자, 경전의
평역이 많다)의 시녀처럼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다소 잘난 체하는 냄새를 풍긴다.
어떠한 방면이라도, 예를 들면 장기 같은 것이라도 어엿한 하나의 권위를 이루는
사람은 반드시 미친 사람처럼 그 길에 열중한다는 것이 원의 사고 방식의 근본인데,
꽃도락에 대해서도 그는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야기를 해도 재미가 없고 얼굴조차도 보기 싫은 인간이 있는 법인데,
그러한 사람들은 모두가 도락이 없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꽃을 미치도록
사랑한 옛사람들은 진귀한 종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심산 유곡을 두루 돌아다니며
찾아 헤매어, 몸의 피곤이나 지독한 추위나 더위나 살갗이 벗겨지는 일이나 진흙
투성이가 되는 것쯤은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았다. 꽃이 봉오리를 맺으려고 할 때
침상과 베개를 꽃나무 아래에 옮겨 놓고 자면서 어린 꽃이 어른이 되어 드디어 지고
말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관찰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과수원에 수 천의 꽃을
심고는 그 변화하는 모양을 연구하고 또는 몇 그루를 방 안으로 옮겨 놓고 끝없는
흥취에 잠겼다. 잎의 냄새를 맡고는 꽃의 크기를 알아 맞힐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뿌리를 보고 꽃빛을 알아 맞힐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참으로 꽃의 애호가, 꽃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다.
꽃을 감상하는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차를 마시면서 꽃을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꽃을
감상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술을 마시면서 감상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시끄럽게
움직이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하는 것은 모두 꽃의 혼을 모독하는 짓이 된다.
꽃을 즐기는 데는 그에 알맞은 때와 장소가 있다. 적당한 환경을 생각하지 않으면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추울 때 꽃을 감상하려면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나,
또는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을 때나, 초승달이 떠 있는 동안이나, 따뜻한
방안이 좋다. 온화, 즉 봄의 꽃은 맑게 개인 날이나, 조금 추운 날에 아름다운 넓은
방에서 방에서 즐겨야 한다. 여름의 꽃은 비가 개인 뒤 상쾌한 바람을 받으면서
녹음이 우거진 나무 그늘, 대나무 아래 또는 물가의 노대가 적당하다. 양화, 즉
가을의 꽃은 싸늘하고 상쾌한 달 아래, 또는 저녁 때, 회랑의 돌층대 가장자리, 이끼
낀 뜰안의 오솔길 또는 오래된 덩굴이 얽힌 바위 가까이에서 감상해야 한다.
바람이나 태양이나 장소 여하를 생각치 않고 마음이 꽃 밖에서 헤맬 때 꽃을 대하게
된다면, 기생집이나 술집에서 꽃을 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맨 끝으로 원은 다음의 열 네 가지를 (화쾌의)의 조건으로 들고 (23개 조항)
(화절욕)의 조건으로 들고 있다.
B. 화쾌의 열 네 가지
명창
정궤
고정
송현
송도계성
주인은 화벽이 있고 시운을 사랑하다.
차에 취미를 가진 친구 승이 찾아오다.
계주인이 술을 갖고 오다.
방안의 손님 시취가 풍부하다.
향기로운 꽃이 눈부시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찾아오다.
예화서를 쓰면서.
밤이 이슥하여 차솥이 끓는다.
처첩이 꽃이야기를 교정하며 주고 받을 때.
6. 장조의 경구 열 가지
자연의 즐거움은 시문이나 회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자연은 인생 전반 속에 파고 드는 것이다. 자연이란 모든 소리이며 색깔이며
기분이며 분위기이다. 슬기롭고 재빠른 생활 예술가인 인간은 우선 자연의 정당한
기분을 가려내어 그것을 자기의 기분에 조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중국의 모든 시인 문인의 태도다.
그러나 그 가장 뛰어난 표현은 장조(17세기 중엽의 사람)의 저서 (유몽영) 중의
경구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문학적인 격언을 모은 것으로,
이러한 종류의 격언집은 중국에 그 수가 많이 있으나 장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안데르센의 동화가 영국의 오랜된 옛이야기와 관계가 있고,
슈베르트의 예술적인 가요가 민요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러한 문학적 격언은
민속적인 속담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세상에서 매우 사랑받고 있으며,
한무리의 중국의 학자들이 참으로 유쾌하고도 경쾌한 기분으로 그 격언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평석을 붙였을 정도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연의 즐거움에 대한 가장 우수한
것 몇 가지만을 번역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 그러나 인생에 관한 격언도 매우
뛰어난 것이 몇 편 있고, 전편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몇 절을 마지막으로 수록하기로 했다.
A. 무엇이 본격인가?
꽃에는 나비가 있고, 산에는 샘이 있으며, 바위에는 이끼가 있고, 물에는 논냉이가
있으며, 교목에는 이에 기생하는 덩굴이 있게 마련이며, 인간에게는 도락이 있다.
이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꽃은 미인들과 함께 즐겨야 하며, 달빛 아래 술은 마음에 맞는 유쾌한 친구들과
함께 즐겨야 하며, 눈빛은 품격이 고상한 선비들과 함께 즐겨야 한다.
꽃을 심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에 좋다. 바위를 쌓는 것은 구름을 부르기에 좋다.
소나무를 심는 것은 산뢰(산바람이 나무가지를 스치는 소리)를 부르기에 좋다.
노대를 마련하는 것은 달을 부르기에 좋으며, 파초를 심는 것은 비를 부르기에 좋다.
버드나무를 심는 것은 매미를 부르기에 좋다.
사람은 높은 누각에서 산을 바라보고, 성벽에 서서 눈을 바라보며, 등불 아래서
달을 우러러보며, 조각배에서 아롱진 구름을 감상하며, 방안에서 미인을 대한다.
정경에 따라 정취는 스스로 다른 것이다.
매화 옆에 가까이 있는 바위에는 (고색창연)한 맛이 있어야 하며, 소나무 밑의
바위는 (우둔)해야 하며, 대나무 옆에 있는 바위는 가냘퍼야 하며, 수반 옆에 있는
바위는 (정교)해야 한다.
맑고 푸른 물은 푸른 산에서 흘러 나온다. 물이 산의 빛을 빌어오기 때문이다.
명시는 향긋한 술에서 나온다.
거울이 못 생긴 여자를 대할 때, 세상에 희귀한 벼루가 옹졸한 주인의 손에
들어갔을 때, 명도가 하찮은 장수의 손에 쥐어졌을 때 모든 것을 끝장을 보는
것이다.
B. 꽃과 여자에 대하여
꽃이 시들고, 달이 지며, 미인이 명이 짧아 일찍 죽는 것은 차마 볼 것이 아니다.
꽃을 심어 그 꽃이 활짝 피는 것을 봄이 좋다. 달을 기다려 만월이 된 것을
관상함이 좋다. 저술은 완성된 것을 봄이 좋다. 미인은 쾌활하고 즐거워 보일 때
보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낙심할 뿐이다.
미인을 보는 때는 아침 화장을 한 뒤라고 알아야 한다. 밉지만 볼품있는 얼굴도
있다. 밉지는 않지만 보기 싫은 얼굴도 있다.
문법에는 맞지 않지만 애독할 만한 문장도 있다. 문법이 지나치게 맞아도 읽기
힘든 나쁜 글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속이 얕은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들이다.
미인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꽃을 사랑하면 꽃의 각별한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꽃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미인을 사랑한다면 특히 사랑스럽고도
귀여운 맛을 알 수 있다.
미인은 말을 알기 때문에 꽃보다 낫고, 꽃은 향기를 풍기기 때문에 미인보다 낫다.
양손에 미인과 꽃을 다같이 잡을 수 없다면 향기를 풍기는 꽃을 버리고 말하는 꽃을
잡도록 하라.
짙은 붉은 색 꽃병에 꽃을 꽂으려면 꽃병의 크기와 높이가 꽃과 균형이 맞도록 할
것이며, 또 꽃병 빛깔의 짙고 연함이 꽃과 좋은 대조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요염한 고운 꽃에는 대부분 좋은 향기가 없다. 몇 겹이나 꽃잎이 포개져 있는 꽃은
대개 밉다. 아아, 세상에 완전한 것이란 참으로 드물구나! 양쪽을 모두 갖춘
것이라곤 오직 연꽃이 있을 뿐이다.
매화는 사람에게 청쾌한 느낌을 주고, 난은 그윽한 느낌, 국화는 소박한 느낌,
연꽃은 만족한 느낌을 암시한다. 봄철 해당화는 사람의 정열을 태우고, 모란은
용기와 의협, 대나무와 파초는 맑고 소슬하며, 가을 해당화는 우아한 기품을
나타내고, 소나무에는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사람의 느낌이 있고, 오동나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며, 버드나무는 사람의 감상을 돋군다.
미인이 꽃 같은 얼굴, 새 같은 목소리, 달 같은 정신, 버드나무 같은 모습, 가을
호수의 아름다움, 경옥의 뼈, 눈과도 같은 살결, 시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지극히
만족하다 하겠다(참으로 그러하다! 임어당 역시...)
만일 이 세상에 책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책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읽어야 한다. 만일 술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술이 있다. 그러니까 마셔야 한다. 만일 명산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명산이 있다. 그러므로 명산을 찾아야 한다. 만일 꽃과 달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꽃과 달이 있다. 그러므로 꽃과 달을
즐기며, 이와 함께 놀아야 한다.
만일 재주 있는 사람과 아름다운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재사와 미인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사랑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 거울이 못 생긴
여자의 적이 되지 않는 것은 거울에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감정이 있다면
틀림없이 산산조각으로 깨뜨려지고 말 것이다.
이제 막 사온 아름다운 화분의 꽃에도 사람은 사랑을 느낀다. 하물며 (말하는
꽃)에 대해서는 그 얼마나 깊은 애정을 느낄 것인가!
시와 술이 없다면 산수도 헛되이 가로놓여 있을 뿐, 좋은 사람과 아름다운 여인이
없다면 꽃과 달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가 빼어난 사람,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여자는 둘 다 오래도록 살기 어렵다. 반드시 신의
시새움만은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대의 보배일 뿐 아니라, 만대의 보배이므로
그 신성함이 모독될 것을 두려워 하여 조물주가 이 세상에 오랫 동안 머물러 있게
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C. 산수에 대하여
우주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강하게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 하늘에는 달이
있고, 악에는 금이 있고, 날짐승에는 두견새가 있고, 초목에는 버들이 있다. 달과
함께 구름을 근심하고, 책과 더불어 좀벌레를 근심하고, 꽃과 함께 폭풍을 근심하고,
재사나 미인과 함께 가혹한 운명을 근심하는 것은 부처님의 대자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의 (마음의 벗), 다시 말해서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죽어도 후회됨이 없다.
옛날의 어느 문인은 꽃과 달과 미인이 없으면 이 세상에 태어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덧붙여서 이렇게 말하겠다. 만일
필묵과 바둑과 술이 없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엇하겠는가. 산의 빛, 물의 소리,
달의 빛깔, 꽃의 향기, 문인의 매력, 미인의 모습, 이 모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당긴다.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꿈꾸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러한 것에 생각을 달리고는 식욕을 잃어버린다.
눈은 고매한 선비를 생각케 하고, 술은 숙달한 검객을 생각케 하고, 달은 정든
친한 벗을 생각케 하고, 산수는 작자의 마음에 흡족한 시문을 생각케 한다. 풍경엔
지상의 풍경, 화면의 풍경, 꿈에 보는 풍경, 머릿속의 풍경 등이 있다. 지상의
풍경의 아름다움은 그 깊이와 파격적인 윤곽이 있다. 화면의 풍경의 아름다움은
필색의 자유와 다채로움이 있다. 꿈에 보는 풍경의 아름다움은 이상하게 변하는
기막힌 그 경치에 있다. 머릿속의 풍경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이 정연하게 있어야 할
곳에 자리잡고 있는 데에 있다.
여행을 하면서 지나가는 경치에 대해서는 예술적으로 그 좋은 곳만을 고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살 곳을 정하여 일생을 보내려는 장소에 대해서는 그 좋은 점만을
가려서 골라야 한다.
죽순은 야채 중에서 진귀한 것이며, 여지는 과일 중에서 진귀한 것이며, 게는
수서동물 중에서 진귀한 것이며, 술은 음식물 중에서 진귀한 것이며, 달은 천계에서
진귀한 것이며, 서호는 산수에서 진귀한 것이며, 송의 서정시 사와 원의 극시 곡은
문학에서 진귀한 것이다.
이름 높은 산수에 접하려면 숙명적인 행운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나에게
정해진 때가 오지 않으면 비록 근처에 있다 하더라도 산수를 찾을 만한 때는 없다.
거울을 비치는 영상에도 섹이 있다. 그러나 달빛 아래 영상은 펜으로 그린
스케치다. 전자는 명확한 윤곽이 있는 그림이지만 후자는 (골격이 없는 그림)이다.
달빛에 떠 있는 산수의 그림자는 하늘 나라의 지리이며, 물에 비치는 별과 달의
그림자는 땅 위의 천문이다.
D. 봄과 가을에 대하여
봄은 하늘의 뜻이 자연을 따르는 계절이고, 가을은 하늘의 뜻이 변함을 나타낸
것이다.
옛사람은 겨울을 다른 세 철의 (부속물)(즉 쉬는 시간)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여름은 (세 가지 부속물)의 계절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름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밤의 (부속물), 여름 한밤중에 일어나 있는 것은 낮의 (부속물), 낮잠은 사교의
(부속물)이다.
옛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나는 진심으로 (여름날의 긴 것을 사랑한다)
사람은 가을의 정신을 가지고 내 몸을 단련할 것이며, 봄의 정신을 가지고 남을
대해야 한다.
명문과 당시는 가을 정기로 맑아져야 하며, 송의 유명한 서정시와 원의 극시는
봄마음으로 향기로워야 한다.
E. 소리에 대하여
봄의 새가 지저귀는 소리, 여름의 매미가 우는 소리, 가을 벌레가 우는 소리,
겨울에 내리는 눈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낮에는 바둑두는 소리에, 달빛을 받으면서는
피리소리에, 산에서는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물가에서는 잔물결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젊은 부랑배가 거리에서 싸움을 시작하거나 마누라가 귀찮은 잔소리를
퍼부을 때는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
거위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남경에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썰매타는 소리를 들으면
소주, 창주, 호주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바닷가에 물결치는 소리를 들으면 절강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여윈 말의 방울소리를 들으면 사안으로 가는 나그네 길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소리는 모두 떨어져서 듣는 것이 좋다. 다만 금소리 만은 곁에서 들어도 좋고
떨어져서 들어도 좋다.
소나무 아래서 금소리를 들을 때, 달빛을 받으며 피리소리를 들을 때, 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에 내려가서 폭포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산속에서 염불하는 소리를
들을 때 귓가에 그윽한 향기가 감돈다.
물소리에는 네 가지가 있다. 폭포 떨어지는 소리, 솟는 샘물 소리, 물살이 세게
흐르는 소리, 도랑을 흐르는 소리.
바람소리에는 세 가지가 있다. 소나무를 흔드는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 수면을
달리는 폭풍 소리.
빗소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오동과 연꽃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처마에서
통속으로 떨어지는 빗물 소리.
F. 비에 대하여
비라는 것은 낮을 짧게, 밤을 길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봄비는 영예로운 상을 주는 칙서와도 같고, 여름비는 기결수에게 내리는
사면장과도 같고, 가을비는 만가와도 같다.
봄비는 독서하기에 좋고, 여름비는 바둑두기에 좋으며, 가을비는 가방 속이나
다락방 속을 뒤지기에 좋고, 겨울비는 술 마시기에 좋다.
나는 비의 신에게 편지를 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련다.
봄비는 정월 보름이 지난 뒤에 내리고, 청명절(3월 3일, 그 무렵에 복숭아 꽃이
피기 시작한다)의 10일 전까지 계속해서 내리고, 모내기 때(곡우)에도 내리게
해 주십시오.
여름비는 매달 초순에 열흘과 그믐께 열흘에 내리도록 해 주십시오(달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을비는 7월과 9월의 초순께 열흘과 그믐께 열흘에 오도록 해
주십시오(8월, 즉 중추에는 중추의 보름달을 감상하기 위하여 하루도 비가 내리지
않도록). 겨울의 석 달은 비 한 방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G. 달과 바람과 물에 대하여
사람들은 초승달이 너무 빨리 진다고 화를 내고, 그믐달이 너무 늦게 뜬다고 또
화를 낸다.
달빛 아래 독경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은 점점 더 속세에서 멀어져 가고, 달빛
아래 검법을 논하면 용기가 점점 더 떨치며, 달빛 아래서 시를 논하면 운치 있는
기상은 넓고 끝이 없어 세상을 멀리 떠나며, 달빛 아래서 미인을 보면 마음의
번거로움이 더 한층 깊어간다.
달을 벗삼아 놀려고 생각하면, 달이 밝게 빛나고 있을 때에 낮은 곳에서 우러러
보고, 안개가 깊어 달이 밝지 못할 때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좋다.
봄바람은 술과 같고, 여름바람은 차와 같고, 가을바람은 연기와 같으며,
겨울바람은 생강과 같다.
H. 한가로움과 우정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정색을 하는 일에 정색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일에 정색을 한다.
세상에 한가로운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한가롭다고 해도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가로움은 사람에게 글을 읽게 하며, 며승고적으로 여행을
하게 하며, 좋은 친구를 사귀게 하며, 술을 마시게 하며, 글을 쓰게 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겠는가.
구름에 햇빛이 비치면 운애가 되고, 골짜기를 흐르는 계류가 절벽에 이르면 폭포가
된다. 서로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이름도 달라진다. 이것이 우정의 존귀한
점이다.
정월 보름 날, 등절을 축하할 때는 담담하게 벗과 술을 마시고, 5월 5일, 용단절을
축하하려면 잘 생긴 벗과 함께 마시며, 7월 7일, 한 해에 한 번 견우 직녀가 만나는
것을 축하할 때는 유쾌한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며, 중추절에 보름달을 바라볼 때는
조용하고도 온순한 친구를 상대해야 하며, 9월 9일, 중양절에 높은 산에 오를 때는
로맨틱한 친구와 함께 마셔야 한다.
아는 것이 많은 벗과의 정담은 좀처럼 보기 드믄 진기한 책을 읽는 것과 같고,
시취를 아는 벗과의 정담은 우수한 작가의 시문을 읽는 것과 같으며, 조심성 많은
벗과의 정담은 성현의 경서를 읽는 것과 다름이 없고, 기지 있는 벗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소설이나 전기소설을 읽는 것과 다름이 없다.
조용한 선비에게는 반드시 몇 사람인가의 마음의 벗이 있다. (마음의 벗)이라는
것은 반드시 생사를 맹세한 벗을 의마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마음의 벗이라는
것은 수백리를 서로 떨어져 있어도 절대로 자기를 믿어 주며, 자기에 대해 나쁘게
평하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 또 그러한 소문을 들었을 때도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것을 변명하고 부인해 주는 사람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충고해 주는 사람들, 위기에 처했을 때는 도와 주고, 때로는 이쪽이
모르는 동안에 자기의 생각대로 빚을 정리해 주거나, 하는 일에 따라서는 지나친
간섭이라고 할 만한 일이라도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고 단안을 내려줄 만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마음의 벗, 즉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처첩보다도 친구 사이에서 이를 찾기가 더
쉽다. 군자의 관계에서 마음의 벗을 찾아보기란 더 한층 곤란하다.
(명저)란 선인이 일찌기 말하지 않는 것을 저술한 책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마음의 벗)이란 가정의 비밀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벗이다.
시골 생활은 좋은 벗들과 함께 살 수 있어야만 즐거움이 있다. 곡식 종류를
분별하거나 내일의 날씨를 알아맞히는 일밖에 모르는 농사꾼이나 나무꾼에게는 이내
싫증이 나고 만다. 또한 친구도 여러 가지가 있다.
시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첫째이고, 이야기를 잘 하고 정담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둘째이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세째이고,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이 네째이며, 술을 통하는 사람이 다섯째이다.
I. 책과 독서에 대하여
한창 젊었을 때 책을 읽는 것은 작은 틈을 통하여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늙어서 책을 읽는 것은 푸른 하늘 아래 노대에 서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독서의 깊이는 체험의 깊이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이다.
글자 없는 책(즉 인생 그 자체인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야말로 현묘한
말을 할 수 있다. 말로 설명하기 곤란한 길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부처님의 극히 높은
예지를 터득할 수 있다. 예나 이제나 찬란하게 빛나는 문학은 그 모두가 피와 눈물로
씌어져 있다.
(수호전)은 비분의 서, (서유기)는 정신적 각성의 서, (금병매)(호색 소설)는
수탄의 서.
문학은 탁자 위의 풍경이며, 풍경은 땅 위의 문학이다.
독서는 모든 기쁨 가운데서 가장 큰 기쁨이다. 다만 역사서를 읽으면 기쁨보다는
분함이 앞선다. 그러나 분노 속에도 기쁨이 있다.
경서는 겨울에 읽어야 한다. 겨울은 마음이 집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서는
여름에 읽어야 한다. 여름은 한가로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옛 철인의 책은 가을에
읽어야 한다. 사상에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후대 문인의 문집은 봄에 읽어야 한다.
봄은 대자연이 다시금 소생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문사의 병담은 대개 서재의 병학에 지나지 않는다(글자 그대로 지상의 병담이다).
무장이 문학을 논할 때는 대개 귀로 얻어 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술의 참다움을 살피기에 철저한 사람은 만물이 화하여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수 또한 책이 될 수 있고, 바둑도 술도 또한 책이 될 수 있으며, 달도
꽃도 또한 책이 될 수 있다. 현명란 여행자는 가는 곳마다 풍경이 있음을 안다.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술도 시도 풍경이다. 달도 꽃도 또한 풍경이다.
옛날 어느 문인은 말했다... 10년을 책읽기에 바치고, 10년을 여행에 바치고,
10년을 그 보존과 정리에 바치고 싶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보존에 10년을 허비해서는 안된다. 이삼 년으로 충분해야
한다. 독서와 여행은 내 소망을 채우기에는 두 배나 다섯 배라도 아직 모자란다.
내 소망대로 하자면 (황구연) 선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3백 세의 수명을 보존할
수밖에 없다.
(시는 시인이 가난해지거나 불행에 빠진 뒤에야 비로소 좋아진다)고 옛 사람들은
말했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할 이야기가 많고 따라서 자기를 유리하게 발표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출세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빈궁에 대한 한탄도
없고, 불행에 대한 아쉬움도 없이 언제나 바람과 구름과 달과 이슬에 대한 시만을
짓고 있다고 한다면 좋은 시가 나올 리 없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 시를 짓는
유일한 방법은 여행길을 떠나 눈에 띄는 모든 것, 산도 냇물도 들도 풍속도 생활하는
모습도, 때로는 전화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도 그 모든 것을 자기의 시의
소재로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노래와 탄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비애를 빌어온다면 구태여 가난해져서 불행해지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J. 일반 모든 생활에 대하여
번뇌는 우주의 토대를 받치고, 재품은 그 지붕을 칠했다.
군자에게 멸시받는 것보다는 시정의 소인배에게 욕을 당하는 편이 낫다. 유명한
학자에게 인정받지 못하느니 시험관에게 낙제를 당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사람은 시처럼 살아야 하고, 사물은 그림처럼 보여야 한다. 고요하고 차분하기는
하지만 생각하면 우수에 젖는 쓸쓸한 정경이 있다. 안개나 비 따위가 그것이다.
시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다. 병과 가난이다. 귀엽게
들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야비한 목소리가 있다. 꽃 파는 소녀의 꽃 사라는
목소리가 그러하다.
나 자신은 농사꾼이 될 수는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뜰에 물을 뿌릴 정도다.
나 자신은 나무꾼이 될 수는 없다. 풀을 뜯는 게 고작이다.
유감스러운 일, 화나는 일이 내게는 열 가지가 있다.
1. 책 겉장은 좀이 먹기 쉽고,
2. 여름밤은 모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3. 달을 바라보는 망월대는 비가 새기 쉽고,
4. 자칫하면 국화 잎이 마르기 쉽고,
5. 소나무엔 큰 개미가 잔뜩 끼고,
6. 대나무 잎은 한꺼번에 땅에 떨어져 쌓이고,
7. 물푸레나무와 연꽃은 시들기 쉽고,
8. 푸른 풀에는 뱀이 곧잘 숨고,
9. 울타리에 핀 꽃에는 가시가 있어 밉고,
10. 고슴도치에는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다.
누군가가 방안에서 창호지에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을 창 밖에서 보면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꽃이 되려거든 훤초(물망초라고 부르는 식물)가 되어라. 새가
되려거든 두견새가 되지 말라(피눈물에서 진달래가 자랐다고 한다)
태평한 세월에 청렴하고 강직한 지사가 다스리는 산천 호소지방에 태어나서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는 집안에서 자라서 이해성 있는 아내를 맞이하고, 똑똑한
자식들을 둔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완전한 인생이다. 산이나 골짜기를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사람은 도시에 있어도 산속 숲에서 사는 것과 같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며, 구름에 마음을 쏟고 있으면 명부도 신선이 사는 섬으로 화한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아 있다... 달을 불러 나의 슬픔을 달래 본다. 좋은 밤에 홀로
있다... 벌레를 불러 내 마음 속의 회한을 풀어 본다. 도시에 사는 사람은 그림을
풍경으로 보며, 화분의 모습을 뜰로 보고, 책을 자신의 벗으로 보아야 한다.
고명한 학자에게 아들의 교육을 부탁하는 것, 명산을 찾아서 시험 논문을 쓰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 유명한 문인에게 대작을 의뢰하는 것... 이 세 가지는 터무니
없는 사도다.
중은 술을 삼갈 필요는 없다. 다만 비속함을 떠나면 족하다. 여자는 문학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다만 무엇이 예술적으로 흥미 있는가를 이해하면 된다.
세무 관리가 덮칠 것으로 골머리를 앓는다면 지세를 바쳐야 한다. 중과 불법을
논하기를 낙으로 삼는다면 때로 사원에 시주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성이라는 이 하나의 유혹만 잊어버리면 모든 일은 문제없이 잊어버릴 수 있다.
석 잔의 술만 있으면 세상 만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술은 차를 대신할 수 있지만 차는 술을 대신할 수 없다. 시는 산문을 대신할 수
있지만 산문은 시를 대신할 수 없다. 원의 극시는 송의 서정시를 대신할 수 있지만
송의 서정시는 원의 극시를 대신할 수 없다. 달은 등불을 대신할 수 있지만 등불은
달을 대신할 수 없다. 붓은 입을 대신할 수 있지만 입은 붓을 대신할 수 없다. 여자
종은 남자 머슴을 대신할 수 있지만 남자 머슴은 여자 종을 대신할 수 없다.
가슴 속의 사소한 부정은 술로 지울 수 있지만, 천하의 부정은 검이 아니면 없앨
수 없다.
바쁜 사람의 뜰은 안채 바로 옆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가로운 사람의 뜻은
안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좋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사는 즐거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른바 고기잡이, 나무꾼, 농사꾼, 정원사, 승려이다. 뜰, 정자,
사랑하는 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른바
부유한 상인과 고관이다.
아픔을 참기는 쉬우나 가려움을 참기는 힘들다. 쓴맛을 견디기는 쉽지만 신맛을
견디기란 힘들다. 한가로운 사람의 벼루는 물론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나쁜
사람의 벼루일지라도 그래야 한다. 쾌락을 위한 애첩은 아름다와야 하겠지만 혈통을
끊지 않기 위한 애첩도 또한 아름다와야 한다.
황새는 로맨틱한 모습을 보이고, 말은 용감하고 늠름한 것을 보이고, 난은 속세를
버린 사람의 모습을 띠고, 소나무는 옛사람의 장중함을 나타낸다.
나는 언젠가 큰 나체 무도회를 열려고 생각하고 있다. 첫째 그 이유는 모든 시대의
재사들의 영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모든 시대의 가인들의 영과 화목하기
위해서다. 다만 이것은 참된 고승을 찾아냈을 때에 실행하기로 하고, 그 고승에게
사회를 부탁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급히 먹고, 훌륭한 경치를 급히 보고, 심각한 감정을 경박하게
나타내고, 아름다운 하루를 먹고 마시는 일로 지내고, 부를 오로지 사치로만
즐긴다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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