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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발견

제12장 신에 가까운 것은 누구인가

by FraisGout 2020. 5. 16.

    1. 종교의 부활

  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신의 뜻을 좇는 것이고 무엇이 신의 뜻을 좇지 않는
것인가.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뽐내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오늘날 내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다루게 되면 신을 모독하는 녀석이니, 예언자니, 하고 비난의 대상이
안될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대우주의 몇 억 분의 1도 되지 못하는 작은 지구,
그 지구의 또 몇 억 분의 1도 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감히 신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우주의 생명과 훌륭하게 조화된 관계를 갖게
되지 않는 한, 어떠한 생의 철학도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인간의 정신 생활에
대한 어떠한 사고 방식도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연구 제목이다.
다시 말해서 휴우머니즘의 본체이다. 그러나 그 인간은 넓고 큰 우주에 살고 있다.
인간 못지 않게 놀랄 만한 우주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보다 넓고 큰 세계의 기원과 숙명을 무시하고서는 참된 의미의 만족스러운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다.
  정통파 종교는 역사적인 발전을 계속해 나가는 동안에 엄밀하게 종교의 정신적인
테두리 밖에 놓여져야 할 것... 다시 말해서 물리학, 지리학, 천문학, 범죄론 또는
부인관 따위와 한데 뒤섞이고 말았다. 이것이 정통파 종교의 곤란한 점이다.
  만일 도덕 의식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른바 종교재정위의 일도 오늘날과
같이 그토록 거창한 것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의 관념을 깨뜨리기보다는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천국)과 (지옥)의 관념을 깨뜨리는 편이 편하다.
  한편, 과학은 현대 기독교도들에게 우주의 신비에 대한 새롭고 깊은 의의와,
에네르기를 바꾸어 이름한 명사 즉 물질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개념을 뚜렷하게
하고, 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임즈 지인즈 경도 말한 바와 같이, (우주는 커다란
기계라기보다는 위대한 사상인 편에 가까와)진 것 같다. 수학 그 자체가
수학으로서는 계산해 낼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리하여 종교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이제까지와 같이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 많은 말을
하기를 그만 두고, 그런 것은 종교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하고 깨끗이 승인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하물며 인류의 역사는 4천 년이라느니 백만 년이라느니,
지구는 평평하다느니 둥글다느니 접는 차탁형이라느니, 지구는 인도 코끼리 등 위에
타고 있다느니, 또는 중국 거북이가 떠받치고 있다느니 하는 따위의 전혀 터무니없는
제목을 정신적인 경험성을 말하는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더군다나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종교는 모름지기 정신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
틀림없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 영역이야말로 어떠한 의미에서나 꽃이나 물고기나
별의 연구와 겨를 수 있는 그 자신의 존귀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생활에 적응될 만한 종교는 사람들이 저마다 멋대로 교회에서 찾아내 오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생각한다.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리고 색유리창을 바라보는 것
같은 예식과 예배의 분위기 속에서는 신학상의 교의에 대하여 다소 의문을 품는 일은
있더라도 위대한 정령 앞에 무릎 꿇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예배는
참된 심미적인 경험이다. 그 사람 자신이 겪는 체험이다. 사실 산 위 나무들의 윤곽
뒤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는 것과도 비슷한 심미적인 경험이다. 그 사람에게 있어
종교는 의식의 최종적인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와 매우 가까운 심미적인
체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를 본다면 누구나 경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예배할 정도의 신은 매일매일의 조그마한 혜택을 부탁할 만한 너절한
신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북쪽으로 항해할 때는 북쪽으로 바람을 불게 하고,
남쪽으로 갈 때는 남쪽으로 바람을 불게 해 주는 그런 신은 아닐 것이다. 순풍을
불게 해 준 것을 신에게 감사드리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기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중요한 한 개인인 그가 북쪽으로 항해할 때는,
남으로 항해하는 사람들을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험이라면, 아무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 자기 본위의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존재하는 참뜻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경과해 온 괴상한 변질에
놀라움의 눈을 크게 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형태 그대로 종교를
정의하려고 하면 어리둥절해지고 말 것이다.
  나는 생각하거니와 우리네의 생활 속에 종교로서 남아 있는 것은 인생의
아름다움과 장대함과 신비로움, 또한 그 의무에 대한 매우 단순화된 존경하는
마음이며, 신학이 오랜 세월에 걸려서 종교의 표면에 뒤집어 씌운 정답고도 기쁘게
느껴야 할 제물이나 신조는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중세의 행복했던 정신적인 신권 정치는 결정적으로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영생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 이 사상이야말로 종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두 번째로 가장 큰 이유였으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는 미련없이
죽겠노라고 완전히 이승의 생활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영생, 영생 하는 말을 들으면 어딘지 아무래도 병적인 데가 있다. 사람이면서 영생
불멸을 바란다는 것은 나로서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향이 없었다면, 이렇게 어이없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일은 아마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시의 영역에 속하는 허구와 사실 가운데 자리잡은 아름다운 명상이라든가,
고상한 환상이니 하는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영생
문제는 매우 진지한 문제가 되었으며, 더우기 승려에 있어서는 죽음과 죽은 뒤의
생명이 어떠냐 하는 생각이 이 세상에서의 주요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하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반수의 사람들은 기독교도이건
이교도이건 죽는 것을 무서워 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그들은 천국과 지옥의
위협을 받는 일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도 별로 없다. 물론 자기가 죽은
뒤의 묘비명이나 묘비의 설계, 화장의 (가부)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인데, 이것 역시 반드시 천국으로 갈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죽으면 목숨은 촛불과 같이 꺼지고 마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영생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어 그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H. G.웰즈, 알베르트 아인쉬타인, 아아더 키이드경, 그밖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정복하는 것은 반드시 일류급 인물이 아니라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영생 사상 대신에 좀더 수긍할 수 있는 영생 사상을
지니고 있다. 즉 인종의 영생, 행위와 사상의 영생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뒤에 남겨
놓은 일이 여전히 후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인 생명 속에서 한 구실을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꽃을 따서 꽃잎을 뜯어 땅바닥에 버리더라도, 그 꽃이 풍기는 미묘한 향기는
공기 속에 남아 있다. 이런 영생 사상 편이 훨씬 멋있고 이치에도 맞으며 이기적인
데가 없어 좋다. 이런 참된 뜻에서 루이 파스퇴르나 루터 버어뱅크 토머스 에디슨이
우리들 속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란 필경 끊임없이 변화하는
화학성분의 결합을 추상적으로 일반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니까, 육체가
없어졌다고 한들 어쨌다는 것인가. 인간은 차츰차츰 자기의 일생이 영원히 흘러서
그치지 않는 큰 강물 속의 한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기꺼이 생명의 대본류에 자기의 역할을 맡기려고 하게 된다. 그다지 욕심 많은
생각만 갖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2. 어째서 나는 이교도가 되었는가

  종교는 언제나 자기만의 것이라고 샐각한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종교관을 세워야
한다. 진지하기만 하다면 결말은 어떻든, 신의를 어기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경험은 각자가 모두 옳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한 것처럼 각 개인의
종교적인 경험을 논의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 문제로 매우 괴로와한
정직한 영혼의 진지한 체험담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일반론을 피하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있다.
  나는 이교도이다. 이 성명 가운데는 기독교에 대한 반역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역이라는 말은 너무 가혹한 말이다.
나의 경우는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겨 기독교로부터 조금씩 멀어진 인간이며, 그
동안에도 사랑과 경건한 마음으로 죽을 힘을 다해 여러 가지 교리에 매달려
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모두 나에게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반역이라는
말은 이러한 심정을 올바르게 표현한 것이 못된다. 즉 증오하는 마음은 절대로
없었으니까 반역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목사의 집에서 태어나 한때는 기독교의 선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그 덕분에 종교적으로 고투한 모든시기를 통하여 묘한 나의 자연적인 감정은
반종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의 편이었다. 감정과 이성과의 싸움을 거쳐 점차로
어떤 입장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테면 속죄설을 단호히 부정하였다. 그것은
이교도의 입장에서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다. 우주와 인생에 대한
이러한 신앙 상태는 내적인 투쟁을 할 필요도 없고, 나에게 자연스럽고도 편한
마음을 갖게 해주었다. 지금도 그 점은 변함이 없다. 이런 마음의 과정은 갓난
아기가 젖에서 떨어지고, 잘 익은 사과가 땅에 떨어지듯이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사과가 떨어질 시기가 왔을 때에는, 나는 그 떨어지는 것을 막지 않는다. 노장
철학가의 말을 빈다면 도에 산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또 유럽인의 말투로는
자기의 영혼의 불길에 따라 자기와 우주에 충실하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성적인 진지함이 없다면 아무도 진실되고 행복할 수는 없다.
이미 진실되다면, 천국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교도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바로 진실된 것이다.
  그러나 (이교도)라는 것은 (기독교이다)라는 것과 같으며, 단지 말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성명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독자에게는 이교도라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뜻일 뿐이리라. 그리고 (기독교도이다)라는 것은 매우 막연하고
애매한 말이기 때문에 (기독교도가 아니다)라는 말로 오해되고 되고 있다.
이교도라고 하면 종교를 믿지 않고 신의 존재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석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신)이니 (인생에 대한
종교적인 턔도)니 하는 의의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위대한 이교도들은 자연에 대하여 언제나 몹시 경건한 태도를 가져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을 보통 흔히 쓰는 그런 뜻으로 해석하여, 단지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그러나, 심미적인 영감을 얻으러 가는 것은 이뿐만은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지금의 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단에 속하지 않고 보통의 정통파적인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이러한 식으로 생각해 두어야 한다.
  적극적인 이교도로서 중국의 이교도가 있는데, 이들은 내가 누구보다도 친밀감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이교도이다. 그들은 이 땅 위의 생활이야말로 인간이
염두에 둘 수도 있고 또 염두에 두어야 하는 모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이 세상에서의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아주 즐겁게 살아가려는 것이다. 인생의
깊은 슬픔도 잘 알고 있지만, 쾌히 그것에 직면하고, 인간 생활의 착하고 아름다운
면에 마주치게 되면 언제나 날카로운 관찰안으로 이를 보고 착하 일을 행하는 것 그
자체가 충분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천국에 가기 위해 선을 행하거나, 천국에
마음이 끌리고 지옥에 위협을 받거나 하지 않으면 선을 행할 필요도 없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런 (종교인)에 대하여 그들은 가벼운 연민이나 경멸을
느끼고 있다. 이 점은 나도 수긍이 간다. 이 설명이 옳은 것이라면, 자기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이교도 외에도 아직도 많은 이교도가 미국에도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현대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기독교도와 이교도와의 간격은 사실상 종이
한 겹의 차이다. 다른 것은 그러한 기독교가 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뿐이다.
  종교적인 경험의 깊이를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황청 추기관인 뉴유먼과
같은 신학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경험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란
하찮은 것이며, 오늘날까지 무서운 오해를 받았을 것이다. 현재 내가 보는 바로
기독교 신자와 이교도와의 정신 생활에서 서로 다른 점은 다만 다음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신이 지배하고 보살피고 다스리는 세계에 살며 끊임없이 신과
교섭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애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도하시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은 또한 때에 따라서는 신의 아들이라는 의식과
일치되는 데까지 높여지는 수도 있다. 물론 사람의 일이니까 모든 생애를 통해서
또는 1주일 동안을 통해서 또는 단 하루만이라도 이 수준을 줄곧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어서 그의 생활은 인간적인 수준과 참된 종교적인 수준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한편 이교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흡사 고아와도 같은 것이다. 천국에
언제나 누군지 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기도를 드린다는 영적인 관계를
통하여 자기의 복리를 지켜 주고 있다는 든든한 마음은 이교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기도교가 살고 있는 세계에 비하면 그다지 태평스러운 세계는
못된다. 그러나, 그곳에는 또한 고아로서의 은혜와 위엄이 있다. 필요에 의하면
독립을 배우고 자기를 지탱해 나가는 길을 알며, 원숙해질 수 있는 덕을 닦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아를 보면 알 수 있다. 모두 그와 같다.
  이교로 개종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나를 겁나게 한 것은 이지적인 신앙
문제는 아니었다. 신의 사랑을 받지 않고 세상에 내던져진다는 느낌이었다.
기독교도로 태어난 많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겠지만, 만일 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이 세상은 밑바닥이 없는 연못이 되고 말 것이라고 나는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교도가 이윽고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경지가 있다. 거기에 서서
기독교의 세계를 보면, 보다 따뜻하고 보다 유쾌한 듯이 보이지만 동시에 훨씬
유치해 보이며 아직 미숙하다고 말하고 싶은 데가 있다. 기독교 세계의 환각이
깨지지 않도록 가만히 놓아 두면 유익하기도 하고 활동하기에 편하게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참된 이교도의 생활 방법 이상의 것도 아니고 이하의 것도 아니다. 또
아름답게 채색된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뚜렷하고 굳건한 진실성이 부족하며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낮은 세계이다. 나라는 인간은 무슨 일이건 적당히 채색되어
있다든가 실질적인 진리가 없다든가 하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자진해서 치러야만 하는 댓가가 있는 법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입장은 살인자의 입장과 아주
비슷하며, 심리적으로는 똑같은 것이다. 즉 사람을 죽이면 다음에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죄를 자백하는 일이다. 이교도가 되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내가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그렇지만, 한 번 최악의 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의 평화란 여러분이 최악의 것을
받아들였을 때의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여기서 나 자신이 이교 또는 도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이교도의 세계가 서로 다른 점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 있는 이교도는 긍지와 겸허한 생각 때문에, 다시 말해서 기분상의
긍지와 이지적인 겸허한 마음 때문에 기독교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후자 편이 중요한 동기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선 정서적인
자존심(긍지)이 어째서 동기의 하나가 되었는가 하면 우리가 근엄하고 단정한 신사
숙녀로서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사실 외에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론상(또한 여러분이 굳이 분류하고 싶다면) 나의
이러한 생각은 전형적인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다음에 겸허한 마음, 이지적인 겸허한 마음이 가독교를 배격하게 하는 좀더 강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은 간단한 이유에서이다. 즉 이 우주의 극히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태양계, 그것의 극히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구, 나아가 그
작은 지구의 극히 작은 한 조각인 하나하나의 인간이 대 조물주이 눈에 아주 중요한
것으로 비친다는 것은 우리의 천문학상의 지식으로 미루어 도저히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뻔뻔스러움과, 그 교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는 태도는 나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어찌 백 만분의 일도 모르는 지극히 높은 존재의 성질을 생각하거나 그
속성을 가정하거나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개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의의 하나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일상생활의 실제에서 얼마나 우스운 불손한 태도를 발휘하고 있는가를
다음 두서너 가지로 알아 볼까 한다.
  나의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기 나흘 전에 큰 비가 내렸다. 상주 지방에서는 7월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만일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면 시가지는 홍수가 나서 장례식은
거행할 수 없다. 가족의 대부분이 상해에서 와 있었기 때문에 장례식을 연기한다는
것은 좀 괴로운 입장이었다. 집안 식구들 가운데 한 기독교도가 있었다. 좀
극성스러워 보였으나 중국의 기독교도로서는 그다지 드물게 보는 편도 아니었다. 그
본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데, 하느님은 자신의 자손들을
도와 주실 것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비를 멎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비가
멎었다. 마치 보잘것 없는 기독교도 집안에서 날을 연기하지 않고 장례식을 치를 수
있도록 비가 멎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부인이 한 말이 정말 걸작이었다. 우리
한 가족이 없었다면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창주에 사는 몇 만명의
주민들을 무서운 홍수의 희생이 되게 하셨을 것이라느니, 비가 멎은 것은 창주에
사는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기독교도의 한 집안을 위해서인 것이며,
예정대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싶으니 비를 멎게 해 달라고 기도드린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기 본위인 사고방식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느님이 이토록 이기적인 자식들에게 은총을 내리시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옛날 중국에 불교를 믿지 않는 학자와 신자인 어머니가 있었다.
  독실하게 불교를 믿는 어머니는 밤낮으로 천 번씩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부처님의 은총을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염불을 하기 시작하면 그녀의 아들이
번번이 (어머님도 참!) 하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어머니는 이를 몹시 귀찮게
생각했는데 아들이 말하기를 (이것 보세요 어머님, 부처님 역시 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머님이 귀찮아 하시는 것처럼 귀찮게 여길 거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했다는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아버지가 저녁 기도를 드리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나는 다감하고 종교적인 아이였다. 목사의 아들로서
나는 종교 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혜택을 받음과 동시에 그 약점 때문에
괴로움도 받았다. 종교 교육이 베풀어 준 은전에 대해서는 나는 언제나 감사했고,
그 약점을 자신의 힘으로 바꾸었다. 중국인의 철학에는 인생에 행운, 불운이란 따로
없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중국 연극을 보러 가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고, 중국 악사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것도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위대한 중국 민족의 전설이나 신화와도
완전히 절연되어 있었다.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 들어간 뒤로는 그나마 아버지에게서
받은 초보적인 중국 고전의 지식도 완전히 무시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오히려 좋았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뒷날 완전히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뒤에, 동쪽의 동화의 나라를 찾아간 서쪽 나라의 어린이처럼, 신선하고 발랄한
기쁨을 갖고 동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학생 시절과 청년 시절에 붓을
버리고 만년필을 쓴 것은 나에게는 가장 큰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의
준비가 다 될 때까지, 동양 정신 세계의 신선함이 손상됨이 없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베수비어스 화산이 폼페이 시를 뒤엎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폼페이의 기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돌을 깐 차도 위에 마차바퀴가 지나간 자국이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이 그토록 뚜렷하게 새겨져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서 받은 교육은 실로 나에게 있어서는 베수비어스 화산이었다.
  사색한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색은 언제나 악마와
손을 맞잡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젊은 대학생 시절이 나의 가장 종교적인
시대이기도 했다. 그 무렵에 기독교적인 생활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성과 무슨
일이나 이성으로 처리하려는 지성과의 싸움이 일어났다.
  톨스토이로 하여금 하마터면 자살하게 만들 뻔했던 고뇌나 절망을 이상하게도 나는
느껴본 일이 없었다. 어느 단계에서도 나는 나 자신을 빈틈없는 기독교도라고
느꼈고, 신앙에도 파탄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톨스토이와 비교해 볼 때 약간 더
자유주의적이고, 기독교의 교의를 받아 들이는 것도 적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언제나 산상의 수훈으로 되돌아 올 수가 있었다. (들에 핀 백합을 보라)고 한 싯구는
너무나 잘된 말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의심해 볼 수도 없었다. 나에게 힘을 부어 준
것은 이 싯구와 기독교도로서의 정신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교리는 급속도로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우선 표면적인 문제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기 1세기 무렵에 일어나리라고 예상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일어나지 않았고 사도 또한 부활되지 않았는데도, 이미오래 전에
깨져 버린 (육체의 부활)은 아직도 사도 신앙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의아하게 느끼게 한 일 중의 하나였다.
  신학과에 적을 두고, 신성한 것 가운데서도 가장 신성한 것을 배우게 된 뒤로,
신앙 가운데의 또 하나의 제목, 처녀 잉태가 논의의 대상이 되어 있어서 미국
신학교의 여러 선생들의 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는
세례를 받기 전에 우선 이 제목을 무조건 믿어야만 하게 되었는데, 같은 교회에
속하는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논의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분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진지한 태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또한 아무래도 옳은
일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또 나아가서, 천국의 (수문)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매우 하찮은 일에 대한
신학적인 주석을 공부하게 된 뒤로, 내 마음도 편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진지하게
신학을 연구해 보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내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교수들은 내가 기독교 선교사로서 알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장로도
내가 그만 두어도 좋다는 정도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를 가르친다는 헛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것이 그 모습을 달리한
하늘의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대로 계속해서 성복을 입는 몸이 되었더라면, 뒷날 지금처럼 쉽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었을는지 어떨지 의문이다. 그렇지만, 신학자에게 요구되는
신앙과 보통 일반 사람들이 개종할 때 요구되는 신앙과의 모순, 나는 이에 대하여
반항적인 마음을 느끼는데, 이것이야말로 내가 (반역)이라고 부르고 싶은 감정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다.
  요즘에 와서는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의 적이라는 생각을 나는 갖게 되었다. 나는
아무리 애써도 두 개의 커다란 모순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첫째의 모순은,
신학자들이 기독교의 모든 구성이 능금의 존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점이다.
만일 아담이 능금을 먹지 않았더라면 원죄는 없었을 것이며, 원죄가 없다면 속죄의
필요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능금이라는 것의 상징적 가치는 어떻든 간에 이것은
나에게는 자명한 이치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도대체 예수 그분의 가름침에 대하여
불충실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 자신은
원죄니 속죄니 하는 말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러 가지
문헌을 연구하여 나는 모든 현대 미국인들처럼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을 뿐더러
단순히 그것을 믿지도 않는다. 만일 신이 나의 어머니의 절반쯤이라도 나를 사랑해
준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의식하고 있는 최종적인 사실이다.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나는 이 진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또 하나의 명제는 이것보다도 더 한층 부자연하게 생각된다. 즉 이런 이야기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신혼 시절에 능금을 먹었고, 이에 신은 굉장히 노하여 두
사람을 벌주었는데, 이 두 남녀가 저지른 조그마한 죄 때문에, 그들의 자손인 인류는
대대로 맨 끝 대에 이르기까지 그 죄를 짊어지고 고통을 받아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이 벌 준 아담의 후손들이 신의 외아들인 예수를 죽였을 때, 신은 크게 기뻐하여
그들을 용서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설명을 할지 해설을 할지 모르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나는 도저히 묵인할 수가 없다. 이것이 나를 괴롭힌
마지막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나는 아직 열성 있는 기독교도였다.
자진해서 북평에 있는 예수교 계통이 아닌 대학인 정화 학당의 일요 학교에서
지도하여 많은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일요 학교에서 맞는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큰 고통거리였다. 마음 속으로는 전혀
믿지도 않은데, 맑게 갠 한밤중에 노래를 부르는 천사의 이야기를 중국 어린들에게
들려 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미 무슨 일이나 이성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사랑과 두려움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에게 행복과 평화를 느끼게 해 주는 전지전능한 신, 그
신의 사랑 없이는 행복이나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 하고까지 생각되는 신, 그 신에
대한, 이른바 하나의 미련이었다. 공포라는 것은 고아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하는
두려움이었다.
  마침내 구원이 왔다. 어느 날 나는 동료와 함께 토론을 하고 있었다.
  (만일 신이 없다면 사람은 착한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인간 세계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어째선가?) 하고 유교도인 그는 말했다. (사람은 본디 올바른 마음을 갖고 태어난
동물일세. 그러니까 올바른 생활을 해야 하는 걸세. 단지 그것뿐인 거야. 달리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일세)
  인간 생활의 존엄을 말한 이 한 마디는 기독교에 대한 나의 마지막 인연의 줄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이교도로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뚜렷하다. 이교의 세계는 기독교의 세계보다는
단순하다. 기독교와는 달라서 아무것도 가정하지 않는다. 또 아무것도 가정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올바르고 착한 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뿐인
것이다. 아무런 가설도 거치지 않았다. 이교가 선행을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좋은
행위가 좋은 행위 자신을 인정할 필요를 없앰으로써이다. 선은 그 자체가 선이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사람들에게 약간의 자선 행위를 하게 하는 데도 기독교적인
일련의 가설이나 가정, 다시 말해서 원죄니 속죄니 십자가니 천국의 축재니 천국에
있는 제3자를 위한 인간적인 서로간의 의무니 뭐니 하는 공연히 복잡하기만 하고,
아무도 그 사실을 직접 증명할 수도 없는 그러한 이야기 속에 사람을 끌고
들어가지는 않는다. 선행은 선행이기 때문에 선행이라는 설을 받아들인다면, 올바른
생활에 대한 온갖 신학상의 듣기 좋은 말은 장황하여 도덕적인 진리의 빛을 흐리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애는 최종적인 절대적 사실이다. 구태여 천국에 있는 제3자에 관한 것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기독교는 도덕성이라는 것을 공연히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죄라는 것을 무언가 조금 매력이 있고 그럴 듯해서
슬쩍 범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만들어 버렸다. 이교는 이와는 다르다. 이교야말로
종교를 신학에서 구해 내어, 아름다운 신앙의 소박함과 인간적 감정의 위엄성을
되찾았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1, 2, 3세기에 얼마나 많이 신학적으로 복잡한 일이 일어나고, 산상
수훈의 단 한 진리를 거북하고 독선적인 구성으로 바꾸어, 결국 성직이라는 것을
고마운 제도로 만들었는가. 나는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묵시라는 말 속에 그
이유가 포함되어 있다. 예언자에게 주어지고 사도가 이어 받아서 끝까지 지키는
특수한 신비 또는 신의 계획의 묵시라는 생각, 이것은 마호멧교, 몰몬교, 활불을
숭상하는 라마교, 에디 부인의 크리스찬 사이언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교에 있어서
인간을 구제하는 전매 특허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성직자는 모두 묵시라는 공통된 음식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 수훈에 담겨 있는 단순한 진리는 장식을 해야 하며, 그리스도가
그토록 탄상한 들에 핀 백합도 도금을 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생겨난 것이 (첫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 등이다.
  초대의 기독교 시대야말로 강한 설득력이 있어 반박하는 사람도 없었던 사도
바울식 논리도, 그 무렵보다는 훨씬 치밀해진 현대적인 비평 의식에 대해서는 이미
힘이 없고 나약한 것으로 생각된다. 엄중한 아시아식 귀납법과 그보다는 탄력이 있고
정교한 현대인의 진리관과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모순과 거리감, 여기에
기독교적인 묵시나 그밖의 묵시가 현대인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힘의 약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교의 세계로 돌아가 묵시를 단념하는 것에 의해서만
원시적인(나에게 있어서는 보다 만족스러운) 기독교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교도를 가리켜 무종교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다만 어떠한
종류의 묵시 따위를 믿기를 거부한다는 점만이 무종교라고 하면 할 수도 있다.
이교도는 모두 신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이교도는 모두 신을 믿고 있다. 중국 문학에서 잘 나타나는 호칭으로는
이른바 조물주라는 것을 믿고 있다. 다만 기독교와 달라서 중국의 이교도는 매우
정직하기 때문에 조물주를 신비로운 후광 속에 모셔 놓고, 거기에 외경과 존숭하는
마음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느낌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 우주의 아름다움, 수천 만에 이르는 훌륭한 창조의 솜씨, 별이 지닌 신비,
하늘의 장엄함, 인간 정신의 존엄은 그들도 또한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것으로 또
만족하다. 그들은 고통과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죽음도 또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또 생활의 은혜도 있다. 상쾌한 전원에는 시원한 바람도 불고, 산 위에는
밝은 달도 떠 있다. 인생의 명암을 적당히 받아들여 굳이 불평을 말하지 않는다.
하늘의 뜻을 좇는 일이야말로 진실로 종교적이며 경건한 태도라고 생각해 이를 (도에
따라 산다)고 말하고 있다. 조물주가 일흔 살에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일흔 살에
죽는다. (천도는 운행)하는 것, 이 세상에는 영원한 부정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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