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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생각의 기술

by Healing New 2020. 5. 16.

     제1장
     생각한다는 것

  1. 마음속은 항상 잡동사니로 가득

  우리들의 눈에 자주 띠는 풍경이지만-예컨대 10월 하순의 저녁 무렵, 석양이
정원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 대문에 서서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당신은
멍하니 어떤 생각에 잠겨 있다고 하자.-이때 누군가가 살짝 곁에 다가와서
  "뭘 생각하고 있지?"
하고 말을 건다.
  이럴 때 당신은 곧장 적당한 대답을 찾아낼 수가 있을까?
  또 밥이 되어, 책을 읽고 있다고 하자. 당신은 즐거운 독서를 할 때와는 달리 얼굴

온통 찌푸리고 책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럴 때
  "지금 뭘 생각하고 있지?"
  "그건 무슨 책이지?"
하고 갑자기 상대방으로부터 질문을 받게 되면, 조금 전 어느 날 저녁 무렵 때처럼
  "응, 뭐 별로..."
  "이런 일, 저런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지"
하고 대답해 버리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막연하게 아참, 이런 일은 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자신도 은연중 얼마나 차리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언제나 밝게 빛나고, 잘 정돈된 방과 같은
것이 아니고, 자신도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고, 어두컴컴하고 마치 모기가 사는 창고

같은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더구나 마음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려고 문을 열어 보면,
갑자기 고동색의 한 작은 모기 새끼가 얼른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사실 유쾌한 일은 못된다.
  "뭘 생각하고 있지?"
하고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들이 흔히 난처한 표정을 짓거나 때로는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대 우리들은 마치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짖거나,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으려고 두세 번 시도해 보고는 실망해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강아지와 흡사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진지하게 연습하면, 적어도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 시도하려면, 아주 멍하니 얼이 빠져 있을 때, 즉 우리들의 의식이
완전히 경계를 풀고 있을 경우에는 오히려 적당하지 않으며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데는 좀더 좋은 기회가 있다.
  예를 들면, 신문을 읽고 있는데 그 신문에 실린 어지러울 정도로 변화하는 다채로운
기사 거리에 약간 싫증나기는 했어도 아직은 그렇게 피곤한 상태가 아닌 때, 차를 타

있는데 차의 진동이 쾌적해서 마음을 놓을 상태가 되었을 때, 꾸벅꾸벅 졸음이 오는
듯한 기분인 데도 아직은 마음의 활동이 다소 느슨하기는 하지만 계속되고 있을 때,
또 강연을 들으러 갔는데 그 강연이 주위를 기울여 들을 만한 값어치가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난처하게 하지 않는 경우 등등 즉 우리들의 마음이 잠깐 동안
휴식하는 상태에 있을 경우가 자기의 마음을 활동하고 있는 상태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잇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의식을 갑자기 긴장시켜서, 3초나 4초 정도, 마음의
흐름의 일부를 멈추고
  '자, 나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자기 자신을 검사하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하는 데 성공을 하면, 당신은 틀림없이 계속 시도해 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 까닭은 어떤 의식의 실험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손쉬운
방법이며, 또 이 방법을 해보면 해볼수록 쉽게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마음의 헝클어짐

  "뭘 생각하고 있느냐구요? 그거야 당신이 쓴 책에 관해서지요. 내가 그 책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이 책을 쓴 당신 자신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내용에 무척 호감이 갑니다"
  "당신이 매우 열중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뭘 생각하고
계시느냐고 묻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만일 약간의 흥미밖에 가지고 있지 않으신다면, 
그건 별로 도움이 안되지요. 그런데 당신은 이 테마가 마음에 드십니까?"
  "네, 좋아합니다"
  "이 테마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흥미를 끈다. 즉 당신 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자극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물론 책을 읽는 동안에 떠오르는 생각은 당신 자신의 것이지. 결코 내가 말하는
바를 반드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쓴 문장에서 당신이 느끼는 여러
가지 생각, 그것이 바로 당신이 이 책을 즐겨 읽는 주요한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신 자신의 생각이지, 나의 생각이 아니며 그러한 생각은 결국 이
책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사실이 책에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걸맞은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실제로 책에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걸맞은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실상 나는 당신이
쓴 책을 충실하게 읽고 있었습니다. 하기야 외우려고는 하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외우려고 하면, 책을 읽는 즐거움이 없어져 버리게 될 것이니까요. 하여튼 나의
즐거움이 나혼자만의 것이라면, 당신이 말했듯이, 책에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흐트러뜨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참, 그렇군요"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메인 주(미국 동북부의 주 이름)에 있는 농장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옛날 당신의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창고가 하나
있었어요. 여름이 돼서 내가 거기에 찾아갔을 때, 그 창고에는 겨울 사과의 향기가
아직 남아 있었는데, 나는 그 향기가 몹시도 좋았어요. 소년 시절의 나는 몇 시간이건
거기서 깊은 생각에 잡기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에라스무스(1466-536, 네덜란드의 신학자)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항상 흐뭇한
행복감에 젖게 되는 그 초상화를 보면서 저 낡은 창고의 일을 상기하곤 한다. 사실
나도 2, 3분 전에, 에라스무스의 일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뚜렷한
생각이었다. 그 까닭은 언젠가 그 그림 앞에서
  "여기 자기 코를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이는 누굽니까?"
하고 나에게 물은 바보 녀석을 생각해 내고는 갑자기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기 때문
이다.
나는 이런 바보 녀석은 싫다. 이 일을 생각하면 그때마다 나는 기분이 언짢아서,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하도록 애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가 그렇게 틀리지는 않았군요. 당신은 이 책에는 쓰여 있지 않은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군요"
  "그건 그렇습니다. 이 책이 근거가 되어서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거지요 내가 내일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한참 열심히 하고 있는 중에 당신 책에 관한 것을 머리에
떠올리고, 문장 하나하나까지도 생각해 낼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런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그런데, 내일 내가 서명(사인)을 할 일 중에는, 나의 5년 분 정도의 수입에 해당되

큰 동이 걸려 있어요. 그러니까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

일이지요. 그렇지만, 이 책만큼 내가 열심히 읽은 것은 일찍이 없었어요. 아무리
되풀이해서 읽더라도 소용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은 이 책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또 다른 일에
대해서도 마음을 주고 있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요.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인데, 예를 들면, 월터 스콧(1771-1832,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
이라는 소설가는 새로 쓸 소설의 줄거리를 찾아내게 되면,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책을 읽어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유는, 독서를 통해서 두뇌의 작용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신이 이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지성이 당신의 의식의
어떤 부분-5분의 1내지 3분의 1 정도-을 이 책을 위해서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당신에게 있어서는 지성이란 외부의 일을 맡아서 해주는 일종의 우수한
 사무원과 같은 것이다. 당신 자신은 자기 일을 하고, 자기에게 있어서 어떤
이론보다도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를 들면, 주위에 퍼져 있는 사과의 향기를 맡으면서
몇 시간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일이 있는 창고이고, 당신이 좋아하는 에라스무스

초상화이며, 그 그림의 훌륭한 점을 알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혐오감 같

것들이다.
  이런 것들과 또 당신의 의식의 표현에 뚜렷이 떠오르지 않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독서하는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짓이라고 당신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자아의 입장에서 보면, 도리어 책 쪽이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이다. 
  글을 쓴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정성껏 펜을 잡고 있는 사이에 나의
자아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이야기해 보자.
  나는 두 시간쯤 전에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가랑비를 맞으며 길을 헤매고
잇는 가엾은 어미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가 마음에 걸리어 아무래도 이 글이 잘
 써지지 않더군요. 당신이 에라스무스를 깔본 바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3. 개울물과 같은 마음의 움직임

  지금까지 이야기한 대화와 똑같은 일이 자기 혼자서 하는 내성-활동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안쪽으로 들여다보는 것-에 의해서 밝혀지게 된다. 심리학자는
이러한 것을 '마음의 흐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정신을 따로따로
떨어진 여러 가지 기능으로 쪼개서 생각하는 잘못되기 쉬운 방법에 비해서는 정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데 커다란 진보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두뇌의 흐름은 현실적으로는 기억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정되어진 이미지
·
감정, 주의, 지성 또는 부분적으로는 지적 판단을 흐릿한 혼란 상태인 채로
흘러 보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마치 강이 그 흐름을 멈추지 않듯이 잠자는 동안에

결코 멈추는 일이 였다
  그러나 마음의 흐름이란 마치 개울물과 같은 것이어서, 그 흐름은 항상 방해를
받기도 하고 끊기기도 하고 빙빙 돌면서 혹은 굽이치면서 멋대로 흘러간다. 우리들의
내부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가 있지만, 잠깐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말고 유심히 잘 관찰하면 심리적인 연쇄의 변환과
재현이 거듭 되풀이되면서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연쇄가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미지가 생각에 따라서 연쇄가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막 나와 대화를 나눈 사람은 여러 가지 많은 이미지-강물의 흐름 속의
잔물결과 같이 재빨리 부서져서 잡기가 힘들 정도의 자질구레한 반사작용-로 마음이
가득 차 있었지만, 그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그 중의 작은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시골집의 창고,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의 초상화, 그리고 그 바보 녀석 등
이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것은 만화경 속의 크고도 밝은 조각과 같은
것으로서, 독서를 하고 있는 중이라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2, 3분마다 이들 이미지로
되돌아가곤 한다.
  이와 같은 이미지가 그에게 주는 것은 우리들에게 다른 이미지가 작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란 점은 되풀이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그 이미지의 몇 가지에 마음이 끌리기도 하고 또 다른 몇 가지 이미지에
대해서는 반발하기도 한다. 낡은 사고 창고의 이미지는 마음을 듬뿍 채워 준다.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도 그렇다. 그 바보 같은 녀석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바보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일기도 한다. 그 까닭은
그 사나이가 나를 몹시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기분
좋은 우월감에 젖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불유쾌한 광경에서 가끔 유쾌한 감정을 구할 수도 있다. 마음의 흐름은 개울물처럼
관목이 우거진 양쪽 기슭 사이를 재빨리, 또 매우 깊게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물 속

뚜렷이 들여다보기란 몹시 어려운 것이다.
  #1 우리들 심적 작용의 거의 전부는 이미지라는 것과 끊을 수가 없으며,
이미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접에서는 주위의 동물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개의 뇌 속에는 이미지·
소리, 냄새가 백과사전만큼이나 대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면
개의 행동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다.)
  #2 이들 이미지는 욕구나 혐오,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것들에 밀접하게 대응(對
應)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바란다,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존의 기본적인
조건과 결부되어 우리들 심리의 궁극적인 동기가 되고 있다.
  #3 사람들의 생각이나 주고받는 대화, 생활방식이나 생활 그 자체로 미루어 보아
어떤 이미지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 주고 잇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이미지를 알아내어 평가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기호의 조사나 평가와
상호 보완되어 행동에서 미루어 판단하는 것 이상으로 정확하게 우리들의 값어치를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행동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하기로 하겠다.

  4. 이미지야말로 사색의 첫걸음

  지금까지 말한 것은 사상과는 아무런 관계없다고 하겠다. 분명히 우리들의 머리는
가끔 이미지나 기호, 바라는 것 또는 바라지 않는 것에서 떠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뭔가 틀림없이 가장 정도가 높은 마음의 작용, 형태가 없는 추상적인
개념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수학이나 철학의 체계 같은 것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진화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른바 논리란 어떤 것일까?
  이와 같은 연구는 '과학 사상'의 분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기술'만을 문제로
삼는 우리들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분야이긴 하지만, 그런 점에 관해서 여기서 부연해
둔다는 것도 우리의 목적에 전혀 무익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사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순수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이미지를 중개하지 않고도 작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지의 도움을
빌지 않고도, 실용적, 또 때로는 이론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마음의 움직임의 과정을 관찰함으로써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보통 '사상'이라고 할 때, 사람의 머리, 또 때로는 두뇌의 내부를
시각화해서, 그것도 흐물흐물한 기분이 좋지 않는 뇌로서가 아니고, 아마도 받아들인
데이터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복잡하게 마치 전선을 배선한 듯한 것, 혹은 최고로
정밀한 기계 장치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없을까?
  정신작용 또는 기능이라는 말은 그리 특이한 말은 아니다. '보다' '알다'는 말은
희랍어로는 같은 말로 쓴다 '숙고'라고 하는 말은 매우 지적인 냄새가 풍기는
말로 들리지만, 이것은 원래 '무게를 달라'는 뜻이다.
'생각하다'는 것은 이런 것들보다는 한결 거친 '...인 듯하다'를 의미하는 말에서 온
것이다. '논리'와 '연설'은 같은 말이고 또 '관념'과 '이미지'도 결국은 같은 말이다.
  우리들은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회전하는 이미지의 필름은 의식할 수가 있지만,
좀처럼 쉽게는 보여지지 않는 그 밖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을 하지 않는다. 

두 가지 세트의 이미지는 스피드를 바꾸어서 시종 서로 겹쳐지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일들에 마음을 팔고 있는데, 예기치도 않던 결론이 불쑥
튀어나오곤 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메인 주에 있는 집의 기억에 정신이 사로잡혀 있던 아까 그
신사는,
  "읽을 필요가 없을 때 읽는다는 것은 좋지 않는 일입니다"
라고 하는 내부로부터의 소리를 갑자기 듣고는 당황해서 책을 덮어 버리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그 까닭은 앞에서 말했듯이 메인 주의 집에 관한 필름 밑에 겹쳐져서, 얼마 전에
진찰을 받고 난 후에 잠재의식에서 거의 한 순간도 떠난 일이 없는
안과의사의 이미지가 나타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의식 속에 세 개의
층(아마도 그 이상일지도 모를 일이지만)이 겹쳐진 것이다.

   생각의 기술이라는 책-메인 주의 집-안과의사

  자, 여기서 아까 그 신사는 예상도 하지 못할 결론을 끄집어낼지도 모른다.
  '나는 뉴저지 주의 그 집을 사기로 하자'
  이와 같은 결론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것처럼 보여서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앞에서 본 그 겹쳐지고 또 겹쳐지고 한 이미지에서 분명히 기인하고 있다. 
  #1 메인 주의 집+속도가 느린 열차+두 군데의 갈아타는 곳+존스 씨 집이
가깝다=고맙지 않다.
  #2 래이크드 씨 댁(부동산업자에게서 사도록 권유를 받은 집)+쾌적한
열차=가깝다+모기가 없다=잠이 잘 온다.
  #3 잠+가깝다+소나무숲+모래땅=매력적=미소=산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마치 번개처럼 빠르게 하나하나 이어지면서 사고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한 가지의 연속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이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때에는, 직접 관계가 없는 것들이
어쩐지 자꾸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가 가끔 있다.
  우리들은 이미지로 생각하는 것보다 말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고급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실상 그런 것이 아니고, 언어나 글귀로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돈을 계산할 때 '더하기 일흔 다섯'이라고 중얼거리거나, 아니면 '두번 다시 이

난처한 일을 당해서는 안되지'라고 혼잣말로 자기에게 말하는 습관에서 오는
착각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느 쪽을 바라보더라도 온통 '이미지'에 둘러싸요 있다고 할 수
있다. 추상이라고 하는 조작도 이미지의 산물로서 반드시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역사를 생각할 때에는, 거의 위대한 인물이나 그 위대한 시대를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또 유일한 실험을 상기하지 않고 과학을 말할 수는 없다.
  '진리'라고 하는 정신적인 말도 분명히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들을 

그 말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라든가, 진리의 아름다움을 우리들에게
인식시키는 어떤 특정한 연구 따위와 결부시켜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또다시 모습을 나타내 보이게 된다. 기하학에서조차도 도형과 이미지가
얼마나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가는 말할 필요가 없다.
@ff
     제2장
     진정한 사색


  1. 사상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여러 병의 의과대학생이 환자의 침대를 둘러싸고 서서, 긴장한 표정으로 환자를
지켜보고 있다. 이 환자는 기록에 남을지도 모를 매우 특이한 병으로 권위 있는
의학교수가 환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있다. 교수의 온 신경은 지금 귀에
집중되어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예민한 감수성을 그 얼굴에 떠올리면서, 교수는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어떤 작은 소리라 할 지라도 놓칠 수가 없다. 이 명의에게
있어서는 흉막의 주름 하나라도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노라면 실제로 눈으로
보듯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학생들은 굳게 믿고 있다.
  30분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이 환자는 마치 수술대 위에서 수술이라도 끝난
것처럼 몸의 모든 기관의 내용이 샅샅이 밝혀진다. 이 의사의 놀라운 지성이 하나의
흉막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수행해 냈던 것이다.
  당신은 세잔(1839-1906,프랑스의 이상파의 대표적 화가)의 자화상, 즉 사막에서 볼
수 있을 듯한 간단한 도구로 그린 놀라운 걸작을 알고 있는가? 깨끗하고, 그러면서도
차가운 강철과 같은 날카로운 그의 눈은 한번 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예술가는 가끔 이와 같은 눈, '현실'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물의 본질에 똑바로
육박하도록 만들어진 눈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눈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시대를 앞질러 내다보고, 사람들의 공포를 꿰뚫어 본다.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7년에, 파리의 살롱에서 여섯 사람이 모여서, 러시아 황제와
루이 16세, 러시아 왕비와 마리 앙투와네트, 케렌스키(11월 혁명의 임시정부의 수상이
며,
후에 실각하고는 망명했다)와 지롱드 당(프랑스 대혁명시대의 온건파)을 각각 비교해
보는,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시간 보내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즉 러시아의 장래를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서 유추해서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자네는, 위기는 이미 사라졌다고 보는가? 그러나 저 병사 노동자평의회라는 것은
뭐지? 거기에서 뭐가 나타날지는 두고 보면 곧 알게 될 걸세"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것은 놀라운 직관으로서, 2,3주일 후에는 온통 사태가 뒤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으로서 후일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일도 가끔
있다.
  또 때로는 사상가들이 말솜씨가 없었다던가, 그의 사상을 일반인이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던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후세에 가서 비로소
그 사상가의 생각하는 바가 평가를 받고 널리 인정을 받게 되는 일이 있다.
  네덜란드에 망명했던 데카르트(1590-1650, 프랑스의 철학자)나 그 제자로서 렌즈를
가는 직공 노릇을 했던 스피노자(1632-1677, 네덜란드의 철학자)라든가 전형적인 시골
선생이었던 칸트(1724-1894, 독일의 철학자)-그들의 조촐하고 검소한 생활과 후세에
남긴 그들의 정신적인 유산 사이의 엄청난 차이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사상가를 특징 지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첫째로 비전이라
할 수 있다. 사상가란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

말의 참신함, 일종의 계시와도 같은 그들의 성격, 거기에 수반하는 매력, 이런
것들은 모두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인습이나 풍조에 따라 서 틀에 박힌 형식을
되풀이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만, 사상가는 정신적 자유를 충분히 발휘한다.
신성불가침이라고 할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조차도, 그들은 맹목적으로 따르게 할 수

없다.
  16세기에,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돈다는 엄연한 사실, 즉 당시로서는 사실이었던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이론이었다. 그런데도 갈릴레이(1564-1642,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천체망원경을
발명했다. 당시의 천동설에 대해서 지동설을 주장함)는 그건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지적 용기는 육체적 용기 이상으로 우리들을 경탄케 했다.
  이와 같이 자기의 힘으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교만하게
보이기도 하고, 자만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에

불만을 느끼거나 지나친 자신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비굴해 하거나 하지 않고 모든
우상을 모조리 파괴하고 오직 일에만 전념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가끔 독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봄으로써,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다루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생각하는 인간은 뛰어난 교사인 셈이다.

  2. 어디에 평가의 기준을 두느냐?
  그러면 어떤 사상이 고귀하고 어떤 사상이 저열한가, 그 평가는 어떻게 해야 될까?
진정한 사상은 보통 일상생활 속에 뒤섞이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인지를
알기가 매우 힘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성을 하면, 이 얼른 보기에 곤란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쉽게 알 수가 있다. 그 결과, 우선 이미지, 다음으로는 이들
이미지에 대응되는 기호, 마지막으로 지적 데이터를 잘 결합시키는 정신적
에너지가 인간의 사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맛있는 음식물, 좋은 옷, 춤이나 여행이나 친구와 같은 이미지로 정신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경치라든가 건축물, 고아한 멋이나
골동품의 매력, 교회나 미술관, 위대한 예술적 생애의 회상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우리들이 말하는 사상과는 인연이 먼 것이라는 점을 뚜렷

알 수가 있다.
  예술가가 일반 사회인들보다 뛰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이미지가 다른
사람의 이미지보다 뛰어나 있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러스킨(1819-1900, 영국의 저술가, 미술평론가)이나 월리엄 모리스(1834-1809, 영국

시인 미술가)는 감각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이미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향상, 행복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대문에 우리들은
그들에게 경의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에 우리들의 마음에 어떤 비전이 우러나오며,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를 들여다보면, 사고란 어떤 의미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감동에는 차이가 없다.

  빼어난 사상가의 곁에서 잠시 귀를 기울여 볼 수 있는 기회를 다행히도 갖게
되었다고 하자. 이 때에 우리들의 마음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
  우리들은 사상가의 '생각하는 기술'의 놀라움과 뛰어남에 우선 경탄하고 찬미해 마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찬미하면서 낙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부글부글 저항감을
불태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나는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무미건조한 사람으로 보였음이 틀림없어. 부끄러운
이야기다. 그러나 할 수 없지. 나에게는 자신을 좀더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기회

없었기 않았는가?"
라고 하면서 애석해 하면서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또 콧대가 좀 센 사람들은 좀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 사람, 자기가 유명하다고 해서 그렇게 뽐낼 것까지는 없잖아. 나와 저 친구
차이는 단지 운이 좋았느냐 나빴느냐의 차이밖에 없잖은가"
  한층 단순한 사람들 같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사람은 사물을 생각하는 방법과 요령을 잘 터득하고 있지. 그리 대단치도 않은
비결인 셈이지. 그 요령만 안다면 나들 뭐 그만큼 안될라고?"
라고 퍽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단순하고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 같으면,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까? 뛰어난 재능과 자기네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차이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오히려
친근한 감정을 가지고 이 사고의 명인들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가 있을까? 그들의 '우둔함'때문에 뭔가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에게도 그들대로의 '생각하는 기술'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둔한' 사람들은 생각하는 기술을 몸에 밸 정도로
익히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심사숙고한 끝에 말이 나오는 마음의
상태를 그들은 그들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체험'이
실마리가 되어서 그들은 사상가들에게 친근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물론 결여되어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언어이다. 또 때로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조잡하고 거짓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오묘한
오르간의 연주 소리나 '출발의 노래'의 멜로디를 들었을 때에는, 마음에 찡하고 울리

무엇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상태가 '종달새'에게서 시흥을 느끼게 되었을
때의 셸리(1792-1822, 영국의 시인)의 도취와는 비교가 안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 감동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지적인 인상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신에게로부터 공평하게 받는 것이다.
시골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들, 그리고 논밭을 바라보는 눈에 담겨져
있는 애정과 감동의 깊이도 시인이나 화가의 감흥과 그 본질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같은 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갚은 감동을 느껴본 경험들이 있다. 이와 같은 인상이 거친
일상생활 속에서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소중히 지키려고 한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비길 데 없는 소중한 인상을 간직하고 키우는 태도, 즉 회상 속에 창조적인 사고의
출발점이 있으며, 스프링의 튕기는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4. 생각하기 쉬운 상황

  별로 의도한 것도 아닌데 문득 마음에 생기가 솟고 감수성이 맑아지는 일이 있다.
밤샘을 하면서 일을 할 때, 불면증에 걸렸을 때에 이상하게도 정신이 맑아진다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생각'이 혼자서 앞질러 달려가곤 한다.
사색가나 예술가들은 이와 같은 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을 택한다.
  #1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심하게 소모되는 것을 알면서도 밤을 새운다.
  #2 식사하는 것마저 잊거나 시간을 늦춘다.
  #3 밤길을 혼자서 쏘다니거나 헤맨다(찰스 디킨즈).
  #4 조용한 여관이나 시골에 틀어박힌다.
  #5 종교가들처럼 때로는 은둔해 버린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사물을 잘 생각할 수 있는 상태란 쉽게 말한다면
  #1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다.
  #2 마음 그 자체가 맑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될 필요가 있다. 이 조건에 맞는 경우는-여기에 그 한 예를
들어보면-열 살 미만의 어린이의 경우이다. 이 나이 또래의 어린아이들은
시인이기도 하고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놀라운 존재들이다. 어린이들은 아직은
어른들의 흉내를 내는 일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은 '고양이'처럼 스스로
만족하고 있으며, 자유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대상'을 자기의 마음을 통해서
보는 매력에 취해 있는 존재들이다. 뛰어난 화가나 시인의 외모가 어린이와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생각해 보면 바로 이런 공통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들이 사무실에서 안락하게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방에 아홉
살 난 소녀가 들어와서 참견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 아름답다는 건 뭐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지, 응?"
  나는 그 소녀의 아버지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 이 소녀의 말에는 뭔가 숨기려고
하는 것이 전혀 없는 지성의 번득임을 볼 수가 있다.
  어린아이들의 '지성'은 이 내·외부의 모방에 작용하기 시작해서 그 번득임을
잃어버리고 만다.
  가정이나 학교의 교육이 모방이라는 형태의 '훈련'을 어린아이에게 강요하고 있다.
대다수의 어린아이들은 거기에 저항하지 못한다.
  블레이크(1757-1827, 영국의 시인, 화가)나 휘트먼(1819-1892, 미국의 시인)은 열 

미만의 어린이만이 지닐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간직할 수
있었던 매우 특이한 예외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ff
     제3장
     강박관념 또는 열등감
     사고를 방해하는 것(I)

  1. 사고를 방해하는 것

  사고를 방해하는 것으로서 제일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말하자면 즉
선천적인 '무능력'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러한 무능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무능력에 관한 문제는 이 책의 독자적인 여러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어떤 장애라도 시달리지 않는 천재에 관해서도, 실상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책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모두 다 일고 있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바보와 천재의
중간에 있는 우리들과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향상을 바라는 한에 있어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 바보도 천재도 아니라는 말은
바로 우리는 사고의 방해가 되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저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장애물로 들 수 있는 것은 바로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강박관념 또는 열등감
  #2 남의 흉내를 내는 것과 군거성, 정신적 기생을 만들어 내는 것.
  #3 교육
  정상적인 사고를 이따금 왜곡시키는 것으로는 정열을 빠뜨릴 수는 없지만, 이 책에

의도하는 것은 사고를 창출하는 방법이지, '사고의 안내'가 아니므로 정열의
작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검토하지 않기로 하겠다.

  2. 처치 곤란한 기생물

  "당신은 자기 마음속으로부터 강박관념 또는 열등감 따위를 자기 스스로 없앨 수
있습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저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강박관념이나 열등감) 때문에 밤낮으로 애를 먹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뭔지 분명치는 않지만, 확실히 그 비슷한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이러한 강박관념이나 열등감은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우리들이
사물을 생각하고, 따지고, 검토하고 하는 이상은 이와 같은 장해가 있음을 깨닫게 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를 들어 이야기해 보자.
  여기에 평범한 한 청년이 있는데 때마침 어떤 친구가 프랑스 사람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광경은 매우 '폼 좋게' 보였다.
  청년은 크게 자극을 받게 되었다.
  "응, 나도 하면 되겠지, 안 될 리가 없어"
  집에 돌아와서 곧장 학생시절의 참고서를 끄집어내서 먼지를 털었다. 그러나 그의
학습은 낮에 잠깐 들었던 그 친구의 유창한 회화처럼 결코 수월하지는 않았다.
동사의 활용 변화를 외우려고 하니 거추장스럽고 짜증스러웠다. 전에도 동사변화를 못
외우고 내동댕이친 적이 있다.
  길고 긴 기초문법을 통째로 외우려면 몹시 짜증스러운 노릇이다. 그래서 청년은
도중에서 점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기억력이 약할 뿐만 아니라 끈질긴 데도 없지. 프랑스어를 

배울 필요가 정말로 있는 것일까? 더구나 해야 할 공부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은가? 셰익스피어를 읽는 편이 낫겠어.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읽고 있는
추리소설을 다 읽으면 하룻밤에 일막씩 읽어 가도록 하자"
  이 청년이 그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 하는 점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기로
하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청년이 어학 공부를 단념하게 되는 이유이다.
  '나는 기억력이 약하다'
  '나는 끈질긴 성질이 못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이런 식으로 규정해 버리고 만 것이다. 정말로 그럴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 같으면 이 청년에게 당장에 반문해 보고 싶다.
  "당신은 자기 스스로 기억력이 약하고, 게다가 끈기도 없다고 체념하고 말았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는 얼굴이 발개지면서 고개를 숙이겠지. 아니면 벌컥 화를 낼지도
모를 일이지. 어쨌든 이 청년은 자기 본심을 털어놓은 셈이기는 하지만
자기 평가의 방법은 틀렸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청년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열등감이란 처치가
곤란한 '기생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이
열등감이란 괴물은 곧장 공격해 온다.
  이 청년의 경우, 끈기가 없다고 중얼거린 그 순간에 영락없이 열등감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적을 알되 자기를 알지 못하면 열등감에 이기지를 못한다. 잠시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강박관념이 집을 짓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들이 가끔 '나는 그런 것은 잘못해'라고 간단히 단념해 버리는 것도, 대개는 이
강박관념 때문이다.
  열등감이 나타나는 것도 앞의 예에서 보듯이,
  #1 이미지에 직접 작용해 오는 경우가 아닐 때
  #2 그 때의 사고의 대상이 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이미지(목적이나 소원)를
끄집어내서, 그것으로 하여금 사고 속을 뚫고 들어오게 하는 일이 있다.
  #3 의 경우에는, 열등감이 보다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연기는 지성의 적

  우리들 주위에는 다른 사람의 성격을 흉내내면서 뽐내고 다니는 사람을 가끔 볼 수
있다.
  정말 치사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노력하면 할수록 자기 성격의 특징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절망적인 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예를 여기서 두세 개 들어보기로 하자.
  #1 에드워드 7세(1901-1910,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또는 조지 5세(에드워드 7세의
둘째 아들)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영국인
  #2 유명인(예를 들면, 알프레드 D.뮈세, 1801-1857, 프랑스 시인)과 똑같은 옷차림

하고 파리의 거리를 활보하는 프랑스인
  #3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을 흉내내고 싶은 정치가.
이런 불성실성은 정치가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4 아직 외국어를 완전히 마스터하지 못한 주제에 몸짓이라든가 말투만은 그럴
듯하게 꾸며대는 사람, 이런 가짜는 그 나라 사람에게 걸리면 여지없이 탈이 벗겨지고
마는 경우가 있다. 가짜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도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5 위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 살롱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어떤 책의 이름이 화제에 올랐다고 하자. 그럴 때, "나는 그 책은 읽지를 못했어"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여기에 든 위선자 축에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이따금 서점에서 책을 살 때에도 '누구나 사가지고 다니니까 나도
한 권!' 식으로 사게 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형편이므로 책을 사기는 해도, 아마도 그

꽂아 두는 데 불과할 것이다.
  #6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
  젊은 층에게 의외로 많은 것이 이런 거드름쟁이들이다.
  미술전람회나 음악회에 다녀온 후 자기의 감상력을 자랑하는 것은 의외로 쉬운
것이다. 외국어나 전문 술어를 알지도 못하면서 빌어서 쓰는 재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최저의 연기자들이다.
  저 부인은 허영심이 많다거나, 그 사람은 연기가 서투르다거나, 하는 식으로 인물평

하는 일은 흔히 있다. 비평의 대상이 된 사람은 '연기'가 서투르다는 점 때문에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이런 일은 모두가 제 탓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이 비웃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은 과연 어떤가라는 의문이
솟아날 것이다.
  그들은 지금 #1-#6까지에 열거한 연기를 하는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우리들 보통 사람들은 정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해 본다면, 결코 그렇게 큰
소리치거나 뽐낼 수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실보다는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다는, 누구 나가 가지

있는 욕망이야말로 지성의 적이다.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지식이나 정보를 마치 제 것처럼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똑같은 위험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 자신의 것이
아닌 지식은 그 사람 자신의 사고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자기 스스로가 생각하는 힘을
악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껍질만을 외우려고 하는 태도에도 열등감의 유혹이
깃들기 쉬운 것이다.
  '외우려는' 생각만으로 연설을 듣고, 시를 읽고 하면, 확실히 빨리 외어지겠지요.
그러나 그 연설의 요지나 목적, 또는 그 시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

된다.

  4. 선입의식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두 가지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는 힘은 1+1=2와 같은 덧셈이 될까? 사실은 이와는 반대로 1-1=0과
같은 뺄셈이 되고 만다.
  지금 여기에 '진짜' 명화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미리 누구에게서
  "저 그림은 모조품이야"라는 말을 듣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당신은 그 그림 앞에 섰
을 때,
  "이 그림은 훌륭한 작품이다"라고 생각하게 될까?
  이 짓궂은 친구는 도중에 사실을 말해 주었다.
  "사실은 이게 진짜야"라고.
  그 순간, 명화가 갖는 박력이 당신이 이미지를 단번에 뒤바꾸어, "응, 그러면
그렇지. 과연 훌륭한 그림이야"라고 몇 초 전과는 180도로 다른 흥분을 불러일으킬 것
이다.
  '선입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이미지를 흐리게 만드느냐를 설명해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또 하나 다른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즉 이 남자가 자기의 눈을 전혀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그에게 그림을 '감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별문제로 하고라도 열등감은 이와 같은 자그마한 암시가 있기만 해도 이미
우리들의 사고를 방해한다는 사실이다.

  5. 사고는 쓴다고 닳는 것이 아니다.

  아직 그럴 나이가 되지도 않았는데 아주 지치고 맥이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 특히
인텔리들에게 많은 타입이다. 그들이 그렇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사고하는 것의 효과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고하는 것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사고'는 쓴다고 결코 닳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 뿐더러 반대로 쓰지 않고
놓아두면 퇴화해 버리는 것이다.
  시끈가오리(우리 나라 근해에도 있는 어류로서 길이는 40cm 정도이고 회갈색.
30-40볼트의 한 쌍의 발전 기관이 있어 몸에 전기를 통하게 하여 적을 공격하고 자기

방어한다)의 흉내를 내어서는 안된다. 소모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방전을
주저하거나 하면, 제대로의 일은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고의 방전'이 신경의 소모를 가져온다는 환상은 뿌리가 몹시 깊어서 가끔
'사고의 전문가'들까지도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문학가 중에는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많은 것 같지만, 그들 작가는
미술가들이 따르지 못할 자유분방하고 시원스러운 그림을 그린다.
  반대로 직업적인 화가들이 쓴 문장도 가끔 같은 경향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의 활달한 문체와 재치 있는 문장은 도리어 문학가들이 부러워할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예에서도 뚜렷이 알 수 있듯이 예술가들은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자꾸 떠오르는 '환영'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많다. 이러한 강박관념

특히 그들이 '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라고 생각했

때 더욱 강화되는 것 같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작가들일
것이다. 그래도 "알고 있어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고 그들은
털어놓는다. 떼느(1828-1893, 프랑스의 철학자, 역사가)와 같은 사람도 환영에 사로
잡혔던 체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는 여전히 쓸데없이 '세계를 그려내는 방법'을
계속 추구했다. 이러한 욕망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고민했다"고 말하고 있다.
  칼라일(1795-1881, 영국의 평론가, 사상가)의 경우는 언제나,
  "너는 언제나 사물의 한 면밖에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속삭이는 환상과 필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6. 자기 자신의 그림자에 겁을 먹지 말라

  작가들은 평론가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론가들이 어떤 식으로 비평을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평론가의 공격을 받으면 펜이라는 무기를
휘둘러서 반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상상상의 독자'라는 그림자이다.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수퍼 맨'의 그림자에 겁을 집어먹는다는 것은 기묘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들로서는 이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몇 번씩이나 이야기된 적이 있고 또 논의가
된 적이 있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같은 것을 되풀이해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게 아닐까?'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당신 같으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단순한 사람일수록 도리어 명쾌한 해답을 할지도 모른다.
  #1 정당한 것은 언제, 어느 때나 정당한 것이다.
  #2 정당한 이론이라면 몇 번이고 되풀이하더라도 상관이 없지 않느냐?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깊은 사람'일수록 이와 같이 명쾌하게는 안된다. 사실 수많은
재주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을 단념하고 말았던 것이다.
  "같은 말을 되풀이해 보았자 쓸데없는 노릇이야"
  이렇게 귓가에 속삭이는 악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강박관념'이다.
  주베르(1754-1824, 프랑스의 도덕가)나 아미엘(1831-1881, 스위스의 작가)도 이러한
환영의 유혹을 간신히 떨쳐 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하

것을 삼갔던 것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글을 썼다. 또한 되도록
공공의 문제에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그 박력의 힘참, 영향력의 크기를 생각할 때, 우리들은 그들이 좀더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썼었으면 더욱 좋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다.
  재능을 좀먹는 환영은 여러 가지 모습의 수단 방법을 써서 공격해 온다. 실례를
일일이 들고 있다가는 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쥬르 르메트르(1855-1914, 프랑스의 작가)와 같이 의식적으로, 또 자유로이 사물을 

수가 있었던 사람조차도
  "과거를 재현하려는 노력 자체가 강박관념이 될 수가 있다"
라고 쓰고 있다.
  오후 한때 양지바른 곳에서 한가롭게 쉬면서 흰 포도주로 목을 축이는
제본공들에게도 강박관념의 씨가 있을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1844-1924, 프랑스의
작가)의 "신들은 목마르다"에 등장하는 혁명적인 직업인의 이미지가 이 제본공들은
위협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7. 글쓰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

  '쓰는 것'은 창조적인 사고 방법의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나도 여러분에게 꼭 쓰도록 권유하고 싶다. 그러나, 쓰는 행위 자체가 어쨌든 환상

만들기 쉽다는 점은 알아야 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바꾸어 말하려고 한다.
  "쓰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쓰지 말 것이다"
라고 말이다.
  자기 표현은 그것 자체가 가쁨이고 구원이다. 그러나 현실은 직업적인 저술가를
포함해서 쓰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 사용되어지는 언어의 파악이 불완전하다.
  #2 다루는 주제에 대한 진정한 흥미가 결여되어 있다.
  #3 이미 쓰기를 마친 부분의 이미지가 자주 걸리게 된다. 등을 들 수가 있다. 물론
이밖에도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쓰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학교 시절에 몸에 붙었던 '환상'이 아직도 남아 있지는 않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작문을 잘 지었던 사람도-괴롭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더욱이 주베르가 말했듯이, '마음속의 생각이 정리가 되면, 즉시 써 보는'
습관을 꼭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
  말하는 것은 즐거우나 쓰는 것은 잘 안된다고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세상에는 실제로 말재주가 뛰어나면서도 글을 쓰라고 하면 잘 안되는 사람도 가끔 볼
수가 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스운 이야기이다. 이런 절름발이가 어디서 왜 생겨나는
것일까? 여기에도 커다란 수수께끼가 있다.
  다분히 거기에도 열등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 나는 예전부터 글짓기는 매우 서툴렀다.
  #2 화술의 기교를 그대로 문장 속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3 쓴 것은 꼭 남이 보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강박관념에 일시적으로나마 걸려드니, 꼼짝 못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사람은 흔히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형용사를 세 개나 네 개씩 쓰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아무런 소용도 없이 무위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예술가들까지도 '나의 작품은
고전적인 스타일에 비한다면 결정적으로 뒤떨어진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의
포로가 되는 일이 있다.
  여기에 괴테(1794-1832, 독일의 사상가)의 잠언이 있다.
  "자기 자신의 시대를 진정으로 산 사람은 어느 시대에도 산 것이 된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서 우리는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눈'과 같은 것이었으면 한다. 우리는 눈처럼 단순해야 한다. 마치 눈이 여러 개 있으

판단에 혼란이 오듯이 말이다.
  비전 내지 이미지가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으면 과연 어떤 결과가 올까?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쭉 검토해 온 바가 있다.
  참고를 위해서 열등감에 져 버린 사람들의 증상을 적어 보자.
  #1 겁쟁이고, 조그만 일에도 안절부절하는 사람.
  #2 사람을 지도하기보다는 지도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3 자기가 만들어 내는 인상을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자기의 약점에서 오는
'과민성' 때문에 고민한다.
  #4 정신의 기생물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다. 강박관념이나 열등감은 우리들의 의식 

깊숙이 숨어들어 있어서 자각되어지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서 이와 같은 콤플렉스를 끄집어내어, 그 정체를 밝힌 것

프로이트(1859-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나 아들러(1879-1967,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의 공적이다.
  그들은 동시에 강박관념이나 열등감이 불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들도 '열등감을 지배할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싸워 보자.
@ff
     제4장
     흉내내기와 사교성
     사고를 방해하는 것(II)

  1. 흉내내기와 사교성

  우리들의 의식의 안쪽을 만일 들여다볼 수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놀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가지각색의 해로운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기 때문이
다.
이들 기생충은 어느 종류를 집어내 보아도 우리들의 사고를 방해하는
백해무익한 것들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당신의 의식 속에 집을 짓고 있는
기생충을 지금 곧 없애 버리자.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벌레'의 생태를 조사하려면 신중하고도 세심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벌레란
때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지도 모른다. 어떤 벌레가 있는지를 알아보
자.

  2. 백해무익한 것

  가) 남의 흉내내기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벌레이다.
  이 '남의 흉내를 낸다'고 하는 것은, '성질' 또는 '천성'이 아니다. 성질과 같이
보일지는 모르지만 벌레임에는 틀림없다. 성질은 고치기가 몹시 어렵지만 벌레 같으면
떼어버릴 수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사람 흉내내기가 자리잡게 되었을까? 우선
어린아이 때의 이미지가 어떻게 해서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리잡는가를 보자. 그것은
마치 대도시의 새벽녘의 동틀 무렵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그 맑디맑은 공기와 상쾌한 고요 속에 싸인 여명의 한때를 생각해 보자.
뭐든지 방금 '태어난 듯이' 보이는 신선함과 소란과 소용돌이, 따분한 '일상생활'이
시작된다.
  어릴 때의 이미지는 이와 같은 대도시의 낮처럼 잡다한 것의 혼합물이 없기 때문에
'첫인상'이란 것이 강하게 또 선명하게 어린아이들을 사로잡는다. 매개물이라고 하는
장애물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도 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부모들은 어린이들의 관찰의 예리함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흉내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열 살 경부터이다.
이 변화는,
  #1 어른 같은 '말씨나 태도'
  #2 틀에 박힌 발음이나 말투
  #3 짐짓 무관심한 체하는 것
  #4 거짓말에 대한 관심
과 같은 형태를 취하면서, 대체로 갑자기 나타나게 된다. 소녀의 경우는, 이른바
'조숙'한 듯한 포즈의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시기이다.
  요컨대 어린아이들은 자연스러워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소년들은 그들대로 어른 티

내려고 노력한다. '어른에 대한 동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에 비례해서 '티없이 맑다'든지 '귀엽다'든지 하는 성질은 두드러지게 줄어든다.
영혼의 순진함, 때묻지 않음이 상실되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아이들의
'흉내내기'의 표본은 어른들이다. 이렇게 해서 기생하기 시작한 '흉내내기 벌레'는
'숙주'의 성장에 따라 한층 더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처음으로 바다를 보고도 놀라지를 않았다고 하는 따위의 놀랄 만한 무신경이 되는
것도 대체로 12, 13살쯤 되어서이다. 이미지를 생생하게 파악하는 힘이 시들기 시작한
것이다. 감수성이 약해지면, 자연히 행동도 '될 대로 되라'는 수동형이 되고 만다.
  그는 다분히 어려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될 수 있는 대로 비슷한 생활 방식을
선택하게 되겠지요. 남의 것에서 '빌어 온' 사상, 태도나 언어 속에 숨겨져 있는 '안
일'
속에 평생을 바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 '남의 흉내내는 벌레'를 물리치는 방법을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다. 어떤 방법이 시도되고 있을까?
  우선 교육의 감화력을 들 수가 있다. 어린아이들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

더욱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교육할 기회를 주는 일이다.
  미국의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될 수 있는 대로 속박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학교도 또한 될 수 있는 대로 이 부모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하다.
얼른 보기에도 그럴듯한 이야기 같은데, 나에게 말하게 한다면, 이것은 쓸데없는
노릇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어린아이 자신의 맹종이라는 습관에 강하게 묶여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다른 역사가 오랜 여러 나라도 같지만-흉내를 내거나 얼마간의
불성실성이 오히려 권장되고 있는 터이다.
  "아빠를 본받아야 된다"
  "애야, 넌 자기 생각만을 자꾸 고집하면 못써요..."
라고 언제나 이런 식인 것이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대신에 흉내를 낼 '본'이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꼭 들고
나오는 것은 사람 좋은 필랑뜨(몰리에르의 극 "사람 싫어하기"의 주인공)이다. '내'가
강한 아르세스뜨(같은 작품에 나오는 사람 싫어하기의 전형)는 물론 낙제이다. 과연
필랑뜨는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다 깊이 통찰하고 있는 것은 아르세스뜨
쪽이다.
  이렇게 벌레에서 기생 당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딱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 사교성
  '사교하기 좋아한다'는 것은 끼리끼리 모이려고 하는 인간의 하나의 약점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도 모방성의 일종이다. '군거성'은 '남의 흉내내기'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 나가 '사람에게 의존하는' 기분이 있고, 이 경향은 그냥 내버려두

제멋대로 비대해지기 쉽다.
  특히 미국인들은 이 경향이 두드러진다.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당면했던 저 고독한
환경이 도리어 박차를 가했다고나 할까? 어찌되었건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사교적인 국민이다. 두 사람만 모이면 싫증나는 줄 모르고 지껄여 대는 것이
미국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 기회를 이용한다. 구실이 없더라도-아니 그것을 어떻게 해서라고
감쪽같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그들의 주특기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만나서 담소하는 기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친해진다'는
출발점에 던져진 물 한 방울은 같은 것 끼리를 모아서 '친구'가 되고 다시 커다란
집단으로 되고... 이렇게 물의 파문이 퍼져 가듯이 커 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그들 내지 집단은,
  #1 공통된 취미를 기른다.
  #2 공통된 이익을 가진다.
  #3 유연성(유사성과 비슷하나 인연도 포함됨)을 발전시키고 확대한다.
  #4 통일된 슬로건을 내걸고 대대적인 운동을 펼친다.
  와 같은 순서를 좇아서 순식간에 한 개의 거대한 세력이 되어 버리곤 한다. 소수의
의견은 어떻게 다루어지는 것일까? 무시되어지는 것이면 행복한 편이다. 나쁜 경우에

발길로 채이고 만다.
  나의 조국(프랑스)에서 미국에 이주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흑인에 대해서 거의
비슷한 '편견'을 품고 있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주하기 전에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

그들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위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에 이주해 온 이후로는 집단의 압도적인 감화력이 극히 자연스럽게 이주민들의
마음을 바꾸어 버렸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들도 '집단'의 한 사람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래서 극히 자연스럽게, 다시 말하

자발적으로 그룹의 회원과 같은 이미지를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발성'은
겉으로만 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안이한 태도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집단에 몸을 맡겼을 때에는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데서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진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열심히 생각하지 않아도, 집단 전체로서의 사상이 만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마치 자기도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 군거성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개인주의란 것이 있다. 개인주의는 그
정도가 지나치면 민주주의의 통일성을 위협하기 쉽다고들 흔히 말한다. 그러나 진실된
개인주의는 뭐니뭐니해도 민주제도의 가장 기본적인 기초가 되는 것이다.
  '집단'의 마력에 휘말려 들어가서 결국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는
권리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우리들은 스스로 경계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군거'를 원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약함에 주의를 주는 한 방법으로
'시간 분할의 관념'에 언급하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시간이란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심의 눈을 가지고 바라본 사람이
있을까? 달력이나 시계의 효용은 여기서 새삼스럽게 다시 고쳐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간분할이라는 편리한 것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들의 사회생활이 정립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우리들은 시간의 노예라는 관심도 또 성립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에 매이게 되는 '집단'이라는 것도 하나의 진리인 것이다.
  모파상(1850-1893, 프랑스의 작가)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매초마다 우리들의 생명은 갉아 먹히고 있다. 해마다 또 생일이 바위처럼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있고...'
  오스카 와일드(1856-1900, 영국의 극작가)에 의하면, '늙은이의 비극은 자기만은 아

젊다고 느끼고 있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관념=허구라는 공식을 털어 버리려면, 천재에 가까운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 쪽에서 하는 노력은 자칫하면 중단되기 쉬우나 허구는 끊임없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부터 눈과 귀를 통해서 계속해서 들어오게 된다.
@ff
     제5장
     교육
     사고를 방해하는 것(III)

  1. 교육은 사고의 장애가 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올바른 사고 방법'을 몸에 익혀 가는 데 있어

가장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교육'이라는 장애다.
  교육이 정신의 '기생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결코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상으로는 교육이란 지성에 탄력성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신적 훈련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교육은 정신을 단련시키는 대신에 정신을 지치게 하고, 탄력성을 줄이는 구실을 하

경우가 많다.
  두뇌라고 하는 것은 쓰면 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생각은 기정 사실이다. 사람은 뭔가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만큼 '사고'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 만일 생각하는 습관을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구실을 한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는 바로 그 반대가 아닐까?
  "당신은 자기가 받은 교육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여기서, 우리들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불만은 우선 일단 제쳐놓기로 하자.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은 가르치는 쪽에 대한 불만에 관해서이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만스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
다.
  라블레(1484-1554, 프랑스의 작가로서 "가르강튀아 이야기"라는 소설의 작가),
몽테뉴(1533-1592, 문예부흥기의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주요 저서는 "수상록"),
존 로크(1632-1704, 영국의 계몽철학 및 경험의 창시자), 펜롱(1651-1715, "덴마크"의
작가), 루소(1712-1778, 프랑스 계몽기의 사상가), 이러한 여러분의 사상가들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당신은 반드시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교육에 대해서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세기의 나타난 이름 있는 교육자들도
대개는 교사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육의 어떠한 점이 그들로 하여금 뛰어난 지성이 결함투성의 교육의 희생물이
되었으며, 발전이 저해 당했다고 할 수가 있다.
  결함투성이의 교육! 이것은 루소나 페스탈로치(1746-1827, 스위스의 교육가) 시대의
옛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한 대답은 '노!'이다. 현재에도 뜻있

교사들은(그들 자신이)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다.
한 발 양보한다 해도 교육은 아직까지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 커다란 갭을 안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창조적 사고'를 향상시키는 데 있어서는 교육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쨌든 우리들의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이야기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앞에서 '장애'라는 말을 사용했

사실을 상기해 주길 바란다. '장애'는 이런 교육을 계속 받으면 도리어 나빠진다는
관점에서 한 말이다.
  예를 들면, '교육'을 받았던 탓으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열등감만 자꾸 심해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도 비교육(무교육이 아니고)의 교육적 악효과의 한 실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모든 나라의 교육에 결함이 있을 겁니다"라고.
  그렇다고 여기서 모든 나라의 교육의 결함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미국이나 프랑스의 경우만을 예를 들어서 검토해 보자.
  미국의 교육은 지나치게 실제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문화라는 것은
소수의 엘리트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는 미국과는 정반대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문화'를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나머지 단순한 지적 만족감을 추구하여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실제적인
의무는 가볍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간에 올바른 사고의 능력이 손상되고, 따라서 사람들은 최초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평생 동안 노력해도 안된다는 비극 속으로 빠져들게 되기가 쉽다.

  2. 프런티어 정신의 폐해-미국의 교육(1)

  미국의 교육은 오늘날까지도 개척자(또는 그 후손)를 위한 교육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외국인은 누구 나가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서부만이 아니고
고층 빌딩이 하늘을 찌르는 대도시라 해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미국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개척자의 습관이나 기질을 이어받고 있다.
  미국인 집의 문패 하나만 보아도 곧장 알 수가 있다. 통나무 끝에 매우 우편함은
근대적인 롱 아일랜드의 한복판에서도 볼 수가 있다.
  철저한 레이디 퍼스트의 풍속도 따지고 보면 여성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대접을
받던 개척 시대의 유물이라 할 수가 있다.
  개척자들이 만든 학교의 목적은,
  #1 우선 학생의 육체를 건강하고 억세게 단련시키는 것.
  #2 다음으로 건장한 육체에 어울리는 건전한 정신과 강인한 의지를 기르는 것.
이라는 것이다.
  미국 사람에게 있어서 건강한 육체로 단련해야 한다는 것은 인디언과 싸우면서
농장을 개간하고 목장을 이룩하던 저 프런티어 이래의 전통이며 또한 본능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의 캠프 생활에의 정열이 독립 자주의 정신과 결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스포츠는 학교 생활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고 물론
그것이 나쁠 것은 없지만 모든 일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솔직히 말한다
면,
미국인들이 이 점에서 생각이 부족한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어떤 학교를 방문했을 때, 그 학교의 교장은 제일 먼저 나를 그들 학교의
'신성한 장소'로 안내해 주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놀랍게도 은으로 만든 받침대 위에
야구공이 소중하게 모셔져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공에 대해서 경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지나친 스포츠 우선-미국의 교육(2)

  어떤 일이나 정도가 지나친 것은 옳지 못하다. 미국인이 스포츠를 즐긴다는 것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 있어서의 지나친 스포츠 편승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미국의 대학 신문은 스포츠 신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노트르담 대학은
카톨릭 계통의 대학이지만 일반적으로 '미식축구가 센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기야 체육도 어느 모로 보아서는 기술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체육을
'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우리 나라의 교육은 체육과 문화를 잘 조화시키는 시도에는 성공하지를 못한 것
같다"라고 불평을 하게 된다.
  또한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당신네 나라(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말재주가 뛰어나더군요. 서로 대화를 해보면 매

재치 있는 표현을 능숙하게 하는데 그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프랑스의 학교에서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밤 여덟 시까지 사이에 레크리에이

시간이라고는 불과 두 시간 정도밖에 없습니다. 프랑스말로 '공부한다'는 말
'뜨라바이에'는 영어의 일하다에 해당되는 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운동장이나 보트

타는 강에서는 '뜨라비아에'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프랑스의 소년들은 말재주는 뛰어나지만 가슴이 좁지요. 미국의 소년들은 말솜씨는
서툴지만 체격만은 훌륭하더군요. 장점도 있고 결점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학교는 실생활에 들어가지 전에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인 교육이란
생활을 위한 준비라는 점에서는 직접적인 효과가 부족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런 점을 탐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우 실제적인 것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화'와 같은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효과가 없는 것을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보지를 않는다. 스포츠 우선이 '공인'되고 있는 이 나라의 교육 자체도 미국적 기질을
만드는 데 중요한 구실을 맡고 있다고 하겠다.
  미국인들은 뭐든지 세계 제일이 아니면 마음이 편치 않은 민족이다. 그러면서도
사상이나 예술의 분야에서는 의외로 욕심이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미국인들은 문화라고 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

것이라 생각하는 민족이다. 잘못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4. 점점 젊어지는 국민 미국의 교육(3)

  미국인들은 언제나 젊다든지, 미국은 젊은이의 나라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과연 젊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말은 어느 정도 핵심을 찔러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의아스러운
점이 없지는 않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영광스러운 여러 인물들을 한 번
보라. 그들, 즉 과거의 미국인들은 결코 '젊지는' 않았다. 미국은 그 역사의 후반에서
젊어진 것이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개탄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서 '어른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오늘날 끈질기게 추진되고 있으나
이러한 노력도 대중의 저항에 의해서 그리 신통한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은 대중을 향상시키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교육방법이 도리어 대중에
의해서 대중이 하라는 대로 마구 휘둘려지고 있는 것 같다. 대중이란 직접적이고
실리적이며 실제적인 것만을 바라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다.
  교육이 현실성의 편중과 손을 끊지 않는 한, 세부적인 방법론 같은 것을 아무리
주물럭거려도 별로 큰 효과를 바랄 수는 없다.

  5. 안이화와 실리성의 편중-미국의 교육(4)

  사물을 될 수 있는 대로 안이화해서, 이해하기 쉽게 한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중대한 잘못을 초래하는 것이다. 미국식의
'안이화'에는 위험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나에게 이런 경험이 있다.
  "알기 쉬운 프랑스 문법"이라는 책을 뉴욕에서 출판하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그 책이름을 "쉬운 프랑스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이었다.
  '쉬운 프랑스어'나 '쉬운 프랑스 문법'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알기 쉽게 재미있

설명할 수는 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며 안된다. 그러나 격변화나 동사의
활용변화를 쉽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효과적인 것은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암시를 주는 정도의 것이다.
  #1 아무리 따분하고 지겹더라도 처음에는 참을성 있게 끈질기게 극복해야 한다.
  #2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이미 해낸 일이니까.
  이것은 원칙적이다. 라틴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라틴어의 학습이나 교과서의 체계를 보면, 우리 유럽인들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진
다.
  미국에서는 라틴어를 꼭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라는 식의
적당주의로 꾸며져 있다는 것을 곧장 알 수가 있다.
  그럴러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물어물할 바에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1 아무렇게나 어물어물하는 습관과
  #2 열등감
  만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단편소설이나 단막극 시나리오 등을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 교육 방법도 고전어학 코스를 가르칠 때보다는 몹시 발달되어
있다. 한편 학생 쪽에서 보면, 그런 분야(단편소설이나 시나리오) 중에서 성공하고 싶

때문에 성과도 상당히 있는 듯하다. 테크닉이란 점에서는 거의 나무랄 곳 없을 만큼
완벽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것은 '팔리는' 상품을 만들려고 하는
상업주의적인 욕망의 결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문제인 것이다. 기교면에 있어서는 그 어느 곳 하나 나무랄
곳이 없지만 아무래도 감동을 주지는 않는 것으로 금방 바닥이 드러나는 것들이
양산되고 있다. 즉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스마트하게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리성'이라는 기생충에게 좀먹힌 정신에서 미에 대한 사고력 같은 것이
우러날 리가 없는 것이다.
  미국의 학생들은 누구나 다소간은
  '문화란 사치스러운 것, 즉 군더더기와 같은 것'
  이라는 고정관념을 안고 학교를 나온다. 그러니 과연 그들의 상상력은
개발되어진다기보다는 오히려 싹이 싹둑 잘려 버린, 보기에도 가엾은 모습이 된다.
미국식 교육은 역시 젊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6. 전통에서 오는 지성의 우선-프랑스의 교육(1)

  프랑스의 교육은 뭐든 미국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것 투성이다. 그 교육의 결함이
나타나는 방식도 또한 정반대이다. 프랑스의 학교가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이념은
지성이다. 학생들은 공부를 마칠 때에,
  '나는 지성의 성과가 '절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교문을 나서게 된다.
  그래서 그들도 또한 잘못된 '환영'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
다.
  그들은 매우 중대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생활상의 실제적인 면'이라고 하는 인생에 있어서는 불가결한 관념은 돌보지
않고, 이를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지성편중이라는 프랑스 교육의 결함은 전통적인 것이다. 프랑스의 학교는
90% 이상이 도시의 한복판에 있고, 유명한 학교는 파리에 집중되어 있다. 대개의
학교는 아직도 중세기의 수도원 같은 좁고 고색창연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높은
벽으로 막혀 있는 좁은 뜰, 여기서는 학생들의 자연스러운 육체적 활동 요구는 거의
전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미국의 학교의 개방적이고 넓고 건강한 분위기는 이런
프랑스의 학교에서는 약으로 쓰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 이와 같은
감화원의 뜰에서 어떤 체육이 가능한가를 상상해 보라. 대답은 분명하다.
감화원 안에서와 같은 빙빙 도는 운동밖에 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이런 환경에서 짓눌러진 '울분'을 학생들은 어떻게 풀고 있을까? 그들은 부득이
상상이나 표현의 연구에 집중을 하게 되고, 정신의 세계에로 도피하는 것이다. 마음만

그만큼 생생하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이런 광경도 폴 부르제(1852-1935, 프랑스의
소설가)의 시대까지는 매우 자연스러운 사실이었다.
  오늘날에는 그 당시만큼은 심하지가 않다. 대학예비학교(우리 나라의 인문고교와 같

것)의 학생들은 체육관에 다니기도 한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축구나 테니스를
즐겨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대체로 11시간의 학과시간 중 단 두 시간이 '놀아도 좋
은'
시간으로 할당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와 비교할 때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7. 재사의 대량 생산-프랑스의 교육(2)

  프랑스의 학교는 문자 그대로 '교사와 책'을 의미한다. 학생끼리의 토론이 중간에
끼여드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고전어를 다루는 방법을 보면 프랑스의 교육이 '머리만 큰' 교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최근까지도 이 나라에서는 고전어(희랍어와 라틴어)가 국어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고전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 반동으로 다른 학과목은 그리 열심히 공부를 안하게 된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연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용적인 면이 없다고 하여 일률적으로 비난할 것은 못되지만, 이런 정도로까지 이

같은 '관습'은 문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형태로 남아 있다.
  물론 '문학'을 배움으로써 학생들이 얻는 바가 적지 않다. 우선 무엇보다도 사실의
논리에 익숙해지게 된다. 명석함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인간적인 성숙을 해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맞는 일이다. 프랑스의 학생들은 이 점을 소홀하게 한 교육의 폐해를 자칫하면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미숙한 두뇌에 지극히 전문적인 지식이나 관념을 억지로
주입하는 방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소년들의 대부분이 겉똑똑이의
재사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그들은 스스로 뜻도 잘 모르는 전문용어를 입에 담음으로써 우월감에 젖기 쉽다'
그리고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행세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에 익숙해져 버리기
쉽다.
  가장 곤란한 것은 이와 같은 불성실성이 몸에 배어 버리는 일이다. 프랑스의 교사들

도대체 뭘 하고 있을까? 학생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그들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특히 파리에서는-그런 것들은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같은 고질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어떻게 환자를 고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8. 우등생 숭배주의-프랑스의 교육(3)

  예를 들면 프랑스의 교사들은 천재의 개념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1 '천재'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천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천재'의 화신을 찾아 나선다. 그 반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얻은
학생이 당장에 그들의 우상으로 떠받들려진다. 일단 이렇게 되면 그들은 자기 체면이

뭐고 내던지고 이 '천재' 앞에 엎드려 버리고 만다.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버리는 것은 이른바 예정된 행동인 것이다. 말하자면 '운명'의
소관이라고나 할까?
  다른 나라에서는 열등생이라 할지라도 각지 활로가 있다. 예를 들면
학과공부는 잘못해도 스포츠의 실력이라든가 용기, 일을 잘 처리해 가는 능력 등 뭔가
한 가지 일에서 특징이 있으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민할 것이 없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지성 우선인 프랑스에서는 결코 그렇게는 안된다. '천재' 이외의
사람, 즉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슬프게도 열등감의 노예가 되고 만다. 따라서
교육상의 왜곡이 프랑스 국민성의 약점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프랑스 사람은 과연 현명하기는 하지만 지성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까?"
  나는 여기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프랑스 인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남이 험담하는 것을 잠자코 들어 넘길 수 있는
국민이기도 하다. 즉,
  #1 웃을 수 있는 경우
  #2 비난을 받을 일에 대해서 핀잔을 주거나 비꼬아 말할 수 있는 경우
  이와 같은 국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처럼 아주 끈질긴 인내심으로 계속
추진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는 계몽운동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또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프랑스 인이 잘하는 '토론을 위한 토론'은 그리 흔하지 않
다.
조국이나 나아가서는 자기에게 피해가 생길 우려가 있으면 영국인이나 미국인은 즉시
토론을 중지하고 실제적인 대책을 세우려고 든다.
  그러나 프랑스 인은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하여튼 너무나도 관념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성'이 없다고 아픈 데를 찔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성'편중의 교육의
결과라고나 할까?
@ff
     제6장
     생활은 사고능력을 약화시킨다.

  1. 사고하는 사람의 생활

  생활이야말로 위대한 교육자라고들 한다. 사실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계속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 안전을 찾는 본능-경험이라든가 생활의 지혜라든가 하는
것을 터득하고 있다.
  그러나 몇 억이라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되풀이하고 있는 방대한 노력이나 경험은
사람들의 사고 능력을 도리어 줄이는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플라톤(B.C. 427-347,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은,
  "경험은 플러스보다도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많다"
라고 말하였다. 사고에 전념하는 생활에는 아무래도 고독하고 자유롭고 또 틈이 있어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수도원의 방 한 칸에서, 데카르트는 파리를 멀리 떠난 조용한 교외에서,
파스퇴에르 (1822-1895, 프랑스의 화학자, 생물학자)와 에디슨의 고립된 실험실에서,
학자인 수도사는 수도원에서, 성자는 매사추세츠 주의 조용한 시골에 틀어박혀서, 또
예술가는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낙원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시도해 온 것이다.
  그들은 사회생활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고 했다. 사고하는 사람에게는 생활이
가져오는 번잡한 일은 필요 없는 방해물이었던 것이다.

  2. 사고하지 않는 사람의 생활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은 스피노자나 데카르트의 생활과는 반대이다.
  부자이건 가난뱅이건 대개는 자기 자신의 일을 안달복달하면서 일하고 있는
인간들이다. 당신이 사람들의 얼굴에서 문득 피로의 기색을 읽게 되면 아마도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불안을 가지고 있고, 그 불안이 눈을 움푹 꺼지게 했으
며,
입을 오므라들게 만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재능은 있지만 재산을
갖지 못하는 문학가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재산이 예술을 망가뜨린다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예술가도 어느 정도의 재력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실패와 불안이 인간의 능력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끄집어
낸다고 할 수만은 없다.
  그 반대로 눈을 움푹 꺼지게 할뿐만 아니라 꽃피려고 하는 재능을 시들게 해버리는
수가 많은 것 같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회피하게 되거나 '방탕' 속에 도피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해서, 만일 부자나 권력을 가진 자와
잘 어울리거나 아니면 자기에 대한 평판에만 신경을 쓰면 인간적으로 비굴해지고 그의
사상의 질은 한꺼번에 타락하고 만다.
  설교자는 부자가 가난뱅이보다 근심 걱정이 많다고 말하지만, 부자는 가난뱅이보다

걱정이 적다는 것이 정말일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이 또 이 부자들의 상투적인 말인데, 가끔 조금 쉬기 위해서 병을
앓는 것을 기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독이나 싫증에는 참을성이 적다.
  여행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함으로써 이 사회의 모습도 알고, 여러 가지 사실이나
지식은 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그들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진지한 책이나 회화에는 흥미나 관심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사색을 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들은 본능을 위해서
생활하고, 오락이나 스캔들 또는 권력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드디어 그들의 가치 판단의 척도는 잘못된 것이 되어 버리고
말며 직접적인 향락만이 최대의 관심거리가 된다.

  3. 기분전환의 수단이 되어 버린 독서

  독서가 사색에 도움을 줄 수가 있을까?
  '독서가 완전한 인간을 만든다'라고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 영국의 철학자)이 
말했다.
그러나 독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아직 책이 귀했던 시대에는 독서는 마술과 같은 신성한 분위기를 주었던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을 수가 없었으므로 성직자는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큰 소리로 책을
읽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이 현상은 개인적인 독서에서도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남아 있게 되었으며 지금도 입술을 움직이면서 읽는 시골사람들은 이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책을 입수하게 되면 몹시 소중하고도 값비싼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엄숙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며, 그래서 온 정신을 독서하는 데 집중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는 책을 읽는 것의 효과를 누가 의심이나 했겠는가?
  책의 희소가치가 있었으므로, 무차별한 장서를 늘린다는 일은
없었다. 인쇄술이 발달되고 난 후에도 처음에는 그 이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종교서적· 시인 철학자의 저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벼운
책으로는 호머나 역사가의 책이 뒤섞여 있었다.
  왕이나 귀족들, 그리고 부유한 수도원의 장서라도 천 권을 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개인의 장서는 당연히 이것보다는 적었고, 스피노자도 60권이 못되는 것으로 그
리스트가 오늘날 공개되고 있다. 1백 년 후 칸트가 3백 권을 모았지만 그 중 대부분은
여행기였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책의 홍수에 휩쓸릴 것 같은 위험에 처해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얼이 빠져서 열등감이나 환영이 세균과 같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처치가 곤란한 것은 아마도 모든 책에 대해서 의견을 가질 수는
없으면서도 알고 있는 척해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사람들은 읽지도 않았으면서도
읽은 것처럼 행세를 해야 되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제 것인 양 표절하고 있다. '생각

기술'에 있어서 이보다 더 파괴적인 것은 없다.
  오늘날 산더미처럼 출판되고 선전되고 비평에서 과장되고 있는 것은 소설이다.
소설은 서점의 책장 뿐 아니라 우리들의 책장에서도 넘치고 있다. 이들 소설은 시간
보내기 위해서 읽히고 있다. 그리하여 '읽는다'는 말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존엄성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의미 그 자체가 변질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독서란 담배를 피운다던가 카드놀이를 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육체적인
기분 전환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교적인 행위로서의 독서가 가져오는
'효과'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이 책의 14장에서 신문이야말로 사색을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구라는 점을
말하려고 생각하지만, 대개의 경우, 신문은 전혀 읽혀지지 않거나 쭉 한번 눈으로
훑어보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나는 기차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다. 그
신사는 허드슨 강을 헤엄쳐서 건너간 여성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이것은 상당히 긴
이야기로서 6면에 계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신사는 신문 지면의 석 장을 넘길
생각은 하지 않고, 같은 지면에 있었던 뉴저지 주의 '돼지 여자 사건'의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후, 의회에 보낸 대통령의 교서, 사설, 옥수수 시세, 선박, 스포츠에 관

소식 등을 거의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읽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신사는 피로해졌는지
신문을 꾸깃꾸깃 꾸겨서 밑으로 집어던지고는 발로 밟고 난 후 담배를 꺼내 피웠다.
  전혀 관심도 없는 기사를 오랫동안에 걸쳐서 읽는다는 지적 작업이 어떤 영향을
주는가 생각해 보라.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생 동안하고 있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독서는 오히려
창조적 사고를 파괴하는 것이 되고, 그 중에서도 신문은 그 산만성 때문에 사람들의
집중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무책임한 표제, 헤드라인에 의해서 농락 당하고 마는 것이
다.
  인간은 본래 열등감이나 환영을 가지지 않고, 관찰하는 힘이나 사고를 위한 이미지

저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 생활, 즉 교육이라든가 문학작품이라든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유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포함한 생활이라는 것은 이것을 마치
4월의 서리가 꽃을 시들게 하듯이 파괴하고, 드디어 사람들이 흉내내기나 비열함 힘센
자에게 는 양보하라는 식의 사고 방법이 독창성을 몰아내고 그 대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표면은 허쿠라리움(기원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에 의해서 매몰된 나폴

부근의 로마시대의 도시)과 같이, 딴딴한 지각으로 싸여 있고, 그 밑에 진짜
생활이 잊혀진 채로 버려져 있는 것이다.
  극히 적은 사람만이 지하에 숨겨진 방-일찍이 소년시대에 즐겁게 놀면서 지낸
일이 있는 그 방으로 통하는 길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습관이나 되풀이라는 두꺼운 용암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ff
     제7장
     외형적인 고독
     사색의 실마리(I)

  1. 고독이 갖는 매력

  여기에 아주 흔한 라틴어로 된 시가 있다.

  아! 행복 할진저, 이 고독
  아! 고요 할진저, 이 행복

  실상 흔해빠진 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무엇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고독'이라는 상태가 갖는 매력, 힘, 그 속에 우리들의 마음에 속삭여 오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고독-그리고 정밀! 이 관념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고독 속에 기꺼이 몸을
던진 몇몇 인물들이 이미지가 지금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화려한 왕궁의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브르타뉴의 장원에 틀어박힌 세비녜 부인
(1626-1656, 프랑스의 서간문 작가), 정원 한 구석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에서 살기를
즐겼던 보스에(1627-1704, 프랑스의 신학자)나 매러디드(1828-1909, 영국의 소설가),
루소는 숲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맛보았다고 했으며, 실비오 페리코(1798-1854,
이탈리아의 작가)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의 하루하루를, 알렝 제르보
(프랑스의 선원)는 대서양에서 표류하는 동안 보트 위에서 고독의 즐거움을 마음껏
맛보았던 것이다. 디킨즈(1812-1870, 영국의 소설가)와 같은 마음이 고운 사람들도
밤길을 혼자서 걷는 것을 즐겼다.
  밤길을 혼자서 거닐 때의 당신의 기분을 생각해 본다. 당신도 문득 그런 상태를
행복한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참된 당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둠 속의 고독'에서, '뭔가'가
얻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이런 약삭빠른 말을 내가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문득... 문득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문득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란 것은, 정말 묘한 무엇이 있는 듯하지 않은가.

  2. 밀실이야말로 자유의 보루

  모든 일은 욕심대로, 장사 속으로만 처리하려는 속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문득
고독을 사랑'하는 심정이 되는 수가 있다.
  눈을 번득이며 도박을 하던 친구가 돈을 모두 잃고 난 후의 그들의 마음을, 그
위안해 주는 것은 고독이 아닐까? 오직 홀로 있을 때만 그들은 내일에의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입에서, "이제는 지겹다!"라는 말이 터져 나올 때, 마음은 분명히 고독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겹다는 것, 단조하고 평면적인 생활,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생활의 되풀이에서
오는 허망함... 고독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의 반대 쪽에 있다.
  이런 것은 실은 우리들 누구나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진부함'을 미워한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그 어디서나 잡동사니
투성이뿐! 이런 풍경을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목격하게 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차라리 이러한 지저분한 것들은 아예 없어져 버리는 편이 훨씬 좋은 듯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해서 끊임없이 '나 자신만이' 호젓이 숨어 살 수 있는 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안식처를 찾아내게 되면 거기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혼자 있다'는 일종의 안도감이 우리들의 마음에
여유를 갖게 해준다.
  사회라고 하는 곳은 이른바 사회사상을 생산해 내는 곳이다. 사회사상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말도 실상 따지고 보면 슬로건에 지나지 않으며 단순한 낱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산된 낱말에는 다소간 명령적인 위력이 따라붙게 마련이
다.
  이러한 명령이라든가 강제와 같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우리가 피해갈 수 있는 곳은
'고독'이라는 진부한 시구까지도 갑자기 빛을 띠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시도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아침에 어느 때보다 한두 시간 일찍이 눈을 떴을 때, 커피를 진하게 타서 한잔
마신다. 그리고 소파(침대가 아니고)에 편안하게 앉아서 당신 자신의 '문제'를 생각해
보라.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될 수 있는 대로 단순한 방향으로 끌고 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단순화가 극점에 이르게 되면-그 때에는 '고민 거리'의 응어리는
말끔히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어떤 부인은 자기 집의 지하실 한 구석에 자기 가족들도 잘 모르는
밀실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런데 실상 그 부인은 평범하고 붙임성 있는 상냥한
부인이다. 당신도 그녀의 기분을 알만하지 않는가?
  여기서 지금까지 말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혼자 있고 싶다는 소원만큼 강한 것은 없다.
  #2 이 소원이 관철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은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되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ff
     제8장
     내면적인 고독
     사색의 실마리(II)

  1. 집중의 의미

  앞에서는 외면적인 고독에 이르는 방법을 검토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방해가 되는 것은 모조리 쫓아내 버려라!'라는 방식이었다. 즉 '배제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다 직접적으로 마음속에 고독을 끌어넣자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수단이 바로 집중이란 것이다. 몰두한다, 빠진다는 것도 같은 이야기이다.
  집중은 배제와 비교하면 훨씬 적극적이다. 그만큼 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다.
집중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의 진행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과정을 분석해
보면,
  #1 집중 속에 들어간다.
  #2 집중의 방해가 되는 이미지를 배제한다.
  #3 나머지 부분이 '사상의 연쇄'가 되어서 앞으로 계속 뻗어 나간다.
  우리들은 #1-#3의 운동을 일컬어 '생각한다'고 말한다.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1-#3의 진행이 순차적으로는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거의 동시에 시작된다고 하는 점이다. 즉 집중의 과정은 '배제'의 계속 상태이고, 동
시에
'흡수'의 과정이다.
  제각기 제멋대로 노는 이미지는, 그것이 아무리 풍부하다 하더라도 우리들을 사색의
길로 이끌어 가지는 못한다. 이미지라는 것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하나의 질서를 이루

경우에만 사색의 실마리가 되어 주는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혼자 있어야만 '고독'해지느냐 하면, 결코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다.
시인이나 예술가는 친한 친구라든가 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고독 속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마음속은 '자기 자신의 문제'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열렬한 사랑에 빠져 버린 젊은이들과도 같다고나 할까.
  알퐁스 도데(1840-1897, 프랑스의 자연주의 작가)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도 그냥
돌려보낸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이 현재 집필 중인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도데는 상대방이 자기의 작품에 대해서
관심이 있건 없건 전혀 개의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늘어놓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신은 사람들로 붐비는 길거리에서
고독을 맛본 적이 없는가? 그렇다. '군중 속에서의 고독감'은 누구나가 경험하는 바이
다.

  2. 집중의 명수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고독의 집중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

왜 그럴까?
  '저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상당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보통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은 확실히 맞다. 변호사라든가
성직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척척 처리해 가는 솜씨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형사, 민사상의 온갖 복잡하고 신경 쓰이는 소송사건이라든가 자기가 맡은
교구 신자들의 온갖 고민을 능숙하게 처리해 내는 숙련된 솜씨야말로 전문적인
훈련의 성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폴레옹은 이미 알려져 있듯이, 천재적이 전략가인 동시에 빼어난 정치가였다. 그

언제나 능숙한 솜씨로 화제를 이끌고 나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전술론을 화제로 삼고 있는가 하면 어느 사이에 화제는
국립극장의 칙허장 문제로 옮겨지게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그 큰 머리 속에는 잘 정돈된 서랍이나 정밀한 지도책이 차곡차곡 있었던
것이다.
  변호사라든가 '영혼의 고민'을 풀어 주는 성직자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검토해 보
자.
그들의 주의력, 집중력은 정말 놀랍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찾아온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를 이미 그 전에 다루었던 사례와 비교해 보면서, 하나의 결론(생각)을
이끌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한다면 집중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방문자들을 상대하면서도 그들 자신의 내면적
고독의 세계만은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전문적 태도는 일반인들과 비교하면 훨씬
'사상'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고. 마치 도서관의 사서가 길거리의 행상인보다 책에
가까운 곳에 있듯이...

  3. 기억력이 왜 나쁜가?
  "나는 왜 이렇게 기억력이 나쁠까요?"
  이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을 주위에서 자주 듣는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왜 나는 

가지 일에 집중이 안 될까?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이 변덕스럽다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다. 그들은 의식을 어떤 대상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면-그것을 '의식'한
순간에-집중을 방해하는 것 같은 이미지가 차례차례로 솟아 나와서 뭐든지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이 사람들은 '고통'보다는 '경박'함을
택하고 만다.
  그러나 기억력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불치의 병은 아닌 것이다. 우리들은 이런
실례를 잘 알고 있다. 강의의 내용이 흥미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품을 하는 학생

반대로 따분하고 흥미 없는 강의를 할 때는 생기가 되살아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알고 보면 그러한 학생들은 흥미 있는 강의 시간에 열중할 수 있는 동료들을
무의식적으로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처럼 집중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쑥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쓸모 없고 싫증나는 따분한 강의 때에는 정신이 집중이 안 되어서
고민하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상관하지 않고 그들은 그 시간에 마음껏 공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뭔가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는 없을까?

  4. 집중을 방해하는 것과 극복하는 방법

  "집중하는 요령을 어떻게 하면 배우지요?"
라는 말을 바꿔 말하면
  "집중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된다.
  우리들은 기억력이 나빠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의 실례에서 신경과민증이야말로
정신을 집중시키는 데 매우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보통 '과민증'에 걸린
사람은
  #1 친구나 다른 사람이 외관이라든가 지능이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인다.
  #2 다른 사람이 농담이라든가 제 자랑이 유난히도 불쾌하게 생각되어진다.
  #3 따라서 친구들 앞에서는 어쩐지 마음이 흐트러져서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다.
라는 식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신경'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주 얼빠진 사람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과민증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너무 자책을
해서는 안된다. 만일 당신이 과민증에 걸려 있는 듯하다고 한다면 나는 솔직히
이렇게 충고하고 싶다. 즉 당신의 기분을 흩으러 놓는 친구와는 당분간 만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골드스미드(1728-1774, 영국의 작가)는 왜 "웨이크피일드의 목사"를 썼으며, 더욱이
미완성인 채로 붓을 꺾고 말았을까?
  그는 신경질을 참고 못하고 '뭔가를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쓴
것이다. 동시에 동료 작가들이 칭찬하는 말을 듣기가 거북해서 작품을 중단하고 만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골드스미드는 친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자칫하면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할만큼 '훌륭한 친구'와의 교제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는 것이 좋다.
그 대신,
  #1 친절하고 단순한 사람을 찾아 나선다.
  #2 만일 당신의 '집중'을 방해할 것 같은 친구와 만났을 때에는 기죽지 말고 침묵을
지킨다.
  #3 침묵은 반드시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처음에는 기분이 언짢겠지만 곧 침묵의
도움으로 결코 꿀리지 않게 될 것이다.

  5. 흥미는 집중의 어머니

  우리들은 집중의 방해가 되는 과민증에서 해방되는 실마리를 얻었다. '친절하고
단순한' 친구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이것은 무엇에든지 잘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 방법이다. 결론부터 말해 본다면 대체로 흥미하고
하는 것은-가령 그것이 어떤 종류의 흥미이든 간에-저절로 집중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싫증나는 수업 시간에 한해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학생들의 태도에 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이런 조그만 수수께끼도 흥미라고 하는 열쇠를 발견함으로써 금방
해결되어 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네 마음속에 상상력을 자유로이 나래 치게 하는 것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집중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시간인 것이다. '주의산만'이라는 딱지가 붙은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열등감을 부추기는 적이 잠잠해진 시간인 것이다. '기분
좋은 상태'로 오로지 자신의 흥미의 대상과 씨름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가 있다는 것만큼 강한 힘은 없다. 글짓기는 싫어서 죽을 지경인데 뜰의 잔디
깎기 같은 것은 좋다, 글짓기 시간에 도망친 학생이 라디오의 조립이라고 하면 잠자는
것도 밥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골방에 틀어박혀 있다-이런 광경은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광경이다.
  가벼운 소설밖에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떤 때에는 보기에도 싫증나는 유명 인사의
회고록 따위에 열중해 있는 경우도 가끔 있다.
  '큰길에서 백 보쯤 떨어진 곳을 걸어가야만 한다'라고 권고한 사람이 있는데
우리들은 그런 금언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흥미가 솟는 대로 백 걸음쯤 떨어져서
역사를 읽고, 과학 하는 마음을 키우는 경우도 있다.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의 효용은 실제로 따지기 어려우리만큼 놀라운 데가
있다. 집중에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열등감'도 이 흥미에 의해서 극복할 수가
있다. '흥미 본위'라는 비난도 열중하기만 하면 되었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흥미의 강도는 의식적인 노력이란 것 가지고는 도저히 다다를 수가 없는
정신적인 높이에까지 우리들을 끌어올려 준다. 흥미를 통해서만 우리들은 관심을
높이고 나아가서는 좋은 의미로의 '우월감'까지도 가질 수가 있다.
  그렇다. '생각의 기술'이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올바른
해결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을 것이 아닌가.
  될 수 있는 대로 번거로운 길은 피하고 힘 덜 들이고 우리들의 지성을 보다
만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하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하고 질문을 할 것이다.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당신

흥미를 느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첫째이다. 그렇게 하면서 보다 높은
곳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확실하게 나가자.

  6. 싫은 것에 집중하려면

  언제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문제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향상을 원하

한, 때로는 싫은 것, 싫증나는 것과도 씨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
  셸리(1792-1822, 영국의 시인)는
  "나는 시를 좋아한다. 그러나 역사는 싫어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셸리는 천재였다. 우리들은 죽어도 셸리를 흉내는 낼 수

없다. 또 흉내내 볼 필요도 없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어떤 부인이 솔직하게 말한 '반성'의 말이다.
  "나는 같은 것을 주의 깊게 되풀이해서 생각하기로 하고 있다"
  그녀의 사고 방법은 우리들의 집중의 대상이 단순한 것일 때에는 확실히 유익한
지침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란 것은 일반적으로 복잡한 형태로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복잡한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집중을 해야 할까?
  우선 당신 자신의 체험을 생각해 보자.
  "어떤 컨디션에 있을 때 당신은 집중이 안 되어서 고민했습니까?"
  여기서는 대상 이전의 문제, 우리들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생각해 보자. 자기의
경험을 쭉 되새겨 보면
  #1 수면 부족일 때나 반대로 너무 많이 점을 잤을 경우,
  #2 너무 음식을 많이 먹었을 때나 반대로 배가 고플 때,
  #3 운동 부족 또는 지나친 운동으로 몹시 피로했을 때,
  이와 같은 육체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에는, 우리들의 마음은 좀처럼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와 같은 나쁜 몸의 컨디션을 정비해서 집중
을 위해 조
금만 신경을 써 보는 것이다. 즉,
  #1 여유 있게 마음 푹 놓고 담배라도 한 대 피운다.
  #2 창문을 열고 멍하니 경치를 내다본다.
  #3 더운 날에는 나무 그늘을 찾아서 산책이라도 한다.
  #4 때로는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이와 같은 준비나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는 당신도
잘 알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쾌한 기분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골치 아픈 문제와 대결할 때 쓸 만한 테크닉이며 기억해 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모두가 깨끗이 처리된 것은 아니다.
  일단 집중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복잡한 분야를 다루게 되면
아무래도 어떤 불안이 따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을 쓸데없는 것과 뒤섞어 치워 버리지는 않았을까?'
라는 걱정을 하게 되는 사람이(지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면 더구나 이런 경우가 많다)
많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 경우, 가장 우리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기억된 데이터'인 것이다. 즉 자기의
기억력에 뭔가 의지할 것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가지고 복잡한 문제의 집중에 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떻게 하면 '기억력'을 강화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로 검토할 예정이지만 --

  7. 로빈슨 크루소의 경우

  여러분도 알다시피 로빈슨은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 혼자 버려져서 의논할 상대도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살기 위해서 그는 여러 가지의 골치 아픈 문제와 씨름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오직 혼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했었을까?
  #1 우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면 종이에 적는다.
  #2 처음 것과는 정반대의 방법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종이에 적는다.
  #3 이렇게 해서 두 가지를 비교해서 검토하면서 더 좋은 방법을 선정한다. 이것이
#1 #2의 장점을 취한 제3의 방법이 된다.
  #4 종이 위에 적은 '생각할 자료'는 소중히 보존한다.
  #5 그래서, 판단에서 얻은 결과는 실행에 옮겨지게 되는데, 실제로 해보고
어떠했는지에 대한 반성이 마지막으로 첨부된다.
  이렇게 해서 #1 #5까지의 기록은 메모의 형태로 남겨지고, 로빈슨이 살아남기 위한
지혜의 양식이 된 것이다.
  자기의 기억력에 자신이 없을수록 이 메모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인데, 메모가 자꾸
쌓여 간다고 하는 것은, 필경 써서 남긴 '기억'이 확실히 더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놓쳐서 안될 것은, 메모는 단순히 지식의 기억이 아니고, 사고
그 자체의 기록이고 살아 있는 데이터로서 그 사람의 일생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1491-1556, 스페인의 승려, 제수이트 교단 창시자)는 (물론 펜

종이도 풍부하게 있었으므로) 로빈슨이 경우보다도 훨씬 치밀하게,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자기의 문제를 계속 써서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 같은 방법으로 써 두었던 알버트 전하(1819-1861,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황서)의
일기도 빅토리아 여왕에게 주어진 전하의 조언의 둘도 없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신도 이제는 여러 가지의 소음, 충고, 불안에 위협받음이 없이 자기의 대상에
집중할 수가 있을 줄 안다. 지금 여기에 한 잔의 레몬 스코치나 당신 자신의 노트가
있다고 하면 아무것도 겁낼 것이 없다.
  우리들에게 예컨대, 미슐레(1796-1874, 프랑스의 역사가, "대혁명사"로
유명하다)나 카알라일(1795-1881)과 같은, 보통 사람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조직되어진 기억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 걱정할 것이 없다. 우리들에게는 자기의
노트가 그 구실을 충분히 해 주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되풀이해 보자.
  '우리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두는 준비를 지금 즉석에 해 두자.
  안톤 채호프(1860-1904, 러시아의 작가, "벚나무 뜰" 등의 작품이 있음)가 그렇게
소설을 썼듯이.
@ff
     제9장
     시간을 만들어라
     사색을 실마리(II)

  1. 시간을 만든다

  "이거 야단났는데요. 시간이 없어서..."
  "바쁘면 좋지 않습니까?"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 좋은 수가 없을까요?"
  "그렇게까지 바쁘시단 말인가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뭐지요?"
  "실은 말입니다. 지금 나는 책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생각의 기술"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시간을 만드는 방법도 다루려고 합니다. 생각하기 위한 시간을
어떻게 해서 만드는가를 여러 가지로 적어 보았는데 반드시 당신에게도 효과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나에겐 별로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경우는 좀
다르거든요"
  "뭐가 다른가요?"
  "실은 말입니다. 나는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없어요. 놀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할 시간이란 도무지 없어요"
  "원, 저런!"
  "그럼 바빠서 이만 실례합니다"
  "난 말이지요. 시간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그것 참 좋으시겠군요"
  "그런데 그렇지가 못해요"
  "어째서 그렇지요?"
  "나에겐 시간은 많이 있지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요. 그저 멍하니 아무렇게나
소일하고 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이렇게 따분할 수가 없어요"
  사실 세상에는 '시간이 없다', '사간을 낼 수 없다'고 고민하는 사람이 정말 많은 

같다.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하고 잇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일까? 지금 내게는 다음과 같은 잠언이 생각이 난다.
  '바쁜 사람일수록 자기 시간을 잘 만들어 낸다'
  같은 이야기를 거꾸로 표현할 수도 있다.
  '시간이 언제나 남아 돌아가는 사람은 도리어 무엇을 하더라도 시간을 만들어 내기

어렵다'
  실상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서로 어긋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좀더
진지하게 시간을 만드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그 요령으로서,
  #1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
  #2 시간의 낭비를 막는 방법으로 나누어서 검토해 보자.

  2.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

  시간이 좀더 있다면, 몸이 두 쪽이라면 하고 누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뜻대로 안되는 까닭은 무슨 일일까?
  "설마 말로만 그러는 것은 아닐 테지요?"
  말로만 그런다고 하더라고 도리가 없지만, 하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머리 속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사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독자에게 반문하고 싶다.
  "당신은 정말로 시간을 절약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그래도 계속 당신의 고민, 즉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나 메모를 해둘 시간조차
없다는 고민이 정말로 절실한 것이라면 나는 대담한 충고를 하려고 한다. 즉 시간을
절약하려면, 결단을 내려서 과감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길밖에 적절한 방법이 달리 또 없을 줄 안다.
  이 과감한 치료 방법의 대상이 되는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손쉬운 예를 몇 가

들어보자.
  #1 노는 시간-가족이나 친구와 단란하게 한때를 즐길 시간을 희생시키라는 것은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별로 즐거울 것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흔히 있는 '노는'
시간은 절약하라는 것이다.
  #2 쓸데없는 잡담으로 보내는 시간.
  #3 별로 재미도 없고 배울 접도 없는 영화나 연극 구경.
  #4 별로 위안이 되지도 못하는 주말의 여행.
  #5 할 일 없는 사람과 어울려서 별 볼일 없이 보내는 시간.
  어떤가? 당신에게는 뭔가 걸리는 게 없는가? 어쩌다가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노닥거리다가 보면 가령 그것이 쓸데없는 노릇인 줄 알면서도 박절하게 거절하기가
인정상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일단 '시간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한 이상은 당신은
체면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시간을 내는 방법이란 요약하면 결국 이 한 가지뿐이다. 단호히 해낸다는 결심,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가 있다.
  어떤 것이 쓸데없는 시간인가 하는 문제는 실상 당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
다.
다음은 실행하느냐 안하느냐 두 가지 중의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다.

  3. 어중간한 시간을 살려라

  '당신은 어중간한 시간을 즐겁게 보낼 궁리를 한 적이 있는가?'
  라므와뇽가(16-17세기의 파리 의회의 초대 의장과 대법관 등을 낳은 명문가)의 한
남자는 저녁 식사 전에 의례 자기 부인을 2, 3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그는 여기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시간에 메모를 몇 줄 정도는 쓸 수가 있겠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곧장 이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을 위해서 식당 한쪽 구석에 펜과
종이를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세월은 짧고 분초는 길다'는 말이 있듯이 그가 식당에서 적어둔 메모철은
후에 몇 권의 "회상록"이 되어 세상에 남겨지게 되었다.
  사람은 대부분 기다린다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을 극히 좋아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손해가 되지 않는다.
  차를 타기 위해서 잠시 기다리는 시간에도 곧장 호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책, 예를
들면 엘리어트 총장의 어록을 끄집어낼 용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당하게
'기다리는 것은 즐거워하는' 소수의 뛰어난 사람에 낄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아침 시간이 신비롭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때로는 보통 때보다도 3, 40분 일찍이 눈이 떠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는
과단성 있게 얼른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도 좋고, 산책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분명히 기분도 좋아질 것이고 어떤 일에 집중도 잘
될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 갖는 신비성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잠자리에서 책을 읽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안과의사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많은 모럴리스트들은 이것을 경계하고 있다.
  지적 작업을 하고 싶거든, 당신의 아침의 작업장을 깨끗이
정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펜롱(1651-1715, 프랑스의 주교, 작가)은 어떤 여성에게 이렇게 글을 써서 보낸 적

있다. 정말로 함축성이 풍부한 말이다.

  4. 낭비를 없게 하는 방법

  앞에서 필자는 시간을 절약하게 위해서 당신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필요한 듯이 보여도 실상 필요 없는 시간이 더 이상 당신을 속박하는 일은 이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하면 아직도 '쓸데없는 시간'은 당신 주변에 널려
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아! 잊고 있었구나' 한다던가,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라고 한다던가 하는 일

없는가?
  만일 '있었다'하는 대답이 나왔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시간의 낭비를 증명해 주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줄 안다. 한번이면 끝날 일을 두세 번
되풀이하는 것은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잊어버리기 쉬운 것은 성격 탓이니 할 수가 없지 하고 체념해 버린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당신에게 만일,
  #1 앞을 내다본다
  #2 일을 잘 정돈한다
  라는 두 가지 습관이 있다고 하면, 결코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며, 실수도 안하

될 것이다.
  선견과 질서-이 두 가지 습관은 누구나 쉽게 몸에 익힐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선견이란 미리부터 상상하는 일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순서에 맞추어 잘 정리해서 트렁크에 넣어 두면, 일단 여행 중에 필요하게 될 때 그건
어디에 있더라, 그것을 가지고 왔는지 어떤지를 당황해서 황급히 찾거나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찾아낼 수가 있다. 이런 정도의 주의로도 시간의 낭비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앞을 내다보는 힘이란 것을 조금 과장해서 생각해 보자.
  인생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제가 몇 가지 있다. 결혼, 늙는 것, 질병, 죽음,
정신이상 등등,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선견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도 말하자면 이 선견지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유비무환'이란 교훈은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선견지명을 당신의 습관으로 몸에 익히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노트를 하는 것, 즉
기록을 하는 일일 것이다.
  당신의 상상력의 작용에 맡겨 보라. 상상이 가는 대로 주의 깊게 노트를 해 보자.
간단하게 노트 해도 무방하다. 당신은 싫더라도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면 그것을 알고
있어야 되며, 그렇게 기록을 해두면 행동의 지침이 되는 것이다. 당신의 안전과
독립의 지침, 이것이야말로 당신의 귀중한 재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질서는 마치 선견지명과 형제 같은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질서는 자연스러이 갖추어져 간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질서는 

정돈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부인, 단정하게 하고 계신다는 것과 질서가 있다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지 알고
계십니까?"
  "모르겠는데요"
  "당신의 화장실은 잘 손질이 되어 있으며, 또 닦고 문질러서 깨끗하게 되어 있군요.
그러나 토요일에 변호사에게 온 중요한 편지는 어디에 두셨지요?"
  "네? 참 그걸 어디에 두었더라?"
  이런 일은 실상 매우 흔한 일이다. 어쨌든 그 부인은 편지를 찾는 데 야단법석을
떨겠지요. 여기도 없다, 저기도 없다, 중요한 것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부인은
드디어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참다 못해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부인, 당신은 분명히 깨끗한 것을 좋아하시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정리하는 것이
부족한 것 같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부인은 이 손님의 도움을 받아들여 화장대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다.
  "아이구, 이제야 깨끗해졌군요. 30분이 걸렸군요.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끝난
셈이군요"
  불과 30분만에 정리가 끝났다고 하자. 그러나 이 부인이 낭비한 시간은
30분뿐이었겠는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는 안된다. 왜냐하면 어수선한 화장대에 못지 않은 혼란이 그녀

마음 속에도 있었을 터이고,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스며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주저하는 버릇을 없애라

  질서가 없다는 것 다음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면서도 망설이는 것도 시간의 낭비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좋지 못한 습관은 사람들의 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하겠다.
  필자의 친구 중에 독일에서 4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이 있다. 그는
불행하게도 '의지상실'이라 불리는 신경증에 걸려 있었다. 어느 날 이런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꼬박 10분 동안이나 모자걸이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뭘 하느라고 그러고
있었느냐고 물으니, 자기의 장교 모자를 어느 못에 걸 것인가를 결정짓지 못해서,
망설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경우는 확실히 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체념해도 좋겠다. 그러나 

 때문이 아니라 박력이나 지성, 요령이 없어서 어떤 일에나 우물쭈물하면서 주저하는
것을 볼 때 정말로 안타까울 뿐이다.
  당신이 만일 다른 사람을 한 시간 반이나 걸림 몸치장을 40분 안에 끝낼 수가 있다
면,
'망설이는 버릇'고는 인연이 없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의 당신은,
베르그송이 추천하는 무의식행동(즉 별로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도
하게 되는 자동적 행동을 말함)을 터득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인간에 있어서 '주저'하기 쉬운 성향이 만성화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주저'는 끝없는 악순환이다. 언제나 시작만 있을 뿐 끝이
없는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발전이 있게 마련이라는 이론대로 본다면 이러한 악순환에는
'시작'조차도 없다고 하겠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그 무엇하나 시작도 하지 않고,
자기의 일평생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한 장의 원고지와 연필을 준비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고 하자.
  그 원고지의 첫머리에 포쉬 원수(1851-1929, 1차대전 때의 연합군총사령관)의 유명

명제 즉 '무엇을 문제로 삼을 것인가?'를 적었다고 하자. 당신 같으면 이 문제에
하나의 해답을 제시할 때까지 5분 동안은 충분히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력한 집중에의 시도도 주저하는 습관에 푹 젖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효험도 없다. 일단 일에 부딪쳐서 손을 쓰기 시작하면, '내가 이기
지'
하는 배짱도 '주저'하는 버릇을 가진 사람에게만은 별도리 없이 당하게 되는 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러한 하나의 습관이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과
사물에는 주저 없이 '덤벼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우리들은
다같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 속담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들은 이것을 격려의 말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당신은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공부하려고 생각해 본 일은 없습니까?"
  전에는 한 번 해 본 일이 있다는 분은 상당히 많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떨까?
  그러나 결코 해서는 안된다. 실험은 한 번만으로 충분하다. '주저하는 악마'는
사람에게 외국어를 배우라고 충동질을 해 놓고는 속으로는 매우 기뻐하고 있다.
  당장 착수할 수도 없는 일을 이런저런 생각만을 거듭하면서 주저하기보다는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일을 착수하라.
  과감하게 실행에 옮겨라. 무조건 시작해야 한다. 선견과 질서 있는 준비만 있으면 

무엇하나 우물쭈물하면서 차일피일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ff
     제10장
     상상력이 사고를 만든다
     사고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I)

  1. 저속한 욕망에서의 자기 해방

  인간의 마음을 채워 주고 있는 이미지는 결코 일반적으로 고상한 것만 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감수성의 강도나 사랑의 깊이에 있어서, 인간은 동물에게 미치지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점은 아무래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일단 저속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이 이미지의 포로가 되어
쉽사리 풀려 나오지 못한다. 다음에서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술 없이는 못하는 알코올 중독자
  #2 색정광
  항상 늘씬하게 차려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여자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사람들

같은 부류에 속한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3 수전노
  이것은 글자 그대로 돈밖에 모르는 일종의 중독자이다.
  #4 야심의 포로가 된 속물. 헛된 명예욕이라든가 겉치장에 홀린 사람들을
말하며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5 사회적 야심가
  #6 이밖에도 여러 가지 치사하고 하찮은 문제에 골몰한 나머지, 나무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대체로 쭉 한번 훑어보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열등한
이미지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가 있다.
  좀더 구체적인 실례가 필요하다고 하는 분들에게는 제인 오스틴(1775-1817, 영국의
여류작가 철저한 사실과 풍자로 유명한 작가임)의 소설을 권하고 싶다. 여기서 아주
훌륭한 표본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비관적인 전제가 길어지기는 했지만 지금 한 가지 필자 자신이 소년시절에 체험한
바를 덧붙여 말하겠다.
  그것은 프랑스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화상 가게 앞에 서 있었던 일이다.
주인인 베야 씨는 체구가 조그마하나 뚱뚱한 중년 남자인데, 보기보다는 민첩하고
줏대가 있는(나중에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었다.
  어린 소년인 내가 가게의 과자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베야 씨는 싱글벙글하면서
어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귀만은 엉뚱한 곳으로 향해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가게의 안쪽에서 종알종알하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은 베야 씨의 부인과 딸들인데 모두 미인들이었다.
베야 씨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쳇! 시시한 소리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시시한 소리들'하는 말이 분명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깊은 인상을 나에게 심어 주었다. 나는 왠지 베야 씨가 '시시한 소리들!' 하고 중얼거

말에 끌렸었다.
  베야 씨의 인상이라고 한다면 단지 이것뿐이었으나 그 수 오늘날까지도 나의
마음속 깊이 새겨 져 뚜렷이 흔적을 남겨준 것이다. 베야 씨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으며, 또 어째서 내가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베야 씨는 여자들의 이미지의 빈약함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의젓한 베야 씨의 태도는 어린 나의 마음에까지도 중요한 뭔가를 강하게 인상짓게
하는 힘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한 가지 복습을 해 볼까요.
  '인간의 이미지가 본래 저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또는 그 인간의 사고)의
가난함을 숙명 짓는 것은 아닐까?
  -베야 씨가 이에 대해서 하나의 해답을 보여준 것이다.
  즉, 저속한 이미지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욕망이 사고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첫걸음인 것이다. 밖을 넓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는 눈이 지금부터 가야 할 깃을 밝혀
주는 것이 아닐까? 이미지의 확대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라

  도시의 공해에 견디기가 어려워지게 되면, 우리들은 멀리 떨어진 바닷가의 솔밭의
솔 향기에로 마음이 이끌리게 된다. 이웃 사람들과 남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세계 정세를 논할 수도 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딥시다"
  "그런 이론이야 누구나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역시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지만 일단 실행을 하려고 들면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
있어서 일이 잘 안되는 일이 있다.
  국제정세라는 테마에 대해서 여기서 좀 생각해 보자.
  우리들은 지금 어지럽게 움직이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더구나 국제문제란
복잡한 것이 되어서 극히 소수의 특권적인 당사자 또는 관측자의 손에 맡겨지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난날을 돌이켜 보자.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를 생각해 보라. 그 때, 우리

일반시민, 수백만 명의 시민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서로 주고받았던 이야기 내용을
상기해 보라. 그 무렵에는 매일매일의 토픽이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러나 평화가
찾아옴과 동시에 이야기의 대상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세상의 흔해빠진 너절한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국제문제라고 하는 '보다 높고 넓은 사고'의 소재는 여전히
시시각각으로 충분히 계속 제공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물을 '보다 높고
넓게'생각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질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제정세를 논할 때와 이웃의 뜬소문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미지의 질이 다른 것이
다.
결국 수준 높은 이미지는 의식적으로 선택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이미지를 획득하려면, 어떤 대상을 선택하면 좋을까?' 라는 문제에 촛점이
옮겨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명석한 해답을 내는 것은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다소 추상적인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효과적 방법이 있다. 즉 모든
것에서 최선의 것을 택하라.
  단순하고도 명쾌한 듯이 보이는 이 원리가 실상 한 곬으로만은 문제가 잘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두세 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여기에 몇 사람의 비평가를 빠뜨린 함정이 있다. 그들은 문학사상의
'2유급의' 인물을 통해서 문학의 본질을 해명하려고 시도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물론 아더 영(1741-1840, 영국의 농정학자, 저술가)은 낭만주의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샹플로리(1821-1889, 프랑스의 사실소설가)는 사실의
철저함에 있어서는 플로베르(1821-1880, 프랑스의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 대표작
"보바리 부인") 이상이었다. 이런 견해 자체는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영이나
샹플로리를 알기 위해서는 책한 권 정도씩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이에 비하면, 발작(1799-1850)이나 플로베르나 바이런(1788-1824)의 경우는 도서관
가득히 채울 책을 써도 결코 많지 않은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학자들에 의해 연구, 토론되면서도 또한 중대한 숙제로서
남아 있는 테마-그것이야말로 본질적이 테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연구해도 끝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테마의 중대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호머, 플라톤, 버질, 밀턴, 라신과 같은 문학자들을 들 수 있으며, 알렉산더,
시저, 나폴레옹 등의 정치가들도 이에 못지 않은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사도시대라든가 대혁명시대 같은 역사상의 시대나 사건이
다른 의미로 보다 중요한 테마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더구나
이밖에도 철학상의 테마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랑과 죽음'과 같은 문제이다.
  다시 되돌아보자. 우리들은 저속한 욕망이 초래하는 '저속한 사고'와는 깨끗하게
인연을 끊어야 되겠다.
  그러나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는 가장 뛰어나고 두드러진 인물의 생애를
추적하여 그들이 남긴 저작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파헤쳐 보는 것이 어떤가를
제안하고 싶다.
  두말할 여지도 없이 여기 당신 자신을 테스트할 단 한가지 방법이 있다. 당신의
이미지의 질이 저속한가 어떤가를 아는 간편한 방법이다.
  당신이 지금 본받고 있는 위인의 이름을 적어도 한 사람 들어 보라.
  당신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본받고자 하는 위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안심이다.
당신의 내면은 저속하다는 것과는 적어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ff
     제11장
     사고의 수준을 높이는 독서
     사고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II)

  1.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만을 골라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어물어물 넘겨 버리려고 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싼 것이 비지떡'이란 말은
독서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말이다.
  '독서'를 하고 있다고 말만은 번지르하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남에게 보이기가
부끄러운 책을 몰래 숨어서 읽고 있는 단계에서는 정신의 향상은 바랄 수 없다.
  가벼운 책이란 '생각하면서 읽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다. 당신의 눈을 뜨게
하는 책, 그런 책이야말로 훌륭한 책이다.
  가벼운 것은 당신의 기분을 편하게 해주고 어루만져 주어 드디어는 한가로이 잠들게
해줄 것이다. 별로 부작용이 없는 수면제의 대용품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런
책과는 정반대의 책을 상상해 보라. 그런 책이야말로 틀림없이 좋은 책이다.
  그러나 '깜짝 놀라게 하는' 효과만을 노린 것 같은 책은 한때 잠을 깨게 할지는
모르지만 역시 수면제의 일종이다.
  어떤 책이 당신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줄 안다.
  책은 풍경과 같은 것이다.
  어떤 풍경이 마음에 드느냐 하는 것은 물론 천차만별이다. 뛰어난 풍경을 선택할
경우에는 당연히 사람에 따라서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다. 거기에는 적성이란
것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당신을 잠시라도 머뭇거리게 하고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 생각하게 하는 
책,
그것이 바로 도움이 되는 책이다. 팜플렛, 백과사전 속의 해설, 신문의 낡은
스크랩... 뭐든지 좋다.
  "당신의 사상 바로 그것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은 라마르틴(1790-1869, 프랑스의 시인, 정치가)의 말이다. 두세 줄의 짧은
글에서조차도 사색의 씨앗으로 삼을 수 있는 철학자의 마음가짐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우리들에게도 이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당신의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시일지도 모르며, 역사, 철학, 과학 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책을 읽으면 졸립다는 사람들에게는 짧게 압축된 북레뷰(서평)가 사색을
돕는 것으로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대수라도 좋다. 위대한 발명가나 실업가의
전기라도 좋다. 당신의 사색을 일깨워 주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 당신 이외의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은 독자의 마음을 비춰 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독자의 개성이 거기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고리타분한 톰슨(1700-1748, 스코틀랜드의 시인)의 계몽서 중의 열 줄이 나에게
있어서는 셸리의 작품 전체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이 톰슨의 책을
탐독했던 시기(어릴 때의 일)의 감수성의 강도가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의 메누엣에 도취해 있던 사람이 바그너(1813-883, 독일의 작곡가, 가극의
창시자)의 오페라를 그리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별로 우스울 것은 없다.
가치 있는 책(뛰어난 예술작품도 포함해서)에 대한 취미는 의식적으로 높일 수는
있어도 기호의 차이는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 이외에는 누구도 필요한
책의 이름을 가르쳐 줄 수가 없다.
  제목은 물론 종별조차도 대줄 수가 없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입니다"
  이런 막연한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다.
  월터 스콧은 테마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책을 읽으면서 자기 소설을 구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철학자 칸트의 경우는 그가 몹시 좋아하는 여행기를 읽으면서
인스피레이션을 얻었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 식으로 말한다면, 예컨대 당신이 만약
  "이 몇 권의 책 중에서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책을 골라 주십시오" 라고
나에게 청했다 할지라도 나로서는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정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책은 엉뚱한 곳에서 뒹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역시
  "당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책을 선택하십시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2. 즐길 수 있는 책만을 읽어라

  '무엇을 읽을 것인가'하는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이른바 테크닉의 문제가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실제로는 기계적으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일단 검토해 보자.
  일반적으로 '생각하면서 읽는' 요령은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읽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쉽게 읽으려면 많이 읽어야만 한다.
  결국 많이 또는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야말로 '생각하는' 여유를 우리들에게 익히게
해주는 것이다.
  문체에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문체는 중요한 것이다. 작가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로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문체를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역시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문체에 너무 신경을 쓰면 중요한 것을 빠뜨릴 가능성이 많다.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요컨대 문체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작품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이 점을 놓쳐 버리면 독자는
문장의 한 단편, 그것도 현학적이 장식의 포로가 되기 쉽다.
  작가가 의도하는 것, 지향하는 것-그런 것들을 파악해서 자신의 피와 살이 되도록
하는 것이 무엇 보다고 독서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잘 알려져 있는 격언 한 가지를 소개한다.
  '좋은 책은 읽지 말라'
  이 말만 듣고 너무 성급하게 엉뚱한 결론을 내리지는 말라. 이 말에는 뒤가 있는
것이다.
  "(좋은 책을 읽지 말라) 인생은 너무나 짧다 .가장 좋은 책만을 읽어라"
  이렇게 말하면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흔해빠진 이야기를 뭘
새삼스럽게 내세우느냐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격언에서 얻을 수 있는 다시
없는 좋은 처방에 대해서 현대인의 95%는 외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또 당신이 자랑하는 그 걸작 리스트를 들먹이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버질이 '아에네이스',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락원' 말이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읽기 쉬운 책이 아니지요. 왜 보통 재미있는 것을 읽으면
안됩니까? 결국 그런 것도 도움이 되는 게 아닙니까?"
  이러한 반박에는 난처한 표정을 짖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당신의 즐길 수 있는 책을 읽으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단지...
  "가장 즐길 수 있는 책만을 읽으십시오"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일단 당신의 반박에 대한 대답은 한 셈이다.
  걸작이 재미없이 보인다는 것은 분명히 난처한 문제이다.
  "걸작이란 학교 선생님들이 해석해서 보여주는 따분한 교재라든가 시험의 문제가
되는 것들이지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여러분의 통쾌한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교육이 낳은
최대의 걸작! 그렇다 하더라도
  '무식한 편이 오히려 해가 없다' 라는 생각하는 것은 심술궂은 역설이다. 분명히
무식한 사람의 머리 속에는 '아직도 그 걸작을 읽지를 못했어' 하는 식의 열등감이
숨어 있게 되는 것이다.

  3. 고전이야말로 가장 좋은 작품

  기차 속에서 우연히 만난 한 젊은 부인의 일이 생각난다. 그녀는 이른바
흥미 본위의 연애 소설을 읽고 있었다. 열렬한 소설 팬이었던 것 같다.
  어떤 인연으로 우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헤어질 무렵, 드디어 그
부인에게 대커리(1811-1863, 디킨즈와 나란히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소설가)의
"허영의 시장"을 읽도록 대중소설을 읽고 있던 부인에게 권했다. 그렇다. 나는 대화
속에서 상대방 부인의 참된 취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고상한 소설은
읽은 적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매우 대중소설에 대해서 싫증내고 있었다.
그것을 입밖에 내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 기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감동했다.
그래서
  "시시한 것을 읽느라고 싫증을 내는 것은 명작을 읽고 흥분하는 것보다 더 값어치가
있다" 라고 말해도 그리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책을 읽다가 그 책이 시시한
것이라고 생각되었을 때에는 그 기분은 꼭 소중히 간직하기 바란다.
  "최상의 것이 아닌 것은 단호히 버리십시오"
  사색을 위한 테크닉으로서도 이것은 역시 효과적이 테크닉이 될 것이다. 고전은
최상의 것, 아니면 거기에 가까운 것들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엄격한 도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고전의 정의
그 자체가 그 가치의 높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세월이라고 하는 이름이 정밀하고도
비정한 필터에 의해서 걸러진 것, 그 중에서도 오래 살아남아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고전이란 레테르를 당신의 독서 카드에 적어 두면
틀림이 없다. 당신이 수고해서 찾아내는 시간과 시간이 매우 절약이 될 줄 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 자신이 책을 엄선하는 수고를 멈추어서는 안된다. 선택하

행위가 있고 읽은 사람(적극적으로 읽지 않는 사람도 포함해서)이 있는 한 책 자체도
끊임없이 선택되어지고 버려진다.-방법은 두 가지 중 한 가지밖에 없다.

  4. 신간은 3개월 기다려라

  여기서 고전만 가지고는 싫증이 난다는 좀더 욕심을 부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
보자.
  현대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은 무익한 행위일까? 매일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출판물 중에서 어떻게 해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가 있을까? 진주와 유리구슬을
어떻게 구별하면 좋을까?'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금방 제본소에서 나온 책이 있다고 하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참아야 합니다. 그 책이 정말로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어쨌든 과거의
기념비로서 남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가서 사서 읽으십시오"
  실상 필자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겠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만큼 사색의 양식이 되는 것은 없다"
  실상 우리들은 유행에 뒤떨어지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가장
새로운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책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매스 프로덕션이 되어
나오는 신간 서적 중에서 어떻게 좋은 책을 선택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좋은 방법을 소개하겠다.
  출판된 후 3개월을 기다려 보는 것이다. 이 사이에 잊혀져 버리는 책은 우선 읽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단지 이런 정도의 선택 방법으로도, 당신이 선택해야 할 대상의 범위는 한결 좁아질
것이다. 불과 백 일도 안 되어서 독자의 엄격한 눈은 어김없이 잘못을 찾아 주기
때문이다. 고전을 포함한 과거 역사가 우리들을 끌어당기는 것은 현대의 역사에 조명

해주기 때문이며, 또 전적으로 이런 경우에만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다.
  당신이 현대의 역사에 얼마나 밝은가, 다시 말하면 유행에 뒤떨어져 있는가,
어떤가를 아는 실마리로서 문제를 하나 제시해 보겠다. 세계지도를 한 장 준비하라.
  어떤 지점을 가리키면 거기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문제점을 신문이나
잡지를 읽듯이 지적할 수가 있겠는가?
  이 장에서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도 결국 여기에 귀착되어 지는 것이다.
@ff
     제12장
     생각하기 위한 독서법
     사고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III)

  1. 자기 페이스로 읽는다

  '생각하기 위해서 읽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
  자. 그러면 도대체 '생각하기 위해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질문에 앞서서,
  "도대체 읽는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것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있을까요?" 하

당신이 따지고 나온다면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지적한 바는
'읽는 것은 생각하는 것' 이라고 믿었던, 고전시대의 독서관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이렇게 추궁을 당할 필자는 꼼짝 못할 판단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다.
  '생각하는 것'과 '읽는 것'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 이 두 가지의 관계에 대해서,
고금의 철학자들이나 대독서가들이 어떤 것을 생각했으며, 어떤 말을
했는가를 한번 훑어봄으로써 교훈을 찾아보자.
  "너무 빨리 읽는다는 것은 좋지 않다" 고 말하면서,
  "너무 느리게 읽어서는 안된다" 라고 언뜻 듣기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까다로운
주문을 붙인 것은 저 유명한 파스칼이다.
  그러나 이 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철학자가 독서 그 자체를 금할 턱은 없는
것이므로 우리들은 여기에서 '정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의자에 앉아 있노라면, 나의 생각은 알게 모르게 잠들어 버리고 만다. 하는 수 없

나는 생각을 집중하고 싶을 때에는 걷는다" 라고 독서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해서
몽테뉴는 말하였다. 몽테뉴와 같은 위대한 인물조차도 이렇게 조심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생각하면서 읽고 있다' 고는 하면서도, 솔직하게 말한다면 마음은 언제나
공중에 떠 있는 경우가 많다.
  너무 빨리 읽어 버리거나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들여서 읽는다는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은 결국 '뭔가 생각하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하

씁쓸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씁쓸한 경험을 또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한 가지 비결로 가장 흥미를
끄는 것만을 읽는 방법이 있다.
  희극에 흥미가 쏠려 있을 때에 무리하게 대수 문제와 씨름하거나 하지 말 것,
활극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굳이 애써서 희극의 연구로 돌아올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만 어중간한 열중이어서는 안되겠다. 전심전력으로 열중해야 된다.
열중하는 것이야말로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열중하지 않고는 어떻게 해서
'잘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앞에서 말한 파스칼의 의견에 다소 보충을 해 보자.
  "빨리 읽는 것이 즐거우면 빨리 읽는 것 이상으로 좋은 방법은 없다"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상태는 독자의 마음이 가장 '생각하기 쉬운' 상태에 있다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는 일 자체가 '적당한 독서의 속도'를 정하고 있는 셈이
다.
  "열중할 수 잇는 것일수록 읽기 쉽고, 읽기 쉬울수록 그만큼 생각하게 된다"
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더 나아가 생각하는 내용=이해의 효율을 올리는 일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2. '필요'는 생각하기 위한 첫걸음

  "당신은 기차 시간표를 어떤 식으로 봅니까?"라는 질문에
  "그런 거 뻔하지 않소?"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선 자기가 필요한 데까지 훌쩍 뛰어넘게 된다. 그리고 요점만을 자세히 살펴본다.
극단적으로 기호화된 기차 시간표 중에서 당신이 필요하고도 충분한 사항만을
이해하려고 들 것이다.
  기차 시간표를 자주 보아야만 하는 사람은 그런 건 별로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러

처음으로 가차 시간표를 보게 된 사람은 별수 없이 그 많은 시간표를 모조리 읽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어디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일까? 물론 '경험의 차이'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경험을 얻기 위한 근원이 된 '필요'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기차 시간표는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 다만 이 사실만이 쉽게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두 가지 극단으로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차 시간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임은 우리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또 여행하는 것이 취미만이 아닌 사람들, 즉 직업상 여행을 자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에게 기차 시간 같은 필요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들은 '기타 시간표 읽기'에는 프로 선수인 셈이다. 어쩌다가 기차 시간표를 이용하

되는 사람과 항상 기차 시간표를 보아야 하는 사람 사이에는 읽는 속도라든가 이용하

솜씨에 있어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이와 같이 대충 '생각하면서 읽는다'고는 하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커다란
핸디캡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상기하기 바란다.
  몽테뉴와 같은 '책 읽기의 후로 선수'라 할지라도 '앉아 있으면 잠들어 버리는'
위험이 있었다는 점이다.
  즐거운 것이어야만 할 독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짐스럽고 싫증나는, 한마디로
말해서 귀찮은 것이 되어 버려서야 되겠는가.
  읽고 있던 책 위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몽테뉴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도 몽테뉴의 흉내를
내어서는 안된다.

  3. 겉치레보다는 저자의 인격

  그런데 기차 시간표의 예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기차 시간표

보는 방법이 생각하면서 읽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하나의 열쇠가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하는 독서와 인격 형성을 위해서 책을 읽는
것과는 어디까지나 구별되어져야 한다.
  지식을 얻기 위한 태도는 자연스러운 욕구의 나타남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키워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식의 책'은 결국 그 자체로서의 의미밖에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기본(1737-1794, 영국의 역사가, "로마제국의 쇠망사"로 이름이 높다)이나
마콜레이(1800-1859, 영국의 역사가, 시사평론가), 몸젠(1817-1903, 독일의 고전학자, 
역사가)의 역사책은 과연 존경할 만한 노작이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지식의
책이고, 생각하는 도구의 백화점이지만, 생각하면서 읽기에는 적당치 않은 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지식의 책'이란 어디까지나 '알 필요가 있어서 읽는' 종류의 책이다. 당신의 꼭 알

싶은 부분이 20페이지에 있다고 하면, 그 부분만 읽으면 되는 것이다. 전부를 읽지
않으면 양심적이라고 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전부 읽는 것은 도리어 해로울 때도 있다고 하겠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라. 시간을 아낀다는 것은 유효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태도이다. 가능하면 당신의 노트를 활용하라.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항은 될 수 있는 대로 반드시 노트를 하자. 이렇게 하면 훗날 책을 다

읽는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하면 훗날 책을 다시 읽는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지식의 정리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한두 줄 읽기만 해도 내용을 알 수 있는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목차를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내용을 알 만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서점에서 책을 선택할 경우 저자와 당신의 의견의 차이를 뚜렷이 알 수가 있는지, 

책의 장절을 보아서 금방 알 수가 있는지 어떤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저자와 당신의 의견이 대립된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간단히 잠들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논쟁을 하면서 좋든 싫든 당신은 '생각을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

때문이다.
  저자나 출판사 쪽에서 보면 책의 주제, 특히 독자에 대한 논점을 명백히 드러내
놓는다는 것은 센세이셔널 하다기보다는 성실한 태도라고 할 수가 있다. 의미를
명석하게 하려고 한 나머지, 인쇄상의 기교를 부렸다고 해서 백안시 당한
샤를르 폐기(1873-1914, 프랑스의 시인, "반월수첩" 창간자)의 일이 생각난다.
그와 같은 '편견'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판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출판사의 스타일도 나날이 새로워져서 새로운 장식을 하게 되는 것은
시대의 추세라고 할 수가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독자의 의도가 거기에 반영되고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급한 주장이나 겉치레가 거창한 것만을 보고 본질적인 논점의 소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더욱 조심하고 싶은 심정이다. 공격적이고 겉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이는 책일수록 내용이 빈약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비판에 대해서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에 소홀히 하기 쉬운 일방적인 주장은 대개의 경우 당신의
'인격형성'이나 교양의 향상에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지식의 씨앗조차도 되지 않는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1 어떤 책이 여기에 있다.
  #2 저자의 논점이 당신을 자극했다.
  #3 당신은 저자와 논점의 가부를 따져 보고 싶다.
  #4 당신의 기대는 채워졌다. 즉 당신은 읽는 과정을 통해서 생각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물론 졸지도 않았다.
  이렇게만 된다면 이상적이겠지요. 그러나 #1-#3의 전제가 결과인 #4에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당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왜 생겼을까? 물론 그것은 당신을 자극한 논점이
'겉치레만 번지르르한' 엉터리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수를 미리부터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결과를 보고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저자가 제시한 논점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들이 정말로 대결할 가치가 있는 것, 그것은 저작의 인격이지 인격에서
독립된 견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변에-즉 주제의 배우에-당신의 존경을 느꼈을 때에 다분히 그 책은
진짜일 것이다. 당신이 읽고 생각하게 되는 책이라 당신이 읽으면서 '존경'을 잃지
않았던 책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당신과 저자 사이에서 침묵 속에 주고받는 '존경의 뜻'이 '창조적 비평'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을 하겠다.
@ff
     제13장
     이해했으면 비판하라
     사고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IV)

  1. 생각하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하자

  어떤 책이라도 일단 읽기로 작정을 했으면
  #1 우선 이해한다.
  #2 이해했다고 생각되면 반드시 비평해 볼 것.
  도대체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독서를 왜 하는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넓은
세상에는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읽는' 방법이 성행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이런 일이 있다.
  브라우닝 부인(1806-1861, 남편 로버트와 함께 시인 부부로 알려진 영국의
여류시인)의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독자 여러분의 감상을 물어본 적이 있다.
시인은 여기서 철학을 '신에의 공감'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필자는
그 점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작가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알 수가 없는데요"라는 답이었다.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틀려도 좋으니까 부딪쳐
보려는 자세조차도 엿볼 수가 없었던 것은 유감이었다.
  이해할 힘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썩히는 짓과 같은 것으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신문을 읽듯이 편하게 앉아서 시를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으로

꾸준한 교양을 계속 쌓아 가는 사람도 있다. 언뜻 보기에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두
그룹의 사람들 사이에는 넘어 뛸 수 없는 간격이 있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작가가 남겨 놓은 단편들을 발굴했다고 몹시 기뻐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편지 따위라든가 친필 원고 따위를 연구한답시고 몇 년씩
세월을 보내는 태도가 무언가 대단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독서하는 마음'의 자세는 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20행밖에 안되는 세네카(65, 로마 제정 초기 문인)의 문장을 두 시간씩 들여서
연구하는 프랑스의 예비대학교(이것을 리세라고 한다)의 수업 방식은 뛰어난 지적
훈련의 한 방법이다.
외국에서 찾아와서 구경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 하며 나중에는 홀딱 반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세의 학생 자신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겪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은 드디어 '올바르게 읽는 습관'이라는 빛나는 결실을 가져오게 된다.
그들도 머지 않아 '그것이 정말 좋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이 외국어를 알고 있다면 한번 번역에 착수를 해 보라. 더구나 매우 지적이고
예술적인 번역이 되도록 해 보라. 하루에 넉줄 정도라도 좋다. 이 작업이 얼마나
'완전히 이해하는 습관'을 붙이는데 도움이 되는지 당신 자신이 스스로 놀라지 않을 

없게 될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거나 너무 어렵다거나 하는 이유로 내동댕이
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생각하는 노력! 이것이 '이해하는' 독서의 시작이고 또 종점이기도 하다.

  2. 우선 의심해 보라

  대체 자기가 쓴 글을 남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한편 그
작가에 대해서 작자의 참다운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남김없이 캐내려고 노력하는
독자가 대기하고 있는 법이다.
  '남김없이 이해하려'고 마음먹고 그런 자세를 취하게 되면 이미 비평이 여기에
포함되고 있는 셈이다. 본래 '비평한다'는 말은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통 비평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직능을 우리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쉽게 알 수 가 있다. 누구도 남의 흠을 찾아내는 전문가를 가리켜서
비평가라고는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판정자라고 부를 따름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까지는 자기 자신은 자진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맞장구를 쳐 놓고 막상 자기 차례가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상대방 이야기를 그대로 복창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빌어온 의견'에 익숙해져 버리면, 끝내는 다른 사람의 의견의 포로가 되어 버리게
되며, 지배를 당하는 '양'이 되어 버릴 것이다. 부화뇌동의 충동을 누를 수
없는 마음속에는 겁쟁이 심보와 게으름뱅이 근성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
  '비판정신'은 될 수 있는 대로 어릴 때부터 몸에 배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빠르다는 법은 없다. 빠를수록 좋다. 우리들은 교사가 해야 할 역할의
중요성을 여기서도 강조화고 싶다.
  뛰어난 문학작품의 분석을 목적으로 하는 세미나는 반드시 우선적으로 했으면 좋을
듯하다.
  학생들은
  #1 되풀이해서 정독을 할 것.
  #2 구조를 조사할 것.
  #3 중심이 되는 관념을 파악할 것.
  #4 관념이 어떻게 전개되며, 지속되었는가를 판단할 것. 이와 같은 순서로
이해 비평의 방법을 몸에 익혀 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훈련이 올바른 지도를 받아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소년 소녀들의 눈이
어른들의 눈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아직 젊은 나이에 매우 놀라운 발전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젊은 마음 속에 뚜렷이 뜨여진 눈, 그 눈빛이야말로
'힘찬 어른의 자각'의 증거가 아닐 수가 없다.
  역사를 연구하는 효과도 문학의 경우에 뒤지지 않는다. 방법이 올바르기만 한다면
효과적인 대상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겠다.
  속담이라든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일반적 원리'도 훌륭한 '생각하는 소재'의 자
격을
갖추고 있다. 이해 판단의 공식은 여기서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한다.
  좌우지간 학생들에게 의심이 싹트지 않는다고 하면, 그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책망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교사는,
  "이것은 진실입니다"
  "이 그림은 아름답습니다"
와 같이 일정한 관념을 늘어놓고, 학생들로 하여금 외우게 해서는 안된다. 학생 쪽에

보면
  "이것은 정말로 진리라고 할 수가 있는가?"
  "이 그림은 과연 아름다운가?"
와 같은 관점에서 스타트할 일이다. 무수한 '견해'가 여기서부터 갈라질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요는 '판단하는 마음'이 일관해서 작동하고 있는지, 어떤지

중요한 것이다.

  3. 사물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데카르트나 쇼펜하우어(1788-1860, 고뇌와 허무의 예언자라 불린 독일의 철학자)에
의하면 판단=비판에서 걸리지 않은 '기정의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체스터턴(1874-1936, 영국의 소설가, 평론가)은
  "흔해빠진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다른 것으로 보여질 때까지 계속
노려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실제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내용을 갖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이것은 체스터턴의 이야기인데 대체로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 넘어선 어떤
종류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명언을 말할 수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 보인' 놀라움은 누구 나가 경험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교교하

달빛 아래 경치에 도취해 있으면서 차를 타고 흔들리면서 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꿈을 꾸는 듯한 경지에서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여기는 어딘가?..."
하면서 놀라서 밖을 내다보고는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이 있다. 멀리서 보아서는 마치
낯선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어느덧 낯이 익은 장소에까지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언덕도 나무도 집도 꿈같이 먼 곳에서 한순간에 현실
세계에로 되돌아와서는 움츠려 들고 또 퇴색해 버리는 일도 있다.
  '유령의 정체가 드러났네. 마른 억새풀'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의 이미지에는
두 가지 면이 있으며 따라서 인상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른바 기성개념이란 것은, 생활, 사상을 뭉뚱그려서, 이런 식으로
왜곡시키지 않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다시 되풀이하지만,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진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여기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모양'의 뒤에 숨은 '진짜 모습, 모양'을 찾아내서 분간하려면
말로만 해치울 수 있는 만큼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나 수고를 아끼고
있다가는 우리들의 실체의 표면을 언제까지나 그냥 지나쳐 버리기가 쉬운 것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할 때 다름 아닌 우리들의 판단하는 능력이 그만큼 유능하냐
어떠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4. 비판 없이 이해 없다

  당신이 아직 읽은 일이 없는 외국작가의 이름을 친구가 들먹였다고 하자. 가령 그
이름이 고리키(1861-1936, 러시아의 소설가)였다고 하자. 당신은 당연히 흥미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들춰본 잡지에 이 작가의 일기가 실려 있었다. 당신의 눈은 그
부분에 쏠렸다. 여기서 감동과 흥미를 느낀 당신의 욕구는 한층 부풀어올라서 그
후로는 고리키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된다.
  이윽고 당신은 고리키를 읽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하여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
  "고리키를 이런 식으로 파악한 것은 나 혼자야"라고.
  비평이란 것을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라. 왜냐하면 우리들의 심미안은
한쪽에서는 머리를 숙이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을 하고 든다. 이 두 가지의
충동의 균형을 잡는 것이 비평의 의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평의 원리로 일류 작가나 철학자의 노작을 당신 자신이 직접 심사를
해보라.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명예가 결코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정말 훌륭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화랑에서 친구의 걸작을 정신없이 보고 있는
광경을 본 일은 없는가?
  그들의 눈은 그 그림을 여기저기 샅샅이 살펴보면서 차츰 열을 띠게 된다.
화가만이 지닐 수 있는 예리한 눈의 표정이 극점에 도달했는가 생각되는 순간,
그는 갑자기 눈을 감아 버린다.
  뛰어난 작품 앞에서 자기를 대상 속에 투입하려고 시도하는 예술가의 모습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행위는 비평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비평도 판단도 결국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ff
     제14장
     신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고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V)

  1. 빨간 연필과 가위를 항상 준비하라

  우리가 '이미지 체인지'를 시도할 경우 신문이야말로 둘도 없는 교재가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신문은 매일 매일 달라지는 '세상 일' 전반에 걸친 살아 있는
데이터인 것이다. 데이터를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읽는 방법' 여하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문을 가장 효과적으로 읽는 방법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신문을 읽는
여러 가지 방법을 편의상 세 가지로 나누어 보자.
  #1 고지식하게도 모조리 빠뜨리지 않고 읽는 방법.
  이런 사람들은 읽는 목적이라든가 요점 같은 것이 뚜렷이 파악되어 있지 않는
것 같다.
  #2 신문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문을 읽는 것은 시간의 낭비라고 처음부터
정해 놓고 덤비는 타입.
  바로 #1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3 빨간 연필과 가위를 항상 준비해 놓고 신문을 이러저리 오려 내는 사람.
  이것은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 한정되고 있다.
  #1과 #2는 우리로서는 배울 바가 없는 태도이다. #3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잠시 이 
사람(가령
A씨라고 하자)의 방법을 보자.
  A씨가 조간 신문 앞에 앉아 있은 지 이미 한 시간은 지난 것 같다. 그런데 어느덧
신문들은 간 데 없고 책상 위에는 빨간 연필로 표시를 한 신분 조각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커다란 가위가 재빨리, 그러나 매우 조심스럽게 빨간 줄을 따라서 신문을
오려 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오려진 조각만이 있었던 것이다.
  A씨는 신문지 조각들을 보면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퍽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어 곧 그 조각들은 여기저기 서류 속에 매우 소중한
듯이 끼워 넣어지거나 상자에 분류해 넣어졌다.
  그날 저녁, A씨와 만났더니, 우리들이 조간에서 얻은 지식에 언급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소홀히 했던 사실들은 그가 제기하는 것을 듣고 거기에 새로운
가치가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로군!'
하고 우리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신문에서 교과서 이상의 교훈과 지식을 발견해 내는군요"
  과연 그렇다. 교과서란 말하자면 지나간 수십 년의 신문을 극도로 압축해서
요약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교과서만으로는 이 현대라고 하는 눈부시게 변화하는 상황을 파악하기
힘드는 것이다. 역사는 살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1년은 지나간 과거의
몇 년, 몇십, 년에 못지 않은 변화를 이룩하고 있지 않은가.
  유럽이 간신히 재건되는 사이에 아시아는 눈부신 발전 변모를 보여 주었다. 그 동안
미국도 별수 없이 자유 수호를 위한 방위선을 재정비하고 있다. 예측을 할 수 없는
역사의 드라마의 한복판에 우리들이 서 있는 셈이다.
  결국 오늘날에 있어서는 어떤 교과서도 미래를 예측하는 데는 질량의 어느
면에서도 신문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판단력이 매일매일
축적되어지는 이미지의 질에 좌우되어지는 한, 신문이야말로 둘도 없는 보고이다.
  A씨의 결론은 다할 수 없이 명쾌하다.
  A씨의 '신문 읽는 방법'이야말로 우리들의 모범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신문을 사대적으로 다루는 #1의 타입, 거꾸로 코방귀를 뀌는 #2의 타입

어느 쪽도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회상의 기회를 턱없이 내던져 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신문 따위야... 하고 잘난 체 해보아야 결국 자기 자신이 손해를 볼뿐이다.
@ff
     제19장
     창조적인 사고

  1.창조력

  '창조적 사고'란 천재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권일까? 물론 천재란 '창조적 사고'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마음'은 그 자체는 어느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리들도 천재같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생각한다는 것 자체는 본래 그리 까다롭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다.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미리 겁부터 먹기 쉽다는 바로 그 점이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사고는 창조라는 최고의 형식에 있어서조차도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능력(가능성)을 믿을 것, 필자가 이 책에서 여러분에게
권장하고 싶은 요점은 바로 이것 한 가지이다.

  2. 당신도 천재가 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들은 천재와 '자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대담하게
치워 없애자. 창조적 능력을 천재들의 특권이라는 위치에서 끌어내려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로의 비너스'(고대 희랍의 조각 중의 걸작)와 같은 천재의 '창조물'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감탄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들은 거기에서
신의 특질과의 유사성, 즉 최고의 완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무랄 데 없는, 신처럼 완전한 예술품에 대하여 우리가 감탄하는 것은
이해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대상의 '완전함'에
홀딱 반한 나머지 자기 자신의 열등성을 지나치게 의식해서는 안된다. 지나친
열등감-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보다 높은 곳을 향하여 발전하려고 하는 '창조적 의식'을
가로막고 불완전하고 수준이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재들은 과연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요컨대 뛰어나 있기
때문에 뛰어난 것이지 결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상식적인 이치를 새삼스러이 내세우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천재들이 마치 어떤 신의 섭리에 의해서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지나친 과장과 신비적인 묘사로 천재를 추켜올림으로써 사실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디도르(1713-1784 프랑스의 18세기 문학, 철학계의 중심적 존재)와 같은 사람조차도
'재능의 고양'을 강조한 나머지, 천재들의 능력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빅토르 위고(1802-1885, 프랑스 낭만파의 거두, "레미제라블"은 유명하다)나
대뒤마(1803-1887,프랑스의 작가, 극작가 "삼총사"는 유명하다)의 경우도
'시대의 대예언자'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불행한 일이었다.
  '아르키메데스(287-212, 희랍의 철학자)는 에디슨(1847-1931, 미국의 발명가)과 같

발명을 할 수는 없었다'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재능'을 비교하는 말은 아니다.
아르키메데스와 에디슨의 차이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데이터에 의해서 좌우되어지는
것이라고 누구나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어떠한 천재도 전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뛰어난 시인들은 끊임없이 영감을 받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들이라
할지라도 태어나면서부터 대시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시인들도 결국 하나의
인간이다. 희망이나 자신의 기억이란 것을 의지해서 암중모색을 하면서
길을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불모의 시기도 반드시 경험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태는 천재들도 한때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들이(천재와 비교해서) '뒤떨어진다'고 하는 말은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

것일까?
  우리들 앞에도 길은 공평하게 열려 있다.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이 길은
자기의 의지로써 선택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바로 범인과 천재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어떤가? 적어도 우리들은 노력하는 길은 선택함으로써 결국 천재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부질없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태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게 되느냐?
지금까지 우리들이 연구해 온 방법을 생각해 보면 된다. 요는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평범한 이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3. 창조의 근원은 무엇인가?

  창조란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마치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의 흐름과도 같은
것이다. 풍부한 흐름을 원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맞닿는 곳에는 관념이 기다리고
있다. 사색적인 창조도, 예술적인 창조도 모두 근원은 하나-관념 이외의 것이
아니다.
  관념이 창조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관념은 처음에는
마음의 밭에 떨어진 한 톨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씨앗은 싹이 틀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일단 싹이 트면 마음껏
양분을 흡수해서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발육을 하나의 목적으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이미 확실한 것이다. 드디어 열매가 맺어지는 것, 그것을 우리들은 '창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기 여러 가지 관념의 씨를 품고 있다. 관념이 성장하는 모습이나
속도는 그 사람의 사람됨, 생각하는 능력이라든가 노력에 따라서 당연히 달리질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의 마음에나 헤아릴 수 없는 가지가지의 관념이
잠자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관념이 부풀어서 드디어 창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이른바 자연의
도리인 것이다. '창조'가 천재의 특권이 아니라고 하는 까닭도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비슷한 '관념'에서 전혀 비슷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열매가 열리게 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우리들은 그 비밀의 열쇠를 관념을 키워 올리려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 태도 속에서
보려고 하는 것이다.
  떼느에게는 고양이와 연애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고양이에게 매혹된 나머지
고양이에게 매혹된 수없이 많은 기억을 소중하게 키워 갔던 것이다. 그의 만년에
"고양이의 소네트"라는 작품이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늙은 철학자와 고양이, 좀 이상스러운 결합이기는 하지만 떼느에게 있어서는
고양이에 대한 애착은 이른바 '늙은이의 심심파적'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
다.
  그러나 떼느를 흉내내는 일이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없는 것이다.
고양이를 사랑하고 고양이를 철저히 안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떼느의 일화는 기묘한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길가의 길 잃은 고양이를 지나쳐 버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집에 데리고 와서
기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이 사람의 고양이에 대한 관념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떤
'성장'을 거쳐 왔는가는 우리들에게도 쉽게 관찰될 것이다.

  4. '단순성' 놀라운 결실

  창조적인 견해라고 하면 뭔가 복잡하고도 까다로운 것을 연상하기 쉬우나 그
밑바닥을 파헤쳐 보면 별다른 것이 있는 것 아니다. 매우 단순하고도 순수한 것이다.
요는 '단순성'에 있는 것이 다. 오직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순수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프랑스에서 가장 국민들에게 어필한 작가라고
한다면 아나톨 프랑스와 모리스 바레스(1862-1923, 프랑스의 작가)일 것이다.
  "이 보잘것 없는 인간세계!"
  단지 이런 정도로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관념'이 아나톨 프랑스에게 있어서는
사물의 시작이고 또 전부였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별이 빛나는 창공의 크기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 세상의 인간의 영위의 허무함이 그의 생애를 통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관조되어졌다. 바레스의 경우에는 실상 매우 대조적이었다.
바레스에게 있어서는 청춘 시절의 어떤 저녁 무렵이 결정적인 의미를 주었다.
  해가 넘어가는 저녁 무렵, 교회묘지에 서서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그는 '조상들이 부르는 소리'를 자기의 영혼의 귀로 들었다. '조국에의
연대감'이라는 관념이 이 때 바레스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았던 것을 모리스 바레스는 한없이 큰
힘의 원천으로 본 것이다. 두 가지 극단이라는 표현이 아주 꼭 맞는 것 같다.
이 두 사람에게 공통된 점, 그것은 '단순성'뿐이다.
  이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비전이 같은 시대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5. 때에 맞추어 생각하라

  그러나 저러나 인간의 일생을 결정짓는 '관념'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과연 '마음대로' 손에 넣을 수가 있을까?
  우리들의 영혼은 넓은 바다와 같이 망막해서 붙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영혼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 이른바 감수성의 탄력성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지만,
정말로 신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누구의 마음에나 기회는 무한히 많이 있는 것이다. 잊어버린 줄만
알고 있었던 어떤 사실이 어떤 계기에 문득 머리에 떠오른 경험이 당신에게는 없는가?
  당신은 그럴 때 일종의 '영감'의 작용을 느끼지 않았는가? 음악감상을 하는 도중 또

커피를 마시고 있던 도중 잊어버렸던(잊은 줄로만 알고 있던) 이미지가 선명하게
계속해서 자꾸자꾸 되살아나올 때에 우리들은 자기의 마음속에 한없는 풍부함,
깊이, 신비감을 엿볼 수가 있다.
  이런 '때'를 우리들은 중요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1 뛰어난 이미지를 저장하도록 항시 유의하고
  #2 어쩌다가 이 이미지의 파일이 떠오른 '관념'은 결코 소홀히 하지 말고 비평이라

조명을 비추어 재정리된 상태로 마음속에 다시 저장해 두어야만 한다.
  '나중에 생각해 보고 알게 되었다'
라고 우리들이 말할 때에 그것은 일단 하나의 이미지로서 잡힌 대상이 나중에 또
다른 각도에서 재평가되고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었을 때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때에 맞추어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감수성을
언제까지라도 탄력성 있게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거기에서 신선한 이미지를 끄집어
낼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6. 관념을 발전시키려면

  여기서 말하는 '관념'이란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단순하지만
기본적인 '사물을 보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누구나 현실과 자기 사이에 관계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보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과 현실과의 위치 관련을 아는데 필요한 척도가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단지 사람에 따라서는
  #1 이 척도를 사용하는 방법이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
  #2 척도 그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반성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반성을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는가?
  라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정도의 차이가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자기의 관념을 찾아낸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높여 주는 사물을 보는 방법을 찾아내서 그것을 몸에 익히는 것'과 같은 태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에게 
  "당신의 철학이라든가 세계관을 말해 주시오"라고 했을 때,
  "그런 건 별로 없습니다" 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 사람에게도 그런 대로의 '의견'이 있을 것이
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에게나 그 사람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의 '관념'이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반성이 부족하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수동적인 태도와는 아무래도 인연을 끊는 것이 좋겠다.
  가끔 "저 사람은 쓸데없는 관념에 구애받기 때문에 틀렸다"
라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인 이상 자연히 자기의 관념이 쓸데없는
것인지 어떤지를 반성하고 검토할 기회를 언제나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이 경우 당신

의지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바로 '창조적인 사고 방법'인 것이다.
  우선 지금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관념'이 어떤 것인가를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 관념에 발전성, 지속성이 있는가를 검토해 보는 일이다.

  7. 두 가지 사고 방법

  '자신의 사물을 보는 방법이 옳은 것일까'라는 문제는 한 걸음 그것을 전진시켜 보
면,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기본적 명제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영혼의
전문가'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문제를 다루어 왔을까?
  그들이 어떻게 해서 자기의 관념을 검토했는가, 또는 새로운 관념에 이르렀는가,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은 결코 쓸데없는 일만은 아닐 것 같다.
  #1 형식논리에 의한 검토 방법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동안에 '사색'의 방법, 원칙을 발견하고, 단순한 것에

차츰 복잡한 부분으로 추론을 쌓아 가는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384-322, 플라톤의 제자이며 그리스의 철학자) 스콜라학파(중세기
유럽을 주도한 철학의 유파), 데카르트 등 주지주의자들의 방법이
이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과학자들도 같은 방법으로 진리를
해명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논리적'이라 불리는 방법이 이에 해당된
다.
  #2 직관에 의한 관념의 발견법
  종교적 또는 시적인 감흥, 정신의 고양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려는
방법이다. 서정시인이 일단 인스피레이션을 얻으면서 동시에 백과사전 속에서 꼭 맞는
글귀를 찾아내려고 할까? 명상에 잠겨 있는 고승이 신 또는 부처와 한창
대화하면서 세속적인 데이터를 참고할까? 뛰어난 신비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데이터는
이른바 2차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쓴 글을 보면, 그 속에 일종의 정연한 논리의 흐름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까닭은 명상 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계시'가 형식논리의
분석체계와 비슷한 '정신적 과정'의 궤도를 밟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스웨덴보르그(스웨덴의 신학자, 신비철학자)는 오로지 명상 가운데서 보았던
이미지에 의해서 저 신비로운 대우주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베르그송과 같은
직관을 존중하는 철학자도 마음의 '신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데이터니 정보니 하는 것의 가치를 일체 부인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들의 '초월적 논리'라고도 할 수 있는 직관의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로서 데이터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길은 많지만 겨냥하는 목표는 단 한 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또 뛰어난
사상가들은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한 전제로서 자기를 위한
사고방법이라는 무기를 활용했던 것이다.
  니체나 바레스의 문장은 '그들의 사상을 낳는 방법 그 자체'를 끊임없이
예증해 보였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방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들 자신의 훈계의 말이
었다.
  "자기 자신이 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라"

  8. 자기 자신이 되라

  '독창적인 것을 낳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즉 개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누구 나가 아는 사실이다. 자기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지 못하고
어떻게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낳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겨우 방해가 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보이기 위한 것'과 '자신의 상실'이다.
  '보이기 위한 것'이나 '외관'은 자신이 아니다. 외간이라는 것은,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마치 그런 듯이 연기를 하는 것으로, 그것을 하는 인간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의식하지 않고는 참지 못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의 연극을 하는 것으로 사고를 소모해 버리면, 사고할 활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뭔가를
생산해 낼 가능성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어려운 이론을 잘 이해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사람, 책엔가 어디엔가 씌어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 놓으며 문학이나 미술의 비평을 멋지게 하는 사람, 주네브에서
국제회의가 있었을 때 우연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만으로 외교통인
것처럼 위장하는 사람, 만난 일도 없었으면서 알고 있는 척하는 사람, 한번밖에 만난
일이 없는 유명 인사의 이야기를 '내가 잘 알고 있는 누구누구' 하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 외국인의 강연을 듣고 그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박수를 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연기자들이다. 그 중에는 무대 배우 뺨칠 정도로 연기가 능숙

사람들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한 조각의 사상도 갖지 않은 그저 하나의 녹음기에
불과한 것이다.
  쓰고 싶은 충동도 없는데 쓰지 않으면 안되는 직업작가에게는 이런 위험이 많다.
  신문, 잡지에 넘쳐 있는 내용이 없는 유창하기만한 문장, 무책임한 흥밋거리 기사,
억지로 자아내게 하는 유머, 이와 같은 방식은 현대인의 정신을 잠들게 하는 자장가가
되고 있다. 다시 작가들에 대해서 말한다면 문학적인 유행도 그들의 개성을
망쳐 버리게 된다.
  빅토르 위고의 리얼리즘을 본뜨려고 프랑스의 낭만파 작가들이 얼마나 열중했는지
모른다. 그 결과 얼마나 많은 프랑스식 위트가 이 때문에 파묻혀 버렸는지 모른다.
1890년에서 1920년에 걸쳐서는 이것 도한 많은 작가나 아나톨 프랑스의 문장의
리듬을 흉내내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표현력이나 감각은 물론 결점에 있어서조차도
그들에게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활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데는 단순히 남의 흉내내는 것이 얼마나 방해가
되는가 하는 점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즉 겉으로만의 모방은 참된 창조에
있어서는 커다란 장해이고 드디어는 본질까지도 손상시키는 것이다.
  자기 이외의 다른 것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참된 자기와는 멀어지고 본래의
것을 지켰다면 뭔가가 되었을지 모를 기회는 점점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9. 자신 상실은 의지력으로 고칠 수 있다.

  '자신의 상실'은 우리들이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할 때 방해가 되는 또 하나의
약점이기도 하다. '보이기 위한 것' 보다도 더욱 주의를 기울여서 반성해 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개성을 자각하는 데
충분하리만큼 강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일 때에는 이와 같은 취약성은
약이라든가 훈련을 통해서 고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노력한다는 것은 설령 어떤
일이든 개성의 원형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적당한 경쟁이나 욕심도
개인의 가능성을 키워 주는 데 도움이 된다.
  '자기의 상실'은 결국 제멋대로의 이해, 즉 자기가 이러이러하게 되고 싶다고 생각

것보다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 속에 파묻혀 버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의 한 가지 형태일 것이다.
  또, 현재의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의 성향이나 재능, 교육, 또는 환경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들이
당연히 해야 될 노력을 안했을 때에, 양심의 가책이 '자신의 상실'이 되어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성실한 사람, 특히 아름다운 것을 언젠가는 생산해 내려는 포부를 안고 있는 사람은
한번 실패하면, 또 다음에도 또 실패하지나 않을까 하고 매우 신경을 쓰게 된다.
  이와 같이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환영의 희생물이 되기
쉬우며 예술가가 세속인들에게서 균형이 안 잡혀 있다고 말을 듣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의 작품에 상당히 큰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을 쓰고
있던 동안은 지금의 만족 이상으로 큰 고민에 차 있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예술가는
언제나 '불가능한 완전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일을 하는 중이라든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들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매력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다. 이들 이미지를 정착시키려고 하면 그 순간 그것들은 사라져 버리고 말며
단편만이 남게 된다. 이 남아 있는 단편만이라도 걸작을 만드는 데 충분하지만,
그 전에 나타났던 신비적인 환영에 비하면 마치 찌꺼기처럼 보일 뿐이다.
  '이것에는 좀더 좋은 표현 방법이 있다'라든가, '누군가가 더 훌륭하게 이것을
표현해 낼 것이 틀림없다'라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상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는 존경하는 경쟁 상대를 가정해 놓고, 이 사람 같으면 같은 작품을 놀랄
만큼 술술 훨씬 뛰어난 문체로 써낼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자기의
주제에 대해서도 의심을 가지며, 그것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도 뒤떨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도덕적 불안으로 떠는 사람도 있다. 즉, 과장해서 그려낸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현실적인 영향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지가지의 관념은 마침내 지성을 흐리게 하며 예술적인 작업에 필요한
의지력을 약화시키는 것들이다. 습관이 될 만큼 오랫동안 이들 환영에게서 위협을
받게 되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기도 하고, 아니면 아주 낮은 곳에서 정착해 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프로만땅(1820-1876, 프랑스의 화가,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도미니끄라는 인물은
아주 체념해 버리고 자기 자신을 서푼짜리 시인이라고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시골
신사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절망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발작도 여덟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도미니끄와 똑같은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한낱 인쇄업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실제로 발작은 당시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다-만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두 해 사이에
인스피레이션에 사로잡히게 되어, 그것이 그를 예술가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인쇄업자로서 기울였던 그의 노력이 가져다 준 의지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어떤 사업에 참여하는 일, 현실적인 아이디어를 위한 투쟁을 수행하는 일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반드시 플러스가 될 것이다. 우리들 속에 있는 강력한 이상이나
관념은 '자신의 상실'을 고쳐 주고, 우리들을 강력하게 할뿐만 아니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낳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ff
     제20장
     잠자는 머리를 흔들어 깨워라

  1. 머리를 썩힐 것인가?

  우리는 일생 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던 머리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죽는다. 어떤
대뇌생리학자는 일생 동안 머리를 잘 써도 겨우 3분의 1정도밖에 못쓰고, 머리
쓰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 같으면 3%도 못쓰고 죽게 된다고 주장했다.
  왜 우리는 신이 만들어 주신 이 귀중한 기관을 안 쓰고 썩히려는가?
  뇌를 쓰고 안 쓰고의 문제는 단순히 공부를 잘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보람을 가지고 사느냐, 안 사느냐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머리 쓰는 문제를 들먹이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사람의 머리는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가?
  사람의 뇌는 여러 가지 부속으로 되어 있다. 즉 대뇌반구, 시상, 사상하부, 뇌량, 
간뇌,
뇌교, 소뇌, 연수 등 여러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 두 개의 대뇌반구를 얇게 싸고
있는 대뇌피질이라는 부분이 바로 인간의 정신을 맡고 있는 중요 부분이다. 중추신경

약 70%를 차지하고 있는 뇌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쭈글쭈글한 표면을 쫙 펼치면 타블로이드 신문 만한 크기 정도가 된다. 이 속에 

140개의 신경세포가 들어 있다.
  이런 뇌의 무게야 그래 봐야 남자의 뇌는 약 1,330 그램 정도이고, 여자의 것이
1,240 그램 정도인데, 뇌의 무게란 머리의 좋고 나쁘고 차이라기보다는 체중에
비례에서 그런 차이가 생길 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도 이 140억 개의 뇌세포를 가지고 있으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주 적은 수만 파괴가 되거나 소멸되지만, 대부분 일생 동안 그대로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같은 일을 해도 성과가 나는 사람이 있고 안 나는 사람도
있듯이, 실력이 차이가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그 원인이 있을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뇌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140억 개의 뇌세포
중에서 신경 작용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신경원이라고 하는 신경세포이다.
이것을 대뇌생리학에서는 뉴론이라고 한다.
  이 뇌신경 하나하나가 몇백 개에서 8,000개 가량의 가지를 뻗고 있다. 이 가지들이
서로 엉겨서 통신을 하는 것이다. 왜 굳이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들이 일생 동안
살아가면서 머리를 써야 할 일도 많고, 잘 쓰기만 하면 어려운 문제도 잘 해결해 갈 

있는데, 자신이 쓸 수 있음에도 잘 안 쓰거나 잘못 써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수가
많게 때문이다.
  결국 생각의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소중한 두뇌

잘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는 엄청난 신경세포간의 연결이 어떤 식으로 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머리가 좋고 나쁨이 결정되며, 개개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방식이
결정된다.
  그뿐이 아니라, 감정이나 의지까지도 이 뇌의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같

일을 해도 실력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은 이들 신경세포의 얽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회로의 조립 여하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이 회로가 어릴 때의 교육이나 경험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지만 그 이후에도
실제적 경험이나 좋은 교육에 의해서 새로이 바꾸어 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새로운 것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해야
과거의 잘못된 학습을 바꾸어 갈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여기에 몇 가지 법칙이 있고 또 이 법칙에 따라서 반복 훈련을 하면 새로운 지식을
빨리 정확하게 학습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과거에 학습한 잘못된 학습도 수정할 수도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집중력을 높이고 오른쪽, 왼쪽 뇌를 골고루 풀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사람의 뇌는 오른쪽, 왼쪽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물론 그 하는 일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지금까지 주로 왼쪽 뇌를 훈련하고 또 써왔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뇌가 두 쪽으로 갈라져 있는데, 그것들이 각각 어떤 일을 하는
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스페리 박사가 이 오른쪽
뇌와 왼쪽 뇌가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것을 발표함으로써
1981년에 노벨의학생리학상을 받게 되었다.
  이분은 세계적인 대뇌생리학자이다. 그래서 이후부터 이 방면의 연구가 활발해져서
지금은 이 이론에 기초해서 두뇌 개발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고, 또
상당히 효과를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부터 오른쪽 뇌와 왼쪽 뇌를 어떻게 하면 잘 개발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확신을 가져야 될 점은 머리는 얼릴 때에 그
기초가 만들어지기는 해도, 좋은 교육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는
점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른쪽 뇌와 왼쪽 뇌를 골고루 발전시켜야 더욱 우리의
삶이 윤택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2. 오른쪽, 왼쪽 뇌는 각각 어떤 다른 일을 하는가?

  사람의 뇌가 오른쪽, 왼쪽으로 갈라져 있다는 정도는 국민학교 어린아이들조차도
그림을 통해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발달되어 왔음에도 이에 관한 연구는 그 속도가
좀 느린 편이다. 그래서 80년대까지만 해도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하게 몰랐던 것이다.
  인간의 대뇌가 좌우로 나누어져 있고, 이 우뇌, 좌뇌가 서도 정보를 교환하는 것은
대뇌의 아래쪽에 있는 뇌량이라고 하는 부분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의 오른쪽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 오른쪽 귀로 들어오는 정보, 오른쪽
팔다리로 들어오는 정보는 모두 왼쪽 뇌로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왼쪽으로 들어오는 정보는 모두 오른쪽 뇌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
교체해서 들어오는 셈이다.
 이와 같은 사실 정도는 스페리 박사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으나 오른쪽, 왼쪽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을 정확히는 몰랐던 것이다.
  스페리 박사가 실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간질병 환자를 치료하다가 좌우뇌가
하는 일이 다르다는 점이다. 간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좌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을
잘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았더니, 뇌량이 잘린 환자들은 좌우의 뇌가 각각
독립적으로 작용하더라는 것이다.
  좌반신은 우뇌의 영향을 받고, 우반신은 좌뇌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스페리
박사는 이 점에서 착안해 좌우뇌의 기능의 차이에 대해서 더욱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발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좌뇌는 언어적, 논리적, 분석사고, 계산 등
  우뇌는 패턴(전체적 형태) 인식 능력, 이미지 능력(머리에 뭔가 영상 같은 것을
떠올리는 능력), 회화(그림), 인식능력, 직관력, 종합력, 운동, 행동 등
  이 오른쪽, 왼쪽에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몇 년 전 내 연구실에 책한 권이
배달되어 왔다. 저자를 보니까 알만한 사람 같은데 얼른 생각이 안 나서 책 뒤편 안쪽
표지를 들쳐 보고는 그제야 누군 지를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대학 동기동창으로 미국 하와이의 구아기니의학연구소의 면역학 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쓴 책은 "한국인의 두뇌 개발"이란 것이었다.
  박 만상 박사가 이 책에서 강조한 것은 오늘날과 같은 과학기술사회에서 살아
남으려면 두뇌의 능력을 길러야 된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란 결국 두뇌의
산물인데 우수한 두뇌, 창조적 두뇌를 개발하지 않으면 비단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예술의 발전도 기약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본 한국인의 두뇌의 특성에 대해서 소개해 보겠다. 그가 아무래도 한국인은
사물의 이치를 차례차례 차근차근 곰곰이 따지는 사고력, 다른 말로 하자면, 논리적
사고, 합리적 사고가 부족한 것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유일한 자원이 사람인데, 국민들을 우수한 두뇌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선진국으로 만드는 첩경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인의 뇌를 우뇌형이라고 보았다.
인정이 넘치는 우리 문화는 다분히 우뇌형이다. 이런 우뇌형만 가지고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좌뇌 문화를 일으키고 좌뇌 교육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필자와 생각이 다르기는 하나 전체적 입장에는 필자도 크게
공감한다.
  우리 나라의 이 방면의 전문가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아주 대학교 심리학과의
고영희 박사였다. 그는 미국의 피츠버그대학에서 뇌의 기능분화에 관련된 연구를 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쓴 분인데, 그분이 내게 보여준 책에 "인간의 뇌와 교육" "오른뇌
방식으로 산다" "당신의 양쪽 뇌를 사용하라"라는 뇌에 관한 저술을 내놓았는데, 그
책 속에는 한결같이 양쪽 뇌를 사용해야 우리는 제대로 자기 실현을 할 수 있고,
공부도 제대로 하고, 나아가 직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고박사의 저서에는 우뇌와 좌뇌가 하는 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좌뇌
  확신적
  분석적
  직선적
  명쾌함
  연속적
  언어적
  구체적
  합리적
  활동적
  목적지향적

  우뇌
  직관적
  일시적-종합적
  정서적-시각적
  비언어적-확산적
  시각적-상징적
  예술적-육체적

  3. 우뇌형과 좌뇌형을 구분해 내는 방법

  자, 그러면 자기 자신은 과연 우뇌형인지, 좌뇌형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할 때에도 그 사람이 우뇌형인지 좌뇌형인지 알면 그와 거래를
하거나 교재를 할 때 도움이 될 줄 안다.
  여기에 몇 가지 장면의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대학교수실에 어떤 졸업생이 오후 1시에 찾아오기로 되어 있다고 하자.
누구누구하고 이름을 대기는 했어도 그 졸업생의 이름만으로 그 사람이 어느 해
졸업생인지, 어떻게 생겼고, 특징이 무엇이었는지가 머리에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 졸업생의 졸업 년도도 모르고 해서 재학시의 학생기록부를 찾으려면 시간

한참 걸리게 생겼는데, 동창회명부로 몇 년도부터 들추어야 될지가 감감했다. 
  왜냐하면 그 졸업생이 전화를 했을 때에는 우선 전화상으로는 아는 척을 했고, 잘
있었느냐고 물어본터라 새삼 물어 보기도 교수로서 자존심이 깎일 것 같고 해서 우선
음성의 색깔을 가지고 그 졸업생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뚱뚱한 편일까, 마른 편일까, 날씬한 편일까? 키가 클까, 작을까, 얼굴이 둥글까
갸름할까, 나이는 얼마쯤 되었을까? 등을 과거의 기억에서 더듬어 보기로 했다. 물론
음성만으로는 단서를 잡기 어렵겠지만 시각적, 기타 감각적인 묘사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가만 있어 보자...' 하고 여러 가지 단서를 조립해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방법을 생각해 볼 때, 우뇌 우세자, 좌뇌 우세자는 각각 어떻게 다른지를 보자.
  그 때 전화를 건 졸업생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 전화를 건 시간이 언제였나, 크게
말했나, 작게 말했나, 빨리 말했나 느리게 말했나, 무엇 때문에 방문한다고 했는가
등을 돌이켜 생각해 본다. 이때 두 사람은 각각 다르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정리표를 만들어 보자

  좌뇌
  1. 정보의 세부적 사항에 관심이 있다
  (예:음성의 고저, 말하기의 속도 등과 같은 세부적 단서를 잘 사용한다.)
  2. 누구인지를 알아맞히려고 한다.
  3.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
  4. 어디서
  5. 언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6. 왜
  7. 어떻게 

  우뇌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면에 관심이 있다
  (예:말할 때 다급한 내용이 있는 것 같았다. 신상에 큰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긴급한 상황은 같다).

  감정이 격양되어 있었다. 선생님이 쓰신 책에 뭐가 있느냐가 물었다. 그래서
필경 개인적 일에 대한 상담을 하기 위한 것일 게다.

  왜 하필 전화를 사용했고, 그것도 공중 전화를 이용했을까?

  왜 하필이면 오전 9시 5분에 전화를 했을까? 그는 몹시 긴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전화로 일방적으로 말하고 급히 끊으려 했다.

  이렇게 적어 보면, 좌뇌 우세자는 보통 우리가 말하면 6하 원칙을 사용하고 있다.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왜, 어떻게를 따진다. 반면에 우뇌 우세자는 말하는
분위기, 음성의 톤, 속도, 느낌 등을 주로 단서로 삼고, 그 사람의 전화걸 때의 태도

머리에 떠올려 본다.
  또 우뇌우세와 좌뇌우세가 즉, 우뇌형과 좌뇌형을 구별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몇 가

적어 보자
  1. 윗사람에게 인사할 때, 그 윗사람이
  좌뇌:인사 받기 전에는 마주쳐도 먼저 인사하지 안는다.
  우뇌:인사할 때 반드시 한마디 말을 덧붙여서 인사를 되돌려 보낸다.
  2. 전화를 받을 때
  좌뇌:어떤 상대방에 대해서도 새삼스러이 "저는 누굽니다. 누구시지요?" 식으로
격식에 맞게 대응한다.
  우뇌:보이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도 문득 머리를 숙이고 말한다.
  3. 전화로 길 안내
  좌뇌:"몇 번째 신호에서 오른쪽으로..." 지도 읽듯이 설명한다.
  우뇌:"모퉁이에 책가게가 있으니까..." 식으로 목표물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4. 약속할 때
  좌뇌:약속한 일이면 그 전날이나 바로 전에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우뇌:전화 등에서 약속 시간을 "xx 시경"이라고 하는 버릇이 있다.
  5. 정리 정돈을 하는 방법
  좌뇌:새 일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 없는 것은 정리해 버린다.
  우뇌:책상 위가 너절해도 일은 제대로 한다.
  6. 메모하는 방법
  좌뇌:갈겨 써도 언제든지 쓸 수 있게 깨끗이 정리해서 메모한다.
  우뇌:기호라든가 난필이 잡다하고 다른 사람이 보아서는 알 수 없는 메모를 한다.
  7. 예정 세우기
  좌뇌:2주일 걸려서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예정표를 미리 만든다.
  우뇌:대충 정하고 일을 시작하면서 세부 계획을 세운다.
  8. 걷는 방법
  좌뇌:빠른 걸음으로 걷는다든지 해서 신속하게 움직인다.
  우뇌:주위의 풍경이나 행인들을 살피면서 좀 느리게 걷는다.
  9. 화젯거리
  좌뇌:TV, 영화 등의 스토리를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우뇌:TV, 영화 등의 어떤 장면이나 극적인 장면을 자주 화제에 올린다.
  10. 점심 식사 때
  좌뇌:혼자서 식사하러 가는 일이 많다.
  우뇌:언제든지 친구를 유인해서 같이 먹으러 간다.
  11. 식사 주문 시
  좌뇌:'육식을 할 대에는 붉은 포도주' 식으로 메뉴가 정해져 있다.
  우뇌:때로는 처음 먹어 보는 것도 일부러 시켜 본다.
  12. 쇼핑할 때
  좌뇌:몇 집이고 둘러서 한 바퀴 돌아보고 사는 일이 많다.
  우뇌:충동 구매를 하고는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많다.
  13. 노래방에서
  좌뇌:뽕짝이나 팝송 등을 부를 때 소절, 박자, 바이브레이션 등 기교를 부린다.
  우뇌:한 군데 서서 자세히 들여다본다.
  14. 전시장 등에서
  좌뇌:팜플렛 등의 설명서를 열심히 읽어본다.
  우뇌:한 군데 서서 자세히 들여다본다.
  15. 술 마시는 방법
  좌뇌:술이 들어가자마자 직장, 일 이야기를 한다.
  우뇌:분위기가 재미없어도 죠크를 연발하고 잘 웃긴다.
  예를 들면 좌뇌 8개, 우뇌 7개이면 균형형이고, 한쪽이 9개, 다른 한쪽이 6개로서,
3점 이상의 차이가 나면 우뇌형이나 좌뇌형으로 보면 된다.
  물론 그 차이가 심하면 심할수록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자, 본인도 한번 해보세요
@ff
     제21장
     우뇌를 잊지 말라

  1. 양쪽 뇌를 골고루

  가) 잘못된 좌뇌 교육
  195년 미국의 프랜티스 홀이라는 출판사에서 발행된 "인간의 뇌"라는 책의
내용을 보련 인간의 뇌의 정보처리과정, 뇌반구에 관한 이야기, 인간 뇌에 대한 최근

연구에 대한 교육적 의의, 인간의 뇌와 교육의 재음미, 좌우 뇌반구의 기능적 특성의
교육적 적용 등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전뇌 교육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오른쪽, 왼쪽 뇌를 균형 있게 개발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무슨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아이 골치 아파" 하고는 손을 앞이마 쪽으로
가져가는 버릇이 있지 않은가? 이상하게도 오른쪽 이마나 왼쪽 머리쪽, 혹은
뒷통수쪽으로는 손을 안 대고 앞이마 쪽으로 손을 대지 않는가?
  이상하게도 바로 이 부분이 사람이 사고하는 데 필요한 신경중추인 것이다. 뭘
생각하고, 계획하고, 깨어 있고, 자발적으로 뭘하려고 하면 이 부분이 주로 활동하게
되는데, 특히 다른 동물들과 크게 구별되는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의 모든 삶의 영위를 팔다리가 하는 줄 알고, 입이 하는 줄 알지만, 그 팔다리

입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뇌가 하는 것이다. 팔다리로는 모든 창조적 작업을 하며,
눈으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보의 대부분을 수집해서 뇌로 보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모두 뇌가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교육이란 것을 되돌이켜 보면, 해방 이후 줄곧(따지고 보면 일제 때부
터도
그랬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지식을 획득하려니까 주입식으로 교육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지식에 대한 정확한 평가 따위는 접어 두고 줄줄 외워서 머리 속에 잔뜩 집어넣

일에 열중해 왔다. 예를 들면, 과학과목조차도 실험이나 관찰은 안하고, 교과서의
지식이나 참고서의 지식을 줄줄 외워서 시험치는 것으로 교육을 끝내 버렸다. 그러나
과학에서 제일 중요한 창의성이란 것이 길러질 수가 없다.
  심지에 국어과에서도 시를 감상하는 대목에 가서 '누구의 무슨 시는 일제하에
치열한 독립정신과 일본의 압제와의 갈등을 승화시킨 것이어서, 어떤 시구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다' 라는 것을 통째로 외우게 했다.
  그러니 그 시를 수십 번 읽어도 감동이란 것은 없고 오직 해설밖에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사고 교육인가? 모두가 엉터리인 셈이다. 이 모두가 좌뇌 교육에 치우친
탓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획일주의, 주입식 일제 수업, 기억위주의 교육, 두들

넣기, 줄줄 외우기, 객관식 시험과 눈감고 찍기 교육, 이 모두가 좌뇌 교육이다.

  나) 한국인은 원래 우뇌형이다.
  원해 한국인은 우뇌형 인간이었다. 우리 나라의 가옥 등 건축물들을 보라. 특히 우

한옥의 서까래나 기둥을 보면 목재를 직선으로 다듬지를 않고 구부러진 것 그대로를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집이 전체적으로 짜임새와 볼품이 안정되고 조화되어 있다. 치수도 자로
정확하게 재서 나무를 다듬지를 않고 눈대중으로 다듬어도 꼭 맞았으니 그 직관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일은 모두 우뇌가 하는 일에 속한다.
  그뿐인가? 우리 음악에는 소리가 다섯 가지밖에 없다. 말하자면 5음계이다. 그러나
실제 연주에서는 무수한 소리를 낸다. 예컨대, 한 소리와 그 이웃하는 소리 사이의 모

연속적인 소리를 다 사용한다.
  현악의 경우 농현이란 것이 있어서 서양 음악의 장식음 같은 것이지만, 실은
그 정도를 넘어선 자유자재한 소리를 낸다. 그것이 바로 우뇌형 음악인 것이다.
  우리가 집에서 쓰던 모든 생활공예품들도 실은 우뇌형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해방되고, 6.25가 터지고, 근대식 경제 개발을 하고, 생필품의 대량
생산 체계에 들어가면서 도로의 건설해서, 공산품의 생산 등에서 우리는 치밀한
설계와 계산에 기초한 좌뇌의 힘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고도 성장기에 들어서면서 좌뇌의 힘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육도 엘리트주의 교육, 주입식 교육, 성적 중심적 교육, 기억 우선주의 교육이
등장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이것을 통틀어서 좌뇌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옛날 풍속화나 산수화를 보라. 이들 그림은 정확한 묘사보다는
패턴 인식에 다 깊게 관련되어 있다. 매우 직관적이고 명상적이고 선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다.
  이런 요소들은 우뇌적인 작업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뇌는 직관, 번득임의 뇌이다. 또 인간의 행동과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우뇌

훈련함으로써 뇌와 몸의 지령 관계가 더 긴밀해져서, 신체 활동에서도 원활하게
행동하기 쉽게 된다.
  발명이나 발견, 예술적 분야에서 기업 활동에 이르기까지의 창조적인 것이 우뇌의
산물인 것도 최근의 대뇌생리학의 연구로 알게 되었다.
  우리 나라가 그 동안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생산일변도의 노선을 달려왔는데,
이제는 그것으로는 한계에 이를 것이다. 남의 기술에 의존해서 대량생산을 해왔는데,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창조를 해야 한다.
  그래서 이 우뇌의 기능을 다시 고쳐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즉 우뇌의 창조적
기능을 강화하고, 더욱 풍부하게 해서, 더욱 자아실현에 가까이 갈 수 있어야 되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우뇌 기능의 강화를 강조한다는 것이 곧
뇌기능을 부정하거나 가볍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뇌에서 번득하면서
떠올랐던 멋진 아이디어도 그것이 현실화되려면, 좌뇌로 이론적으로 통합하고 정교하

조림해야만 발견에 이어지게 된다.
  중요한 점은 우뇌를 활성화시킴으로써 편중에 의해서 경직되고 비대화된 좌뇌를
재충전하는 일이다. 우뇌와 좌뇌는 본래 뇌량에 의해서 이어져 있고, 양쪽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한쪽만 비대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며,
기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양쪽 뇌가 함께 균등하게 활성화되고, 개발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놓치기 쉬운 우뇌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좌뇌를 재충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프트화 사회에로의 전환기를 힘차게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니까 전뇌 교육을 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2. 우뇌로 창조력을 높이자

  제23장에서 알파파 훈련에 관해서 설명하겠지만 특히 우뇌의 기능을 활성화해서
창의성이나 창조력을 높이기 위해서 우뇌가 비교적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가) 음악에 의한 우뇌 훈련 
  음악이란 미술과 수학의 완벽한 결합이라고 말한 음악가가 있다. 음악이야말로
완벽한 음향학의 원리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론 음악이 되지 않고 작곡가의
상상력이 이에 참여해야만 한다.
  집중력을 높이는데 유용한 우뇌 훈련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 음악이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우뇌란 감각적, 직관적, 회화적 인식력, 패턴 인식력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또한 운동도 맡아 가지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스포츠, 회화 등도 훌륭한 수단으로
생각될 수 있다.
  왜 우뇌 개발에 음악이 좋으냐는 것은 정신치료에 음악요법을 사용하는 이유를
보더라도 그렇지만, 뇌일혈 등으로 좌뇌가 손상을 입어 언어중추가 파괴된 환자에게
음악요법이 큰 효과가 있다는 증거도 있어서 전문가들은 음악의 활용을 권하고 있다.
  뇌일혈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재활이 곤란하지만 음악요법을 실시하면 조금씩 말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음악에 의해서 우뇌가 활성화된다는 것을 말하며,
그렇게 됨으로써 좌뇌로 그 영향이 미쳐져서 다시 언어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악이라 하더라도 예술 가곡에서 시작해서 팝스, 록, 펑크, 레게, 아폴로, 카르비
안,
헤비메탈, 렙, 펑크 등 다양한 장르가 있고, 거기에 국악의 민속악과 정악, 또
서양음악에서도 클래식, 째즈. 퓨전까지 아주 광범위하다. 이와 같이 많은 종류의 음

중에서 가장 알파파를 잘 내는 음악이 어떤 음악인가는 일률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어떤 대기업 레코드 메이커가 여러 연령층의 1,000명 가까운 피험자에게 여러 가지
종류의 음악을 주고 뇌파를 조사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세대별, 개인별로 알파파를 내는 음악의 종류가 달랐다고 한다. 예를 들
면,
강한 비트에 빠른 템포의 음악에 익숙해 있다는 20대 젊은이들은 록음악에서, 3, 40대

개울물의 속삭임 같은 음악에서, 5, 60대는 클래식 음악에서 알파파가 나왔다고 한다.
즉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야 들어야 우뇌가 활동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알파파와 우뇌 활동과는 깊은 관계가 있으니까.
  그래서 어떤 학자는 좌뇌를 논리적, 우뇌를 음악뇌라고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 우뇌 정보술
  사람의 좌우뇌의 능력을 비교해 본다면 우뇌는 좌뇌에 비해서 백만 배의 정보용량을
갖는다 좌뇌는 한번에 단어 한 가지만 회상하지만, 우뇌는 동시에 여러 이미지(연상)

겹쳐서 회상하거나 떠올릴 수가 있다.
  한번에 낱말 한 개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좌뇌의 능력과 한 개의 이미지 속에도
엄청난 정보를 담는 우뇌와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정보화시대니까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의 창조적인 일을 잘 할 수가 있다. 우뇌로 정보생산과 활용을 잘하면
우뇌는 산업, 생산, 발명, 문예창작, 과학기술 발전에서 창조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가
있다.

  (1) 가장 중요한 현장을 우뇌로 파악하라
  즉 사회학자는 자기가 사는 지역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데서, 심리학자는 많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식물학자는 산과 들에서, 경영자는 생산 현장에서 우뇌를 작동시
켜야
한다.
  그래야 거기에 어떤 문0제가 있는지, 무엇이 더 필요한지, 어떤 개선이 필요한지를
감지할 수가 있다. 책상에서 서류와 책만 들추어서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잘 창출되지
않는다. 현장을 이미지로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때 뇌에 저장하는 정보는 비디오식 정경이다. 이것을 우뇌가 받아들이게
된다. 언어정보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다. 이런
비디오식 정보를 많이 저장해둔 사람이 바로 시대의 흐름에 앞서갈 수가 있다.

  (2) 무엇이 알고 싶은지 그림을 그려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언론인인 존 간더는 "나는 저널리즘에서 제일 필요한 요소는
'내가 무엇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보수집에 있어서는 역시 이것이 출발점인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정말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 못하는 때가
많다. 이 경우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이 있기는 해도 그것을 말로 잘 표현 못할 뿐이다.
  이럴 때에는 문장화하는 일을 포기하고 기호나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즉 우뇌력을 활동시켜 보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처음에 우뇌에 구성되어 있던 이미지와 가까운 패턴을 찾아내서 그것을 계속
겹쳐 나가는 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뇌를
이용한 정보수집 방법이다.

  (3) 정보는 기호와 도형으로 바꿔라
  수집된 정보는 제1단계에서는 대충 큰 분류를 해서 기호와 도형으로 묶고, 그래서
흐름을 큰 안목에서 파악하고 난 후 다시 소분류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그
분류 속에 안 들어가는 잡정보도 때로는 굉장히 중요한 구실을 할 때가 있다.
  이 잡정보야말로 우뇌의 창조성을 키우는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 신문 잡지의
스크랩이나 메모를 수집해서 분류할 때에도 잡정보에 해당되는 것을 버리지 말고 따로
분류해 두었다가 이용하면 의외로 좋은 정보가 될 수가 있다.

  (4) 사람 자신이 제일 좋은 우뇌 정보원이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면 약60%가 활자 중심의 매체에서, 25%정도가
'인간'에서 정보를 얻는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재미있는 재판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자기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것이다. 사석에서 한 말은 나중에 보니 다른 친구가 그것을 책으로 냈더라 는 이야기

그런 것이다.
  활자정보, 영상정보 다음으로는 '인간'이 우뇌력을 키우는 데 있어서는 제일 중요한
정보 원천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정보는 먼저 우뇌로 들어가기가 쉽다. 활자들로 된 말은
좌뇌로 들어간다. 그러나 말은 그 사람의 분위기, 주위 상황, 말은 톤, 표정, 말의 억
양 등
다른 단서도 동시에 입수함으로 머리(우뇌)속에 비디오로서 저장이 된다.
  미국의 유명한 싱크탱크인 랜드 코퍼레이션에는 '최대의 정보원은 사람이다'라는
모토가 붙어 있다. 좋은 잡지의 기획이란, 사람들의 말 속에 들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성잡지 내의 기사도 기자가 취재한 르뽀보다는 그 사람(독자들) 자신이 한
말이 더 호소력이 있는 법이다.

  (5) 글을 못 읽어도 외국 잡지를 많이 보라
  요즘 대형 서점에 가면 웬만한 외국의 잡지가 다 들어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잡지 속의 일러스트와 사진만 보아도 그 기사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스웨덴 말을 모른다. 그런데 스웨덴에 갔을 때 간판이나 안내 표지판을 읽을 

난감했는데, 어딘지 독일어 비슷하다고 생각되어 독일어 식으로 읽었더니 뜻이
통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우뇌를 가동시킨 셈이다. 또 여가가 없어서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으면
"xx 백서", "여행 가이드 북", "연감", "그림백과사전", "도감" 등을 보아라. 그러면
아이디어가 속출할 것이다.

  다) 우뇌로 아이디어를
  말하자면 발상술을 말하려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참신하고 멋있는 아이디어를 짜낼
수 있을까?
  기획이란 기관의 현실적인 목적과 밀착해서 실현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되지만,
발상은 그 자체 실현 가능성 또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존재할 수가 있다.
  발상이란 다른 말로 하면, 아이디어의 번득임을 말하는 것인데, 이 번득임은 우뇌의
직관력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우뇌에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 오는 것을 말한다. 우뇌는 언제나 밖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이미지로서 저장하는 구실을 한다.
  (1)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림으로 만들어 놓고 살펴보아라. 그러

해결책이 쉽게 강구될 것이다.
  (2) 흥미 있는 일에 관심을 보여라. 풍부한 정보량과 대국적인 견지에서 정확한 의
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일이면 깊이 파고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호기심이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중추신경의 하고자 하는 마음을
자극하게 되어 우뇌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3) 한 가지 발상을 얻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걸 말해 본다. 그러면 우뇌의 이미지가
확대되고, 새로운 발상이 생긴다. 자기가 한 말이 힌트가 되어서 새로운 발상이
떠오르게 된다.
  (4) 자기 생각을 플로차트를 만들어 보라. 그러면 그 흐름에 각단계 사이의 관련성

모순점이 쉽게 드러난다.
  (5) 다른 분야에서 히트한 패턴을 자기 분야에 적용해 본다. 심리학에서 안 풀리면
수학으로 푼다.
  (6) 한 단계 높은 입장에서 우뇌에 지도를 그려본다. 그러면 대국적인 입장에서
문제가 풀린다.
  (7) 답은 언제나 문제 속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우뇌를 작동시켜라.
@ff
     제22장
     여행과 영화 보기는 우뇌 영역을 넓힌다

  1.여행의 효율성

  가) 여행의 가치
  원래 여행이란 새로운 경험을 얻고,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새로운 것을 학습을 하
고,
그리고 즐거움을 맛보는 일상 활동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때로는 치유적인 효과를 주

때문에 정신과 의사들은 어떤 종류의 환자에게는 여행을 권한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을 한다. 17세기 영국의 작가 토마스 풀러의
말이다.
  이 말에 깊은 뜻이 있는 듯하다. 방황하는 시간이나 여행하는 시간은 일에서 떠나
있는 시간이다. 일에서 떠나 있으면 잡시 자유로울 수가 있다. 자유로워질 때 인간의 
상상의 날개는 마음껏 펼쳐질 수가 있다.
  여행은 확실히 공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자극 효과가 큰 경험이다. 여행의 정신은
바로 자유의 정신이다. 즉 자기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는 완전한 자유

누리는 시간이다. 영국의 수필가이고 평론가인 윌리엄 해를리트의 말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여행 관행에는 문제가 있다. 국내 여행을 살펴보면 주로 먹자판과
춤판이 주종을 이룬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오고 난 후에 골병드는 사람이 많다.
스트레스 해소한다고 절제 없이 과다하게 술먹고, 춤추고 나면 허리 다쳤다, 발목
삐었다. 속탈 났다, 골치 아프다, 잠설쳤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올 때에는 모두가
지쳐서 차속에서 잔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풀러 갔다가 스트레스를 안고 돌아온다. 완전히 밑진 장사한
셈이다. 그 후유증이 여러 날 간다. 따지고 보면 돈 쓰고, 몸버리고, 시간 낭비하고,
때로는 친구하고 틀어져서 돌아오기도 한다. 왜 우리는 좀 현명하지 못할까? 왜 우리

목적 지향성이 약할까? 왜 우리는 좀 따져 보는 않는 것일까? 

  나) 잘못된 여행 관행
  외국의 경우를 보자. 비행장에 모일 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안내자가 모이라고 한
시간에 맞추어 제 시간에 당도하는 사람이 적고, 출발 5분 전에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도 있다. 우서 안내자의 지시를 안 지킨다. 이것은 여행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가장 나쁜 행동이다.
  출발 시간이 한두 시간 지연된다는 통보가 오면 남자들은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 놓

고스톱 치는 사람이 생겨나고, 여성들은 매점에 가서 음식 사서 파티를 연다. 기다리

시간에 신문이나 잡지, 혹은 책을 보는 사람이 드물다. 서양 사람은 거의가 책을 본
다.
  이 점이 선진국 사람과 후진국 사람의 차이다. 여행 관행에서 보면 후진국을 면할
수가 없다.
  비행기를 타면 떠드는 사람들이 많다. 한번은 파리를 가는데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샐러리맨 세 사람이 비행기를 탔다. 서울을 떠나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007 가방 위에 담요를 깔아 놓고 고스톱 치면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이런 형태는 시간과 정력과 머리의 낭비이다. 13시간

중요한 시간이다. 그들이 비행기 속에서의 시간은 그들의 삶에서 영원히
무위하게 사라져 버린 시간이 된 것이다.
  파리서 돌아오는 길에 내 옆에 일본인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는데, 비행기가 안정된
고도를 유지하자 핸드백에서 책을 끄집어내서 읽기 시작했다. 그 13시간의 비행시간
중 반 정도는 책을 읽는 것 같았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중년 여성보다 덜
지성적인 셈이다.
  여행지에 당도해서 행선지로 가는 도중의 이동 버스 속의 풍경을 보자. 처음에는
신기해서 차창을 내다보다가 한 1시간쯤 달리면 그 때부터는 모두 얼굴에 수건이나
신문지를 얹고 잔다. 여행을 왜 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적지 않은 여행비를
내고, 아까운 시간을 들여서 외국까지 와서 잠을 자다니, 잠자러 온 것인가?
  그뿐이 아니다. 현장에 도착해서 안내자가 설명할 때 귀담아듣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안내자도 대충대충 이야기하고 자리를 뜬다. 또 한 쪽에서는 안내자의
안내와는 관계없이 개별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혼자서 휘둘러보고는 밖에 나와서 사

찍느라고 정신이 없다.
  여행을 온 목적은 무엇을 보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갔다왔노라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비실제적인 사건인가? 갔다 와서는 사진 구경시켜
주는 것 이외에는 무엇에 감동했다거나 무엇을 배웠다거나 하는 것을 말할 밑천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 모양일까?
  옛날(조선조)에 우리 나라에 표류해서 귀국하게 된 네덜란드 상선 선장 하멜이 쓴
"표류기"를 읽어 보라. 그의 표류일기는 그대로가 역사이다. 그들은 새로운 풍물을 볼
때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눈여겨보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영역을 넓히고, 사고를 더 유연하게 하
고,
넓은 견문으로 다른 사람과 사귀고 대화하려면, 뭐든 낯선 것을 볼 때나 새로운 경험

하게 될 때 무심코 지나쳐 버리지를 말고, 눈여겨보고 귀담아듣는 태도를 가져야 한
다.
  우리에게 이 점이 부족하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한테 딸리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해 준 사람은 주로 서양 사람들이다. 앨빈 코플러,
죤 갈브레이트, 폴 케네디, 아놀드 토인비 등이 모두 동양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양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은데다가 어떤 문제와 한번 씨름하면 치밀하게 파고드는
지질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이 점이 부족하다. 뭐든 겉핥기식이다. 대충대충이다. 적당히 넘어간다.
이래서는 우리가 21세기의 주도적인 국가가 되기 어렵다. 돈만 있다고 선진국이 아니
다.
머리를 어떻게 쓰느냐를 따져야 한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렇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선진국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고 수준은 선진국 수준에 있다. 바로 이 점인 것이
다.

  2. 뒷골목과 시장을 보라

  새로운 아이디어, 뭔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면, 늘 보는 광경, 늘 듣는 말,
늘 듣는 음악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머리를 다양하게 쓰려면 여행을 해야 한다.
특히 외국 여행을 하고 외국 여행을 할 때에는 그 나라의 민속박물관이나 역사박물관

꼭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도시는 우리의 도시와 다를 바가 없다. 도시의 백화점은 더욱 그렇다.
파리의 유명한 쁘렝땅이니 뭐니 하는 백화점에 가봐야 한국의 큰 백화점에 있는 것과
차이가 별로 없다. 그러나 박물관에 가면 다르다.
  어느 도시나 그 도시의 외간에 관련된 곳 예컨대 건물(현대적 빌딩), 교통수단,
음식점, 쇼핑센터, 슈퍼마켓 등은 별로 다를 바가 없으나 큰 길에서 한 블럭 들어간
뒷길이나 시장에 가면 이야기는 다르다.
  거기에는 우리의 것과는 한결 다른 무엇이 있다. 그들의 서민들이 웅성거리는
뒷길은 그들의 진솔한 삶이 거기에 있고 신기한 것도 많다.
  동남아시아는 거기대로 다른 신비롭고 음산한 무엇이 있는 듯하고, 
남태평양의 섬들에는 또 다른 신기로운 분위기가 있다. 북유럽이 다르고, 서유럽이
다르고, 에게해 연안 국가가 다르다.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라틴계나 나라가 또
다르다.
  시장이나 뒷골목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양아치, 소매치기, 깡패, 집시 아이들. 이

곳에 갈 때에는 여럿이 같이 가야 한다. 단신으로 움직여서는 안된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고 배워야 하느냐 하면, 우리와 다른 점이 뭣이
며,
왜 다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점이 아주 중요하다.
  예를 들면, 대만에 가면 시장이나 선물가게에서 조그만 인형을 무더기로 만들어
놓고 파는 것이 있다. 물어 보니까 "서유기"나 "수호지"에 나오는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한 세트씩 샀다. 불과 키가 3cm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인형들인데 모두 표정이 다르다. 기가 막힌 작품이다. 그러니까 장사가 되는 것이다.
비싸지도 않다.
  타이 사람들은 저녁에 퇴근할 때 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뭔가를 싸 들고 집으로
간다. 알고 봤더니 그들은 저녁거리를 사서 들고 가서 집에서는 차리기만 하면 된다.
저녁 식사를 집에서는 장만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 사회의 생활양식이다. 거의 누구나
일을 하니까 집에서 밥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가) 여행은 두뇌를 자극한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들, 호기심이 너무 없다. 서양 사람들은 이상한 광경을 보면 

물어 보고 노트에 적고 사진 찍고 하는데, 잘 물어 보지도 않고 자기 혼자 짐작해
버리고 만다. 또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은 더욱 없다. 사진도 그들은 찍는 것이 아니라
꼭 자기 얼굴이 거기에 들어가야 된다. 말하자면 여행을 하는 데도 객관적으로 안하고
주관적으로 하는 셈이다.
  여행자는 모름지기 다른 나라의 역사, 풍속, 생활 습관, 생산, 민속 등에 관해서
알고 경험하고 그 속에 들어가서 참여해야 여행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특히
관광 여행은 그렇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외국 여행을 가도 꼭한 식당을 찾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고추장병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 나라에 가면
한두 마디도 그 나라 말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호텔에서
만나는 보이에게라도 그 나라 말로 인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현장에 가면 그 나라 음식을 맛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다. 음식과 언어가 바로 그 나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그런 데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가 지방에 여행을 가는데도 대도시보다 중소도시, 그 중에서도 5일장, 야시장,
민속 축제날 등을 구경할 수 있으면 좋고, 산골, 농촌, 어촌, 너와집, 초가집, 민속마

등을 구경하는 것이 좋다. 우리 나라에 살면서도 일생 안 가보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여행을 하면 우뇌의 기능이 확대된다. 그래서 체감능력, 상상력, 창의력, 표현력
등이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우뇌를 개발하려면 여행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3. 영화에서 무한한 아이디어를

  가) 수학보다 영화가 더 중요하다
  나는 영화를 무척 많이 본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이화여대, 연세대 주변만 해도
영화관이 여덟 개가 있다. 퇴근길에 지나가다가 시작 시간과 관계없이 불쑥 들어가서
영화를 감상한다.
  그래서 영화관에서 우리 학생들과 마주칠 때가 많다. 나는 그것을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는 내 여가 시간 이용의 중요한 일부이기 대문이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담배도 안 피운다. 골프도 안 친다. 헬스클럽에도 안 간다. 그러니
여가 시간에는 영화 보기가 적격이다.
  왜 내가 영화를 좋아하느냐? 젊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영화 잡지 두 가지를 정기 구독하고 있다. 그만큼 좋아한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자주 영화 이야기를 교재 안에 끼어 넣어서 써먹는 일이 많다.
왜냐하면 심리학 강의에서 영화 내용이나 장면을 실례로 드는 것이 아주 적절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사이코계의 영화는 더욱 그렇다.
  심지어 영국의 유명한 개방 학교의 효시를 이루고 있는 서머힐의 닐 교장의 책에
"머리에서 가슴으로"란 것이 있다. 이 책 속에 "우리는 일생 동안 학교를 졸업한 후
한번도 써먹어 본 일이 없는 미분, 적분을 가르치느니보다는, 차라리 영화 감상법을
가르치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영화는 우리가 일생 동안 접하는 중요한 매체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대목이 있다. 그만큼 영화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보는 방법은 어디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관객도 그냥
'재미 있다'의 기준으로만 영화를 보는데, 이것은 어린 아이들의 영화 감상 수준이다.
영화야말로 아주 깊은 의미가 있는 예술이고 생활의 일부이다. 특히 나는 영화를
창조성의 관점에서 문제삼고 싶은 것이다.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싶으면 동시
2본 상영 영화를 본다. 돈도 적게 들고 많이 볼 수 있어 좋다.

  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
  영화란 가장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테크니컬 하게 만들어지지만 가장 감성적이고
비논리적으로 전달되는 예술이다. 우리가 한편의 영화를 통해서 얻는 정신, 아이디어,
감정, 이데올로기, 충격,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고 깊다.
  나는 지금은 누구의 작품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1947년도에 대구의 만경관에서
본, "영광의 서곡"이라는 프랑스 영화와 1949년에 본 디아니 더빈 주연의
"오케스트라의 소녀"와 "크리스마스 홀리데이"를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던 해인 1957년 대한극장에서 개관 기념 영화였던
"잊지 못할 사랑"은 영원히 내 가슴속에 감동이 남아 있는 것들이다.
  소설을 읽고 얻은 감동에 비교할 수가 없다. 지금도 그때 현장에서 느꼈던 감동을
그대로 가슴속에 되새길 수가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정보전달적 효과와 창의적 아이디어를 자극 받을 수
있다는 데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우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 줄거리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 줄거리는
의뢰 받은 작가이거나 소설가이거나 혹은 제작자의 머리에서 나온다. 그 줄거리가
영화의 내용을 결정하는 데는 제일 중요한 몫을 한다.
  즉 무엇을 그려내려고 했느냐를 말해 주는 것이다. 원작자의 창작 아이디어가 그 중
제일 중요한 몫을 한다.
  즉 무엇을 그려내려고 했느냐를 말해 주는 것이다. 원작자의 창작 아이디어가 그 중
제일 중요하다. 이 아이디어가 우선 창조적인 것이어야 좋은 영화가 된다.
  그 다음에는 이 이야기를 영화로 찍을 수 있게 시나리오로 옮겨 놓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것 또한 대단한 기술이다. 이런 경우는 작가 자신이 소설을 시나리오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 작가가 '60년대식'이란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김승옥
씨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쓴 "무진기행"은
영화로서 성공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화면 구성을 해야 한다. 이때 감독, 촬영 감독, 카메라맨, 때
로는
작가 등이 이에 참여해서 연구하고 토론한다. 화면 구성을 할 때 네모난 칸막이 속에
들어갈 그림을 스케치한다.
  이때 화가나 디자이너가 동원된다. 그리고 난 후 배우들에게 대본을 주고
소화시키면서 연기 지도를 한다. 화면 구성과 연기 지도는 네모난 칸막이 속에 어떤
화면(배경)을 구성하고, 어떤 배우로 하여금 어떻게 연기하게 함으로써 관객을
끌어들여야 할지를 연구하게 된다.
  이 대목에 관객을 사로잡는 작업이다. 감독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몫이다. 세트를
만들고, 촬영을 하고, 음악을 넣고, 편집을 하고, 그리고 시사회를 갖고 시장에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영화를 만드는데 동원되는 엄청난 인력을 생각해 보면, 영화 장면
하나하나는 단순히 감독 한 사람의 재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문학)
음악가, 미술가, 엔지니어, 의상 디자이너, 연기 지도하는 무대감독, 촬영기사, 스턴
트맨,
세트 설계자, 미니어처 제작가, 건축가, 소도구 제작을 하는 공예가, 편집, 녹음...
굉장한 인력들이 동원되어서야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화가 다 끝나고 타이틀 막이 쭉 흘러 내려갈 때 참여한 스텝들의 이름을 보라. 그
배경을 보면 엄청난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영화 한 편에서 우리는 각 전문 분야 사람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접을 쓰고 싶은 것이다.
  주말이나 여가 시간에 영화를 보라. 비즈니스맨들, 판매 사원, 제작팀, 기획팀,
학교 교사 예술 분야에서 공부하거나 일하고 있는 사람들, 영화를 잘만 감상하면
무한한 아이디어, 보고로서 활용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영화를 권하고 싶다. 영화는 종합예술이요, 테크놀로지와 삶 그
자체이다.
@ff
     제23장
     성공에 이르는 알파 훈련

  1. 성공에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가) 성공한 사람의 예
  내가 아는 우리 나라의 특수 분야의 대가들을 보면 그들의 집중력에 경탄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나라 타악기 연주의 명인에 김대환 씨가 있는데, 양쪽 손가락에
각각 3개씩 모두 6개의 북채를 끼고 연주하는 세계적인 타악기 대가이다.
  그런데 이분이 쌀알 하나에 "반야심경" 전문에 써넣는 분이다. 이게 될 말인가?
내가 물어 보았더니 글자 한 자를 쓰기 위해 새벽녘에 일어나서 목욕재계하고 참선을
한 다음 쓴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쓴 것을 나는 본 일이 있다. 이것은 굉장한
집중력이 아니면 안되는 일이다.
  어떤 한 가지 특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 작곡가, 작가, 화가, 조각가, 공예가,
과학자, 및 발명가, 만화가, 심지어 구두수선가라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때 훌륭

작품, 훌륭한 제품, 훌륭한 서비스를 만들 수가 있다. 일본의 칼 닛뽄도를 만드는 데
담금질만 천 번 이상 한단다. 그래야 단칼에 내려쳐도 뭐든 벨 수 있는 강도를
가진 칼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러지지 않는 칼이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도공들의 고도의 집중력의 소산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실패하게 되는 까닭은 자신감을
잃고 암담한 기분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능력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발휘하려면 그 능력을 집중할 수가
있어야 한다. 주의가 산만하고, 한 가지 일에 진지하게 덤벼들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집중하기가 어렵다.
  또 한 가지 뇌의 잠재력을 집중하는 방법도 있다. 뇌파가 알파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뇌파에는 알파, 베타, 델타, 감마파가 있는데, 그 중 알파파란 얕은 잠과 같

뇌의 상태이다. 그러면서도 수면과 다르며, 그러면서도 생명활동과의 관계가 깊은
자율신경중추의 기능이 고양된 상태가 되어, 기분도 안정되고, 몸도 이완되는 이른바
명상의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일파파가 인간의 감추어진 잠재적인 뇌의 힘(이것을 뇌력이라고 한다)의
하나인 경이적인 집중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통의 한계를 타파한
성과를 올릴 수 있지만, 이런 사실을 최근에 와서야 대뇌생리학의 연구가 밝혀 주었
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머리를 쓰는 심리적 과정을 '집중적 사고'라고 한다. 즉 이
알파파에 의한 집중력 훈련이 또한 성공에 이르는 또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밝혀 두는
바이다.

  나) 알파파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면 알파파의 상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 알파파의 상태란 리랙스한
자재심의 상태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거리낌이 없고 거칠 것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바깥으로부터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런 제약이나
간섭을 받지 않는 마음 상태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알파 상태는 참선하는 스님이나 명상, 요가 호흡, 단전호흡을 하는
수련자들의 뇌파에서 볼 수 있다. 즉 최고의 집중 상태인 것이다.
  이 알파 상태가 되면 직관력이 뛰어나며 이미지가 잘 생산된다. 집중력을 비롯하여
기억력, 심신의 절묘한 균형, 직관, 번득임과 같은 잠자고 있던 뇌력이 크게
활동을 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알파파의 훈련에 의한 집중력 강화는 곧 우뇌를 개발하는 일이
셈이다. 우뇌와 좌뇌는 서로 협조하게 되면 동시에 서로 억제하는 관계에 있으므로,
좌뇌가 쉬면 우뇌가 활성화될 여지가 생긴다. 머리 속에서 언어를 배제하면, 그런
의미로 우뇌를 개발하는데 효과가 있다.
  우리가 명상을 하거나 참선을 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무념무상이 되는
것이 좋다. 또 지도자가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면 우뇌는 말 대신 이미지 쪽의 활동을
활성화시킨다.
  알파파 훈련에 의한 집중력 강화는 확실히 집중력을 높이는데 효과가 있다. 이
훈련을 계속하면 아이디어가 속속 창출된다. 기억력도 향상되며, 감각기관이 자극을
받아들이는 감수성도 예리해지며, 기가 살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학교 성적의 향상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 성적이나 비즈니스 성적을 향상시키려면, 학교 공부(일)를 잘하기 위한
학습(과업)목표 설정, 진지한 학습(직무)태도, 효과적 학습(문제 해결)방법의 채용,
꾸준한 학습(일) 습관 유지 등이 뒤따라야지, 알파파 훈련만으로는 안된다. 알파파
훈련으로 단련된 집중력은 기초적인 뇌력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 이 뇌력을 문제
해결에 적용하려면 앞에서 말한 실천행동전략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집중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두 수레바퀴와 같다 할 수 있다.

  2. 알파파의 경이적인 힘

  가) 기억력, 집중력의 원천
  우리 나라의 최면심리학의 대가인 대한심리연구소 소장인 유한평 박사와 점심 약속

하고 그의 연구소에 갔더니 알파코일이라는 기계를 한 대 내게 주었다. 그게 뭔가
했더니 일본에서 특허를 받은 알파파 발생 전자기기였다.
  유박사 말로는 오후 머리가 띵하고 머리 회전이 잘 안될 때 이. 코일을 감고 한 30

정도 리랙스하고 있으면 뇌력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것을
연구실에 놓아두고 사용하고 있다. 효과를 보고 있다.
  사람의 뇌의 의식화 수준은 0단계에서 제4단계에 이르는 다섯 가지 단계로 되어 있
다.
그 중 제3단계가 정신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의식은 명쾌하고, 기민해지는
상태이다. 주의력이 가장 잘 활동하며, 주의의 폭도 넓어지며, 총합적 판단이 가능한
상태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뇌가 가장 이상적인 활동을 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실은 이
제3단계야말로 알파파의 상태이다. 우리가 기억력, 집중력, 발상력 등의 뇌력을 발휘

때 뇌파가 알파파가 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바이다.
  굉장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의 뇌파를 조사해 보면 그의 뇌파가 알파파 상태가 되거

명상에 잠겨 있는 수련자들이 뇌파도 알파파가 나온다. 초당 8-14Hz의 파장을
나타내 보일 때를 알파파라고 한다.
  어떤 초인적 기억력을 가진 사람의 기억력 테스트를 하는 동안의 뇌파 검사를
해보았더니 알파파가 나왔다는 것이다.
  또 어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하여금 실제 연주와 같은 상황을 설정해 놓고
좌파를 측정했더니 그의 뇌파 중 알파파가 가장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또 어떤 바둑
명인이 전에 두었던 기보를 회상하게 한 실험에서도 눈을 감고 회상하기
시작하자 비슷한 알파파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알파파가 잘 나타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재능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알파파는 나온다. 그러나 알파파가 나오는 상태를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자기의 재능을 자유자재로 발휘할 능력을 터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알파 상태를 만들어 내는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기억력과 집중력을 높일
수가 있는 법이다.

  나) 누구나 간단히 할 수 있다
  미국서 출판된 "간부의 ESP"라는 책이 있는데, 기업의 간부들에게 ESP훈련을
시키면 회사가 잘 운영되어 이익을 많이 낸다는 내용이다.
  이 ESP 심리학 용어인데, ESP란 Extra-Sensory Perception의 약자이다.
초감감지각이라고 번역한다. 즉 영감이나 제6감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회사 간부들이 이런 영감이나 육감을 많이 가져야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신상품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앞에 소개한 책이 바로 그런 영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알파 훈련의 효과에 대해서 쓴 책인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초대형기업인 IBM이나 제록스, 펩시콜라 같은 회사에서는 간부들에게
바이오피드백장치(알파코일과 같은)를 사용해서 알파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뇌력을 개발해 붐으로써 빅히트를 할 수 있는 신상품을 내놓을 수가 있다. 미국의
어떤 대학 중에서는 알파 훈련 코스가 개설되어 있는 데가 있다.
  그런데 알파 훈련은 바이오피드백장치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
중에서도 조금만 연구하고 노력하면 알파 상태를 만들 수가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훈련인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뇌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어떨까?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스트레스를 많이 느끼고, 불안 욕구불만도 쌓이는 세상

살고 있는 오늘날 상황에서는 사람의 집중력도 떨어지고 일에 대한 의욕도 저하되고,
골치만 아파진다.
  이렇게 되었을 때 술이다, 고스톱이다, 디스코다 하고 소극적인 방법으로 머리를
식히는 것이 한국사람들의 관행이다. 어떤 사람은 여행이다., 골프다, 등산이다 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방법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방법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알파 훈련을 권장하고 싶다.

  3. 알파파가 하는 일

  사람은 누구나 고성능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앞에서도 밀 했지만 사람은 자

머리 속에 엄청난 성능의 컴퓨터(뇌 중추신경조직 중의 대뇌피질)를 가지고 있는데
일생 중 그것을 3%정도밖에 안 쓰고 죽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고성능의 장치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가동시킬 만한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그 좋은 장치도 소용이 없게 된다. 컴퓨터를 움직일 BASIC프로그램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알파 훈련이다.
  잠시 눈을 감고, 뭔가 즐거운 정경을 그려보는 것이 좋겠다. 연인과의 데이트 장면

좋다. 스포츠 경기에서 우승한 경우도 좋다. 고향의 아름다운 경치도 좋다. 그것이
눈앞에 쭉 전개되었을 때, 당신의 뇌파는 알파파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알파파가 성질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하겠다.
  사람의 뇌란 것은 일종의 전기적인 활동을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전기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물론 아주 낮은 주파수 내역에 있는 파동인데, 뇌세포가 발생하는
생체 에너지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좀 전문적으로 말하면 뇌의 신경세포가 정보를 전달할 때에 전기적인 임펄스가
전달되며 이때 전기적인 활동이 생기게 된다.
  뇌파에는 크게 4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기능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주파수:14-20
  종류:베타파
  기능:외적의식:시각, 미각, 청각, 후각, 시각, 공간, 촉각, 걱정스러운 일, 복잡한
계산, 일에 직면했을 때, 즉 외계와 대응해서 긴장하고 있는 상태

  주파수:8-14
  종류:알파파
  기능:내적의식:사고, 번득임(영감), 집중, 직관, 명상 뭔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 명상에 들어갔을 때, 즉 심신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

  주파수:4-8
  종류:쎄타
  기능:내적의식:몽롱, 얕은 수면과 이식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상태

  주파수:4 이하
  종류:델타
  기능:내적의식:무의식, 깊은 수면

  이 표를 보면 알파파가 사고에서 번득임, 영감, 직관, 집중과 같은 뇌의 활동 시에
나타나는 파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심신이 함께 리랙스된 느슨한 상태, 명상에 들어간 상태에서
알파파가 잘 발생하는 것임으로, 이거야 그리 어려운 훈련이 아닌 것이다.
  우리 나라 대기업 총수들 중 여러 분이 이 참선, 명상, 요가, 단전호흡법으로 심신

단련하고 있는데, 선경의 최종현 회장의 단전호흡 수련은 유명하다. 매일 아침
간부 사원들, 혹은 원하는 부하 직원들과 함께 단전호흡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방법이다. 참신한 아이디어 창출을 위해서도 멋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집에서도 할 수 있고, 회사에서도 할 수 있고, 통근 전철 속에서도 할 수 있다.
  집에서도 할 수 있고, 회사에서도 할 수 있고, 통근 전철 속에서도 할 수 있다.
틈만 나면 1분이나 2분 정도도 좋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보다 풍요롭게 살려고
하는 동기가 있음으로 이 힘을 활동시키면, 이 훈련을 실시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4. 알파파 훈련은 이렇게

  다음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알파 훈련에 대해서 설명해 보려고
한다.

  1) 기상과 함께 알파파를
  아침에 눈이 떠지면 이불을 젖힌 채 침대에서 두 팔을 벌리고 크게 기지개를 켠다.
이 순간 바깥 소리라고는 전혀 안 들린다. 이른바 단절된 정신의 공백 상태가 된다. 
실은
이 기분 좋은 일순간이 뇌파가 알파파가 된 상태이다.
  하루의 스타트는 몸의 컨디션 여하에 달려 있다. 아침에 몸이 상쾌하면 머리 회전도
잘되고, 몸이 찌푸드득 하면 머리 회전도 잘 안된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알파 상
태가
되도록 노력하면 몸의 리듬도 좋고 머리의 활동도 순조로워질 것이다.
  세면장에 가서는 거울을 보고 빙긋 웃어 보라.
  오늘은 기분이 상쾌하구나 하고 가볍게 소리를 내본다.

  아침에 출근을 하거든,
  사람을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한다.
  이때 "야, 그 넥타이 멋있어"라든가 "오늘은 더욱 화사하게 보여"라고 말을 건넨다.
  물론 이때 입으로만 그르지 말고 진심으로 하라.
  아침에 집 부근을 산책하라.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셔라.
  아침 식사를 즐겁게 하라.
  그러면 아침부터 알파파가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2) 수면 부족 때도 '잘 잤다'고 생각해라
  요즈음은 직장의 잔업 처리, 밤늦게까지의 비디오와 TV 시청 등으로 잠이 모자라기
쉽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몸이 무거워지고 출근을 하더라고 하루 종일 머리가
무겁고 졸게 된다.
  이럴 때에도 알파파를 내려면 '아이고, 잘 잤다'고 생각하고, 그 말을 자기
스스로에게 하면 이상하게도 머리가 개운해지고 몸도 가벼워진다. 일어나자마자
기지개를 켜고 심호흡을 하고, '잘 잤다'고 뇌이면 알파 상태가 된다.

  3) 목욕하면서 알파 상태를 만들어라
  옛부터 목욕탕에서 문득 발견, 발명의 힌트를 얻었다는 사람이 많다. 유명한
이야기로는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가 있다. 탕에 들어가서 지그시 눈을 감고 앉아
있는다면 심신이 리랙스 되어 좌파도 알파파가 되어, 잠재적인 뇌력도 활발하게
작용하기 시작한다.
  욕탕 속에서의 알파 상태를 활용하면 건강과 미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탕
속에서 기분이 좋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알파 상태가 되는데,
욕탕에 들어가서도 불쾌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뇌파는 베타 상태가 된다. 탕
속에 몸을 내맡겨라. 그러면 알파 상태가 된다.

  4) 이미지를 이용하라
  뭔가를 꼭 기억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을 똑똑히 기억해 두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시키고, 알파 상태를 만들 필요가 있다.
  프로 기사의 경우는 대국한 기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재현할 수가 있다. 이것은
대국 중의 놀라운 집중력으로 알파 상태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베타 상태에 있으면 기억은 잘 안된다. 바둑의 예를 들어보자.
  처음에도 '검든 바둑돌을 든 손이 있다. 그 돌이 바둑판에 놓여졌다. 그때 갑자기
볼 일이 있어서 바둑을 두다가 그만두고 신을 신고 볼 일을 보러 나갔다'라는
식으로 이미지를 생각해 낸다..
  그러니까 시각상으로 생각해 낸다. 이와 같은 연속적인 영상과 같은
이미지의 흐름으로써 기억하는 방법을 '이미지 기억술'이라고 한다.

  5) 반복 기억시는 휴식기간을 넣어라
  단어나 연대 등을 외워 두려고 할 때에는 처음에는 베타 상태가 된다. 그러는 동안
알파 상태가 되기도 한다. 뭔가 잘 기억하려면 처음 기억해 두었던 내용이 사라져
버린다.
  이때 조금 외우는 행동을 되풀이하다가 조금 휴식 시간을 넣어서 다시 복습하는 것

좋다. '아, 알았어' 하고 생각하면서 휴식을 취하면 기분 전환이 되고 난 후 다시 한 

되풀이 외우면 효과가 좋다.
  이렇게 휴식을 넣으면서 같은 방식으로 3회 정도 암기를 되풀이하면, 기억이 정착된
다.
휴식이 끝나면 '아이, 피곤해'보다는 '잘됐어' 하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6) 꿈 속에도 힌트가 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타르티니(1692-1770)의 작품 중에 바이올린 소나타
"악마의 드릴"이라는 것이 있다. 이 곡이 탄생된 것은 타르티니의 꿈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꿈 속에서 타르티니는 악마가 연주한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 곡이 아침에 일어난
후에도 머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소나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꿈속에
나타나는 내용 중에도 눈을 뜨고 있는 낮 동안보다 훨씬 독창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
수가 있다.
  예로부터 꿈 속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번득여서 일대 발견, 발명을 했다는 예는 많다
그러니까 잠을 잘 때에도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것이 꿈 속에
나타나게 되는 일이 많다.
  또 잠을 잘 때 베갯머리에 메모지를 놓고 자기만 해도 꿈을 의식적으로 컨트롤할
수도 있다. 특히 외국에를 공부하고 있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공부하면 꿈 속에서까지
외국어가 튀어나오게 된다. 그리고 꿈꾼 내용은 내용이 사라지기 전에 일기체로 적어
주는 것이 좋겠다.

  7) 간단히 할 수 있다.
  제1단계 훈련은 편안한 자세로 턱을 당기고 눈을 가볍게 감는다. 이불 위에 누운
채로도 좋고, 의자에 앉아서도 좋다. 의자에 앉을 때에는 깊이 앉아서 등을 바로 세우

된다. 그리고는 크게 호흡을 두세 번하고, 숨을 내쉴 때에 속으로 "지금 기분이 가라
앉았구나. 기분이 매우 좋구나" 하고 자기에게 말한다.
  눈을 가볍게 감으면 이번에는 세게 힘을 주어서 감아 본다. 그리고 가볍게 늦춘다. 

감을 때에는 긴장, 느슨하게 할 때에는 리랙스 하는 것이다.
  이 감촉이 차이가 느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눈이 끝나면 입, 이, 손, 
어깨,
턱, 대퇴부, 팔, 손가락 등으로 차례차례로 간장, 이완을 되풀이한다. 이 운동을 아
침,
저녁으로 하루 두번 정도 하면 좋다.
  제2단계도 위와 유사하지만 온감을 느끼는 차례이다.
  제2간계는 편안한 자세로 등을 펴고, 가볍게 턱을 당기고 눈을 감는다. 크게 심호흡

3회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숨을 내뱉으면서 마음속으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기분이
가라앉았다"고 되풀이 자기에게 말한다. 의식은 눈꺼풀에 모으고, 숨을 내뱉을 때마다
몸이 편안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런 느낌을 느끼면 의식을 양손으로 보내서 손이 따뜻해진 것을 느껴 본다. 이것이
온감이다.
  이런 식으로 의식을 신체 각 부분에 보낸다. 이런 의식 집중 훈련을 아침에
일어났을 때와 밤에 자기 전에 두 번 한다. 2-3분 정도면 된다. 전철 안에서도
사무실에 도착한 후에도 잠시 할 수 있다.
  이런 훈련을 계속하면 알파 뇌파가 잘 발생해서 머리의 회전과 발상이 아주 쉬워진
다.
물론 더 복잡한 방법도 있으나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정도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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