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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발견

제13장 사물을 사고하는 방법

by FraisGout 2020. 5. 16.

    1. 인간미 있는 사고방법이어야 한다.

  사고란 하나의 기술이지 결코 과학은 아니다. 중국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을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점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두드러진 한 가지 보기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중국인은 활 문제에
대해 서양 사람보다는 훨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전문화된 과학이 없다.
이와 반대로 서양 사람은 전문적인 지식은 매우 풍부하지만 인간적인 면에서의
지식은 매우 빈약하다. 서양에서는 과학적인 사고가 인간적인 면에서의 지식의
본래의 영역 안에 침입했다. 과학적인 사고의 특징은 한문의 고도로 전문화된 것과,
과학적 술어 또는 반 과학적인 술어를 풍부하게 구사하는 일이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과학적)인 사고라는 것은 보편적인 뜻이며, 진실한 뜻으로의 과학적인
사고를 가리킴이 아니다. 만약 진실한 것이라면 한편에 상식, 한편에 공상, 이 두
가지 것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보편적인 뜻의 (과학적)인
사고는 엄밀하게 말해 논리적이며 객관적이어서 고도로 전문화되며, 이 방법과
관찰력은 (원자적)이라고 할 만큼 매우 세밀하다. 동양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 이 두
가지 학문의 형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논리와 상식과의 대립으로 돌아가고 만다.
상식을 잃은 논리는 비인간적이 되고 만다. 논리를 잃어버린 상식은 대자연의 신비를
구명할 수 없게 된다.
  중국 문학과 중국 철학의 세계를 훑어보면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중국에는
과학이 없다는 것, 극단적인 이론, 독단이 없다는 것, 실제로 서로 다른 철학의
대학파가 없다는 것이다. 대개 상식과 양식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온갖 이론, 온갖
독단을 때려 부수고 만 것이다. 중국의 학자는 대시인인 백낙천처럼 (겉은 유교로써
그 몸을 닦고, 안은 불교로써 그 마음을 다스리며, 한편 산수풍월 가시금주로써 그
뜻을 즐기는도다) 이런 것이다. 그는 몸은 비록 이승에 있었으나, 정신은 이승 밖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 문학은 전체가 짧은 시와 짧은 수필뿐인 사막과 같은 것이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사막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광야의 풍경 그
자체와 같이 그곳에는 또한 변화가 있는 무한한 아름다움이 있다. 중국에는 미국의
국민학교 학생의 글짓기보다도 훨씬 짧은 3백자나 5백자 정도의 짧은 글이나 수기에
인생관을 담으려는 수필가나 서한 작가 밖에는 없다. 이러한 우연한 기회에 쓴 문장,
편지, 일기, 문학적 각서, 수필 일반 등등 중에는 영고 성쇠를 읊은 짧은 감상이
있기도 하고, 이웃 마을에서 자살한 여인의 기록이 있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즐거운
봄의 잔치나 눈 속의 향연, 달밤의 뱃놀이, 무시무시한 번개 치고 비가 쏟아지는
밤을 절에서 보낸 추억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추억거리가 될 만한
인상적인 말을 그 사이에 엮어 가고 있다.그러므로 수필가이며 시인이고, 시인이며
수필가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5백 자나 7백 자 이상 되는 긴 글은 쓰지 않지만
단 한 줄 속에도 온 인생 철학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자기의 사상을 엄격한
체계 속에 넣으려고 하지 않는 우화 작가나 경구 작가, 가정적인 서한을 쓰는 필자도
있다. 이런 일이 중국에 있어서의 학파와 체계가 출현하는 것을 방해한 것이다.
양식, 다시 말해서 상식적인 판단을 귀중히 여기는 정신이나 또는 작가의 예술적인
감수성 뒤에 지성은 언제나 숨겨져 있다. 지성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다.
  과학의 정복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적인 능력이 인간 정신의 지극히 강력한
무기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다. 서양에 있어서 인간의 진보가 지금도
여전히 상식과 비판적인 정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이
비판적인 정신은 논리적인 정신보다 위대한 것이어서 이것이야말로 서양에 있어서의
인간적인 사고를 나타내는 가장 높은 형식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보다
훨씬 발달된 비판적인 정신이 서양에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인정할 것까지도 없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논리적인 사고의 약점을 지적했지만, 다만 서양
사상의 특수한 결함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다. 또 이를테면 독일이나 일본에서의 무력
정책과 같이, 때때로 서양의 정치에서도 볼 수 있는 특수한 결함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논리에도 또 독특한 매력은 있다. 나는 탐정소설의 발달을 가장
흥미있는 논리적인 정신의 소산으로 보고 있으나, 이것은 중국에서는 전혀 발달되지
못했던 문학 형식이다. 그렇지만, 너무 열중하여 논리적인 사고에 빠져 버리면 역시
그 약점이 눈에 띄게 된다.
  서양적인 학문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의 전문화와 지식을 잘게 썰어 넣어 각각 다른
구획 안에 집어 넣어 버리는 일이다. 논리적인 사고와 전문화가 지나친 발달을
이루고, 그에 따라 전문적인 말투도 매우 분화된 결과 철학이 매우 뒤쪽으로, 다시
말해서 정치나 경제보다도 훨씬 뒤쪽으로 물러나게 되어, 일반 사람 따위는 조금도
양심의 가첵을 느끼지 않고, 철학의 옆을 그대로 지나칠 수 있다는 현대 문명의
기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교육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일반 사람은 철학 따위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학과) 중에서도 첫째로 해당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현대 문화의 괴상한 변태 현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과 일에
가장 가까와야 할 철학이 인생으로부터 가장 멀리 동떨어지고 만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인생에 관한 지식을 연구하는 일을 학자의 주요한 직분으로 여겨 오던
그리이스나 로마의 고대 문명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으며, 같은 중국에서도 그러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현대인이 철학의 본래의 제목인 생활 문제에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었거나, 또는 우리가 철학의 최초의 개념에서 너무 동떨어지고
말았거나 그 중의 어느 하나의 결과이다. 우리의 지식의 범위는 매우 넓어져서
저마다의 전문가에 의하여 열심히 지켜지는 굉장히 많은 (부문)이 발생되기에
이르렀으나, 철학은 그 여세로 인간 최고의 학문이라는 관록도 찾을 길 없이 겨우
아무도 자진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려고 들지 않는 한 분야로서 남고 말았다.
전형적인 현대 교육의 상태는 미국의 어느 대학의 다음과 같은 발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심리학부는 호의를 베풀어 경제학부의 3학년
학생에게 심리학부 4학년의 문호를 개방함) 그리하여 경제학부 3학년의 교수는 그의
사랑하는 학생들의 앞날을 축복하여 모든 시중을 심리학부 4학년 교수에게 맡기게
되는 것인데, 한편 그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친절한 환영을 나타내어 심리학부 4학년
학생이 경제학부 3학년의 성역에 들어갈 것을 허락한다. 이렇게 해서 학생의 수가
적은 학과는 차츰 보잘것 없이 몰락해 가는 것이다. 옛날 중국의 전국시대의 황제는
자신의 세력권 안에 속한 각 나라로부터 공물을 거두어 들이기는커녕 세력도 영토도
차츰 줄어들어 겨우 충성되며 선량한 배고픈 소수의 백성만을 심복으로 붙들어 두는
상태가 되고 말았는데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지식의 왕좌를 자랑한 철학도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그와 똑같은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식 그 자체는 없으면서 지식의 구획만이 있는 인간 문화의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전문화된 것은 있으나 하나로 종합된 것은 없다.
전문가는 있으나 인간적인 긍지를 다루는 철학자가 없다. 도가 지나친 지식의
전문화는 중국 궁정의 주방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친 전문화와 별로 다름이 없다. 옛날
어느 왕조가 멸망 하였을 때, 어떤 돈 많은 관리가 대궐의 수랏간 숙수로 있다가
도망쳐 온 한 여인을 자신의 숙수로 두게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랑스러워서 여러
곳에 있는 친구에게 안내장을 보내어 수랏간의 숙수였던 여인의 음식 솜씨를 맛보아
주면 고맙겠다는 말을 퍼뜨렸다. 초대한 날이 가까와지자 그는 숙수에게 궁정 요리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여인 편에서는 음식 같은 것은 도저히 만들 자신이
없다는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그렇다면 너는 무슨 일을 했었단 말이냐?) 하고 관리가 따져 묻자,
  (예, 저는 만두를 만드는 일을 거들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날이 되거든 손님에게 대접할 맛있는 만두를 만들도록 해라)
  그런데, 숙수의 대답에는 그도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전 만두를 만들 줄 모릅니다. 저는 폐하께서 드실 만두에 넣는
둥근파를 다지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태는 오늘날 인간 지식의 영역이나 아카데믹한 학문의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인생과 인간성에 대해서는 극히 조금 밖에 알지 못하는 생물학자가
있는가 하면 같은 부류의 정신병학자도 있다. 인류의 고대사만 알고 있는 지질학자,
문명인에 관한 일은 모르지만 야민인의 심리라면 알고 있다는 인류학자도 있다.
어쩌다 친절한 사람이 있어서 인류사에 반영된 인간의 예지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사학가도 있다. 심리학자는 곧잘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지식을 주지만, 동시에 또 루이스 캐럴은 새디스트(이성을 학대하고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욕자) 였었다느니, 실험실에서 닭을 실험한 결과 강렬한 소음이 닭에게 끼치는
영향은 심장을 뒤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느니 하는 것을 발표하여 공연히
아카데믹한 저능한 상태의 일단을 폭로하는 경우도 많다. 교육심리학자는 그 설명이
잘못되었을 때는 언제나 얼에 빠져 보이지만 옳았을 때는 더 한층 얼빠져 보인다.
  그렇지만 이 전문화되는 과정의 한편, 종합의 과정 다시 말해서 이러한 모든
부문의 지식을 한데 모아서 인생의 슬기로움이라는 가장 높은 목적에 도움이 되게끔
하려는 노력은 뼈져리게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예일 대학의 인류
종합 학회나 하버드 대학 창립 3백 년 기념제의 식사에서 실증되었듯이 어느 정도의
지식을 종합할 준비는 오늘날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서양의 과학자들이 좀더
단순하고 좀더 비윤리적인 사고 방법을 취하게 되지 않는 한 종합이라는 것은 실현될
수 없다. 인간의 슬기로움은 단순한 전문적인 지식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도
아니거니와 통계적인 평균치의 연구에 의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슬기로움은 오로지 견식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상식, 기지, 솔직
미묘한 직감이 좀더 널리 골고루 퍼지게 되어야만 비로소 사람은 슬기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논리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와의 사이에는 뚜렷한 구별이 있다. 이것은 또
아카데믹한 사고와 시적인 사고와의 다른 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카데믹한
사고의 예는 매우 많으나, 시적인 사고의 예는 오늘날 거의 찾아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
그리이스인이 현대인과 비슷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틀림없이 그들이야말로 현대
사상의 조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인간적인 사물을 보는 법,
생각하는 법이 있고, 중용설을 취하고 있던 점도 있으나, 분명히 현대적인 교과서를
쓴 필자의 조상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어서 의학, 식물학, 논리학,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지식을 많은 구획으로 분리시켜 버린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또한
그로써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조금도 알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아카데믹한 잠꼬대를 입에 담기 시작한 맨 처음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잠꼬대가 심한 것으로는 도저히 오늘날의 미국의 사회학자, 심리학자를 당해 낼 수는
없다.
  플라톤은 진정한 인간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그 역시 새로운 플라톤
학파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관념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숭배하게 만든 책임자이다.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추상적인 관념을 숭배하는 전통은 보다 통찰력이
풍부한 인물에 의하여 완화되는 일이 없이 오히려 관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투로 논하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오직 최근의
심리학만은 (이성), (의지), (감정)의 물샘틈 없는 구획을 깨뜨려 버리고 중세의
신학자에 있어서는 엄연한 실체였던 (심령)을 없애 버리는 일을 도왔다. (심령)은
죽이고 말았으나, 한편 우리의 사상을 제압하는 이상한 사회적, 정치적인 슬로우건이
수없이 만들어졌다. (혁명파), (반혁명파), (부르조아), (자본주의 = 제국주의자),
(탈주파) 따위이며 또 (계급)이니 (운명)이니 (국가)니 하는 똑같은 것을 창조하고,
개인적인 자유를 말살하는 방향으로 논리적인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인생을 전체로서 바라볼 수 있는 참시하 사고 방식,
보다 재미있는 사고 방식이 오늘날 매우 요망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 제임즈
하베 로빈슨이 경고했듯이, (사상을 종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문명에 어떤 커다란 후퇴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안식이 갖추어진 관찰자는 극히 솔직하게 이와 같은 확신을 말하고 있다) 로빈슨
교수는 또한 현명하게도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실직과 달식은 서로 시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머지않아 서로 친구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경제학자와 심리학자는
양심적인 진실성은 지나칠 정도로 지니고 있으나, 달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논리를 인간적 사상에 적용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며, 이 점을 크게
역설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에 있어서의 과학적인 사고의 힘과 위세는 너무나 크고
각종의 아카데믹한 사고는 온갖 경고에도 아랑곳 없이 인간의 정신은 하수도와
마찬가지로 측정할 수 있다느니 하는 따위의 천박한 신념을 지니고 끊임없이 철학의
영역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그 때문에 우리 일상의 사고는 얼마만큼 어지럽혀진
정도로 그쳤으나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2. 상식으로 돌아가라

  중국인은 (논리적 필연)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인간적 사상에 논리적인 필연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논리를 불신하는 것은 우선 말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어 더욱 정의를 혐오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온갖 체계와 논리에 대해 증오하게
되었다. 아마도 말과 정의와 체계가 있음으로 해서 철학의 여러 학파가 생겼기
때문이다. 철학의 타락의 말에 몰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학자인 공정암은
말했다. (성현은 말하지 않고, 능한 자는 이야기 하며, 어리석은 자는 논한다)
그런데 공부자 자신은 매우 논의를 좋아하였다니, 흥미있는 이야기다.
  성현과 능한 자와의 사이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성현은 스스로가
직접 체험해 얻는 인생에 대해 말하지만, 능한 자는 성현의 말에 대하여 말하며,
어리석은 자는 능란 자의 말을 서로 논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궤변학자
가운데는 말을 주고 받는 놀이 그 자체를 흘겨워한 순전한 담론가가 있었다. 지식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철학은 말에 대한 사랑이 되고, 궤변파적인 경향이 커져감에
따라 철학과 인생은 점점 더 멀리 동떨어지고 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철학자는
점점 더 많은 말을 쓰게 되고, 더욱 더 긴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인생을 풍자하는
경구는 문장으로 바뀌고, 문장은 논증으로, 논증은 논문으로, 논문은 평석으로,
평석은 철학적인 연구로 자리를 양보하게 되고, 게다가 사용하는 말을 정의하고
분류하기 위해 더욱 더 많은 말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과잉은 어디까지 가도 끝날
줄을 모른다. 드디어는 생활에 직접 친근감 있는 감정이나 각식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속인들이 (도대체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하고
역습을 할 권리를 갖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의 사상사를 통하여 괴테나 사무엘 존슨이나 에머슨이나 윌리엄
제임즈 같은 인생 그 자체를 직접 체험한 소수의 독립된 사상가는 저 담론가가
말하는 투의 잠꼬대를 배척하고 완강히 분류적인 정신에 계속 반대했다. 아마도
그들이야말로 인생의 지식이 되는 철학의 참다운 의의를 유지해 준 현명한
철학자였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에는 논의를 버리고 경구로 돌아갔다. 경구로 말하는
능력을 잃었을 때는 단문을 썼다. 단문으로 명백하게 나타내지 못할 때는 논의를
시작했다. 논의를 해도 진의를 다할 수 없을 경우에는 비로소 논문을 쓰기 위해 붓을
들었다.
  인간이 말을 사랑하는 일은 무지로 빠지는 제1보며 정의를 사랑하는 일은 제2보가
된다. 분석이 세밀해지면 정의는 더욱 더 많아지고 더욱 더 불가능한 논리적인
완성을 보게 되지만, 이와 같은 노력은 무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말은 인간의 사상의 재료이므로 정의를 내리려고 하는 노력은 매우 갸륵한
마음가짐이기는 하다. 소크라테스는 유럽의 정의광의 원조였다. 다만 위험한 것은
정의를 내린 말의 의의를 안 다음 그 정의에 사용된 말에 또 정의를 내려야 하게
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에는 인생 그 자체를 정의하고 또는 표현하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을 정의하는 다른 종류의 말을 갖는 것이 되는 셈이어서, 결국은 그
편이 철학자들의 주요한 관념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바쁜 말과 한가한 말, 일상
생활에 쓰이는 말과 철학자의 연구실에서 밖에는 쓰이지 않는 말과의 사이에는
분명히 구별이 있으며, 소크라테스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정의와 현대의 교수들의
정의 사이에도 차별이 있다. 인생을 가장 뼈저리게 느꼈었던 셰익스피어는 일체
정의를 내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말에는
다른 작가에서는 볼 수 없는 (실체)가 갖추어져 있다. 그의 어법에는 오늘날의
작가에게는 흔히 볼 수 없는 인간적인 비극감과 장엄감이 불어 넣어져 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에게 어떤 특수한 여성관을 실토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말을 특정한
기능에 고정시켜 놓을 수는 없다. 대개 정의라는 것은 인간의 사상을 숨막히게 하고
인간 그 자체의 특질인 찬란한 공상적인 색채를 말살시키기 쉬운 것이다. 대체로
정의란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말이 아무래도 표현 과정에 있는 사상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체계를
사랑하는 것은 인생의 예민한 지각에 한층 더 치명적인 장해가 된다. 체계라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팔뜨기에 지나지 않는다. 체계가 논리적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사팔뜨기는 더 심해진다. 인간은 가끔 진리를 인식하면서도 오로지 그 한쪽만을
보고, 그것을 한 개의 완전한 논리적 체계로 발전시키고 승격시키려고 하는
것이지만, 철학이 점점 더 인생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운명에 놓여 있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말하는 것에 의하여 진리를 해치고,
진리를 실증하려고 하는 사람은 실증하려고 하는 것에 의해 진리를 손상하고 또
비뚤어지게 한다. 진리에 레테르를 붙이고 유파의 이름을 쓰는 사람은 진리를
죽이고, 스스로 신봉자라고 일컫는 사람은 진리를 땅 속에 묻어 버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진리라도 일단 체계가 된 것은 세 번이나 죽여서 묻힌 진리이다.
그를 장사지낼 때 거기에 모인 합장자 일동이 부르는 만가는 (우리는 모두 옳고
그대는 모두 잘못되었느니라) 하는 글귀이다. 어떤 진리를 장사지내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장사지낸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이렇듯이 옹호하는 자의 수중에서 계속 괴로와하며, 예나 이제나 철학의 온갖 유파는
(우리는 모두 옳고 그대는 모두 잘못되었느니라) 한 점을 증명하기에 분주하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그들이 가장 자랑으로 삼는 근본성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일정한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큰 논저를 쓰지만, 결국은 진리를 터무니 없는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들이야말로 진실에 대한 가장 나쁜 모독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서양의 사상가들에게는 이와 마찬가지로 사고의 질환을 인정할 수
있다. 추상적이 되면 될수록 증상은 더욱 더 악화되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논리의 결과로서 비인간적인 진리가 나타난다. 오늘날의
철학은 인생 그 자체와는 더욱 더 인연이 먼 것이 되고, 인생의 의의와 생활의
지식을 가르치려고 하는 의도는 거의 포기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철학은 우리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점으로 하는 인생에 대한 친밀감 또는 생활의 지각을 잃고 만
것이다. 읠리엄 제임즈가 스스로 (경험의 요소)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에 대한 이러한
친근감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앞으로 윌리엄 제임즈의 철학과 논리는 현대의
서양적인 사고법에 더욱 더 파괴적인 힘을 미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서양 철학을
인간적인 것으로 하려고 한다면 우선 서양 논리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만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논리정연하게 하려는 것보다 더욱 정열적으로 현실과
접촉하고, 인생과 접촉하여 특히 인간성과 접촉하려는 시고 방식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핝다)라는 유명한 데카르트의
발견 속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사고의 질병을 없애고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는 그대로 충분하다) 이렇게 말하는 휘트먼의 보다 인간적이며 현명한
생각으로 옮겨져야 한다. 인생, 다시 말해서 실체는 논리 앞에 무릎 꿇고 자기의
존재와 실재를 증명해 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윌리엄 제임즈는 무의식중에 중국인이 생각하는 식의 사고 형식을 싫증하고
옹호하는 데 온 생애를 바쳤다. 그러나 윌리엄 제임즈가 만약 중국인이었다면,
말하는 바 학설 연구에 그렇듯 많은 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겨우 3백 낱말이나
5백 낱말의 수필에, 또는 한가로운 마음으로 쓴 일기 형식의 수기에,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다고 쓰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말을 많이 쓰면 오해를 받을 근심도
많아지는 것이니까, 그는 그 말 자체에 대하여 겁장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윌리엄 제임즈에게는 민감한 인생에 대한 지식과 인간적인 경험의 다양성과
기계론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반항이 있었다. 그는 또 사상을 끊임없이 유동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나야말로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본원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혼자만의 체계 속에 집어 넣어 버리려는 인간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틀림없는 하나의 중국인이었다. 그는 또 예술가의
지각적인 현실감은 개념적인 현실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중국인이었던 것이다. 진실한 철학자라는 것은 감수성을 가장 높은 촛점으로 하여,
생명의 흐름을 지켜보고 신기하고 이상한 역설이나 모순, 원칙에 맞지 않는 알 수
없는 예외에 부딪치면 영원히 놀라움을 느끼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체계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온갖 서양 철학의 학파에 대하여
파괴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그가 말했듯이 우주의 일원관과 다원관의 차이는
철학사상 가장 함축성 있는 점이다. 그는 철학으로 하여금 화려한 공중 누각을 잊게
하였으며 인생 그 자체로 되돌아갈 수 있게 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는 잠깐 동안이라도 인간에서 떨어져선 안된다.
떨어져야 할 것은 도가 아니니라) 공자는 또 제임즈의 입에서라도 나올 듯한 기지에
가득찬 짧은 말로 (도가 인간을 크게 만드는 것이며, 인간이 도를 크게 만드는
것이니라)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삼단 논법이나 의론이 아니라 실재이다. 우주는
말하지 않고 오직 살아 있는 것이다. 우주는 논의하지 않는다. 오직 존재할
따름이다. 영국의 어느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저술가의 말을 빌면, (이성은 신비의
한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훌륭하기 그지없는 의식의 등 뒤에서 이성과 회의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다. 논리적인 필연은 썩었다. 그러나 회의와 희망은 사이가 좋다.
우주에는 야성이 있다. 매의 날개처럼 날짐승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다. 대자연 이 모든 것이 기적이다)
  나는 생각한다. 서양식인 논리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얼마간의 겸손이다. 그들을
구제하는 임무는 오리지 헤겔식의 자만을 고치는 사람에게 있다.



    3. 정리를 알라

  논리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에 상식이 있다. 상식이라고 하기보다는 정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정리를 중히 여긴다는 것은 인간 문화에 있어 가장
건전한 최고의 이상이어서, 정리를 아는 사람은 으뜸가는 문화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다만 정리를 알고 있는 믿음직한 인간이 되도록
마음쓸 뿐이다. 실제로 나는 세계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문제이건 국가적인 문제이건
이 정신을 몸소 터득하는 시대가 올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정리를 아는 국민은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정리를 아는 부부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딸의 신랑감을
고르려면 표준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상대가 정리를 아는 사람인가 어떤가 하는
문제뿐이다.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 완전한 부부라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
다만 정리를 따져서 다투고 정리로써 화해하는 정리 있는 부부를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정리 있는 인간 세계야말로 평화와 행복을 즐길 수 있다. 정리 시대라고 할
만한 시대가 언제고 온다면 그야말로 평화로운 시대이며 정리 있는 정신이 널리
퍼지는 시대일 것이다.
  인생의 정리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은 중국이 세계에 제공해야만 할 최선의 것이다.
중국의 군벌들이 50년이나 앞날의 세금을 국민으로부터 강제로 걷어가는 것이 정리를
아는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이 정신이야말로 중국 문명의
정수이며, 그 최선의 측면이라고 나는 말한다. 나의 이와 같은 발견은 우연히 오랫
동안 중국에 살았던 두 미국인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 중의 한 사람으로 30년이나
중국에 머물렀던 미국인은 중국의 온갖 사회 생활은 (강리(도리를 말한다))라는 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중국인이 싸움에서 마지막 결판을 내는 말은, (이봐,
그게 도리에 맞는다는 말이냐!) 하는 말이다. 누구나 곧잘 하는 가장 통렬한 선어는
(부강리)한 놈이라는 것, 즉 (이치에 맞는 말을 하지 않는 놈이다)라는 한 마디다.
자기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인정하게 되면 싸움은 이미 진 것이다.
  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정리를 아는 사고 방법이라는 뜻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언제나 자기를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적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잘못되어 있다. 그런데 정리를 아는 인간은 때에 따라서는 자기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을 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올바른 것이다. 편지의 추신에는 이 두
가지의 대조가 나타나는 일이 있다. 나는 언제나 친구가 보내 주는 편지의 추신을
사랑하는데, 본문과 완전히 모순된 말을 쓴 추신은 특히 재미있다. 추신 가운데는
본문을 쓴 뒤에 가슴에 손을 대고 여러 가지 세상에서의 정리에 비춰 보아서 생각한
일이나 망설임이나 기지나 상식이 한데 섞여 있다. 어떤 명제를 긴 논의로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쓴 뒤에 갑자기 어떤 직각에 부딪쳐서 번갯불처럼 상식이
비쳤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의론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리고 자기가 잘못 되었음을
인정한다. 이런 것이 온정 있는 사상가인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사고 방법이야말로
내가 인간미 있는 사고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편지의 본문에는 논리적인 인간으로서 말하고, 그 추신에서는 참다운 인간적
정신과 정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는 편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어떤 아버지가 여자 대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졸라대는 딸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치자.
  그는 붓을 달려 어째서 딸을 대학에 보낼 수 없는가 하는 이유는 첫째, 둘째,
세째로 조항을 들어 말하고 누가 보아도 그럴 듯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갖가지의 논거를 적어 놓는다. 이론을 정연하게 늘어놓아 반문할 여지라곤 전혀
없다. 다시 말해서 현재 이미 오빠 셋을 대학에 보내고 있으며, 어머니가 병이
낫으니 누구든지 집에서 시중을 들어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느니, 어쩌느니 여러
가지를 적어 넣었다. 그런데, 편지 맨 마지막에 이름을 쓰고 나서 간단한 글귀를 한
줄 적어 넣었다. (그래, 괜찮겠지, 주리야, 올 가을에 입학할 생각으로 준비를 해
두어라. 어떻게 되겠지)
  또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이혼할 뜻을 적어 보내려고 하는 남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첫째, 그녀는 남편에 대하여
성실성을  잃고 있었다. 둘째, 남편이 집에 들어 왔을 때 따뜻한 음식을 마련해 준
일이 없다는 등등, 모두 당연한 그럴 만한 이유이며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점도 있다.
만약 변호사를 부탁한다면 논리는 더 한층 완전해지며, 사정은 한층 더 정정당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편지를 다 써 놓고 보니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글씨로 갈겨 쓰기를 (제기랄, 사랑하는 소휘여! 나야말로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구려. 나는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겠소) 하였던 것이다.
  이 양쪽 편지의 본문에 있는 논의는 매우 완전하며 옳다.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추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참다운 인간적인 정신...
인간적인 아버지와 인간적인 남편이다. 조금만 정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쓸데없이
까다로운 의논 따위에 골치를 앓지 않고 서로 반대되는 충동과 감정과 욕망이 변해
마지않는 바다 가운데서 건전한 키를 잡도록 애써야 할 것이며, 그것이 인간적인
정신의 의무인 것이다. 우리가 진실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 인간
세계에 잇어서의 진리의 모습이다. 공박할 여지가 없는 의론에는 인정이라는 것이
맞서며, 정당한 것일지라도 애정 앞에서는 약한 법이다. 그러니까 가장 확신을 가질
수 있는데, 아무래도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경우가 가끔 있다. 법률조차도 그가
주장하는 절대적인 정의에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있다. 법률은 가끔 조문의 (조리
해석)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경우가 있다는 것, 최고 행정장관에게 사면권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면 뚜렷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떤 어머니의 아들에 대해
이 사면권을 매우 효과 있게 행사했다.
  이렇듯이 정리를 중히 여기는 정신은 온갖 사고 방법을 인간적인 것으로 하며,
우리들 자신이 정확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관념을
원숙하게 하며, 행위에 있어 모가 난 곳을 둥글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 대립되는
것은 사상과 행위... 개인 생활, 국가 생활, 결혼, 종교, 정치에 있어서의 온갖
종류의 광신과 독단이다. 나는 감히 주장하는 바인데 중국에서는 지적인 광신과
독단논이 다른 여러 나라보다 적다. 중국의 폭도는 매우 흥분하기 쉬운 면도 있으나
정리를 분별하는 정신은, 중국의 전제 군주제, 종교, 또 이른바 (부인의 억압)을
매우 인간미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런 일들은 모두 얼마간 조건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어떻든지 틀림은 없다.
  정리라는 것이 중국의 황제, 신, 남편을 단순한 인간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중국의 역사가는, 황제는 하늘의 명령에 의해 통치하는 것이며, 잘못 다스렸을
경우에는 (하늘의 명령)을 잃는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황제가 나쁜 정사를 할
경우에는 우리는 사정없이 목을 베고 만다. 지난날 수없이 망하고 흥한 그 많은
왕조의 왕이나 황제의 목을 너무나 많이 베었으므로 그들이 (신성)하다거나,
반신적이라는 일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성현은 신으로 모셔지지 않고 오직
언제나 지식의 스승으로서 우러를 뿐이다. 또 중국의 신은 완전무결한 전형이 아니라
중국의 관리와 마찬가지로 돈으로 어떻게라도 될 수 있는 썩어 빠진 사람들이어서
아첨도 통하는가 하면 뇌물도 통하는 사람들이다. 중국에서는 정리를 떠난 사람은 곧
부친런칭(인간성으로부터 멀리 동떨어진 것)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만다. 너무나
성인인 체하며 완전무결한 인간은 마음 속에 이상이 있다고 여기고 반역자처럼
다루어지는 일조차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의 유럽을 살펴본다면, 정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정리는 커녕 이성조차 통하지 않고, 오히려 광신적인 정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유럽의 실정을 보면 누구나 신경과민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다만 국가의 목적인 충돌이 있다든다, 국경 문제나 식민지를
요구하는 마찰이 있다든가, 그런 일만이 원인은 아니다. 그런 일들만이라면 이성으로
판단하여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그
근원이 더 깊고, 오히려 유럽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의 정신상태에서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것으로 비유해서 말한다면 낯선 도시에서 택시를 탔으나 갑자기
운전수를 믿을 수 없게 되어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과 같다. 운전수가
지리에 어둡고 정확한 노선으로 손님을 목적지까지 모시지 못한다면, 다소 이야기를
납득할 수 있지만, 운전수가 무언가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좌석에 앉아
있는 손님의 귀에 들려, 이 사람이 과연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인가 하는 의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면 그야말로 곤한한 문제다. 더우기 정신이 이상한 운전수가 권총을
가지고 있고, 손님은 차에서 내릴 기회가 없다면 신경과민은 단연 극도로 심해진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이런 컬리커추어는 인간 정신의 참다운 모습은 아니다. 온갖
나쁜 병의 물결에 휩쓸리듯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불태워 버리고 마는 단순한 정신
착란, 일시적인 발광의 단계에 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믿을 만한 이유가 나에게는
있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력에 결국은 신뢰의 뜻을 나타낸다. 그것은 원래 한정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무모한 유럽의 운전수의 지능보다는 한없이 높은 그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평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앞으로 머지않아 정리에 입각하여 사물을 생각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을 만한 이유가 우리에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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