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병의 증세를 찾아내고 그 병의 성격과
발생 경과 등을 알아내는 것이 일반적인 대화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이것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며, 때론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증세를 진단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병을 이해하는 데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어떤 질환이든지 -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 아무 이유없이 그냥 생기지는 않는다. 병이란 환자가 그것을
미처 막아내지 못했지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병의 증세는 패배의
부산물이다.
따라서 환자와 대화를 할 때는 표면상의 증세보다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그 환자 전체를 파악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즉 그의 장점이나 단점,
인생을 살아 온 경험 등 광범위한 측면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환자의
병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알아야 할 것이 많다. 발병 직전에 환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또는 어떤 병균이 침입했나 등의 최근의 일을 알아야 함은
물론이고, 그가 예방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으며, 발병 초기에 어떤
대책을 썼고, 나아가 어떤 시점에서 무슨 이유로 그 방어 기제가
무너졌는지 등도 모두 알아야 한다. 이런 과정중에서 발병의 직접적인
원인을 알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환자를 대하면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이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일은
어디까지나 응급 처치에 불과할뿐 근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입원 후 며칠째 원인을 알 수 없던 중년부인의 병명이 드디어 심한
영양실조로 판명되었다. 적절한 식이요법과 약물요법으로 치료는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무엇 때문에 이 환자가 그토록 오랫동안 적절한 식사를 할 수
없었던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을 모르고서는 이 환자의 질환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근본적인 완치를 기대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비록 지금의 증세가 혼전되어 퇴원하더라도, 환자는 또
적절한 식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후면 병은 반드시 재발 하게 될
것이다.
근본적인 대책없이 증세 치료만으로 퇴원했다가 병이 재발, 또는
악화되는 경우는 위의 경우에서 뿐만이 아니고, 병원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자살기도 환자도 흔한 예 중의 하나이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사람,
동맥을 끊는 사람, 수면제를 먹는 사람 등 자살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된다. 응급실로 실려올 때, 거의 사경을 헤매는 환자도 있고 멀쩡한
환자도 있다. 그러나 의사는 가능한 방법을 다해 상처받은 생명을 건지는
게 급선무다. 응급실에서는 최신 장비나 기술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대부분의 경우 치명적인 환자도 기적적으로 소생하곤 한다.
자, 여기까지는 잘 되어 왔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지금부터다. 즉, 응급
처치로 생명을 건졌다고 판단되는 순간부터 환자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가는 데 문제가 있다. 생리적 기능만 회복되면 의사도 보호자도,
심지어 환자 자신까지도 마치 모든 면에서 완치된 것처럼 생각하여 퇴원을
서두른다. 여기에 중대한 과오가 있다. 자살 행위라는 것은 근본적인
불안정 상태의 한 증세이며, 신호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지만, 누구나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살기도로 인한 상처 자체를 병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이것만 나으면
완쾌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살 행위가 신체적 질환의 한 증세에 불과하다고 오해를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자살기도 그 자체가 드러나 보이는 병이나 상처의 회복
후에 일시적이나마 완전히 치료가 된 듯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해 행위는 단순히 우발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자해 행위란 고의적인
것이며, 죄의식에서 비롯된, 자신에 대한 합리화된 공격이다 자신에 대한
공격은 형벌로 간주되고, 일단 처벌이 가해지면 환자의 죄의식이 그만큼
약해진다. 따라서, 그의 일시적인 우울증이나 자해하고자 하는 충동도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증세가 호전되었다고 낙관하는 것은 금물이다.
중요한 것은 환자를 자살기도의 상황으로 물고 산 근본 원인을 찾아
환자로 하여금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하게 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작업이다. 치료가 여기까지 이르지 못하면 완전한
치료라고 볼 수 없으며, 그렇게 서둘러 한 응급 처치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된다.
이러한 예를 모두 얘기하려면 끝이 없다. 때로는 심각하고, 응급한
문제들도 그 원인은 전혀 엉뚱한 곳에, 그리고 아주 하찮은 일에서
출발하는 수가 있다. 이 보이지 않는 문제가 해결되지 안는 한, 휴화산처럼
언젠가는 다시 폭발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병 뒤에 숨은 병, 이것이 진짜
병이다. 그러나 자유롭고 기술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 환자의 병력을 조사하면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언제 무슨 병을
앓았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질환들이 환자의 삶과 성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
환자가 그때그때 어떻게 대처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이용했는가
하는 것까지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한 가지 병은 다음의
새로운 병을 유발하는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병이
연발하면 환자의 방어 기제는 그만큼 약화된다. 반대로, 어떤 환자는 병을
앓은 후에 오히려 다른 병에 대한 면역이 생겨 더 강해지기도 하며, 또
의지력을 길러 앞으로 닥칠 역경을 잘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방어력이
생시시도 한다. 이럴 수만 있다면 병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녀가 여섯 명이나 있고,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인 어느 부인은
오랫동안 요통에 시달려 왔는데, 검사 결과 자궁육종으로 판명되어 수술을
해야만 했다. 부인의 동의 아래 수술은 비교적 간단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지속적인 요통과 수술 부위의
통증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그런데 부인은 자신의 병 때문에 특별히
고민하는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회복이 늦어지는 것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의사는 그녀의 힘든 가정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회복이 늦어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부인에게 병은 힘든 현실을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것이었다. 부인의 가정 환경이 원만했다면
보다 쉽게 회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의사가 환자의 가정 환경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환자의 회복이
지연되는 이유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환자가 피부염이나, 위궤양, 알레르기와 같은 만성 질환들로 오랫동안
시달리다 보면, 이러한 것들은 차차 환자의 생활 전반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런 환자를 치료할 때는, 그 병이 환자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또 어떤 구실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치료는커녕 오히려 그 병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병을 치료하여 증세만을 없애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지해온 그나마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일 수도 있고,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평형이 완전히 깨져서 본래의 병보다 더욱 심각한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한 예로, 오랫동안 위궤양을 앓았던 환자의 경우를 보자.
이 환자는 위 절제수술을 받아 극적으로 회복되었다. 10년만에 처음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환자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치의가 생각이 좀 더 깊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난 10년 동안 그는 위장병과 함께
살아왔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 생활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위장병을 핑계로 해결하려 했고, 대개의 경우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기분이
나쁘거나 사람들과 만나고 싶지 않거나 일과 관련된 모임에 가고 싶지
않을 때, 혹은 괜히 불안하거나 화가 났을 때, 그는 그 이유를 따져보기도
전에 모든 것을 위장병 탓으로 돌려 버렸다. 이러한 일이 수년간 계속되어
왔고 위장병은 그에게 훌륭한 지팡이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수술이
성공하여 모든 증세가 깨끗이 사라져 버리자, 결과적으로 그는 무방비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성공적인 수술로 인해 위장의 상태는 완전히
좋아졌다. 따라서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가 싫건좋건간에 이젠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너무나 신경이 많이 쓰이기 때문에 그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전에는 피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핑계가 없어졌다. 그렇게 가기 싫던 처가에도
꼼짝없이 가야 했다. 위장병이라는 오랜 친구를 잃었으니 이젠 누구도
그를 이러한 곤경에서 구해 줄 수 없었고 결국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다.
만약 의사가 이 환자의 성격, 생활, 그리고 위장병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만 했더라도, 그리고 수술 전이나 후에 이를 환자에게 이해시킬 수만
있었어도 자살까지 시도하는 불행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환자와 대화를 하는 또 하나의 목적은 그 환자의 질병 패턴을 이해하여
이후에 나타날 증세를 예측하고, 가능하면 그 증세를 치료하는 것이다. 즉,
질병을 초래하는 환경적 요소를 파악하면 그 병의 재발을 막을 수도 있다.
열두 살의 한 소년이 캠프에 간 첫날 기관지염을 앓게 되었다. 결국
이틀 동안 누워 있어야만 했고, 때문에 캠프 기간 내내 재미없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병력을 살펴보니 전에도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고
거기엔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소년의 경우, 캠프에
가야만 한다는 불안감이 신체적인 저항력을 약화시킴에 따라 저항 기제를
손상시켜 기관지염이 발병하게 된 것으로 보였다. 캠프가 시작되기 전에
소년은 캠프에 대해서 불안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흥분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캠프 가기 전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흥분에 들뜨기 마련이다. 결국, 이 소년은 흥분이나 불안감을
억제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고 발병하게
된 것이다. 불안감을 표현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불안감을 숨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소년의 경우, 이러한 결론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소년이 다음
캠프를 계획할 때에도 무관심한 척 하자, 그 나이 또래라면 그런 일에
대해서 흥분하고 걱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소년은
처음에는 이를 부인하더니, 이러한 가정들이 나쁘지 않다고 되풀이하여
지적해 주자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까지 소년의 주요 관심은 오로지 캠프에 쏠렸다. 잠을 설치고 자세한
계획을 세우는 한편, 계속 불안해하였다. 그러나 일단 캠프가 시작되자 잘
적응하여 건강하고 즐겁게 지냈다. 이 소년은 학교 선생님에게 다음에는
캠프를 떠나기 전에 함께 계획을 세우자고 부탁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의사 선생님이, 제가 흥분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병에 걸릴
거라고 했어요.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화를 내시거든요. 그러니까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하게 해 주세요"
따라서 의사가 환자의 생활과 명백하게 관련있는 문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환자의 생활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모든 사실들을 중요하게 여겨야만 한다. 하나의 사실을 다른
사실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 볼 때에만 그 진정한 의미가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넓은 시야로 환자를 보고 심지어 환자가 잊고 있는 것이나 사소한
불평등에도 관심을 갖고 다른 사실과 연관시켜 생각해야만 비로소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대화에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술적인 요령을 습득해야만 한다. 어떤 이는 쉽게 배우고, 또
어떤 이는 어렵다 못해 아주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의대생에게 실험이나
청진술 등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와의 대화 요령'을 가르치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들이 대화 요령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환자와의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위험하다.
진정한 대화는 누구나 쉽게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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