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의 대화에서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한자는
불안하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환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불안하다고
느끼는데, 그 불안이란 우리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마음의 신호이다. 위험
신호라는 의미에서 보면, 불안은 통증과도 같이 없어서는 안 되는
아이러니컬한 것이다. 무슨 어려운 문제가 시작되거나 또는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면, 우리 마음은 곧 여러 가지 형태의 불안에 휩싸인다. 그래서
불안의 정도나 그 형태에 따라 우리 몸에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불안은 신체적
질환에서도 비롯되고, 스트레스나 갈등 등의 실리적 요인, 또는 환경으로
인한 마찰이나 위험에서도 생긴다. 이러한 경고 신호 때문에, 다가올
위험에 대비해 그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 불안의
기능이다.
이렇게 보면, 불안의 기능은 아주 긍정적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현실적으로 불안의 기능은 그리 완벽하지 못하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을 제거하는 데 그 불안이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을 때 특히
그러하다. 위암 진단을 받은 환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암은 아직까지도 환치의 방법을 찾지 못한 의학적 숙제이다. 화재경보는
끌 수 있지만, 이런 암 때문에 생기는 불안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병도 불안도 달리 처리할 수 없는 이런 경우에, 우리는 차선책을 택한다.
두 가지 모두를 정신적으로 제거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즉, 아예 생각을
않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또는 병으로부터 불안을 분리 시켜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은,
해결하기 쉬운 문제로 바꿔 처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치유될 수 없는
병을 걱정하는 대신, 깨진 창문, 녹슨 차, 재정 문제, 심지어 어지러운 세계
정세 등을 걱정하면서 병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신체적 병증을 이와 같이 왜곡, 부인하거나 다른 문제로 전이시키고
나면 마음은 훨씬 편해진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 병 증세는 아주 달라져서
의사가 전혀 엉뚱한 오진을 할 수도 있게 된다. 위암 환자가 불안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위장 증세는 이야기하지 않고 잠이 안 와서 병원에 왔다고
이야기한다면, 진단이 어떻게 될 것인가? 불안한 환자를 진찰할 때는
불안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병의 증세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불안하지 않다고 우기는 환자일수록 사실은 더 불안할
수도 있다. 환자의 불안은 자신의 병이나 또는 죽음에 대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다.
의사가 실력이 있는지, 자기를 좋아하고 치료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인지,
또는 자기가 의사를 좋아할 것인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뒤범벅되어
불안해한다.
불안은 사실 그가 현재 앓고 있는 병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불안은 그
개인의 오랜 역사를 토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크고 작은 병을 앓을 때마다
거기에 대처하는 그 나름대로의 특수한 방법이 형성되어 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타박상, 벤 상처, 중병, 감기, 두통, 복통과 심지어 심한
발열까지도 무시해 버린 채 일을 계속한다. 반면에 가볍게 손가락을
베거나, 콧물이 조금 나거나, 머리가 조금만 아파도 고통스러워하며 자리에
눕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환자는 작은 불행에도 큰 일이나 난 듯 펄펄
뛰다가, 막상 중병이 생기면 오히려 담담해지기도 한다. 위장천공으로 인해
복막염이 되었는데도 자기는 신경성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안해서 뛰는 심장을 불치의 심장병으로 고집하는 환자도 있다. 속으로
불안해하면서 겉으로는 담담해 하는 환자도 있고, 너무 불안해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환자도 있다. 그러므로 환자 개인의 특징이나 개성을
제대로 모르면서 그 증세의 정도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은 아주 힘들다.
환자마다의 불안의 역사를 이해만 한다면, 별것도 아닌 증세를 가지고
마치 죽을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두려움에 떠는 환자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방울의 코피가 흐른다고 입원까지 하며 죽는다고
아우성치는 환자를 꼭 엄살이라고만 해야 할 것인가? 그에게는 어릴 적
코뼈가 부러져 수술까지 해야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의 지나친 불안에 동정이 갈 것이다. 몇 방울의 코피가 몇 년간
잠잠했던 불안에 다시 불을 지른 셈이다. 혹은 까맣게 잊었던 어릴 적
기억을 되 살렸는지도 모른다. 환자가 어이없는 반응을 보일 때는 그의
과거의 경험을 자세히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환자가
이유 없이 불안해하는 까닭은 오래 전 일의 영향 때문이며, 과거에 비슷한
상황에서 보였던 반응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불안한 환자와의 대화에서 또 한 가지 큰 문제는 환자의 불안이
의사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환자가 불안해하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일단 혼자가 불안해하면,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한다. 환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지도 않고, 불안하다는 말조차 못하게 가로막으면서 진정시키고
위로하려고만 든다. 하지만 불안한 환자더러 불안해 보인다고 해서 나쁠
이유가 있단 말인가? 긴장하고 겁에 질려 말문마저 막힌 환자에게, 보이는
그대로를 이야기해 보라. 그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사실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상태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복잡한 외과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위험한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가
있었는데, 의사들은 그녀를 안심시키느라 친절하고 진지했다. 전혀 걱정할
것이 없으며, 주사만 한 대 맞고 푹 자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환자는 너무 불안해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다른 의사들도 그것을 알고 되풀이하여 두려워할 것이 없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그때 과장이 나타났다. 젊은 의사들을 제치고 환자에게
다가가서 악수를 청하더니, "당신 너무 겁을 먹고 있군 그래" 하고
거침없이 말했다. 이 말을 듣고, 환자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그
의사에게 매달렸다. 그는 환자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의 침묵은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말보다 더 큰 효과가 있었다.
잠시 후 "자,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하고 웃으며, 그는 병실을 떠났다.
이제 환자는 안정을 찾은 듯했다. 처음으로 의사의 지시를 이해하고
따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외과의사로서는 예외적으로 친절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친절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 과장은
친절한 사람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비록 감동을 주지는 못했지만, 친절하고
진지했던 것은 젊은 의사들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친절
이상의 의미, 그것은 과학적인 합리성이다. 과장은 그 환자가 걷잡을 수
없어 표현조차 할 수 없는 불안 때문에 듣지도 보지도 말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때의 최선의 처방은 친절만이 아니라, 환자의 불안을
인정하고 그것을 표현하게 하는 것이었다.
환자의 불안은 우선 의사가 인정해 주어야 한다. 환자는 자기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사가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한결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로 하여금 자기 불안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불안이 발산될 수 있다. 표현하지 못한 불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때로는 신기한 효과를 가져다준다. 표현되지 않는 이상
불안이 몰고 올 위험은 무한하다. 그러나 이것이 말로 표현되면 불안의
정체가 분명해지고, 위험의 한계가 명확해진다. 그렇게 되면 불안은 의사나
환자가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따라서 그 위험은 대폭 줄어든다.
물론 이러한 것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일반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환자의 불안을 지적하여 이야기하게 하라. 때로는 그 불안의 원인이
어이없는 것일 수도 있고, 엉뚱한 환상에서 출발한 것일 수도 있다. 몸이
허약하면 마음도 약해져서, 꼭 어린이들의 공상 같은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 자기 병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시정하려고 너무 성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썩은
음식을 먹었을 땐 그것이 다 배설될 때까지 기다린 후 신선한 음식을
먹이는 것이 순리요, 순서다.
이를 위하여 의사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즉, 모든 환자는 불안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불안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의사에게는 필요하다. 불안은 우선 그 말 자체부터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다. 초조, 긴장, 걱정, 공포, 현기증 외에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가 없다' '잠이 오지 않는다' '먹을 수가 없다'
'마음을 정할 수가 없다' '제 정신이 아니다'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환자들이 이러한 말을 하면, 의사들은 환자의 불안을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안은 이런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한다.
불안은 물론 신체적인 증세로도 나타난다. 이런 경우, 불안보다 신체적
증세를 다루는 것을 손쉽게 생각하는 의사는 신체적 증세에만 관심을
국한시키기도 한다. "언제나처럼 또 왼쪽 머리가 ,,,,,,", "이렇게 숨이
막혀오면 누워야 한다", "저녁만 먹으면 고개를 들 수 없다", "갑자기
설사를 한다", "언제나처럼 거기가 아프다", "소화가 안 된다", "어지럽다",
"그것만 보면 메스꺼워진다", "한 시간에도 몇번씩 소변을 본다" 등의
증세를 호소할 때는 그 밑바닥에 불안이 깔려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대개의 환자들은 자신의 증세를, 어떤 특별한 불안감을 조장하는 상황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증세는 자기에게만 일어나는
독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이들은 "책만 들면 두통이
일어난다", "그곳에만 가면 배가 아프다", "받아쓰기를 하거나 혹은 물건을
살 때마다 숨이 차다", "교회만 가면 기침이 난다" 등 이러한 증세의
원인을 잘 알고 있다고 자기 나름의 신통한 처방을 갖고 있기도 하며,
대개 일정한 경로를 밟아 호전된다. 이런 경우에도 신체적인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증세의 바탕에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아무리 검사를 해도 옳은
진단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증세들을 단순히 신경성이라고 처리해 버리는 것도
잘못되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환자들은 신경성이라는 말에 굉장히
불쾌하며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거나, 심하면 '내가 돌았단 말이오?' 하고
화를 내며 진찰실을 나가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신체적 증세는 불안의 표현이며, 이 불안을 일으키게 하는
특수한 원인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에 대한
신체적 반응을 의사에게 털어놓는 것은 곧 화자가 그러한 상황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는 것을 나름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내와
화투를 칠 때마다 두통이 생긴다는 남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
좋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부인과 화투놀이를 하는 것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군요. 그래서 두통이 오는 것 같은데, 거기에 왜 그리 신경이
쓰이는지를 알아야 두통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부인과의 화투놀이 - 불안 - 두통의 심리적 역학 관계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 낫다. 단순히 신경성 두통이리거나 긴장성 두통, 혹은 불안
때문에 생기는 두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환자에게 혼란만 줄 뿐 별
도움이 안 된다. 사실 이런 증세는 불안 그 자체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다.
불안을 대신해서 나타나는 증세이고, 현실적이고 정체를 밝힐 수 있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긴장이나 불안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고 그 현실적인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불안은 흔히 신체적 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손톱을 물어뜯거나, 손을
비비거나, 발을 떨거나, 머리를 긁적거리는 등의 신체적 행위로부터
과식이나 과음, 담배를 연달아 피운다거나, 또는 필요 없는 물건들을 많이
사는 사회적 행동에 이르기까지, 불안은 여러 가지 행위로 위장된다. 이런
행위를 하는 환자들은 자신이 스스로도 불안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 이런 불안을 이해시키고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불안하게 만드는 갈등의 요인을 찾아 낼 수 있어야 한다.
불안은 또한 다른 감정을 숨기기도 한다. 이유없이 짜증을 내거나,
공격적이고, 욕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화를 돋구는 것은
무엇인가 그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환자에
따라서는 아주 솔직히 자기의 볼래 감정을 털어놓기도 한다. 시험 때만
되면 괜히 놀고 있는 동생이 미워져 싸우게 된다거나, 남편의 귀가 시간이
늦기만 하면 애꿎은 가정부를 들볶고, 또 걱정거리가 생기면 물건을 마구
사들이거나, 돈을 마구 쓰고, 주위 사람과 말다툼을 하고,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아무도 먹지 못할 음식을 만드는 등 주변 사람을 화나게 하는 일을
하는 환자들도 있고, 겁이 나면 갑자기 온몸이 얼어붙어 말은커녕 꼼짝도
못하는 환자도 있다.
위험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은 그 사람의 수동적인 무력감과 능동적인
공격성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의 표현이다. 이런 갈등 이 때로는 사람을
완전히 마비시키기도 한다.
한 젊은 부인이 진찰실에 들어온 순간 나는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웃옷의 단추는 목까지 꼭꼭 채워져 있었고, 모자는 헬멧처럼 푹 눌러 쓴
채였다. 검정테 안경도 눈을 보호하기 위해 쓴 것 같았다. 손에는 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핸드백은 누가 뺏어갈까 봐 꼭 끼고 있었다. 발은 바닥에
꼭 붙이고,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다. 웃음은 물론이고,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묻는 말에만 짧게, 그것도 겨우 대답할 뿐 다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왔느냐는 물음에 "문제가 좀 생겨서,,,,,," 무슨 문제냐고 묻자
"우리 결혼이,,,,,,,," 하고 말할 뿐이었다. 결혼 생활이 어떠냐고 다시 묻자,
그 부인은 "도대체 무엇을 알고 싶냐" 고 반문해 왔다. 그 순간 나는 숨이
꽉 막혀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대답은 외모만큼이나 적개심에 가득
차 있었고, 표정은 냉정했다. 그 부인이나를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 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럴 방에야 차라리
오지나 말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든 빨리 끝나 다시는 오지 말아
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난 내가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내 마음에 이런 싫은 감정이 일어난 것이 이 환자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게 바로 이 환자의 문제요, 이 때문에 나를 찾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여민 환자의 차림새부터가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다가서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용기를 내서 나를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었는지도 모른다.
완전 무장한 병사에게 정면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부인이
불안해하고 있으며, 의사인 내가 가할 수 있는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처를 주는 질문으로는 대화를
현명하게 이끌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태도를 바꿔 "고향이 어디냐?" 고
물었더니, 별 주저 없이 자기 고향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난 내가 그곳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이야기며, 또 거기 사는 아는 사람들 이야기도 했다.
듣고만 있던 환자도 몇 마디 거들기 시작했고, 한참 동안 우리는 그의
고향에 대해 스스럼없이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몇 분 후 그토록
냉정하던 환자의 몸과 마음이 풀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장갑과
안경을 벗고, 단추도 몇 개 더 풀고 나서, 마침내 편한 자세로 앉게 된
것이다.
그때서야 "자!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라고 나를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그래야 될 것 같다며 가볍게 웃었다.
곧바로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시간낭비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환자의 경우, 분명히
시간낭비는 아니었다. 이 환자가 내게 보여준 처음의 행동도 확실한
하나의 사실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다. 10여 분이라는 시간소비는
환자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그러한
시간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환자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런 태도로 이 환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중 하나를 알 수
있었던 때문이다. 즉, 심한 불안에 대처하는 그녀의 독특한 방법뿐만
아니라 자신을 방어하려고만 하는 그 환자의 태도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화나게 하고 짜증스럽게 했는지 알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이걸 모르고선,
누구도 이런 환자를 참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입 좀 열라고 고함을 지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게 바로 중요한 진단적 소견이다 그리고 이 소견은
그녀의 결혼 생활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들 부부간에는 싸움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이 부인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남편이 따질수록 점점 더 얼어붙기만 할뿐이었다. 이것은
방금 전 내게 보여준 반응과 같았을 것이다. 그럴 때 남편은 점점 더 화를
내고, 부인을 때리기도 하고, 가구를 부수거나 집을 뛰쳐나가 버리기도
했다. 남편이 화내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환자와의 만남은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환자가 불안해 할 때
의사를 대하는 태도는 그의 사회 생활이나 가정 생활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환자가 불안해 할 때 의사에게
보여주는 또 하나는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의사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때론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의사 자신의 반응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만
하라고 말리고 싶거나, 지루하거나 답답한 기분이 들 때, 또는 무슨
이야기인지 종잡을 수 없어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때면, 일단 불안한
환자와 대화하고 있다고, 이쯤되면 환자가 하는 말보다 오히려 불안에
대해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시기임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대기실에서 나를 본 순간부터 환자의 끝없는 넋두리는 시작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고, 천천히 하는 법도 없었다. 그의 전생애를
다 들은 듯한 기분에 나는 얼떨떨했다. 되풀이도 하고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곁들이면서 끈질기게, 그러나 제법 유쾌한 어조로 그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그는 일어나면서 마음이 후련해졌다며
고맙다고 했다. 그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했고, 나는 그러라고 했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그의 이야기를 가로막지
않으면 안 외었다. 난 그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아직까지 여기에
온 이유조차 모른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여전히 즐거운 어조로 이렇게 실컷 이야기라도 하고 나니,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그가 기분이 좋아진 이유라면 아마 그것은 자기 불안과 여기에 온 이유를
잘 감출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말에, 그는 껄껄 웃더니
자신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웃음을 그쳤을
때 비로소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흐르는 침묵
속에서 갑자기 자신이 불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시 후, 그는 아주
정색을 하더니 그제서야 자기 문제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왜 진작 말리지 않고 그렇게 시간낭비를 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압력이 너무 강해서, 성급히 막으려 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라도 불안을 이겨낼 수 있다면, 얼마
동안은 그렇게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내가 그의 방어무기를
뺏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을 시킬 수 있을 듯했다.
또한 그 환자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를
지켜보는 것은 치료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즉, 그 불안으로 인해
직장에서 그에게 어떠한 문제가 생길 것인가를 알수 있었다. 직장동료들은
이 환자가 공격적이고, 주위 사람들을 지겹게 만들고, 말이 너무 많다고
했다. 물론 그들은 이 환자가 그렇게 쉴 새 없이 말하는 것이 불안을
감추기 위한 방편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불안을 숨기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의사의 말을 가로막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환자가 계속해서 말을
가로막으면 낭패감이 들기도 하는데, 이럴 때면 환자가 고의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어떤 환자들은 아주 지능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기 때문에, 의사들도 처음얼마 동안은 모른 채 당하기
일쑤다. 말도 많이 하지 않는다. 때로는 의사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다가 의사가 말을 하려 하거나 또는 입을 열려고
하는 기미만 보여도, 이런 환자는 틀림없이 먼저 무슨 말을 하기 시작한다.
몇 번을 똑같이 당하고 나면, 화도 나고 정말 답답해진다. 참다못해 의사도
말을 시작하면, 환자의 목소리만 더 높아질 뿐 그치질 않는다. 이러기를
얼마 동안 계속하면, 의사의 질문은 허공에 뜬다. 아무런 대화가
이루어지질 않는다. 물론 환자에 따라서는 처음 얼마간은 이러다가 차차
긴장이 풀리면 더 이상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환자는 막무가내이다. 이럴 땐 말싸움만 계속할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환자를 가로막고 환자가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를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의사가 무엇을 물을까 두려운 나머지 의사의 말문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도 말해 주어야 한다. 또한 더욱 효과적인 방법은
환자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환자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도
되고, 또 그것이 바로 그들이 불안할 때 쓰는 상투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불안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놀랍게도 불안을 일부러
노출시키거나 과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그가 얼마나
불안하며, 어떤 걱정거리가 있고, 또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는가 등을
귀찮을 정도로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어쩌면 좋겠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따지고 보면 적의에찬 행동이다. 이런 환자와 의미있는 대화를
하려면 그러한 적개심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끝없이 되풀이되는 불안의 넋두리를 다 들어줄 필요는 없다.
그런 이야기가, 새로운 사실이나 어떤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든지,
아니면 똑같은 사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들을
필요가 없다.
불안을 공격적으로 과장해서 나타내는 경우도 있는데, 어떤 중년 신사는
진료대기실을 계속 서성거리면서, 너무 불안해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진료실에서도 의자에 채 앉기도 전에, 일어서서 이야기해도 좋으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그는 방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너무
불안해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노라고 몇 번을 되뇌이면서 뚜벅뚜벅
아주 위협적인 걸음걸이로 내 의자 뒤로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안하다는 말뿐이지 불안한 기색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한 것은
오히려 내쪽이었다. 앉은 채로 그가 걸어 다니는 것은 한참 동안 쳐다보는
일이 어색하기도 하고,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대로는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도 같이 좀 걸을까요?" 하고 나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일어선 순간, 환자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그는 부들부들
떨더니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제서야 그가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이
확연해졌다. 이제 그는 나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에
대한 방어 기제를 상실한 셈이다. 불안은 그래서 폭발한 것이다. 그의 이런
방어 기제를 분석해 보면,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남으로부터 지배를 받거나, 수동적이 되거나, 또는 이용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환자에게 따라서 자기가 무서워하고 있는 사람을 정면공격하면서,
자기의 불안을 위장하는 경우도 있다. 의사가 두려울 때 직접 그 의사의
면전에서 공격하기도 하고, 또는 의사 모두를 공격하기도 한다. 자기를
치료했던 의사들은 모두 엉터리라느니, 아무것도 모르는 의사들이라거나
또는 오진을 해서 환자가 죽기까지 했다는 등 신랄하게 비판을 한다.
의사를 공격하는 한 가지 교묘한 방법으로는, 의사를 마치 친구처럼
대하며 의사도 자신을 환자라기보다는 친구로 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남자 환자들은 그야말로 시원시원하다. "말씀 낮추시죠 그래야 저도
형이라고 부르지요", "형, 어느 학교 나왔어요?", "아! 선생님도 테니스를
좋아하시는군요. 어느 클럽 소속이세요?" 하는 식이다. 이런 환자들은
자신과 의사와의 관계를 의사와 환자의 관계보다는 사회적 관계로
만듦으로써 의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고 한다. 극장표나 테니스 공을
사올 뿐만 아니라, 같이 술 한잔하자고 권하기도 한다. 여자 환자도
마찬가지지만, 다만 그 접근 방법이 좀 다르다. 이들은 의사의 용모에 대해
특히 민감하다. 모성애를 발휘하기도 하고, 오빠처럼 대하기도 하고,
은근히 데이트 상대로서의 환상을 갖기도 한다. 의사의 건강을 염려해서
안색이 좋지 않다느니, 또는 머리 기름을 바르라는 등 여성다운 걱정이나
충고를 해서, 주객이 바뀐 느낌을 줄 때도 있다. 손수건이나 장갑을 만들어
오기도 하고, 인삼이나 꿀 같은 것을 가져오기도 한다.
한번은 한 여자 환자가 집에서 만들었다는 과자를 가져왔다. 나는
지극히 담담하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 선물의 의미를
생각하느라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음에 틀림없다. 내 표정을 지켜보던
환자가 화가 났으면서도 농담조로 던진 말이 걸작이었다. "선생님, 그 과자
속에 독약이 든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과자 그 자체는 긍정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반면, 이 말 송에는 적대감이 들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이
환자가 의사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어떤 여자 환자들은 의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고 -
암암리에 혹은 공공연하게 - 의사를 데이트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이
때문에 종종 연애사건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야말로 의사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만약 환자들이 의사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환자가 겁에 질리고 불안해서 자신의 병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형태로든지 의사가 환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들을
친구처럼 대하게 된다면, 의사와 환자 모두가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기
쉽다.
한 중년 여인이 비교적 가벼운 질환 때문에 입원해 있다가 히스테리를
일으킨 경우가 있었다. 나는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준 그녀의
주치의에 따르면, 그 부인은 수년 동안 여러 질환을 앓아 왔지만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었고, 여러 분야의 전문의들에게 치료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 환자를 진료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왔고 결혼 생활도 불행해 참 안됐으니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조금 망설이더니, 오히려 강조하는 투로, 정말 불쌍한 여자이고
가난하기도 해서 치료비를 받지 않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 환자를 만났는데, 유쾌해 보이고 아무 걱정도
없어 보여 무척 놀랐다. 그 환자는 명랑하고 총명했고, 나를 만나서 반가운
듯했다.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질환과 진료해 준 의사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의사들이 마치 친구나 되는 듯 거리낌없이 그들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 의사들도 역시 환자의 이름을 불렀던 모양이다. 한 20분쯤
계속하게 내버려두었다가 말을 가로막고 "몹시 속상해 한다고 들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군요" 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갑자기 태도가
바뀌더니, 단도직입적으로 한 의사와의 연애 사건 때문에 속상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야기 중에도 그 의사의 이름을 친구같이 불렀고,
목소리에는 서글픈 애정이 담겨 있으면서 원망과 경멸감도 느껴졌다.
환자는 그 의사를 천박하고 비열하다며 경멸했다. 자신을 유혹하고,
나중에는 바보 취급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용당했다는 느낌마저 든다고 덧붙였다. 그 의사와의 관계는
1년 이상 계속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의사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었다고 했다. 그 여자 환자는 진료 시간이 끝날 무렵 내 손을 잡고(물론
내 이름을 부르며) 아주 고맙다고 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 의사와의 관계는 이미 몇 년 전에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제 와서 지난 일 때문에 고통받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당황했던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동안 앓아왔던 신체적 질환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자신을 치료한 의사들이 친구나 되는 것처럼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마침내 나는 말을 가로막고, 항상 친구인 양
의사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 말에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더니,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보고
자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원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했다고 애교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목소리가 변하더니 내가 자기를 좋아해 주기를
바란 것이 잘못이었다고 하며, 결국 나는 의사이고 자신은 환자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했다. 내가 계속 입은 다물고 있었더니, 몇 분 후에
자기가 의사들을 친구처럼 부르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물었다. 나는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이 뜻하는 바를 알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사실 자신도 그 점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녀도 원하는 것이므로 내 짐작을 이야기했다. 즉, 항상 이름을 부르며
친구인 양 의사를 대하는 것을 보면, 의사를 적극적으로 유혹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 여자 환자는 몹시
당황하는 기색이더니, 사실은 지금도 다른 의사와 관계를 갖고 있다고
했다. 이 새로운 관계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고,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먼저 그 의사를 유혹했고, 지난 번 의사와의 관계에서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의사들과의 긴밀한 관계에 이런 동기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니 너무 두려워 정신과의사의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로 자신이 의사와 이러한 관계에
거듭해서 빠지게 되는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
내가 다른 정신과의사에게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니, 애교를 부리며 내
도움을 받고 싶다고 했다. 즉 새 정신과의사를 유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나는 정신과의사를
만나자마자 그 동안의 연애사건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먼저 유혹했으며
지금도 그를 유혹하게 될까 봐 두렵다고 이야기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후에 그 여자 환자를 맡은 정신과의사는 환자에 대한 문제를 극비로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내 충고를 받아들였는지 궁금했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 알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불안에 대해서 할 말은 아직도 많다. 불안의 성격과 신비를 잘 알고
있으면 환자와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불안이란, 일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여기서 논의된 불안한 환자에 대한 사항은 모든
환자에게 적용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불안 외에도 불안의 요인이나 표현 형태는 환자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이런 불안의 기전이나, 또
수수께끼와 같은 그 정체를 잘 이해한다는 것은 그 환자의 전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것을 강조해 둔다. 사실, 모든 질환의
밑바닥엔 불안이 깔려 있으므로, 여기서 이야기한 불안한 환자와의
대화에도 그 중요성이 적용된다는 것을 유념해 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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