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나 의사의 분노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 있거나 숨겨져 있는 것에
상관없이, 대화 자체에 장애가 된다. 하지만 적대적인 환자보다 더욱
어려운 경우는, 오히려 의사를 우러러보면서 지나치게 친절한 환자이다.
사실 의사를 존경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반응하는 환자의 경우가 치료의
성공률이 더 높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순진한 감정이 때로는
맹목적인 애정이나 성적인 집착으로 이유없이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적대적인 환자에 대해 논의되었던 점이 여기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즉
환자로부터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았을 때, 의사는 환자를 훌륭하게
치료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칭찬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칭찬의 일부는 다른 의사를 향한 것인데, 환자
내부에서 비롯된 이유들 때문에 현재의 의사에게 전이된 것일 수도 있다.
몇 번밖에 온 적이 없는 여자 환자가 어느 날, "제가 보기에는요,
선생님이 우리 나라에서 가장 훌륭하고 믿을 많나 의사인 것 같아요"라며,
쉴 새 없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나름대로 아주 진지해 보였다.
환자가 지나친 친절이나 칭찬을 할 때 의사들은 흔히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흐뭇해 할 수도 있고, "별말씀
다하십니다"하고 부정하는 의사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농담으로
받아넘기거나, 심지어는 못 들은 척 슬쩍 넘어갈 수도 있다. 하여튼 좀
겸연쩍은 기분일 들므로 가급적이면 빨리 화제를 벗어나려 한다. 앞서
말한 환자의 경우, 의사라면 여러 가지 궁리를 할 수밖에 없다. 즉, 칭찬을
받아들일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 그도저도 아니면 농담으로 넘길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환자의 태도가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에 농담을
하거나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 칭찬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역시 쉽지는 않았다. 그만한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전혀 한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 환자의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경우에 적절한 과학적 해결
방법이 있다.
그런 칭찬을 하는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다. 아마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을 이야기하기 위한 예비공작일지 모른다. 그 부인은 상당히 불안했기
때문에 내가 뛰어난 의사라고 믿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는 환자에게
무언가 내게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고,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녀는 결혼 전에 임신 중절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죄책감이 매우
컸고 누구에게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가 처음 본 의사에게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라고 칭찬한 것은 결국 그의 비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고 그래야만 의사가 자기의 비밀을 지켜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환자 스스로 담당 의사를 유명의라고 믿어야만 자신이
받는 치료가 더 권위있고 훌륭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내가 상당히 젊었을 때 한 여자 환자가 내게 참 다정하고 친절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나 애매한 어투로 이야기했던지 그 순간
기쁘면서도 동시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나는 굉장히 실망하고
한편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고 그 환자가 웃으며 말했기 때문이다.
의사를 상대로 지나친 호감을 표현하는 것은 심각한 신체적 질환을 가진
환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된다. 이들의 경우, 자기 의사가 제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치료 과정이나 우울 등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누가 나쁘다고 할 것인가? 중요한 점은 이러한 감정이 환자
자신의 필요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더욱 일반적인 경우는, 신체적 치료 후나 어떤 고통스러운 비밀을
토로한 후 의사를 도에 넘치게 우러러보는 것이다. 이 경우, 환자는 그
의사를 신뢰하기를 잘했다고 스스로 재확신하게 된다. 이때 의사가 환자의
이러한 반응을 인지하고, 그 의미를 간파한다면 그다지 당혹스럽지 않을
것이고 환자의 감정도 곧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기 마련이다.
여자 환자들은 의사를 남자로서 좋아하게 되어 선정적이 되고, 가끔
성적 유혹을 하는 수도 있다. 그건 환자 자신의 생각에서 우러나온 것이지
결코 의사의 용모나 혹은 남자로서의 매력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의사로서의 사회적 지위, 명예, 아버지와 같은 인상, 신통한 마법사......
이러한 것들은 특히 히스테리성 질환을 앓고 있는 여성들에겐 좋은 사랑의
대상물이 된다. 어떤 경우든 이러한 환자들의 심리 상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사의 윤리를 제쳐놓고라도 도대체 치료가 되질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의사가 환자의 애정 표현의 대상이 되어 의사가
눈치를 챘을 즈음에는 이미 때가 늦어 좀 불쾌한 수습이 불가피하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신호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떤 의사들은
스스로가 은근히 자극을 하거나 일부러 모른 체 하여, 결국 의사와 환자의
순수한 관계를 깨뜨리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바보가
아니라면 환자가 보이는 여러 가지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환자가 의사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시도하면
의심해 보아야 한다. 잘생겼다, 외국 배우 같다는 등의 칭찬뿐만 아니라
피곤해 보인다, 건강해 보인다, 즐거워 보인다, 슬퍼 보인다, 걱정스러워
보인다 등의 관심은 수상한 징조다. 별것도 아니 것을 가지고 너무 자주
찾아오는 환자, 자꾸 검사를 해달라고 조르는 환자, 선정적인 행동을 하는
환자 등은 모두 경계해야 할 환자들이다. 물론 섹스 문제를 너무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는 환자도 요주의 대상이다. 이상하게도 어떤 의사는
한 번도 이런 사고가 없는가 하면 또 어떤 의사는 여러 번 사고를
저지르는 것을 보는데 이건 아마 환자보다 의사 스스로가 초래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의사에 대한 애정 표현이 늘어가거나 과장되어 가는 징조가 보이면,
가능한 한 신중한 태도로 환자를 대하고 농담 따위는 피하는 것이 좋다.
적대감의 경우마찬가지로, 이런 경우에도 환자는 자신의 감정을 표면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이것이 바로 정신과의사들이 환자들
치료하는 법이 아닌가!) 이때는 고도로 능숙한 기술이 요구되므로,
일반적으로 권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적극적이고 공공연하게 접근해 오면 의사는 반드시 환자에게
이야기해야만 한다. 많은 의사들이 이런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 흔히 하는
일들이 있다. 즉 진료실에서 나간다든지, 간호사를 부르거나, 농담으로
넘기는 수가 많다. 이러한 방법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의사에게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감정은 치료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에 대한 것이며 믿음과
감사의 마음도 관여하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이는 익히 일어날
만한 감정의 움직임이므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 관계에서 과학자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하며, 환자의
접근이나 입에 발린 칭찬에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 어떤 환자들은 화를
내고 항의를 하려 들기도 할 것이다. 정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동료
정신과의사의 충고를 구하는 것이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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