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환자와의 대화/성인 환자를 위하여

9.환자에게 친절히, 그러나 충고는 신중히

by Healing New 2020. 6. 2.

환자가 의사를 찾아올 때는, 치료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적절한 충고도 
함께 기대한다. 사실, 치료 자체가 충고나 지시를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충고를 주고받고 하는 것은 진료실에서 언제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환자들의 질문이 너무 엉뚱해서, 좀 다른 방법으로 처리해야 할 
필요를 느낄 때가 있다.
  "간질이 유전병입니까?", "암은 고통스럽지요?", "사촌끼리 결혼해요......", 
"그런데 참......",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등 서두는 이렇게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시작한다. 때로는 남의 이야기처럼 하는 수도 있다. 
"제 사촌이 알고 싶어하는데, 암은 유전됩니까?", "친구가(아니면 옆집 
사람이)알고 싶어하는 건데......" 하는 식이다. 중요하고 심각한 질문일수록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표현한다. "세상에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암환자와 함께 있으면 전염이 된다나요.", "내 
친구녀석은 겁이 많은 놈이죠. 이 놈은 생각하기를 돈을 만지면 온갖 
병들이 전염된다는 거예요."
  이러한 모든 질문이나 말 중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속엔 공통적으로 
불안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런 질문을 통해 은근히 불안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아무것도 아닌 듯 묻는 질문 속에 숨어 있는 환자들의 
불안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진지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농담처럼 이야기한다고 해서 농담으로 듣고 넘어갈 일이 
결코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환자가 개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따라서 그 질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섣불리 즉각적으로 대답해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선생님, 제 
친구가 그러는데요. 암이 유전된다는데, 그렇지 않지요?" 하고 물어왔을 
때, 우리 반응은 즉각적으로 - 마치 친구와 환자 사이의 다툼을 해결이나 
할 양으로 - "아니오, 유전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즉각적인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질문 뒤에는 
사실 이 환자가 암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아마 
그는 자기 나름대로 암이라 여겨지는 증세를 느끼면서도, 차마 겁이 나서 
말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 이러한 질문은 곧 걱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럴 때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대답은 "무슨 걱정이 있는 모양이죠?",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죠?",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세요"하고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좋다.
  이런 질문은 예기치 못할 뿐 아니라, 환자들이 성급한 대답을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막연하고 가상적인 질문을 던져 놓고, 그 이상의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대답만 요구한다.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불치병의 환자들에게 때로 치사량의 
아편주사를 놓는다던데요?", "하역한 아이에게 과격한 운동을 시키면 
늑막염이 오지요?" 등의 질문이야말로 그가 왜 묻는 지를 알기 전에 
함부로 대답을 해선 안 될 성질의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의 경우, 이 
환자의 경우 모친이 암으로 누워 있는데, 혹시 자기가 염려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둘째 질문도 마찬가지로, 
이 환자의 자녀가 체육 시간에 마라톤을 하고 난 후 늑막염을 앓았다고 
판단하여 학교를 상대로 소송이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성생활이나 부부 사이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 올 때는 특히 
신중해야 한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질문이라도 언제나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의사로서 꼭 지켜야 할 
일은,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이 분명해 질 때까지는 어떠한 충고도 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 가족이나 친구, 목사 또는 다른 의사들이 
이 환자에게 어떠한 충고를 해 주었나? 또 어떤 것을 읽었나?
  #2 누가 뭐라고 말했든, 무엇을 읽었든 상관없이 환자 자신이 
객관적으로 어떤 것이 가장 옳다고 믿고 있는가?
  #3 문제 해결을 위한 그의 계획은 무엇인가? 역시, 무슨 충고를 들었든 
무엇을 읽고 또 무엇을 믿고 있든 상관없이, 또 더 중요한 것은 의사가 
지금 어떤 충고를 하든 상관없이, 그 환자의 계획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스무 살 된 총각이 외래 진찰실을 찾아와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위행위가 해롭습니까?" 의사는 서둘러 "해롭긴, 아무 일 
없어" 라고 대답했다. 환자는 그대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날 그 환자는 
면도칼로 동맥을 그어, 응급실로 실려왔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그 
환자와의 대화에서 의사는 그 환자가 자위행위에 대한 심한 갈등으로 
고민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그 환자는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 부모도 자위행위는 몸에 
해로울뿐더러, 심하면 정신이상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목사도 이는 
죄이며 이에 대한 벌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유야 달랐지만, 
주위 모든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자위행위는 나쁜 것이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여러 가지 서적을 뒤졌으나 명백한 해답은 없었다. 
"해롭지 않다. 정신이상이 된다든가 병에 걸린다든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역시 자제하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문의를 찾게 된 것이다. 해롭지 않다는 의사의 한 마디가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자위행위의 강박적 욕구, 죄책감, 불안감, 등의 
뒤범벅 속에 그의 혼란은 극도로 치달았다. 아무런 해결방안이 없었다. 
그의 자살기도는 예방할 수 있었다. 그의 간단한 질문 속에 내포되어 있는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사가 이해할 수만 있었다면......
  또 다른 예가 있다.
  젊은 남녀가 찾아와 그들이 결혼을 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신랑 
가족중의 여러 사람이 정신질환 병력이 있고, 또 신부쪽에서도 할머니가 
현재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혼 후 태어날 아이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들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되었다. 또 결혼을 하더라도 아기는 낳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쨌든, 냉정한 의학적 입장에서 그러한 내용의 충고를 한다는 
것이 논리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충고를 하기에는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그들 자신에 대해 좀더 캐물었다. 당혹스럽게도 
그들은 이미 결혼을 했고, 더구나 부인은 이미 임신중이었으며, 누가 뭐라 
해도 이미 아이를 낳을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만약 내가 성급히 그 논리적 충고를 해 주었더라면 
허공에 뜬 싱거운 이야기가 될 뻔했다.
  가끔 사람들은 충고를 따르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에서 충고를 구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무슨 충고를 하든, 그들의 길을 확정한 상태에서 조언을 
듣고 싶어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다른 
충고는 언제나 틀리기 마련이다. 이 경우의 충고는 옳건 그르건 간에 결국 
그들에게 혼란만 더 가중시키고, 그들의 결정사항에 회의만 가져와서 
오히려 실패할 확률만 높여주게 된다. 
  결혼, 아기, 취직 등에 대해 의견을 물어올 때는, 당신의 충고가 그들의 
결정에 무슨 영향을 미칠 것이냐고 되물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놀랍게도 '아니오'라는 대답을 흔히 듣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에게 충고를 해 준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충고를 받으러 온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요, 대부분 칭찬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충고를 유혹을 뿌리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꼭 
선생님께만 이 문제를 여쭙고 싶습니다."라고 애원할 때 어찌 이를 뿌리칠 
수 있으랴. 그리고 이러한 환자의 이야기가 사실이기도 하다. 의사는 그의 
지식과 경험, 사회적 지위나 인격, 어느 모로 보나 좋은 충고를 해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또 충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앞서 지적한 
사실들을 다 파악한 연후에 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충고와 상치되는 것은 아닌가 확인해 볼 필요도 있다. 상반되는 의경이야 
어차피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무엇이 상반되는지를 알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또 의사는 환자가 그의 충고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하며 끝으로 자기 충고를 따를 가능성이 조금은 있어야 한다. 
불필요한 충고는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