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을 하거나 학문을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취직을
하더라도 중앙, 곧 서울이 아니면 안된다는 이상한 중앙 집약적 논리가 우리
한국인의 현대병 가운데 고질인 '중앙병'을 앓게 하고 있다.
우리 한국 사람은 가운데를 무척 좋아한다.
빈 자리가 드문드문 있는 지정석 없는 기차를 탔다 하자. 어느 손님이든 문간
가까운 빈 자리에 일단 앉고 본다. 한숨 돌리고서 보다 가운데에 빈 자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반드시 그 가운데 자리로 옮기는데 예외가 없다. 한국인의
중앙지향이 그렇게 이동시킨다. 아파트의 층별선호에서 그 중앙지향이 완연하게
드러난다. 서양 사람들은 맨 위층이나 맨 가줄에 있는 변경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한데 우리 한국 사람은 가운뎃줄 가운데층을 보다 선호한다. 상하층의 값과
중간층의 값에 몇 백만, 몇 천만 원의 차이가 나는 나라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우리나라뿐이 아닐까 싶다. 옛날 인구가 많이 집산하는 큰 도시에는 전주, 충주,
상주처럼 '주' 자가 붙어 있다. 이 주 자가 붙어 있다. 이 주 자 돌림의 큰 도시는
대체로 변경인 바닷가에서 내륙으로 파고들어 가운데인 바닷가에 발달한 것과
비겨봄직하다.
한국인을 상대로 한 많은 의식조사에서 자신이 중간층이나 중류층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연구에 따라 80__90퍼센트에 이르고 있고 이 마을은 상승추세에
있다.
물론 자신이 중간층에 속해 있다는 것과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같지
않지만 이토록 중간층 의식이 부풀어 있다는 것도 한국인의 중간지향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한국인의 중간층 의식에는 환상중간층의 퍼센티지가 가산 돼
있다고 보아야 한다.
벼슬을 하거나 학문을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취직을
하더라도 중앙, 곧 서울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상한 중앙정치 집약적이요, 중앙경제
집약적이며, 중앙문화 집약적인 논리가 지배, 우리 한국인의 현대병 가운데 고질인
'중앙병'을 앓게 하고 있다.
연전에 지방 도시의 각종 간판 상호를 조사한 것을 본 일이 있는데, 가장
선호하는 상호가 '중앙'이요, 버금이 '서울'이었다. 총 조사대상의 1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니 중앙에 대한 향수가 얼마만한가 알게 해준다. 중앙식당. 중앙시장,
중앙상사, 중앙상회, 중앙치과, 중앙기원, 중앙유치원 등등.... 중앙이란 이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중앙'하면 뭣인가 권위가 더 있고 가치도 있으며, 보다 고급 같고
보다 질도 좋으며, 진짜 같다는 막연한 한국인의 중앙병의 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모든 생활 문화가 중앙문화를 모방하는 의사중앙문화요,
아류중앙문화로 변질되어 그 개성 있던 전통성은 상실해 왔고 상실하고 있으며,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먹듯한 불고기를 전국 각지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편리해졌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비통해야 할 일인 줄 안다. 모든 음식문화가
전통적 특색을 상실하고 일률화한다는 것은 음식문화의 멸망을 뜻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국도처의 관광지에서 파는 기념품이 그 관광지에서만이 살 수 있는 개성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비롯, 전국 각지 아무데에서나 살 수 있게 된 것도 그렇다.
중앙문화의 왕성한 식욕이 개성있는 지방문화를 모조리 잡아먹고 획일화시킨
것이다. 중앙은 그지없이 탐욕하다. 서울의 부동자금이 몇 조원씩 떠도는 반면, 우리
농가 빚이 몇 조원으로 누적된 것도 중앙이 살찌고 지방이 피폐해지는 중앙병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몇 조원이란 수치가 바로 중앙편중치라 해도 대과가 없다.
서울 인구가 1천 만을 넘게 된 이유도 바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중앙병의
증상이다.
한국인의 중앙병은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를 정복하지 못했던 데 원인을
찾아볼 수가 있다.
해외로 뻗어 나가는 프런티어십이 신라시대 이후 건포도처럼 쭈그려들어 밖으로
뻗어 나가려는 원심력이 약화되고 가운데로 파고들려는 구심력이 반비례해서 커
왔다.
거기에 왜구들의 약탈이 유사 이래 삼면의 바다를 위협했을 뿐 아니라, 해안
지역을 간단없이 약탈하였기로 가운데로 파고드는 중앙병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했음직하다.
둘째로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가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다스려졌다는 것이 모든
정치, 경제, 문화를 중앙에 집중시키는 전통일 있게 했다.
유럽이나 일본처럼 지방에 권력이나 경제나 문화가 분산되는 봉건제도를 실시해본
역사적 체험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심은 빈약하지만 화심 둘레의 꽃잎들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국화형
문화'는 정착하지 못하고 화심만 멋없이 비대하고 둘레의 꽃잎들이 빈약한
'해바라기형 문화'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내 자식이 데모에 참가하여 다치는 걸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데모에
참가하더라도 다칠 확률이 높은 맨 앞이나 맨 뒤 같은 가장자리에 서지 말고
가운데에 끼도록 타이르곤 한다. 그 부모의 충고대로 가운데 끼여 데모했다던
아들놈이 밤늦게 붕대를 싸매고 돌아왔다. 그날따라 진압 경찰관이 데모대열을
양분해서 분산시키고자 한가운데로 돌진했던 것 같다. 유비유환이 된 셈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가운데 끼여 있으면 안전하다고 자위하는 부모들의
심성이다. 그 가운데 지향의 심성은 이 부모들뿐 아니라 우리 한국인의 공통된
심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은 감정이나 용기나 지혜마저도 인체의 중심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뱃심이 좋다느니, 배짱이 좋다느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느니, 배를 가르고
이야기하자느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담이 크다느니, 대담하다느니, 담략이
뛰어나다느니 하는 것도 그것이다. 선량한 사람을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도덕심도 가운데 있다고 본다. 그래선지 옛날에는 고문을 하더라도 등,
배, 옆구리 등 집중적으로 가운데에다 태질을 했던 것같다. 세종대왕을 비롯, 정조,
숙종이 오장과 오정이 맥락된 배나 등이나 옆구리치는 폐단을 통금하는 어명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옛 우리 선조들은 벼슬하는 동안만 서울에 머물다가 벼슬이 끝나면 주저없이
낙향하는 것이 법도였다.
이퇴계 선생은 열한 번 벼슬을 계속했는데, 벼슬을 그만두기가 바쁘게 열한
번이나 고향인 토계로 물러갔었다. 그래서 아호도 토계에 물러가 살았다 하여
퇴계인 것이다. "목민심서"에 보면 벼슬살이할 때 가급적 가족을 데려가지 말되,
굳이 혈육의 정이 그리우면 아들 하나만 데리고 가는 것이 벼슬아치의 덕목이라
했다.
장보고의 동남지나해의 정복은 활달했던 신라프런티어십의 단적인 증거다. 신라
청년들은 풍운을 품고 낚배 하나 띄워 원양으로 모험을 곧잘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비일비재하다. 진평왕 때 설계두라는 신라 청년은
'도대체 골품이나 논하고 문벌만 따지는 신라땅에서 답답해서 못 살겠다. 나는 멀리
서유를 해 비상한 공을 세워 천자 옆에 서서 호령을 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일엽편주를 타고 항해를 떠나고 있다.
먼 인도의 오천축국을 순례한 스님으로 기록에 남은 고승만도 해초스님 등
10여명에 이른다. 대단했던 이 신라의 원심력만 계승되었던들 안으로 쪼그라드는
중앙병은 기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지방에 뿌리박은 대가족제도나 동족부락, 그리고 서원이 나름대로 그나마도
귀거래할 거점을 상실하고만 것이 중앙병을 가속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그외 정보/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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