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요즈음 자녀들은 아버지의 단절원리는 전혀 작용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포용원리에만 무한대로 감싸이면서 자라기에 서른 살이 가깝도록 자립 못하는
의존적 인간이 어른아가 되고만 것이다.
어른아...란 말은 국어사전에 없다. '어른+아이'를 합성해서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어른과 아이, 곧 성년과 미성년이 공존해 있는 사람으로 어른이기도 하고
아이이기도 하며 반면에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어중간 한 인간이 어른아다.
아이 속에 어른이 들어앉아 있고 또 어른 속에 아이가 들어앉아 있기도 한 어른과
아이 사이에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연결 인간이다.
이 어른아는 순박한 아이어야 할 때 걸맞지 않게 어른 행세를 하고 숙성한
어른이어야 할 때 응석부리는 아이 행세를 한다. 요즈음은 온통 매듭상실의 어른아
세대가 판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먼저 가정에서 증발되고 없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매듭을 보자. 아버지가 먹는
밥상과 아이들이 먹는 밥상은 그 질이 같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 밥상의 질이
더 좋은 경우도 없지 않다. 옛날에는 아버지 밥에는 보리쌀이 더 들어가거나 같은
고깃국일지라도 고깃덩이가 더 들어가고 아이들 상에 오르지 않은 별식이 더러
있었다. 밥그릇이나 숟가락부터도 달랐다. 겸상을 하더라도 아이들은 아예 젓가락을
대어서는 안 되게끔 사전에 지시받은 별식이 있게 마련이었다. 차등을 두는 것이
반드시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어른과 아이는 식탁부터 매듭이 확연하게
지어져 있어 어른의 영역, 아이의 영역을 확연하게 인지하고 자라나갔다.
또 잘살든 못살든 일곱 살만 되면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 아사랑이라는 동년배
집단 속에 끼여듦으로써 응석을 단절한다. 유럽에서도 '어른아'를 매듭짓는 나이가
일곱 살이다. 14세기에 유아세례를 할 때 사제는 '이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만
물이나 불이나 말로부터 보호돼야 한다.'고 엄연하게 하느님에게 선서를 한다.
지금도 미국 동부의 WASP(앵글로색슨 계의 신교도) 가문에서는 일곱 살만 되면
목장에 데리고 나가 승마를 시킨다. 낙상해서 다치거나, 죽거나하면 그것은 제
팔자로 미루어 버린다고 한다.
메리메의 소설 "마테오 팔코네"에는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섬에 사는 농부 부부와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등장한다. 부상을 당한 이탈리아 독립군이 헌병에게 쫓겨 이
외딴 마테오의 집에 숨어든다. 뒤쫓아온 헌병 상사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아들에게 회중시계로 유혹, 숨어든 곳을 알아낸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 마테오는
그의 아들이 시계에 팔려 밀고한 비인간적이고 부도덕적인 사실을 알자 아들로
하여금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시킨다.
용서해 주라고 울며 붙드는 어머니를 땅에 쓰러뜨리고 이 아이를 강변으로 끌고
나간다. 조금 있다가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퍼졌다. 혼자 돌아온 아버지
마테오는 울부짖는 어머니에게 '가엾은 놈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한다.
소설 속의 일이지만 부자간의 사이가 이토록 잔인하게 매듭지어지는 것이 유럽의
역사적 상식이었다.
개척시대의 미국에서만도 아버지가 아들을 법정에 데리고 가 증언만 하면 사형을
선고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이처럼 자라나는 자녀에게는 옳고 그르고 또 잘하고 못하고를 선명하게 매듭짓고
단절하는 부성원리와 옳고 그르고 밉고 곱고 잘하고 못하고 간에 무한히 포용하는
모성원리가 더불어 작용하게 마련이다.
한데 요즈음 자녀들은 아버지의 단절원리는 전혀 작용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포용원리에만 무한대로 감싸이면서 자라기에 서른 살이 가깝도록 자립 못하는
의존적 인간인 어른아가 되고 만 것이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다. 사회에서도 어른아를 매듭짓는 단절 원리는 증발되고 없고,
온통 포용 원리만이 판치고 있다. 버스나 전철 속에서 아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어른들이 서 있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뿐이 아닐까 싶다. 원칙적으로 구미
각국에서는 걷지 못하는 대여섯 살난 아이가 아닌 이상, 소학교 1학년일지라도
단거리의 공공승용차 속에서 앉는다는 법은 있을 수가 없다. 자리가 비어도 그
자리는 어른이 앉을 자리라는 확연한 매듭 때문에 앉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매듭이 확연하기에 유럽의 소학생들은 이미 중학생만 되면 자신의 장래에 대해
뚜렷한 목표를 나름대로 지니고 있으며, 그 목표대로 직업을 선택하는 비율이 무려
78퍼센트나 된다는 통계를 접한 일이 있다. 그래서 서양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려느냐고 물으면 우리 아이들처럼 대통령이나 육군 대장이 된다는 아이는 없고
선생이나, 운전사나, 간호사나 우편배달원 등 뚜렷하게 그 목표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졸업을 앞둔 대학생마저도 자신의 장래를 모르고 그저 급료가 좋고
정년이 길며, 복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회사면 아무데나 좋다는 막연한 생각들을
갖게 마련이다. 진학할 때도 이 학교 저학교, 이 학과 저 학과... 부모가 정해
주었기에 취직도 누군가가 정해주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된다.
또한 밥을 안 먹어줄 테야... 공부를 안 해줄 테야... 나가서 안 놀아줄 테야...
학교에 안 가줄 테야...하는 부성원리를 거부하고 모성원리에 응석만 부리든
아이들이 모성원리가 통하지 않는 집 밖의 사회에 나가면 별스럽지 않은 일에
좌절을 하고 자해자살을 시도하는가 하면 단세포적인 폭행 가해를 스스럼없이 한다.
학교에서도 사제간의 매듭이 없기로는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런
우스개이야기가 있다. 어느 한 서당 선생이 죽어 가고 있었다. 제자들이 울며불며
미음이라도 드십사고 권하자 이런 병세에 미음을 먹으라는 말이 책에 적혀 있지
않다고 막무가내다. 그럼 꿀물이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시라고 하자 서책을 갖고
오게 해서 뒤져내게 하는 동안 숨을 거두고 있다. 스승의 고식성을 빗대는
우스개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제간의 매듭을 끝까지 유지하는 교육적 의미도 있는
것이다. 스승의 그늘은 세 발 물러서 밟지 말아야 하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그늘을
갖고 논다. 사제간에 매듭이 없다는 것은 권위를 상실하는 것이 되고 권위를 상실한
스승은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그 매듭없이 배운 제자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안하무인의 무법적 어른아가 된다.
1964년 일본 동경대학을 과격파 학생들이 점거, 동대학의 문학부장인 H교수를
불법 감금했었다. 보름이 지나도록 풀어 주질 않자 전국에서 여론이 들끓고 구출해
내지 않은 경찰에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한데 알고 보니 경찰의 실력행사에
의한 구출을 H교수가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지금 갇혀서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으니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불법감금이라는 비상수단도 상대가 두려워하거나 겁을 먹거나 할 때 효과가 나는
법이지 감금당한 본인이 피해자 의식을 갖지 않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황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빠져나갈 기회를 주었으나 전혀 도망칠 기색을 찾아볼 수 없자
끝내는 손을 들고 말았다.
학생들은 'H교수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는 글러먹었다. 하지만 조금도 흔들림없이
일관해서 글러먹은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석방 이유이며 학생의
적의가 존경으로 돌아가고 일본 백성들은 일본에도 진정한 교육자가 살아남아
있었다고 흠모했던 것이다.
한국의 고질병인 어른아병은 어른아를 구별하지 않고 방영되고 또 시청되는
텔레비전에 의해 가속되고 있지만 그 뭣보다 부모가 단절원리를 포기하고 스승이
단절원리를 포기한 데 가장 큰 병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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