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우리 옛 목민의 첫째 조건이 백성의 한과 원을 몰아오는 응어리가
무엇인가를 통찰하여 그 응어리를 풀어주고 또 응어리를 생기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선조 때 정승 백사 이항복이 조정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여염 부인인 길
앞을 가로질러 갔다. 정승에 대한 무례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이에 전도하는
하인들이 이 여인을 꾸짖고 밀치어 땅에 엎어지게 했다. 집에 돌아와 백사는
하인들을 불러놓고, "길가는 백성을 밀치어 땅에 엎어지게 한 것은 백성의 원을
사는 일로 심히 부당한 짓이다."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조금 있으니 그 여인이
뒤쫓아와 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이 발악을 하는 것이었다.
"머리 허연 저 늙은이가 종들을 놓아 행패를 부려 나를 길바닥에 엎어지게 했으니
네가 정승이 되어 나라에 유익한 일 한 것이 무엇이길래 이 따위 위세를 부리느냐.
너의 죄로 말할 테면 마땅히 귀양을 가고도 남을 것이다."
이것으로 그치질 않고 혹심한 욕설을 마냥 퍼부어댔다. 당시 신분 사회에서
정승에 대해 이같이 해댄 것을 보면 이 여인도 대단한 맹렬 여성이었던 것 같다.
마침 그 자리에는 손님 한 분이 있었는데, 이 발악과 욕소리를 듣고 "어느
누구에게 하는 욕설입니까?" 하고 물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백사는 웃으면서
"머리 허연 늙은이가 내 말고 누가 있소."했다. 이에 손님은 안색을 바꾸며, "왜 저
여인을 잡아들이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백사의 대꾸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먼저 잘못했으니 그 백성이 성내어 욕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마음대로
욕설을 퍼부어 분을 풀고 가야 백성의 마음 속에 응어리가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그 수가 많든 적든 간에 백성에게 마음의 응어리를 생기지 않게 하고 응어리가
생길 양이면 풀어 주어야 한다는 백사의 정치철학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응어리가 뭘까. 사람의 몸은 기와 피와 살이 맥락 조화되어 이루어 졌다고 우리
선조들은 생각했다. 한데 그것이 조화돼 흐르지 않고 맺히면 기체, 혈체, 육체로
병이 생긴다. 이 흐르지 않고 맺히는 체를 응어리라고 했다. 기가 충만해서
탈출구를 못 찾을 때 '기가 차다'고 하고, 기의 유통이 단절됐을 때 '기가 막히다'고
하듯이, 무형의 기가 외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맺혀 있을 때 응어리라고 한다. 불평,
불만, 원망, 탄식 등을 발산 못 하고 속에 맺혀두는 것을 '옹이지다'고 하고, 겨우
입속말로 투덜대는 것을 '응얼거리다', '옹잘거리다'고 하는 것과 응어리는 같은 의미
계열의 말이다.
우리 한국은 역사적으로 민권 위에 관권이, 여권 위에 남권이, 인권 위에 권세가,
인간 위에 삼강오륜이, 상민 위에 양반이, 살아 있는 자손 위에 돌아가신 조상이
타고 눌러내린 바람에 놀부에게 오장육부 말고 심술보 하나가 더 있듯이
'응어리부'하나가 더 있어 내렸다.
서양의 역사는 이같은 외압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역사라 해도 대과가 없는데,
우리 한국의 역사는 이같은 외압에의 순종이 강요된 역사라 해도 대과가 없다.
그래서 응어리는 우리 한민족의 고질이 돼버린 것이다. '아리랑'이 우리 민족 정서에
품이 꼭 들어맞는 것도 '날 버리고 가시는 님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라.'는
응어리풀이가 주제가 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응어리가 오래 풀리지 않으면 한이 되고 이 한이 사무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
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 원이 하늘에 사무치면 날이 가물고 벼락이 치고 홍수가 나며 일기 불순을
일으켜 흉년을 몰아온다고 알았다.
그래서 우리 옛 목민의 첫째 조건이 백성의 한과 원을 몰아오는 응어리가
무엇인가를 통찰하여 그 응어리를 풀어 주고 또 응어리를 생기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무속의 푸닥거리가 본풀이니, 살풀이니 하는 '풀이'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 응어리를 푸는 굿이기 때문이요, 우리나라 무속신이 최영장군이며, 공민왕이며,
남이장군, 임경업장군 등 원한을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인데 예외가 없음도 바로 그
못 풀고 죽은 응어리에 대한 민중의 공감력이 별나게 강하고 예민하다는 단적인
증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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