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하게 지난해의 허물이나 실패나 결점을 되돌아 보는 세모의 일주일은 바로
개인이나 기업하는 이나 정치하는 이에게 있어 마이너스감각의 풍속적 보장이랄 수
있다.
망년병은 우리나라에 없었던 외래병이다. 물론 가는 해를 잊는다는 뜻으로의
망년이란 말도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한적에서 망년은 나이를 잊어 버린다. 곧 나이
차이를 초월한다는 뜻으로 쓰였을 뿐이다. 나이가 어릴지라도 재주나 인품을
존중하여 사귀는 친구를 망년지우라 하고 그런 사귐을 망년지교라 했을 뿐 망년회란
말을 쓴 문헌은 없다.
망년회란 말이나 풍습은 일본 말이요, 일본 풍습이다. 그 나라에는 1천4백 여 년
전부터 망년 또는 연망이라 하여 섣달 그믐께 친지들이 서로 어울려 주식과 가무로
흥청대는 세모풍속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도 세모에 어울리기는 하지만 그를 별세
또는 발산이라 했지 망년회라고는 하지 않았다.
망년병이라는 외래 병균이 현해탄을 건너오면서부터 오히려 원생지보다 더 조건이
좋은 기생지를 만난 것이다. 이 세상에서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연줄을 가장 즐겨
찾고 그 연줄에다 자신을 얽매어두기를 좋아하며 그러해야만이 안도를 하고 그
연줄따라 가치체계가 형성되는 나라가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연줄에서 떠나
살더라도 언젠가는 희귀하다는 전제와 가능성 아래 살고 있는 연줄 이산민족이다.
망년회는 이 연줄 이산민에게 회귀의 원점을 던져주는 것이기에 외래 병균이 걷잡을
수 없이 기생하여 불치의 고질이 돼버린 것이다.
"고암가훈"에 보면 우리 선조들은 3연 12친이라 하여 연중 안부를 묻고 살아야
할 연줄을 제시하고 있다. 3연이란 혈연, 지연, 학연이요, 12친이란 혈연으로는
내팔촌, 외육촌, 처사촌, 내외사돈, 그리고 지연으로는 동, 방, 현, 목에 같이 사는
친지를, 그리고 학연으로는 서당, 오학, 사관, 대과에서 더불어 공부한 동문과
배웠던 스승을 뜻한다.
이 20번이 기본망년회요, 준망년회도 무궁무진하다.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끼리
동성동명망년회, 파리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끼리 파리망년회, 어느 대학의
공과출신으로 비공과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끼리의 서자망년회, 병실에 함께 입원했던
사람끼리 동상망년회.... 심지어 동기동창망년회로도 만족 못하여 몇 학년 몇 반 때
같이 다녔던 반창회까지 유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고수망년회라하여 산천의 풍류를
즐기는 모임인 줄 알았더니 고스톱 친구들끼리의 망년회라하여 실색한 일도 있고....
'소셔빌러티(사교학)'라는 미국의 새 학문에서 성인 한 사람당 평균 50개 연줄로
8백 명 꼴로 사귀고 있다 했다. 이 사교학의 이론을 믿는다면 우리 한국 사람은
갖기로 들면 최대한 50번의 망년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된다.
2천만 명의 성인이 한 사람당 1만 원 회비의 망년회를 열 번씩 갖는다 하면
2조원이라는 돈이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는데 날려 버리는 것이 된다.
우리나라 예산의 8분의 1이 넘는 거액이다. 그 돈이 극빈자에게 분배되었다면...
하고 가정해 본다면 그 흥청거림이 미치는 정신적 황폐나 그러하지 못하는 계층간의
위화감 같은 불가시의 손실은 2조원을 한결 웃돌 것이다.
우리 전통적 세밑습속을 되뇌어 보면 더욱 이 망년병이 새삼스러워진다. 지금도
시골집 부엌에 가면 정화수를 담은 백자 보시기를 흔히 볼 수 있다. 부엌신인
조왕신을 연중 그렇게 독실하게 모셔왔던 것이다. 이 조왕신은 한 해 동안 그 집
식구의 행실을 낱낱이 보아 두었다가 섣날 스무나흗날 밤에 승천하여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옥황상제에게 낱낱이 보고하는 것으로 알았다. 선행이 많으면 많은 만큼
이듬해에 복을 내리고 악행이 많으면 많은 만큼 이듬해에 화를 내린 것으로 알았다.
이렇게 조왕신이 새로운 운명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굴뚝을 통해 돌아 오는 날이
섣달 그믐날이다.
섣달 그믐날 밤 조허모라 하여 집안팎, 심지어 외양간, 칙간, 굴뚝의 개자리에까지
기름불을 켜놓고 밤을 새우는 뜻은 이 조왕신의 하강을 경건히 맞기 위함이다.
이렇게 승천에서 하강까지의 이렛동안 우리 선조들은 목욕재계하고 근신을 했던
것이다. 지금 상천에서 자신이 심판대에 올라서 있는데 어떻게 먹고 마시고
흥청거릴 수 있겠는가. 신과 나와 직결되어 형성된 원초적인 양심을 프로이트는
초자아(슈퍼 에고)라 했다. 우리 한국인이 연중 초자아로 돌아갈 수 있었던 단
한번의 시공이 바로 이 세모의 1주일 동안이었다. 이 동안에 식구끼리 친구끼리 또
부인네들끼리, 궁중에서는 궁녀들끼리 모여 한해 동안 자신이 한 일 가운데 양심에
걸리는 일을 돌아가며 고백하는 '속뵈기'라는 습속도 있었다. 특히 궁녀들의 세모
속뵈기는 엄숙했다 한다.
물론 이 속뵈기에서 한 말은 면책이 되기에 그 때문에 한 해 동안 남몰래 받아온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이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결함을 반성함으로써 훌륭한
발전의 계기가 되었음직도 하다. 또한 이 경건한 세밑풍속으로 우리 한국인이
얼마나 선량해졌을까 생각하면 뭉클해지기까지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에 세모에 친지들끼리 모여 러시아 판
속뵈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약간의 불편으로 행상하는 한 노파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손찌검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노파는 병든 과부였으며, 훗날 마음에 걸려 다시 찾아 갔을 때는 죽고
없었다고 고백한다. 다른 한 사람은 남의 집 가정 음악회에 초대되어 가 빈 방에
떨어져 있는 3루블짜리 지폐를 주워 슬쩍했다고 고백한다. 그 때문에 그 집 여급인
고아소녀가 의심받고 쫓겨난다. 눈만 감으면 그 소녀가 원망하는 눈매로 노려보아
괴롭다고 말한다. 얼마나 경건하고 생산적인 세모 습속인가.
사람이 한 일에는 보기에 따라 잘 되었다고도, 또 잘못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자기가 한 일을 되돌아보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 가짐을 '마이너스
감각'이라고 개념화한 것은 미국의 경영하자 훼스팅거다.
그는 개인이나 기업하는 사람이나 정치하는 사람에게 마이너스감각이 왕성하면
성장을 하고 결여되면 파멸한다는 법칙을 계수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결혼을 앞둔
연인들은 상대방의 장점만 보려는 플러스 감각이 왕성하게 작동한다. 만약 장점만
보고 결혼을 하면 결혼 후에 드러나게 마련인 단점들 때문에 그 결혼은
불행해지거나 파멸로 치닫는데 예외가 없다. 그래서 훼스팅거는 마이너스 감각으로
단점을 애써 보다 많이 찾아들고 시집 장가가기를 원한다.
경건하게 지난해의 허물이나 실패나 결점을 되돌아보는 세모의 일주일은 바로
개인이나 기업하는 이나 정치하는 이에게 있어 마이너스 감각의 풍속적 보장이랄 수
있다.
해가 다 저물었다. 외래성의 망년병을 주체화, 경건하게 마이너스 감각으로 자신을
뒤돌아보는 생산적 세모풍습을 되찾는 반환점이었으면 한다.
그외 정보/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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