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의 자기보다 상위에 자기가 처해 있다고 착각하는 의식을 환상상향이라고
하며, 이 환상상향 때문에 생긴 공백이 바로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각박하게 하는 인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연전 파리로부터의 외신보도에서 세계 일류품이요, 귀족의 애용품이라는 루이
뷔통의 핸드백 본점 고객 가운데 한국인의 비율이 두드러진다는 뉴스를 본 일이
있다.
흥미 있는 것은 그 본점이 있는 파리에서 루이 뷔통의 고급 핸드백을 가진 여인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루이 뷔통뿐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세계적 최고급 시계인 로렉스나 오메가쯤 차고 있는 것은 별스럽지도 않다.
던 힐이나 뒤퐁의 라이터도 흔해 빠졌다. 여성들에게도 피에르가르댕의 스카프나
구치의 핸드백쯤 그다지 희귀한 것이 못 된다. 세계적으로 값비싼 술인 나폴레옹
코냑이나 시바스리갈쯤 마신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한국인은 없다.
외국에서는 상류층에 있는 사람도 그만한 술을 마셨다면 자랑할 이야기거리가
충분히 된다던데 말이다.
이 한국인의 외제병은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옛 우리 선조의 마음
속에서 그 병균이 양성화돼 있었던 풍토병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중종실록"에 당대 사대부들이 최고급 의상인 초구, 사라로 몸치장을 하고 옥개
없는 가마는 창피하다 하여 타지 않으려는 성향마저 있다고 사치풍토를 개탄하고
있다.
부녀자들의 두식 사치도 심하여 요란스런 가발을 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더니
이제 당물인 주취로 장식한 호화화관이 유행하여 가발을 막느니만 못하다
했고--"정종실록", 손에 들고 다니는 부채가 베 8, 9필 값과 맞먹는 명나라 것이
유행했다고도 했다.--"효종실록".
인조 때는 사치가 어찌나 심했던지 가마꾼마저도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금단을
입는다고 상소하고 있다.
역대에 혼기를 놓친 사녀가 항상 큰 사회문제가 돼 왔고 또 지방의 목민관이 해야
할 일로서 이 혼기 놓친 처녀 총각을 여의어주는 것이 큰 일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혼기를 놓친 가장 큰 이유로서 각종 문헌이 혼인 사치를 빈번히 들고 있다.
'근래에 혼인 사치가 심하여 상하 없이 당물을 쓰는 것이 관례가 되어 어려운
사람은 거의가 혼기를 놓치고 있으니 금령을 내려 주옵소서.' 하고 중종 17년에
예조가 계언을 올리고 있다. 이미 세종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외래
사치품으로써 시집살이 장만을 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어서 혼기를 놓친 사람이
많다는 실록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연산조 때는 사헌부에서 부잣집의 결혼을
신고토록 하여 의녀로 하여금 납채, 혼장, 혼물, 연찬 등을 검찰시킬 것을
상소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 선조들 모두가 이 외제병 환자는 아니었다. 선비사상은 청빈을
가르쳤고, 지족을 가르쳤으며, 수분을 가르쳐 검소하게 사는 것에 가치를 두었고
그렇게 살아낸 선조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치병에 감염될 소지는 우리 일부 한국인의 정신적 원형질에 항상
도사려 왔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소지의 형성 이유가 무엇일까?
사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가난'의 체질화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랫동안 전화 등 이변으로 최저한의 생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곧 하한선을
유지시켜 줄만한 안정시기의 지속시대가 없었기에 불안의 역작용이 상향심을
가속시켜 최고병으로까지 치솟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으로
족하지 못하고 손아귀 밖에 있는 것만을 헤아리면 항상 기근감에 허덕이며 사치를
하면서도 가난하다는 느낌에서 해방되질 못한다.
곧 지족하는 사람들은 가구나 옷, 그림, 식기 등 모든 것을 값이 비싸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맘에 들기에 산다. 곧 물건은 자기의 연장인 것이다. 이에 비해
지족하지 못한 사람은 그가 지닌 물건이 고급품인가 여부로 자기를 나타내는 척도로
삼는다. 즉 자기가 물건의 연장이 돼 버린다.
국산 술이든, 자동차, 전축, 냉장고든 내구소비재의 이름 붙이는 것을 봐도
한국인이 최고병에 어느 만큼 영합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최고를 나타내는
외래어는 빠짐없이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로열, 골드, 슈퍼, 디럭스,
프레지던트....
둘째로 분수 이상으로 자기를 과시하려는 한국인의 환상상향을 들 수 있다.
사람을 곧잘 최고한난계로 비유한다. 여느 보통 한난계는 기온이 오르면 수은주가
오르고 기온이 내리면 따라 내리는데 비해 최고한난계는 수은주가 오르면 최고
표지의 푯말을 떠받쳐 오르지만 수은주가 내리면 푯말은 그 최고 지점에 남아 있을
뿐 따라내리지 않는다. 곧 최고 온도계가 표시하는 눈금과 수은주가 표시하는
눈금과의 사이에는 항상 공백이 있다.
이것을 사람에 비기면 자기 자신이 처해 있다고 생각되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직위와 자기 자신이 실제로 처해 있는 직위와는 어느 만큼씩의 공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꿔 말하면 내가 보는 주관적 자기와 남이 보는 객관적 자기는 일치하지 않으며
이 공백이 크고 작고의 차이는 있지만 일부의 우리 한국인에게 공통된 심성의
하나로 적시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실제의 자기보다 상위에 자기가 처해 있다고 착각하는 이같은 의식을
환상상향이라고도 하며, 이 환상상향 때문에 생긴 공백이 바로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각박하게 하고 초조하게 하는 인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인자는 우리들의 많은 버릇을 탄생시킨 온상이 되고도 있다. 이를테면 값비싼
것을 분에 넘게 지니려고 하는 최고병도 이 환상상향의 환상 스테이터스를
충족시키려는 데서 파생된 정신병폐다.
우리 한국인에게 있어 최고병은 외제병과 종이 한 장 사이이기에 최고병은
무분별한 외제선호로 나타났다. 곧 한국인은 외제의 질을 따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외제라는 상표 곧 남들이 외제로 보아주니까 산다 해도 대과가 없다. 왜냐하면
남에게 과시하고 싶어 환상적으로 상향시킨 스테이터스만 충족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외 정보/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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