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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와의 대화/성인 환자를 위하여

13. 죽음을 앞둔 환자의 '알 권리'

by Healing New 2020. 6. 2.

만성병으로 신음하는 환자나 또는 임종이 가까운 환자와 대화하는 일은 
정말 힘들다. 이는 환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의사 
자신에게 있다. 많은 의사들은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는 나머지,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 앞에서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두려움 때문에 병상방문을 가능한 한 꺼리거나, 아니면 
보호자나 간호사를 통해 겨우 돌봐주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어쩌다 병실에 들어서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그곳을 벗어나려 한다. 
환자가 아프다거나, 못 먹는다거나, 잠이 오지 안는다는 등의 고통을 
호소하면, 의사는 즉각적으로 "곧 처방을 해 드리지요" 라며 밖으로 나와 
버리기 일쑤다. 이러한 의사들에게 더 이상 환자 진료를 기대할 수는 없다. 
환자와 시간을 좀더 가져달라는 것은 이런 의사에게는 오히려 잔인한 짓일 
뿐만 아니라 환자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과 이야기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의사들도 많이 있다. 이런 환자들과의 대화를 기피하는 의사들은 이 
과정이 치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아예 모를 수도 있고, 또 처음 
경험하는 일일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죽음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 또 
편견을 가지고 대해 왔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 
것조차도 인식을 못하고 지내왔다. 시간이 없다거나, 또는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는 등의 어설픈 변명이 그런대로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이런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에서 죽음을 
논의하는 운동들이 활발해졌고 이러한 변화는 무척 바람직한 일이다. 이 
변화는 핵심은 죽어가는 사람을 마치 이미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지 말자는 
데 있는 듯하다. 그들을 찾아가서 함께 앉아 이야기하고, 또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 주어야 한다. 즉, 죽어가는 환자도 살아있는 한 인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임종을 앞둔 환자와의 이런 접근은 무언가 문제의 실마리가 풀릴 것도 
같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의사 자신의 죽음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큰 장애 요인이다. 서서히 다가서는 죽음을 가다리는 환자를 보면서 
의사 자신도 심경이 다가서는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를 부면서 의사 자신도 
심경이 착잡해짐은 말할 것도 없다. 의사이기 전에 인간적인 비애와 회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의사로서의 무력감은 제쳐 두고라도, 이 환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 것인가가 의사를 가장 힘들게 한다. '죽는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인가? 한다면 어떻게, 또 언제 할 것인가' 등의 문제로 
환자와의 대화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 의사가 죽어가는 환자를 쉽게 
대하려면, 임종을 앞둔 환자를 아주 많이 경험하여 전혀 동요되지 않는 
수밖에 없다. 그때서야 의사는 이 문제에 있어 원하는 대로 쉽게 
이야기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환자는 어떠할 것인가 
환자의 고통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임종을 앞둔 환자는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큰 고통을 받고 있거나, 
당장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의사가 할 일은 
바로 환자의 이런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약물이나 물리적인 방법으로도 물론 가능하지만, 더 좋은 방법은 환자와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무슨 약을 어떻게 쓰느냐보다 더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말해 줄 
것이냐는 문제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환자와의 
대화에서 몇 가지 원칙만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상황을 현실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환자의 
주변정리가 되었나를 살펴보는 일이다. 유언장 준비에서부터 사업관계, 
집안문제 등이 잘 정리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가족이나 친구, 
변호사를 통해 쉽사리 알 수 있는 일들이지만, 만약 준비가 되어 있지 
있으면, 환자에게 주변정리를 권유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가 곧 죽는다고 
단도집입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도록 한다.
  그러나 주변을 정리하기를 몹시 주저하는 환자들도 있다. 이런 일을 
서두른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라도, 의사는 잠자코 있기보다 꼭 필요한 일은 할 수 있도록 환자를 
격려해야 한다. 
  문제는 아직 남아 있다. 환자에게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어떤 의사들은 솔직히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들의 주장은, 
환자들은 사실을 아는 것을 감사히 여기며, 어떤 경우에도 사실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한편 그런 이야기를 환자에게 해서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절충형으로 환자의 의사에 따른다는 의견도 
있다. 즉, 환자가 꼭 알고 싶어할 경우에는 이야기해 주고, 그렇지 않을 
때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추세는 숨기는 것보다는 이야기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다. 
일단 이야기를 하고 나면, 쉬쉬하고 숨길 때보다 오히려 환자와의 대화가 
쉬워진다는 결론이다. 이런 추세는 죽어가는 환자도 합당한 대우를 해 
주고, 더 이상 버려진 채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이제 
환자는 구석방에 버림받은 사람도 아니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취급받지 
않아도 된다. 이런 접근은 마치 환자도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을 옹호하는 입장인 것 같다. 그러나 알 권리가 곧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건 마치 환자가 알 권리가 있는 
이상, 반드시 알기를 선택할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오해는 
권리라는 개념을 잘못 아는 데서 출발한다. 알 권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몰라도 될 권리'를 인정 해야 한다. 따라서 알 권리가 있다고 모든 
환자에게 그가 곧 죽을 것이란 이야기를 하거나, 그래서 죽음에 
직면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환자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지면 은연중에 환자 스스로가 앞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할 때를 발견할 수 있다. 언젠가는 다가올 자기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마음의 자세도 이야기할 것이다. 
그 죽음을 용감히, 그리고 조용히 위엄을 가지고 맞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알고 싶어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환자와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환상, 미신, 온갖 의문이나 불안 등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단순히 들어주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환자가 괴로웠던 일, 
후회되는 일, 화가 난 일 등 죽고 나면 아쉬워할 일들에 대해 실컷 
이야기하도록 격려해 주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환자가 알고 
싶어하지 않을 때는 죽음에 대한 생각마저 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의사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의사는 
죽는다는 사실에 직면하지 않을 수 있는 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또한 죽어가는 환자에 대해 보가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도움을 주려면 
의사 자신도 도움이 필요하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막연히 의사더러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에게 보다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또 인간적인 대우를 하라고 말하는 것은 환자를 대하는 의사에게 큰 
도움이 못 된다.
  의사들에게는 우선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진료적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 환자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의사 자신부터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들어야 하고, 또 그게 무슨 뜻이며, 무어라 말해야 할 
것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즉, 의사는 대화에게 어떤 자세로 임하는 것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만일 의사가 이러한 
치료적 합리성을 가지고 환자를 대한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당혹감도 
줄고 그런 환자들을 포기해 버리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이것은 임종을 
앞둔 환자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나 친척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이들 
환자를 위한 최선일까를 생각하기 앞서, 의사는 환자 주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 혐오감, 죄책감, 홀란 등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환자에게는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앞서 말했듯이, 환자가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죽음을 편하게 
맞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환자가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은 거의 없다. 
대화중에 환자가 그런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 이상 말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어떤 환자는 꼭 그 사실을 알고 싶어한다. 언젠가는 죽을 몸인데 
죽는 것쯤 두려울 것 없다거나 또는 확실히 죽는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나을 것 같다는 환자를 만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명심해야 할 것은 그 환자가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속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의사는 항상 환자가 용기있고 자신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환자가 언제나 자기 생각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대로 가르쳐 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심 그는 죽는다는 사실을 전혀 알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환자와의 대화에서는 조금만 세심하게 관찰을 하면, 그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환자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키기 마련이다. 의사는 그의 눈에서, 표정에서, 목소리에서, 
아니면 사용하는 어휘 어딘가에서 말과는 다른 숨겨진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비록 의사가 그 불안을 미처 읽어내지 못했다 할지라도 죽어가는 
환자의 마음속엔 언제나 불안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틀림없다. 이런 
환자일수록 의사의 일거일동에 신경을 쓰고 작은 일에나마 희망적인 
징조가 있으면 거기에 매달린다. 사실대로 이야기해 달라고 계속 조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그렇게 묻는 것뿐이지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때론 기적을 낳는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느끼고, 
죽음이 눈앞에 닥쳐와도 아무렇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심리를 
부정이라 한다. 이는 마치 진통제와도 같아서, 모든 아픔이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진통제는 고통과 괴로움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므로, 어떤 의미에서 는 진통제도 일종의 부정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진통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고통을 
주는 근원적인 병소 부위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부정심리는 어떤 괴로움이나 아픔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일시적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 마음의 힘이란 정말 강력하고 효력이 
미치는 범위가 광범위하므로 이것을 잘만 이용하면 어떤 약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체중도 자꾸 감소하고 숟가락조차 들기 힘들 정도인 암환자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도 장래를 계획하고, 또 퇴원 후 할 일을 걱정하는 
것은 곧 죽음을 부정하는 무서운 마음의 효과다.
  이런 역할을 하는 부정은 환자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진행된다. 
그리고 그 형태는 환자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의사나 가족들이 하는 말은 
환자의 부정심리를 부추기기도 하고 억제시키기도 한다. 몰론 환자의 
고통이 너무 심하면 부정심리도 큰 역할은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부정의 심리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 어떤 의사들은 이를 
저지하고 환자가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심지어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렇게 똑똑하던 환자가 어쩌면 이렇게 바보스러울 
수 있을까 하고 어이없어 한다. 또 이런 의사일수록 환자에게 적절한 
처방을 못해 주고, 진통제를 주는데 매우 인색하다. 환자는 곧 
죽어가는데도 습관성이나 중독을 염려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환자가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고 조급해 하거나 언짢아하지 말고, 환자의 
자연스럽고 내재적인 방어노력을 관대하게 이해하고, 죽음을 부정하는 
환자에게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환자를 위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건강한 사람이나 치유 가능한 질병을 앓는 환자가 이런 부정의 심리상태를 
보이면 의사는 환자가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 
'이 정도야 괜찮겠지' 하고 설탕을 마음대로 먹어대는 당뇨병 환자라면야 
의사로서 즉시 그 병의 심각성을 이야기해 주고 병을 부정하는 태도를 
고쳐야 함이 마땅하나 임종을 앞둔 환자를 대할 때는 이와는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죽음을 완전히 부정하는 환자에게 죽는다는 사실을 굳이 
인식시키려 드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환자에게 
불안감만 가중시키게 된다.
  급성백혈병을 앓는 환자가 곧 죽게 될 것인지 가르쳐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아주 침착하고 조리있게 물었다. 그는 어른이고, 교육도 받을 만큼 
받았고, 또 종교인이기 때문에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진 않는다고 했다. 
자기의 병을 확실히 알아야 가족과도 서로 숨기는 것이 없어 좋고, 또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도 많다고 했다. 한동안 망설이던 의사는 이 
환자야말로 죽음에 초연한 사람이니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해야 
환자나 짧으나마 보람된 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되어 결국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 환자는 고맙다는 말을 하며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는 남은 시간을 친구도 만나고, 여러 사람과 
이야기도 하고, 회고담도 나누는 등 유용하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는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고, 그 자신은 관찰자나 기록자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다 며칠 
후 갑자기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자 그의 불안은 극에 다다랐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정신착란으로 죽는 날까지 그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는 차라리 
죽는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뉘우쳤다.
  심장병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는 환자가 있었다. 그는 매우 불안해하며 
의사나 간호사에게 병세가 어떠냐고 거듭 물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환자에게 그 병은 회복되기 어려우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이제 언제 죽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그 환자는 불안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너무도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주치의는 병실의 모든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그의 증세는 많이 호전되었으며 완전히 회복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을 지시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환자는 곧 
진정되었고 미소도 되찾았으며, 가족과 담소를 즐기며 잠도 잘 자게 
되었다. 이렇게 편안한 상태가 나흘 동안 계속되었고, 그는 편안히 숨을 
거두게 되었다. 
  죽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심리는 환자에 따라 그 이유가 각양 
각색이다. 물론 죽음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현실로 
다가올 육체적 고통과, 죽음과 연관된 개인적인 치욕감을 생각하면 
두려워진다. 더구나 사후를 생각하면 그 두려움은 극에 달한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겪게 될 두려움을 생각해 보면, 이를 외면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앞서 말한 부정의 심리도 그런 두려움을 
피하려는 노력의 하나이다. 환자들은 부정심리를 통해 자신이 그와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감출 수도 있다. 
  분노, 후회, 욕구불만, 질투, 실의 등의 감정도 죽음과 함께 부정하는 
흔한 것들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죽어가는 환자들에게서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환자 자신도 그런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이런 환자들이 분노를 표현한다고 놀랄 이유는 없고, 이를 못마땅해하게 
여겨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특히 환자가 젊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면 어찌 화가 나기 않겠는가? 기만당한 것 같고, 
무엇인가를 억지로 빼앗긴 듯하고, 누구에게 따돌림을 당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과 지금껏 희생해 온 
것에 대해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건겅하게 살아갈 사람들에 
대해서 질투도 나고, 밉고 화가 나지 않겠는가? 가족들이나 의사도 그러한 
기분을 환자에게서 느낄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다만 환자나 가족이 애써 
피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서로가 이러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죽음 
그 자체를 부정하는 강력한 동기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정말 죽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자살이나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죽음 자체를 부정할 필요가 생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며,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오랜 세월 죽음을 
생각해 온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위험한 운동이나 직업을 고의로 
택하기도 하고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사고나 병도 자주 나는 등 자해행위가 
잦아, 한 마디로 위험하고 자기 파괴적인 인생을 산다. 이들에게는 어떤 
이유로든 죽음의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또 
죄책감으로 고민하는 환자라면, 죽음이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므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또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너무나 견디기 
어렵고, 오랜 기간 계속되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런 환자들은 무슨 이유에서든 죽음을 소망하고, 또 다가오는 죽음을 
환영하면서도, 이것이 곧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용납될 일아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부정해야 한다. 즉, 죽고 싶은 생각을 숨기기 위해서 
죽음이 다가오면 오히려 이를 부정하게 된다. 
  죽음을 부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죽음이란 곧 창피한 것이요, 남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창피하고 당혹스러워서 남이 알까 두려워하고, 자기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부끄러움과 거부감은 흔히 
특정한 질병과 관계가 있다. 암이나 심장병과 같은 위협적인 질병으로 
죽을 때는 더욱 그런 경향이 높아진다. 이런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부끄러움은 병 때문이든, 혹은 죽음 자체 때문이든, 환자의 남은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남이 자기를 버리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창피나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사람이 찾아오면 마음이 편치 
못해서 불안하기 때문에 방문객을 멀리 하거나 아예 찾아 오지 말라고 
직선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내가 의대생일 때, 허름한 양로원에 누워 있는 어느 친척 노인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양로원 자체가 마치 죽음의 집 같았다. 시설이나 
환경이 너무 지저분했다. 방안에 짙게 밴 대, 소변 냄새가 마치 죽음의 
냄새처럼 느껴졌다.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당장 돌아가고 싶었고, 
겨우 그 환자를 찾아을 때는 한시바삐 빠져나갈 궁리만 했다. 오래 전에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인사를 하자 처음엔 
반가워했으나 이도 잠시 뿐, 곧 어색해 하고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그 
노인 역시 나 못지않게 불안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앉을 의자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나를 쳐다보던 그 노인은, 방도 더럽고, 자기도 이렇게 추한 
꼴을 하고서는 더 이상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대 옆에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내 
손을 잡아, "제발 돌아가 줘요" 라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나는 그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환자의 '제발 돌아가 줘요'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확실히 모른다. 정말 내가 가기를 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 환자의 처참한 몰골에도 불고하고 더 있어 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내게 
빠져나갈 기회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 환자가 제발 가 
달라고 해 주기를 기다리기나 한 듯 나는 그곳을 벗어났으며, 오늘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역시 그렇게 행동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러한 환경에서 방문객을 맞는다는 자체가 창피하기 때문에 자신을 
격리시키게 된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환자에 따라서 지나친 당혹감으로 
인해 결국 자기 자신을 격리시켜 버릴 수도 있다. 환자는 이런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때로는 죽음 자체를 부정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최근에 위의 경우와는 아주 다른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환자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점에서는 유사했다.
  임종에 가까운 한 남자 환자를 일 주일에 두 번씩 5개월 동안 
방문했었다. 내가 찾아갈 때마다 자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것에 놀라워 했다. 그는 흥미롭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꾸만 
지루하지 않는냐고 물었다. 그뿐 아니라 하던 말을 멈추고 갑자기 
스스로를 탓할 때도 많았다. 예를 들어, 조금 전 자기가 한 말은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리곤 이 모든 것이 병 
때문에라고 한탄하며,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곤 
했다. 심지어는 자신을 주먹으로 때리기도 했다. 모든 말과 행동이 자신은 
이제 형편없고 부끄러울 뿐이라는 것을 냉혹하게 말해 주는 셈이었다. 
이렇게 되니 나 같은 방문객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침울하고 불쾌한 
감정이 점점 쌓였고 그 환자의 말처럼 더 이상 찾아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환자의 이런 태도는 찾아오는 사람이 빨리 가 
주기를 재촉하며 문을 열고 기다리는 셈이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환자를 방문하는 것이 점점 내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환자는 내게 자기를 여전히 찾아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친구로서 또는 의사로서 계속 
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주치의가 우울증에 빠진 환자라고 살펴보라고 
해서 온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가능한 한 사실대로 말하려 했다. 그 환자의 주치의가 보낸 것은 
아니고, 주치의가 우울해 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것은 나도 이미 말고 있던 
사실이었고, 환자 자신도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덧붙여 
내가 그 환자를 담당한 의사는 아니지만 병중에 있는 친구이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물론 내가 그를 안쓰러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 봐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가 찾아오는 문병객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내가 느낀 
바를 말했다. 그 자신이 애써 찾아와 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여 몰아내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반발하며 자기는 그런 적이 없으며 자기가 
형편없이 되어 찾아올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틀렸다고 
말하고 찾아오는 사람을 서둘러 돌려보냈던 그의 행동을 구체적인 예로 
제시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오래 있느냐고 되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하며, 아마도 그에게는 누가 뭐래도 오랜 시간을 보내 
줄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또한 내 
자신이 그 환자를 방문하는 것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 찾아와서 오래 앉아 
이야기하다 보니 더욱 깊이있고 중요한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그 환자도 동의했다. 그 역시 
시간이 흐르고 방문이 되풀이되니 자신의 일생, 가족, 일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까지 점점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이 환자는 죽음을 부정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 환자도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직접 언급하는 일도 없었고, 때때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죽음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적극적이지는 못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탓하고 부끄러워하며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어색해 하는 것으로 보아 죽음에 직면하는 부담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듯하다. 그 환자같이 자존심이 강하고 독립적이고 
남의 도움받기를 꺼리는 사람이 병들어 할 수 없이 남에게 의존내야만 
하고, 자기 한 몸 주체하기도 어렵고, 더욱이 보는 사람마다 가엾게 여기는 
현실을 참기란 마치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으리라. 따라서 병이 깊어감에 
따라 나타나는 신체의 변화도 유난히 창피하고 때론 참을 수 없었다. 또한 
이루지 못한 일이나 이제는 소용없게 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절망하기도 
했다. 이런 상태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환자는 아직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환자의 경우라면 아마도 죽음을 부정하여 그러한 
갈등을 해결하지 않았을까? 죽음을 부정할 수만 있어도 스스로의 상황을 
그렇게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찾아와 준 
데 대해 감사를 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환자들이 죽음을 부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특이한 이유들이 있기 
마련이므로 환자의 그러한 노력을 좌절시키는 문제는 신중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부정의 심리는 참으로 묘하다. 현실적인 불행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부정할 수 있으면 우선 얼마 동안은 편안해 지지만, 다시 불행의 아픔은 
되살아난다. 이 정도는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이 부정의 심리가 어떻게, 
또 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의사라면 이런 것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환자와 성공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
  부정하는 심리는 환자 자신이 완전히 의식하지 못한 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산물인 부정심리는 
불행을 알면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기는 아주 건강하다고 믿는 심리가 곧 부정이다. 이러한 심리적 부정이 
잘 성립되면 자기는 죽지 않는다고 믿게 된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부정의 묘한 
심리이다. 그는 단지 알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다. 마치 가족 중에 창피한 
일을 당했을 때나, 사업에 실패한 가장이 아무 일 없는 듯 가정에 돌아와 
여느 때처럼 즐거워하는 그러한 심리와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가족 중 
한 사람이 횡령이나 강간으로 체포되는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 때,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집안 사람들은 그 치욕스러운 사건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평소처럼 행동하려 한다. 
  이러한 부정 심리는 어느 환자에게든 조금은 작용한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아픔이나 절망, 그리고 죽음을 의식하지 않은 채, 쓰라리고 암담한 
최후의 진실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는 평상시처럼 장래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어느 정도 자신에게 닥쳐올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때에만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임종에 가까운 환자를 지켜보며 
우리가 궁금한 것 중의 하나는, 저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 모를까 하는 점이다. 그 것을 알아내기는 쉽다. 환자가 죽음에 
대해 일체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는 분명히 죽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요, 나아가서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환자는 죽음 
앞에 어쩔 수 없는 자신을 이미 받아들였다는 의미도 된다. 
  부정의 심리는 환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나 심지어 
의사까지도 환자의 죽음을 부정할 수 있다. 환자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가족들도 무의식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게 되어, 환자가 죽는 일 
따위는 없다고 믿어 버린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의사에게도 이런 
경우는 있다. 이렇게 되면 환자는 죽음을 심리적으로 부정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아주 불안하게 된다. 자기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데 자기를 
걱정해 줄 가족들이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면, 죽음의 길을 혼자 
가야 하는 두려움이 온다. 이와 같이 부정의 심리는 묘한 것이어서, 주위 
사람들이 부정을 하지 않을 때에만 잘 작용할 수 있다. 
  임종이 가까우면 자신을 주체하기도 힘들고, 가족의 도움없이는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죽는다는 것은 포기를 강요당하는 상태이고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주위의 가족이 자기가 
죽음에 임박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가 죽을 때까지 잘 돌봐주기를 
원한다. 만일 환자가 가족이나 의사까지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을 알면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죽음의 길을 혼자서 
가야하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죽어가는 환자가 어린이일 경우 부모들의 부정심리는 더욱 강해진다. 
자식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엄청난 충격이므로, 임박한 죽음을 
믿지 않음으로써 감정상태를 그나마 보호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이야 이해가 되지만, 이 경우 죽음을 앞둔 어린이는 더욱 
힘들어진다. 부모가 죽음을 부정하고 있으니, 혼자서 죽음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둔 열 살 난 소년이 있었다. 어린이 자신도 자꾸 야위어 가는 
것을 의식하고 불안해 했다. 그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행여 죽는 건 
아닌가, 죽은 후 어떻게 되는가, 왜 죽어야 하는가,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가 등을 물었다. 가족이나 의사들도 괴롭고 소년이 안쓰럽기도 하여,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이제 곧 나을 
것이고 머지않아 학교에 갈 수 있을 것이라며 책을 사주기도 했다. 아이가 
어쩌다가 죽음에 대하 이야기를 꺼내면 그들은 오히려 화를 내어 
꾸짖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에 닥친 부모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가 
좋아하는 음식, 듣고 싶어하는 음식, 읽고 싶어하는 책, 갖고 싶어하는 
장난감 등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주었다.
  점쟁이도 부르고, 무당굿도 하고, 온갖 미식적인 괴상한 짓까지 소년에게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보았다. 죽음을 부정하기 위한 거의 광적인 
심리상태였다. 무엇인가 좀더 도움이 되는 것을 해달라며 의사까지도 
못살게 굴었다. 이젠 아이나 가족, 그리고 의사도 완전히 기진맥진해 
버렸다. 결국 이 의사는 보모들의 혼란한 감정상태와 소년의 점점 
커져가는 공포를 보다 못해 내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상황에 직접 개입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감정이 고조되고 불행이 겹친 상황에서는 외부인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외부인의 감정이나 생각은 그 심각하고 
두려운 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그 소년이나 
부모를 전혀 몰랐고, 의사도 안면이나 있는 정도였으므로, 그나마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내용을 알고 감정적 동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 의사의 부탁을 거절할까도 생각했다. 나까지 
휘말려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도 나의 이런 반응과 
똑같은 심경에서 저렇게 되었으려니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은 나머지 소년이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어디엔가 생명을 구할 방도가 있다고 믿게 된 
것이리라. 무엇보다도 이렇게 부정함으로써 일단 그가 죽는다는 불가피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부정만 하고 있으니 소년 자신은 혼자서 계속 
불안해 해야만 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우선 주치의와 대화를 한 후 부모, 그리고 필요한 
경우 소년과 이야기를 나우어야 될 것 같았다. 내가 그 의사에게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무슨 기적이라도 바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그는 너더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이라고 하면서 나를 찾아온 것을 
후회된다고 했다. 이런 말이 내 기분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오히려 내가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따라서 화가 난 그와 아무 
말없이 마주앉아 있었다. 한참 후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 귀여운 애가 
죽는다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죽은 두 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견디기 어려웠던 심경을 토로했다. 또 다시 아이의 죽음을 보느니 
차라리 소아과의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다짐하듯 말하기도 했다. 그는 
한참 동안에 감정에 복받쳐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죽음에 대한 자기의 
느낌을 말하더니 이 아이 문제만 해도 자기는 현대의학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보호자가 하자는 대로 푸닥거리도 하게 내버려 두었고 자신이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변한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고 했다.
  내가 할 일은 이 의사와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했다. 환자의 죽음을 
인정한 이상, 그는 다시 침착한 의사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환자의 부모가 
죽음을 부정하고 있는 현실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이런 상황이 
죽음을 앞둔 소년에게 끼치는 영향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환자의 부모와 만났고, 환자와도 대화를 했다. 물론 처음엔 이전보다 더 
동요되었지만 그것은 잠시뿐이고 이제 그들은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우왕좌왕하던 때와는 달리 한결 차분해졌다. 그들의 표정에는 슬픔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런 슬픔은 적절한 감정의 표현이 아닐까?
  이렇게 환자의 주변 인물들의 감정상태가 안정궤도에 접어들자, 
소년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여러 가지를 끊임없이 
캐묻는 대신, 훨씬 안정된 상태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당황해서 안절부절하는 대신 진한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꼭 필요한 것이요, 의사의 계속적인 관심으로 
부모 역시 더 이상 죽음을 부정하는 일은 없었다. 
  가족들은 환자의 부정하는 심리적 반응뿐만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생존자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환자가 죽은 후에도 자신들은 계속 살아갈 것이라는 것에 대해 매우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되며, 이 때문에 죽음이나 환자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람직하지 못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슬픔이나 애도, 이별의 아픔 등은 물론 견디기 힘들지만,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이며 치료적인 의미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생존자 반응은 그것과는 달리 치료에 도움도 안 될뿐더러 
인간적인 의미로 이해되거나 존중될 성격의 것도 아니다. 이것은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한 복잡하고 설명하기 곤란한 분노와 죄의식이 주를 
이룬다. 이런 감정이 환자가 죽기 전에 일어나면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되고, 또 죽은 후에는 정상적인 애도 
반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존자 반응은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사고사, 또는 너무 일찍 죽었다고 
판단되는 경우 가장 심각하게 나타난다. 특히 천재 지변으로 인해 가족이 
죽고 자기만 살아남은 경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생존자 반응 중 가장 
처절한 것이라면,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이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렇게 끔찍한 경험을 하고 살아남은 것만 두려운 일인데, 
생존자들이 단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의식까지 느낀다면 그 정신적 
부담이란 극단적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기만 살기 위해 마치 죽음의 
구렁텅에서 경쟁이나 한 듯한 죄책감마저 들게 되면, 그 부작용은 
병적으로 심각해지게 된다. 
  위의 경우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이와 유사한 생존자 반응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으며, 죽은 사람에 대한 증오의 감정도 생존자 
반응의 한 가지다. 이 증오심은 의사도 얼른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증오심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도의심과, 때론 
환자를 향한 진정한 사랑과 애도 속에 함께 가려져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의사가 거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 죽어가는 환자에 
대해서 분노의 감정을 품을 수 있으며, 이를 비난할 수도 없고, 그 심증을 
헤아리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한 분노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하려면 환자나 그 가족의 예사롭지 않은 행동을 주시해야 
한다. 너무 극단적인 정신적 고통, 히스테리, 우울, 불안, 비정상적인 
사랑이나 애도의 표현도 생존자가 가질 수 있는 적대감과 죄책감에 대한 
반작용이나 쉽다.
  간암으로 신음하고 있는 남편을 걱정하느라 오히려 그 아내가 지쳐 
쓰러지게 된 경우가 있었다. 참으로 가슴아픈 상황이었다. 50대인 남편은 
건강하고 사업에도 성공했지만 갑자기 발병하여 곧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의사로부터 그가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순간에 아내는 
넋을 잃었다.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남편의 시중을 더 잘 들기 위해 
집에서 치료하기를 고집했다. 간호사도 있었지만 자기 스스로 남편의 
간호를 도맡았다. 남편이 자는 동안에는 옆에서 지켜보고 앉아 있었으며, 
집 주변을 산책할 때에도 항상 옆에서 부축했다. 밤중에 환자가 일어나면 
따라 일어나 심부름도 해 주고, 약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같이 앉아서 
이야기도 해 주었다. 또한 책도 읽어주고, 편지도 써주고, 전화도 대신 해 
주는 등 그녀의 하루 일과는 완전히 남편을 위해 바쳐졌다. 그뿐 아니라 
환자가 하던 사업도 재정비했다. 말만 들어도 지칠 정도였다. 거의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항상 자기가 충분히 못 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부인이 갖아 걱정했던 것은 남편의 병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지, 
남편이 그의 병세에 대해 물어올 때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 그리고 그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걱정일 뿐이지 남편은 아직 한 번도 자신의 병세에 대해 
걱정조차 해보지 않고, 막연히 피곤해서 쉬는 정도로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사업이나 다른 문제에 대한 걱정만 할 뿐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내는 행여 남편이 병세를 물어올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 
쩔쩔매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자기를 두고 먼저 죽는 남편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부인은 한참 생각을 하더니, 사실 자기는 항상 
남편보다 자기가 먼저 죽을 거라고 믿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이 너무도 확고했기 때문에, 인생계획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 즉, 수년 전 죽을 때를 대비해서 모든 정리를 끝내고, 그 후로 
계속 이를 수정해 올 정도였다. 모든 서류, 재정상태, 심지어 장례식 
계획까지 철저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이 모든 일은 자신이 죽은 다음 
남편이 일을 처리하는 데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기가 
막히게도 모든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뒷일을 감당해야 
하다니, 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남편은 모든 정리를 끝냈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자신이 죽은 후 
아내가 일을 처리하는 데 두음이 되도록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자기 사업이나 채무 관계, 보험, 은행 거래 등 아무것도 
정리해 놓지 않고 엉망인 상태로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남편이 미웠고, 
원망스럽다고 이야기했다. 잠시 후 냉정을 되찾은 그녀는 자신이 남편에 
대해 이렇게까지 화가 나 있고 미워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의 행동이 화가 나게 만들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그 부인은 자책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죽어 
가는 남편을 미워하다니 큰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좀더 이해심을 
가지고 관용할 수 없는 자신의 미흡함을 꾸짖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남편은 
너무 무심하다면서 남편의 무성의한 행동을 예를 들어가며 이야기했다. 
도저히 남편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참 후 다시 "죽어 가는 
사람을 두고......" 하면서 스스로를 책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증오와 자책의 되풀이였다.
  결국 우리의 대화는 어째서 부인이 남편을 위해 지칠 정도로 모든 일을 
도맡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가 하는 문제에 이르렀다. 결국 남편에 
대한 억제된 분노와 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헌신적으로 간호할 수밖에 없었음을 부인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두려웠던 것은 만일 남편이 병세를 물어오면, 방금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런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고 이와 유사한 
경우가 빈번히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편은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하지 못하여 언제나 부인이 뒤처리를 해왔던 것이다. 그 
부인은 남편은 위해 문제를 해결해 주고 중요한 일을 잊지 안게 도와주는 
일 따위를 싫어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만족감도 맛보았을 것이다. 
우선 이런 일을 처리해 주면서 남편보다 우월하다고 느꼈으며, 남편도 
부인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또한 모든 일이 깨끗이 
정리된 상태여서 직성이 풀리는 부인의 생활방식에도 맞았다. 죽음에 
임박하여 벌어지는 상황은 이제까지의 결혼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남편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부인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부인은 이제까지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부담을 지게 되었다. 부인이 남편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야기하는 동안 많은 문제점이 분명해지고 점점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 부인은 울었다. 눈물을 머금은 얼굴에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기는 남편을 무척 사랑한다고 했다. 다만 때로 
남편이 너무 무관심해서 죽도록 미울 때가 있긴 했지만.
  가족의 사망은 출산이나 결혼처럼 여러 가지 갈등을 야기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이러한 갈등의 양상은 새로운 것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으로부터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이 
죽음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래된 
실망감이나 증오가 오래 된 기쁨이나 만족과 어우러져 가족의 죽음이라는 
비극에 혼란스러운 배경 노릇을 한다. 이럴 때 의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가족의 복잡한 반응을 무마시키고 도움을 주어, 결국 환자를 
편하게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의사는 죽어가는 환자나 혹은 
가족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묘한 감정들 - 부정, 증오, 죄책감 -을 잘 
분석, 이해하고, 이를 중재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내용을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환자가 죽은 후에 
남을 가족이나, 혹은 부정의 심리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강조를 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임종을 앞둔 환자를 위해서는 가족의 이해와 협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덧붙이고 싶다. 가족이 갈등을 극복하여 환자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들은 죽어가는 환자를 
포기하지 도와줄 수 있게 된다. 이런 일이 전제되어야 환자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지 아닌지, 즉 자신의 죽음에 직면할 것인지 
부정할 것인지를 보다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비록 환자가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자 해도 그가 반드시 죽음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할 것이란 
가정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도 죽음을, 특히 자신의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가 자연스럽게 취하는 방어의 방법에 따라주기만 
하면 된다.
  때로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은 기꺼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다고나 할까. 때로는 철학적이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죽음에 초연할 수도 있고 자연스런 인생의 연장으로, 
또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보통사람에게는 
죽음이란 불가사의한 것이고, 피하고 싶고, 화제로 삼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의사는 그것을 반드시 사실대로 말할 필요도 없다.
  죽음 자체야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무언가 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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