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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와의 대화/성인 환자를 위하여

16. 상실과 소외, 정신 착란증을 부른다

by Healing New 2020. 6. 2.

정신 착란증(혹은 섬망증)은 아주 특이한 병으로, 가벼운 증세일 때에는 
크게 신경쓸 것이 없으나 심한 경우에는 무서운 병이 된다. 정신 착란증은 
여러 가지 증세가 복합되어 나타난다. 대개의 증세는 심한 노이로제 
같지만, 환각과 망상을 동반하는 특징 때문에 정신병과도 비슷하다. 망상과 
환각의 원인이 되는 현실과의 단절은, 정신 착란증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정신 분열증 같은 정신병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정신 분열증과는 달리 정신 
착란증에서의 단절은 가볍고 일시적이며 환자의 성격 내면에까지 파로 
들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정신 착란증의 환각과 망상은 얼핏 보기에는 
정신 분열증의 증세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다르다.
  환각이나 망상이 생기는 원인은 아주 단순하다. 무서운 현실을 
부정하려는 심리에서 기인한다. 정신 착란증의 환각과 망상은 대개 환자의 
현재 상태를 부정하기 위한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상징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보통 그들의 상징적 진의(진의)는 현재의 문제들을 감출 뿐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실제 상황과 상반되는 세계와 신념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혼돈 상태에서 지적 능력이 일시적으로 마비된 
착란환자가 '나는 수학의 천재가 되었다'는 환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아들이 급사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갑자기 착란증을 일으키면서 아들이 
살아 돌아온 환상을 보는 경우나, 시력을 잃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는 환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갈증을 못 견뎌 거의 광적이 된 사람이 사막에서 물을 마시는 환각을 
본다거나,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바다에서 항로를 잃은 선원이 육지의 
환각을 보는 것은 그 원인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비록 망상이나 
환각이 불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불쾌한 현실의 문제들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란 것을 염두에 두면 이해하기 쉽다.
  환자가 정신 착란을 일으키면 옆에 있는 사람도 정신을 못 가누게 된다. 
그러나 정신 착란의 원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신체적, 화학적, 
또는 심리적 요소 중 어느 하나 또는 셋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생긴다.
  정신 착란증의 증세가 광범위하고 불가사의의 의해 보여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시간을 들여서 관찰하면 비록 증세가 거칠고, 심하고, 
엉뚱한 것일지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원인이 한 가지만이라고 속단하지 말라. 정신 착란증의 원인이 
한 가지인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 몇 가지 요인들이 상호 작용을 해서 
착란을 일으킨다. 감기로 열만 올라도 착란증이 올 수 있다. 특히 어린이나 
허약체질인 사람들은 조금나 열의 올라도 착란을 일으킨다. 술을 마셔 
취하는 것도 일종의 착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모든 독성물질에 의한 질병은 정신에 영향을 주어 착란증을 일으킨다. 
신체로 들어 온 독성물질은 착란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많다. 한가지 
예로, 알코올은 착란증을 일으키는 가장 흔한 것이고, 알코올에 의한 
진전섬망은 가장 치명적인 착란증이다. 피로, 신체, 외상, 굶주림도 착란의 
중요한 원인들이 된다.
  어떤 원인에서 온 것이든 착란증의 심리적 내용을 이해하는게 중요하다. 
환자의 심리를 이해하면, 원인을 이해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심리적 쇼크, 스트레스, 그리고 상실감이나 갈등이 없었나를 찾아야 
한다. 정신 착란을 악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심리적 상황은 환자를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떼어놓는 경우인데, 특히 친한 사람들, 친숙한 장소, 자기 
소유물, 그리고 익숙한 자극으로부터 떼어놓는 경우이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거나, 혹은 이사를 해서 낯선 곳으로 가거나, 직장을 옮겨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일하는 것도 그로 하여금 현실감을 상실케 하여 
착란증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익숙한 소리, 장면, 냄새, 
접촉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괴로운 일이며, 멀쩡한 사람을 
정신 착란증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입원한 환자가 가끔 착란증에 빠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환자는 그때까지 정신 건강을 지탱해 주었던 물건들을 
빼앗기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접촉이고, 친숙하게 의지했던 
사람들과 물건 대신에, 완전히 낯선 사람들과 낯선 환경속에 있게 된다. 
이는 마치 나침반은 있으나 알고 있던 모든 표지판이 없어져 버린 것과 
같다고 하겠다. 
  게다가, 입원한 환자의 정신기능은 약물로 인해서 약해지기 쉽고, 그렇게 
되면 환자는 나침반마저 잃게 될 지도 모른다. 환자를 안정시키기 위해 
쓰는 진정제, 수면제, 진통제는 착란증을 일으키기 쉬운 환자들에게 위험할 
수가 있다. 이런 약은 환자를 진정시키기는커녕 환자의 정신을 몽롱하게 
하여, 환자가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파악하는 능력을 현저히 
감소시키기 때문에 착란증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옇튼, 환자가 착란증을 보이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야만 한다.
  착란증은 본래 일시적이다. 비록 주위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하지만 그 
경과는 길지 않다. 그리고 이런 착란증에 잘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작은 
충격에도 허겁지겁 정신을 못 차리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전문용어로는 
'착란성향 성격'이라 한다. 이들은 일상생활에도 벼랑 끝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주위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그래서 
작은 충격에도 곧 균형을 잃고 벼랑으로 떨어지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급성착란에서 회복된 후에도 어딘가 좀 모자라는 듯도 하고 이상한 데가 
보일 수도 있고, 재발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어떤 방법으로든 
착란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치지만, 상황이 고통스러워지거나 
정신적으로 불안해지면 다시 착란에 빠진다. 
  이런 착란성향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면은, 어떤 조건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그것과 싸우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생활 
구조중 대부분은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주위 환경과 떨어지지 않도록 
묶어 놓기 위한 것이다. 흔히 나타나는 것들로는 이상한 습관으로 옷을 
입고, 먹고, 잠자는 것과 이상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의학적 믿음과 
미신 등에 빠지는 것 등이다. 혹은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다루기 힘들 
정도로 고집이 세고, 쉽게 격분하고 호를 내는 특이하고 만성적 노이로제 
같은 증세들, 특히 공포, 강박 관념, 건강 염려증과 같은 증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호를 노골적으로 분출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환자의 핸디캡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환자들의 문제는 그들 자신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엾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상증세는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참아내고 이용할 수 있도록 주위의 세상과 접촉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착란성향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해 두면 급성 발병을 치료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로, 의사들이 환자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게 해 
줄 것이고, 그들이 급성 착란증으로부터 회복할 시기를 좀더 빨리 파악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어떤 환자들은 회복된 후에도 여전히 이상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이와 같은 특이성을 정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이 아직도 착란증이 있다고 생각해서 
불필요한 치료를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의사는 회복된 착란증 환자가 착란증을 일으키게 하는 상황을 미리 
피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가 착란성향 성격을 지닌 사람의 위험성을 
이해하면, 환자를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
  이런 지식과 몇 가지 예방책이 환자를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사례가 있다.
  68세 된 할머니 환자였다. 그녀는 온종일 큰소리로 떠들어 대고, 한 
밤중에도 라디오를 크레 틀고, 아무리 추워도 창문을 열어 놓아야 했다. 
다른 환자들이 불평해도 막무가내 였다. 간호사가 창문을 닫거나 라디오 
볼륨을 낮추거나 뺏어 버리면, 그녀는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욕설을 하는 
등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방에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며 소란을 피운다. 그녀를 정신과로 보내야 할까!
  진료 기록부를 보고 나서, 환자가 장님이 된 지 몇 해가 되었고, 최근 
대퇴골절로 인해 입운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지적이고, 재치 있고, 독선적이며, 다른 사람과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을 견디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를 문병하러 왔던 가족들과 친지들마저 그녀와 
오래 마주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병동 직원들도 더 이상 참기 힘들어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매우 영리하고, 쾌활하고, 
친절했으며, 대답도 잘 했다. 20분 정도 되는 대화를 몇 차례 한 후에, 
그녀가 못마땅해하고 때로는 착란적인 행동을 하는 데에는 뜻밖의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직원들에게 몇 가지 충고를 했다. 그들은 
재빨리 충고에 따랐으며, 그 결과 그녀와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서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제는 그녀를 정신과로 보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내가 처음 환자를 보았을 때, 라디오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라디오가 그녀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무슨 방송을 잘 듣느냐고 물었다. 놀랄 일이었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자세하고 다양한 야간 라디오 프로그램 전체를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아나운서와 DJ 이름은 물론이고, 어떤 
음악을 틀어 주는지, 어떤 상품을 광고하는지 알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들은 우스운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고, 그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게 된 
것들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밤에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가졌던 
열정과 감정이 즉시 나에게 전해져 왔다. 소화불량, 감기, 그들이 보았던 
쇼 같은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들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몇일인지, 심지어는 몇 시 몇 분인 지까지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마음속으로 
응답했었다.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아나운서와 프로그램이 따로 있었는데, 
나에게 왜 그들을 좋아하는지도 말해 주었다. 물론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몇 있었는데, 그 이유도 내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사람들과 싫어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치 자기가 그들의 주인이나 된 
것처럼 말했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이 사람들이 전부였다. 마치 자식이나 
된 것처럼 항상 그녀에게 친절한 이야길 들려주고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도 알려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겉보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던 라디오를 
계속 틀어놓는 행동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 화제는 창문이었다. 여기에도 그녀에겐 창문을 꼭 열어 놓고 
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은 것에 대한 그녀의 
다소 시적(시적)인 설명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가 창문을 통해서 
들은 것은 이웃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밤의 파노라마였다. 그녀는 버스가 
사람들을 내려주기 위해 멈추는 소리를 들었고, 밤에 막차 소리와 새벽에 
첫차 소리를 들었다. 택시, 소방차, 경찰차, 앰뷸런스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우유 배달원과 청소부가 언제 오는지도 알고 있었다. 우유 
배달원의 자전서 소리가 늦으면 행여 사고라도 났을까 봐 걱정을 한다. 
애를 태우다가 언제나처럼 그 소리를 들으면 자식을 만난 듯 반갑고,,,,,,,.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어떻게 모든 일이 일어나는 시간을 알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라디오에 나오는 그녀의 친구들이 
계속해서 알려준다고 했다. 짖는 개와 울어대는 고양이가 오가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을 그녀는 비록 보지는 못하지만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 그녀만의 세계였다.
  결론은 간단했다. 그녀에게 라디오나 열린 창문은 눈이요, 다리였던 
것이다. 불구가 되기 전 그녀의 생활은 사람들과의 접촉에 의한 자극을 
바탕으로 바람직했으며, 자신은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두 알고 
있다고 자신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책을 읽거나 돌아다닐 수 없게 된 지금, 
그녀는 세상과 접촉하고 사람들에게 자극 받고 현실과 접촉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환자에게 라디오와 창문을 열어 놓는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비록 못 보고 못 걷지만 그런 좋은 방법으로 적응할 수 있었던 그녀의 
기지나 능력을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세상과 접촉하기 위한 
이런 수단을 빼앗겼을 때 왜 그렇게 거칠어지고 난리를 피웠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 당시 자신이 거칠게 굴었던 것을 인정했고, 다만 그녀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가 알고있었던 것은 다만 라디오를 끄고 
창문을 닫았을 때는 정말 정신을 잃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제 남은 일은 그녀가 착란증을 피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것이며, 
다른 환자들과 직원들이 어떻게 하면 환자의 정신이 혼란스럽지 않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이었다. 방안에 그녀 혼자 놔두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녀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이 환자의 행동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자, 나름대로 다양한 해결책을 고안해 낼 수 있었다. 첫째로, 
그녀가 라디오에 꽂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이어폰을 생각해냈다. 그 다음, 그녀의 침대를 창가로 옮겨서 창문을 
열더라도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밖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조그만 소리라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더 놀랍게도 간호사들이 다른 환자들에게 그녀를 
위해 눈이 되고 다리가 되어 주는 뜻에서 병실에서 일어난 이야기며, 
밖에서 보고 돌아온 이야기도 해 주라고 격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양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준비하는 동안 간호사들은 자신들이 다른 
환자들도 열심히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그들은 환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어떤 마을 해 주기도 하고, 다독거리거나 침대를 밀어주게 
되었다.
  간호사가 이렇게 한 것은 시력이 있는 환자들은 세상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언제라도 볼 수 있지만, 시력을 잃은 환자들은 보지 못하고 단지 
듣고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일시적인 실명조차도 환자의 정신적 안정을 위협할 정도의 심한 
소외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눈병을 치료할 때나 눈 수술을 한 
후 눈에 붕대를 감을 때 의사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많은 대화를 하거나 
접촉을 하고, 직원들이 환자와 함께 일할 때나 환자의 옆을 지나갈 때 
"나는 누구입니다"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 좋다.
  난청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환자에게 어마어마한 소외감을 
가져올 수 있다. 난청이 갑자기 발생했거나, 환자가 외부 자극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중요한 정신 반응이 일어난다. 
  대화하는 데 꼭 필요한 신체의 손상 또한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발성기관, 목, 입, 턱, 또는 치아의 수술, 또는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밖의 다른 것들이 환자를 참기 어려울 정도로 소외시킬 수도 있는데, 
이때 병에 걸리기 쉬운 사람은 착란증에 빠질 수도 있다.
  똑같은 이유로, 언어의 장벽도 환자를 불안하게 만들고, 심지어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자신의 모국어를 아무도 쓰지 않는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심한 소외감을 느끼고,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환자가 나이 들고 무기력하다면, 착란증은 더 쉽게 일어날 것이다. 그 
예방책은 확실하다. 그 환자의 모국어를 쓰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친척이면 더욱 좋다. 친척에게 환자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특히 가장 
많은 불안을 느끼는 병원에 입원한 첫날 옆에 있어 달라고 하라. 만약 
이것이 하루에 몇 번씩 들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 말을 하는 다른 환자를 찾을 수도 있다.
 어떤 환경에서는, 환자가 운동하는 것을 막으면 외부 접촉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 현실감각을 위협할 수도 있다. 이는 
특히 걷거나 물건을 만지는 것과 같이 현실과의 접촉을 간절히 원하는 
환자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런 환자들에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상실감일 것이다.
  나는 언젠가 10대 소년이 다리가 부러져서 커다란 깁스를 하고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된 직후에 착란 증세를 일으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입원 
첫날 날이 셀 무렵에, 그는 말 그대로 미쳐 버렸고, 팔과 다리를 침대에 
묶어 놓아야만 했다. 나는 그가 착란에 빠진 원인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겨서, 부모에게 혹시 그가 운동 선수 
인지 물어보았다. 부모는 비록 그 소년이 운동 선수는 아니었지만 항상 
바쁘게 생활했다고 대답했다. 그가 얼마만큼 바빴는가 하는 것은 들어볼 
만했다. 그는 일이 있는 곳마다, 운동이나 소란이 있는 곳마다 가야 했다. 
그리고 만약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왜 아무런 일이 없는가를 
알아야만 했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나는 그의 성격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현장에 직접 가서 확인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사람이었다. 다른 방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릴 때 가보지 않고 듣기만 하거나, 멀리서 비슷한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는 현장에서 사건과 가까이 
있어야만 했다. 참견을 하고, 만지고, 찔러 보고, 그의 손바닥으로 문질러 
보고, 냄새를 맡아보는 등, 모든 각도에서 그 사물을 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일단 내가 이 어린 환자의 생활에서 이러한 특징을 알아낸 다음에 말을 
붙이자, 그의 흥분은 곧 가라앉았다. 그는 사람, 장소, 사물에 대한 정신적 
이미지를 오래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직접 자신의 눈으로 봐야만 
했다. 정신적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획되고 조직화된 생활 양식이 
필요했다. 예컨대, 그는 학교에 갈 때는 왼쪽 길로 가고, 집에 돌아올 때는 
오른쪽 길로 다녔다. 내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거기에는 늘상 그가 
보고 싶어하는 집, 개, 사람, 표지판, 하수도 뚜껑, 상점 창문에 있는 간판 
등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것들은 실상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는 사물의 중요성을 존재 그 자체에 두는 것 같았다. 
그가 본 것은 그의 세계의 일부였고, 매일 봄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집에서 위층, 아래층, 이 방 저 방을 왔다갔다 하고, 어떤 물건은 
쳐다보고, 어떤 것은 만져 보고, 어떤 것은 냄새를 맡아보는 등 놓여 
있는가를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더듬어 보기도 했다.
  소년과 부모 모두 소년이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왜 
그러는지는 몰랐다. 그의 행동은 나에게도 역시 이상해 보였다. 나는 그가 
현실과의 단절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현실과 접촉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소년이 하는 행동은 우리들도 어떤 식으로든 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단 
한 가지, 우리는 그것을 더 경제적으로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걸어가서는 확인하는 대신에 우리의 정신을 이용한다. 우리는 생활 
속의 사건들에 대해서 기억하고, 인식하고, 신중히 생각하고, 걱정하고, 
하나하나 따져보는 등,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의 마음속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 그러나 그는 두 발과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를 현재의 딜레마로부터 구해 줄 완전한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적인 조짐은 내가 주치의에게 소년의 이상에 대해 
이야기해 준 뒤에 소년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와 
학교 친구들에게 집과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주라고 했다. 처음에는 부모와 친구들도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그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것들을 말해 주었으나 그다지 
도움이 도지 못했다. 그가 듣고 싶어한 것은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친숙하고 오래 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병객들이 그를 위해서 
과거에 자신이 보고 느꼈던 것들을 가능한 한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계속해서 말해 주길 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물론 문병객들에게는 
지루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소년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고난 뒤 
깊이 공감했다. 전화 거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입원한 환자들은 전화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소년은 전화로 그의 
어머니에게, "지금 뭐하고 계세요?",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무슨 
소리예요?", "아빠는 어디 계세요?", "정확히 어디에 계시죠?", "정확히 
어디에 계시죠?". "정확히 무엇을 하고 계세요? 무슨 옷을 입고 계시죠?", 
"엄마는 무슨 옷을 입고 계세요?"라고 물었다. 그는 요란스런 환대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친숙한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가 건강했을 때 돌아다니면서 얻었던 것과 똑같은 정보를 
원했으며, 그 세계에서 자신이 친숙했던 것들과 구체적으로 만나고 
싶어했다. 그를 미치게 만든 것은 이러한 접촉의 상실이었고, 부러진 다리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여 움직일 수 없게 되어서 생겨난 상실감이었다.
  급성 착란증에 대한 예를 한가지 더 보자. 이것은 신체의 일부를 잃고 
난 후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24장의 수술 환자의 상실방응'에서도 그러한 
예를 제시하겠지만, 여기서는 다른 예를 들고 싶다. 
  이 환자는 50대의 중년 부인으로 심한 혈관부전증으로 불가피하게 
다리를 절단해야 했는데, 수술 후 갑자기 착란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환각과 망상은 겉보기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녀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면, 그녀는 "황홀해요, 전 정말 황홀해요. 
어젯밤에 나는 임금님과 춤을 추었어요" 라고 말했다. 또 "나는 많은 
관객들이 있는 오페라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들은 나에게 환호를 보냈죠." 
때론 그녀의 잘생긴 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그녀의 착란 속에서 
그녀의 아이는 그녀의 침대 옆에 있었으며, 간호사들에게 아들이 귀엽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그녀는 아들이 한 살이고 
지금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아기는 지금 
이곳에 없다는 말을 해 주면,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였으며, 울면서 아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곤했다.
  내가 그녀를 만나러 갔을 때, 나는 그녀의 망상보다는 이불로 한쪽 
다리만 덮고 있는 것을 보고 더 놀랐다. 그녀가 내내 웃으면서 그날 밤 
가려고 하는 댄스 파티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나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그녀의 환각과 망상이 그녀의 다리 절단을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절단된 다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망상과 환각이라는 정신병적 소원 성취 언어로 표현하고 있었다. 사람이 
다리를 잃었을 때, 단지 두 다리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이다. 이 여인의 경우 아기에 관한 망상 또한, 그것이 특히 
한 살 된 아기였다는 점에서 이 이론에 들어맞는다. 아이들은 한 살쯤 
되었을 때 걸음마를 시작하고 다리를 토해서 세상을 발견한다. 그때까지 
주위의 세상을 보기만 하던 아이는 이제부터는 스스로 세상을 탐구할 수 
있게 된다. 아이에게 세상은 더 이상 정적인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저기로 
걸어감에 따라 변화하는 동적인 것이 된다. 이리하여, 아이는 현실과 
외부자극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 다리 절단 환자는 
걸음마기의 아기가 경험했던 신나는 경험을 공상 속에서나마 누리고 
싶어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직 설명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왜 환자가 유독 한 살 된 
아들이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을까? 왜 그녀 자신이 한 살 된 아기라고 
생각하질 않았을까? 사실 그녀의 아들은 열아홉 살이었고, 군에 입대해서 
최근에는 외국으로 파병되었다. 왜 그녀가 그를 택했을까? 나는 그녀의 
아들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그 아들은 아들들 중에서 막내였으며, 
환자의 자랑이자 기쁨이었다. 그가 군에 입대하고 다시 외국으로 떠났을 
때, 환자는 그의 사진을 모두 내놓고 보면서 그가 마치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 다리를 잃었고, 그 다음 그녀는 망상 속에서, 떠나 버린 아들을 
성인이 아닌 아기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다리 상실의 고통을 아기가 
혼자서 걷기 시작했을 때 엄마들이 느끼는 가벼운 상실감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망상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절단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절단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절단을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고통, 불편, 불안, 슬픔에 대해서도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는 절단된 
다리를 한 번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옷을 입을 때도 그녀는 얼른 망상 
이야기로 관심을 돌렸고, 절대로 상처를 보지 않았으며, 절단된 부분을 
치료하고 붕대를 다시 감는 동안에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이 환자가 현실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방법 외에 다른 무슨 방법이 
있었을까? 그녀에게 있어 부정과 망상 이 두 가지는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적절한 시기에 그녀가 부정을 포기하게 되면 
망상은 사라질 것이었다. 며칠 후, 그녀가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여서 절단된 부분을 보게 했다. 그리고 미리, 이불 속에는 두 
다리가 없다고 계속해서 말해 주었다. 붕대를 감은 부분이 그녀에게 
보여졌고, 그녀는 순순히 그것을 보고 느꼈다. 그녀가 좀더 견딜 수 있게 
되자, 그녀에게 다시 조심스럽게 다리를 보게 했다.
  절단된 다리를 인식하게 한 후, 그녀에게 떠나간 아들에 대해서 말하게 
했다.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최근에 아들이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편지를 읽고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이 편지로 인해서 그녀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편지를 들고 읽도록 했으며, 주소와 외국 소인을 보게 
했다. 편지에 그의 새로운 생활에 대해 말한 것을 생각하게 했다.
  며칠 동안 현재의 상황과 그녀의 신체, 아들에 대해 말해 주자 망상과 
환각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직면해야 할 현실문제에, 다소 
슬프기는 하지만, 더 건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착란증은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오는 자극의 상실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의사들은 착란성향 환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그들에게 
이러한 익숙한 자극의 상실은 없었는지 알아 봐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런 환자들에게는 병원과 병원의 틀에 박힌 생활이 
자극박탈을 일으킬 수도 있다. 병원에서 악의없이 무심코 행해지는 일들이 
환자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다.
  조용한 시간에 환자가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있다고 해서 단순하게 잠을 
더 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환자들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착란증 환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외부 자극이 줄어드는 밤시간이 그들에게는 나쁜 시간이며, 
때로는 매우 괴로운 시간이기도 하다. 어둡고 조용한 방 대신 그 반대의 
환경을 주는 것이 어떨까? 자극이 없는 것보다는 작은 소리와 약한 
불빛으로부터 오는 자극이 환자들을 안심하고 잠잘 수 있게 해 준다. 
환자에게 잠자는 습관을 물어본 후, 가능하면 병원에서도 그와 똑같은 
환경을 배려해 주는 것이 현명하다. 
  환자의 개인 소유물을 몽땅 치워 버리는 일 또한 환자를 불안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착란증까지 일으키게 한다. 이런 행위는 현실과의 접촉이 
제하노딘, 나이든 환자에게 특히 위험할 수 있다. 인간의 안정감과 
현실감의 대부분이 칙숙한 물건들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즐겨 입던 옷을 입는 것은 이런 환자에게 
특히 중요하다. 친근한 자신의 외모, 우리의 몸과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감촉, 특별한 냄세, 심지어는 우리가 손을 비빌 때 나는 소리까지 이 모든 
감각적 인지가 우리를 안심시키며 지탱시켜 준다. 환자가 입원하면 
병원에서 주는 생필품을 사용하게 된다. 즉, 입원하는 순간 환자의 옷과 
소지품은 압류되고, 살균된 환자복으로 갈아 입혀진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도 자주 갈아 입어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 특징이나 체취가 벨 틈이 
없다. 여하튼 이런 것들은 환자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버티고 있는 
현실적 기반이 이미 약해져 있는 환자의 경우, 그에게서 모든 흔적을 
빼앗아 가는 일은 그를 절벽으로 밀어 넘어뜨리는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환자들만이라도 그들이 좋아하는 옷과 좋아하는 것들. 보고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왜 자신들이 사용하던 담요나 베개를 가져오면 안 된다는 것일까? 
왜 그들이 평상시 사용해 왔고 좋아했던 물건들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단 
말인가?
  대부분의 환자의 경우, 압류, 격리, 상실 중에서 한 가지에 노출되면 
걱정과 불안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겠지만, 그런 것들이 몇 가지 겹치게 
되면 현실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눈에 붕대를 감은 
환자는 문병객이 너무나 적고 개인 소유물이 거의 없는 데다가, 약간의 회 
허혈이 있을 때에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반대로 초조하고 우울한 환자, 
또는 실제로 착란증이 있는 환자는 압류나 격리, 상실 조건 중 하나만 
주어져도 착란에 빠지거나 악화되며, 반대로 친숙한 환경과 자극을 주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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