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수술의 상황을 얼마나 잘 견뎌내는가를 보면 실로 놀랍다.
수술을 앞둔 환자들은 때로 자신도 모르는 용기가 솟아나 자제력도
좋아지고, 위험은 앞두고 태연할 수도 있으며, 상황을 냉철하게
받아들이기도 하고, 때론 유쾌해질 수도 있다. 환자의 이런 내적 변화는
수술의 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것은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환자를 보호해 주며, 또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의사에게 자기를 맡길 수 있게 해 주고, 치료에 잘 협조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아무리 담담해 보이는
환자라도 그의 내심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마취, 통증,
후유증, 부작용, 수술 부위의 상처나 흉터 등 모두가 무서운 일뿐이다.
수술을 마친 후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을일도 두렵고, 주위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도 견딜 수 없으며, 사랑하는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참을 수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수술중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수술에
대한 이런 두려움은 현실에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다른 불안감과는 차이가
있다. 그 외에도 불안을 극복해 내는 특별한 방법이 많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이 다 이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수술 부위에 대한 걱정을 덜기
위해서 다른 신체부위를 걱정하는 방법도 쓰고, 심지어는 일부러 다른
신체상의 문제를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이런 방법이 환자에게 해로울 게
없다고 판단되면 굳이 간섭할 필요는 없지만, 부작용이 생긴다면 환자의
불안을 다시 원래 자리로 갖다 놓아야 한다.
눈 수술을 받은 환자가 있었다. 수술 후 3일이 지날 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왔다. 그는 농담도 하고 아주 유쾌한 병실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수술 후 정상 소변을 못 보기 때문에 도뇨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도 역시 그는 유쾌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수술한 눈에 대한 농담까지 하며, 수술이 참 잘된
것 같다고 만족했다. 그런데 왜 소변이 나오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눈 수술을 했는데 왜 소변이 나오지 않느냐고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자넨 무슨 수술을 어디에 받았는지를 혼동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 그러니까 엉뚱한 곳만 걱정하고 있지." 난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병실을 떠난 즉시 그는 변기를 달라고 하더니
처음으로 소변을 볼 수 있었다고 간호사가 말해 주었다. 그리곤 그때서야
자기 눈 수술이 잘 되었는지 걱정하더라는 것이었다.
눈은 대단히 소중한 것이므로 잘못되면 심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특히
눈 수술을 받아야 할 때는 많은 불안이 따른다. 그래서 이 불안이 다른 곳
특히 비뇨 생식기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다. 또 성에 대한 불안으로 변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시력을 잃을까 봐 너무 걱정을 한
나머지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어서, 성에 대해 걱정을 하거나
현실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일어날 수
있다. 생식기 이상에 대해 극심하게 걱정하는 환자는, 그 불안을 내면에
감추고 눈에 통증을 느끼거나 시력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환자가 신체 어느 부위를 소중히 여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배우는 얼굴의 상처에 특히 불안해 할 것이고, 피아니스트는 손가락에
상처가 날까 봐 전전긍긍할 것이다. 물론 신체의 중요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수술 받을 때에는 그 두려움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개인에 따라 중요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대개 간, 부신,
뇌하수체, 췌장은 심장, 뇌, 허파에 비해서 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환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부위를 수술 받아야 하는 경우엔 많은
불안이 따르므로 이 불안을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신체부위로 옮겨간다.
대개의 경우 며칠 후면 자연 회복되므로 걱정할 건 없지만 그런 심리
상태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때로 이러한 심리 과정중에
엉뚱한 부작용이나 새로운 증세가 생길수도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불안을 감추고 왜곡시키면 의사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또
환자의 불안이 겉으로 드러날 때 그것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도 어렵다.
수술 환자의 이러한 감정들은 수술을 하는 의사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인간의 생명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할 수도 있다. 수술이 잘 되면 보람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잘못되는 경우에는 그만큼 상처도 크다. 가끔 이런 상처를 받고서도 계속
수술을 할 수 있는 데는 한 가지 분명한 원인이 있다. 그가 수술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술에 따르는 여러 가지 위험이나 부작용, 수술
후 처치 등의 불쾌한 일은 싫어할지 모르나 수술 그 자체는 매우 좋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외과의사에게는 이런 긍정적인 사고가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의사가 정서적 충격을 이겨내는 데에는 수술에 대한 긍정적 사고가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번 경험하게 되었다. 한번은, 근사한 연회석상에서
흥이 한참 고조되는 판인데 응급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외과 친구가 측은해보여 내가 한 마디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보여 내가 한 마디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안됐다니? 천만에! 응급 환자 때문에 병원에
호출되는 의사를 가엾게 생각하지 말게나. 오히려 안 불려가는 외과의가
불쌍하지. 그저 난 수술할 뿐이라네. 그렇다고 술이 싫고 잠이 싫은 건
아닐세. 단지 이게 내 인생이고 이게 내가 원하는 일일 따름이네" 하고
말했다.
수술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반응하는 의사도 있었다. 그는 암환자를
위해서 자신이 특별히 만든 후속 프로그램과, 환자들이 진찰을 받으러
와야 하는 불특정 기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몇 년이 지나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환자도 말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들은 특별히 와야 한다네. 만약 내가 그들을 그렇게 돌보지 않았다면,
수술하는 것을 그만 둬야만 했을 걸세" 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수술이 그렇게 언짢고 어려운 일이라면, 왜 하나?"라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나는 수술하기를 좋아하고 수술 외에는 내가 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네."
죽음에 대해서 또다른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의사들은 환자가
수술로 인해 사망하게 되면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는데 어떤 의사들은 무조건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우울해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의사들은 극도로 낙심하여 두 번 다시
수술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 말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그 말을 믿을지 모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 후
그들이 다시 기운을 내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런데 정상 컨디션을 되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의사들도 가끔
있다. 내가 알고 있던 한 의사는 환자가 죽은 후 몇 달 동안을 수술실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어떤 의사들은 죽음에 대한 그들의
감정과 싸워서 물리치려는 듯 평소보다 더 많은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이들은 만나는 의사마다 붙잡고 환자가 사망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위로받으려는 듯한 행동을 한다.
언젠가 한 외과의사에게 "만약 수술을 하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다면 왜
계속 수술실을 드나드는 것인가?"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외과의사라면 수술하는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라네" 라고 대답했다.
덧붙여서 "자네도 알다시피, 어떤 의사는 견디지 못하고 끝내 포기하기도
하지, 또 어떤 의사들은 자신의 감정에 상처를 입지 않을 수술만을 골라서
하기도 한다네. 수술을 계속할 수 있으려면,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하지" 라고 말했다.
외과의들이 이러한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환자와 자기 사이에 정서적 장막을 치는 것이다. 사실, 환자가 보여주는
수술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을 다 인지하고 받아들였다간, 의사인
자신마저도 마비가 되어 수술을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게 된다.
외과의사가 때로 냉담하고 환자의 아픔에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마 이런 데서 연유하는 것같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다. 외과 의사는 환자의 작은 일에도 아주 민감하다.
그러나 필요한 외과적 처치를 위해 그의 이런 예민한 감정을 일시적으로
죽이고 있을 뿐이다.
의사가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려면 자신의 감정상태는 물론이고
환자의 감정상태에 대한 인식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환자에게서
오는 부담을 줄이고 그 부담에 대한 의사로서의 반응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한 예로 어떤 의사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환자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으려고 환자의 걱정거리에 대하서는 신경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신경을 쓴다 하더라도 알아야 하는 최소의 것만 알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환자와의 접촉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애쓴다.
외과의사의 이런 반응은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사의 이런 반응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가 인정머리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하서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냉혈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의사가 그런 냉혈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많은 외과의사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결과, 그들도 역시 예민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의사의 경우에는 지나칠 정도로 환자의 감정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개의 외과의사들은 자신이 수술을 해야 할 경우라면 자신의
감성의 상당한 부분을 차단한다.
조금 과장된 예이긴 하지만, 자신을 위협하고 치료에 장애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환자의 감정에 개입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한
외과의사의 반응을 살펴보자.
외과의사가 의뢰한 중년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일 주일 전에 담석증
수술을 받았으나 담도관에 아직 담석이 남아 있어 재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말을 듣자 환자는 마구 울면서 아주 기진맥진해버렸다는
것이다. 환자의 이야길 들으니 그의 형편이 정말 딱했다. 당뇨병에 걸린
남편은 실직 상태에 있었고, 세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자기 입원비도 감당
못할 지경이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아파트는 춥고 비좁았으며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녀는 담석증으로
수술을 받아야 했고, 당뇨 합병증으로 눈까지 먼 남편이 세 아이들은
돌보고 있었다. 그녀가 입원한 지 얼만 되지 않아 한 아이가 난롯불에
데어 다른 병원에 입원했고 그 다음 날 남편은 당뇨산과다증으로 또 다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식, 남편, 그녀까지 세 사람이 한
병원도 아닌 각각 다른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나머지 두 명의 아이들을 누가 돌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환자는 재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걱정보다
병원에 계속 있게 되어 식구들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염려가 더 커졌던 것이다. 나는 주치의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 그의
기분이 한결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더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내 말을 가로막으면서 "그래도 수술은 받아야 합니다. 이 상태로
퇴원시킬 수는 없어요" 라고 격한 목소리로 항의하듯 이야기했다. 나는
단지 그에게 환자가 수술 외에도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래도 그는 환자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알고 싶어했던 한 가지는 이런 정신 상태로
환자가 수술을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그때야 난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환자의 딱한 사정을 더 들으려 하지 않았다. 환자의 그런 사정을 들을수록
그는 더 괴로와진 것이다. 그렇잖아도 첫 번째 수술을 잘못한 데 대한
가책이 남아 있는데, 딱한 이야길 들을수록 그의 죄책감은 커지기만 하니
환자에게나 그 자신에게도 결코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방법을 바꾸었다.
나는 그에게 환자의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구청에 연락해서 환자의 집 형편을 잘 보살필 수 있도록 주선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 환자도 안심을 할 수 있을 테니 2, 3일 후면 재수술을
받을 준비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야 이 의사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
되었다. 그것은 수술을 다시 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환자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환자보다도 보호자 치료가 급한 경우도 있지만, 환자보다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 주치의일 경우도 가끔 있다.
내가 주치의, 간호사와 함께 회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회복실에
들어갔을 때, 환자가 불안과 흥분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의사는 이
때문에 매우 불안해 했다. 깁스를 살펴보고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한 다음
우리 셋은 병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그는 간호사에게 "다시 가서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녀와 같이 있어 줘요. 그 환자처럼 불안해 하는 환자는
옆에 누군가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라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제 3외과 부과장의 의뢰였다. 간단한 맹장 수술을 받은 이 여자 환자는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수술과 관련된 괴상한 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필요한 처치를 지시하고 돌아가는 길에 복도에서
담당과장을 만났다. 그래서 난 그 환자에 대한 내 소견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과장은 내 말을 가로막더니 자기 환자에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좀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잘못 알고 있나 해서 환자의 이름을 댔다. 그는 여전히 성난 투로 그런
이름을 가진 환자는 없다고 퉁명스런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 부과장을 불러 영문을 물었다. 부과장은 한참을 웃더니, "과장님께는
그 환자 이야길 안할 걸 그랬어요. 그 양반은 환자가 기분나빠 하는
이야기는 듣기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도 아예 그런 이야기는 하질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 환자 이름까지 모른대서야 말이 됩니까?" 라고 투덜거렸다. 그는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 양반은 환자에 대해 적게 알수록 일하기가
쉽다는 걸요. 그래서 이름조차도 알려고 하질 않습니다."
어떤 의사들은 비록 환자의 문제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환자에 대하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의사가 환자의 문제게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는 그가 정신과 상담을 의뢰하는 환자의 수를
파악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또 의사가 환자의 신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는 의사가 작성한 소견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나에게 환자를 의뢰한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어 환자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했을 때 그는 환자의 신경질적인 행동과 감정 상태를 짤막하고,
알기 쉽게, 적당히 설명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몇 살인지 하는 일상적인
질문을 할 때마다, 그는 거의 대부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훨씬 더 알기 쉬운 질문 가령, 환자의 이름이 무엇이며, 누가 가정의인지를
물어도 그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환자에 대하서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조금 겸연쩍어 하면서, "내가 환자에 대해서 이런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나?" 라고 했다. 그러나 겸연쩍어 하는 것은
잠시이고, "내가 자네에게 말한 것처럼, 자네를 부르길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라고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만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이어싿.
나 역시 잘했다는 대답을 했고 또 그가 잘한 것은 사실이다. '자기의
환자에 대해서 저렇게 모를 수가 있다니......' 하며 놀라워하기는 했지만,
환자의 신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의사의 정신적 부담을 덜어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
이 예들은 다소 극단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예들은
외과의사들이 환자의 신상을 잘 앎으로 인해서 긴장되는 상황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피하여, 자신의 임무인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한 자구책의 일종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또 반대로 의사들 역시
환자의 불안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들을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행히도 이러한 의사의 태도가 때로는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수술에 관한 증세 외에 환자에 대한 것을 알기 싫어하거나, 혹은
자기 감정을 억제하다 보면 꼭 필요한 말조차도 하지 못하고, 꼭 알아야
하는 일들도 모르고 넘어가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의사 자신의 불안
때문에 설명을 분명히 하지 않거나 또는 어물쩍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예를 들어, 자신을 걱정하게 만들었던 수술에 대해 외과의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하는 환자는 불안을 억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 질문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의사가 앞으로 하게 될 치료나 지금껏 해왔던
치료에 대한 설명을 할 때, 환자는 닥쳐올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사고능력을 저하시켜 의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환자들에게 의사가 자신의 불안 때문에 무성의한 반응을
보이거나, 사실대로 말하지 않거나,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환자의
상황은 나빠질 것이고 만약 환자가 졸린 상태에 있거나, 심한 열이나
통증이 있을 때 설명을 해도 마찬가지로 듣지 못하고, 열이나 통증이 있는
환자는 들을 만한 여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환자가 놀랄 이야기나 수술 전 처치를 받고 몽롱한 상태에 있을
땐 분명히 설명을 해도 도대체 알아듣질 못하고,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따라서 수술 환자에겐
몇 번 설명을 되풀이하는 한이 있더라도 분명히 알아들었는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환자에게 치명적인 소식을 전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하게 될 치료에
대해서 설명한다면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언젠가 한 외과의사가 환자의 보호자들에게 환자의 질병에 대한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보호자들은 의사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았다고 했지만 그 의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나가면서 나에게, "그들은 내 말을 하나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네" 라고 했다. 내가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걸세. 그들은 분명히 한 시간쯤 후면 전화를 할
테니까.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진정된 후에 이야기를
해도 늦지 않을 거야" 라고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쯤 지나서
그들은 전화를 했고, 그는 다시 모든 설명을 자세히 해 주었다.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에 대한 다른 예들이 있다.
대장의 사진을 찍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환자는 간호사를
붙잡고 자신의 대장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으며, 사진을 찍으려면
절개를 해야 하는지 물었다. 또 꽉 짜여진 수술 계획 때문에 자신의
수술이 연기되었는데, 환자는 의사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서' 라는 모호한
말만 들었다. 그러자 환자는 자신의 병이 심각해져서 그 날 수술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매우 간단한 수술조차도 환자에게는 불안한 것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술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수술실까지 걸어갈
것인지, 휠체어를 타고 갈 것인지, 들것에 실려갈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수술실에 누구와 함께갈 것인지, 친척들도 갈 수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언제 돌아올 것인지 궁금해 한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 몇 번씩이나 이야기를 들은 뒤에도 환자들은 치료가
되었는지, 또 다른 수술을 해야 하는지, 상처가 터지지 않을지, 예전처럼
건강해질 수 있을지 궁금해 한다.
나는 환자가 이런 사실들을 여러 차례 확인하는 것이 아무런 해가 되지
않으므로 의사는 같은 이야기라도 몇 번씩 되풀이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술 환자와의 의사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외에도
많다. 수술실 분위기도 그 중의 하나이다. 병원 직원도 수술실에 가 보면
마치 공상과학 소설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되는데, 하물며 환자의
입장에서는 두말할 여지도 없다. 눈만 겨우 내놓고 완전히 가려진
모습부터가 이상하지만,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로 수근대고, 이상한
기계들이 번쩍거리고...... 환자의 수술 불안 때문이기도 하지만 혼란의 더
큰 이유는 이러한 수술실 분위기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혼란의 원흉이라면 아마 수술 자체의 불규칙성일 것이다. 8시에 한다는
수술이 10시도 되고, 또 때로는 다음 날로 연기되기도 한다. 아무런
설명이나 해명이 없을 때도 있다. 설명을 해주어도 환자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이다. 병실이 매우 복잡하거나, 의사가 바쁘다거나, 엑스레이 촬영
시간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응급 환자 때문에 준비가 덜 되어서,
혈액이 부족해서 등을 설명해도 환자의 불안만 더할 뿐이다. 환자들은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 특히 수술은 정확한 것으로 믿고 있다. 약
한 알만 잘못 써도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곳이 병원 아닌가? 그들은
수술실의 형편이 얼마나 복잡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야
하는지를 모른다. 어떤 수술은 예정된 시간 내에 끝나기도 하고, 또 어떤
수술은 하루가 꼬박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환자는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으로 알고 큰 걱정을 하게 된다.
수술의 이런 복잡 다양한 불규칙성을 환자에게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수술 자체의 이러한 불규칙성의 가능성은 꼭 설명되어야 한다.
시간이나 장소가 바뀔 수 있다는 것쯤은 미리 설명해 두는 것이 좋다.
반드시 자세한 것까지 다 설명해야 안심을 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계획이 다소 변경되더라도 그를 누군가가 항상 보살펴주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변경이 수술 경과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수술과정이나 수술 후의 신체 변화에 대한 개요도 미리 설명해 주는
것이 좋다. 수술 상처를 처음 보았을 때 환자의 충격을 줄이자는
의미에서이다. 예를 들어, 환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 의사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면, 환자는 수술이 끝난 후 상처를 처음 볼 때 필요
이상으로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결장절개수술을 한 환자의 경우, 환자가
그 상처를 보기 전에 그 상태에 대하서 미리 말해 주는 것이 좋다.
드레인튜브, 개방창, 특수봉합, 특수절개 등과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한
어머니가 아들이 수술받을 때 의사에게 어떤 절개를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의사는 보통 수평절개를 한다고 말했다. 수술 후, 그 어머니는
무언가 완전히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그녀는
수평절개가 아닌 수직절개된 아들의 사처를 본 것이다. 의사가 단지
기술적인 이유이고 환자에게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거듭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보호자와의 긴밀한 연락이나 그들의 협조는 특히 수술 후 경과에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보호자들이 의사의 지시를 확실히 알아듣지
못하거나 혼란스러워 하면 환자의 경과가 아주 나빠질 수 있다. 수술이
대개 얼마나 걸릴 것이며, 그후 어떻게 될것이라는 것을 미리 이야기해
둠으로써 그들의 충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수술 후 실려 나오는
환자를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보호자에게 상세한 이야기는 모두 해 줄 수 없어도 몇 가지쯤 사전에
알려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
외과의사가 조금은 냉정하고 초연해야만 수술을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환자나
보호자를 지나치게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간격을
메워주어야 한다. 간호사도 좋고, 인턴, 레지던트, 혹은 의대생들이
담당의사가 다 하지 못한 설명을 친절히 환자에게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과의사라면 더 이상적이다. 정신과의사는 환자나 의사의
불안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과의사는
외과의사가 다 하지 못한 부분을 메워줄 수 있는 적임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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