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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와의 대화/성인 환자를 위하여

21.수술불안을 외면하는 환자도 있다

by FraisGout 2020. 6. 2.

수술 환자들은 그들의 불안이나 공포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감정을 
억제한다. 그래서 때로는 감정을 너무 억제한 나머지 아주 무감각하게 
되거나 냉담하게 된다. 가벼운 경우에는 별로 말도 없고 불평도 없으며, 
특별한 감정의 표현도 없이 멍한 상태로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피곤해서 
그러려니 하는 정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좀 심해지면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거의 없어진다.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불평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력증은 수술 전에도 올 수 있다. 특히 위급한 수술인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며칠 동안을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던 환자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증세들이다. 그러나 수술 직후 이러한 증세가 대개 4, 5일 정도 
계속되는 게 보통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증세이므로 지나쳐 버리거나, 또 
때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수술 후의 쇼크, 상처에 대한 반응, 고통, 
출혈, 마취, 영양 부족, 수면 부족 등의 반응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증세가 더 심해지면 환자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른다. 묻는 말에만 겨우 대답할 정도이다. 환자는 외모나 안정, 음식, 
대화와 같은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흥미조차 잃게 된다. 마치 잠들거나 
또는 그 주위의 것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조용히 누워 있거나 또는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증세들에 대해 별 
관심없이 때로는  모르고 넘어가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 여기엔 아마 
외과의사들이 환자의 불안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심리도 작용하리라 본다. 
수술 환경 또한 이러한 반응들을 그냥 지나치게 만들기 쉽다. 환자가 
밤중에 입원해서 다음날 아침에 수술을 받거나 응급수술 직후 병동에 
입원하는 경우에는, 그의 평상시 성격을 의사나 간호사 등 다른 
직원들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마취에서 깨어난 후 어떤 반응을 
보여도 그 환자의 성격이 원래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수가 많다.
  본래 조용하고 말이 없는 환자들에게서는 병리학적 무력증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평상시 성격이 잘 알려진 환자의 경우에는 병리학적 
무력증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그들은 무력증과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말이 많고 사교적이며, 성미가 급하고 화도 잘 내며, 시끄럽고 
귀찮게 구는 환자들이다. 그러나 수술 후 4, 5일 동안은 이들의 민첩성, 
수다, 불평, 급한 성미, 분노, 심지어 불안까지도 사라진다. 그 대신 병적인 
평온(placidity)과 무관심이 찾아온다. 
  무감증의 원인은 물론 수술에 대한 환자의 공포 때문이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거의 자제를 잃을 것 같은 지경이 되지만, 달리 방법이 없을 때 
사람들은 흔히 이런 방법을 쓴다. 아예 아무것도 못 느끼는 상태로 
만듦으로써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런 방어기제가 
성립되면, 환자는 한편으로 편안하게도 보인다.
  이러한 수술 후의 무력증과 무감증은 주로 감정의 급상승 때문에 
발생한다. 이들에게는 공포가 주된 감정이지만 공포 뒤에는 분노가 
나타난다. 공포가 빨리 엄습해 오고 피할 곳이 없게 되면, 환자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끊임없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수술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기억을 차단시켜 버린다. 수술이 임박해 올수록 자아를 무(무)의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런 심리 상태는 수술뿐 아니라 다른 비슷한 극한 상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대상부전(decompensating) 노이로제에서도 비슷한 증세가 
나타난다. 신경성 증세(neurotic symptom)와 다른 방어 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불안을 점점 더 통제 할 수 없는 환자는, 그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음을 느낄 것이며, 자포 자기로 기진 맥진해지고 
반혼미 상태가 될 것이다. 나는 중병에 걸려 천천히 죽어가는 
환자들에게서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의 증세는 거의 
비슷했다. 기질성 질환(organic disease)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병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반혼미 상태가 되고, 거의 무반응 상태가 
되며 일 주일 가량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 그런 후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내부의 힘이 모아지게 되며, 그 문제에 다시 한번 맞서기 
위해 혼미 상태로부터 빠져나온다. 그것은 강제 휴식 또는 일시적인 내적 
휴식이나 회복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무력증은 회복 기능 측면에서 보면 자기 제한적이기 때문에 너무 
놀랄 필요는 없다. 그 회복 기간은 보통 4--7일 정도이다. 무력증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데, 특히 환자들에게 병이 호전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용기를 북돋아 준 후에 잘 나타난다. 심지어 봉합, 배농관, 정맥 
주사 등을 제거한 후에도 발생할 수 있다.
  환자의 무감증 상태가 일 주일 이상 계속되면, 적당한 활동을 하도록 
권하는 것이 좋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무리 좋지 않다 하더라도 환자들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의사나 간호사는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다. 
본래의 성격이 아무리 급하고, 불평이 많고, 겁이 많다 하더라도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 반가운 것이다. 그들은 이제 환자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너무나 이르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의 감정을 없앤 사람은 살고자 하는 희망과 의지를 없앤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응급 결장 조루술(emergency colostomy)을 받은 한 중년 부인이 극도의 
불안 때문에 생긴 무감증의 증세를 보였다. 그녀는 수술 후 4, 5일 동안 
눈을 감고 등을 기댄 채 앉아 있기만 했다. 언뜻 보기에는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심한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로 활기가 없고 
어떤 자극에도 무감각한 것처럼 보였다. 원래 그 환자는 응급실에서 길려 
왔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수술전의 상태를 모르고 있었고, 직원들은 
그녀의 원래 성격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그녀에게 결장 
조루술을 한 후의 몸조리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했는데, 그녀는 좀처럼 
배우려고 하지 않았고 아예 배울 능력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외부에 대한 
둔감 증세에서 비롯된 학습 장애인데, 이를 본 간병인들은 그녀가 정신 
지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 주일이 지나자 환자는 명랑해졌다. 그리고 무감증의 
상태가 심한 공포 상태를 가려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한 고통 
속에서 병원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녀는 살아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마취가 곧 죽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깨어나서 
며칠 동안은 자신이 여전히 죽어가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응급 결장 조루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줄어들었고, 그 대신 다른 정신 작용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간호사가 되풀이해서 퇴원한 후의 몸조리법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녀는 
정말 자신의 상태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게 
이것은 커다란 희망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바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일시적 둔감 현상은 정신 지체로 오진받기 쉽다. 이런 반혼미 
상태는 때론 기질성 뇌 질환을 일으키기도 하므로, 상당 기간 지속되는 
무력 반응(prolonged lethargic reaction)은 특히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또 
무력증은 우울증과 그 증세가 비슷해서 오진하기가 쉽다. 대개 무력증이 
심하지 않은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말하기도 
하고, 자신이 우울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아주 심한 정도의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말하기도 하고, 자신이 
우울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아주 심한 정도의 우울증 환자는 
죄책감과 허무감을 가지고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행동한다. 이에 반해서 무감증 환자는 이와 비슷한 우울 증세가 있다 해도 
거의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조차 못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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