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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와의 대화/성인 환자를 위하여

23.수술 후 찾아오는 우울

by FraisGout 2020. 6. 2.

수술 후의 우울증은 흔히 있는 일이다. 사실 너무 흔하기 때문에 때론 
아무 처치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고 가볍게 
넘겨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기술적인 치로를 해야만 
회복되는 환자도 있다.

  내가 외과팀과 함께 병실 회진을 하던 때의 일이다. 유방암 수술 후 
상처가 너무 커서 다시 피부를 이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40대의 
여인이 있었다. 열흘이 되었는데도 그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 뚱뚱했으며 침대를 끝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열흘이 되었는데도 
그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 뚱뚱했으며 침대 끝에 힘없이 
안자 있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아무렇게나 여며져 있었다. 
병실에는 읽을 만한 책이 한권도 없었고 라디오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무력증이나 무감증은 아니었고, 특별히 피곤하거나 야위어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불행해 보일 뿐이었다. 담당의사는 나를 외과 
과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간단히 소개했을 뿐 정신과의사라는 것은 
밝히지 않았다. 드레싱을 바꾸는 동안 의사는 환자가 10일 전에 근치 유방 
수술을 했고 절제한 부분이 괴사를 일으켜 부육을 형성했으므로 회복되는 
대로 피부 이식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들이 치료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무표정하게 상처를 보았다. 좀 
어떠냐고 묻자. "별로 좋지가 않네요"라고만 했다. 그러나 무엇이 좋지 
않은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환자에게 옮겨 가는 동안 나를 포함해서 누구 한 사람도 그 환자에 
대해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의사들은 환자가 우울해 하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누가 보아도 그녀의 우울증은 완연했다. 다만 모두가, 
그렇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저 모른 체 할 뿐이었다. 그 환자의 
우울을 생각하기엔 의사 자신들이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그후로도 며칠 동안, 환자는 훨씬 더 우울해 보였고 외과팀이 그녀에게 
가는 것을 더 꺼려하게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첫번째 날과 똑같은 
이들이 되풀이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환자에 대한 나의 개인적 관심은 더욱 커져 
갔지만, 나 역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나의 위치가 관찰자일 
분이었으므로 치료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환자에 대한 
관심이 크기는 했지만 아무런 조처도 취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 환자의 치료를 맡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그 
환자를 만난 후 처음으로 주치의가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그 환자가 
매우 우울해 보였다고만 대답했다. 그러자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유방암 수술은 받은 많은 환자들 대분분이 그렇게 반응하므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게 도움을 청했고 이 
환자에게는 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그녀와 대화를 하겠다고 했다.
  환자는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세수도 거의 하지 않게 되고 식사도 
거르곤 했다. 내가 정신과의사임 그녀에게 밝히자, 그녀는 별 관심이 업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자신에게 정신과의사의 도움은 필요없다며 
나의 대화는 것을 주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작된 그녀의 이애기는 
주로 자신을 수술한 외과의사에 관한 것이었다. 혀가 마르도록 그를 
칭찬했다. 실력도 있고 친절하기도 하고 정말 훌륭한 의사라는 것이었다. 
이 지나친 칭찬이 내게 힌트를 주었다. 
  내가 "수술 경과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라고 하자 그녀는 
기다리기나 한 듯 내말을 가로막더니, 그것은 위사의 탓이 아니라 모두 
자기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몇 달 전에 콩알만한 혹이 가슴에 
만져졌을 떄만 해도 그녀는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얼마 후 감기 때문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이웃 병원에 갔을 떄 그 이야길 갔을 때 
그 이야길 했더니, 그 의사는 별 것 아닐 테니 몇 달후 다시 와보라고 
했다. 그것부터가 자기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하필 그 의사에게 간 것도, 
몇 달 후가 얼마 동안을 말하는 것인지 묻지 않았던 것도, 그리고 수술 
경과가 나빠진 것도 모두 자기 잘못이라고 했다.
  그후 10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그 혹이 더 커진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다른 의사를 찾아갔고 그 의사는 지금의 주치의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 의사 또한 처음에는 별 것 아닌 낭종일 것이라고 말했으나,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수술 후에애 그것이 암이었음을 
알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운명이기에 슬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듯이, 모두 다 자신의 탓이라고 했다.
  그녀는 괴사를 일으킨  피부와 이식 수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에 대해서 묻지 ㅇ낳을 수 없었다. 그것 역시 불행한 
일이긴 하지만 병원에서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며, 자기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만 했다.
  그 다음 시간, 우리는 그녀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불행했던 
결혼, 이혼, 그리고 이제 열 살 난 아이 떄문에 그가 좋아하던 교사직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했다. 자기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불행하다고 하면서도, 그 애만큼 착한 아이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번째 신간에 그녀는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 냈다. 왜 피부 
이식을 해야 하며, 또 언제 하게 될 것이며, 누가 하느냐고 물어왔다. 
그것은 내 분야가 아니므로 주치의에게 물어보라고 말했으나, 그녀는 
울상을 지으면서 주치의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묻자, 그런 질문을 하면 그 의사가 싫어할 것 같기 떄문이라고 
했다. "아마 우리 의사 선생님은 저 같은 환자는 싫어할지도 몰라요." 그 
이유에 대해 그녀는 "상처가 잘 낫지도 않고 또 수술을 해야 하니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요"라고 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주치의가 자기를 
싫어하고, 자신에게 화가 잔뜩 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환자의 우울 
성향이 차츰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요. 수술이 
잘못되었으면 환자가 의사에게 화가 날 텐데." 그녀는 다시 말을 
가로막더니 그것은 자기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난 그 이상은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몇 차례 더 만나면서 이야기에는 별 진전이 없었으나 그녀의 우울증은 
호존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병실에 들렀을 때 환자가 
보이질 않았다. 간호사들에게 물었더니, 환자가 날 만나길 거절하더라는 
것이었다. 별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기분만 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난 
창피했고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 책임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거나, 홧김에 이대로 그냥 가 버릴까 생각했지만, 순간 이게 그 환자의 
병이란 것을 인식하고 참기로 했다. 환자가 의사를 거절할 때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럴수록 의사는 침착해야 한다. 병원에서의 
의사와 환자 관계는 사회에서의 대인 관계와는 이런 면이 다르다. 같이 
화를 냈다간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환자의 이런 부정 반응 의사에 대한 정면 대결이며 매우 중요한 것이다. 
드디어 그녀가 의사에 대한 분노를 겉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녀가 나와의 
대화를 거부한 것은 자신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데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며, 지금껏 감추어 두었던 감정의 폭팔인 것이다. 이 환자가 
나의 잘못된 치료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것은 주치의에 대한 
분노를 대리 인물을 통해서 해소하려는 시도일 뿐 아니라, 화를 냈을 때 
나나 주치의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화를 내거나 두 번 다시 의사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는 환자를 의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 환자가 화를 낸다고 해서 의사도 덩달아 
화를 내며, 그는 정말로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된다. 외과적이든, 
의학적이든, 정신과적이든 간에 이럴 때의 치료 상황은 상식적인 상황이 
아니다. 다른 규칙과 이론이 필요하다.
  내가 환자가 있는 곳을 물어 찾아 갔을 때 그녀는 방안에 혼자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아주 달라져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화난 듯한 눈 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고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우울한 환자가 아니라 
잔뜩 화가 난 환자였다. 말할 떄의 목소리도 달랐다. 나를 보고 처음 
한다는 말이 "나가세요!"였다. 그녀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놀랄 
일이었다.
  난 담담히 이 시간에 우리는 만나기로 되어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선생님은 화 안 
나셨나요?" 하고 물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웃음을 지으며 
"전혀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날의 대화는 이전과는 상당히 달랐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기 주치의에 
대해 얼마나 화가 났는가를 노골적으로 이야기했다.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수술을 잘못해서 재수술을 해야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억울한 듯 마구 울었다.

  이 사례는 너무나 특이하고 극단적이어서 수술 후 우울증의 좋은 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한 가지는 그러한 우울 반응을 가볍게 넘기거나, 단순한 불행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환자의 경우 정말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또한 우울증에서 화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환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 증세 속에서 화를 낸다. 그리고 
그가 화를 내는 대상은 우울증을 일으키게 했던 대상과 동일시되며, 주로 
의사가 된다. 어떤 환자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를 자신에게 발산하기도 
한다. 위의 예와 같이 환자는 그녀의 자신이 모든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난받아야 할 사람도 자신이며,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양심은 공격자의 역할을 하고 자신은 공격을 받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 
뒤에는 우울증이 심해진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면 할수록 
양심 때문에 자신을 학대하게 되며, 우울증은 더욱더 심해진다.
  수술 후의 우울증은 대부분 반응성이다. 이러한 우울증은 경증에서 
중증까지 있으며, 우울증을 유발시키고 심화시키는 촉진 요소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환자의 경우는 암과 근치 유방 절제술의 흉터, 게다가 피부 
이식이 필요한 살의 흉터가 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환자의 충격, 두려움, 
분노가 모두 합해져서 급성 우울증으로 전화되었다. 이런 환자와 대화할 
때는 급성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환자가 화난 
이유를 알아내고, 환자의 가까이에 있는 의사나 친척들에게 그 분노를 
터뜨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일단 이렇게 되면 급성우울증은 대개 약화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경우에도 환자의 분노가 의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녀의 병을 오진한 이웃 병원의 의사에게 대부분의 책임이 있었다. 
훨씬 더 거슬러올라가 보면, 그녀가 가슴에서 혹을 발견하기 전에도 
잠재적인 우울증이 있었던 것 같았다. 결혼에 실패한 것과 열 살된 자식 
문제와 다른 문제들 때문에 화가 나 있었고 우울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처음 혹을 발견했을 때, 이미 내재하고 있던 우울증이 자신을 학대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이웃 의사가 건망증이 심하고 구시대 
적이어서 오진을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그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그의 무능함을 
직접 체험했을 때에도 즉시 다른 의사를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일종의 
우울 증세이며, 자기 파괴적인 엄연한 자살 행위라고 까지 생각할 수 있다.
  이제 그녀를 도울 일은, 우울증을 치료하고 피부 이식 수술을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의사에게 화가 났다고 말하면서, 처음에는 
내게 화를 내다가, 그녀의 우울증은 사라졌다. 비록 그녀가 의사에게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는 없었으나, 나와 이야기하는 중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또 수술을 받기 직전에는 주치의에게 화가 났다고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는 없었으나, 나와 이야기하는 중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또 수술을 받기 직전에는 주치의에게 화가 났다고 
직접 말했는데, 그 이유는 부육 때문이었고 그에게 피부 이식 수술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치의는 환자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불안했고, 그래서 다른 의사를 소개시켜 주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태도를 바꿔서, 다른 의사는 싫고 이전의 주치의에게 수술을 받겠다고 
했다. 이로써 그녀의 우울증과 분노는 끝이 난 것이다.

  수술 후 우울증의 또 다른 예는 심장 수술(open-heart surgery)을 
받았던 여성에게서 나타났다. 수술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으며, 그녀가 
앞으로 건강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퇴원하기 며칠 
전 그녀는 갑자기 우울해지고 불안해졌다. 자신은 쓸모없고 모든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말만 했다.
  이러한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가 수술 전에 우울했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그녀는 너무 쇠약해져서 거의 
움직일 수도 없었으므로, 사실 부담스러운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낙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쾌활했으며,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거나 부담이 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는 
진단이 나온 지금에서야 자신이 불행하고, 인생에서 실패했다며 우울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치료를 주었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주치의를 실망시킨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녀는 
의사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남편이 얼마나 착하고 친절한지, 그리고 자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또 경비를 지출해야 했는지를 말하며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자기 주위의 의사, 남편, 간호사들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환자에게 화가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환자를 싫어하는 것은 더욱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그녀를 만나러 갔을  때, 나 또한 똑같은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에 그녀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울기만 
했다.
  울음을 그치고 말문을 열었을 때에도 머뭇거리는 태도였으며, 남들이 
자신을 보면 기분이 나빠할 것이라고 했다. 또 모든 사람들이 정말 잘 
대해 주었지만, 특히 남편과 주치의에게 자기에 대한 희망이 헛되게 
되어서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중얼중얼 말을 했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종교 의식과도 같았다. 아무도 그녀를 귀찮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위로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 같았다. 계속해서 
자기 비난을 하는 것은 중요한 우울 증세였다. 게다가, 마치 종교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자신을 비난을 것은 중요한 우울 증세였다. 
게다가, 마치 종교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걱정을 감추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걱정들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와의 대화에서 중점을 둘 것은 이 환자가 하고 있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다른 우울 환자들과 달리 이 환자는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으므로 
항상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만 했다. 그녀가 계속 자신을 비난하는 말만 
해대자, 나는 도중에 말을 가로막고 몇 가지 질문을 해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울음을 그치고 정색을 하며 무슨 질문이냐고 
물었다.
  나는 단지 자신이 끔찍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면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다고 하며 그녀의 가족이 자기의 감정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했으나, 곧 아무 대답도 듣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해 나갔다.
  실제로 그녀가 말한 것 중에는 치료에 특별히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나는 큰 힌트를 얻었다. 
남편에 대해 말할 때면, 그녀는 긴장하고 경계했으며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았다. 이것이 그녀와 남편에 대한 유일한 실마리였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남편은 어떤 사람입니까? 애정이 
있나요? 자기 주장이 강합니까? 이해심은 많나요?" 등의 질문을 하면,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녀의 이런 태도를 
보아 남편에 대해 좀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심장병에 걸린 이후 
남편과의 성생활은 어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그녀는 "심장병 치료를 끝마친 후를 말하나요, 아니며 수술 전 
심장 상태가 아주 나빴을 때를 말하나요? 하고 물었다. 내가 원래 묻고자 
했던 질문은 수술 전이었으나, 환자가 두 가지를 묻는다는 것은 수술 전후 
모두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므로 "둘 다" 라고 재빨리 
대답했다.
  그녀가 대답을 하는 도중에, 그녀의 태도가 이전과는 정반대로 변한것에 
대해 저으기 놀랐다. 똑바로 앉은 자세로 울지도 않았고 울먹이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몇 년 동안 건강이 나빴기 때문에 그 동안에는 성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이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남편이 
그녀를 혼자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말을 한 후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떄를 틈타 "그렇다면 지금은 어때요?" 하고 물었다.
  환자는 갑자기 우울을 터뜨렸다. 조용히 흐느끼거나 울먹이는 정도가 
아니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엉엉 울었다. 몇 분쯤 지나자 울음을 
그치고는 그녀를 치료한 의사가 그녀에게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 이제는 아주 건강해져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게 됐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했다. 처음에 그녀는 의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으나, 
그 말은 남편과의 섹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의사는 마치 좋은 
소식이라도 전하는 것처럼 기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좋은 소식이 아니었나요?"
  그녀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으나, 이번에는 금방 그쳤다. 그리고 나서 
매우 나쁜 소식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과 성 관계를 다시 갖는 것에 
대해 끔찍하게 생각했고, 그녀가 병들기 전에도 남편과의 성관계는 전혀 
만족스럽거나 즐겁지 못했으며, 남편과 성 관계를 갖지 않았던 동안 훨씬 
가깝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고 가정 생활도 더 순조로왔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문제점들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그녀에게 의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한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그녀는 화를 내며, 남편이 어느 날 그녀와 다시 성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쁘고, 그녀가 빨리 퇴원해서 침실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남편이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묻자, 주치의가 남편에게 "부인이 건강해져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어 기쁘시겠습니다." 라는 말을 했고, 남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냐고 물었고 의사는 그것도 포함한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때 환자는 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다시 우울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으며, 퇴원을 해서 집에 가도 섹스를 하기 싫어할 
것이므로 의사도 남편도 분명히 자기를 싫어할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막연하게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으므로, 나는 중간에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고 말했다.
  주치의가 그런 이야기를 해서 자신을 난처하게 만들었으므로, 그녀는 
은연중에 그 주치의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의사에게 하고 싶었던 
비난을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환자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의사는 수술에만 신경을 써야한다고  
말하며 이 점에서 그 의사는 정말 훌륭했고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며 남편에게 그녀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섹스를 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것은 의사의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변화된 비난과 분노의 표현은 그 환자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었고, 그로 인해서 그녀의 우울증은 차츰 사라져갔다. 울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기간이 며칠 있긴 했지만 정도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고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는 며칠 동안 매일 만났고 매번 30분 가량의 대화를 했다. 대화를 
통해서 그녀는 주치의에게 자신의 성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서 도움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편에게 퇴원하는 날, 또는 다른 날 그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도움을 얻는 
일이었다.
  주치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남편에게 해야 할 만에 대해서는 지금껏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을 바탕으로 몇 가지 도움을 주었다. 다만 나의 추측이 옳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전에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서 들은 그들 부부의 
성생활을 생각해 볼 때, 남편은 겉으로만 그녀와의 성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할 뿐이며, 사실은 그녀 자신이 남편보다 더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가 했던 말은 단지 의사의 말에 대한 반응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의사는 남편이 부인과 섹스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행복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남편은 그런 의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정말로 부인과의 성 관계를 기대하고 행복해 
하는 것처럼 행동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남편 또한 
그들의 불만족스러운 성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해 그녀 못지않게 
걱정스러워하고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환자는 내 추측에 매우 놀랐다. 그녀는 남편이 남자답지 못하기 때문에 
성 관계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걱정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녀 자신이 매력이 없기 때문에 남편이 성 관계를 갖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걱정하고 있었다. 이같이 내 말에 놀라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섹스에 대한 남편의 생각도 그녀의 
생각과 같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고 어느 정도는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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