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를 좇지 말고 이자를 물리지 말라는 성경적 경제원리(출 22:25)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집을 짓자는 생각은 '코이노니아 농장'에서 시작
되었다. '코이노니아'는 아메리쿠스 남서쪽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다. 조지아 주의 소도시 내에 자리잡고 잇는 헤비타트라는 이름의 거리와
코이노니아 농장 사이의 거리는 겨우 8마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두 장
소를 잇는 사람들과 그들이 공유하는 경험의 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
계로 무한히 뻗어나가고 있다.
나는 1965년 처음 코이노니아에 갔는데, 당시 나는 개인적으로 깊은 시
련을 겪고 있었다. 아내 린다와 거의 남남이 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린다
는 그 해 11월 내 곁을 떠나 뉴욕 시로 가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 보겠다
고 했지만, 함께 할 미래가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우리는 앨러배머 주 몽고메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당시 나는 투스칼루사
에 있는 앨러배마 법대의 동기와 함께 시작한 우편판촉과 출판업이 꽤 잘
풀려 일에 푹 빠져 있었다. 8년 동안 우리는 힘을 합쳐 회사를 키웠고 회
사가 성장을 거듭함으로써 마침내 우리는 둘 다 1년에 10만 달러의 연봉을
챙기게 되었다. 내가 얻은 순수익만 해도 100만 달러를 넘었다. 나는 아름
다운 집에 살면서 링컨 컨티넨탈을 몰았고, 근교 호숫가에는 별장과 모터
보트가 있었다. 친구와 나는 승마용 말과 가축떼를 사육하는 2,000에이커
의 목장을 공동소유하고 있었다.
린다와 나는 젊은 부부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물질적 풍요를 한껏 누
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부를 소유한다고 해서 행복이 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며, 재산이 삶에 의미를 줄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괴로운 별거의 시간 끝에 나는 린다를 다라 뉴욕으로 갔다. 한동안 내
영혼을 살피고 회개하며 기도로 지새는 나날들을 보냈고, 기나긴 화해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빗나갔음을 깨닫고 다시 주님 곁
으로 돌아가 우리 앞에 예비해 놓으신 주님의 계획을 알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기 전에, 우리는 몽고메리에 있
는 사업을 모두 처분하고 모든 재산을 헌납했다.(이 무렵에 우리가 겪은
일들은 Love in the Motar Joints (Piscataway,NJ.:New Country
Publishers,1980)에 자세히 적어놓았다.)
그 해 12월 린다와 나는 한두 시간 정도 둘러보리라는 생각으로 코이노
니아 농장을 방문했다. 그러나 결국 한 달을 머무르고 말았다. 1942년 당
시 아내 플로렌스와 함께 코이노니아를 창건한 개척자 클래런스 조던이 그
때 막 시작되고 있던 우리 부부의 치유과정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기 때문
이다.
나는 이 사람에게 매료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만큼 그리스도를 헌신적
으로 섬기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클래런스의 주도아래 코이노니아
는 초대 교회를 본받아 '함께 모여'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이 모임은 궁
핍한 지역 소작농들에게 선진 농업시술을 가르치겠다는 특수한 사명을 띠
고 출발했다. 비폭력, 공동재산, 그리고 인종불문이라는 원칙을 실천하던
초기 주민들은 백인 이웃들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폭행을 당하
고 총을 맞았으며, 방화에 불매운동까지 겪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핍
박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흔들림 없이
증오를 사랑으로 되갚으며 분투했다.(Dallas Lee의 Cotton Patch
Evidence(N.Y.:Harper & Row,1972)를 보라)
클래런스는 성경에 분명한 가르침이 있다고 말했다.(그는 성경을 속속들
이 알고 있었다. 조지아 대 농학 학위와 남부 침례신학교 그리스어 신약
박사 학위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던 클래런스는 1969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
기 전까지, 후에 베스트셀러가 된 코튼패치 판 신약성서 집필작업을 마무
리했다.) 나라마다 무력에 의존하며 전세계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화력
을 갖고자 안달하고 있던 때에 클래런스만은 예수님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
고 주장했다. 곧 원수를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라,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 누가 5리를 가자고 하거든 10리를 같이
가주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지요."
클래런스도 그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할 힘
을 주시고, 기회만 있다면 그를 도울 힘을 주십니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복음을 따르는 클래런스의 신앙을 코이노니아의 이
웃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클래런스는 2차대전 도중, 즉 코이노니
아가 막 건립되던 중에 일어난 사건을 즐겨 회상했다. 한 번은 어떤 농부
가 코이노니아에 들러 그 곳에 살던 얼마 안 되는 주민들에게 애국심이 없
다며 분노에 찬 욕설을 퍼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뭔가 오해를 하셨나 봅니다."
클래런스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당신네들은 싸울 생각이 없잖소!"
"아니오, 오히려 우리는 대단한 투사들이랍니다."
"당신네들이?"
농부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클래런스는 하나님의 갑옷과 무기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농부에게 그런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접근방식을 달리하기로
했다.
"농장에 노새가 있으시지요?"
"몇 마리 있지요."
"그럼, 한 가지 묻겠습니다."
당시 농부 지역 농부들은 밭일을 할 때 이 끈기있는 동물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헛간을 지나가고 있는데, 노새가 갑자기 머리를 내밀고 당신의 엉덩이
를 꽉 물어버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야 눈에 띄는 몽둥이를 집어다가 패대기를 치겠지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럼 엉덩이를 물어뜯는 노새를 가만 둔단 말이오?"
"제 말은 왜 똑같이 물어뜯지 않느냔 말입니다."
"노새를 물어뜯어? 당신 미쳤소? 나는 노새 엉덩이 따윌 물어뜯진 않아.
도대체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클래런스는 그때 그 농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야기할 때마다 웃음
을 띠곤 했다.
"물론 싸워야지요. 하지만 뭘로 싸우느냐가 문제입니다! 노새한테 무기
를 고르라고 하진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직접 무기를 고르잖습니
까? 그리스도인들도 악의 세력에게 우리의 무기를 사용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폭탄과 총을 선택하지만, 우리는 사랑과 친절과 용서를
선택합니다."
세상과 말씀이 충동할 때마다 클래런스는 타협을 거부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노예도 자유민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갈 3:28) 우리는 그 안에서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남부
조지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흑인도
백인도 없다는 뜻입니다."
클래런스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주지시켰다.
"세상은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 남남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
지만 성경은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
씀을 따라야 합니다!"
한 번은 클래런스의 집요한 믿음에 이끌린 불행한 목사 한 사람이 조언
을 부탁해 왔다. 도무지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교인들은 설교를 참고 듣지 못했다. 목사는 교인들이 바라는 대
로 말하고 행동해주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배우가 된 느낌이라고 서글프게
털어놓았다.
클래런스는 그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결국 창녀가 된 기분이라는 말씀이군요?"
목사는 불쾌한 감정을 어렵게 누르며 말했다.
"그런 셈입니다."
"그럼 왜 그만두지 않으십니까?"
"글쎄요, 배운 거라곤 목사노릇뿐입니다. 신학교육밖에 받지를 못했어
요. 그러니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클래런스는 계속 목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형제님, 몸 파는 재주밖에 없다는 사실이 창녀노릇을 계속 해도 좋다는
이유가 될까요?"
성경적 경제원리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클래런스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세상은 '너 자신을 위해 재물을 축적하라. 그리하여 재정적으로 안정되
고 훌륭한 삶을 누리며, 은퇴해서도 넉넉한 연금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
러나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리라'(마 6:19-21)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나머지는 모
두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하나님의 사람이 가르치는 말에 깊이 감화를 받았다. 학자이자
재담가였던 클래런스는 박식하면서도 철저히 서민적이었다. 온 나라가 그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싶어했지만, 클래런스는 거의 언제나 물빠진 작업복
을 입고서 '하나님 운동'의 이야기를 이웃들에게 널리 퍼뜨리며 코이노니
아에 머물렀다. 우리 가족이 코이노니아에서 지내던 한 달 동안, 클래런스
와 나는 몇 시간씩이나 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는 내 영적 우
물이 말라버렸음을 알고, 기꺼이 스스로 도구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물을
다시 채워 주시도록 도우려고 했다.
1968년, 린다와 내가 이런저런 기독교 봉사활동을 전업으로 삼고 일한
지 두 해 반이 다 되어가던 즈음에 우리는 코이노니아 농장으로 이사가기
로 결정했다. 수십 년간의 핍박과 투쟁의 세월이 공동체에 크나큰 상흔을
남기고 있었다. 사정에 따라 얼마 동안씩 일하겠다고 찾아오는 다양한 연
령층의 구도자들이 여전히 끊이지 않았지만, 그 해 여름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일년 내내 상주하는 이들은 덩그러니 두 세대뿐이었다.
지방 상인들의 잦은 폭력행사와 불매운동에도 불구하고, 코이노니아의
유일한 자산인 1,100평에 달하는 당만은 가까스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
나 그 땅 전역에 걸쳐 살고 있던 가난한 소작농들은 강요에 못이겨 그 척
박하기 그지없는 농촌생활을 떠나서 훨씬 더 불안한 도시의 삶을 찾아가야
했다.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사람들은 위험할 정도로 낡아빠진 집에서
서로 옹기종기 껴안고 살아야 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살 만한 집을 마
련하리라는 희망따위는 애초에 품을 수조차 없었다.
1968년 가을, 클래런스와 나는 영적으로 깨어있고 사회적으로도 의식이
있는 그리스도인 15명을 코이노니아에 불러모았다. 나흘에 걸친 회의를 통
해 '코이노니아 동지회'라는 새로운 비전이 탄생했다. 이 단체의 주력 부
서는 협동주택 사업을 맡았다. 코이노니아가 박해의 세월을 견딜 수 있도
록 기부금을 헌납해주고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던 전국의 수많은 후원자
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클래런스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종
류의 주택공급 계획을 제시했다.
우리는 반 에이커짜리 택지 42구간을 마련하여, 강제퇴거당한 농촌 가족
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가운데 4에이커는 공원과 휴식공간으로 남겨둘
것입니다. 목욕탕, 부엌, 거실을 갖춘 방 네 개짜리 주택을 지을 것이며,
비용은 20년에 걸쳐 상환받을 것입니다. 이자는 전혀 없으며, 다만 매달
소정의 관리비를 받을 뿐입니다. 이 비용의 차이는 가난한 이들이 집을 가
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차이입니다. 이자를 부담할 경우 비용은
집 두 채에 해당하는 금액을 부담하면서도 수중에 들어오는 집은 단 한 채
뿐인 것입니다.
동역자가 되는 가족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지으면서 조금씩 빚을 갚
아나가게 됩니다. 최소한 저축금의 일부분은 자기 집을 지을 때 사용된 기
금의 이자로 내어놓기를 권장합니다. 모두 이익을 얻는 만큼 책임도 함께
분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욱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주는 기쁨의 한없는 복을 느
끼지 못한다면 안 될 말이지요.
클래런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건축사업에 쓰일 비용은 '인류를 위
한 사랑의 기금' 발족식을 통해 모금하도록 되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선이 아니라 자본이며, 사회복지사업
가가 아니라 함께 일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사용할 현명하고도 영예롭고 공정한 방법입니
다. '인류를 위한 사랑의 기금'은 이러한 양쪽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줄
것입니다.
기금은 자신에게 필요한 액수보다 돈을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
이 기꺼이 내어놓을 헌납금과 그 정도의 능력은 없으나 극빈자를 위한 운
영자금을 보태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무이자 대부금, 그리고 동역자로 참여
할 산업체, 농장, 그리고 주택들이 자원봉사로 내놓는 영리금으로 충당합
니다. 그 시작으로 코이노니아 농장의 전재산인 25만 달러를 기금으로 위
탁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다른 헌납금들도 벌써 들어오고 있습니다.
기금에서 현금을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적선이 아니기 때문입니
다. 동역자로서 참여하는 사업에만 자본을 제공할 것입니다.
클래런스는 이 위대한 노력이 시행된 지 1년 만에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만의 '판잣집', 즉 농장에 딸린 단칸방 서재에 앉아 특
유의 힘이 넘치는 설교문을 작성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를 사랑했던 우리들은 모두 그의 죽음이 던져준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
나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한참 전개되고 있던 협동주택사업에 더욱더 헌
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클래런스를 통해 우리를 엄청난 도전에 부
딪치게 하셨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새롭게 합류한 몇몇 가
족들의 도움과 각계각처의 친구들이 보내온 헌납금과 무이자 대부금에 힘
입어, 1972년 연말에는 최초로 시작한 27개 주택단지가 거의 다 완성되어
입주를 완료했다. 부지 일부분은 위락시설을 위해 남겨두었고, 2개 부지는
육아센터와 어린이 놀이방으로 활용했다. 1마일 떨어진 곳에는 이미 32개
세대를 위한 새로운 부지가 계획되어 있었다.
이듬해가 되자 또 다른 도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천 교회
의 찬조를 받고 연합 그리스도 교회와 결연을 맺어, 린다와 내가 코이노니
아를 떠나 특별한 선교의 사명을 띠고 아프리카 오지로 가게 된 것이다.
네 아이들을 데리고 프랑스에 들러 언어훈련을 받고 곧 자이레로 떠났다.
우리는 제3세계 국가에서도 협동주택 사업의 개념을 시험해 보리라 마음먹
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6년 자이레 적도지역의 중심도시인 음반다카를
방문하고 나서, 이 도시가 출발점으로 적격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 도
시는 자이레가 1960년 급작스럽게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면서 밀림의 촌락에
서 도시로 이주하는 것이 허가되는 바람에 서둘러 급조된 부실 건물들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덕지덕지 붙어있는 곳이었다. 10년도 못되는 기간
동안, 음반다카의 인구는 30,000명에서 150,000명으로 폭증했다. 아주 잘
사는 사람들을 빼면 안락한 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었으며, 더
구나 새로 이사오는 사람들한테 돌아갈 집은 아예 없었다.
3년간 린다와 나는 도둑질을 비롯해서 한심하기 그지없는 관료주의와 변
덕스런 단속과 차압, 그리고 만성적인 기금 부족과 물자의 부족은 물론이
고 시간을 돌처럼 여기는 나라에서 끈질기게 참고 기다리는 법까지 배워야
만 했는데, 그 고초와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함
께 일하겠다고 나서준 놀라운 자원봉사자들이 있었고, 수백 명에 달하는
고국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게다가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사는 지
역주민들이 정말로 그들에게 살 만한 집을 마련해 주고자 애쓰는 우리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자, 정말 뜨거운 열성으로 성원해 주었다.
로코니 목사가 살던 음반다카 변두리의 다 쓰러져가는 진흙집은 두 내외
가 친자식처럼 기르려고 입양한 아홉 어린이들의 보금자리였다. 로코니 목
사는 이 계획의 열렬한 응원자였다. 언젠가 우리의 공사부지를 방문한 손
님들에게 했던 말이 그의 경외심과 흥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몇 년 전 선교사들이 왔을 때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자기네가 살 안락한
집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하나님께 근사한 집을 지어 드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집 짓는 일을 도우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와 린다와 자원봉사자들을 보내서 서민들의 집을 짓게 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집 마련이 제일 큰 고민이라고 할 겁니다.
교회가 도시 중심에 이렇게 새로운 주택단지를 짓고 있다니 정말 대단한
일 아닙니까!"
1976년 4월 7일 우리가 자이레를 떠나던 날, 80세대가 음반다카지역 '인
류를 위한 기금'에 매달 상환금을 내고 있었고, 벌써 새 집에 입주한 사람
들만도 수백 명에 달했다. 남쪽으로 90마일 떨어져있는 응톤도 마을에서는
제2차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어느 정도 견실한 자재로 지은
집이 통틀어 세 채에 불과했다. 그 지역의 위원회는 그 세 채에서 사는 사
람들은 제외한 모든 주민들에게 제대로 된 집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
고, 우리들은 그에 따라 300채에 달하는 집을 지어야만 했다. 실로 광대한
기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한 돈을 어디서 구해야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지금가지 주님께서 내딛는 발자욱마다 함께 해 주셨으니, 이제 와서 우리
를 낙담시키지는 않으시리라 믿었다.(자이레에서 있었던 일들은
Bokotola(N.Y.:Accociation Press,1977)에 적어놓았다.)
1976년 린다와 내가 코이노니아 농장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제 우리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사로
잡고 있었다. 그 해 가을 헤비타트 운동본부가 발족하면서 그 방향은 분명
해졌다. 이 새 조직은 기금을 모으고,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며, 전세계에
걸쳐 도움이 필요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 나은 주거지를 마련해주기 위
한 수속절차와 전문적 기술을 제공해 줄 것이다.
우리의 꿈이 막 발사된 셈이었다. 그 꿈이 얼마나 빨리 창공으로 솟아오
를지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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