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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헤비타트

"린다, 우리 걸어갑시다"

by Healing New 2020. 9. 20.

  공기는 싸늘하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우중충하게 찌푸린 하늘에서 금방
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1983년 4월 초순의 일요일 오후, 나는 조지아 주 아메리쿠스의 우리 집 현
관문 앞에 앉아 있었다. 벌써  몇 주 동안 아메리쿠스에서 700마일 떨어진 
인디애너폴리스까지 걸어가는 게 어떨까  생각해왔다. 9월 셋째 주말에 헤
비타트의 일곱 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대규모 축하행사가 가을 이사회를 겸
해 인디애너폴리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만일 행사장까지 도보로 여행한
다면, 주택문제의 필요성을 더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당면한 문제의 절박성
을 더 많은 사람들이 실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린다에게조차 이 생각을 털어놓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계획이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그렇
게 먼 거리를  걸을 수 있을까부터가 의심스러웠다.  건강은 썩 좋았지만, 
그렇다고 700마일을 걷는다니 그런  일은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다!
  그래서 나는 좀더 소박한  목표를 생각했다. 일요일 오후 예배에 참석하
러 코이노니아 농장까지  갈 때 8마일에 이르는  그 길을 걸어가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고 나면 과연 어떤 기분이 될까. 예배는 오후 4시에 시작하는
데 벌써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주저했다. 날씨는 험악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코이노니아까지는 적어도 
두 시간이 걸릴 터였다. 나는  마침내 걸어가기로 했다. 집안으로 다시 뛰
어들어가면서 아내에게 밑도 끝도 없이 소리를 쳤다.
  "코이노니아에 예배 드리러 가려고 하는데, 걸어가야겠어!"
  "뭐라구요?"
  "걸어간다구!"
  "왜요? 비가 올 것 같은데요.  도대체 왜 굳이 이런 날씨에 걷겠다는 거
예요?"
  "나중에 말해줄게. 당신도 나갈거지?"
  "그러려고 해요."
  "좋아. 돌아올 땐 당신 차를 타면 되겠네. 그럼 거기서 봅시다."
  나는 모자와 우산을 낚아채듯 거머쥐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예배시간에  맞춰 코이노니아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하늘을 보니 낌새가  좋지 않았다. 4마일쯤 걸었을까, 비가 본격
적으로 내리기 시작하면서 바람이 얼굴을 정면으로 때렸다. 갈수록 걷기가 
힘들었지만, 꿋꿋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4시 15분 나는 흠뻑 젖고 기진맥
진한 채 농장 진입로에 도착했다.  어차피 예배 시작 시간은 한참 전에 지
난 터라 곧장  예배당으로 가는 대신 첫 번째  건물에 들어가 쉬면서 숨을 
골랐다. 의자에 앉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겨우 8마일밖에 안  걸었는데 이 모야 이 꼴이라니. 700마일을 
걸을 생각이라는 얘길 안 하길 잘했지.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었을거야!'
  몇 분이 지나자 예배를 드리러  나설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
침에 여기저기 쑤시고 아팠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나았다. 중요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코이노니아까지  걸어감으로써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다. 나는 인디애너폴리스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린다와 걷기운동에 대해 의논
했다. 린다도  마음이 끌리는 모양이었다. 린다는  함께 걷고 싶어했지만, 
그 먼 길을 전부 걷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둘이 교대로 걷는다면 몰라
도 말이다. 자기가  서너 마일쯤 걷는 동안  나는 지원차량을 타고 따라가
고, 반대로 내가 걷는 동안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는 것이 린다의 생각이었
다. 그 먼 거리를 전부 다 걷겠다는 건 과욕이라는 것이었다. 린다는 완고
하게 고집을 부렸다. 결국은 마음을 바꾸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 날만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인디애너폴리스 헤비타트 축제와 관련해  기금 100만 달러를 
추가로 모금하기 위해 구성했던 특별조직 '7인 위원회'와 이런 걷기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 의논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세계의 참혹한 주택문제에 사
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주 새로우면서도 극적인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
다.
  100만 달러의 성금을 창출하기  위한 갖가지 아이디어들이 나온 뒤에 나
는 아메리쿠스에서 인디애너폴리스까지 걷기운동을  할 의향을 비쳤다. 헤
비타트 소식지로 홍보를 하고, 사람들에게 1마일당 얼마씩을 헌금하겠다는 
약속을 받으면 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와 함께 걷도록 장려할 수도 있
을 것이다. 전체를 다 걷든  그 중 일부구간만 걷든 자유의사에 맡기면 된
다. 걷기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제각기 헌금약속을 받게 된다. 100,000달러 
정도는 목표액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100만 달러의 십분의 
일이 아닌가!
  처음 이 아이디어를 들은 위원회는 놀라서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떤 위원
들은 과연 그렇게    엄청난 수고를 하는 게 현명한 일인지 따져 물었다.
  "안 그래도 바쁘신데 스케줄을 너무 많이 차지하지 않겠습니까?"
  "고속도로 갓길을 걷는 게 얼마나 위험한데요."
  "걷기운동이 돈을 모으려는 싸구려 쇼처럼 보이면 어쩌죠?"
  걷기운동이 좋은 의견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당장 열띤 호응
을 기대하긴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의논을 거듭함에 따라 이 제안은 
점점 더  그럴싸하게 생각되었다. 위원회는 심사숙고하고  기도를 드린 뒤 
마지막 결단을 내게 맡김으로써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빗속을 뚫고 코이노니아까지 걷고 난 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긴 기도와 
생각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찾았다. 나는 가기로 결정했다. 린다도 함께 걷
겠다고 나서주는 것이 정말 기뻤다.
  축하행사에 대한 계획이 1년째  진행되고 있었다. 헤비타트 운동은 1983
년 9월이면 창설 7주년을 맞게 되어 있었다. 7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숫
자로서 '성스러움, 완전함, 안식'을  뜻했다. 모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뻐하는 대집회를 열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헤비타트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고, 우리는 이제껏 성취한 업적을 자축하고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영감을 고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이레, 우간다, 페루 등 다
른 나라에서도 탁월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석해 집다운 집이 없는 사람들
이 비참한 상황을 증언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전진하도록 우리
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줄  예정이었다. 미합중국 방방곡곡에서 초청된 
연사들도 격려연설을 하고,  국내의 주택수급상황을 설명하며, 헤비타트가 
어떤 일을 해왔는가 소개할  것이다. 우리는 깃발과 풍선들로 가득찬 퍼레
이드도 벌일 예정이었다! 1,000명이  넘는 후원자들이 참석함으로써, 역사
상 최대의 헤비타트 집회가 될 전망이었다.
  물론 우리는 이 집회가 언론의  귀중한 관심을 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걷기운동은 훨씬  더 많은 이목을 헤비타트  사업에 집중시킬 것이다. 
결심이 굳어지자 나는 곧  메모로 헤비타트 사업에 집중시킬 것이다. 결심
이 굳어지자 나는 곧 메모로  헤비타트 이사들과 고문들에게 이 사실을 알
렸다. 8월 3일 아메리쿠스를 떠나 9월 13일에 인디애너폴리스에 도착할 계
획이었다. 우리는 지역 헤비타트  자원봉사자들과 친구들에게 동참을 호소
했다.
  최초로 우리와  함께 걷겠다고 나선  사람은 아일랜드 베일리보로출신의 
휴 오브라이언이었다. 건장한 66세의  독신남인 휴는 1982년 9월 아메리쿠
스에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유콘에서 카톨릭 신부를 도와 성당을 짓는 일
에 자원봉사로 목수 일을 하던 휴는 아메리쿠스까지 버스를 타고 왔다. 그
는 우연히 캐나다에 있는 어떤  사람한테서 (모르타르에 깃든 사랑) 한 권
을 받았다. 그 책에 감동을 받은 휴는 버스를 잡아타고 조지아까지 내려와 
책에서 읽은 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한 경찰관이 새벽  3시에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휴의 도착을 알려주었
다.
  "풀러씨, 헤비타트 본부  밖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하는군요."
  "새벽 3시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유콘에서 왔다고 하는데요."
  "당장 내려가지요."
  유콘에서 우리를 찾아오는 손님은 흔치 않았다!
  난 첫눈에 휴가 마음에 들었다.  키가 작고 대머리인 휴는, 활짝 웃음을 
띠었는데, 남은 이가 몇 개  되지 않았다. 옷차림은 헐렁한 셔츠와 바지가 
전부였고, 머리에는 푹 꺼진 펑퍼짐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곧 그
가 단벌신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휴는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 년 동안 그는 온타리오와 유콘과 인
도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는 홀홀단신의 아일랜드 
기독교 평화봉사단이었다. 끈기있고 성실한 노동자인 휴는 건축일을 잘 알
았다. 언젠가 그는 단돈 20달러를  지니고 뉴욕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몇 
달 후에 돌아올 때까지 돈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고 했다!
  휴는 도착한 날부터 아메리쿠스의  헤비타트 건설 인부들과 어울려 자원
봉사를 시작했고, 몇  달 동안 충실하게 일해주었다.  그는 걷기운동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결단을 내렸다. 그는 여기 아메리쿠스에서도 어디든 걸어
서 가거나  자전거를 이용했고, 나 역시  그가 인디애너폴리스까지 걸어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이들도 전부, 또는 일부 구간에서 
우리의 동참하겠다는 신청하기 시작했다.
  늦은 4월, 린다와 나는 몸을 단련하기 위해 오후마다 야외에 나가 3,4마
일을 걸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던 길은 5,6마일 가량의 도시순환로였다. 
그 길이 아니면 우리는 근처 조지아 사우스웨스턴 칼리지의 고즈넉한 소나
무숲 속 반 마일 가량의 조깅 순환로까지 걸어가 그 길을 몇 번쯤 돌고 집
으로 다시 걸어오곤 했다.  린다는 정기적으로 수영과 에어로빅 강습도 받
기 시작했다.
  훈련으로 체력이 강해지면서 우리는  속도와 거리를 늘려나갔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10마일에서 15마일  밖까지 차를 타고 나갔다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아메리쿠스로 걸어들어오곤 했는데  샛길들을 탐험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마침내 린다도 700마일 전구간을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
다. 그리고 나도 해낼수  있다는 것을 믿어주었다. '교대하자'는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우리는 아메리쿠스에서 인디애너폴리스까지  전구간을 함께 
걷기로 했다.
  8월 3일 출발일을 일주일을  앞두고, 우리는 이틀 연속해 15마일을 걸었
고 3일째 되는 날은 10마일을 걷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걷고 난 
뒤에도 몸이 가뿐해서, 우리는  이제 대사를 치를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헤비타트 소식지 6-7월호에  이 계획에 대한 기사를 실어 걷기운동
이 갖는 삼중의 목적을 알렸다.
  무엇보다 우리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
에게 아담하고도 쾌적한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제시하고 싶습
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엄청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담대하게  외치고 싶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
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의 손 말고는 다른 손이 없으며, 우리의 발 말고는 다른 발이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걷기운동을 통해  적어도 100,000달러를 모금하고자 
합니다. 마일당 얼마씩의 현금을  1983년 연말이 되기 전에 납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나긴 걷기운동의 세 번째  목적은 우리가 아메리쿠스에서 인디애너폴리
스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걷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관심이 있으면 편지를 주십시오. 전구간을 걸으
셔도 좋고, 일부 구간에서만 참여하셔도 좋습니다.
  7월 16일, 우리는 아메리쿠스에서 새로 수리한 베시 무어의 집을 헌정하
는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에서  베시의 열두 살난 아들 헨리는 함께 걷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는 전구간을 함께 걷고  싶어했지만, 개학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머니 베시와 상의했고, 그녀는 헨리
가 애틀랜타까지 걸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헨리는 한 번도 애틀랜타에 가
본 적이 없었다. 헨리네는  차가 없었기 대문에 아메리쿠스 밖으로 나가본 
적도 거의 없었다.
  헨리는 우리  부부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기운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헌금을 하겠다는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걷기운동을 실제로 떠나게 되었을 
무렵, 그는 이웃 사람 모두의 서명을 받아 왔다. 그의 모금액은 모두 합해 
2,000달러가 넘었다!
  우리가 앤더슨빌에서  아메리쿠스로 연습 삼아 걸어  돌아오던 어느 날, 
나는 헨리에게 새  집에서 제일 좋은 게 뭐냐고  물었다. 헨리는 즉시 "제 
방이요"하고 대답했다. 개조 전에는 헨리, 여동생, 그리고 엄마가 모두 좁
은 방 한 칸에서 잠을 자야 했다.
  나는 헨리에게 왜 걷기운동을  하고 싶어하느냐고 물었다. 그 애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지막이 대답했다.
  "저도 다른 사람들이 좋은 집에 살 수 있게 돕고 싶어서요."
  출발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열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출발 일주일 전, 
인디애나 주 뉴 패리스에서 온 젊은 퇴직자 세실 밀러는 캠핑차를 몰고 아
메리쿠스에 도착했다. 세실은 우리와  함께 가면서 식사를 제공하고, 침낭
을 운반하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기로 했다. 그의 아내 쥬
넷은 켄터키 북부에서 우리와  합류하기로 했다. 월러스와 낸시 브로드 부
부, 그리고 클레어 윌리엄즈는 아메리쿠스 사무소의 자원봉사자로서, 먼저 
전구간의 길을 답사하고  노상에서 참고가 될 만한  건물과 도시를 세심히 
메모했으며 잠을 잘 만한 교회를 섭외했다. 
  헌금과 헌금 약속이 쇄도하고 있었다. 걷기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목표액의 절반 가량이 모금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벅찬 약속이 7
월 4일 아침에 전해졌다. 그  전화가 걸려왔을 때, 나는 린다와 함께 부엌
에 서 있었다.
  "밀라드, 나 짐 핸들리요."
  "아, 짐! 안녕하신가!"
  짐과 지니 핸들리는 미시간 주  하버 비치에서 온 특별한 헤비타트 동역
자이다. 1982년 내가 잠재적인 헤비타트 사업단지를 물색하고 현재 진행중
인 사업을 둘러보려고 파푸아뉴기니를  거쳐 세계를 일주하려 할 때, 핸들
리 부부는 린다가  동행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 
축하행사와 관련해 100만 달러  추가모금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역
시 아낌없는 헌금을 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소
식을 가져온 것이다.
  "밀라드, 방금 6-7월호 소식지를  받아 보고서 자네가 인디애너폴리스까
지 걸어가기로 했다는  걸 알았네. 정말 환상적인  생각이야. 지니와 나는 
자네의 목표를 위해 20,000달러를 헌금하기로 했다네!"
  나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짐, 그건 정말 엄청난 돈인데! 고맙네, 정말 고마워!"
  아메리쿠스를 출발하기  얼마 전, 헤비타트  사무소의 직원들은 1마일당 
44센트의 헌금을 약속하는 서명들이  적힌 거대한 카드와 꼭대기에 '축 인
디 700마일 걷기운동'이라고 쓰여진 케ㅇ을 린다와 나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우리가 떠나기 바로  전날 밤, 린다와 내가 마지막으로 짐정리를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전화벨이 울렸다. 로잘린 카터의 비서였다. 그는 로
잘린과 딸 에이미가  다음날 아침 송별식에 참가해  시외까지 함께 걷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1983년 8월 3일 수요일 새벽6시,  거대한 군중이 웨스트 처치 가에 있는 
헤비타트 사무소 앞에 모여들었다. 우리는 간단히 송별식을 했는데 식순의 
마지막은 "헤비타트  오예!"라고 외치며 화답했다.  열기를 고조시키는 데 
그보다 더 훌륭한 방법은 없었다.
  6시 30분이 되자 모든 참석자들이 하나의 깃발 뒤에 정렬했다.
  700마일 걷기운동
  아메리쿠스에서 인디애너폴리스까지 
  인류를 위한 헤비타트 운동
  처음 몇 구간 동안 우리는  200명이 넘는 대군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아메리쿠스 중심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우
리 시온으로 행군한다네'라고.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이 오랜 찬송은 린다와 내게 너무도 
뜻 깊은 노래였다. 이 노래는  18년 전 뉴욕 시를 떠난 앨러배머로 돌아오
던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가슴 속에 불어넣어 주셨던 바로 
그 곡이었다. 그때 우리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기독교 사업에 몸바
치며 살자고 갓 다짐한 터였다.
  내 감정이 북받쳐오른 데에는 또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거의 14년 전인 
1969년 10월 29일,  나는 수의로 감싼 클래런스  조던의 시체는 뒤에 실은 
채 쉬보레 스테이션 웨건을 몰고 이 똑같은 길을 달렸다. 그가 코이노니아
의 '판잣집 서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떴을 때, 나는 검사관을 불
러 시체를 해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검사관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부검할 의사조차 오기를 꺼렸다. 아메리쿠스와 섬터 카운티의 사람들은 클
래런스를 증오했다. 그가 흑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소위 '집단 공산주의
자 사회'를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사랑하던 농장의 땅에 
그를 묻기 전에,  부검을 받고 사망진단서를 떼기  위해 그의 시체를 싣고 
병원까지 달려야만 했다.
  나는 또한 이 거리에서 마지막으로 가두시위를 이끌었던 때를 회상했다. 
1971년 8월, 아메리쿠스의 흑인 시민들은 경찰의 폭력행사사건으로 분노하
고 있었다. 도시 곳곳의  흑인교회에서 연이어 대집회가 열렸다. 법원청사
를 둘러싸고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코이노니아 농장의 몇몇 사람들은 시민
들의 불만을 검토한 뒤 그들의 명분에 동참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바로 
이 길을 따라 행진하며 '우리 승리하리라'와 '그 누가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으랴'를 불렀다.
  그 후로 세상은 놀랄  만큼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몹쓸 짓을 한다고 항의를 하며  걷던 수많은 흑인관중과 몇몇 소수의 백인
들로서가 아니라, 완전히 하나가  된 그룹으로서 걷고 있었다. 시장도, 경
찰서장도, 전 여부인도,  그리고 흑인 시의원도 우리와  함께 길을 나서서 
너로 돕기 위해 해낸 일을 축하했다. 참으로 벅차고 감격스러운 경험이 아
닐 수 없었다.
  우리는 리 거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 왼쪽으로 한때 버드시 
사료가게가 있던 건물이 보였다. 그 가게는 50년대에 다이너마이트로 폭격
을 당했는데, 지역상인들이 주도하던  불매운동중에 코이노니아에 몇 가지 
물품을 팔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가게는 다시 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
나 이제는 이 도시의 모든  가게들이 기꺼이 코이노니아 농장과 거래를 트
고 있다.
  우리는 거리를 행진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헤비타트 오예!"를 외쳤다. 
왼쪽으로는 일렬로 늘어선 말쑥한  집들이 스쳐갔고 오른쪽으로도 몇 채가 
지나갔는데, 모두가 코이노니아의 협동주택 사업을 통해 지은 집들이었다. 
코이노니아의 헤비타트의 건설 인부들은  이 지역 중학교를 중심으로 23채
의 새 집들을 지음으로써, 몇 년  전만 해도 그 곳에 늘어서 있던 다 쓰러
져가는 판잣집들을 바꾸어 놓았다.
  이 견고한 집들을 훑어보면서,  그리고 수많은 주민들이 마당에 나와 앉
아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들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것이 바로 
걷기운동을 감행하는 이유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애틀랜타로 가는 19번 고속도로를 향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주택들의 모습
이 바뀌기 시작했다. 좀 나은 집들 사이에 수많은 판잣집들이 자리잡고 있
었다. 우리의 일이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해 주는 풍경이었다. 
이 서글픈 건물들이 우리의 걷기운동에 절절한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저쪽이 19번  고속도로입니다! 모두 우회전하세요!  고속도로에 올라서
면, 모두 함께 노래를 부릅시다!"
  오라.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이여
  이 기쁨을 세상에 알리라 
  달콤한 화음으로 노래를 부르라
  달콤한 화음으로 노래를 부르라
  그리하여 보좌를 에워싸라
  그리하여 보좌를 에워싸라
  우리 시온으로 행군한다네
  아름다운, 아름다운 시온으로
  우리 시온으로 올라간다네 
  아름다운 하나님의 도시로
  경찰 호위대가 선두에서 길을 인도해준 덕에, 우리는 몇 마일 동안 고속
도로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메리쿠스 시 경계선 바로 북쪽의 마
켓 유아원에서 길을 다시 비켜줄 때까지, 많은 자동차들이 수백 야드 거리
를 후진해 돌아가야만 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섰다.  우리 큰딸 킴은 그 곳까지만 우리와 
동행했다. 킴은 린다와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우리는 수많은 다른 이들
과도 포옹을 나누었다. 그리고  열심히 흔들어대는 작별의 손짓과 몇 번인
가 "오예!"를 외치는 함성을 뒤로 한 채 북쪽을 향했다.
  우리는 애틀랜타까지 걷는 기간을 열흘로 잡았다. 그보다 더 빨리 갈 수
도 있었지만, 우리 모두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것을 감안했다. 첫 번째 구
간에서는 안전을 위주로 하기로  했다. 한여름이었으므로, 우리는 대충 새
벽 동트기 직전부터 정오까지 걸을  수 있었다. 대략 오전 10시쯤 세실 밀
러가 캠핑차를 몰고 우리를  쫓아와, 과일이며 아이스티며 쿠키 등의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세실의  얼굴을 보면 언제나 반갑기 짝이 없었는
데, 그가 가져오는 선물도  물론 좋았지만 그의 기분좋은 유머감각과 아낌
없는 격려 때문이기도 했다.
  모든 참가자는 각자 물병 한 개와 여행필수품 일체, 그리고 예비용 양말 
한 켤레가 든 배낭을 메고 걸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휴식을 취했다. 오
후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조금씩 더 걷기도 했다. 
  8월 6일 토요일 아침에,  우리는 '각다귀 선'이라고 이름난 플린트 강을 
건넜다. 이 강의  남쪽에서는, 초여름부터 서리 내릴  때까지 눈이든 코든 
입이든 가리지 않고 날아드는  새카맣고 작은 곤충들이 극성을 부렸다. 그
러나 플린트 강  북부에서는 이 성가신 작은  괴물녀석들을 만나기 힘들었
다.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는  그 흐르는 물줄기를 건너게 되어 얼마
나 기뻤는지 모른다!
  토마스튼 바로 남쪽에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클렘슨의 제일침례교
회에서 나온 노동수련캠프 회원들이 자동차  두 대에 가득 타고 와서 우리
와 함께 걷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몇 주간 아메리쿠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헤비타트 사무소에서 나온 톰 
홀과 아내 다이앤도 비슷한 시기에 세 자녀를 데리고 왔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걸어서 토마스튼 시를 종단할 예정이었다. 
  샘의 아내 비키 롯은 며칠째 우리와 함께 걸으며 걷기운동 홍보담당으로 
일하고 있었다. 비키는  다음 마을로 한발 앞서  가서 언론사와의 인터뷰, 
종교계와 민간 지도자들과의 접견을  주선했다. 클렘슨 노동수련캠프 회원
들이 우리와 합류한 토마스튼에서 그녀는 아주 특별한 일을 벌였다. 한 호
위경찰이 도시 남쪽 경계선에서 우리를  맞아 전체 시를 횡단하는 동안 선
도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늘어난 집단을 한데 모아 이끌었다.  
  "자, 모두들 힘을  냅시다! 우리는 경찰차 뒤를  따라 힘차게 걸을 겁니
다. 관심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헤비타트 자료를 건네주십
시오. 자, 갑시다!"
  시내 한가운데를 행진하는 동안,  우리는 "헤비타트 오예!"라고 외쳤다. 
다정한 표정을 짓는 자동차  운전수가 지나가며 차창으로 헤비타트 소식지
와 전단을 쑤셔넣었고,  인도 위에 서서 귀를  기울이는 듯한 사람만 보면 
소식지와 전단을  쥐어주었다. 몇 분마다 경찰이  사이렌을 울려댔기 때문
에, 아무도 우리를 못 본 척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시의 북부지역에 도달했을 쯤에  비키가 무료 점심을 제공받기로 주선해
놓은 맥도날드에 들렀다. 점심을  먹는 도중 에이미 카터가 가게에 들어오
는 바람에 모드 깜짝 놀랐다. 그때 마침 나는 '토마스튼 타임즈'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중이었다. 기자는 나와 에이미의 사진을 찍으면 좋겠다면서 
함께 서주기를 부탁해왔다. 그러더니 한참 동안이나 미적거리며, 사진기를 
옆으로 들었다 위로 들었다  하는 것이었다. 여기자는 마침내 낙담한 표정
으로 말했다. 
  "도대체 사진을 찍을 수가 없네요,  에이미에 비해 밀라드 씨 키가 너무 
커요."
  5피트 3인치(약 158cm)의 에이미가 재빨리 대꾸했다.
  "제가 어떻게 해 볼께요."
  에이미가 발끝으로 서고, 내가  6파트 4인치(약196cm)의 몸집을 약간 숙
인 끝에 기자는 우리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 날 오후 나는 지역방송국에서 인터뷰를 녹화했는데, 그 날 저녁 뉴스
에 방영할 분량이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참가자들은 빠짐없이 장로 교회
의 강당에 모여 방송을 시청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는 인터뷰의 앞부분을 
방송하다가 밑도 끝도  없이 말을 툭 끊더니  그 지역 협동저축대부조합의 
광고를 삽입했다.  어떤 이윤이나 이익도 추구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주택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내 말이 갑자기 부자들에게 열띠게 호
소하는 저축대부조합의 상업광고로 바뀌자  그 대조가 너무나 두드러져 모
두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알았다. 
  우리는 토마스튼의 여러 교인들의 가족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일요일 
아침 우리는 시내의  각기 다른 교회로 흩어져  예배를 드리고 헤비타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오후에는 다시 제불론이라는 작은 도시를 향해 북쪽
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불론의 남쪽 경계선 바로 못미쳐 토마스튼 제일침례교회에서 파견나온 
노동수련캠프 참가자들이 우리를 따라잡았다.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에 이
르는 50명 남짓한 청소년들이 큰  버스 한 대에 타고 있었다. 걷기운동 참
가자 중에서 제일침례교회 출신이  몇 명 있어서 노동수련캠프 참가자들도 
걷기운동을 잘 알고 있었고, 얼마간 우리를 따라 걷겠다고 자청해 나섰다. 
나는 버스에 올라타 헤비타트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특히 걷기운동
의 목적을 강조했다. 그리고는 "헤비타트 오예!"를 외치는 법을 가르쳐 주
었다. 어린아이들은 금방 요령을 익혔고, 우리는 제불론 시내를 60병이 넘
는 대군으로 질풍노도처럼 통과하며,  "헤비타트 오예! 인디애너폴리스 오
예!"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고 나서 버스는 가던 길로 떠났고, 우리는 
밤을 지내기 위해 발걸음을 멈췄다.
  우리는 이블린 베리  박사와 누이 도로시 던의  널찍한 마당을 야영지로 
잡았다. 그들은 아름다운 언덕 꼭대기에 살았는데, 바로 옆에 골프장이 있
었다. 우리는 텐트를 치고 나서 골프장을 돌아다니며 산책도 하고, 호스로 
샤워도 했지만 각다귀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우리는 북쪽  그리핀 시로 향했다. 제불론에서 몇 마일쯤인가 
벗어났을 때, 머리가 희끗희끗한 부인 한 분이 자기 집에서 허겁지겁 뛰쳐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신가요?"
  부인이 물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전 애니 더든이라고 해요. 여기 잠깐 들어와서 앉으시지요."
  부인은 야외용 의자 몇 개를 가리켜 손짓하며 말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게 있답니다."
  부인은 집안에 다시 들어가더니 아름다운  딸기 케익과 차가운 물 한 주
전자를 들고 나타났다. 우리는 반  시간 동안 그 집에 앉아 부인과 이야기
를 나누었다. 우리가 떠나기 전에 달기 케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다시 떠
온 물주전자까지 바닥이 났다. 우리는 음식과 휴식뿐 아니라, 매력적인 부
인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상쾌하게 기분전환을 할 수 있었다.
  몇 마일쯤 더 걸어갔을 때,  이번에는 잔디를 깎고 있던 나이 지긋한 신
사분을 만났다. 그는 헤비타트와 걷기운동을 익히 알고 있다며, 그 곳에서 
당장 헌금서약을 했다.
  정오가 가까웠을 때, 우리는 길을  걷던 농부를 만났다. 그는 싱싱한 오
이 한 자루를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그 날 밤 우리는 그리핀 바로 남쪽에 
있는 모퉁이돌 교회에 묵게 되었다. 교회 현관문을 들어섰을 때 우리는 아
주 반가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숙소로 쓸 주일학교 건물이 냉방중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우리의 목표지점은 20마일 떨어진 조너스보로의 보난자연합 그리
스도 교회였다. 우리는 새벽 6시에 출발해 정오가 지날 때까지 걸었다. 11
시쯤 되자 더위가 엄청나게  기승을 부렸다. 페이스는 오른발에 커다란 물
집들이 생겨서, 한쪽 신발을 아예  벗어버렸다. 그는 한발 한발 디딜 때마
다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 날 아침 출발할 때 선두에 섰던 휴 오브라이언은 오후에 뒤로 처지고 
말았다. 마침내 그의 모습이 아예  봉지 않자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휴가 따라올  때가지 기다리라고 댄에게 부탁해놓고,  우리들은 계속 길을 
걸었다. 마침내  우리는 죠너스보로 교회에  도착했다. 20분이 지났는데도 
댄과 휴는 오지 않았다. 30분. 45분.
  세실에게 부탁해 차를 타고 두 사람이 무사한가 확인하러 되돌아갔다. 4
분의 1마일쯤 가자, 두 사람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휴는 길
목 어디선가 낡은 천을  발견하고는 작열하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가리려고 
머리 위에 덮어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허연 천을 뒤집어쓴 KKK(미국의 
인종차별주의적 비밀조직)단원처럼 보였다!  우리가 모두 그랬듯이 그들도 
기진맥진했지만 결국 교회까지 걸어오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다음 이틀 동안 우리는  애틀랜타까지 남은 20마일을 걸으며, 짬짬이 다
른 일들도 만끽했다. 하루는  보난자 교회의 배려로 오후에 애틀랜타 브레
이브즈의 야구경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한 번도 메이저리그를 보지 못한 
헨리 무어에게 그보다 큰 선물은 없었다.
  8월 12일 금요일에  우리는 조지아 주 주청사  앞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주무장관 맥스 크릴랜드가 걷기운동에  관한 주지사의 성명을 발표할 예정
이어서 최소한 100여  명의 군중들이 이 행사를  보기 위해 원형의 주청사 
건물로 몰려들 전망이었다. 신문과 텔레비전의 기자들도 참석했다. 그러나 
정작 맥스가 오지 않았다.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자들이 동요하
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불안해 보였다. 마침내 전갈이 왔다. 주무장
관이 엄청난  교통정체에 갇혀 언제 도착할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대리인이 성명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경건하게 성명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명에서 내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밀드레드 
풀러"라고 읽는 것이었다. 처음엔  여기저기서 쿡쿡 소리죽여 웃는 정도였
지만, 급기야  그가 "밀드레드"를 부를 때마다  폭소가 터져나오기 시작했
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친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들 배꼽을 
쥐고 웃어대는지 끝까지 몰랐을 것 같다.
  앤드루 영 시장 또한 이 도시를 대표해 선포할 일이 있었다. 8월 12일은 
애틀랜타 시와 조지아 주 전역에서 '헤비타트의 날'로 선포되었다.
  다음날 아침 새로운 동역자 샐리  윈터와 앤 네텀을 포함하여 모든 걷기
운동 참가자 전원이 트리니티 연합 감리교회에 집합해 다시 북쪽으로 발걸
음을 재촉했다. 새로 조직된  애틀랜타 헤비타트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 곳
에서 우리를 맞아 몇 마일  동안 함께 걸어주었다. 모두들 기분이 들떠 있
었다. 아메리쿠스에서 애틀랜타까지의 걷기운동은 훌륭한 경험이었다. 500
여 마일이 넘는  거리를 더 가야 했지만,  우리들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테네시 주 경계선까지는 닷새가 걸렸다. 그때부터 우리는 자이레에서 갓 
돌아온 자원봉사자 댄 로먼과 합류했다. 댄은 인디애너폴리스 목적까지 쭉 
우리와 함께 걷기로 했다. 그는 조지아와 인디애너 주 사이 어딘가에서 샐
리 윈터와 사랑에 빠져 1년 후 그녀와 결혼했다!
  조지아 주 댈튼에서 솔로몬 밴들과  열두 살난 아들 마크가 스테이션 웨
건을 몰로 나타났다. 거기에는 해바라기씨, 꿀, 계란, 여름소시지 등이 한
가득 실려 있었다. 헤비타트와 오랜 친분을 나누어 온 솔로몬은 이미 아메
리쿠스에서 몇 달 동안 자원봉사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앞으로 인디
애너폴리스까지 남은 길을 우리와 함께  가면서 그 동안 비키 롯이 해왔던 
홍보 일을 도맡아줄 예정이었다. 테네시  주 경계선 못 미친 곳에서, 아들 
크리스가 걷기운동 모습을 녹화하려고  온 헤비타트의 언론담당 이사인 월
러스 브로드의 차를 타고  나타났다. 크리스는 여름 내내 사우디 아라비아
에서 일을 했다.  겨우 하루 우리와 함께 묵고  떠났지만, 그 애의 얼굴을 
보니 없던 힘이 갑자기 샘솟는 것 같았다.
  테네시 주 경계선에 다가가며  우리는 캠핑차에서 길다란 현수막을 펼쳐
들고 '우리 시온으로 행군한다네'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크 프레이는 경계
선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애팔래치아의 자원봉사자인 빌과 루스 언더힐, 
기타 헤비타트 사람들, 대여섯  명의 언론인을 대동하고 있었다. 애팔래치
아 헤비타트 후원자들도 역시 따로 현수막을 준비해 왔다. 테네시 주로 건
너가는 순간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퍼졌다.
  우리는 곧장 9마일 떨어진 채터누 거리를 향했는데, 태양은 머리 위에서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기온은 무려 화씨 100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채터
누 거리 중심가에서 시민공원의 폭포수를 본 우리들은 물에 뛰어들어가 행
복하게 온몸을 흠뻑 적셨다. 
  다음날도 우리는 성실하게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세쿠아치강을 건
너 크로스빌로 향했다.
  오랫동안 헤비타트의 동역자였던  노스캐롤라이나의 프랭크 배슬러가 우
리를 찾아와 하루 동안 함께 걷기로 했던 것은 8월 22일 월요일 아침의 일
이었다. 그는 하필이면 걷기운동  전체를 통틀어 가장 뜨겁고 무더운 날을 
골랐던 것이다. 점심을 먹으러  크로스빌 못미쳐 남쪽에 있는 셰이디 베일 
하나님의 교회 진입로에  들어섰을 때, 우리 모두는  땀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있었고,  온도계는 화씨 11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크로스
빌은 걷기운동의 중간지점이었다. 프랭크 배슬러가 이 사실을 알고는 "야, 
그건 축하할 만한 일인데!"  하고 외치더니, 100달러를 내놓고는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그래서 그 날 저녁 우리는 정말 포식을 했다. 컴벌랜드 주립
공원의 호반 식당에서 근사한 저녁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것이다. 우리가 
쓴 돈은 66불이었다. 그러고도 우리의 100만 달러 목표액을 채울 34달러가 
남은 셈이다!
  크로스빌 지역에서 보낸 첫날  밤에는, 컴벌랜드 주립공원 입구 편에 있
는 컴벌랜드 홈스테드 침례교회의  초청을 받았다. 우리가 교회의 친교 강
당에 짐을 풀고  있을 때, 그 교회 목사인  휴스턴 인먼 부부가 들어왔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휴스턴은 기타를 가져왔다. 우리는 함께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댄은 자기가 일하던  자이레 지방의 언어인 
링갈라어로 노래를 불렀다. 앤과  나는 이중창을 했다. 린다와도 이중창을 
했다. 휴 오브라이언은 아일랜드 민요를 힘차게 불렀다. 앤, 샐리, 그리고 
댄은 특별히 그 날을  위해 작곡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우리들은 찬송가를 
꺼내 몇 시간 동안이나 애창곡들을 불렀다. 영어를 막 배우던 참인 페루의 
천주교인 제논 콜크 로하스는  이 곡들을 하나도 몰랐지만, 누구보다 열심
히 참여했다. 어느새 자정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모두들 놀랐다. 이토록 즐
거운 친교의 시간이 끝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쳐
다보았다. 기쁨의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둥글게  손을 잡고 섰으며 휴스턴은  기도를 인도했다. 휴스턴은 
그 특별한 밤을 주신 데  대해 마음속 깊이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아내 
셜린과 함께 우리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삶이 어려울 
때 마침  우리가 와주었다는 것이었다. 휴스턴은  일평생 테네시 교도소의 
교회사(교도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로 근무해 왔는데 그 전 해에 일
자리를 잃었고, 이 교회에 오기 전까지는 고독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셜린
은 교사였는데 일자리를 아직 얻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크게 낙
담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 삼아 이 
두 사람을 격려하셨음을 깨닫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다음날 우리는  크로스빌 중심가로 계속 걸어갔다.  린다와 샐리는 물집 
때문에 보통 고생이 아니었다. 몇  시간 간격으로 물집을 째고, 붕대를 감
은 뒤 걸어가기를 반복했다. 여행이 끝날 때쯤이 되자, 두 사람이 쓴 일회
용 밴드는 무려 15통에 달했고,  발가락 사이에 끼워 쓴 탈지면만도 몇 봉
지에, 거즈도 10여 통을 넘게 썼다.


  나는 테네시의 교회들 앞에 있는 흥미로운 표어들을 공책에 적기 시작했
다. 그 중에는 "질투는 악마가 즐겨 타는 말이다"라는 것도 있고, "슬픔은 
뒤를 돌아보고, 걱정은 주위를 돌아보며, 믿음은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도 
있었다. 교회들의 이름도 재미있었다. 리니 침례교회, 뉴 채리티 세퍼레이
드 침례교회, 예언하시는 하나님의  교회, 신앙 침례교회, 독립, 근본, 전
천년 교회 등등. 눈에 띈  것들은 교회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부쉬
왜커 미용실(머리를 망치는 미용실),  데드랫 태번(죽은 쥐 술집), 그리고 
팻 랫 살롱(뚱뚱한 쥐 미용실)등도 보았다!
  8월 26일 금요일, 우리는 차를 타고 우회해서 애팔래치아 헤비타트 사업
구역인 모건과 스캇 카운티를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잡았다. 로빈스의 바
튼 교회가 점심을 제공해 주었다. 우리는 다시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날 오후 7시 30분  우리는 켄터키 주경계선에서 반 마일 남쪽에 위치
한 퍼킨스 크릭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자마자 일종의 나이트클럽이 있었
고, 거기서부터 주 경계선까지는 길 양편으로 술집과 댄스홀과 호프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지금  진입하고 있는 켄터키 지방은 음주를 법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에 알코올 생각이  나는 사람은 테네시가지 차를 몰고 나
와서 배를 채워야 했다. 정확히  오후8시 정각에 우리는 켄터키 주에 입성
했고, 모두들 곤죽이 될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목청껏 '우리는 시온으
로 행군한다네'를 불렀다.
  다음날, 다니엘 분 국립삼림원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전진했다. 좁은 길
은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굽이굽이 휘어져 올라, 정오에는 정상에 있는 
작은 매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목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가게에
서 빵과 과자  등으로 점심을 때우고 나서, 우리는  4마일 정도를 더 걷고 
그 날의 일과를 끝냈다.
  다음날 아침, 솔로몬이 우리를 차에 태우고 인디애너폴리스로 가는 주요 
경로인 127번 도로로 데려다 주었다. 우리가 진입한 테네시-켄터키 국경에
서 19마일 진행한  지점이었다. 일행은 이제 6명으로서,  린다, 제논, 댄, 
샐리, 휴, 그리고  내가 남았다. 앤은 이틀  전에 아메리쿠스로 떠나야 했
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와 우중충한 하늘을 훑어보았다. 비가 오더라도 솔로
몬이 우리와  함께 있어줄까 걱정이었다.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천둥이 
북소리처럼 울려댔다.  솔로몬이 활짝 웃으며  "주님께서 대답을 하시는군
요!" 하고 말했다.
  그 다음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우리는 강행하기로 했고, 솔로몬이 먼저 
길을 떠났다. 곧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놀랍게도 순한 비였고 몇 분 되지 
않아 그쳤다. 걷기운동 여정을 통틀어서  내린 비는 그 날 그렇게 잠깐 뿌
린 보슬비가 전부였다. 우리가 가는  길 앞으로도 비가 많이 내렸고, 우리 
양편으로도, 우리 뒤로도 비가 내렸으며, 우리가 건물에 들어가 쉬는 동안
에도, 도 우리가 잠을 자던  한밤중에도 비가 내렸지만, 우리가 걷는 동안
에는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켄터키를 통과하는 내내 우리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풍광에 둘러싸여 지
냈다. 고산지대의 날씨는 서늘했으며,  간간이 낙엽이 덜어지는 모습도 보
였다. 어떤 곳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계속 걸어가면서 나는 
그 느낌을 적어보았다.
  울프 크릭 댐을 건넜다.  풍광은 환상적이다. 길가의 암벽에서 삼나무들
이 쭉쭉 뻗어나와 잇다. 컴벌랜드 호수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안내명
판에는 호안선이 무려 1,200마일에 달한다고 적혀 있다.
  매일 새벽 우리는 어둠 속에, 또는 달빛 아래 걸었다 결코 지울 수 없을 
만큼 인상적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광경들은 막 동이 트는 새벽녘의 
모습들이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동쪽 지평선에 깔
린 구름 뒤에서 빛나는  태양은 구름들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구름
의 윗부분은 아직 캄캄하다. 바람이 한 점도 없어서, 머리 위 하늘을 온통 
뒤덮은 구름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 듯하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정동향을 
향하고 있기에, 태양은  우리의 정면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저 앞 새카만 
산들에서 불타는 오렌지빛의 공이다.
  늘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 본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우리는 범사에 기
뻐했다. 어느 날, 컬럼비아 주 남쪽 교외에 버려진 교회를 지나치게 된 적
이 있다. 담쟁이  덩굴이 건물 왼편을 온통  덮고 자라나 현관문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창문유리는 모두  개지고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다. 교회간
판은 낡고 우그러졌고, 칠도 흉하게  벗겨져 있었다. 교회 바로 앞을 지나
는 고속도로 위에는 커다란 주머니쥐가 지나가는 차량에 치어 납작해져 있
었다. 썩어가는 살덩어리  밑으로 이빨이 하얗게 빛났다.  이 곳을 지나칠 
때 우리 일행  여섯은 모두 함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광경을 훑어보고 
서로를 쳐다본 뒤,  잠시 몸을 떨고나서는 거의  동시에 '우리는 시온으로 
행군한다네'를 외쳤다.
  켄터키의 날씨는  대체로 시원했지만, 남부를 지나치던  어느 날은 모두 
초죽음이 되었다. 세실은 우리에게  오전 간식을 주고서 차를 몰고 떠나면
서 오후 1시쯤에 우리가 따라잡을 만한 자리에 서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길이 너무 좁아서 세실이 차를 세울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과 달리 훨씬 멀리까지 가야만 했다. 우리는 거의 3시가 다 되도
록 세실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때쯤 되자 20마일을 내리 걸은 피로에 한낮
의 열기가 합쳐져 가히 살인적인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벌써 두 시간째 
우리 머리 위로 한 떼의  대머리독수리들이 빙빙 돌며 따라오고 있다는 사
실도 사기진작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침내 세실을 찾아냈을 때 그는  글렌스 포크라는 작은 마을에 차를 세
워놓고 있었다. 우리보다 약간  뒤처졌던 댄과 샐리는 아주 극적으로 풀썩 
무릎을 꿇고는 캠핑차까지 무릎을  질질 끌며 간신히 기어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위대한 고난을 겪어냈다는  듯한 표정이 장난스럽게 떠올라 있었
다.
  세실은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참치  샐러드, 토마토, 과일 
샐러드, 구운  감자, 호밀빵, 아이스티와 초콜렛칩  쿠키로 근사한 저녁을 
차려주었다. 왕실의 만찬이라 해도 그만큼 반갑지는 않았으리라.
  그로부터 며칠 뒤 정오에 우리는  켄터키 주에 있는 나자렛 대학 정문에 
도착했다. 학교 진입로에 아름다운  나무그늘이 있는 것을 보고 걸어가 앉
으려는데 관리실의 직원 한 사람이 우리 바로 옆에 차를 세우더니 말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글쎄,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솔로몬이 대답했다.
  "배가 고파서 그늘에서 식사를 좀 하려 합니다."
  "여기는 사유지입니다. 이 곳에서 식사하시면 안 돼요."
  그 여자는 완강하게 말했다.
  내가 나서서 우리는 헤비타트 운동이라는 기독교 사업차 인디애너폴리스
까지 700마일 걷기운동을 강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껏해
야 30분 정도 머무르면서 점심을 먹고 가려 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안 됩니다."
  그녀는 고집했다.
  "여기서 드시면 안  돼요. 사유지에 침범해 소동을  피우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여기서는 안 됩니다."
  그 여자직원은 길을  벗어난 곳에 식사할 만한  장소를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사진을 찍을 신문기자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벗어날 수 없는  사정을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그 곳을 떠나야 
했다.
  길을 따라 대학 구내를 벗어나자마자 나타난 바로 다음 집에서, 한 젊은
이가 현관에 앉아 깡통맥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큰 소리
로 잠시 앉아 식사해도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물론입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실래요?"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여기 바깥에서 먹겠어요."
  그는 벌떡 일어나 뒷마당으로 가더니 커다란 피크닉 테이블을 질질 끌고 
왔다.
  점심을 먹는 동안, 젊은이의  동생이 찾아왔다. 근처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녀에게 헤비타트와  걷기운동에 대해 설명해 주었
더니 무척 흥미를 가졌다. 우리는 헤비타트 티셔츠를 선물했고, 그녀는 다
음 10마일을 우리와 함께 걸었다.
  루이즈빌을 향해 걷던 9월 3일 토요일에는, 그 도시의 연합 그리스도 교
회 목사이자 헤비타트의 좋은 동역자인  존 로이머 목사가 우리 일행에 동
참했다. 그는 표어를 만들어 왔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헤비타트는 무기가 아니라 집을 만듭니다.
  우리들은 교대로 이 표어를 들고 도시로 입성했다.
  주일 아침, 우리는  서로 흩어져 도시 전역에  있는 교회에서 연설을 했
다. 월요일은 노동절이어서 우리  모두 휴식을 취했다. 나는 아메리쿠스의 
헤비타트에 보내서  글로 옮길 테이프들을 녹음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나는 길을 걷는 중에도 사무실에서  보내 오는 소식들에 답할 편지와 메모
를 녹음하곤 했다. 이런 방식은 꽤나 효과가 좋아서, 본부에 두고 온 수많
은 일거리들에 따라잡지 못할 만큼 뒤처지지 않도록 나를 다잡아 주었다. 
  화요일 아침 우리는 다시 길에 올랐고, 오하이오 강을 넘어 인디애너 주
에 입성할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리 저편에서는 교회와 정부 간
부들과 충실한 헤비타트 동역자들이  나와 긴긴 걷기운동의 마지막을 장식
하는 주에 입성하는 우리를 환영해 주기로 비리 섭외가 되어 있었다. 또한 
인디애너 주지사인 로버트 오어 씨도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다리를 출발해  인디애너 주쪽에 있는 만남의  장소가 가까와지자, 나는 
수많은 친숙한 얼굴들을  다시 볼 생각에 한껏  들떴다. 우리는 한참 동안 
발길을 멈추고 포옹을 나누고,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주지사의 성명
을 들었다.  그러나 인디애너폴리스까지는 아직도  110마일이나 남아 있었
다. 우리는 오전 10시쯤 다시 여정에 올랐다.
  이 마지막 구간 중 이틀  밤은 가가 세이무어와 콜럼부스에 있는 홀리데
이 인 호텔이  무료로 방을 제공해 주었다.  우리는 뜨거운 샤워, 수영장, 
그리고 자쿠지 목욕탕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호사에 기쁨의 환성을 올렸
다.
  9월 12일 월요일 아침, 우리는 인디애너폴리스의 세인트 존 연합 그리스
도 교회의  주차장에 집합했다. 헤비타트 축하행사가  열리기로 되어 있는 
로버트 파크 연합 감리교회까지는 이제 겨우 8.1마일밖에 남지 않았다. 인
디애너 주를 가로질러 걷는 동안 헤비타트의 도보여행자의 숫자는 점차 불
어나 이제 마지막 구간을 걷는 참가자는 24명이 되었다.
  모두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걷기운동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우
리는 손을 잡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서서, 걷기운동과 안전한 도착을 감사
드리며 기도를 올렸다. 
   9시경, 우리는 열띤 합창을 하며 로버트 파크 교회가 있는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두 개의 새로운 푯말을 들고 있었다.
  헤비타트 운동
  하나님의 사랑이 깃드는 보금자리
  조지아 주, 아메리쿠스

  주님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는 한 
  아무리 집을 지은들 헛수고일 뿐입니다.
  구름이 많이 낀 날씨 덕에  기온이 아주 쾌적했다. 며칠 전 합류한 오레
곤 출신의 진 크럼리는 땅바닥에서  1달러 지폐를 주웠는데, 벌써 두 번째 
있는 일이었다. 모두들 "진 오예! 헤비타트 오예!"를 외쳐댔다. 우리는 모
두 길에서 돈을 주웠는데, 전부 우리의 10만달러 목표액을 채우는 데 쓰기
로 했다. 보통은 1센트짜리,  5센트짜리, 10센트짜리 동전들이었지만 합치
니까 그럭저럭 5달러가 넘었다. 아메리쿠스에서는 걷기운동에 보내온 헌금
과 헌금서약이 벌써 70,000달러를 넘어섰다는 소실을 보내왔다.
  오전 10시  30분, 우간다 굴루의 헤비타트  사업장 대표인 오구왈주교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축하행사에서 주요연설자로 인디애너폴리스를 방문
했었지만, 최후의 몇 마일 동안 우리와 함께 걸어주었다.
  11시가 되자 눈앞에 교회의  모습이 보였다. 현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
여 있었다.  축하행사 준비위원회장인 그로버 하트먼이  활짝 웃는 얼굴로 
아메리쿠스 주에서 린다를 위해  보내온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몇몇 기자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우리가 여기 왔
다는 것이었다!
  부분적으로 걷기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무려 400명이 넘었다. 한 사
람도 다치지 않았다. 물집 위에  또 물집이 생겼지만, 그래도 우리는 해냈
다. 건강하게, 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게 말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도 나와 린다는 가장 기쁜 사람들이었다. 그로버가 우리의 열한 살짜리 딸 
조지아의 편지를  건네주었던 것이다. 조지아는 우리를  위해 특별한 시를 
써서 보내주었다.
  바로 오늘 저는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엄마와 아빠가 그 먼 길을 걸어내셨다고!
  차도, 버스도, 지프도 타지 않고 
  두 분의 다리만으로!
  어떻게 해내셨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솔직히 저라면 할 수 없었을 텐데.
  아, 2마일만 걸어도 전 피곤해지거든요.
  그 먼 길을 걸어내신 두 분을 저는 존경합니다!
  먼 거리를 걷거나 뛰지는 못할 것 같지만 
  아주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해요!
  엄마 그리고 아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오늘 저는 두 분을 정말로 사랑한답니다!
  나중에 조지아는 축하행사에 모인  청중 앞에서 이 시를 낭송했다. 40일 
만에 인디애너폴리스에 갓 도착한 린다와  내게 이 시는 얼마나 큰 건물이
었는지!
  잊을 수 없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길을 걷는 동안 몇 천 명
의 사람들에게 직접 헤비타트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었으며, 광범한 홍
보를 통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헤비타트  사업으로 끌어들였다. 최소한 
이 걷기운동의 결과로 새로운 헤비타트  사업 하나를 시작할 수 있은 정도
였다. 그리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목표했던 100,000달러를 채울 수 
있었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지만, 우리 모두 그만큼 수고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매혹
시켰고, 그 절박한 필요에 이목을 집중시켰다는 것이다. 어떤 잣대로 보아
도 걷기운동은 성공이었다.
  잇달아 열린 축하행사는 장관이었다.  3일 동안 30여개 주, 컬럼비아 지
역, 그리고 해외의   12개국에서 몰려든 헤비타트 동역자들이 로버트 파크 
교회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자이레의 그리스도 교회 회장인  보클레알레 주교가 목요일 저녁 개회식
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궁핍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집을 짓는 이 급
박한 사명을 끊임없이 추진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난
에 허덕이는 조국 자이레에서의 헤비타트 사업에 박차를 가해줄 것을 특별
히 부탁했다.
  금요일에는, 국제적인 교회지도자들이 번갈아 집회에서 연설을 했다. 점
심식사 후 모든  참석자들은 도시 한 가운데  자리잡은 아름다운 공원으로 
행군을 했다. 사업장 대표들은 다채로운 색깔의 깃발을 들었고, 나머지 참
석자들은 헬륨을 채운 풍선을 들었다. 광대들이 사방에서 춤을 추었다. 우
리는 기쁨에 겨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금요일 밤에 열릴  대규모 '헤비테이션'(Habitation,헤비타트 축하행사)
을 앞두고 우리의 언론담당 부서는 서둘러 인디애너폴리스까지의 걷기운동
을 기록한 슬라이드 쇼를  마무리했고, 햇빛에 그을리고 피곤에 지친 위엄
있는 사진으로 청중들을 아주 즐겁게 해주었다. 전세계에 걸친 주택건축현
황을 보여준 슬라이드쇼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토요일에는 해외 사업현장으로 떠나게 되어 있는 8명의 새로운 자원봉사
자들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한  '이별' 예배가 열렸다. 그리고 데이빗 로우
는 '비전을 가지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는데 청중들은 마술에 홀린 듯 그
의 메시지에 사로잡혔다.
  "사회변혁에 관해 탁상공론만 하는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근사한 사무실에 앉아서 말하고 계획하며 이론을 세우기를 좋아합니다. 또 
그 정반대 편에는 새로운 질서가 일어나길 바라며 집단적인 공포를 조성하
는 테러리스트 단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가들과 테러집단들 사이
에는 헤비타트 운동처럼 소박하게나마  행동하고, 부족한 힘이나마 봉사하
며, 초라하게나마 실천하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짓고, 또 짓고,  또 짓습니다. 우리는 집을 짓고, 지역공
동체를 지으며, 우정을 짓고,  편지로 교류하는 집단을 지으며, 또한 공감
을 짓습니다. 우리는 초석 하나 하나마다 퍼부어지는, 벽돌 하나 하나에서 
타오르는, 널짱 하나마다 못박히는,  열쇠 하나 하나마다 돌려주시는 하나
님의 사랑으로  집을 짓습니다. 우리는 태산처럼  쌓인 관료주의의 공문서 
속에서 좌절과  문화충격과 언어장벽과 성격차이와  경제난과 향수와 질투 
속에서 일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음새 하나하나에 예수님의 사랑
을 방울방울 짜넣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한다면 
이 자리를 떠나십시오. 천국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살짝 엿보는 것
이라고 믿기 대문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집은 하나님의 사랑
과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함께  어우러져 일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
의 상징입니다. 천국은 고난과 어둠 속에서 앞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비전입니다. 헤비타트는 지금 당장 우리의 작업에 의미
를 부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비전입니다."
  데이빗의 열렬한 연설이 우리 모두에게 비전을 고취시켰다. 우리는 새로
운 다짐으로 충전되어 인디애너폴리스를 떠났다. 그리고 열기에 들떴던 이 
주말이 지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1986년 헤비타트의 10주년 행사를 축
하하기 위해 아메리쿠스에서 캔사스  시티까지   1,000마일을 걸어갈 생각
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를 린다에게 당장 털어놓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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