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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헤비타트

2주간의 중노동

by Healing New 2020. 9. 20.

  1984년 봄, 아메리쿠스에서 노동한 지 몇 주 뒤에 카터 대통령은 강연차 
뉴욕을 방문했다. 헤비타트의 초청으로  그는 이스트 6번가의 헤비타트 사
업장을 답사했는데, 그 곳에서는  개축 준비단계로 6층짜리 아파트 철거작
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뉴욕 사업의 이사인 롭 데로커는  바로 이틀 전 완성된 임시나무 계단으
로 카터를 5층까지  조심스럽게 모셨다. 버려진 건물 꼭대기에 서서 발 아
래 펼쳐진 황량한 도시풍경을 바라보던 카터는 불쑥 말했다.
  "여기서 여러분이 할 일이 엄청나게 많겠군요. 롭, 내가 도와줄 일이 있
으면 밀라드한테 얘기를 하세요. 그 친구가 내 상관이니까."
  롭은 이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대답했다.
  "다니시는 교회에서 수련회원을 모아서 여기서 일주일쯤 노동수련캠프를 
하면 어떨까요?"
  "생각해 보지요." 
  롭이 내게 전화를 걸어 카터  대통령의 답사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나
는 롭의 제안에 대한 대통령의  대답에 놀랐고 또 힘을 얻었다. 참으로 훌
륭한 아이디어였다!  나는 대통령이 플레인즈로 돌아오자  곧 연락을 취했
다. 뉴욕 시에서  노동수련캠프를 인솔하는 데 정말로  관심이 있는 걸까? 
대답은 신속하고 긍정적이었다. 자,  이제 카터 대통령이 나를 '상관'으로 
임명해 주었으니, 당연히 이  멋진 아이디어를 빨리 실행에 옮기라고 다그
쳐야지! 
  우리는 이 특별한 노동의  축제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미국 헤비타트 사
업을 도맡아 진행하는 테드 스위셔와 나는 자택에서 카터 대통령을 만나 9
월 첫주로 날짜를 잡았다. 버스  한 대를 전세내서 9월 1일 토요일 정오에 
아메리쿠스를 출발하면 밤새도록 달려야  일요일 오후에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동수련캠프는  월요일 아침에 시작해 그  주 금요일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노동수련캠프  참가자는 플레인즈의 마라나타  교회 신도들에 
국한하지 않고 조지아 주 다른 지방의 자원봉사자들과 다른 주 출신까지도 
포함시키기로 했다.
  9월 1일이 다가옴에 따라 뉴욕과  조지아 주 양편에서 기대감이 한껏 고
조되었다. 전국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이 문의전화를 걸어오는 
통에 아메리쿠스 헤비타트 사무국의 전화벨이 쉴새 없이 울려댔다.
  "카터 대통령께서 정말로 버스를 타고 뉴욕까지 가실 예정입니까?"
  "대통령께서 메트로 침례교회의 침상에서 주무실 계획이라는데 정말입니
까?"
  "실제로 대통령께서 건축현장에서 육체노동을 하게 됩니까?" 
  언론의 반응은  회의적이거나 놀라거나 진심으로  감명을 받은 경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출발하는 당일 아침, 헤비타트 사무국 정면에는 캠프 참가자들을 환영하
며 좋은 캠프가 되기를 빈다는  내용의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100여 명 
가까운 군중들이 나와 우리를 전송했다. 간결하게 가진 송별식에서 린다는 
손수 헤비타트 로고를 아플리케한  작업복을 대통령에게 선물했고, 부부에
게 헤비타트 티셔츠를 선물했다.
  접견실에서 작별을 아쉬워하는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18명의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탔고  "헤비타트 오예!"라는 외침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애틀랜
타를 향해 북쪽으로 출발했다.
  두 시간 반 후 우리는  칼리지 파크에 있는 제일침례교회 주차장에 정차
해 18명을 더 태웠다. 이제  우리는 36명의 막강대군이 되었다. 한껏 기대
에 부풀어 우리는 북으로 향했고, 어스름이 질 무렵 남부 캐롤라이나 주의 
컬럼비아에 도착했다. 우리는 컬럼비아  주에서 가장 유서깊은 흑인교회인 
래드슨 장로교회 앞에 차를  세웠다. 진입로는 카터 대통령과 인터뷰를 하
려고 혈안이 된 기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잠시 안부를 묻고 악수를 나눈  뒤, 우리는 교회 안으로 안내받았다. 주
민들이 준비한 훌륭한  성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닭튀김, 그린 빈
스, 버섯덮밥, 아이스티, 블루베리  파이, 피칸 파이, 조그만 레몬 케이크
까지, 정말 잊지 못할 송별만찬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엔  양편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내가 카터 대통령을 소개하자 대통령은 헤비타트와 갈
수록 돈독해져 가는 친분에  대해 감동적으로 연설했다. 백악관을 떠난 후 
쏟아져 들어온 열두 건의 제안 중에서 유일하게 받아들인 직책이 헤비타트 
이사직이라고 밝힌  대통령은 헤비타트 운동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헤비타트 운동은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제가 그 일원이라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고 말을 맺었
다.
  컬럼비아를 떠나던 토요일 저녁  9시쯤 우리는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뉴욕에서의 긴 여정을 거뜬히 치러낼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벨머라는 작은  도시에서 예배에 참석했다. 
경호원이 먼저 교회를 물색하고  담임목사에게 우리의 참석을 미리 귀띔해 
주었다. 버스가 조그마한 컨서버티브 침례교회 주차장에 정차하자 나는 카
터 대통령을 대동하고 차에서 내렸다. 교회쪽으로 걸어가자 담임목사가 나
와서 맞아주었다. 전직 대통령의 방문에 황송해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역
력했다. 그는 어색한 투로 외쳤다.
  "오늘 아침에 저희 교회에 귀중한 손님이 두 분 오셨군요! 바로 '대통령 
각하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순서로 이야기했는지 나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
다.
  예배를 마친 뒤, 우리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40번가의 메트로 침례교
회를 향했다.
  수많은 헤비타트 동역자들과  언론인들로 이루어진 환영인파가 교회정문
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짐을  풀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우리가 일하게 
될 건물로 갔다. 맨해튼의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이스트 6번가 742
번지였다. 전국 네트워크 방송사에서  파견나온 텔레비전 방송팀들이 월요
일 아침 이 곳에 모여  사업장을 취재하고 지미 카터를 인터뷰할 예정이었
다.
  우리의 자그마한 헤비타트  군대는 버스를 함께 타고  온 36명의 일행에 
몇 명의 원군을 더 충원했다.  10여 명 남짓한 자원봉사자들이 우리와 1주
일 동안 함께 하기 위해 펜실베니아, 메릴랜드, 콜로라도, 뉴저지, 매사추
세츠, 그리고 뉴욕 북부에서 날아왔다.
  월요일 아침, 우리는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여
섯 개 층에서 각자 맡은  일에 착수했다. 기자들이 사방에 진을 치고 경쟁
적으로 취재를 해댔다. 그런데 잠시  후 1층에서 낡은 널장을 뜯던 린다가 
한 무더기의 뼈다귀를 발견했다.
  "어서 쉴리 게이트를 불러줘요!"
  린다가 소리쳤다.
  "이게 사람 뼈면 어쩌죠?"
  아메리쿠스 출신의 의사인 쉴리는 몇  층을 뛰어내려와 몇 분간 낡은 뼈
다귀와 뼛조각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사람의 뼈가 아니라는 진
단을 내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전 10시 30분에 잡혀 있는 기자회견 일정 때문에 건물 정면의 6번가에 
쳐진 경찰보호선 뒤로 수많은  기자와 사진기자가 몰려들었다. 나는 롭 데
로커, 지미 카터와 함께 내려가 기자들을 맞았다. 
  카터 대통령은 헤비타트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참여에 대해 간략한 연설
을 했다. 특히 이 건물의 개축계획을 자세히 설명한 뒤 질문을 받았다. 바
로 두 달 뒤에 대통령 선거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은 정치에 관
한 소견을 묻고 싶어했지만, 지미 카터는 이런 질문들을 살짝 비켜나가 헤
비타트를 강조했다.
  한 기자가 물었다.
  "이런 기획이 바로 레이건  대통령께서 자구라고 말씀하신 바 있는 그런 
활동이 아닙니까? 민간인들이 나서서 나라를 살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
야 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행동하자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에 옮
기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전직 부통령께서 이런 일에 관여하는 게 흔치 않은 일이 아닌가요?"
  "글쎄요, 부통령 노릇을 못해봐서  그 질문에 대답해드릴 수가 없겠는데
요."
  와락 폭소가 터졌다. 대통령은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받으니  명성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
이 드는군요!"
  또다시 폭소. 그 기자는 아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주일 내내 일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카터 부인께서도 일주일 동안 일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오후 늦게 도착해서  남은 시간 동안 함께 있을 겁니
다."
  "정말로 메트로 침례교회의 임시침상에서 주무시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꼭대기 침상이지요."
  "버진 아일랜드 방문을 포기하고 여기 와서 일주일을 희생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희생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왔고, 목수 일도 처음 해
보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일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
서 동시에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모두 담겨 있었다. 회의적이었던 
기자들도 정치적 언급의 유도를 포기하고 헤비타트의 훌륭한 자원봉사자와 
대화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 '굿모닝  아메리카'의 사회자인 데이빗 하트만이 
다가왔다. 카터는 아침 일찍 뉴욕 한복판에 있는 ABC방송국 스튜디오와 원
격연결해 생방송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데이빗 하트만을 
비롯한 대담자 모두에게 이 곳에 와서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 우리는 하
트만에게 건물의  1,2층을 보여주었다. 카터는 2층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다시 시작했고, 내가 남은  4개층을 안내했다. 결국 데이빗 하트만을 설득
해서 망치를 들고 일하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같은 월요일 아침 '투
데이쇼'에서 카터 대통령을 인터뷰한 NBC의 존 파머는 우리의 초대를 기꺼
이 수락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현장에 남아 함께 일하면서 많은 땀을 쏟
았다.
  자원봉사자들이 점차 건물  전체로 퍼져 일을 하는  동안 아래쪽 거리에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간간이 "지미, 지미, 지미!"를 외쳐댔다. 대
통령이 2층 창문에 모습을 보일 대마다 요란한 환성이 터져나왔다. 구경꾼
들은 매일 그 곳에 와서  카터 대통령이나 로잘린의 모습이 보이기만 하면 
환호성을 올렸다. 점심을 먹으러 갈  때나 혹은 일을 마치고 나서 카터 부
부가 건물을 나설 때면, 예외없이 엄청난 인파가 몰려 대통령과 악수를 하
거나 사인을 받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뉴욕 헤비타트 사무국에는 문의전화가  쇄도해 급기야 캠프 참가자들 중 
한두 명을 파견해 일손을 거들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
들은 대부분 카터 부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었
지만, 헤비타트 사업을 도울  방법을 문의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임금
노동, 건축 자재 공급, 기타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서약과 함께 기부금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요일에는, 전미 목공 노동조합의 뉴욕 지부장인 파스칼 맥귄즈가 건물
에 들러 500달러 수표를  기부하고 카터에게 특별 노조회원증을 수여했다. 
그는 또한 건축용 석고판을 비롯한 건축자재와 함께 도제수업중인 목공 몇 
명을 보내 일을 도와주겠다고  서약했다. 그리고 남은 봉사기간 동안 노조
에서 파견나온 4명의 젊은이들이 힘을 보태주었다. 맥귄즈 씨는 또한 노동
수련캠프에 참가한 모든 이들에게  노조의 모자와 목공용 앞치마를 선물했
다.
  하청업자협회에서는 전화로  2,000달러의 기부금을  내겠다고 서약했다. 
히트너 트럭 렌트 회사는 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어떤 트럭이든 무료로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카라디오에서 사업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는 뉴저
지 출신의 한 남자는 곧장 차를  몰고 현장으로 달려와 못 한 상자와 연장 
한 상자를 헌납했다. 브롱크스에서 온 한 숙녀는 지하철을 타고 로우어 이
스트사이드까지 직접 찾아와서 대통령에게  꽃화분을 선물했다. 화분은 황
폐한 지역에 꽃 핀 새로운 희망을 상징하도록 건물 정면의 비상구 위에 놓
아두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75년 전 당시 아름다웠던 이 건물에 
직접 살았던 적이 있는 한  노인의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이 낡아빠
진  건물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사실의 너무나  기뻐서 
1,000달러를 기탁했다.
  화요일 저녁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 우리는 뉴욕에 
있는 동안 하루는 근사한  식당에서 외식을 하자고 정해놓고 있었다. 그래
서 기나긴 하루의 일을 끝내고 정리를 한 뒤, 비좁은 버스에 몸을 싣고 차
이나타운의 실버 팰리스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굉장한 여섯 코스  정식이 나왔다. 음식은 나무랄  데 없었고, 우리들의 
동지애 또한 티 한 점  없이 완벽했다. 어찌나 웃고 장난을 쳤는지 음식을 
먹기가 힘들 정도였다.
  식사가 끝난 뒤 각기  17달러씩을 모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지배인이 돈
뭉치를 높이 치켜들더니 그  돈을 고스란히 헤비타트에 기탁하겠으니 건물
을 보수하는 데 보태달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실버 팰리스 오예!"
  5일 동안,  건물 공사는 급속도로 진척되었다.  오래된 석고판을 철거했
고, 불에 그을리고  썩은 들보는 모두 교체했다.  창문으로 버려지는 목재 
부스러기가 하도 많아서 건물 뒷쪽에 먼지가 안개처럼 뿌옇게 날리고 있었
다. 많은 캠프 참가자들은  보호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했다. 주말이 되자. 
산산조각난 널장들, 부러진 들보,  부서져 내리는 석고 등의 쓰레기더미가 
2층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하루 일과는 언제나 아침식사 시간에 메트로 교회에서 짤막한 예배를 드
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고 나면 조지아에서 우리를 태워주웠던 버스를 
타고 오전 8시 전에 현장에  도착해야 했다. 보통 노동은 오후 5시에 마쳤
으며, 중간에 한 시간 동안의  점심식사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일의 진척
정도에 따라 시간이 달라지기도 했다.  가금은 8시도 되기 전에 도착해 30
분 동안 점심식사를 마친 뒤 5시 30분이나 6시까지 내리 일하기도 했다.
  일과가 끝나도  일손을 놓기를 아쉬워했던 일꾼이  바로 지미 카터였다. 
카터는 하루 이틀 정도 교회에서 현장까지 3마일 거리를 조깅해서 간 적도 
있었는데, 그러고도 다른 사람들보다 한 시간 먼저 일을 시작하곤 했다.
  속을 다 들어내서 껍데기에  불과한 건물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일하는 것
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새 지붕을 올리는 동안에는 6층 아래 밑바닥까지 
뻥 뚫려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자원봉사자들 중
에는 경험 없는 사람들도 많았기  대문에, 일주일 동안 부상자가 단 한 사
람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웠다. 엘리제이 제일침례교회의 담당
목사인 제임스 홀트 목사는 널장을  지고 계단을 오르다 임시계단에 난 구
멍에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오른쪽 다리 정강이 뼈에서 살점이 찢겨나갔
다. 다행히 부러진 뼈도  없고 동맥도 끊어지지 않았지만 상처를 40바늘이
나 꿰매야 했고, 하는 수  없이 귀가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고통스런 경
험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로 인해 더욱 열심히 일할 의욕이 생겼
다고 한다. 오른쪽  다리는 급속히 회복되었고, 그는  몇 사람의 동료들과 
함께 고향에서 헤비타트 사업을  발족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1985년 10월, 
그들은 북중부 조지아 헤비타트의 정식 지회 승인을 받았다.)  
  수요일 저녁에는 메트로 침례교회에서 열린 정규 수요 예배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전직 대통령도 참석했을 뿐 아니라 우리 근로봉사자들
을 비롯한 100여 명의 손님들이  자리를 같이했으니, 보통 때의 '정규' 예
배와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한 주를 기념하는 명판을 교회에 
헌정했다. 담임목사인 진 볼린 목사는 캠프 참가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물의 낡은 들보를 단정하게 깎아 만든 명패를 수여했는데, 명패에는 '빈
민을 위한 주택  보급에 앞장 선 귀하의  자원봉사를 치하하며' 라고 쓰여 
있었다. 명판 위의 받침대 위에는 새 망치가 세워져 있었다.
  그 주의 화려한 피날레는 금요일 밤에 열렸다. '헤비테이션'이라고 이름
붙인 헤비타트의 특별축하행사를 참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인파가 성 바
솔로뮤 성공회를 가득 메웠던 것이다.
  마음을 뒤흔드는 음악, 오랜 여운을 남기는 연설들, 다함께 주님을 찬양
하던 그 저녁의 잊지 못할 행사가 끝날 무렵 헌금을 걷는 딱딱한 모자들이 
신도석 사이로 돌았다. 모인  헌금은 손수레에 한데 모아서 전면의 단상으
로 운반했다. 그 날 밤에만  10,000달러 이상의 헌금이 모였다. 일주일 동
안 모인 헌금액은 현금과 물자를 통틀어 20,000달러를 넘어섰다.
  토요일의 귀향일정을 준비하던 우리는 우리의 방문이 뉴욕 시 사업 자체
에 엄청나게 큰 힘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전국에 있는 수백만 
명이 헤비타트 운동이 벌이는  사업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일주일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캠프 참가자들은 녹초가 되어 기나긴 귀향길에 오르면
서도 기뻐했고, 웃음을 터뜨리며  노래를 불러댔다. 그러나 주일 새벽 4시 
30분에 버스가 애틀랜타에 정차했을 때쯤엔, 모두들 잠에 곯아떨어져 아무
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뉴욕 노동수련캠프 이후, 카터 부부는 아예 헤비타트의 장기 자원봉사자
로 등록했다. 두 사람에게 더 많은 일감을 찾아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1984년 가을, 카터 부부는 개인적으로 남미 몇 개 국가를 여행했는데 마
지막으로 들른  곳이 바로 페루 푸노의  헤비타트 사업장이었다. 체재기간 
동안의 행적을 언론이 다루어준 데다가 카터가 페루의 지도자들을 만나 방
문의 목적을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카터 부부가 페루를 떠날 때쯤에는 
온 국민이 헤비타트 운동에 대해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1984년 10월 11일, 카터 부부는 페루에서 곧장 텍사스 주 아마릴로로 날
아가 첫 헤비타트 이사회에  참석했다. 카터는 이사회가 열릴 때마다 빠짐
없이 참석했으며, 결코 좌중을  좌지우지하려는 법이 없었다. 동료 이사들
은 거리낌없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잘 아는 주제가 나오면 언제나 
의견을 제시하며, 주제가 익숙치 않을 때는 열심히 듣는 카터의 태도를 높
이 평가했다.
  로잘린 역시 고문단 회의 및 미국 내 사업장 대표들의 회의를 열심히 쫓
아다니며 성실히 참여했다. 어느 날 오후에는 헤비타트의 이야기를 전파할 
구체적 방안들과 선거캠페인에서 터득한 홍보전략을 가르치는 두 시간짜리 
워크샵을 인솔하기도 했다. 아마릴로 이사회가 끝나자마자, 로잘린은 텔레
비전 방송출연과  신문 인터뷰를 통해 헤비타트를  홍보했다. 그리고 전국 
몇 개 사업장에서 기금을 연출하고 주택을 헌정함으로써 큰 힘을 보태주었
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뒤,  카터와 나는 함께 뉴욕으로 가 케미칼 뱅크 
주관의 오찬석상에서 연설을 함으로써,  1986년 헤비타트의 10주년 행사를 
위한 기금 1,000만 달러 모으기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000만 달러 모으기 운동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방향을 제대로 잡
기 위해서는, 별도의 기획위원회가  필요했다. 나는 또다시 카터와 접촉했
고, 카터는 내의견에 따라  회장직을 맡아주었다. 1985년 2월 21일 카터의 
애틀랜타 집무실에서 첫 회의가 열릴 때쯤 위원회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위
력을 발휘할 초강력 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위원회 회의 결과 개인과  교회로부터 기금을 연출할 아이디어가 엄청나
게 쏟아져 나왔으며,  위원들 자신도 사재를 털어  돕기로 했다. 누구보다 
창의력이 돋보이는 기금조성가는 바로 지미 카터였다.
  애틀랜타 회의가 열린  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한 스포츠 용품회사가 
허락도 없이 광고에 자신의  사진을 사용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변호사
에게 그 회사에 전화해서 광고에 사진사용을 허락한 사람이 누구냐고 따끔
하게 물으라고 했다. 
  "아, 이런.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가 그들의 대답이었다.
  "대통령께서 개인적인 대가는 바라지 않는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렇지만 헤비타트  운동에 10,000달러 정도의  기부금을 기탁하신다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는군요."
  며칠 내로 우리는 그 수표를 받았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주식회사 퓨리나에서 카터 부부의 애완고양이인 미
스터 말라키를 1986년도 달력에 싣게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번에도 
사진게재는 허락되었지만, 당연히  헤비타트에 5,000달러를 기부한다는 조
건이 따라붙었다.
  대학에서, 공식회의석상에서, 가지각색의  단체들에서 연설을 해 달라는 
요청이 날마다 카터의 집무실에  쇄도했다. 그는 그 중에서 극소수의 요청
만 승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연요청을 수락할 때는 헤비타트에 후한 기
부금을 기탁해 달라는 조건을 종종 붙이곤 했다.
  전직 대통령을 아군으로 거느리고  잇다는 점은 기금 마련이라는 측면에
서뿐 아니라 여러 모로 값진 자산이었다. 1984년에 미시간 주 질랜드 출신
의 자원봉사자 로저와 바바라  스넬러 부부는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인도
행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인도 카맘에서 새로 진척되고 있는 헤
비타트 사업을 위해 일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뚜렷한 이유 없이 비자발
급이 거부되었다. 스넬러 부부는  재차 모든 서류를 제출했지만 결과는 또
다시 거부였다. 이 시점에서 나는 카터 대통령을 만났고, 대통령은 신속히 
인디라 간디 수상에게 친필로 서한을 보내 중재를 부탁했다. 며칠 내로 우
리는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1985년 1월 우간다 굴루에서  느닷없이 우간다군이 헤비타트의 덤프트럭
을 압류조치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트럭을 되찾으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한 달쯤 지난 뒤에도 사업장에 덤프트럭이 없어서나는 
다시 한 번 카터  대통령의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또한번의 친필서한이 
날아갔는데, 이번에는 밀튼 오보테 우간다 대통령 앞으로 갔다. 우리는 곧
바로 트럭을 되돌려  받았는데, 그 트럭을 친히  몰고 온 바실리오 오켈로 
장군은 그로부터 6개월 뒤  쿠데타를 일으켜 오보테 대통령 정권을 전복시
켰다!
  카터 대통령은 뉴욕 사업장의 진척상황을 점검하느라 1985년 봄을 다 보
냈다. 껍데기만 남은 아파트를  개조하는 초대형 공사는 진척이 무척 더뎠
고, 일손을 대부분 주말의  자원봉사 인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헤비타트의 
1985년 이사회는 뉴욕 시 지회에서 개최하게 되어 있었고, 그들이 지은 첫 
건물의 헌정이  이사회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게  되어 있었다. 사업에 
새로운 힘을 북돋아주기위해 카터  대통령은 1985년 여름에 뉴욕으로 돌아
가 두 번째 노동수련캠프를 갖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7월 29일 우리는 바
로 그렇게 했다.
  두 번째 행사를 기획하다 보니 1984년의 참가자들이 상당수 다시 등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나머지 자리는 다른 헤비타트 동역자들이 합
류해 채워주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토요일  밤새도록 버스를 타고 뉴욕 
시로 향했다.
  7월 30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우리는 뉴저지 유료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와 예배 드릴 만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호원을 미리 파견해 
사전답사를 하지 않았다. 카터는  어떤 교회든 예고없이 불쑥 나타나고 싶
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뉴욕 시에서  몇 마일 남쪽에 있는 뉴저지 주 에디
슨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예배 드릴 교회를 찾는 데 약간의 곤란을 겪어야 
했다. 그 지역 교회들은 여름에 평상시보다 약간 이른 시간에 예배를 드렸
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르는 교회들은 한창  예배가 진행중이거나 아니면 
이미 끝나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소방서에 들러 11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느냐고 물었
다. 소방관들은 몇 블록 떨어진  곳의 막다른 골목에 있는 작은 루터파 교
회를 가르쳐 주었다.  버스가 건물 앞에 정차했을  때 교회게시판을 볼 수 
있었다. 게시판에는 예배가 10시  30분에 시작한다고 쓰여 있었는데, 시계
를 보니 11시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카터 대통령이 물었다.
  "다른 곳을  찾을 시간이 없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설교 시간에 맞춰서 
들어갈 수 있겠군요."
  내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들어갑시다!"
  모두들 차에서 내려 33명이  한꺼번에 예배당 정문으로 발맞추어 걸어갔
다. 아무리 조용히 들어간다고 해도, 예배중에 소란을 피우지 않을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커다란  문을 열어제쳤을 때, 우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배당 안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옆 건물  앞에 있는 한두 명의 아이들을 발견했고, 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다가가자 한 여자분이 문을 열어주었다. 교
인들은 거기에서 양로원에서 도로 모셔온 한 신도의 85번째 생일을 축하하
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사람들은 카터  대통령을 알아보았다.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교회는 9시 30분에 이미  예배를 끝마친 뒤였다. 바깥의 게시는 가을
의 일정을 미리 고시한 것일  뿐, 여기도 그 지역의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
지로 여름에는 한 시간 일찍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담임복사인 E.월터 클레클리 주니어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앞으로 나서
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카터 대통령이  자기 교회를 찾아주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격한  것 같았다. (후에 한  기자는 "파티를 여니까 정말 
축하할 일이 생기더군요!"라는 담임목사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는 무례하
게 끼여들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잠시 예배당을 
써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담임 목사에게 일행중에 목사님이 여러 분 
계시고 그 중에는 신학교 교장선생님도 계시니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예배당을 쓰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가 여러
분을 위해 한 번 더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몇 분 동안 상의를 한 끝에 예배를 한 번 드리기로 했다. 오르간 연주자
도 아직 있었고, 목사님도  설교문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예배당으로 
되돌아왔고 대부분의 교인들도 함께 그 자리로 돌아왔다. 
  에베소서 2장 말씀에 근거한  설교문은 그렇게 시기적절할 수가 없었다. 
사도 바울은 그 장을 마무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9-22).}
  '모퉁잇돌'과 '터'와 '건물'이라니! 게다가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외인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인 것이다!
  우리는 경외심에 차 귀를  기울였다. 감정이 북받쳐오른 젊은 목사가 튼
튼한 기반 위에 하나님의 권속이  살 집을 지으라고 설교하는 모습을 보면
서, 그가 이토록 자신의 설교에  몰입하는 청중을 예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예배가 끝날 무렵, 모두들  따뜻한 감사의 말을 나누었고 우리는 기쁨에 
차 뉴욕으로 길을 떠났다.  주님께서는 특별히 우리를 위한 설교를 예비해
주신 것이다.
  점차 위용을 갖춰가는 이스트 6번가의 건물로 돌아와서, 우리는 힘든 노
동과 풍요로운 동지애로  가득 찬 일주일을 다시  한 번 보냈다. 이번에는 
19개 아파트에 입주할 세대들이 대체로 결정된 뒤였는데, 입주자들도 일주
일 내내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일했다.
  이번에는 아주 훌륭한 아이디어 덕분에 사업기금 마련이 두 배로 늘어났
다. 뉴욕 헤비타트  이사회 위원인 엘렌 베어는  그 지역 교회들과 접촉해 
카터 대통령의 시간당 노동량을  후원할 교인이 있는지 타진해 보았다. 많
은 사람들이 호응했는데, 아마 대통령을 목수로 고용할 수 있는 기회에 마
음이 끌렸던 것 같다. 금요일 저녁 롱아일랜드의 리차드와 펙 앨핀 부부는 
시간당 25달러를 서약하고는, 직접 현장을 보고 싶어 우리를 찾아왔다. 카
터 대통령이 일주일에  55시간을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리치는 당장 
이렇게 외쳤다.
  "이런, 그러면 그 금액의 절반을 더 내겠어요!"
  누군가 재빠르게 계산을 해보더니  총계가 1,421달러 50센트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리치는 
  "그럼 말끔하게 1,500달러로 합시다!"
  라고 말했다.
  그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졌고, 우리들도 활짝 웃었다. 그는 약속
한 금액의 수표를 기탁했고, 자기 교회에서 노동수련캠프 참가자들을 인솔
해 건물로 다시 돌아와서 계속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카터 부부가 함께 해준  덕분에, 두 번째로 로우러 이스트사이드 노동수
련캠프는 지난번보다 더 많은 전국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뉴욕 지구의 사
업체, 교회, 재단 등에서 더 많은 방문객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이번 활동
이 끝나자마자 대통령은 1986년 2월 니카라과의 헤비타트 사업장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시카고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또한번의 
노동수련캠프를 인솔했다.
  이 가장 유명한 자원봉사자 두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헤비타트에 기여한 
엄청난 금액의 현금과 물자와 호의는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우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느끼고 있다.
  지미 카터와 로잘린 카터 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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