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밀라드 풀러 씨를 연사로 모시게 왼 것을 무한
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풀러씨는 헤비타트 운동의 창설자이신 전직 대통
령 지미 카터 씨를 측근에서 돕고 계십니다!"
사회자는 플로리다 탤러하스의 시의원이었다. 1984년 8월 탤러하스 헤비
타트가 갓 준공한 복식 아파트를 헌정하는 식장에서 나를 소개하던 참이었
다. 헤비타트에 지미 카터가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틀림없이 어디선가 들었
던 모양이다. 그의 소개는 실제와는 영 달랐지만 적어도 이제 그는 자신이
사는 도시에서 헤비타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헤비타트의 창립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창립자는 하
나님이시다. 이 아이디어는 천국에서 내려왔다. 이것을 클래런스 조던을
통해 처음 이 땅에 표현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통해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1969년 10월, 클래런스가 그의 영원한 헤비타트인
천국으로 떠났을 때, 나는 이 꿈을 포기하지 말고 따르라는 분명한 부르심
을 받았다. 그 부르심으로 1976년 헤비타트가 창설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헤비타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
두 소중하다. 쓰여지는 글자 하나 하나, 슬라이드쇼 하나 하나, 노동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나 페인트 한 깡통이나 헌금이나 어떤 형태의 봉사라도 우
리에게는 정말로 소중하기 그지없다. 전세계에 걸친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새로 짓고, 개축하고, 수리하는 집들 한 채 한 채가 모두 판잣집을 추방하
고 그 자리에 튼튼한 가정을 건설하도록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영감
을 고취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전직 미합중국 대통령이 우리와 힘을 합쳐 일했을 때,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헤비타트 운동을 알게 되었
다. 헤비타트의 신용도가 한층 높아졌고, 갑자기 새로운 길이 열려서 기금
을 모으거나 자원봉사자를 확보하거나 택지며 연장이며 자재들을 기탁받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린다와 내가 자이레에서 빈민을 위한 집을 짓느라 3년의 세월을 악전고
투하던 1976년 당시에, 지미 카터는 미합중국 대통령 후보로서 기나긴 유
세 끝에 귀향하고 있었다. 그는 11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백악관에서 보
낼 4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가을, 린다와 나는 조지아로 돌아와
헤비타트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는 지미 카터와 안면이 없었다. 그는 재직중에도 가끔씩 우리
가족이 예배를 드리는 아메리쿠스의 교회에 참석하곤 했다. 우리는 그때
악수를 하며 몇 마디인가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지만, 그것이 전부였
다.
카터 대통령은 고향 플레인즈에서 이웃으로 지내던 랠프와 제인 낸을 통
해 처음 헤비타트 운동을 알게 외었다. 낸 부부는 자이레의 헤비타트를 위
해 2년간 자원봉사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980년 9워, 아프리카로 출발
하기 직전 카터 대통령 부부는 낸 부부와 두 아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이
틀 정도 묵게 했다.
카터 대통령은 몇 년 전부터 코이노니아 농장의 활동을 들어 알고 있었
지만,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적은 없었다. 코이노니아 지역사회와 여
러 번 의견을 교환한 일은 있었지만 말이다. 야심 있는 정치인인 그로서
는, 코이노니아와 공개적으로 손을 잡았다가는 단칼에 정치생명이 끝날 수
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코이노니아는 '공산주의자' 조직이라는 혐
의를 받고 있었고, 대부분의 백인들은 1950년대와 60년대 남부 조지아의
통합집단이라면 무조건 끔찍하게 싫어했다.
카터 대통령이 1981년 1월 백악관을 떠난 뒤, 지미와 로잘린 카터 부부
는 플레인즈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플레인즈 침례교회의 종신신도였
지만, 이 교회는 카터가 워싱턴에 있는 동안 흑인에게 문호를 개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놓고 분란이 일어나 양분되고 말았다. 교회가 인종을 불
문하고 신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따로 떨어져 나와, 1마일
쯤 떨어진 곳에 자그마한 교회를 지었다. 그들 부부는 마리나타 침례교회
로 명명된 새 교회에 합류했고, 카터는 성인 주일학교의 교사직을 맡았다.
이 무렵, 헤비타트 운동은 상당한 거듭해 아메리쿠스로 찾아오는 자원봉
사자들과 봉사수련회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일요일이면 이들 중 수많
은 사람들이 지미 카터의 주일학교에 참석했고, 이들로부터 마터는 확장일
로에 있는 헤비타트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1982년 10월에 아메리쿠스에서 개최될 헤비타트 가을 이사회의 계획을
짜던 중, 데이빗 로우가 카터 전 대통령을 초청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야말로 탁월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카터가 기꺼이 와줄지는 의문
이었다. 얼마나 지독하게 바쁜 사람인지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우리는
이사회 회장인 데이빗이 초청장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훗일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데이빗은 최종적으로 플레인즈에 보낸 편지문안을 작성하느
라 헤아릴 수 없는 초안을 폐기했다고 한다.
예정대로 아메리쿠스의 집회가 열리기 바로 직전, 헤비타트 사무국은 전
화 한 통을 받았다. 초청이 수락된 것이다.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가 1982
년 10월 16일 토요일 아침에 제일침례교회를 방문해 인사를 하고 헤비타트
이사, 고문, 사업장 대표들이 모인 연례행사장에서 짤막한 연설을 하게 되
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예배당에는 사람들이 발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었다.
카터가 방에 들어오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오랫동안 열렬히 박수갈
채를 보냈다.
대통령은 인권, 천연자원관리, 인류평화와 같은 절대절명의 문제를 다룰
때 이론과 실천을 양립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토로하는 말로 서두를 꺼
냈다. 그는 헤비타트 운동이 빈민 주택보급이라는 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태도로 이론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개인적으로 인도
차이나, 아이티, 기타국가들의 망명자와 빈민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힘주
어 강조하면서, 코이노니아와 클래런스 조던을 아끼는 마음을 거리낌없이
털어놓았다.
"저는 코이노니아의 이웃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너무 먼 곳에서
지켜보기만 한 방관자일 뿐이지만 클래런스 조던이 이 나라에 끼친 영향을
목격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삶으로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구
현했던 이 과묵한 사람의 친구였음이 자랑스럽습니다. 그에게도 인간의 약
점은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클래런스 조
던과 코이노니아, 그리스도 헤비타트 덕분에 저는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여생 동안 더 크게 성장하고
싶습니다."
카터의 연설은 대략 10분이 걸렷다. 그는 집에 가서 주일학교 강의를 미
리 공부해야 되기 때문에 긴 연설은 못한다고 농담을 했다. 폭소가 조금
잦아들자 그는 우리 모두를 다음날 있을 마라나타 침례교회의 예배에 초대
했다.
연단에서 내려 서는 순간, 또다시 참석자 전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당이 떠나갈 정도로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 곳을 방문해 격려의
말씀을 해준 데 대해 한결같이 감사하고 있었다. 헤비타트 동역자들의 모
습에서 역력히 드러나는 관심과 헌신적 태도에 카터 역시 깊은 감명을 받
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82년, 헤비타트는 전직대통령과 영부인으로부터
후한 헌금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8월, 영부인 로잘린과 에이미가 인디
애너폴리스까지의 긴긴 여정의 첫 아침에 동참함으로써 카터 가족들이 개
인적으로 헤비타트에 관여하는 폭이 더욱 넓어졌다. 아메리쿠스에서 시경
계까지 1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걷는 동안 나와 로잘린은 깊이 있는 대
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주제는 단지 걷기운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헤비
타트 운동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로잘린은 진심에서 우러난 관심을 표시
했다.
1983년 12월, 아메리쿠스의 사무국 건물을 확장해 헌정식을 가질 채비를
마쳤을 때 우리는 대통령과 영부인을 모두 연사로 초빙했다. 그들은 이를
수락했고, 참석한 250여 명의 청중들에게 헤비타트를 극찬하는 연설을 선
물했다.
그 날 저녁, 나는 린다에게 어쩌면 카터 부부가 정말로 헤비타트에 관심
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한두 주
후에 나는 플레인즈에 있는 카터 대통령의 비서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
녀는 1984년 1월 23일 오전 10시에 카터 대통령이 면담을 수락했다고 전화
로 답해주었다.
카터의 저택은 단정한 풍광을 배경으로 한 매혹적인 벽돌건물이었으나
겉치레만 번드레하게 화려한 집은 아니었다. 나는 현관문으로 걸어가 초인
종을 누르고 한 발 물러섰다.
카터 대통령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그 유명한 미소를 얼굴 가득 지어
보이더니 나를 현관 오른편의 대기실로 안내했다. 몇 마디 안부인사를 건
네는 사이 로잘린이 들어왔다. 지체없이 나는 방문의 용건을 이야기했다.
"저는 여기에 이웃으로 왔습니다. 두 분께서 헤비타트 운동에 관심을 보
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간략하게 카터 부부가 헤비타트와 맺어온 인연을 요약했다. 그러고
나서 이제까지 해주신 일들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다고, 그러나 이제까
지보다 더 큰 성의를 보여주실 의사가 있으신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
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두 분께서 헤비타트 운동에 단순히 관심이 있으실 뿐인가요, 아니면 정
말로 관심이 많으신 건가요?"
카터 대통령은 싱긋 웃더니 로잘린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조용히 대답
했다.
"우리는 정말로 관심이 많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관심을 저희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그는 내게 사무국으로 돌아가 자신들을 적절히 이용할 구체적인 방안들
을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편지를 한 장 보내 주십시오. 그 편지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활동하면
좋을지 아이디어의 윤곽을 대충 잡아서 써주세요."
카터 대통령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모두 목록에 적어 주십
시오. 편지를 받고 나서 이 문제를 좀더 생각해본 뒤에, 정확히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 결정하겠습니다."
나는 헤비타트 사업에 대해 20분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
어났다. 헤비타트 운동을 위해 미합중국의 전직 대통령과 영부인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하는 아이디어들이 머리 속에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바
람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당장 데이빗 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
고 전직 대통령 부부가 참여할 방법을 목록으로 작성하는 일에 착수하도록
했다. 다른 헤비타트 이사들 몇몇에게도 전화연락을 해서 아이디어를 구했
다. 그리고 사무국직원들을 소집해 이 일에 총력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며
칠 동안 기도하면서 아주 오랜 시간을 깊이 묵상하고 숙고했다. 서둘러 편
지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철저히 검토해 변변치 못한 제안은 모두 삭제
해야 했다. 16일 후에야 마침내 나는 대통령과 영부인에게 한 통의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
친애하는 대통령 내외분께
무엇보다 먼저 두 분이 자택에서 저를 만나주시고, 헤비타트 운동을 논할
시간을 내어주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두 분의 격려와 칭찬의 말씀은 개인적으로 제게, 또 나날이 성장하는 이
사업을 위해 일해온 모든 이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특히 두 분께
서 헤비타트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게 되어 얼
마나 큰 희망과 기쁨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일전에 요청하신 대로, 저는 사무국에 돌아와 모든 이들과 함께 기도하
고 토론하면서 호의를 어떻게 헤비타트 운동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의견을 모았습니다. 두 분께서는 가능한 참여방법을
거리낌없이 나열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나긴 목록을 보면 아시겠
지만, 저희는 두 분의 부탁을 충실히 이행했답니다!
1)두 분 중 한 분이 인류를 위한 헤비타트 운동의 이사나 고문으로 일하
실 수 있습니다. 별도로 우송한 우편물을 보시면 이사, 고문, 그리고 헤비
타트 사업장 대표들의 전체 명부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자체
규약에 따라 이사를 25명까지 허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사는 22명입니
다. 가을 이사회 때마다 신임 지도자를 선출합니다.
이사들은 매년 다른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1년에 두 먼, 즉 봄과 가을에
이사회를 갖게 됩니다. 고분은 1년에 한 번, 가을 이사회 때에만 이사들을
만납니다. 고문은 1년에 한 번, 가을 이사회 때에만 이사들을 만납니다.
이사들은 집회에 꼭 참석하게 되어 있고 고문들에게는 참석을 권장하고 있
습니다. 대부분의 이사는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며, 고문들은 여행경비를
각자 부담합니다. 고문과 이사 모두 헤비타트의 관리경비를 분담하게 됩니
다. 대부분 이러한 비용들을 아주 흔쾌하게 넉넉히 지불하고 있습니다.
2)언론에 홍보해 주십시오. 구세군, CARE, 적십자사, 보이스카우트, 기
타 등등의 조직들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헤비타트는 그렇
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대통령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대통령께
서는 짧은 시간 내에 '지미 카터'를 세계적으로 친숙한 이름으로 만드셨습
니다. 대통령께서는 적당한 언론관계자들과 접촉하시고 그들을 움직여 헤
비타트 운동을 도와주신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3)도움을 줄 수 있는 핵심재단이나 법인 관계자들과 저희를 연결해 주십
시오. 1983년 우리들은 헤비타트가 벌이는 모든 사업의 비용으로 각계각처
에서 240만 달러를 모금했습니다. 이 돈은 전적으로 개인과 교회가 헌납해
온 것입니다. 재단과 법인에서 들어온 돈은 거의 전무하다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알라져야 합니다. 장비-트럭, 건축장비, 사무실 컴퓨터, 미디어
장비-를 기부받거나 할인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
다.
4)대통령의 친지분들께 편지를 써서 헤비타트 운동을 알리고 대통령께서
후원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5)헤비타트 후원을 호소하는 안내편지 캠페인에 대통령의 지지를 표명하
는 서한을 작성해 주십시오.
6)헤비타트를 도와줄 만한 유명인사들이 있다면 저희와 연결해 주십시
오.
7)텔레비전과 라디오에 배포할 만한, 헤비타트를 위한 공적 성명을 작성
해 주십시오.
8)저와 함께 헤비타트 운동을 소개하는 30분짜리 인터뷰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해 주십시오. 이 테이프는 향후 전국에 배포되어 주일학교나 강의나
토론모임에서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9)남부 침례교인이시니 이 지역의 핵심 인사들께 편지를 써 주시면 특별
히 많은 후원자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시다시피 헤비타트
는 교파를 초월한 단체입니다. 우리는 남부 침례교에서도 많은 지원을 받
고 있지만, 다른 교파들의 활동에는 아직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이 점도
앞으로는 개선되어야 합니다.
10)미합중국의 몇 군데 주요지역에서 연설회를 주선했으면 합니다. 대통
령이시라면 수많은 청중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적절한 사전조율
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정해 우리측에서도 적극적으로 이벤트를 벌여야 할
것입니다.
11)해외의 헤비타트 사업장을 몇 군데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3세계
에서 헤비타트가 하고 있는 일을 더 깊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동
시에 대통령의 방문으로 헤비타트가 국제적인 명성과 신망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12)미국 내의 헤비타트 사업장도 들러 주십시오.
13)자원봉사자로 일해 주십시오. 하루 동안 아메리쿠스의 건축현장에서
노동을 해주신다면, 아주 훌륭한 모범적 사례가 될 것입니다. 대통령과 영
부인께서는 사무국에서 일하셔도 좋고 건축현장에서 일하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여성차별을 하지 않으니까요! 대통령께서 자원봉사하는 모습을 카
메라에 담아 대통령의 솔선수범이 여러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도록 하겠습
니다.
14)개인적으로 성금을 기부해 주십시오. 대통령께서는 이미 헌금을 해주
셨고, 저희는 그 선물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대통령께서 정기적으로 성금
을 기부해 주신다면, 그 사실 자체가 실제 돈의 액수보다는 훨씬 더 의미
깊을 것입니다.
15)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기도의 능력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정기적으
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이 기나긴 목록에 나열된 어떤 일보다 값
진 선물이 될 것입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 목록은 아주 깁니다. 그리고 저는 대통령께서 이
제안들 중 몇 가지에만 긍정적인 답변을 주실 수 밖에 없음을 잘 압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목록을 보시고 대통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다
른 방법을 생각해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귀한 우정과 격려와 지원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존경을 담아, 밀라드 풀러
며칠 후 비서의 전화를 받았다. 카터 대통령이 나를 자택에서 한번 더
만나고 싶어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메리쿠스의 헤비타트 사무국에서 플레인
즈의 카터 저택까지 또다시 9마일을 알려가면서 나는 흥분에 들떠 어쩔 줄
몰랐다.
카터는 이번에도 현관에서 직접 나를 맞아 대기실로 안내했다.
"편지를 훌륭하게 쓰셨더군요, 로잘린과 의논을 해보았는데, 풀러 씨가
제안한 것들을 대체로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의자 옆의 램프 스탠드에서 내 편지를 집어들더니 각각의 항목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의견을 말해주었다.
"성금모으기 부분은, 내가 지금 대통령 전용 도서관 설립기금조성에 참
여하고 있기 때문에 한동안 그 쪽에 전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조만간 이 방면에도 신경을 더 많이 쓸 수 있게 될겁니다."
아메리쿠스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서와 정확한 날짜
를 의논해 보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하자
는 뜻이었다.
카터는 이사회에 참석하고 로잘린은 고문을 맡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힘닿는 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정기적으로 열리는 집회에도 참석하기로
했다. 나는 기쁨에 들떠 카터 저택을 나섰다. 카터 부부는 진심으로 헤비
타트 운동을 의해 뜻깊은 실천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카터 부부의
참여가 가져올 여파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장기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한 달 뒤, 지미 카터가 아메리쿠스 건설현장에서 1일 인부로 자원봉사를
하러 왔다. 그는 아침 기도회가 열리기 10분 전에 도착해서 하루 종일 성
실하게 일을 했다. 나 역시 전직 대통령이 자기집과 친구들을 위해 아름다
운 가구들을 만들어주는 솜씨좋은 목수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러나 바로 이 곳에서 헤비타트 사업장의 인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헤
비타트가에 세워질 도로시와 윌리 솔로몬의 새 집 골조를 올리는 그의 모
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 날의 행사에 잊지 못할 사건이 없었을 리 없다. 작업자들이 다함께
골조를 들어 제자리로 세우던 중, 갑자기 골조가 손에서 미끄러져 카터 대
통령 쪽으로 정통으로 무너져내린 것이다. 경호원 한 명이 재빨리 몸을 나
려 무너지는 벽과 카터 사이를 막고 제때 붙잡았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중
상을 입을 뻔 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소동이 또 한 차례 일어났다. 한 일
꾼이 목조골재를 콘크리트 바닥에 고정시키기 위해 콘크리트 못을 발사하
는 소형총을 쏘았기 때문이었다. '빵!' 소리가 커다랗게 울리자 경호원이
또한번 혼비백산했다. 모두들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 나서는 어색하게 웃
을 수밖에 없었다.
정오에 우리는 '평화의 집'에 모여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먹었다. (사무
실 공간과 자원봉사자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개축한 14채의
집에는 '평화', '정의', '아미고'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건축인부들과 지
원팀 몇몇도 자리를 함께 해 한가로운 나눔과 우정의 시간을 가졌다. 식사
시간 동안, 나는 편지에 언급한 바 있는 비디오 인터뷰 제작에 관해 카터
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이런 기획에는 제3자를 참여시키는 게 더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몇 가지 가능성을 토론했다. 그러다가 앤드루
영의 이름이 나왔다. 카터 대통령이 물었다.
"전화기가 어디 있지요?"
"옆집에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영한테 전화를 걸어보지요."
우리는 '아가페의 집'으로 갔고, 카터 대통령은 애틀랜타의 영 시장 사
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작년에 우리가 700마일 걷기운동을 하면서 애틀랜
타를 관통한 데다가 애틀랜타 시에서 한창 헤비타트 운동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도 헤비타트 운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호의를 표시했
고 헤비타트 사업에 관한 시청각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 참여해 달라는
우리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했다.
우리의 언론담당 이사인 월러스 브로드가 소소하고 현실적인 절차들을
처리하는 데 당장 착수했다. 녹화장소는 애틀랜타 시의 영 시장 저택 뒷마
당으로 결정했다. 날짜는 다음달인 1984년 4월로 잡았다.
카터 전직 대통령과 나는 화창하게 아름다운 봄날 영 시장의 자택에서
만났다. 영 시장의 중재로, 위 세 사람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의 백성들이 살 집을 마련하는 일이 얼마나 절박한가에 대해, 그리고 세상
을 변화시키기 위해 행동하라는 복음의 요청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
리고 애틀랜타, 아메리쿠스, 미합중국 전역, 나아가 전세계에서 헤비타트
가 벌이는 확장일로의 사업을 특히 힘주어 강조했다. 그 결과로 '도움의
손길을 갈구하는 세계-나눔의 기회'라는 25분짜리 비디오 프로그램이 탄생
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수백 개의 비디오가 미국, 캐나다, 나아가 유럽 전역
으로 배포되어 교회, 지역단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활용되었다. 그 프로
그램은 지금도 광범위하게 방영되고 있으며, 헤비타트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녹화가 끝난 후, 우리는 영의 집에 초대되어 간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했
다. 대화 도중 영 시장의 아내 진은 딸 폴라가 헤비타트에서 자원봉사를
할 생각이 있는 것 같다고 귀띔해 주었다. 폴라는 듀크 대학을 갓 졸업했
는데, 한동안 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평소에 자주 했다는
것이다. 나는 주소를 적어주며, 폴라에게 편지하라고 전해달라고 부탁했
다.
몇 주 후, 나는 진심으로 헤비타트와 일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폴라의
전갈을 받았다. 1984년 7월 8일 폴라는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러 아메리쿠스
에 도착했고, 그로부터 6개월 뒤 우간다로 날아가 굴루의 헤비타트 사업장
에 일을 했으며, 그 지역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미와 로잘린 카터의 도움은 기금조성과 홍보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간접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일해줄 최고급 인력을 또 하나 얻게 해준 것이
다.
이러한 그들의 참여는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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