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타트는 항상 자원 봉사자들의 양어깨 위에서 움직인다. 지미와 로잘린 카터는 전
세계에서 자신의 능력이 무엇이든 간에 힘껏 발휘해 정력적으로 일을 해왔던 연령 불문
의 수많은 동역자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지금도 이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
다.
듣는 사람을 모두 놀라게 하는 헤비타트의 특징 중 하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그 다
채로운 면면이다. 우리는 우리 활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기꺼이 받아들
인다. 자원 봉사자의 고향에서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든, 아니면 그 사이 어딘가로
절충하든 간에 봉사의 기회는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자원 봉사'라는 단어를 처음 들으면, 더구나 노동 봉사와 연결지어 생각하면 많은 사람
들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을 떠올리기 쉽다. 각 곳의 헤비타트 프로그램은 실제로 방
학 동안 일주일, 또는 한 달 정도 근로 봉사를 하는 청소년들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도움을 받아 왔다. 이들은 각 지역의 공사 현장에서도 튼튼한 뒷받침이 되었다.
뉴저지 우즈타운의 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이자 세일럼 카운티 헤비타트의 이사인 하워드
테일러는 자기 교회에서 2개조의 근로봉사대를 이끌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존스 아일랜
드의 헤비타트 프로젝트 모임에 찾아왔다. 하워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보다 더 잊지
못할 추억이 될 만한 체험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리 세심하게 계획만 짜 둔다면, 노동 수련 캠프는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뿌듯한 느낌
을 줍니다. 아무리 기술이 없어도 좋고,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좋습니다. 그리스도 안
에서 친교를 나누며 집을 짓기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은 참으로 값진 경험입니다. 우정이
깊어지고 세대간의 이해도 놀라울 정도로 폭넓고 깊어집니다. 어른들은 10대들이 진지하
게 일하고 성취할 수 있다는 걸 보고 놀라고, 청소년들도 어른들이 단순히 이래라 저래
라 간섭하는 권위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놀랍니다.
노동 수련 캠프에 참가하고 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곤경을 새삼 더 민감하게 의식
하고 반응하게 되지요. 꼭 참가자들에 국한된 얘기는 아닙니다. 교인들도 더한층 참여
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금을 모으고, 새벽 기도회를 하고, 새벽녘에 함께 아침을
먹고 나둥에 환영식을 하면서, 교인 전체가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몇년이 지났는데도 교
인들은 그때의 수련캠프 이야기를 합니다. 수고스럽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믿습니다."
가끔씩 젊은 청년들은 취업을 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에 장기간의 봉사를 하겠다고
결심하곤 한다. 우리는 이런 범주에 속하는 재능 있는 청년들을 이미 수십 명 맞아들였
고, 사업장에서도 언제나 대환영이다.
아리조나 주 메사의 댄 로먼도 그런 청년이다. 1981년 자이레 응톤도에 사는 모반다 모
펜게는 자기 마을에서 벌어지는 헤비타트 사업을 격찬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특히 당시
22세였던 댄을 보내주어서 고맙다고 썼다.
댄은 꼭 여기서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와 함께 있으니 달리 필요
한 것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댄에게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질 때까지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자고 부탁했답니다! 그리고 엘롬베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습니다. '일꾼 중의 일
꾼, 신자 중의 신자, 사업의 힘센 추진자'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그를 골라 이 곳에 보
내주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냅니다.
케냐의 응조이아 헤비타트 사업장 대표인 제레마이어 와마치오 역시 비슷한 편지를 내게
보냈는데, 이번엔 캐나다의 자원 봉사 폴 해더드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의 폴은 하나님
께서 내려주신 선물이랍니다!" 기독교 봉사단의 후원을 받는 폴은 튼튼한 집을 짓는 일
뿐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인간관계를 쌓는 일에서도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사람을 돕는 기쁨은 모든 연령층에게 열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헤비타트에서 가장 귀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퇴직자들이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흔들의자
에 앉아 편안히 쉬고 싶어할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헤비타트와 함께 이랗는 노인들은 어
떤 장애물도 극복하게 하시는 주님의 사업에 정열과 의욕을 가득 불어넣어 주며, 그 과
정 속에서 무척이나 젊게 살고 있다.
이 활동적인 노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엘렌 스터들리이다. 1924년에서 1951년까지 중
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연합 감리교 목사를 지낸 바 있는 그녀는 1981년 헤비타트 운동
을 알게 되었을 때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 버스를 잡아
타고 3일 동안 전국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그녀는 그 해 11월 중순 아메리쿠스에 도착했
고 6개월 동안 봉사활동을 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82세였다.
드포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유니온 신학교
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은 바 있는 엘렌은 정력적인 저술가였다. 아메리쿠스에서는 당장
그녀의 재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일 매일 새로운 자원 봉사들을 면접하고,
그들의 고향 언론에 창의력 넘치는 홍보자료를 제작해 넘겨주었다. 또, 전국에 걸쳐 있
는 동역자들과 지회에 보낼 수십 통의 편지를 써서, 헤비타트를 널리 알리고 새로운 후
원자들을 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가끔씩 엘렌은 아침기도회를 이끌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했다. 어느
날 엘렌은 2차대전 발발 당시 중국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모두들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의자 끝에 엉덩이를 겨우 붙이고 앉아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웨이시엔
에 강제억류를 당했지만 살아남았다. 그 숨막히는 몇달을 회고한 회상록에서 엘렌은 이
렇게 쓰고 있다. "살아남을 확률은 영적인 문제에 따라 달라진다...... 서로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배려와 격려를 보여줄 때 희망과 믿음과 자비가 자라나
고 생존의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엘렌은 평생 그렇게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왔다. 67세에 그
녀는 "앞으로 다시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리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 는 의사의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 뒤로도 엘렌은 인디애너 주에서 두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맡아 일했
고, 국제교류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84년에는 엣 친구들을 만나러 중국을 다시 찾았
다. 게다가 처음 아메리쿠스에서 여섯 달 동안 봉사활동을 끝마친 뒤로로 두 번이나 돌
아와서 단기간 동안 일을 하고 갔다. 헤비타트 자원 봉사들에게 정년이란 말은 사전에
없는 것이다!
가족이 함께 자원 봉사하러 오는 경우도 많다. 엘렌이 사는 곳에서 정반대편 끝에 있는
뉴햄프셔 주 라코니아에는 뒤퐁 가족이 살고 있었다. 폴과 케이시 부부는 딸 리사와 제
니퍼, 그리고 조카 메리를 대동하고 1981년 8월 처음으로 아메리쿠스를 찾아왔다. 그들
은 아홉 달 동안 묵었는데, 폴은 건축인부 십장으로 일하고 케이시는 사무실에서 타이핑
을 하고 편지를 봉투에 넣고 소식지 교정을 보았다. 케이시는 또 다른 일거리들도 찾아
내서 떠맡았는데, 예컨대 헤비타트의 수혜를 받는 해당지역 가족들과의 중간연락책으로
일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뒤퐁 가족의 경비는 라코니아의 조합교회가 전적으
로 부담했다.
아메리쿠스에서 봉사기간이 끝난 뒤, 폴과 케이시는 고향으로 돌아가 뉴햄프셔 주 라코
니아의 헤비타트 지회를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힘을 보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업
부는 워너와 플리머스에도 새로운 지회를 발족시켰다.
1985년 뒤퐁 가족은 아메리쿠스로 다시 돌아와 6개월 동안 자원 봉사를 재개했다. 이번
에는 어린 아들 케빈도 함께였다. 폴은 또다시 건축 인부 십장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아
메리쿠스와 뉴햄프셔 양쪽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케이시는 테드 스위셔의 보좌역을 맡
아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새로운 사업장들을 조정하는 일을 도왔다.
어떤 자원 봉사들은 장년기를 맞아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기도 한다. 1982년 노스캐
롤라이나 주 채플힐의 건축업자이자 신학교 졸업생인 R. 딘 드보어 씨는 마흔의 나이에
자이레로 가서 봉긴다 이코코 마을의 새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얼마 되
지 않아 딘은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찾던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고향으로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딘은 "드디어 저에게 맞는 곳을 찾았습니다!" 라고 썼다. 그리고 그
후 딘에게서 오는 편지에서는 하나같이 "자이레에서 환하게 웃으며, R. 딘" 이라는 서명
을 볼 수 있었다.
3년 뒤 미합중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딘은 계속해서 헤비타트 사업을 위해 일했다. 그가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 채플힐에서도 헤비타트 사업이 발족되었던 것이다. 딘은 아프리카
에서 예수님의 약속이 생생히 실현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
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양속의 말씀 말이
다. 딘의 설명은 이러했다.
미국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나라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
은 채 나 자신을 던졌을 때, 나에게 돌아온 보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는 몰랐지만 자이레의 킨샤샤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저는 부자가 된 것입니다. 한 달
에 300달러의 자원 봉사 경비로 나는 봉긴다 이코코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먹을 것
도 충분했고, 입을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의 저택보다 훨씬 더
넓은 집에 살았을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저와 함께 살게 해준 '아들'도 있었습니
다. 그 아이는 영광스럽게도 저를 '아버지'라고 불저 주었지요. 주민들은 커다란 배도
혼자 쓰게 해주고 '전용기사'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마을의 귀빈으로 대접
했고, 그들의 우두머리로 받들어 주었습니다. 이 모든 선물은 제가 받은 것입니다. 하나
님의 사람이 얼마나 자비롭고 풍성한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오직 하나, 헐벗은
주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일에서 얻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영적인 부요 힘입니다.
아프리카에서의 봉사기간을 마친 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 딘은 그
곳에서도 주님께서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신다는 것을 실감했다.
집에서 쓸 물건들을 사려고 쇼핑목록을 적었습니다. 침대시트니 베갯잇이니 부엌 살림살
이 등이었지요. 엣날에 두고간 토스터오븐이 찾아도 없길래 어떻게 됐나 생각했는데, 바
로 다음날 집에 돌아와보니 탁자 위에 누군가 꾸러미를 놓고 갔더군요. 열어보니 침대시
트 두 벌, 베갯잇과 수건 한 장, 바나나빵 한 덩이, 그리고 토스터오븐이 들어 있었습니
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다른 것은 전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헌신적으로 이하는 헤비타트 직원들 중 상당수는 예전에 자원 봉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
는 사람들이다. 펜실베이니아 마운트조이의 켄 소더는 1974년 자이레 음반다카에서 우리
부부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자이레 응톤도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
작했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대학을 마치고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도시계획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켄은 헤비타트 운동이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비전을 보았고, 1984년
아메리쿠스로 돌아와 중남미와 카리브 지역 사업의 책임자가 되었다.
1977년 클라이브 레이니라는 젊은 학교 선생이 아메리쿠스에서 소정의 기간 동안 자원
봉사를 시작했다. 그 뒤 그는 자이레 킨샤샤, 우간다 굴루, 부룬디 기테가, 말라위 링롱
웨에서의 활동을 거쳐 아프리카 사업장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다. 크라이브는 특히 연합
감리교의 응도르심파 주교가 이끄는 부룬디 사업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부룬디 현지
자원봉사자들의 힘만으로 건설되는 이 공사는 1986년말까지 준공할 예정이었다.
밥과 캐시 가이어, 그리고 그 아들들인 스캇과 매튜는 뉴욕 버팔로 출신으로 1982년 자
원 봉사로 아메리쿠스를 찾아왔다. 캐시는 우편국에서 일을 하고, 타이핑을 하고, 회계
부에서 보조로 일했다. 밥은 건물을 짓는 인부들을 관리하는 동시에 헤비타트 사무국 시
설들을 디자인하고 새로 짓는 일을 도왔다. 1985년 회계학 학위를 가진 밥은 망치와 청
사진을 손에서 놓고 재정관리 책임자로 취임했다.
월러스 브로드는 1982년 당시 애틀랜타에서 기독교 라디오 방송 재단의 일원으로 일하다
가 헤비타트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처음 헤비타트를 알게 되었다. 얼마 후, 그
는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헤비타트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형제가 일해주시면 우리도 정말 좋겠습니다. 하지만 넉넉히 월급을 드릴 수가 없습니
다. 헤비타트에는 팜플렛이며 슬라이드쇼, 홍보영화 등등 홍보물을 제작할 미디어 부서
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사람을 고용할 만한 돈이 없어요."
월러스의 대답은 신속했다.
"무급으로 일하겠습니다. 아내 낸시와 둘이 먹고 살 만한 돈만 있으면 됩니다."
헤비타트 사업에 남편만큼이나 열심이었던 아내 낸시는 몇 주 안되어 아메리쿠스에서 일
자리를 찾았고, 월러스는 우리의 언론담당 이사가 되었다. 그는 그렇게 훌륭한 능력을
갖추고도 2년 동안 자원 봉사로서 일해주었다. 월러스가 봉급을 받게 되자, 낸시가 직장
에서 사퇴하고 헤비타트의 자원봉사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낸시는 처음에는 내 일을 옆
에서 도와주다가 나중에 우리의 소식지인 '헤비타트 월드'의 편집장이 되었다.
1985년 2월 1일, 한나 브로드가 태어나 최연소 헤비타트 자원 봉사가 되었다. 한나는 모
델과 친선대사 역할을 했다. 우리는 21세기에 한나를 새로운 스탭으로 맞이할 작정이다.
그러나 자원 봉사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헤비타트 가족들은 바로 집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부금을 기탁하고, 모금운동에 참여하며,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에
서 튼튼한 주택의 비전을 함께 공유한다. 그들은 모두 어느 하나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미시간 주 레이크 오데사의 프랭크 타운젠드는 은퇴한 목수다. 몇 년째 그는 헛간을 개
조해 '헤비타트 작업실'이라 이름붙이고, 아름다운 수공예 가구들을 제작했다. 이런 식
으로 그가 헐벗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모금한 돈은 무려 수천 달러에 달한다. 프랭
크와 윌마 타운젠드 부부와 그 가족들은 다른 헤비타트 모금운동에도 동참했으며, 그들
이 다니는 교회 교인 전체의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미시간 주 프리포트 근처의 호프 교회는 매년 가을에 축제를 여는데, 프랭크는 축제의
회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모든 수익금을 헤비타트에 기부하고 있다. 축제에서는 집에서
기른 야채와 수공예품들을 전시판매하는 일 외에도, 야외의 가마솥에서 저어 만든 애플
버터를 몇 갤런씩 준비하며, 교회마당에서 속을 채워 훈제한 소시지, 거대한 항아리에
가득찬 양배추절임등의 별식을 제공한다. 호프 교회는 1979년 이후 해외에 해마다 집 한
채씩을 지을 돈을 모금해왔다.
1982년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의 사업이 한창 준비단계에 있을 때에도 프랭크는 물심양
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타운젠드 가족처럼 자택에서 일하는 자원 봉
사들이 수천 명 더 필요하다!
베키 코프는 딜리야드라는 북부 조지아의 작은 마을에 있는 벨리스 크릭 로드에서 남편
과 함께 수퀘어댄스(남녀 네 쌍이 한 단위로 추는 춤)휴양지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전미 각처에서 정보를 모아 <스퀘어댄서들이 공개하는 사연 많은 요리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한 권이 팔릴 때마다 50센트씩 인도와 미시시피 델타 지역의 헤
비타트 건설 프로그램에 자동적으로 기부된다. 베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스
퀘어댄스 클럽들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베키는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이 사업의 무한한 가능성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헤비타
트에게도 좋은 일입니다만 그보다 이에 참여할 무수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변화할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로우즈와 로이스 톰슨 부부는 1981년 남편인 로우즈가 필립스 대학 신학대학원의 설교와
실천신학 조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오클라호마 주 에니드로 이사했다. 톰슨 부부는 이
미 헤비타트의 후원자로서 로우즈가 맡고 있던 교회 교인들을 독려해 과테말라와 우간다
에 각각 한채씩의 집을 이미 지은 바 있었다. 일본에서도 선교사로 4년 동안 봉사한 적
이 있는 로우즈와 오리스는 이제 평생 처음으로 소박한 그들만의 집을 갖게 된 것이었
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집다운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개인적으로 캠페인을 시작
했다.
로우즈는 교회와 수련회 등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곤 했다. 그들 부부는
이 기회들을 제3세계의 기독교 사업에 바쳐서, 모든 사례금을 여기에 기탁했다. 1986년
까지 헤비타트에 돌아온 몫은 열두 채의 집을 지을 정도였다. 우리는 과테말라에 한 채,
아이티에 한 채, 페루에 한 채, 인도에 한 채, 니카라과에 네 채를 지었다. 로우즈와 로
이스는 이 외에도 <모르타르에 깃든 사랑>을 300권 이상 사서 주위사람들에게 나누어 주
었다. 그래서 나는 1985년 봄에 오클라호마 에니드 시에 새로운 헤비타트 지회가 조직되
었다는소식을 듣고서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한편, 톰슨 부부의 딸인 조디는 에니드에서 에어로빅 강사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을 헤비
타트에 보내왔는데, 그 총액은 과테말라에 집 한 채를 지을 비용의 절반을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캘리포니아 가데니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톰스낙의 딸 린도 역시 헤비
타트의 후원자이다. '소박하게 살아라, 그러면 다른 사람도 소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모토를 실천하며 린은 5년 동안 두 번이나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해외의 헤비타
트 집 한 채씩을 헌정했고, 그 사이사이에 다섯 채의 비용을 부담했다.
1985년 10월, 나는 로우즈에게 뉴욕 시 가을 헤비타트 이사회에서 워크샵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청지기 정신: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정말이지 로우즈 톰슨보다 그 주제에 적합한 연사가 또 있을까.
분명한 것은 헤비타트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해서 머나먼 길을 떠날 필요는 없다는 사실
이다. 미국 내에서 지회가 발족될 때에는 대개 눈앞에서 집 없이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
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지역주민들의 힘이 배후의 추동력이 되
곤 했다.
밥 윗포드는 네 개의 직업을 거쳤다. 17년 동안 민간산업부문에서 일하다가 연방정부와
손잡고 8년을 일했으며, 1981년 부터는 인디애너 주 라파이에트에서 퍼듀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83년 그는 헤비타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헤비타트가 제4의 직업이라
고 말하고 있다.
1982년 봄, 밥은 베델 성경 공부 시리즈를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던 중 희년 축제의 무한
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공공정책 교수였던 밥은 레위기에서 생산의 3요소인 토
지, 노동, 자본을 다루는 방식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이 문제를 신학적, 성경학적으로
깊이 연구했다. 다음해, 밥은 센트럴 장로교회의 주일학교 성인반에서 '여호와 경제학'
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개설했다. 대략 스무명이 이 강의를 들었다. 이들은 구약성경과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희년과 안식년에 대한 가르침을 함께 공부하고자 했다.
때맞추어 창립 7주년을 맞은 헤비타트가 가까운 인디애너폴리스시에서 '안식년' 기념행
사를 개회했다. 이 행사 개최준비위원회 위원인 존과 수 영 부부는 '여호와 경제학' 수
강생들이었다. 영 부부는 라파이에트로 이사오기 전에 샌 앤토니오 헤비타트에 참여한
적이 있어서, 샌 앤토니오 헤비타트 사업의 창립자인 페이스 라이틀을 연사로 초청했다.
밥의 머리에 갑자기 '헤비타트야말로 20세기에 희년의 의미를 실천하고 있는 사례'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는 몹시 흥분했다.
밥은 곧 그 흥분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초교파적 위원회를 구
성했고, 결국 1984년 6월에 라파이에트 헤비타트를 조직했다. 그들의 첫 집은 1985년 11
월에 헌정되었다. 밥은 지금도 퍼듀 대학의 교수로 재직중이지만, 그가 헤비타트에 쏟아
붓는 자원봉사기간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아마도 그는 이 네 번쩨 직장이 나머지
셋을 합한 것보다 더 큰 보람을 준다고 말할 것이다.
헤비타트를 도와주는 또 다른 종류의 봉사자들이 있다. 이런 자원 봉사들을 '헤비타트의
집시들'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다.
잭과 로이스 월터스 부부는 노스캐롤라이나 트라이언에 근거지를 둔 명예퇴직자들이다.
두 사람은 모두 가까운 헤비타트 지회인 헤비타트 운동 온대지방 지회를 위해 성실히 일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매년 몇 달 동안 커다란 개 한마리를 끌고 전국의 헤비
타트 사업장을 누빈다. 정차할 때마다 트레일러를 작업현장 근처에 주차하고, 일주일이
나 한 달 정도 묵다가 다음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들은 세라믹 타일을 깔거나 차고를 팔거나 새로 입주할 가족들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
까지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로이스는 "재주란 재주는 모두 써봤어요. 갖
고 있는지도 몰랐던 재주까지 긁어내서 말이죠!"라고 말했다. 1986년이 되자 잭과 로이
스가 일해본 사업장이 적어도 스물세 군데가 넘었는데도, 그들은 도무지 지칠 줄을 몰랐
다.
미시간 주 오네카마 출신의 데이빗과 메어리 조세프 부부는 1982년에 처음으로 자원 봉
사 위해 아메리쿠스를 찾았다. 그 후 그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를로리다, 미시
건의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일했으며, 아메리쿠스에도 몇 번인가 더 왔다. 조세프 부부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특히 헤비타트 가족들과 나란히 일할 때 생기는 끈끈한 우정을 좋
아한다고 한다. 새로운 주인이 입주한 뒤 다시 그 곳을 찾아가서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
이 몹시도 기쁘다는 것이다. 사업장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데이빗과 메어리가 방문할 장
소의 목록도 길어질 것이다. 조세프 부부가 헤비타트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1981년 뉴 햄프셔 주 라코니아의 리타와 앨 라플램은 50년 동안 가업으로 내려오던 제과
점 사업을 처분했다. 여생을 아둥바둥하지 않고 편안하게 쉬면서 살기로 결정했던 것이
다. 그들은 이동주택을 끌고 길을 떠나 니타의 남동생인 폴 뒤퐁을 만나러 아메리쿠스에
들렀다. 폴은 당시 우리 건축인부의 십장을 맡고 있었다. 평생 못 한 번 막아본 적이 없
다고 실토한 앨은 폴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앨
과 리타는 현재 짓고 있는 집에 들어가 살 가족들이 옛날에 살던 끔찍한 판잣집들을 둘
러보고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라플램 부부는 결국 한 달 동안이나 아메리쿠스에 머물
렀고, 그 후 12개 주의 헤비타트 사업장을 누비며 시간이 나는 대로 일을 했다.
이 훌륭한 동역자들 하나 하나는 로저와 바바라 크로스 부부의 표현대로 '헤비티티스'의
사례들이다. 로저와 바바라는 로체스터, 뉴욕, 이모칼리, 프로리다를 돌아다니는 헤비타
트 집시들로서, 오랫동안 어느 곳에서나 그 진가를 발휘해왔다. 로저는 '헤비티티스들은
더 많은 모르타르에 더 많은 사랑을 퍼부어야만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 자신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떠돌이 헤비타트 자원 봉사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집을 지
으며 함께 나눈 경험들과 그 사이 사귄 수많은 친구들에게 빛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
다. 로이스는 그 심정을 이런 말로 표현했다. "헤비타트는 제가 가져본 직업 중 최고의
보람을 주는 직업입니다!"
로이스의 말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고 잇다 .빈부를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나 우리
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비전'이라는 것이다. 자원 봉사들과 새 집 주인을
포함한 헤비타트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비전을 간직하게 도니다
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리와 린다 버그는 1982년에 북부 뉴욕 주에서 담당하고 있던 교회의 목사직을 사임하
기로 했다. 그들은 두 자녀와 함께 1년 동안 자원 봉사 하기 위해 아메리쿠스로 내려왔
다. 버그 부부는 그 사이에 끊임없는 성장을 거듭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꿈과 노력이 한데 합치면 얼마나 큰 힘을 갖게 되는가'를 발견했다. 우리와 함
께 하던 나날들이 끝나갈 무렵, 게리는 캐나다 국경 근처인 뉴욕 주 멀론에서 연합 감리
교회 담임목사 자리를 제의받았다. 버그 부부는 그 곳으로 떠날 때 그들의 꿈도 가지고
갔다. 2년 후 헤비타트 북부지역 지회가 뉴욕 주 멀론에서 발족했고, 이 사업에 대한 후
원이 늘어나자 게리와 린다는 "헤비타트 사업고 ㅏ그 정신은 뉴욕 북부에서 사람들의 삶
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내게 호언장담했다.
미시간 주 캘러마주의 캐티 올포드는 1986년 2월에 헤비타트의 입주자가 되었다. 공장에
서 야간근무를 하던 캐티는 낮 시간 동안 자신의 집이 지어지는 한 단계 한 단계를 빠짐
없이 지켜본 충실한 헤비타트의 동료 일꾼이었다. 그녀는 세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
면 데리고 와서 청소와 페인트칠을 돕게 하기도 했다. 입주한 뒤에도 캐티는 이 일을 그
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 역시 비너에 사로잡힌 것이다. 케티는 자신이 만난 모든
이들과 나눈 기쁨을 다시 돌려주고 싶어했고, 입주하기 오래 전부터 다음 건물을 짓는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앞으로 헤비타트가 짓는 집이 있으면 무조건 힘을 보탤 거
예요!"
헤비타트인들이 일단 비전을 갖게 되면, 곧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 비전을 전파하는 일에
착수하게 된다. 인디애너 주 프리랜드빌 출신의 오스카와 리디아 버거 부부, 그리고 오
하이오 주 아이언턴 출신의 데일과 잰 크리스터 부부는 이 일을 충실하게 실행했다. 몇
년간 이 두 부부는 자기네들끼리 조직한 10여 개 남짓의 근로봉사대를 이끌고 아메리쿠
스를 방문했다. 그들이 올 때면 새 참가자는 물론 몇명의 경력자들도 다시 돌아오곤 했
다.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1985년 데일과 잰은 켄터키와 오하이오 주의 이웃 도시들을 맡게 될 애쉴랜드 - 아이언
튼 지구 헤비타트 운동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뒤 곧바로 잰은 1986년 캔사
스까지 1,000마일 걷기운동을 위해 강도 높은 훈련에 들어갔다.
캐나다의 '실천하는 신앙회'의 이사인 조지 앤더슨은 1984년 헤비타트 건축을 돕기 위해
아이티로 아이티로 날아갔다. 집에 돌아올 때 그는 자신이 체험한 봉사의 기회 자체에
얼마나 흥분이 되었던지 그 비전으로 국가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지는 기금을 연출하고 캐나다 전역에서 아이티로 갈 근로봉사대를 모집했다. 1986년도
가 되자 이미 일곱 그룹이 근로봉사에 참여해 아이티를 다녀왔고, 미국 국내는 물론 아
이티와 중남미로 갈 노동 수련 캠프를 기획했다. 그는 또한 1985년 카터 대통령이 인솔
한 로우어 이스트사이드 노동수련캠프에 4명의 참가자들을 소개했다. 조지는 전국 10여
군데에서 설명회를 가지면서, 청중들에게 그의 꿈을 털어놓았다. 캐나다가 서방에서는
두 번째로 헤비타트 운동ㅇ르 대규모로 전개하는 국가가 되도록 하자는 꿈이었다. 그 꿈
은 1985년 가을 이사회에서 실체를 갖추게 되어, 미합중국 ㅂ에서는 최초로 헤비타트 국
가본부가 인가되었다. 캐나다 헤비타트 운동본부가 발족한 것이다.
미주리 주 캔사스 시티의 존 프리차드는 이사회의 재정담당이자 캔사스 시티 사업을 처
음 주창한 장본인이다. 프린스턴과 하바드에서 학위를 받은 성공적 사업가인 존은 1979
년 반쯤 은퇴하다시피 하고 모든 정력을 헤비타트에 바치기 시작했다. 1982년 존과 그의
아내 메어리는 우리 부부와 함께 헤비타트 사업장과 파푸아뉴기니, 파키스탄, 케냐, 우
간다, 그리고 자이레 등지에 현재 컴토중인 부지를 돌아보았다. 잊지 못할 사람들을 만
나고, 비참ㅅ한 참상을 목격한 우리들은 헤비타트 사업을 계속 확대해 나가야겠다는 결
의를 새삼 다지게 되었다.
오랜 여정을 마치고 귀향하던 길에 마지막 들른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는 미국 프러테스
탄트 교회에서 연설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에 존은 북받치는 열
정에 가득찬 짤막한 연설을 했다. 그는 그들 부부가 지금 방금 평생 가장 잊지 못할 연
설을 했다. 연설을 끝내던 그의 힘찬 말은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저는 이제껏 부자들을 위해 별장을 지으며 살아 왔습니다. 이제 여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집을 지으며 살려고 합니다."
크기와 연령과 인종과 재능의 유무를 떠나 여러 자원봉사자들이 헤비타트를 찾아오고 있
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 소박한 집을 지어주기 위해 시간과 능력을 바칠 결심만 한다
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꺼이 당신에게 밭길 일거리가 있다.
그러나 정말로 참여하고 싶다면 조심해야 한다. 이 참여는 당신의 삶을 바꾸어 놓을 것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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