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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헐뜯기 좋아하는 버릇

by Healing New 2020. 9. 26.

  모나지 않는 평균인간으로서 공존하고 싶은데 누군가가 그 평균성을 벗어나려 
하면 발을 끌어내려 평균층에 있게 하려는 심리 취향이 곧 시기 질투로 발전한다. 

  옛 남도 농촌의 사투리에 '세덧이 있다'느니 '세덧이 있어야 한다'느니 하여 
부녀자의 인덕을 말할 때 '세덧'이란 말을 잘 썼다.
  세덧이 있는 마님하면 인덕이며 인성을 갖춘 마님이란 뜻이다. 시집갈 때 가난한 
친정 부모가 딸에게 해줄 것이 없으면 세덧밖에 해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세덧은 세덕(삼덕)을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세덧이란 말 가운데 우리 
한국인의 아름다운 의식이 전통적 구조로서 존재해 내린 것이다.
  세덧은 셋을 더한다는 뜻이다. 밥을 지을 때 식구 수만큼 쌀을 되어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짓는 것이 상식이다. 이를테면 열 식구면 열 명분의 양식을 퍼내어 
짓는다. 한데 '세덧'이란 식구 수보다 세몫을 많게 양식을 퍼내어 밥을 짓는다는 
뜻이다. 열 식구면 열세 식구 몫으로 밥을 짓는 행위를 셋을 더한다 하여 세덧이라 
한다.
  합리적 사고로 따지면 먹지도 않을 잉여분의 밥을 지어 낭비를 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모든 사물이 합리적으로 따지지 않듯이 이 세덧의 낭비도 합리적으로 
따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대체로 한국 농촌은 가난했다. 제 논밭 가꿔 먹고 사는 사람보다 논밭이 없어 품을 
팔거나 남의 논밭을 얻어 가꾸거나 하여 제벌어 제가 못 먹고 사는 사람의 비율이 
많았다. 이런 가난한 집 어버이들은 좀 먹고 사는 집에 가서 청하지도 않은 
설거지며, 빨래며, 김매는 일이며, 청소를 자청해서 한다. 이 불청노동을 거절해서는 
안 되게끔 전통적 불문률이 돼 있기도 했다. 불청노동이기에 그 보수나 대가를 
요구한다는 법은 없다. 다만 끼니에 그 집 식구들이 먹다 남은 밥을 먹고 또 남은 
밥을 얻어 갖고 집에 가서 집식구들을 먹였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 
숟가락 하나씩만 들려 그 집에 데려가 먹이기도 했다. 
  어려운 사람과 공존공생하는 아름다운 전통인 것이다.
  만약 어떤 주부가 자기 식구 수대로만 밥을 지었다 하자. 그럼 어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이 불청노동자가 먹을 밥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세덧의 지혜는 이 어려운 
사람과 같이 먹고, 산다는 우리 촌락 공동체의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가난했으면서도 굶지 않고 살아왔으며, 또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농촌공동체는 그 자체가 마이크로 코스모스로 그 공동체내의 
기능만으로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인간적인 공생공존의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촌락공동체의 생리는 그 속에 같이 사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하고 실패하거나 
어렵거나 불행한 삶을 서로 돕는데 시간이나 노력을 아끼지 않게 했다. 따라서 
공동체의 삶이 요구하는 융화될 수 있는 평균인간을 지향하고 그 평균인간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한다.
  만약 유별나게 재능이 많거나, 유별나게 잘되거나, 유별나게 고생하거나, 유별나게 
인색하거나, 유별나게 사치하거나, 유별나게 고매하거나, 유별나게 타산적이거나, 
유별나게 이치를 따지거나 하는 비 평균인간을 거부하고, 싫어하고, 배척한다.
  평균을 벗어나 남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는 그런 인간을 지향하고 교육도 이 
비평균을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베풀어졌던 것이다.
  누군가가 잘되거나 누군가가 잘 살게 되면 배리감을 갖고 그것이 질투로, 그 
질투가 모략과 헐뜯는 일로 곧잘 진전하는 이유가 바로 한국인의 촌락공동체의 
평균인간 체질때문인 것이다.
  모나지 않는 평균인간으로서 공존하고 싶은데 누군가가 그 평균성을 벗어나려 
하면 발을 끌어내려 평균층에 있게 하려는 심리 취향이 곧 시기 질투로 발전한다.
  예부터 한국인을 '독 속의 게 꼴'이라고 비유했다. 오지독 속에 많은 게를 잡아 
넣어두면 제각기 독의 벽을 타고 기어오르려 한다. 그러나 다른 게가 기어오르는 
게를 붙들고 늘어져 밑으로 떨어진다. 독속에서 제각기 기어오르고 붙들고 떨어지고 
하는 반복운동을 계속함으로써 어느 한 마리도 기어나오질 못한다.
  한국인의 집단생활에서 '독 속의 게'현상은 너무나 보편적이고 자연스럽다. 
어려워지거나 불행해지면 서로를 잘 돕지만 누군가가 출세를 하거나 돈을 잘 벌거나 
승진이 빠르거나 하면 숨어서 욕을 하고 흉을 본다. 누군가가 이 비평균 인간을 
헐뜯으면 속으로 시원해지는 카타르시스마저도 느낀다.
  옆집 아이가 우리 아이보다 공부를 잘해도 시기심이 나고 옆집 부인이 비싼 옷을 
입으면 웬지 흠을 잡고 싶어진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심리가 이러한 평균 
인간층의 이탈에 저항을 느끼는 촌락 공동체의 체질 때문인 것이다.
  외국에 이민한 한국인 사회에서도 이 현상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1900년대 초 하와이와 멕시코에 이민했던 한국인들은 계약기간 동안 노예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는 한국 이민을 비롯 중국인, 일본인, 쿠바 인 
등 서로 이웃을 이루고 이민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한국인처럼 상부상조를 잘하는 민족이 없었다 한다. 이를테면 중국이나 쿠바 
이민촌의 경우 누군가가 앓아 누우면 그 사람이 일하지 못한 만큼 그 사람 수입은 
로스가 커진다고 하는데 한국인과 일본인은 누군가가 동료가 앓아 누우면 서로 와서 
대신 일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앓아 눕지 않고 일했던 때보다 작업량이 늘어 수입의 
플러스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곤궁에 빠지고 불행할 때는 세덧의식구조의 작동으로 상부상조하고 
공생공존을 한다. 그러하던 한국 이민이 계약 노동을 마치고 일가를 이뤄 좀 살게 
되면서부터는 서로 헐뜯고 모략하고 고자질하여 서로가 불화할 뿐더러 성공에 
지장을 주기 일쑤였다 한다. 한국 이민들의 자립이 일본인들의 자립에 비해 
30년이나 늦고 성공률도 15퍼센트에 불과했다는 것은 바로 이 이민국가의 외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라 한국 이민끼리의 내적인 조건 때문이었다는 것은 이민 사회에서 
상식화돼 있다 한다. 중동의 기업체 진출도 한국 업체끼리 시기, 질투, 모략하는 
바람에 일을 적지 않게 놓치거나 불리한 조건으로 맡게 되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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