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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불구자를 얕보는 버릇

by Healing New 2020. 9. 26.

  한국에서 오체구족이 아닌 불구자는 도태요소이지만 미국사회에서는 공존요소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다극상 사회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몇 차례 파티에 낙 느낀 것 가운데 하나로 그 파티에 참석한 
신체장애자의 태도와 신체장애자를 둔 비장애자 태도가 우리 한국의 그것과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유별나게 발을 저는 절름발이 학생이 다른 학생들과 어울려 왕성하게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서 있을 수가 없기에 그 절름발이 학생과 의논하는 
학생은 그 앞에 허리를 굽히거나 의자를 끌어당겨 놓고 삿대질을 하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불구자에게 너무하지 않나 하고 비정적인 느낌이 든 것도 어디까지나 
느끼는 자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한쪽 발이 없는 사람은 한쪽 발이 없는 
사람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때문에 파생되는 정서적 플러스 알파가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으로 정신적인 노력은 하고 있는지 모르나 곁에서 
보기에는 결코 한쪽 발이 없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거나 비뚤어져 있지가 
않다. 곧 한국에서처럼 어딘가 어두운 음영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또 이 
불구자와 의논하는 사람도 그 불구라는 것 때문에 핸디캡을 주고 대어들 것을 
대어들지 않고 할 이야기를 삼간다는 법이 없다.
  곧 불구라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에 결부되는 법이 없다. 그 사람의 불구가 
정상적인 사람이냐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냐 하는 가치와 결부되지 않는 것이다.
  오체구족에 가치를 두고 지극히 남다름의 동조사회인 우리 한국에서는 남과 같지 
않은 그 무엇을 지닌 사람은 매우 살기 어려운 일생을 살아야만 한다. 한쪽 발이 
없고, 한쪽 손이 없다는 것으로 정상적인 사회 관계에서 탈락되어 예외시당하거나 
동정을 받거나 한다.
  신체장애자라는 말은 미국에서도 있으나 한국에서 신체장애자란 말이 내포하고 
있는 감각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 한국에서는 손이나 발 하나가 없다는 그 사실을 
초월한 야릇한 감각이 내포되어 있게 마련이다.
  우리 한국에서 신체장애자들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대체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혹시 그런 장애자가 참석하면 그 파티는 그 사람을 동정하고 위해 주는 파티가 되고 
만다. 그 불구라는 것에 항상 마음을 써 주어야 하고 그 마음을 쓴다는 것이 곧 
한국에서의 휴머니즘인 것이다. 한데 그 마음을 쓴다는 그 자체가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회관계로부터 탈락했다는 전제에서 형성되기에 장애자 자신도 유쾌하지 
못하여 슬퍼질 뿐더러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피로하다.
  이처럼 마음을 써주고 동정을 해야 하기에 일상생활에서 가급적 신체 장애자를 
기피하려는 성향이 자연 발생한다.
  따지고 보면 장애자를 위해 주고 마음을 쓰는 것으로써 자신은 친절한 인간이라고 
자기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동정으로 충족시키는 이기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불구 때문에 정상적 사회관계에서 소외된 사람을 동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소외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확인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같은 불구자나 
약자를 둔 동정은 이따금씩 진정이라기보다 위선일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이 사회적 약자는 어디까지나 공존자이지 동정받는 소외자가 아니며, 
그러기에 전혀 열등감이나 비굴감이나 비뚤어진 마음을 갖질 않게 되고, 따라서 
모든 생활 현장에서 여느 사람과 똑같이 자연스럽게 웃고 행동한다.
  팔 하나 없는 아이가 야구 게임에서 투수를 하고 목발을 짚은 아이가 유쾌하게 
포수 뒤에서 심판을 본다.
  생태학에서 생물은 격심한 생존경쟁 끝에 자연도태되어 우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진화론이 있다. 이 진화론을 문화측면에 원용하여 '단극상'이라 한다면 
생물이 어느 공간을 서로 나눠 갖고 그 자신의 공간 한계에 적응해 가며 공존한다는 
반도태의 생태이론을 '다극상'이라 할 수 있다.
  곧 ABCDE...라는 많은 문화인자가 어느 공간에 있게 됐을 때 그 중에서 제일로 
강한 C만이 살아남고 ABDE...는 도태되어 사라져가는 문화생태와 ABCDE...가 
서로 공존하는 문화생태로 대별해 본다면 한국사회가 단극상 사회요, 영국이나 
미국사회가 다극상 사회가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오체구족이 아닌 불구자는 도태요소이지만 미국사회에서는 공존요소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다극상사회이기 때문이다.
  신체장애자 뿐만이 아니다. 영국 산매상들의 다극상은 경탄할 만하다. 이를테면 
같은 상표의 같은 분량의 위스키일지라도 거리나 장소, 가게에 따라 값이 다르다.
  한국 같으면 값싼 가게로 몰려 값비싼 집은 한산하고 장사도 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곧 도태당하는 단극 양상을 보일 것이다. 한데 영국에서는 손님이 값 
차이만으로는 옮겨다닌다는 법이 없다. 손님은 자기가 좋아하는 단골 가게를 정해 
놓고 있고 그 단골 가게에서는 그 손님의 취향을 잘 알고서 그에 맞게끔 서비스를 
하고 있다. 개중에는 3대, 5대, 대대로 그 가게를 단골로 하는 대물림까지 하는 집도 
적지 않다. 
  그러기에 가게는 물건 파는 데만이 아니라 일종의 사교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딴 가게에서 사고 또 줄지어 서 있는데도 가게 주인은 손님하고 한가하게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광경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줄지어 서 있는 
손님이 고함을 지른다는 법이 없다. 오히려 줄지어 서서 한담에 자신도 가담하고 
있다.
  영국 사람들은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기에 단골 담배 집에서는 그 단골 손님의 
취향에 맞추어 파이프 담배를 조제해 준다. 스코틀랜드의 술집에서는 몰트라는 
위스키 원주 통을 놓아두고 그 손님에게 알맞게끔 즉석에서 술을 조제해서 판다. 
그러기에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단골 가게를 바꿀 수가 없게 돼 있다. 산매상들의 
경쟁이나 도태가 있을 수 없으며 아무런 충돌 없이 공존을 하게 된다.
  과자집이나 빵집들도 매일 정해진 분량 이상을 굽지 않는다. 그것이 팔리면 
가게문을 닫아 버린다. 평판이 좋아 잘 팔린다고 해서 우리 한국처럼 대량 생산을 
하고 또 분점이니 뭐니하는 체인스토어로 만든다는 법이 없다.
  근년 영국에 마크 앤 스펜서라는 슈퍼마켓이 탄생 유통구조의 근대화가 되고 
있으나 팔리는 만큼만 만든다는 전통적인 유통구조는 일조 일석에 변하지도 않을 
뿐더러 단골 가게가 그 때문에 망한다는 법도 없다 한다.
  이같은 다극상 상법은 곧 주문을 받아 생산하고 파는 수주생산, 수주판매의 
비중을 크게 하고 있다.
  영국의 책방이 그 좋은 실례이다. 런던에 있는 서너 개의 대형 서점을 제외하면 
영국 책방에 진열된 책의 빈약함에 놀라게 된다. 책방에 책이 적다고 영국 사람들이 
독서를 잘하지 않는 민족으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지루한 겨울의 영향도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독서를 하는 독서 민족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읽고 싶은 
책을 인근 단골 책방에 신청을 하면 책방에서는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에 주문을 
해서 늦어도 2__3주 안에 입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같이 주문받아 책을 팔기에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책을 잔뜩 책방에 꽂아둘 필요가 없다.
  영국이 자랑하는 수주산업으로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롤스로이스는 재고가 없다. 주문을 해오면 그때 만든다.
  돈많은 한 미국인이 롤스로이스를 갖고 싶어 회사에다 그 자동차의 성능을 가르쳐 
달라고 편지를 띄웠다 한다. 한데 회사측의 답장은 'As you like'라는 세마디 
말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곧 롤스로이스는 일정한 성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문자가 어떤 성능을 원하면 그에 맞추어 만들어준다는 수주성을 풍자하는 
이야기랄 것이다.
  이같은 수주산업사회는 경쟁이 없기에 소비자 운동이 상륙하질 못한다. 발붙일 
틈이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다극상사회와 단극상사회의 형성요인은 그 사회가 내 나름의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냐 남 나름의 동조성이 존중되는 사회냐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우리 한국사회의 기본취락단위인 농경촌락공동체에서는 농경에 필요한 오체구족의 
평균인간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평균인간 이상으로 뛰어나거나, 잘나거나 힘이 
세어도 소외요소가 잘 되었고 평균인간 이하도 소외요소가 되었다. 높은 가지는 
바람을 잘 타고 뛰어난 말뚝을 두들겨 박음으로서 평균인간 지향을 하였다. 곧 남 
나름대로 동조하는 것이 가치를 이루었기로 개성적인 요인은 비가치화될 수밖에 
없었다. 재능이 있든 없든 일률적으로 대학에 보내고 개성에 맞든 안맞든 
일률적으로 법과 지망을 한다. 풍토적 특색을 무시, 통일벼를 심게 하고 곧 지방색이 
있는 음식을 버리고 서울 음식을 지방화해 버린다. 남 나름대로의 동조하는 것이 
가치를 이룬다는 이 한국인의 의식체질은 평균문화, 평균인간, 평균가치로 
단일화하게 되고, 따라서 단극상 사회를 이룩하게 되며 개성존중 사회는 
단일평균지향을 거부하기에 문화나 인간이나 가치가 다양화하고 따라서 
다극상사회를 이룩하게 된다.
  이 단극과 다극은 비교문화의 척도로서 외국문화와 다른 한국문화의 본질을 
풀이해 주는 열쇠가 될 뿐 아니라 우리 한국의 앞날을 원시적으로 개선해 나가는데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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