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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신용을 지키지 못하는 버릇

by Healing New 2020. 9. 26.

  한국 사람은 신기한 것을 보면 맨 먼저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 한다. 만져봐야만이 
그 존재가치가 확인되는 이 피부감촉적 사고의 무의식적인 발동 때문이다.

  뉴욕의 관광 코스에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영국 성공회 사원이 꼭 끼어 
있다. 이 사원에 대한 관광안내서를 보면 이 사원이 착공된 것 1775년으로 돼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영조 말년으로 그 몇 년 전에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살해된 
해이다.
  그런데 그때 착공했다는 그 사원이 아직도 준공하질 않고 지금도 짓고 있다고 
안내서에 적혀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은 지가 언제인데 지금까지 준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감각으로는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는다.
  1979년에 우연히 그 사원 앞을 지나다가 그것이 사실인가 알고 싶어 한 번 
들렀던 일이 있다. 2__3백 명의 인부들이 발판을 만들어 놓고 공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감독이 현장에 있기에 물어 봤다. 이 사원 언제 준공할 작정인가고.... 이 
감독은 친절하게 설계도까지 보여주는데, 아직도 지을 공간이 어마어마하게 남아 
있었다.
  '본 계획대로 보면 아직도 80년이 남았다. 한데 내가 설계 변경을 해서 50년 후면 
준공하도록 했다.'면서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해 보이는 것이었다.
  구미의 사원이나 공공건물들은 우리나라 건물처럼 다 지어서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어가면서, 쓰면서, 또 쓰면서 지어간다.
  곧 '점(결과)'을 '선(과정)' 속에 매몰시켜 버린다. 그리고서 그 과정을 확고하게 
하여 날림이나 부실을 배제, 하나의 확고한 자연물처럼 만든다. 유럽의 오랜 
사원들이 어느 부분은 고딕형이요, 어느 부분은 코린트형, 어느 부분은 
로마네스크형으로 복합돼 있는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지어졌기에 일어난 필연이다.
  따라서 과정주의는 날림이나 부실이 용납되지 않으며 결국 위험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결과를 빨리 얻어 누리려는 결과주의가 부실과 날림을 불러들이고 또 
위험을 자초하게 한다. 
  우리 한국인에게 신용이 결핍된 것은 신용이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라 
함이지 결과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곧 신용을 지키지만 이런 강요된 신용은 
자발적인 신용에 비겨 악질일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에 들렀을 때, 나는 여느 서민과 가깝게 접해 보려고 세인트 조지 호텔에 
이웃한 유태인 경영의 세탁소에 민박을 했다. 보름 남짓 민박하는 동안 나는 
한국인과 다른 유태인의 사고나 행동을 적지 않게 관찰할 수가 있었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로 신용을 둔 한국인과 유태인의 차이였다. 이 세탁소에 
단골 손님 아닌 낯선 사람이 오면 유태인 주인은 반드시 다음과 같이 손님에게 
물었던 것이다. '혹시 저 앞에 있는 세탁소에 갈 것을 잘못 알고 이리 온 것이 
아니냐.'고 그 세탁소의 길 건너 블록에 다른 세탁소 하나가 있었으며 이 유태인은 
그 앞집 세탁소 손님인가 아닌가를 반드시 확인한 다음 세탁물을 받았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비록 앞집에 갈 손님이 잘못 알고 찾아 왔을지라도 맞아서 돈을 
벌면 욀 일을 굳이 확인해서 보낼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의 질문은 곧 
한국적인 발상을 대변한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저 사람도 똑같이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오. 사람이 태어날 
때는 그 사람이 평생동안 일할 분량이 정해져 있으며 신으로부터 주어진 일을 너무 
빨리 끝내 버리면 그만큼 빨리 죽게 됩니다." 
  대형 공장에서 드라이 클리닝을 해오는 이 세탁물은 때가 잘 벗겨지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 유태인 주인은 깨끗하게 세탁되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손님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 굳이 돈을 주려 하면 반액만을 받곤 했던 것이다. 
  혹시 이 주인이 출타 중에 이 흠이 있다고 판단된 세탁물을 찾아갔을 경우는 
전표에 적힌 주소를 자전거로 찾아 일부러 돈을 되돌려 준다고 했다. 손에 
구체적으로 잡힌 눈앞의 돈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신용이 유태인에게는 
그만큼 소중했던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 일시성의 돈, 곧 결과가 손아귀에 
들어와 있지 않지만 영속성의 신용, 곧 과정 중 어느 것이 이 유태인의 장사를 
번창하게 할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다.
  보이지 않는 신용을 기업이나 장사의 우선된 자본으로 삼는 사고방식은 비단 
유태인만의 것은 아니다. 수년 전 나는 대만에서 발행되는 "중앙일보"에서 대만에 
있는 각종 고문헌에 대한 정보를 해외에 서비스한다는 학생서국이라는 책방 광고를 
보았다.
  당, 송, 명대에 중국 사람이 한조에 관해 쓴 옛 기록 수십 종의 문헌들이 지금 
대만의 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지 없는지 이 학생서국에 물었던 것이다.
  나는 그 문헌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있다면 복사해 올 심산이었다. 한데 약 석 달 
후에 꽤 두터운 국제 소포 하나가 나에게 배달된 것이다. 펴보았더니 내가 있나 
없나만을 알아봐 달랬던 이 옛 문헌들을 모조리 발굴, 복사해서 보내준 것이었다. 
복사 대금이 280달러라는 간략한 편지와 더불어.... 물론 언제까지 어떻게 보내 
달라는 내용도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복사대금을 내가 떼어 먹고 보내지 않아도 그쪽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어디까지나 한국에 사는 한 자연인으로서 문의한 것일 뿐 그 
학생서국이 인정하는 어떤 기관이나 기구의 보증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외국에 사는 한 자연인에게 아무런 보증도 없이 문헌발굴이라는 힘든 노력을 무료로 
봉사하고 거기에 280달러라는 재력을 아낌없이 쓸 수 있는 이 정신적 자질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생서국이란 대만대학 앞에 있는 겨우 너댓 평의 공간을 가진 
조그마한 책방으로 그 소규모의 기업에서 280달러라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나는 이 
대담한 신용에 매혹을 느끼고 이 책방과 거래를 계속, 무려 1만 달러 어치의 한국 
관계, 중국 관계 옛 문헌을 들여왔는데 수천 달러가 미불인 채 밀리길 여러 번 
했으나 지불독촉 한 번 받은 일이 없었다.
  한국의 기업이나 장사가 이만큼 신용을 폭넓게 또 자연스레 활용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 가고도 남는다.
  이것은 신용에 숙달하고 미숙하고 하는 의식구조의 차원이 아닌가 싶다. 곧 외국 
사람에 비해 한국인은 신용에 숙달하지 못하며 이것은 한국 기업의 신장과 침체를 
좌우시키는 엄청난 인자라고 본다. 왜 한국인은 이처럼 신용에 미숙할까. 결과주의 
이외에 또다른 이유를 들라면 결과주의에서 발상된 피부감촉적 사고를 들 수 있다. 
피부감촉적 사고란 어떤 뭣이건 구체적으로 손에 만져지는 결과에 보다 가치를 두는 
사고다. 바꿔 말하면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가치를 두려고 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람은 신기한 것을 보면 맨 먼저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 한다. 만져봐야만이 
그 존재가치가 확인되는 이 피부감촉적 사고의 무의식적인 발동 때문이다.
  옷감을 사거나 그릇 하나를 사거나 한국 사람은 예외없이 만져보고 산다. 
관광지나 고적지에 가면 문화의 손이 닿는 부문에는 예외없이 사람의 손때가 
반지르르한 데 예외가 없다. 눈으로 복 감상해도 될 것을 한국 사람은 손으로 
만져봐야만이 성이 풀린다.
  플라스틱 인생이란 말도 있듯이 미국 사회는 크레디트 카드만으로 모든 물건도 
사고 밥도 먹으며 비행기도 탄다. 곧 현금이 필요없다.
  한데, 미국에 이민가 사는 장년, 노년층의 한국인은 대부분이 크레디트 카드의 
사용을 거부한다고 들었다. 왜냐하면 생리적으로 맞지 않고, 돈쓰는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작년 가을 미국을 여행하면서 이 한국인의 플라스틱 인생 거부 현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현상도 구체적으로 돈을 만지고 헤아리고 
씀으로써만이 돈쓴 맛이나 가치를 얻는 피부감촉적 사고 때문으로 알고 있다.
  한국인에게 강한 피부감촉적 사고에서는 손에 쥐어지지도 않고 또 보이지도 않는 
신용이 불안하고 가치를 형성하기 힘들다. 그러기에 신용에 미숙할 수밖에 없다.
  흔히들 유럽 사람들은 시각이 발달하고 한국 사람들은 촉각이 발달했다고 한다. 
시각의 발달은 추상적 사고를 발달시키고 촉각의 발달은 구상적 사고를 
발달시킨다고도 한다. 구상적인 것에 가치를 편중시키는 한국인이기에 항상 눈앞에 
있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사리를 먼 눈으로 보지 못한다. 눈앞에 닥친 일은 빨리 
현명하게 잘 처리하지만 조금 멀리 있는 것에 대한 사려나 배려가 부족하다. 신용은 
추상적인 것이면서 미래의 일이기에 한국인의 가치권이나 관심권이나 사려권 밖에 
있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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