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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남이 하니까 나도 하는 버릇

by Healing New 2020. 9. 26.

  남이 하니까 하는 의식은 이 유성에서 탈락되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한 존재에의 
안간힘이기도 한 것이다. 곧 유성의 생활이 철칙이 된 것이다.

  어느 날, 국민학교 5학년에 다니는 아들놈이 전자 손목시계를 사달라고 정식으로 
요구해 왔다.
  평소에 저 하고 싶은 일에 자중하고 먹고 싶은 것 사먹으라고 돈 백 원 주어도 잘 
받지 않던 놈이기에 이 요구가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아이들이 제 욕심을 
말할 때면 나타나게 마련된 아양이나 응석도 없이 정색을 하고 불쑥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 나이에 시계는 필요없다고 타이름으로써 이 요구를 거절했다. 
집에 있을 때는 벽시계가 있고 학교에 가면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 주기 때문에 
너는 시계가 없어도 불편이 없다는 것을 설득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아들놈은 전혀 설득당한 기색이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같은 반의 다른 아이들이 전자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이 정당하고 당당한 
그 이유였다. 처음에는 나의 주장에 동조했던 아내도 이 아들놈의 이유 제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남이 하니까... 이것은 한국인에게 어느 무엇보다도 강한 정당성(legitimacy)인 
것이다.
  어느 물건이나 상황이 갖는 실질적인 가치(value)는 한국인에게 별반 중요하지 
않으며 남이 하니까의 의타성이 한결 우선되고 선행된다.
  나는 겨우 농토 스무 남은 마지기를 짓는 산촌 소농의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평년작일 때 겨우 양식이 되는 불안한 농토를, 그보다 단 한 뼘도 줄일 수 없는 
하한의 땅이었다.
  내가 열여덟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집안 어른들과 더불어 장례를 두고 
상의를 할 때 상여를 마을의 상계에서 쓰는 낡은 것으로 하느냐, 새로 꽃상여를 
만드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집안 어른들은 우리 집 만큼도 못 사는 아무 누구도 꽃상여를 냈는데, 이 가문의 
체통으로 미루어 보아 동네 상여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아마 누구의 장례 때는 만장이 80여 개나 되었으니 적어도 80개는 만들어야 
한다고 집안 어른들이 압력을 넣었다. 만장이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친지들이 
보내주는 일종의 부조이다. 많이 보내 오면 많고, 적게 보내 오면 적을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도 만장의 다과로 가문의 성쇠를 가늠했던 터라 그런 
남의 이목의 노예가 되어 상가에서 돈을 내어 보내 오지도 않은 만장을 대량으로 
위조생산을 했던 것이다.
  객지에 가서 꽃상여를 만드는 기술자를 비싸게 모아 오고, 또 오색 만장의 매스 
프로를 하는 등 하여 우리 집 원래 농토의 4분의 1인 다섯 마지기를 팔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 팔려간 밭두렁에는 내가 태어났을 때 심었던 오동나무 열 그루가 우람하게 
자라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었으며 그 나무로 시집 장가갈 때 농짝을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내나무 습속이 있었던 것이다. 그 내나무가 농토와 더불어 
팔려갔기 때문인지 이 '남이 하니까'의 의타의식에 사로잡혔던 할아버지의 장례가 
더욱 잊혀지지가 않는다.
  시험 볼 때 커닝을 하다 들킨 학생은 대체로 커닝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을 별반 
느낀다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남들도 다하니까 하는 생각이 선점해 있기 때문이다. 
커닝의 정당성이 이미 획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커닝하다가 들킨 사람은 
재수없다고 하여 불운으로 처리를 해버린다. 곧 나쁜 소행이 아니라 재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부정으로 해고당한 공무원들도 예외없이 부정행위가 나쁘다는 
가치기준에서 자신의 해고를 생각한다기보다 불운으로 하니까 하는 정당성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생활 주변에는 이 남이 하니까에 휩쓸리는 소비 패턴이 깊게 뿌리박고 있다. 
어느 소비재의 가치보다 남들이 그 소비재를 사 쓰니까 나도 사 쓴다는 동조성이 
지배하는 소비성향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전기믹서가 선풍처럼 팔리는 어느 시기가 있었다. 야채나 과일을 
갈아주는 전기믹서는 생활의 이기일 수는 있어도, 없다고 해서 못 사는 필수품은 
아닌 것이다. 혹시 식이요법을 위해 특수 야채를 갈아먹어야 할 사람 같으면 
전기믹서는 그 가정에 가치를 형성한다. 그 가치에 따라 믹서를 사면 된다.
  한데 그같은 가치가 없는데도 너나없이 믹서를 사들이는 유행은 바로 남들도 
사니까 하는 동조성에서 형성된 것이다.
  전기밥솥 붐도 마찬가지다. 밥짓는데 편리해서라기보다 남들이 모두 사니까 나도 
산다. 요즈음 바싹 유행되고 있는 수도꼭지에 다는 정수기 붐도 일종의 그런 남들이 
하니까의 심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의식 형성의 요인은 복합적이랄 수가 있다. 한민족은 같은 피부색의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문화를 누려 온 동일종족으로 이같은 동일종족만이 수천 년 
동일문화를 누리며 한 땅덩어리에 살아왔다는 것은 세계적인 분포로 보아 이상에 
속한다.
  이처럼 서로가 같다는 것은 서로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개인주의나 개성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 된다. 곧 유성이 생활의 철칙이 된 것이다.
  남이 하니까 하는 의식은 이 유성에서 탈락되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한 존재에의 
안간힘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농경공동체 사회란 유별나게 뛰어나거나 잘 나거나 
별나게 유능하거나, 또 못나거나, 처지거나 하는 특수성을 거부하고 남 나름대로 
하는 보편적인 유성을 안전기반으로 하여 구축된 사회이다. 높은 가지는 바람을 
많이 타고 튀어나온 말뚝은 두들겨 박음으로써 보편화시키는 가치체계 위에 형성된 
사회인 것이다. 이같은 유성이 남 나름대로의 의식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 있어 소비절약에 역행하는 가장 큰 의식구조 측면에서의 저항과 
반작용은 바로 이같은 남이 하니까 유성에 정당성을 찾는 성향이라고 본다.
  곧 '유'로부터 '개'를 찾고 '동조성'으로부터 '가치'를 찾아내는 지성의 노력이 
소비절약을 원천적으로 정착시키는 오늘을 사는 지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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