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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학력에 집착하는 버릇

by Healing New 2020. 9. 26.

  학력주의 사회와 학력주의 사회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학력이 아니라 학력에 의해 
인간을 평가하는 학력사회적 요인이 우세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있어 학교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외국에 비해 월등하게 크다. 
한데 그 비중은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비중이 아니라 명목상 의미에서의 비중이란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자격은 반드시 고도의 전문적 능력을 
지녔음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대학을 졸업했다는 명목적인 효과가 
효력을 발휘하고 또 크게 작용하는 사회란 점에서 학교 교육의 비중이 커져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 인생 항로의 출범은 대학을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 나왔으면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의해 이미 장래의 방향이나 목적지가 어림으로나마 
결정되는 그런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학력주의 사회와 학력주의 사회를 구분하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학력이 
아니라 학력에 의해 인간을 평가하는 학력 사회적 요인이 우세하다 할 것이다.
  이것이 여러 외국의 학교와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진 우리 학교의 특징이랄 
수가 있다.
  이 학력사회에 사는 오늘날 학생들의 의식구조가 외국의 구조와 달라질 것은 뻔한 
일이다.
  먼저 학력사회의 장단점부터 가려 볼 필요가 있다.
  학력 사회는 장단점을 양쪽에 지닌 양날의 칼이랄 수가 있다. 오늘날 과당 경쟁 
속에 신음하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불행은 이 단점의 면이 크게 가늠하고 있기 
때문이며 장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도 못하고 있다.
  학력 사회의 장점은 누구나 다 학교만 졸업하면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게 인생의 
스타트 라인에 설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가문의 귀천이나 직업의 귀천과 
재력의 다과 등 아이들의 능력에 관계없는 사회적 조건 때문에 학교의 문호가 
제한받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같은 사회에서는 사회적 신분이나 재력에 아랑곳없이 
누구나 부상할 수 있을 뿐더러 일단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문호가 개방된 
사회인 것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이 비싼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어 재력상의 불평등이 격차를 형성시키고는 있지만 원칙면에서는 
재력에 차등을 두진 않고 있는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이 우리나라처럼 교육 기회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이를테면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일레븐 테스트라 하여 중학교에 들어 갈 나이인 
열한 살만 되면 국가 시험을 치른다. 이 시험을 계기로 그 인생이 엘리트 코스를 
밟느냐, 비엘리트 코스를 밟느냐 판가름이 된다. 비엘리트로 판정이 난 소년은 
일찍부터 직업 학교나 직업 전문 학교로 발길을 돌리고 엘리트로 판정된 소수의 
소년들만이 소수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사회의 지도적 인물이 된다. 근래에 와서 
열한 살 된 아이의 능력으로 일생을 판단하는 것이 무자비하다 하여 비판의 소리가 
높지만 여전히 이 차별로써 다수를 걸러내고 소수만을 골라 가르친다.
  그러기에 유럽 각국마다 우리나라처럼 대학이 많지가 않다. 아니 필요가 없다.
  빈부의 계층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구미의 계층 사회에 비기면 우리나라의 
학력 사회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 청소년이 
크게 혜택을 받고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이 곧 학력 사회의 장점이다.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가 붙게 마련이듯이 평등한 자유 개방의 문호 앞에는 
혹심한 학력 경쟁, 수험 경쟁이 따르게 마련이다.
  곧 일생의 경쟁이 학교 시대에 집중되는 느낌마저도 든다.
  국가나 사회가 1년에 요구하는 인재는 국한되어 있는데 그 국한된'사회'를 위해 
1년이면 몇만 대로 배출된다. 이 험난한 경쟁은 대학 입시의 경쟁으로 소급되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이 악순환 속에서 우선 이겨내고 봐야 한다는 의식이 맨 먼저 선행되기에 
경쟁에서 이긴다는 최고의 가치관 아래서 많은 청소년의 의식 구조가 개조되고 
재구성된다.
  첫째, 서두에 지적했듯이 학력을 위해 공부를 하지 않고 경쟁에서 이겨낼 시험 
공부를 치중, 공부를 바로 시험 공부로 오인하게 까지 됐다. 어쩌면 한국의 
고등학생이 세계 어느 나라의 고등학생 보다, 또 예전 어느 시대의 고등학생보다 
공부하는 시간은 많을 것이다. 바람직한 그 많은 시간을 시험 치르기 위한 일종의 
수험 공부이다. 바람직한 그 많은 시간을 시험 치르기 위한 일종의 수험 공부로 
소비한다는 것은 마치 금그릇에다 오줌 받는 격이다.
  더욱이 출제 범위를 교과서에 국한하는 바람에 그 많은 시간을 공부하면서도 얻을 
수 있는 지식 범위는 그 좁디좁은 교과서 범위를 못 벗어난다. 어쩌면 그 공부 
시간을 유용하게 쓴다면 박사 학위라도 얻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현대 청소년들에게 창의력과 정서력을 불모케 했다. 시험 공부란 수단 
공부이기에 창의력을 개발한다든지 정서력을 풍요하게 하는 공부가 못 된다. 
스스로의 인생을 풍요하게 하며 국가 사회에 이바지할 능력이 결여되는 그런 
드라이하고 무능한 인간 공장이 돼 가고 있다.
  셋째, 남을 항상 낙후시켜야만이 내가 선택되는 겹치기 경쟁 사회의 생리 때문에 
남을 보다 낙후시키고 못 되고 잘 안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작용을 하는 악성의 
의식이 도사리게 된다.
  물에 빠진 자에게 손을 빌려주는 인간이 아니라 물에 빠진 자가 내어 뻗은 구원의 
손을 뿌리치는 인간이 돼 가고 있다.
  넷째, 비단 수험 공부가 끝난 후에도 공부하는 목적을 항상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취직을 위한 공부, 고시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 
승진이나 자격을 따기 위한 공부, 학위를 따기 위한 공부만을 한다. 그로써 
상향의식은 충족될지 몰라도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풍요한 자기 계발이나 국가, 
사회, 학술, 예술에의 참다운 기여는 하지 못하는 그런 인간이 되고 만다.
  외국에도 수단을 위해 보다 높은 교육을 받으려는 성향은 있다. 이를테면 국제 
청소년의 의식 조사에서 '학교는 취직이나 결혼에 유리한 수단이 돼 있다.'고 
생각하는 각국별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독 24.8퍼센트, 프랑스 33.4퍼센트, 스웨덴 35.8퍼센트, 미국 35.9퍼센트, 영국 
40.6퍼센트, 스위스 41.7퍼센트, 일본 51.4퍼센트.
  한국에서는 조사한 자료가 없어 비길 수가 없으나 아마 50퍼센트 이상은 될 
것이다. 어쩌면 80퍼센트가 넘을지도 모른다.
  다섯째, 이 경쟁적 학력 사회는 한국인의 의식구조 가운데 비교적 강한 편인 타인 
지향성과 야합하여 보다 타인 지향의 성향을 강하게 하고 있다.
  공부도 하기 싫을 뿐 아니라 공부해 봤자 별볼 일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청소년일지라도 모두 대학에 가니까, 또는 누구도 가는데 내가 안 갈 수 없다는 
타인 지향성 진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진학동기를 물어 본 우리나라의 통계 자료는 더러 있다. 뚜렷한 동기가 없이 
모두들 가니까 간다고 답변하는 율이 조사 대상의 18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여자 
대학생만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는 보다 상승하여 27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전기 국제청소년 의식조사에서도 같은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각국별 비율은 다음과 
같이 거의가 영콤마 이하다.
  서독 0.5퍼센트, 영국 1.0퍼센트, 프랑스 0.6퍼센트, 일본 4.7퍼센트.
  물론 유럽 사람들은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기에 무목적의 행동이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타인 지향의 율이 무시할 만큼 적다.
  남에게 뒤지지 않고 '남도 하는데, 내가....' 하는 의식은 근면성을 유발하는 좋은 
장점도 있다. 그 타인 지향성 의식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번영에 적지 않은 역활, 
작용을 할 것으로 본다.
  이 학력 사회는 한국 청소년들로 하여금 이상과 같은 정상적이지 못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후천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청소년의 의식 변화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많은 부작용을 빚고 있기도 
하다.
  비참한 낙방 수험생의 자살과 좌절은 그만 두고라도 모든 청소년들에게 천금의 
억압을 주고 있다는 것이 첫째 부작용이요, 수험 공부에 소비되는 젊은이들의 
막대한 에너지 낭비가 그 둘째 부작용이며, 그 때에 많은 다른 가능성의 싹이 
잘리거나 시들고 있다는 것이 그 셋째 부작용이다.
  그 결과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단절하는 타인 불신의 불행한 국민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해도 대과가 없다.
  흔히 요즈음 청소년들 사이에 무기력, 무관심, 무책임, 무감동의 사무주의가 
만연되고 있다고들 한다. 그것을 현대 젊은이들의 책임으로 곧잘 돌리고 있으나 
이것은 바로 어릴 때부터 그 순진하고 발랄한 정신에 너무 강한 억압을 가한데서 
비롯된 일종의 정신 이상 증상이랄 수가 있다.
  평등한 개방 사회의 장점도 이 개방 사회의 결점인 학력 사회의 병폐 때문에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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