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줄기 실가닥에 수천 마리, 수십만 마리의 개미 떼가 기어오르려는 양상을
상상해 보면 이 단선상향의 문제성이 완연해진다.
"위를 보고 걷자"는 대중가요가 유행한 적이 있다. 같은 이름의 영화도
히트했었다. "출세를 하라"는 노래도 꽤 유행했었다. 위를 보고 걷자나 출세를
하라는 것이 모두 우리 한국인의 마음속에 잠재된 어떤 의식에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공명을 일으킨 의식을 상향의식이라 한다. 이 세상 누구에게나 자신의 처지를
보다 높이려는 상향의식이 있다. 그것이 없다는 편이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그
의식이 한국인에게 유별나게 강하다는 것, 그 강한 것 때문에 한국사회의 마이너스
요소인 부조리와 부정부패의 소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먼저 상향의식이 강하다는 개연성을 외국인과의 비교로 부각시켜 볼 필요가 있다.
좀 오래된 조사통계이긴 하지만 1966년에 영국에서 실시된 한 식품기업 노동자의
의식조사에 의하면 남자 노동자의 58퍼센트, 여자 노동자의 83퍼센트가 현장감독
자리에의 승진을 거부하고 있다. 감독이라는 직위는 보다 상향된 직위요,
관리직위로서 육체노동을 면할 수 있는 자리다. 한데도 그 상향을 원치 않는
것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별반 흥미가 없다거나 책임이 무겁다는 것이었다.
어느 한 사람 예외없이 감독 직위에 승진하고 싶은 우리 한국인에게는 이해 못할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필자도 영국 여행 도중 리버풀에서 만나 너댓 명의 노동자에게 만약 봉급이
50퍼센트 더 오른다면 뭣에다 쓰겠느냐고 물어 본 일이 있다. 이때 이들의 대꾸는
봉급의 인상은 원치 않고 일을 덜어주어 여가를 늘여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봉급이 50퍼센트 오른다는 것은 경제적 상향을 의미한다. 한데도 그 상향을 원치
않는다. 심신이 감당할 수 있는 지극히 고된 노동조건이 아닌 바에야 우리
한국인이면 경제적 상향을 원하지, 여가를 원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영국
노동자들은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척도에서의 상향보다는 동정스트라이크, 기업간의
임금 격차, 남녀간의 임금 격차에 별난 관심과 정열이 있었던 것이다. 곧 개인의
종적인 상향보다 동료와의 횡적인 연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니스베트는 흔히 써왔던 계급의식이라는 개념 말고
수준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쓰고 있다. 곧 유럽 사람들이 횡적인 수준의식이
강하다면, 한국인은 종적인 수준의식이 강하다는 것으로 구조적 특성을 대비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상향의식이 강하다는 단적인 증거로는 유럽 사람들에 비해 하향을
하지 않으려는 하향억제의식이 별나게 강하다는 것을 들 수 있는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상황이나 사정 또는 환경이 바뀌면 그에 맞추어 자연스레 하향을 한다.
한데 우리 한국인은 이것과 사정이나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하향은 끝내 하지
않으려 하며, 어찌할 수 없이 하향을 하게 될 때에는 처참하고 처절한 심경에
빠지고 만다.
영국이나 서독, 프랑스에서 수상을 했던 사람이 자연스레 장관자리에 앉곤 한다.
수상으로서 장관자리에 하향했다 해서 털끝만한 저항감을 갖거나 처절해진다는 법은
없다.
우리 한국에서 국무총리하던 사람으로 후에 장관을 한 사람은 단 한 분도
없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만하다. 정승 판서를 지냈던 사람이 지금은 비록 끼니를
못 이어 처자식을 굶기는 일이 있더라도, 아니 혀를 모래에 박고 죽는 일이
있더라도 그 하위직인 참판이나 정랑 벼슬에 하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강한 한국인의 상향의식이 원인이 되어 너무나 한국적인 상황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첫째, 한국인의 단선상향을 들 수가 있겠다. 유럽 사람들은 사회적인 신분이
상승한다고 할 때 그에 알맞는 인격적인 지위, 교양적인 지위, 경제적인 지위,
심지어는 신체적인 지위까지도 조화되어 균형되어야 상승이 가능하다. 곧
복선상향을 하여 인격이나 교양은 형편없는데, 돈만 많이 얻었다고 해서 상향한
것도 아니요, 또 아무도 상향했다고 인정해 주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상향이 더디고 무딘 반면에 별반 상향의지가 강하지 않고, 오히려
복선요소들의 조화나 균형을 잡는데 보다 강한 의지를 보인다.
한국 사람은 상향의지가 강하기에 상향이 빠르고 예민한 단선상향을 노린다.
이를테면 금권이나 벼슬보다 인격적인 상향을 중요시했던 우리 옛 선비 사회에서는
오로지 도학에 의한 인격상이란 단선에 집착, 그 밖의 복선들인 돈이나 벼슬을 전혀
도외시한다.
그리하여 누더기를 입고 끼니를 거르며 숟가락도 갖추지 못하여 한 숟가락으로
식구가 돌려가며 밥을 먹어가면서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격적으로 숭앙받는 그런
단선상향을 택했던 것이다.
요즈음 돈버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인간성이나 도덕성, 상식이나 법률을
조개처럼 짓밟고 오로지 돈에 혈안이 되는 것은 단선상향의 단적인 증거이다. 한국
상인들이 해외시장에서 단칼에 큰 돈을 벌 수 있어도 지속적인 돈벌이는 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 단선상향 때문이다. 눈 앞에 있는 돈을 위해서는 신용이며,
인간성이며, 애국심이며, 모든 복선요소를 저버리기에 계속해서 장사를 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한국 업체끼리 해외경쟁입찰에서 덤핑을 하여 서로 손해를 보는 그 잦았던
행위도 이 단선상향성의 의식구조가 원흉인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고질이었던 과외병도 단선상향성이 가장 큰 원흉인 것이다.
우리 한국사회는 어느 한 사람의 인격이나 교양, 재능, 지식, 발상력, 구상력,
창조력, 조화력 등 많은 복선요소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기보다 단선요소, 곧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단선으로 판단하는 성향이 농후하다. 곧
학력이란 단선으로 그 사람의 모든 신분을 결정짓는다. 일류학교를 나오면 수준급의
배우자를 선택, 일류 취직자리가 보장되고 그것은 장래의 안정된 생활과 연결이
된다.
그러기에 일류대학을 나오기 위해서는 유치원부터 '일류'에 다니게 해야 하고, 그
일류라는 단선을 붙들고 기어오르기 위해서는 본래의 인격 함양의 공부와는 전혀
별도의 기어오르기 공부, 곧 수험공부에만 치중하게 되고 그것이 악성의 과외병을
만연시킨 것이다.
외줄기 실가닥에 수천 마리, 수십만 마리의 개미 떼가 기어오르려는 양상을
상상해 보면 이 단선상향의 문제성이 완연해진다.
그 혹심한 경쟁 속에서 서로를 뛰어넘고, 서로를 밀치고 차고 떠밀어 가며
소수만이 가능한 외줄기 상향선 지향을 한다. 그러기에 상향한 소수의
마이너리티보다 상향선에서 떨어져 나간 다수의 메이저리티로 한국 사회의 기층이
형성되고, 그 메이저리티의 좌절감이 마이너리티에의 불신, 불만, 반동으로 고질적인
단절을 이루기에 이른 것이다.
곧 한국 민중의 심리적 저변에는 이 좌절감 보상의 원한이 항존하고 있으며, 이
항존하는 기층심정은 여러 가지 정치, 사회문제에 잠재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인의 강한 상향의식은 자기만이 단독으로 기어오르려는 단독상향의
성향을 농후하게 지닌다. 지금 내가 여러 사람과 더불어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달리다가 그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하자. 침몰 중에 있는 배로부터 나
혼자만이 구제되어 인양되었다면 그것은 나 개인의 상승이동이요, 침몰하는 배
전체가 구제되어 인양되었다면 그것은 내가 소속된 집단의 상승이동이 된다.
일반적으로 구미인과 한국인과의 상향의식이 두드러진 차이는 구미인들이 배
전체를 상승시키려는 단독상향 성향이 강하다.
앞서 영국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위 상향보다 같은 직업이나 집단 동료의
차별대우에 보다 관심을 보였듯이 구미인들의 상향 욕망은 자신까지 포함한 직업,
집단, 계급, 크게는 국가의 지위 향상에 관심을 더 보인다.
한국인은 어떤 직업집단에 소속되면 가급적 빨리 그 직업을 빠져나와 보다 높은
상향 직업에 취업하기 위하여 직업생활을 한다. 술장사를 하는 사람은 그 술장사를
면하고 보다 상향된 다른 직업을 할 수 있는 밑천 마련을 위해 술장사를 한다.
그러기에 일생 동안 만족하고 안주하는 직업이나 직급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직업이나 직급이 보다 상향된 직업이나 직급을 위한 과도기요, 디딤돌의
임시과정으로 일생이 점철되게 마련이다.
한데 집단상향성이 강한 구미인들은 자신이 속하고 종사하는 직업에 집착하여 그
직업인끼리 횡적인 유대를 갖고, 힘을 기르고 그 힘을 이용, 그 집단의 상향을
노린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장의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장의사라는 작업집단의
상향을 위해 조합운동으로 직업 이름인 Undertaker를 Funeral Director로
변경하고 직업조합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으며(1882년), 면허제도를 두어
권위와 자격을 높이는가 하면 (1884년), 드디어는 직업 윤리강령(1894년)까지
선포함으로써 품위를 높이는 집단상향을 꾸준히 해온 것이다.
또한 1914년에는 장의대학이란 전문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의사나 변호사처럼
전문적인 권위직업으로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데 꾸준히 노력해 온 것이다.
초면에 사람을 만났을 때 구미인들은 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만 알면
그만이다. 한국 사람처럼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 것만 알아서는 성이 차질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곧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데, 얼마나 높은 사람이냐, 낮은
사람이냐에 전혀 알려 하지도, 또 관심도, 흥미도 갖지 않는다. 이를테면 저 사람은
우리 회사 제품을 사러온 상사원이라는 것만 알면 그만이지, 상사원인데 평사원이냐,
차장이냐, 부장이냐, 부사장이냐 하는 것은 전혀 알고 싶어하지도, 관심도 없다. 곧
그 사람이 소속된 직업집단이 중요하지, 그 사람의 단독상향치인 직위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
사회학자 네이들은 사회의 역할을, 본역할과 의사역할로 나눠 풀이하고 있다.
본역할이란 사회전체적으로 통용되는 역할 명칭이요, 의사역할이란 그 집단
내부에서 분화되어 통용되는 역할 명칭이다. 이를테면 대학교수라는 역할을 두고
실례를 들면, 교수라는 것은 본역할 명칭이요,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는
의사역할 명칭이다.
구미 사람들은 이 본역할만 알면 족한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의사역할까지
알아야만 성이 찬다.
이것은 곧 한국인의 상향의식이 단독 상향성인데, 구미인의 상향의식은
집단상향성이라는 차이 때문에 형성된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이같은 구조적 특성 때문에 한국인은 같은 동료나 같은 집단사람, 그리고 직위
서열이 같은 사람일수록 무자비하게 짓밟고 모략하고 헐뜯고, 마냥 단독성향만 하려
한다. 종적인 단선을 타고 단독성향을 하기 위해서는 횡적인 복선적 요소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반복과 갈등과 부조리의 원천적 씨앗이 바로 여기에서 싹트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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