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외 정보/버릇

힘없음을 내세우는 버릇

by Healing New 2020. 9. 27.

  무력에의 공감이 한국인에게는 어떤 도덕, 질서, 법률, 권력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 공감을 촉발시킴으로써 한국인은 이같은 가치로부터의 소외에서 
구제받았던 것이다.

  언젠가 택시 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열지어 서 있다가 차례가 되어 택시를 
탔다. 한데 나보다 먼저 앞자리에 올라타는 젊은이가 있었다. 운전사는 아마 일행인 
줄 알았는지 이 낯선 두 사람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앞자리 손님과 뒷자리 
손님과는 시비가 붙을 수밖에 없었고 무법자인 앞자리 손님이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빠져 더 이상 시비를 할 수 없게 되자 이 젊은이는 나는 권력도 
빽도 없는 노동자니까 맘대로 하시구려 하며 자세를 고쳐 눌러앉는 것이었다.
  왜 난데없는 권력도 빽도 없는 무력자를 내세우는지 도시 알 수 없었다. 불법과 
무력은 통하는 것인지 또는 무력이 유력보다 강하고 또 질서나 도덕이나 법률보다 
강하다는 어떤 개념성이 있지 않고는 이 궁지에 몰린 자가 무력으로써 방패로 
삼으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말로써 시비할 수 없는 그런 경지에서 곧잘 이 무력을 내세우는 
버릇이 있다. 이를테면 시비 끝에 육체적인 싸움이 붙기 직전, 싸우는 두 사람은 
서로가 먼저 상대방으로부터의 피해자가 되고자 한다. 예외없이 서로 볼을 내밀며 
'때려?...' '때려?...' 한다. 싸움은 이겨야 하고 이기려면 선제공격을 하도록 하는 
이 
행위는 바로 자신을 무력자로 만들어 육체적으로 피해를 받음으로써 주변 사람으로 
하여금 무력이라는 공감 측면에서 응석을 떨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은 무력이란 공감에 응석을 떠는 버릇이 보편화되어 있다.
  옛날에 산송이라 하여 무덤자리를 두고 가문끼리 싸움이 잦았다. 왜냐하면 풍수를 
믿었기에 무덤자리가 가문의 성쇠와 직결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가문이 
번창하거나 세도가 있거나 또는 벼슬아치가 있을 경우 이 약자의 풍수혈을 압력으로 
빼앗는 경우도 잦았다. 약자의 가문에서 강자와 대결해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최후 수단으로 그 가문의 약자인 부녀자들로 하여금 그 묘자리에 가서 
연좌시키는 일종의 무저항 대결을 하는 습속도 있었다. 개화기 철도 공사 때 이 
공사가 지연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 부녀자들의 잦은 연좌 때문이었다고 한다. 
철로가 난다는 것은 풍수혈을 끊는 행위로 인식했던 당시의 백성들은 이에 
대항하고자 가장 무력한 부녀자들로 하여금 공사장에 연좌시켜 무력항거를 했던 
것이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도 이같은 무저항의 저항을 
행동강령으로 삼았던 것은 적이 한국적이랄 것이다. 33인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고 종로 경찰서에 연락하여 체포해 갈 것을 통고했던 것이다.
  무력에의 공감이 한국인에게는 어떤 도덕, 질서, 법률, 권력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 공감을 촉발시킴으로써 한국인은 이같은 가치로부터의 소외에서 
구제받았던 것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라도 재판관 앞에서, "조실부모하고 사고무친인데 먹을 것도 
없고 동생들은 배고파 울며...." 하고 무력과 약자를 강조할 때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고 또 그에 일단 공감하면 한국의 대중들은 그 흉악범죄를 잊어 버리거나 
용서해 준다.
  신문에 난 범죄자나 사고로 화를 입는 사람 가운데 3대 독자니, 고학생이니, 
고아니, 부모가 병석에 누워 있으니 하는 사적, 이면적인 내용이 보도되고 또 신문 
화제의 요령이 되어 있는 것도 한국적이랄 수 있다. 그런 무력성, 약자성의 보도가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표면적인 보도에서 못 느끼는 인간적 여운을 남겨주기 
때문이다. 외국의 신문에서는 그같은 요소는 사적이므로 취재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리지도 않고 또 독자에게도 공감을 준다는 법이 없다.
  한국인이 인간관계에서 '사정을 한다'는 요소는 굉장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곧 
통사정을 한다는 것은 이치, 도리나 법적으로는 불합리하고 불법이며 되지 않는 
일을 이같은 약자성, 무력성을 강조하여 공감시킴으로써 무슨 일을 용서받고 또 안 
될 일을 해내는 그런 한국적 함수관계인 것이다. 그같은 불합리하고 불법적인 
행위를 미국 사람들에게 통사정했다고 들어먹는다는 법은 없다. 한국인에게 어떤 
요소가 이같이 무력에 응석을 떨고, 그것이 힘을 갖게 했을까. 여러 가지 복합요소가 
있다고 본다. 첫째, 한국인은 아이가 어머니에 의존하고 응석을 부리는 그런 
모성의존적 퍼서낼러티가 강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곧 어머니에의 응석은 사리, 
도리나 법률 같은 이성사회를 초월한 행위다. 서양인이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부성문화라면 한국인은 정실적, 의존적인 모성문화라 그 응석이 실생활에서 무력 
공감에의 응석으로 나타난다. 둘째, 한국인은 가족외적 요소에 침해를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으면 가족 내적요소로 도피하여 구원을 받으려 한다. 셋째, 역사적으로 
한국인은 항상 피해자로 살아온 역사시간이 그렇지 않은 역사시간보다 길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외침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정착된 중앙집권제의 정치가 
백성으로부터 빼앗아만 갔지 돌려주는 것이 없었다는 기나긴 체험에서 약자의식, 
피해자의식이 체질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 약자끼리 공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 피해가 피해자의 잘못 때문이라도 피해자끼리의 공감은 이 
역사적 상황 아래에서 생존의 조건이었기에 이같은 퍼서낼러티가 체질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논리는 관존민비, 관민괴리에도 해당된다. 곧 최소한도 조선왕조의 후기에 있어 
관은 민의 원망의 표적이 된다. 곧 최소한도 조선왕조의 후기에 있어 관은 민의 
원망의 표적이었으며, 곧 최소한도 조선왕조의 후기에 있어 관은 민의 원망의 
표적이었으며, 민은 관으로부터의 피해자라는 의식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에 대한 민의 피해자의식은 곧 민의 피해자 공감력을 강하게 해주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민의 피해자의식에 가장 민감한 악세의 사례를 살펴보자. 종종 2년에 
문약으로 해이해진 병역의무를 바로 잡는 방편으로 병역에 응하지 않는 장정에게는 
병역 대신 1년에 베 두 필을 바치는 군보포제도로 합법화시켰던 것이다. 이 
군보포를 일선의 수령들이 악용, 열여섯 살 이상의 장정으로 국한한 의무 연한을 
갓낳은 사내아이들까지 소급해 받아내는가 하면, 이미 병적에 들었던 자로서 사망한 
자일지라도 병적에서 제적하지 않고 증세를 했던 것이다.(백골포). 그 밖에 
정상적으로 납부한 세미 이외에 수십 가지 부가세가 붙는 것으로 민에 대한 관의 
수탈이 얼마큼 제도화되어 있었는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세미를 서울의 창고에 
옮기는 동안 축이 난다 하여 그 보충미 명목으로 1섬당 3승색을 부가세로 더 
받았다. 이를 가승이라 했으며, 또 덧붙이라 하여 운반 도중 새나 쥐가 소모시키는 
분량을 보충한다 하여 역시 섬당 3승색 더 받았던 것이다. 이 세미를 배에서 내려 
창고까지 들여놓는데 인부 2명의 품이 든다 해서 그 품삯으로 이가미라는 부가세를 
받았고, 또 세금을 거두는 관원의 노고에 인정을 베푼다는 미명으로 인정미라는 
부가세가 또 붙었다.
  이 밖에도 교묘한 명분을 세워 역가미, 진상가미, 책지가미, 수령의 사용전인 
치계미, 치계색락미, 서원고복채미, 신관쇄마가, 구관쇄마가, 심지어는 말질할 때 
말잡이들이 속임수를 써 남겨먹는 그 손실까지 부가미니 타석미니 하여 부가세로 
공식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제도적 수탈 아래서 민의 관에 대한 피해의식은 고질화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공감의 약자의식이 성숙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외 정보 > 버릇'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높은 사람에 약한 버릇  (0) 2020.09.27
완전해야 성이 풀리는 버릇  (0) 2020.09.27
여가를 악덕시하는 버릇  (0) 2020.09.27
외집단에 불친절한 버릇  (0) 2020.09.26
기어오르려는 버릇  (0) 2020.09.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