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완전주의는 그 모든 개성이나 자질을 모두 갖추도록 가르치고 있다.
완전이란 힘들고 어려워 그 '완전'을 성취하기란 역사적으로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남도에서 봄에 피는 진달래꽃을 '참꽃'이라 하고 진달래가 지면서 피어나는
철쭉꽃을 '개꽃'이라 한다. 우리나라 말에서 '개'란 접두어는 개떡, 개살구, 개구장
이,
개차반 등이 말해주듯 진짜가 아닌 가짜 혹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
우선적인 것이 아니라 차선적인 것,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을 뜻한다.
왜 진달래에 '참'이 붙고 비슷한 생김새에 비슷한 빛깔인 같은 과의 꽃인 철쭉에는
'개'가 붙었을까.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철쭉꽃이 진달래에 비해 훨씬 아름답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것이 생명인 꽃이고 보면 '참'과 '개'가 전도돼야 한다. 한데도
진달래가 '참'이 된 이유는 그 꽃잎을 먹을 수 있고 단 술에 빚거나 떡에 빚거나 그
뿌리가 약재로 쓰이는 등 하여, 비단 꽃으로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사람에게 쓸모도
있는 완전한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해 철쭉은 점액질이 있어 벌레를
불러들이고 또 유독하여 사람이 먹을 수 없기에 사람의 공리성 가치판단에서
결격요소가 있는 것이 되며, 따라서 '불완전하기에 개꽃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완전할수록 가치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완전지향의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이보다
아름다운 철쭉에 개꽃이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수년 전 여름 나는 설악산의 설악동 입구 강변에서 야영을 한 일이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면서 강변의 풀밭에서 낮에는 보지 못했던 노오란 꽃이 일제히 피어나
몽환적인 무드에 황홀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알아 보았더니 해가 지면서 피고
새벽녘에 다무는 달맞이꽃(월견초)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꽃에 흥미를 갖고
식물도감도 찾아보고 고문헌도 뒤져보고 했더니 '개달맞이꽃'으로 돼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에서는 이 꽃이름이 '야리향'으로 돼 있으며, 꽃이 피면서
아주 특수한 방향을 풍기기에 그같은 이름을 얻었다 했다. 그래서 규방이나
기방에서는 이 야리향 화분을 창가에 두어 그 방향으로 로맨스 무드를 돋구는 것이
풍류가 돼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후 설악산에서 등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한국의 야리향에서 방향을
맡아 보고자 여러 번 달밤에 방황을 해왔지만 방향은커녕 지린내 같은 악취가 날
뿐이었다. 야리향이란 예쁜 이름이 전달되지 못하고 개달맞이라는 차선적이고
불완전한 이름이 붙어 있는가를 이해할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외국인이 한국이나 한국인에 관해 쓰는 글들을 유심히 찾아 읽는데 그
가운데 그들이 이질적으로 생각하는 한국인의 공통요소로서 이 완전지향을 실감할
때가 많다. 이를테면 어느 한 미국인은 어느 한 미국인은 한국에서 옷을 아주 싸게
사입는 방법으로 바지 저고리를 한꺼번에 맞추어 사지 말고 따로따로 사면 된다고
그의 체험을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하면서 쓴 것을 본 일이 있다. 분명히 원세트로
한 벌 사입는 돈과 아이비 룩으로 바지 저고리를 따로따로 사입는 돈과는 큰 차이가
난다. 같은 옷 한 벌인데 원세트의 완전주의적 요소가 내포되면 값이 비싸고
빛깔이나 디자인이 각기 다른 불완전주의적 요소가 내포되면 값이 싸지는 이유는 곧
한국인의 완전성향이 빚어 놓은 경제현상인 것이다. 옷 한 벌 해준다는 그런 공여의
가치형성은 원세트로 완전하게 해야지 가능한 것이고 피공여자의 필요나 기호에
따라 바지만, 또는 저고리만 해준다 할 때 그 공여가치는 반감하게 마련이다.
외국인이 쓴 체험 가운데 한국에서는 가구점에 가 자기 마음에 맞는 의자가
있어도 그 하나만은 살 수 없으며, 또 책방에 가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책이 있어도
그 한 권만을 살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도 있었다. 아마 의자의 경우
테이블 하나에 의자 너댓 개가 일조가 된 세트세일이요, 책의 경우 전집의
세트세일인데 어느 하나만 달라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외국에도 세트세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한국처럼 왕성하지는 않아 아마 부엌세간살이 일습까지도
세트세일하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뿐이 아닌가 싶다. 더욱이 한국의 전집 붐은
외국인에게 적이 이상하게 보이는 문화양상 가운데 하나다. 이같은 세트세일이
한국에서 판치는 것은 완전을 추구하는 의식구조의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면에서도 이 완전주의가 판친다. 사람에게는 개성이 있고 자질에도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으며 또 사회에서는 이 천차만별의 개성이나 자질을 골고루
요구하고 있다. 한데 한국의 완전주의는 그 모든 개성이나 자질을 모두 갖추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를테면 각급 학교에서 주는 우등상이란, 모든 과목을 모두 잘한
학생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개성과 자질에 맞는 어떤 과목 하나만 잘했다 해서
우등상이 주어진다는 법은 없다. 이에 비해 프랑스의 학교에서는 수학의 우등상,
라틴 어의 우등상, 미술의 우등상이 따로따로 있고 또 용기의 우등상, 협동의
우등상, 엘레강스의 우등상도 있다. 곧 완전주의가 아니라 개성주의다. 그러기에
프랑스의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개성과 자질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개성과
자질의 개발에 스스로가 역점을 둘 뿐 아니라 학부모나 선생들도 그 개성과 자질
개발에 주력을 한다.
구미에 있어 진학할 때 내신제가 갖는 비중은 꽤 크다. 한데 이 내신제는
한국인이 생각한 것처럼 전체 성적의 순위가 아닌 것이다. 내신제가 갖는 장점은
바로 이 종합성적의 우열이 아니라 그 학생의 개성과 자질이 상세히 전달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 자질이 지적으로 단련되어 그 자질을 요구하는 사회의 수요에
응해 그 역할을 다 한다.
지난 학년말에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평균 12종 이상의 각기 다른 상이 있고
최고로 상을 많이 주는 학교는 25종의 상이 있었다는 보도를 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개성을 중요시하는 시상제가 베풀어지고 있구나 생각했었다. 그런 선입감을 갖고
그 기사를 읽어내리는 도중에 여전히 완전주의를 탈피 못하고 있구나 하는 배신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상의 종류가 많은 것은 개성이나 자질별로 시상을 해서 많아진 것이 아니라
시장상, 교육감상, 교육구청장상, 학교장상, 육성회장상,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상
등 온통 유지상으로 상의 종류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 역시 종합성적순에 의한다지만
사정에 쏠려 시상하고 있음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한국인의 완전주의는 그것이 작동되는 경우나 부문에 따라 효과적인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병폐로서 작용하는 경우나 부문도 많은 것인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병폐로서 작용하는 경우나 부문도 많은 것이다. 완전이란 어렵고 힘들어 그 '완전'을
성취하기란 역사적으로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불완전한 것으로 그치느니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 편이 한결 가치를 형성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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