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부인은 사장의 부인일 뿐이지 회사의 서열과는 전혀 관계없는 직위에 있다.
한데도 남편의 직위인 사장에다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사장이 누린 권위를
사원이나 사회에다 누리려 한다.
체호프의 단편소설에 "관리의 죽음"이라는 게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반 체르
비야코프는 회계검사원이라는 하급관리다.
이 이야기는 이 하급관리 이반이 영화구경을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구경하는
도중 이반은 크게 재채기를 한다. 재채기는 일종의 생리현상으로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것이기에 많은 관중들도 이 이반의 재채기에 별반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한데 재채기를 하고 난 이반은 바로 제 앞줄에 앉아 있는 분이, 황제가 직접
임명한 운수성의 칙임관인 고급관리 브리스쟈로프임을 알게 된다. 이반의
재채기에서 튀어나온 침이 이 브리스쟈로프의 대머리까지 튀어나간 사실을 두고 이
하급관리는 고민을 한다.
물론 이 고급관리는 이반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이반이 아무 말도 않고 있었으면
아무렇지도 않다. 한데 어딘지 꺼림칙한 이반은 이 고급관리의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매우 죄송하게 됐다고 사과를 한다.
극장에서 집에 돌아온 이 소심한 이반은 유쾌한 것 같지 않은 칙임관의 표정이
맘에 걸려 우울해진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상의를 한 끝에 이튿날 이 칙임관의
사무실을 찾아가 어젯밤에 재채기를 한 것은 별다른 악의가 있어서 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 이 집요한 사과에 울화가 치민 칙임관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돌아가 버려!" 하고 호통을 친다.
이반의 눈앞은 캄캄해진다. 집에 돌아가 소파에 앉아 있는 자세로 절망 끝에 죽어
버린다.
이 단편은 관료사회의 지위(status)에 대한 억센 서열의식을 풍자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그같은 재채기 때문에 죽기까지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 억센 지위의
서열에 대한 감각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공통된 감각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본다.
사람과 사람을 서열적으로 견주어 볼 기준은 수백 수천 무한정으로 많다.
이를테면 인물이 잘생기고 못생기고의 기준, 학력이 높고 낮고의 기준, 마누라가
예쁘고 밉고 하는 기준, 자식놈의 재주가 좋고 나쁜 기준 등....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에 비해 어떤 기준에서는 서열이 높고 어떤 기준에서는 서열이
낮기도 하다.
관청이나 기업에서 직위가 높고 낮은 것은 그 많은 서열기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한데 우리 한국인은 직위의 기준을 많은 서열기준 가운데 평등한
하나로 여기지 않고, 그 많은 서열기준에서 가장 우선되고 다른 많은 기준을
압도하는 절대기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데서 적이 한국적이다.
곧 직위는 한국인에게 있어 one of them이 아니라 all of them인 것이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학식도 높고, 인격도 높으며 돈도 많고 아이들도 보다
행복하다고 약간씩 착각을 하고 있으며, 직위가 높은 본인도 직위가 낮은 다른
사람에 비해 모든 다른 서열기준에서도 자기가 높다는 약간의 착각들을 지니고
있다.
이같은 직위에 자기 인간의 모든 것을 동일시하는
아이덴티피케이션(identification)이 한국인에게 유별나게 강하다.
이를테면 캐딜락을 모는 운전기사는 그 고급 승용차에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
완행하는 소형차를 추월하면서 캐딜락 운전기사는 차창을 열고 그 소형차를 모는
사람에게 일갈을 하는 광경을 곧잘 보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동일시성향의
발로인 것이다.
이를테면 사장 부인은 사장의 부인일 뿐이지 회사의 서열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런
직위에 있다. 한데도 남편의 직위인 사장에다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사장이
누린 권위를 사원이나 사회에다 누리려 한다.
한국 사람이 고급 좋아하는 것도 바로 그 고급품에 자기 자신을 동일화하려는
의식구조의 소치라고 본다. 보다 고급 승용차를 탈수록 그 고급 승용차가
나타내주는 어떤 사회적 직위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 오메가나 로렉스를 참으로서
그 고급 시계가 제시해 주는 어떤 보다 사위의 직위에 동일화하고, 루이뷔통의
핸드백을 들고 가르댕의 스카프를 둘러씀으로써 그 고급 외제품이 암시하는 어떤
직위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
일류학교에의 과열지망도 일류학교가 지닌 어떤 사회적 직위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화하려는 성향 때문일 것이다.
한말에 안동 김씨 세도는 유명하다. 심지어 김좌근, 김병국 등 세도가들이 문을
맞대고 살았던 교사동에는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뇌물의 짐바리와 수레로 꽉 찼다
한다.
빨리 바치고 돌아가야겠기에 급행료를 물어야 한다. 급행료는 그 세도가의
고직이나 집사 등 하인들이 받는 다. 심지어 이 세도가들이 타고 다니는 말에게까지
향응을 베풂으로써 아부를 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교사동 고직이 세도'란 속담이 생겼으며 '교사동 나귀와 말은 밀과와
약식도 마다고 한다'는 원한의 노래가 퍼지기까지 했다.
곧 안동 김씨 세도에 그 하인과, 나귀나 말까지 아이덴티파이를 했던 것이다.
한국인이 직위만 높아지면 모든 다른 지위도 아울러 높아진다는 착각은 이같은
한국인의 의식구조 가운데 하나인 동일화성향 때문인 것이다.
한국의 웃사람은 직책상의 웃사람일 뿐 아니라 모든 사사까지 웃사람이기에
상사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상사에게는 모든 서열기준에서 자신이 상사만 못하다고 비하하고 살아야
하며 상사보다 좋은 집, 좋은 차, 고급오락, 고급시계를 차는 불손감을 갖는다.
상사의 집에 아내를 보내어 김장을 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바치는 일종의
아부행위도 상사 직위 아래 자신이 놓여 있는 그런 하위 지위의 확인행위인 것이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은 곧 한국에 있어 모든 자기의 스테이터스를 직위의
아래에 사장시키는 그런 죽음의 풍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같은 직위지상주의의
탈피야말로 민주주의의 토착화와 밀접한 함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사람은 얼굴이 다른 만큼 개성과 재능과 가능성이 다르다. 그 차이만큼 서열을
따질 기준도 많다. 그 무한량의 수많은 기준을 직위 아래서 부활시키고 그런
지성적인 용기가 현대의 한국인에게 한국사가 요구하는 역사적 사명이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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