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은 내집단 둘레에 큰 성벽을 쌓고 외집단으로부터 침해나 간섭이나
관여를 거부하려 든다. 서비스는 외집단에서 내집단에 작동하는 최초의 관여란
점에서 한국인에게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흔히들 한국인은 서비스를 할 줄 모른다고 한다. 서비스를 할 줄 모를 분더러
서비스를 받을 줄도 모른다. 할 줄도 모르고 받을 줄도 모른다는 이 두 가지 속성이
상승하여 더욱더 한국인으로 하여금 서비스에 미숙하고 서툴게 해왔다.
어떤 것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서비스에 미숙하게 했을까. 그 이유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 세상에는 나와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과 나와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내집단이라고 하고, 내가 알고 있지 않는 남을 외집단이라고
한다.
세상은 나라나 민족에 따라 이 내집단을 대하는 것과 외집단을 대하는 것이
일정치가 않다. 유럽이나 미국 사람 또는 중동 사람들은 예부터 유목이나 상업 같은
낯선 사람과 주로 접하는 이동성 생업을 영위해 온 때문인지 나와 잘 알지 못한 남,
곧 외집단에 속한 사람들도 남이 아니라 예비친지로서 친밀감을 갖는다. 외집단의
친밀감이 한국 사람보다 한결 강하다. 이에 비해 서로 아는 친지들끼리만 한 마을에
폐쇄되어 평생을 정착성 생업을 영위해 온 우리 한국인은 외집단에 속하는 남들은
일단 불신을 하고 적대하며 나를 해칠 사람으로까지 경원시한다.
바꿔 말하면 낯선 사람과 만났을 때 서양 사람들은 친화성이 작용하는데,
한국인은 상반성이 작동한다. 서비스란 낯선 사람 사이에 오가는 친화성의 언동이요,
사인이며 제스처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 서비스가 서툰 이유가 자명해진다. 낯선 사람에게 퉁명하고
불친절하며 가급적 무관, 무심하려고 하는 정신체질에서 서비스가 성숙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은 나의 내집단 둘레에 큰 성벽을 쌓고 가급적 외집단으로부터
침해나 간섭이나 관여를 거부하려 든다.
서비스는 바로 외집단에서 내집단에 작동하는 최초의 관여란 점에서 볼 때
서비스는 한국인에게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버스 속에서 한 여학생으로부터 자리를 양보받고 앉았다 하자. 버스
안에 서 잇기가 괴로울 만큼 늙었거나 건강이 나쁜 경우라면 이 여학생의 서비스
또는 친절이 무척 고맙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고마워야 할 그
서비스나 친절이 차라리 주어지지 않은 편이 보다 맘으로는 편했을 것이라는 불편한
느낌이 수반된 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서비스를 받고도 불편하고 부담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나의 내집단에
남(타인)이라는 외집단의 침투를 억제하려는 자연적인 심리의 반동 때문인 것이다.
외집단에 이토록 미숙한 우리 한국인은 내집단 사람에게는 외국 사람이 흉내도 낼
수 없을 만큼 친밀감을 갖는다. 내집단 사람에게는 이해도 초월하고 타산도 하지
않는다. 내집단에 속한 사람 때문에 내가 약간의 손해나 불편을 당해도 별반 짜증도
나질 않고 배가 아프지가 않다.
곧 서비스나 에티켓이나 예의 같은 별반 친밀도가 약한 사람 사이에 오가는
관계매체를 이 친밀한 내집단 사람 사이에 적용한다는 것을 오히려 불쾌하고
섭섭하게 여긴다. 어느 가게 주인이 나와 잘 알고 있는 사이라 하자. 그 가게에
내가 들어갔을 때 그 가게주인이 나와 잘 알고 있는 사이라 하자. 그 가게에 내가
들어갔을 때 그 가게주인이 어느 낯선 고객 대하듯이 '안녕하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뭣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서비스 용어를 늘어놓았다고 하자. 우리 한국
사람은 한 사람 예외없이 서비스를 받았다고 유쾌하기는커녕 기껏 형성시켜 놓은
친밀감을 저해시키는 소원감과 섭섭한 마음을 갖게 마련일 것이다.
그래 서비스고 뭐고 아무말 말고 그 아는 사람이 가게를 찾아온 어떤 가능성을
눈치로 알아차리고 그것을 알아주는 것에 오히려 친절감과 친근감을 가중시켜 준다.
곧 서비스가 서비스 효과를 내질 못하는 내집단 사회에서 자라온 한국 사람이기에
서비스 감각이 발달할 수 없는 것이다.
서비스 풍토가 성숙하지 않는 다른 이유로서 서비스가 가장 왕성하게 기생할
상업관행이 우리나라에 미약했고 또 사농공상이라는 전통적 직업 관념이 말해주듯
상업은 천대받는 직업이었다는 점에서 서비스가 기를 펼 어떤 역사적 여건이 돼
있지 않았음을 들 수가 있다.
우리 선조들은 주로 필요에 의한 물물교환이었기에 그 사이에 거간꾼만 끼면 됐지
서비스 따위는 개입할 수도 개입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서비스에 대한 계급적인
하위개념이 생겼으며 서비스는 아쉬운 사람이나 계급적으로 아랫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됐으며 지금도 그같은 인식은 예외가 아니다. 구미에서는 서비스를
하는 사람이나 서비스를 받는 사람 사이에 서열적 고하 없이 평등한 수평관계에서
주고받기에 서비스를 받는 사람은 그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할 줄 안다. 비록 그
대가가 고맙다는 말 한 마디요, 웃음띤 표정을 지어주는 단순한 것일지라도 기브 앤
테이크의 평등한 교환 이론에서 응분의 대가를 한다. 이에 대해 우리 한국 사람은
의당히 그래야 하고 또 당연하게 받을 사람으로 자신은 당연시하고 서비스에 대한
반례를 하지 않는다. 반례는커녕 오히려 처음 본 사람인데도 반말을 지껄인다.
이토록 서비스를 받을 줄도 모른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내집단 사람끼리 살아왔기 때문인지 말을 통해
자신의 요구나 필요를 전달하려 하기보다 상대방이 눈치나 통찰이나 정보를 통해
자신의 요구나 필요를 알아주길 바란다. 곧 어린애들이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려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듯이 한국의 고객들은 가게에 들어와 '왜 있잖아....'
'그것 몰라?'하는 식으로 가게주인에게 알아주기를 원한다.
한국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뭣인가 알아주면 어린애처럼 친밀감을 갖고 접근한다.
고객의 신분이나 가족상황을 알아서 촉발해 주면 더욱 좋고, 그 사람의 차림새나
용모나 식견을 좋은 관점에서 알아주어도 좋다. 그 사람이 지닌 시계나 넥타이나
옷차림이 유명 메이커의 것이면 그것을 알아주어도 좋아라 하고, 또 그 손님의
의중에 기호나 성향을 알아주어도 좋다. 곧 서비스받기에 서툰 한국인에게 하는
서비스는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언사나 굽실거리는 인사보다는 통찰에 의해 알아주는
그래서 응석을 충족시켜 주었을 때 가장 서비스 효과가 상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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