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외 정보/버릇

지름길을 좋아하는 버릇

by Healing New 2020. 9. 27.

  순리란 어떤 사물의 일부분과 그 일부분을 포함한 전체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또 
세부적인 일을 할 때 그것이 내포된 전체를 머릿속에 그리는 감각이 바로 
순서감각인 것이다.

  연전 어느 가을철에 미국의 동부를 자동차로 가로지르다가 공업도시인 
맨체스터에서 폭설을 만났다. 가벼운 옷차림이었기에 방한복 하나를 사입고자 
옷가게에 들렀다.
  진열장 속에 갖가지 디자인과 여러 색깔의 방한복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빛깔과 디자인으로 된 것을 골라 아가씨에게 꺼내 달라고 했다.
  한데 이 아가씨는 꺼내 줄 생각은 않고, 나의 몸 사이즈를 물었다. 몸이 크다는 
것만 막연하게 알고 있을 뿐 내 몸 사이즈가 얼마나 되는지, 더욱이 미국 사이즈에 
상식이 없는 나로서는 확답을 할 수가 없었다. 확답을 하지 않은 데는 한국에서처럼 
입어 보면 될 것을 까다롭게 군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사이즈를 원합니까? 속에 우모가 든 것을 원합니까? 인조견이 든 것을 
원합니까?"
  질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겉감이 자연면, 혼방, 나일론으로 세 종류가 있는데 어떤 것을 드릴까요? 폭설이 
내리는데 혹시 방수된 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까다롭게 묻는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한국인은 겉으로 나타나는 
감각적인 부분, 즉 빛깔이나 모양새만 보고 물건을 사려고 들기에 사이즈라든가 
옷감의 질 같은 실용가치 면에서는 등한해지기 쉽다. '색을 보는 자는 형을 보지 
않는다'는 공맹의 철리에도 있듯이 어떤 사물의 필요성이라든가 실용도를 우선해서 
고려해야 할 경우에 대체로 한국인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먼저 
생각하는 폐단이 있는 듯하다.
  맨 먼저 몸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그 옷의 내구성과 
방수성은 어떤가를 따져 보고 나서 빛깔이나 디자인 같은 감각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순리인데, 선택의 순서가 거꾸로 소급되는 우리들의 이러한 심성을 지름길 
의식이라 부르기로 하자.
  따지고 보면 물건 하나 사는데에 작용하는 지름길 의식은 별 문제가 없다 해도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한 일을 실행할 경우 지름길 의식 때문에 순서가 뒤바뀌게 
되면 그 일은 엉망진창이 된다.
  이를테면 마이홈을 갖고자 수십 년 저축 해 온 한 봉급생활자가 교외에 싼 대지가 
나왔다 하면 먼저 사놓고 본다. 아직도 그 개발지에는 도로도 나 있지 않고 상, 
하수도 시설도 돼 있지 않지만 '사람 사는 곳인데 어떻게 되겠지.' 하고 이리저리 
변통하여 집짓는 일을 서둔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무계획적으로 집을 짓고서 
도로를 내고 상, 하수도 시설을 설치하느라 길은 구절양장이 되고 월례행사처럼 
길바닥을 파헤쳐야만 한다.
  물론 신개발지라 해도 도시계획이 선행되어 도로가 먼저 되고 공공 시설이 들어선 
연후에 집이 들어서야 하는데, 한국인의 지름길 의식은 그 순서를 거꾸로부터 
시작해 소급해 오곤 한다.
  2차대전 이후 전쟁으로 폐허화된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에는 단 한 채의 
바라크(판잣집)도 들어서지 않았었다고 한다. 낡은 폐허에서 은인자중하길 10년, 
15년, 고생스러움을 참으면서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항만, 공장, 주택 순으로 
재건하기 위해 '지름길 부흥'을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 인내 끝에 지은 집들은 
당연히 앞으로 수백 년 갈 만큼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들이었다고 한다.
  절경인 마터호른이 우러러보이는 스위스의 관광지 체르마트에서는 빈 터가 
생겼다고 해도 이 마을 사람들의 합의가 없이는 주인이 맘대로 매매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자동차 출입도 통제하는 이 조용한 마을에 요란스런 미국식 고층 
호텔이 들어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배려가 도시 조성에 합당한 순리일 
것이다. 한데 한국인의 지름길 의식은 마치 황무지나 밀림을 개척하고 집을 
짓는듯이 불도저식으로 도시 조성을 해온 것이다.
  순리란 어떤 사물의 일부분과 그 일부분을 포함한 전체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또 
세부적인 일을 할 때 그것이 내포된 전체를 머릿속에 그리는 감각이 바로 
순서감각인 것이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이 '전체 속의 부분 감각', '부분 밖의 전체 
감각' 이라는 순서의식에 대체로 미숙하다.
  이 순서의식의 미숙이 지름길 의식을 유발하고 있으며 이 지름길 의식은 여태까지 
우리 사회에서 저질러져 온 부정부패, 부조리의 온상이 되어 왔던 것이다.
  지름길 의식이 빚는 폐단은 공공질서의 문란에서부터 뇌물을 주고 받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국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줄 서서 못 기다리는 행렬기피증은 세계적이다. 영국 
사람은 혼자 있어도 줄을 선다. 기차표 사는데 줄 서는 것쯤은 우리나라에서도 
상식이 되어 있지만 홈에 들어가 그 수많은 열차 문전에서까지 줄을 서는 국민이 
바로 영국 국민이다. 홈에 올라서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영국 노인이 뒤에 
와서 서면서, "Af-ter you sir"한다. 'After you sir'란 인사말도 되지만 다음 
차례의 권리는 내가 확실히 보유한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다.
  사실 구미의 소문난 관광지에 들어가려면 보통 2__3시간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것이 상식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그만큼 기다려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돌아설 것이다. 약은 사람은 새치기를 하던가, 권력 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름길을 모색할 것이다.
  공공질서의 행렬은 눈에 보이는 행렬이지만 우리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한 
행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테면 돈을 버는 것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스텝 바이 스텝으로 서서히 바탕을 
다져가며 벌어나가는 것이 원칙인데도 이 지름길 의식은 그렇게 순서대로 버는 것이 
바보같이 뒤쳐진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 그리하여 분에 넘게 남의 돈을 빌리고 
은행돈을 끌어대어 투기를 하는 등  지름길 성금을 노리는 모험을 한다. 지름길과 
부정부패 부조리와는 바로 종잇장의 표리관계로 사촌간임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집단 내에서의 지위향상에도 지름길 의식이 왕성하게 
작용한다. 차근차근히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다져가며 사다리 오르듯 한칸 한칸 
순서대로 오르려 하지 않고 위선과 시기와 모략과 전시효과 그리고 아부와 뇌물 
등등... 모든 악의 요소를 동원하여 사다리를 두 칸 세 칸씩 뛰어오르려 한다.
  한국인의 이 지름길 의식을 어떤 방법으로 없애 나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앞날이 
희망적이냐 절망적이냐로 결정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줄 안다.

'그외 정보 > 버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치병  (0) 2020.09.27
중원문화에 맹종하는 버릇  (0) 2020.09.27
자조하는 버릇  (0) 2020.09.27
높은 사람에 약한 버릇  (0) 2020.09.27
완전해야 성이 풀리는 버릇  (0) 2020.09.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