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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사치병

by Healing New 2020. 9. 27.

  인간욕구의 발전에 경제적 뒷받침을 한 것이 에이브러헴 머즈로다. 농업화 
사회에서는 생리 욕구가, 공업화 사회에서는 소유욕구가, 탈공업화 사회에선 존재 
욕구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열등감 보상위해 소유욕이
  아무리 세계적인 블루 진 시대라 하지만 귀밑머리가 흰 나이에 블루진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쯤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데 연전 미국 여행중 별나게 
맘에 들었던 진 바지 하나를 샀다. 그것은 바짓가랑이 위아래 부분의 빛깔이 볕에 
바랜듯이 좀 다른 짝바지였다. 이 짝바지를 입고 다니고자 산 것만은 분명히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특정의 물건에 대해 편집적인 소유욕이 발동하듯 나에게는 바지 
소유에 대한 편집증이 있어 왔으며 그 그지없는 병적 소유욕이 그것을 사게 한 
것뿐이다.
  오랜 전쟁으로 먹고 입는 기본적 욕구마저도 충족 못 시키고 살았던 광복 직후, 
중학교 입학생이었던 나는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위아래로 깜장 새 제복을 맞추어 
입을 수 있을 많나 처지가 못 되었었다. 일제 때 배급받은 국방색 반바지에 
광목베로 바지통을 달아내어 깜장물을 들인 것이 내 인생의 첫 제복이었다. 
일주일도 못 가서 빛이 바래기 시작, 이을목의 위아래가 완연하게 드러난 짝바지, 
그래서 '짝바지'란 별명까지 얻었던 그것이 나의 바지 편집증의 심리적 요인이 
아닌가 싶어진다.
  더욱이 사춘기인데다 남녀공학을 하는 학교였기로 짝바지 열등감을 감소시키고자 
짝바지 이을목에 검은 잉크칠을 했다가 비를 맞아 짝바지에 줄무늬까지 얼룩졌던, 
그래도 그 바지를 요 밑에 깔아 주름을 잡았던 일들이 골수에 사무쳤고 그 고농도 
열등감의 보상으로 야기된 소유욕이 늙도록 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 생리 욕구를 충족 못 시키는 어떤 상황에 처했던 사람이나 나라일수록 
반비례해서 소유욕은 그지없이 커간다고 한다.
  1978년도에 13개 선진 국민들의 가치관을 비교 조사한 것을 보면 2차대전에 
잿더미가 된 서독과 일본 사람의 소유욕이 13개국 평균치보다 갑절이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다.
  직접 비교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2차대전과 6.25전쟁으로 연거푸 기본적 생리 
욕구마저도 무참히 짓밟혔던 피해 민족인 우리 한국인의 소유욕은 병적으로 비대해 
있을 것은 예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거기에 우리가 처해 있는 경제구조의 발전 단계가 복합되어 소유 중독증세를 
보이기까지 하고 있다.

  스스로 선비층에서 소외시켜
  연전에 작고한 에리히 프롬은 그의 "산다는 것"에서 사람이란 먹고 살 수 있는 
생리 욕구(to love) 단계에서 재산이나 지위, 권위의 소유 욕구(to have) 단계로 
발전하고, 다시 소유는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 그치고 정신적인 
흡족과 기쁨을 누리려는 존재(to be) 욕구로 발전한다 하고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의 가치는 소유 인간에서 존재 인간으로의 발돋움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 인간 욕구의 발전에 경제적 뒷받침을 한 것이 에이브러햄 머즈로다. 농업화 
사회에서는 생리 욕구가, 공업화 사회에서는 소유 욕구가, 탈공업화 사회에선 존재 
욕구가 발생하게 마련이라 했다.
  이 논리에 오늘날 한국인의 욕구 단계를 가늠해 보면 농업화 사회에서 공업화 
사회로 옮겨가는 도중이기에 소유 욕구가 가장 왕성하게 작동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아파트 평당 단가가 1백80만 원이나 치솟았다 하여 사회적 물의가 일고 있는데 
문제는 고단가보다 고단가를 유발하는 주택 사치에 투영된 한국인의 그지없는 
소유욕에 있다고 본다.
  한국인의 주택 사치는 우리 역사상 분명히 근간의 일이며 경제구조의 변천과 
잇따른 전화가 원흉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같다. 막스 베버가 지칭한 한국의 
지도층이었던 문인 신분층, 곧 선비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규범을 유지했던 선비 
정신이 집 사치를 철저히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집 사치를 한 사람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대체로 예외적 인간이나 계급적 
열등감을 보상하려는 소외층 인간들이었다.

  기둥 한 자씩 잘라 낮춘 중인의 호화주택
  이를테면 사상 가장 호화주택을 지녔던 중종반정의 일등공신 박원종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반정의 공으로 보화를 많이 받아 생활이 지나치게 분수에 넘쳤던 
것이다. 정사룡이 예조낭관으로 있을 때 이 호화주택에 갔다가 그 호사함을 적은 
것을 보자.

  세 대문을 지나서 대청 앞에 이르니 돌을 다듬어 뜰을 만들었는데 반송 두어 
그루가 있고 붉은 난간 푸른 창문이 화려해서 눈을 부시게 했다. 다시 한 문을 
들어서니 조그마한 누각 하나가 날아갈듯 서 있는데 붉은 발이 땅에 드리웠고 
성장의 시녀 하나가 인도하는 대로 다시 문 하나를 들어서니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는 곳에 공이 연못 동쪽 평상 위 수놓은 베개와 비단 자리에 앉아 있는데, 두 
여종이 부채를 들고 당상에 서 있고 주렴 안에는 또 다른 시녀가 수없이 있었다.

  문제는 이토록 집 사치를 한 박원종이 당시 사회의 지배 이념이요, 지배층이던 
선비 정신과 선비층에서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킴으로써 집 사치를 합리화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지식이 없는 일개 촌부로서 종사의 신령을 힘입어 시운을 
타고 이런 자리에 외람되게 앉아 있을 따름이다.'고 선비의 사회적 신분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써 당시 '선비'의 법도나 규범을 오염시키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3.1운동의 진원지인 서울 인사동 태화관은 인조가 등극하기 이전에 살았던 
궁가였기에 규모가 사치스러웠다. 구한말에 영의정을 역임한 김흥근이 그 집에 
살았는데 그 문하에 드나들던 한성 제일의 갑부 임상현이란 중인이 청계천 수표 
다리 근처에 태화관과 똑같은 규모의 호화 주택을 지어서 조정에 말썽이 되었다. 
형조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일이라 헐려들자 김 대감이 지각없고 법도 모르는 중인의 
짓인지라 집 기둥을 고루 한자씩 잘라 집 높이를 낮추게만 하고 용서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호화 주택은 '납작 태화정'으로 불렸고 분에 넘치게 호화주택을 
짓고 살면 '납작  태화정'이라고 빈축을 사는 그런 속담으로까지 정착했던 것이다.
  우리 옛 선조들은 중류의 상식적인 방 규모는 대체로 한 식구당 한 칸이었다. 
여기 한 칸은 요즈음 한 평보다는 약간 큰 8__9자 평방이긴 하지만 대체로 방만해서 
중류 가정이 다섯 칸에서 열 칸 정도였다. 방 면적만 요즈음 평수로 10평 내외를 
넘기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보다 크면 '옥'이라 불렀고 이보다 작으면 '사'라 
했는데 옥이란 글씨를 풀면 '시지' 곧 송장이 이른다는 뜻이 되고 사란 글씨를 풀면 
'인길'이 되니 큰 집에 살면 화를 입고, 작은 집에 살면 복을 받는 다는 것이 일종의 
토속 신앙처럼 체질화돼 있었던 것이다.

  비를 가리면 집은 족하다.
  연산군 때 일이다. 한양 남산에 9만 9천 9백 99칸이란 상상을 초월한 호화주택이 
있다는 소문이 팔도에 떠돌았었다. 그래서 서울에 오는 사람은 이 집을 구경코자 
남산을 헤매게 마련인데 찾고 보면 크게 실망하곤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판서 
홍귀달이 사는 허백당이란 당호가 붙은 단칸 초막을 두고 그런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홍 대감은 비록 그 단칸방 속에서도 9만 9천 9백 99칸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그의 주거 철학 곧 현상학적 공간이 그를 흠모하는 선비들 입을 통해 구전돼 
나간 것이 그렇게 구상적 공간으로 팔도에 와전됐던 것이다. 옛날 선비 가운데도 
격이 높은 선비를 '헛가리 선비'라 불렀는데 헛가리란 가벽집, 곧 요즈음 말로 
옮기면 판잣집 선비를 일컬었다. 주로 남산에 살았던 선비들은 홍 판서처럼 
헛가리에 살았기에 생겨난 말일 것이다.
  우리 선조들을 지배했던 주거 철학으로 비우사상을 들 수 있다. 이 비우란 선조 
때 판서요, 대학자인 지봉 이수광이 살던 집 당호인 비우당에서 비롯된 사상이다. 
근근히 비를 가린다는 뜻인 이 검소한 청빈 사상의 발생지에는 역사가 있다. 지금 
동대문 밖 신설동과 보문동 경계쯤 동덕여고가 있는 근처에 조선 왕조 초기에 
유관이라는 정승이 살았다. 어찌나 누추했던지 장마철이면 방안에서 일산을 쓰고 
살았을 정도였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일산인지라 유 정승은 '일산이 
없는 집은 이 장마를 어떻게 지내느냐.'고 걱정까지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바로 그 집이 유관의 외증손인 이희검 판서가 '집은 비를 막는데 족하고, 옷은 
몸을 가리는 것으로 족하며, 밥은 속을 채우면 족하다'의 신조로 그 집에서 청빈하게 
살다 갔고 임진왜란에 타버린 그 터에 다시 이희검의 아들인 이수광이 두어 칸 
초당을 짓고 비우당이라 이름지어 비우사상의 법통을 이어내렸던 것이다.
  이 비우사상이 한국인의 정신 체질에 어느 만큼 영향을 미쳤는가는 다음 고사에서 
역력히 찾아볼 수가 있다.
  장필무가 양산 군수로 있을 때 경상병사와 경상수사가 규정된 법외의 청구를 
자주하는 것을 막아 내었다. 이에 화가 난 양사가 모여 '영문의 명령을 거절하고 
시행치 않으니 무엇을 믿고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고 힐문하자 '나는 믿는 바가 
없고 다만 초가 두어 칸이 있으니 그 맘 속의 비우만이 나의 배경이요.' 했다 한다.
  곧 집을 절검하게 갖는 것은 청백의 본이요, 그 이상 큰 빽이 없다고 
여겼으리만큼 비우사상은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것 같다. 따라서 집 
사치를 서로 경계하는 풍조도 활성을 띠어 왔다. 세조 때 이조판서 이승소는 겨우 
삼간되는 초가에서 살았었다. 어느 날 임금이 불러 국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당시 
병조판서이던 아무개도 자리를 같이 하였다. 병조판서는 이 승소와 아래 이웃집에 
사는 친한 사이였다. 한데도 서로 서먹서먹 모르는 체하자, 세조가 '이판은 병판을 
모르는가.'고 물었다.
  이때의 이승소의 대꾸는 유명하다. '알지만 모릅니다.(지면불화평)' 아무리 
말렸지만 끝내 호화주택을 짓고 만 병판을 상종 못할 소인으로 간주, 모르는 체해 
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집이 과람하면 뜻있는 친지들은 '지면불화평'로 소외시키는 
선비들 습속이 생겨나 그 소외가 두려워 절제하는 풍조가 토착화한 것이다.
  이를테면 대제학 벼슬의 김유는 죽동에 마루 한 칸, 방 한 칸의 두 칸 집에서 
사는 바람에 여러 아들들이 처마 밑에서 자리를 펴고 거처하기까지 했다. 그가 
평양감사로 가 있는 동안 장마에 그 집마저 무너져 중수를 하게 됐는데 아들들이 
아버지 눈을 속여 방과 마루를 각각 반 칸씩 늘려 지었던 것이다. 돌아온 김유는 
방이 커진 것을 모르고 처마 밑이 좀 좁아진 것을 뒤늦게 알고야 아들들을 불러 
애비를 지면부지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고 호통치고 원상대로 복구시키고 있다.
  성종 때 대비의 직계 친척 하나가 승지로 있으면서 자단향으로 집을 지은 것을 
확인한 임금은 아프다는 핑계로 이궁, 명령을 내려 그 외척을 베어 죽이게 했다. 
이궁하는 듯은 대비가 용서 해 주기를 청할까봐 그를 기피하기 위해서였다.
  인육까지 먹지 않을 수 없었다던 임진왜란 수복 후 집 사치, 옷 사치, 음식 사치가 
대단하여 이를 제동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학, 곧 선비의 행동 철학이 크게 
부흥됐다는 해석은 일리가 있다고 본다.
  곧 전화 후에 왕성해지게 마련인 소유욕에 재동을 가한 것이 곧 선비 정신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집 사치로 나타나고 있는 이 양(quantity)의 시대를 어떻게 질(quality)의 
시대로 전환시키는가, 물질적인 하우스(house) 시대를 어떻게 정서적인 홈(home) 
시대로 진입하는가, 물질적으로 소유하는(to have) 시대에 어떻게 정신적으로 
존재하는(to be) 시대로 발전하는가가 우리가 겪어야 할 가장 큰 정신적 시련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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