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이란 개념이 탄생한 것은 일제 침략시기였다. 민족과 민족문화 말살에
저항하여 민족을 민족문화의 유지하고 명맥을 잇기 위한 안간힘의 표현으로
'한국적'이란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문화권을 분류하는 한 방법으로 문화인류학에서는 중원문화(Central culture)와
변경문화(Marginal culture)로 양대별 한다.
중원문화란 어떤 역사 시기에 있어 가장 우세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그런
문화권의 문화를 뜻한다. 이를테면 서양에 있어 기원 전의 희랍문화, 기원 직후의
로마문화가 그렇고 근세에서는 프랑스문화가 중원문화요, 동양에 있어서는
중국문화가 그것이다.
이 중원문화를 중심으로 하여 그 문화의 영향권에 있는 주변의 위성문화권을
변경문화권이라 한다. 이를테면 16세기 전후의 독일, 영국 등 유럽 여러 문화권들은
프랑스를 중원문화로 한 변경문화권이었고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중국을 중원문화로 한 변경문화권이었다.
지금도 국제회의에서 회의 용어로 프랑스 어가 통용되는 것은 바로 프랑스 문화가
오랫동안 중원문화로 있어 왔기 때문이요, 한국말, 일본말, 베트남 말이 한문요소가
막대한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
우세한 중원문화권에 들어 있는 동안은 변경국가의 문화란 생명력
이 없기 마련이었다. 그 문화의 질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열세하기에 그 문화는
바이탈리티를 상실하고 침체돼 있어야만 했다. 파워면에서 우세하다는 것과 질적인
면에서 우등하다는 것과는 다르듯이 열세와 열등도 동일개념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랜 중국문화의 중원권에 소속되었던 우리 한국문화도 열등해서가 아니라 열세
때문에 침체돼 있었으며 한국적 요인은 중국적인 요인의 수렁 깊숙이 침체돼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옛 선조들은 우리 한국이란 호칭마저도 중원인 중국에 대한 변경의
호칭인 '동방'이란 말로 부름으로써 주체적 국가파악보다 종속적 국가파악을 했던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 같은 나라 이름이 독립된 주체적
차원에서 불려지기보다 변경 차원에서 불려졌을 뿐이며, 그러기에 문화에 있어
'한국적'이란 개념은 항상 열등하고 열세하며 저질의 것을 표현하는 형용사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조수의 근원이 중국으로부터 나오니 우리 서해는 가까운고로 조수가 미치고,
동해는 먼고로 조수가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같은 문헌에, 물고기가 수족이 아닌 것이 없는데 유독 숭어만을 수어라고
부르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중국의 사신 기연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숭어를 먹어 보고 맛이 좋으므로 이 고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통변하는 사람이 '수어라고 합니다.' 했더니, 이
사신이 웃으면서 '비늘 있는 고기가 수만 종이거늘 이 고기만 어찌 수어라 하느냐.
물 속에 있는 고기를 모두 수어라 해야 하지 않느냐.' 하였다. 그 후부터 천사(중국
사신)의 판단을 어길 수 없다 하여 수어가 수어가 돼버린 것이다.
음이 같은 두 다른 글씨의 판별을 하지 못한 일개 중국 사신의 무식에서 비롯된
오판일지라도 중국 사신이 한 일이면 진리도 바꿔 버리는 이 맹렬한 중원지향의
변경사고였다. 이 변경사고의 맹렬시대에 '한국적'이란 개념은 싹틀 수가 없었다.
개화기에 그 중원권인 중국이 영불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고 구미와 일본 세력이
우리나라에 밀어닥쳤을 때 이 종래의 변경사고는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랜
의존체질과 약체성 때문에 한말의 한국인들은 그 의존 대상만을 옮겼을 뿐
의존체질을 탈피한다는 법은 없었다. 친청, 친노, 친일파로 세력이 4 분 5 열 되었을
뿐이며 이 혼란기인 한말에 한국적인 주체 세력의 형성이 없었다는 사실은 한국
사상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한국적이란 개념이 탄생한 것은 일제 침략 시기였다. 민족과 민족 문화 말살에
저항하여 민족을 유지하고 민족문화의 명맥을 잊기 위한 안간힘의 표현으로
'한국적'이란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제시대의 '한국적'은 민족
광복에 주안점이 있었기에 2차대전의 끝장으로 그 광복이 얻어진 다음에는 그
'한국적' 개념에 새로운 비전이나 활력을 불어넣어 발전시킬 어떤 토양이 주어지질
못하여 다시 한국문화는 변경성으로 타락하여 미국문화를 중원문화로 지향하고
위성적 위치에 되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왕성한 미국문화 지향 때문에 '한국적'이란 개념은 또다시 열등과 열세 속에서
30여 년 죽어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미국문화 속에 자신을 동일화시켜 미국문화란
색안경을 통해 한국문화를 투시하는 그런 한국관이 지배해왔고 모든 한국적
가치관도 구미화된 가치관의 색안경을 통해 평가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이 작품에, 한국 각계에 술렁대고 있으며 한국인의 재발견,
한국인의 가치관, 한국인의 의식구조, 한국인의 동일성이 활발하게 대두되고
논의되고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게르마니아나 브리테니커라는 개념이 그들
중원문화인 프랑스 문화권에의 반동이요, 이탈 과정에서 형성되었듯이 '한국적'이란
개념도 미국 문화권에의 반동과 이탈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한국과 한국문화와 한국인에게는 외국과 외국문화와 외국인과는 다른 자질의
동일성(identity)이 있다. 그 동일성은 한국의 기후, 풍토, 의, 식, 주, 생산, 문화,
전통 등 모든 공간적 시간적 조건에 적응해서 형성된 한국 고유의 자질이며 이
자질없이 한국이나 한국문화나 한국인이 형성될 수가 없다. 그것을 무시한 어떤
외래적 요소만으로 한국의 존립이나 발전이나 영화도 기약할 수 없다. 오랜 우리의
역사는 이 동일성을 무시한 전제에서 형성되어 왔다는 점에서 비극이었고, 그런
뜻에서 '한국적'이라는 개념의 대두는 신선하고 희망적인 것이다. 이 발전적 자질인
동일성의 대명사로서 '한국적'일 때 한국적이란 개념의 실이 정립된다.
한데도 이 '한국적'이란 신어는 많은 허를 더불어 내포하고 있다.
첫째, 변경사고의 잔재로서, 한국적이란 개념이 열등개념으로 아직도 통용되고
있다. '엽전' '죠센징(조선인)' 이란 말이 열등개념으로 파악되듯이 코리언 타임,
양견에 대비시킨 통개, 양복에 대비시킨 바지저고리 등 한국적 요소의 열등파악이
아직도 우리의 사고방식을 적지 아니 지배하고 있다.
둘째, 국제적 편견으로 '한국적'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외국적 요소면
긍정적 가치라도 부정적 가치로 간주하여 거부하고 한국적 요소면 부정적 가치라도
긍정적 가치로 간주하여 수용하는 '한국적' 지상주의인 것이다. 한국적인 요소에서
부정적 면을 들추면 분노와 격분을 함으로써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시점을 무시한다.
셋째,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협의의 민족주의나 내셔널리즘으로 한국적인 개념의 테두리를 국한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의 참뜻은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협조나
발전을 위해 투자할 한국의 개성이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를테면
구주공동시장(EEC)이 목적한 바는 단지 지역분업도 아니고 또 단순한 유럽의
일체화도 아니며, 강한 민족국가의 개성 발휘와 그에 의한 유럽의 협조적 통일인
것이다.
개인이나 민족의 몰개성화로 세계시민주의나 지역의 통일을 이루려 했던 종래의
주장은 항상 현실을 무시한 몽상에 그쳤으며 인간성이나 사회적 결합이란 것이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탄생한 것이다. '한국적'이란 주장도 편협한 고립주의나
편협한 민족주의에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협조적 국제적 입장에서 한국을 다시
보고 그 위치를 정립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진취적이고 개방된 민족주의요, 실질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내셔널리즘의
주장이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한국적'은 복고적이란 편견이다. 옛 우리 한국의 묵고 좋은 것의 복고라는
감상적 의미로도 이 말이 널리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묵고 좋은 것의 재발견이란 차원이 아니라 묵지 않고 좋지 않더라도,
세계적 입장에서 한국 민족이나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발견하고 그 특수성 위에다
독자적인 사회질서나 문화를 세우는 일이 오히려 미래지향적이랄 것이다.
다섯째, 우익적 보수적 개념으로 또는 진보적 지성적 발전의 저해요소로서
한국적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한국적이란 실이 한국, 한국인의
원형질인 동일성을 뜻한다 할 때 반진보, 반지성은 해당되질 않는다. 이를테면
한국인의 간 기능과 미국 사람의 간기능에는 20퍼센트 이상의 기능 차이가 있다고
한다. 각기 살고 있는 각종 환경에 적응한 만큼 그렇게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른 한국인의 자질이 한국인의 체질 기능의 동일성이며 만약 미국에서 간의학이
비약적 발전을 한다 해도 이 20퍼센트의 동일성에는 아무런 혜택을 주지 못한다.
한국인의 간 의료에 진보를 가져다 주는 요소는 바로 이 동일성을 둔 의학의 연구에
있는 것이다. '한국적'요소가 무시된 어떤 분야의 진보도 불가능한 것이다. 곧
한국적인 것은 보수로부터 진보에로의 탈피를 뜻한다.
그 밖에 반미적 이미지도 한국적이란 개념 속에 내포된 것 같으나
탈아메리카니레이션과 '반미국적'이란 개념의 혼동에서 비롯된 허 가운데 하나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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