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한국인은 탈한국 운동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러기에 한국은 머지않아
한국이라는 특수성으로 좁아지는 세계에 존립할 가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한국에 관한 옛 중국 문헌을 읽다가 '고려취'란 낱말을 본 일이 있다. 백인에게
노린내, 호인에게 되내가 나는 한국인의 민족냄새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에 의하면 한국말 고린내의 어원이 바로
'고려취'라는 것이었다.
그는 연행길에 이 '고려취'란 말이 생기게 된 동기를 직접 체험했던 것이다.
사신이 행차할 때는 경우에 따라 수백 명에 이르는 가마꾼과 말몰이꾼 등 종들이
수행하게 마련이다. 무도한 이들은 행패도 심했으려니와 몸의 청결도 말이
아니었다.
몇 달 동안 모랫바람을 안고 걸어야만 하기에 몸을 청결히 할 엄두도 못내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들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풍기게 마련이며 이들에 접근했을
때 나는 냄새를 중국 사람들이 고려취라 부르고 무척 싫어했다는 것이다.
또 이 사신행차의 종들은 연행길가의 행상들의 물건을 소매치기하거나 좀도둑질을
자주 하여, 이 조선 사신의 행차가 멀리 나타나면 철시를 하고 저자들은 문을 닫는
것이 상례가 돼 있었다고 박지원은 그의 견문을 써 남기고도 있다. 그리하여 중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뚱이(동이)란 말을, 중국에서 좀도둑이란
뜻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뚱이란 말은 고린내란 말과 더불어 고스란히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와 우리말로 정착했으며, 요즈음 어린이들간에 좀도둑질하는
아이를 빗대어 뚱이라고 놀린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 고린내와 뚱이란 두 외래어를 두고 생각해 보자.
이 두 말은 어원이 중국 말이고 중국에서만 통용되었어야 했을 말들이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의 불결이나 나쁜 버릇에서 비롯된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사람들간에 통용될 중국말이지 한국말은 아닌 것이다.
한데 왜 한국을 천대하고 깔보며 수치스런 이 중국말이 국경을 넘어 거침없이
우리나라에 몰려들었고, 또 그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말을 앞다투어 즐겨 쓰게
되었는가 말이다.
여기에 한국인 특유의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가 있겠다.
이미 박지원도 이 치욕적인 말을 조선 사람이 즐겨 쓰는 일에 한탄하고 연행길
다녀간 한국 사신 일행들이 이 말을 조선 땅에 옮겨놓았을 것이라고 지적해 놓고
있다.
곧 우리의 것을 깔보고 얕보는 자학적 사고방식이 이 신나는 두 낱말을 얼싸안고
즐겨 씀으로서 마치 자기는 고린내나고 뚱이질 하는 한국인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는 것으로 안 것이다.
'조선 사람이 그렇지 뭐.' 하는 어른들의 말을 곧잘 듣는다. '엽전이 그렇지 뭐.'
'엽전이 그렇지 뭐.' 하는 요즈음 말과 발상이 같다. 곧 고린내나 뚱이란 말을 쓰는
정신체질과 별 다를 게 없다.
무슨 좋지 않는 일이 벌어졌을 때마다 '조선 사람은...' 혹은 '한국 종자는...' 하
며
그 좋지 못한 일을 민족 또는 국민 전체의 소행으로 확대시킨데 길들어 있다.
'조선 사람은 공중 도덕이 없고....' '한국 종자는 의존심이 강해서....' 예를 들라
면
끝이 없다.
한국인의 결함을 반성하기 위해서 이같은 한국인 저주의 어두로 시작된다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렇게 한국을 통틀어 얕보는 사람의 저의가, 자기는 마치 그런
한국 사람이 아닌 체하는데 예외가 없다. 이를테면 엽전은 공중도덕심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한국 사람들이 새치기를 잘하고 길가에 침을 뱉고 하는 것을 그 실례로
곧잘 드는데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에는 '단 나만은 예외이지만....' 하는
은연중의 예의 표현이 내포되게 마련이다.
이같은 풍조는 한국인의 사고방식 가운데 분명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자학의
심성 때문인 것이다.
그 같은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의 주변에는 신이나 사람이나 역사나 풍속이나 또
집이나 옷이나, 밥그릇이나 모두가 군더더기 같은 지저분한 것들뿐이다.
그런 것들은 희랍의 신이나 독일의 사상이나, 영국의 역사, 프랑스의 풍속,
이탈리아의 옷, 코르시카의 밥그릇에 비겨 열등하고 천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한국의 전통에 열등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있지만 그만한 열등적
요소는 비단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앵글로 색슨 족에도 게르만 족에도 또 슬라브
족에도 다 있다. 오히려 더 심할 수도 있다.
어느 민족에게나 마이너스적인 가치도 있고 또 플러스적인 가치도 있게 마련이다.
다만 다른 민족들은 자기네 마이너스적 가치를 극소화하고 플러스적 가치를
극대화한데 비해 한민족은 마이너스적 가치를 극대화하고 플러스적 가치를
극소화하는 역조의 차이가 다를 뿐인 것이다.
이 오랜 역조시대의 연장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공간적인 옆의 것 곧 외래의
문물이면 모든 것이 좋고, '시간적인 뒤의 것' 곧 전통의 문물이면 모든 것이
나쁘다는 것이 통념화되어 버린 것이다.
테크놀로지 만능의 구미사조만을 옆으로 보고서 그들의 미래상을 정립하려 할 뿐
전통적 한국의 가치관을 발굴해서 미래상을 정립하려고 뒤를 돌아본다는 법은 없다.
곁눈질만 늘어 한국인의 눈은 옆으로 찢어지는 세상에도 흉한 괴물이 돼가고
있다.
그리하여 교통, 통신, 매스컴 등의 발달로 자꾸만 좁아지는 지구상에서 한국인은
국적을 상실한 고아가 돼 가고 있다.
곧 한국인은 탈한국 운동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은 머지않아
한국이라는 특수성으로 좁아지는 세계에 존립할 가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두려운 사실이 아니겠는가.
성내어 '뒤'를 돌아봐야 할 때라고 본다. 한국인의 문명작용인 전통의 극소화
진행에서 극대화 진행으로 방향을 돌리고 정신혁명을 역사는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적 요구에 부응하는 맨 첫 정신개조는 우리의 것을 얕보는 고린내
콤플렉스와 뚱이 콤플렉스로부터의 대담한 탈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성내어 뒤돌아보는 젊은 세대를 한국사는 목메어 부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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