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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모인병

by Healing New 2020. 9. 27.

  모인성이란 곧 응석을 다 받아들인 어머니의 과보호성 '사육' 때문에 형성된 
의존체질이 어떤 기회에 만족되지 않을 때 생기는 체질적 반발 현상인 것이다.

  어릴 때는 왠지 형님 따라가 억세게 놀고 싶은데도 형님은 주먹질 돌팔매질까지 
하며 억세게 따라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 같으면 어머니에게 가 
비죽비죽 울면서 일러바쳤을 것이나, 나는 집에 돌아와 형님의 국어책장을 
찢어발겼던 기억이 난다.
  형제가 많기도 했지만, 고달픈 소작농으로 들판과 부엌을 오가며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던 어머니인지라 아이들의 응석이나 아양을 받을 심신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응석을 받지도 않을 뿐더러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라든지 뭣이 돼달라고 원한다는 
법도 없었으며 모진 환경에 시련받아 성숙한다는 법도, 도 환경의 시련으로 
비굴해진다는 법도 없이 묵묵히 하루 종일 일하고 추운 겨울밤이면 등짝을 
드러내놓고도 곤히 주무시던 그런 어머니였다. 곧 모자 사이의 응석이 차단된, 그런 
심리 공간에서 자랐기에 내 앞에 당한 일은 어머니에게 의존할 수 없이 형님 책장을 
찢는다든지 하여 나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고뿔을 앓는다든지, 두드러기가 난다든지, 목젖이 부어 오른다든지 할 
때도 중증이 아니면 '아양병' 앓는다고 업었다가도 내려 팽개치던 기억이 선하다. 
우리 모계로 전승된 슬기 가운데 하나로서 이 모자간의 응석이나 아양 등 과보호가 
아이들을 약체화시킨다는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신병으로 나타난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같다.

  모인병 감기까지 실재
  구미 등 선진국에서는 어린이의 감기를 바이러스성 감기와 모인성 감기로 대별해 
처방한다고 들었다. 야뇨증, 저혈압, 습진, 기관지 천식이나 알레르기성 피부염에도 
모인성이 있다는 학계의 보고가 있다.
  문명국에 있어서의 '육아에 대한 정신적 붕괴 과정'이라는 바울비의 WHO 보고에 
의하면, 경제성장과 사회보장제도가 충실해지면서 모친주의(matrism)가 
부친주의(patrism)를 능가, 어머니들이 육아에 이상 관심과 이상 열성을 부림으로써 
모인성 질환이 상승 일로에 있다고 했다.
  특히 모친주의가 강한 편인 일본의 한 임상학자는 현대 어린이들 질환의 
60퍼센트가 모인성이라 해도 대과가 없다고 체험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다. 하물며 
이 세상에서 가장 비대해져 있는 한국의 모친주의임에랴.
  모인성이란 곧 응석을 다 받아들인 어머니의 과보호성 '사육' 때문에 형성된 
의존체질이 어떤 기회에 만족되지 않을 때 생기는 체질적 반발 현상인 것이다. 우리 
옛 어머니들이 업었다가도 내려 팽개치는 '아양병'의 현대적 표현인 것이다. 이 
응석받이의 과보호가 육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모인병이라면 정신적, 성격적으로 
나타난 것이 자기 본위, 아집, 자폐증, 등교거부 증상으로 발전하고 보다 심해지면 
자살과 부모에게 행패를 하는, 가정내 폭력으로 나타난다. 곧 모인병과 가정내 
폭력은 그 뿌리가 같은, 각기 다른 나무 가지인 것이다.

  부모 구박은 참형 이상의 벌
  신문사 사회부장 시절에 다루었던 잊혀지지 않은 일로 청바지 사건을 들 수가 
있다.
  청바지가 갓 유행할 무렵, 열여덟 살 난 아들이 청바지 입는 것을 거부하는 
어머니를 묶어놓고 끼니를 굶기며 폭행한 사건이다.
  아버지가 없지만, 유복한 살림에 갖은 응석을 다 받아가며 자란 이 외동아들은 
공부도 중상이요, 밖에 나가서는 수줍고 얌전하기 이를데없는 유순한 아이였다 한다. 
한데 일부러 옷을 더럽혀 갖고 들어와서 어머니가 그 때문에 노고하는 것을 
즐기는가 하면 야뇨를 핑계삼아 번번이 이부자리를 버려놓고 어머니가 그 때문에 
근심하고 당황하는 것을 만족한 얼굴로 바라보곤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가치가 청바지만도 못하게 타락된 이 가정내 폭력은 그것이 가학적으로 
나타나든 자학적으로 나타나든, 또 직접적으로 나타나든 간접적으로 나타나든, 또는 
우회적으로 변질돼 나타나든 가능성으로 잠복돼 있든 오늘날 어른들이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집안 일이라는 금기 때문에 묵살하고 있는, 너무나 흔한 중대 
문제가 아닌가 싶다.
  현종 5년(1664) 형조의 계목에 보면 조묵석이란 자가 그의 사촌동생 유동이와 
서로 싸우다가 몽둥이질을 하려는 참에 이를 말리기 위해 개입한 어머니가 잘못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비록 과실에 의한 시모이긴 하지만 어머니를 죽였다는 
결과는 윤상십악의 대죄이기에 '부대시', 곧 때를 기다리지 않고 당장 
능지처참시키고 있다.
  시부모나 구부모는 본인의 참형만으로 끝나질 않는다. 파가저택이라 하여 그 
윤상사건이 난 집을 파헤쳐 없애 버리고 못을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그 가족들은 
전가사변이라 하여 두만강 북변으로 강제 이주 당하고 가문의 족보에서 삭제, 
파문을 당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난 고을을 분할, 이웃에 귀속시키거나 읍호를 부나 
군으로 현으로 강등시켰던 것이다.

  자학도 모인성서 비롯
  이 엄청난 윤상에의 규제가 있던 윤리 풍토였던 것을 감안, 오늘날의 구모, 시모의 
개연성을 생각할 때 그렇게 변질시키게 한 인자가 뭣인가가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다.
  근간에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무비 카메라를 잃어버리고 꾸중들은 18세 된 
고등학생이 프로판 가스통을 폭파시켜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 여동생, 조카들에게 
집단 중화상을 입히고 있다. 사달라는 것을 잘 사주질 않고 또 그것을 꾸짖는다 
하여 어머니의 밥에 독약을 넣어 독살시킨 맹렬 소녀도 있었다. 이것은 가학형 
가정내 폭력이다.
  돈도 없는 주제에 수학여행은 왜 갔다 왔느냐는 선생님의 그 간단한 말 한 마디에 
자살한 여고생, 또 시험볼 때 커닝한 학생들의 이름이 게시판에 나붙자 교실 안에서 
자살한 여고생이 있었다. 이 일련의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감수성을 배려하지 않은 
선생이나 학교측의 잘못으로 여론들은 규탄했었다. 물론 선생이나 학교측의 잘못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만한 감수성의 상처로 그 소중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이 
극심한 자학적 바탕은 현대 한국 가정에 있어 이들을 둔 뭣인가 잘못된 문화적 
병폐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는 곧 자학형 가정내 폭력으로, 가학형과 방법만 다를 뿐 
그 뿌리는 같다.
  예전에는 가정내 폭력은 있었다. 밤늦게 돌아다니며 불량배와 짝지어 놀고 이를 
주의 주는 부모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부모에 협박, 금품을 요구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근년에 증가하고 있는 가정내 폭력은 이같은 불량성 폭력과는 전혀 이질의 
것으로 전혀 문제 행동도 없을 뿐더러 집 밖에서는 대체로 온순하고 공부도 웬만큼 
하며 집도 반드시 어렵지 않은 집 아이가 안에서는 주로 어머니나, 어머니의 역할을 
하거나 어머니에 편드는 가족에게 폭력을 부린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대적인 
심리병이랄 수가 있다.
  미국에도 가정내 폭력은 있다. 하지만 계약 정신과 개인주의가 왕성한 그 
풍토에서는 부모에 대한 직접적인 가학이나 자신에의 자학적 폭력과는 질이 다르게 
나타난다.
  근간 "매콜즈"지에 의하면 미국의 10대들이 부모를 걸어 법정에 소송하는 일이 
악역처럼 만연되고 있다 하고 그 실례를 들고 있다. 열다섯 살 난 딸을 석 달 간에 
걸친 세계일주여행에 데리고 가려 했으나 딸은 이를 거부, 재판소에 아버지를 걸어 
소송했고 재판소는 그 딸을 친척집에 맡겨두고 떠나라는 선고를 하고 있다. 
아버지가 대주기로 구약을 한 대학등록금을 기간 중에 마련하지 못했다 하여 소송, 
아버지에게 지불 명령을 내리도록 한 딸의 사례도 적고 있다.
  일가족이 물가에서 캠핑을 하는데 10대의 아들이 물이 깊은 줄 알고 다이빙을 
했다가 물이 얕아 부상을 입었다. 물이 얕다는 것을 미리 주의시키는 것은 아버지의 
의당한 의무인데 이를 소홀히 했다 하여 상해배상 소송을 하고도 있다.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한심하겠지만 그 병인은 전혀 다른데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그것은 너무 아이들의 응석이나 욕구를 교육적 측면에서, 또 자립 측면에서 제한을 
하지 않고 받아줌으로써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가능하다는, 각기 하나의 
'소폭군'으로 길러져 왔으며, 사춘기에 이른 소폭군이 가정 밖의 큰 세상에 
나아감으로써 당하는 자립과 의존의 갈등과 좌절을 가정내의 의존(응석) 대상에 
폭력적으로 발산하는 한국형 가정내 폭력인 것이다.
  미국의 폭력(소송) 대상이 주로 아버지인데 비해 한국의 폭력 대상이 주로 
어머니인 차이는 퍽이나 주의를 끄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온통 모성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우리 한국인은 감정적인 충격을 받았을 때 
예외없이 어머니를 부른다. 육당 최남선이 백두산의 원시림에 발을 딛자 자신도 
몰래 맨 먼저 나온 탄성이 '에그머니!'였다 한다. 갑작스런 경악을 당했을 때 
한국인은 남녀 없이 '어머니'가 튀어나온다. 가수가 의외의 시상을 했을 때 엄마를 
부르며 우는 광경도 자주 봤다.
  대중의 심정을 사로잡는 대중가요에서 즐겨 쓰는 낱말 빈도 가운데 최고로 많은 
낱말, 곧 1위가 '어머니'요, '아버지'는 1백 8위로 조사된 것을 보았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성악곡에 '죽은 자식을 그리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의 
가장 비장한 대목의 가사는 우리의 노래처럼 '어머니의 손을 놓고...'가 아니라 
'아버지의 손을 놓고...' 였다.

  부성과 모성의 원리 대립
  사람 맘 속에는 많은 대립된 원리가 작용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부성과 모성의 
원리 대립은 매우 중요하다. 모성의 원리는 좋든 나쁘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감싸는 
기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모성 원리 앞에서는 절대적인 평등성을 가진다. 내 
자식인 이상 좋든 싫든 간에 모든 자질이 평등하게 포용됨으로써 아이들의 개성이나 
능력과는 관계가 없다. 반면에 모성 원리는 아이들이 제멋대로 그 포용의 한계, 곧 
슬하에서 떠나가는 것을 거부한다. 모자일체의 근본 원리 파괴를 허락치 않기에 
응석받이를 과보호한다.
  이에 비해 부성 원리는 절단, 곧 '끊는 기능'으로 나타난다. 주체와 객체, 선과 악, 
상과 하를 모성 원리와는 달리 분류하고 아이들의 능력이나 개성에 따라 유별을 
한다. 이 세상에는 민족이나 문화권에 따라 어떤 원리가 우세하고 잠재되고의 
차이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감싸는 모성 원리가 압도적으로 끊는 부성 원리가 
잠재돼 있는 전형적인 모성 원리 사회인 것이다.
  관음 사상이 그 보살상에서 보여주듯 모성 원리를, 그리고 기독교 사상이 
그리스도상에서 보여주듯 부성 원리를 있게 했다고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 
문화권의 문화가 소화할 겨를도 없이 밀려들었지만, 웬일인지 어린이를 둔 부성 
원리만은 발을 못 붙이고 있으니 그만큼 한국인의 모성 원리가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일까. 정말 어린이를 위한 길은 옛 우리 모계로 전승된 '아양병'의 슬기를 
부활시킴으로써 두 원리간의 역학에 균형을 잡아 주는 일이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천 길 벼랑 위에서 새기를 떼미는 어미 사자의 지혜를 터득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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