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란 장에 가서 비단구두를 사오게 하는 이기적 필요성과 나팔꽃을 피우기
위해 새끼줄을 치는 노동을 필요로 할 때, 엄마 위해주기 위해 엄마 아빠 좋아하는
마지못할 경우에만 등장한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여덟 살 난 아들놈을 밖으로 몰아내고자 '넌 친구도
없느냐.'고 따졌던 일이 있다. 이따금 옷도 좀 버려갖고 들어오고, 더러는 싸워서
다치기도 하며, 계집아이도 좀 놀려 울리기도 했으면 싶은 그런 요즈음 아이들의
비활성과 자폐 성향을 염려한 아버지로서의 질문이었던 것인데 놈의 엉뚱한 반문에
오히려 말려들고 만 것이다.
"아버지는 나만했을 때 친구가 많았어?"
"그럼, 동네 아이들은 모두 내 친구였지."
"...여자 친구도요?
"그럼 여자 친구도 많았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퇴근길에 집 앞 가게에서 담배를 한 갑 사는데 가겟집
아주머니가 야릇한 웃음을 띠며, '아저씨, 여자 친구 많다면서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좀처럼 웃는 것을 보지 못했던 수위 아저씨도
일그러진 웃음을 띠며, '선생님, 걸프렌드가 많다면서요?'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마치
바람둥이처럼 동네에 소문이 난 것이다.
아들에게 즉석으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아버지답지가 않아 꾸욱 참고 있다가
어느 날 놈과 더불어 산보를 하면서 가게 아줌마나 수위 아저씨에게 불고 다녔던
여자 친구 사건을 따졌던 것이다.
이에 놈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로, '아빠가 많다고 했잖아요.' 하면서
발부리에 걸린 돌을 툭 차는 것이었다.
'쓸쓸이'가 된 아버지 상
정말 요즘 아이들은 엉뚱한 데가 있는 것이다. 놈의 어투나 손을 호주머니에 꽂고
돌을 차는 몰골로 미뤄, 아빠가 당한 피해는 미리 조작된 놈의 가해였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회색빛으로 퇴색돼 있는 '아버지'가 놈이 찬 돌멩이에 아프게
얻어맞는 듯한 통증을 절감했던 것이다.
아버지 부재시대의 그 부재 농도는 요즈음 청소년들간의 요즈음 청소년들간의
은어에서도 그 농담이 완연히 드러난다.
근간에 아버지가 '쓸쓸이'로 통하고 있다던데 쓸쓸할 '예'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아비 '부'에서 두 머리 꼭지가 사라진 부친 부재 호칭인 것이다. 더러는 '삐칠이'로도
통한다던데 삐칠 '불' 자에서 비롯된 것으로, 머리 없는 쓸쓸이에서 다리 한쪽마저
증발하고 없는 처절한 부친상이 아닐 수 없다.
옛날 산촌에서는 아이가 너댓 살만 되면 '쪽 숟가락 나이'라 하여 제밥벌이를
시작하는 나이로 쳤다. 반 토막난 쪽 숟가락으로 감자를 긁음으로써 수입 가계에
참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옛날 쪽 숟가락 나이가 '아이스크림
에이저'가 되어 이미 그 나이부터 왕성하게 지출 가계에 참여한다. 모든 가족이
왕성하게 수입 가게에 참여했을 때도 그토록 권위가 컸던 아버지였다. 한데 모든
가족이 왕성하게 지출 가계에 참여, 오로지 아버지 혼자 분골쇄신, 그 지출을
감당하느라 허덕허덕하는데도 아버지가 쓸쓸이, 삐칠이로 퇴락하고만 것이다.
그리하여 텔레비전 채널권마저도 아이들에게 빼앗기고, 아이들 어깨 너머로
흘깃흘깃 훔쳐보는 처절해진 아버지의 몰골인 것이다.
옛날 민요나 시조, 잡가 등에는 아버지의 은공을 읊은 대목이 어머니보다 많았다.
어머니의 정을 읊을 필요가 있을 때라도 반드시 아버지를 앞세웠던 것이다. 한데
요즈음 노래에 아버지를 읊은 대목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동요 속에서 가뭄에
콩나듯 아버지가 나오는데, 그 아버지마저도 장에 가서 비단구두를 사오게 하는
이기적 필요가 있을 때나, 나팔꽃을 피우기 위해 새끼줄을 치는 노동을 시킬 필요가
있을 때나, 엄마 위해주기 위해 엄마 아빠 좋아하는 마지못할 경우에만 아버지가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무척 부권에 감정적인 시몬느 드 보봐르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외치게까지 하고 있다.
"크고 뭉실뭉실한 난자가 민첩하게 노는 정자를 날쌔게 낚아채어 그 꼬리를
잘라먹는 광경, 뭉실뭉실 살찐 개미의 여왕이 노예처럼 봉사하는 수캐미 앞에
군림하는 광경. 사랑에 도취한 암당랑이나 암커미가 교미 끝에 숫당랑과 수커미를
잡아먹는 광경. 암원숭이가 음탕한 부분을 노출, 그에 현혹되어 뒤쫓는 수컷들을
실컷 골탕먹이며 즐기는 광경. 그리고 가장 존대한 사자나 표범의 수컷까지도
암컷의 명령적인 포효아래 비굴하게 몸을 가로놓은 광경...."
오늘날 청소년에게 영향력을 많이 주고 있는 마르쿠제로 하여금 '아버지는 죽었다.
이제 아버지는 정액의 공급자라는 것 이외 아무런 존재 이유를 못 갖게 됐다.'고
오이디푸스 시대를 선언하게까지 하고 있다. 니체가 신을 죽였듯이 마르쿠제는
아버지를 죽이고 있다.
사회학자 듀르캥은 그의 "자살론"에서 종전의 엄격했던 부자간의 거리 상실로
요즈음 젊은이들은 자기 욕구를 추구하게 되고 실력이나 재력이 없는 이 욕구
추구는 아버지 권위 시대에 없었던 좌절을 가져오게 한다. 이 거리감각 상실의
아노미 상태가 자살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곧 아노미는 부인병이라 했다.
쇼펜하우어도 '고슴도치의 딜레머'란 개념으로 이 부자거리상실이 청소년의 폭력이나
저하의 원인이라 경고했다.
아버지의 보호막 밖으로 해방된 청소년은 자위 수단으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온몸에 세우게 되고 서로가 추워서 접근하면 서로의 가시로 서로를 찔러 피를 보게
한다는 것이다. 고슴도치의 딜레머도 부인병이다.
"고독한 군중"의 저자 리스만, 그리고 "아버지 없는 사회"의 저자 폴 훼데른,
"뿌리 뽑힌 사람들"의 저자 오스카 헨드린을 비롯하여 많은 지성들이 오늘날
청소년들의 삼무주의이며, 폭력이며, 단절이며, 반체제며 모든 문제를 이 아버지의
권위 상실 곧 부인병에서 찾고 있다.
미국 학생들의 부친 복권 교육
재작년 나는 보스턴 북교, 개화기 때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
선생이 유학했던 더머 스쿨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곳 여교장 선생님으로부터 학생들이 반드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필독 서적
가운데 메리메의 "마테오 파르코네"란 소설이 끼여 있으며, 미국의 저명한 사립
고등학교에서는 이 소설이 필독 도서로 돼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설은 부친 부재시대의 부친 복권을 위한 교육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마테오는 산 속 외딴 집에서 아내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사는 농부다. 어느 날
아들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총상을 입은 산적 하나가 헌병에 쫓기어 숨겨줄 것을
애원했다. 이 산적이 당시 외국 군주의 지배에 저항하는 애국독립단의 지사임을
알고 짚더미 아래 숨겨준다. 뒤쫓아온 헌병 일행은 이 집 밖에 숨을 곳이 없다고
집요하게 추궁했으나 아들은 막무가내였다.
한데 헌병이 은줄에 매달린 회중시계로 유혹하자 이에 매수되어 산적은 붙잡히고
때마침 돌아온 마테오가 있는 자리에서 산적은 '배신자! '라고 매도하며 끌려간다.
마테오는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라.'고 아들에게 시킨 다음 강변으로
데려간다. 아무리 모자가 울고불고 애원해도 막무가내인 마테오는 한 발 총으로
아들을 쏴죽인다. 그리고 돌아와서 아내에게 '놈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단 한
마디 말할 뿐이었다. 아버지의 권위 회복을 위해 이 소설을 교육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미국의 고충이 처절하기까지 했다.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부도덕하거나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면 마테오처럼 아버지가 '도모지'란 사형으로
질식사를 시키는 전통이 있었다.
묶어놓고 조선 종이를 몇 겹 발라놓으면 숨막혀 죽는 이 도모지 형이 '도모지 알
수 없다'는 그 도모지의 어원이라고 황현의 "매천야록"에 고증해 놓고 있다.
유계문이 관찰사로 배임받았을 때 관찰사라는 직명 가운데 아버지 이름 유관을
침범하는 글자가 있다 하여 부임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름을 부를 때면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해자를 해서 불렀을 만큼 아버지의 서슬이 퍼렇던 시대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부인병 소멸 위한 방법
일상 생활에서도 일단 아버지가 집안에 계시면 그 집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성'이라 하여 목소리를 죽여 허스키 보이스로 귀엣말을 해야 했을 만큼 문 안에
아버지의 권위가 충만했던 것이다.
아버지 생신날에는 아들은 환갑이 넘어도 때때옷 입고 재롱을 피워야 하며, 또
환갑이 넘어도 아버지 앞에 종아리 걷고 매를 맞았던 것이다. "명륜록"에 기록된
사실을 보면 노부모의 매를 맞고 새삼 우는 장년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전에는 울지 않다가 우는 뜻은 어버이의 매질하는 기운이 이전보다 떨어진 것이
슬퍼 우는 울음인 것이다. 하물며 그런 가정과 사회에 부인병이 탄생할 수 없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아버지의 권위를 되뇌는 뜻은 사라진 권위에의 향수를 달래기 위함도 아니요, 도
낡은 모럴의 복고를 노리려 함도 아니다. 심각해진 부인병에서 자녀들을 구출하기
위해 남녀 평등 등 현대의 조건과 조화시키면서 어떻게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는가의 온고이지신을 위한 것이다.
정신 의학 측면에 있어 가족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 리스는 아버지의 기본
역할이란 도구적 역할이라 정의하고 있다. 가정에서 아이들의 버릇을 들일 때
어머니는 부친 이미지를 도구로써 이용하는 것이 부인병 소멸을 위해 크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빠에게 물어 봐서 혹시 좋다고 하시면...', '아빠에게 말씀드려
혼내줄태다', '아빠가 뭐라고 할지...' 해놓고 아버지가 돌아오면 때로는 아이들을
혼내주기 위해 아이들의 악행을 설명하고 때로는 아이들의 대변자가 되어 아빠로
하여금 승낙하게끔 능변을 토한다. 따라서 아버지가 도구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권위 이미지 형성이 필요하다.
아빠가 성내면 끝장난다느니, 비록 술 한잔 걸치고 돌아와 눈총을 쏘는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에게는 너희들 학자금을 벌고자 늦게까지 일하는 아빠라고 해주어야
한다. 아빠가 숟가락 들기 이전에 숟가락을 들지 못하게 하고, 맛있는 음식은
아버지가 먼저 손을 댄 후에 손대게 하는 것도 이 도구 이미지를 위한
온고이지신이랄 수가 있겠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어느 만큼의 존경, 외포, 그리고
아버지의 노고에 대한 송구스러움을 느끼게 하지 않고는 버릇들이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어머니(아내)의 뜻대로의 도구가 되는 아버지(남편)가 있고 없는 가족에
따라 그 가족 프로세스가 순조로이 발전하고 지체하곤 하며 부인병의 병균에
저항력이 생기지 않고 한다고 리스는 말하고 있다.
콩알에서 깨알로 마이크로화하는 부친 이미지의 부활을 위해 어버이가 뭣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성케 하는 어버이날이어야만 하겠다.
그외 정보/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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