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힌다는 것과 태운다는 이 차이는 그의 품으로의 회귀를 포용하는 대지와 회귀를
거부하는 대지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화현상이랄 수가 있다.
짚신 썩어 나무 잘 자라고
연전 한 90대 노인이 라디오의 '장수무대'에 나와, 전라도 남원땅에서 한양을
걸어서 오르내렸던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한양 6백 리 길을 나설
때는 스페어 짚신 열 켤레를 메고 떠나게 마련인데, 약 50리 길에 한 켤레씩 닳아
없어지는 것이 상식이라 했다. 그 짚신 한 켤레 닳아 못 신게 될 만한 곳에 반드시
'신나무'로 불리는 고목이 서 있어, 그 나뭇가지에 해진 짚신을 매달아놓고 떠나곤
하는 나그네 풍속이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한양에서 일을 보고 돌아올 때면, 이미 그 신나무에 걸어 두었던 짚신이
풍우에 썩어 문드러져 그 나무의 거름이 되어 없어지고 신발에 스민 내 기운을 먹고
서 있는 싱싱한 신나무를 보면 고향 사람 만난듯 정을 느끼곤 했다는 그 노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헌 짚신 한 짝일지라도 큰 어머니인 대지에 돌려주는 이
한국인의 모성원리는 한국인의 심성을 이해하는데 한 좋은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유럽의 중세 소설을 보면 양을 모는 목동들은 신발이 떨어지면 반드시 불을
태우고 간다.
십자군 원정 때 병사들의 생활 수칙을 보면 해진 신발은 반드시 불에 태우도록
되어 있으며 태우지 않고 버려두면 악마가 신게 되고 악마가 신게 되면 그 주력이
신상에 불행을 가져오게 된다고 여겼다 한다.
썩힌다는 것과 태운다는 이 차이는 그의 품으로의 회귀를 포용하는 대지와 회귀를
거부하는 대지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화현상이랄 수가 있다.
신발뿐 아니라 만물은 모두 땅으로 돌아간다는 한국인의 발상은 한국의 고온
다습한 기후가 짚신뿐 아니라, 만물을 잘 삭히고 썩혀 끝내는 흙으로 돌아가
기름지게 하는 풍토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 땅은 곰팡이와 미생물이
왕성하게 물질을 분해하는 힘이 유럽의 죽어 있는 땅에 비해 30배 내지 50배로
왕성하다 한다. 그러기에 신발뿐 아니라 어떤 물건이든 땅에 버려두면 이 미생물의
분해로 땅에 회귀해 버린다.
미생물이 없거나 미약한 유럽의 땅은 박토요, 지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으며, 죽은
땅이기에 같은 단위 면적에서 소출된 곡물의 칼로리량은 한국 땅의 그것에 비해
20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나마 한국 땅은 매년 연작을 해도 지력이 지탱하는데,
유럽 땅은 2년 동안 놀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삼포식 농사를 불가피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서시대 이래 유럽이나 중동의 대지는 비생산적인 황야였다. 황야에 서
있는 사람은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거부당하고 격리된 존재요, 그 황야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밖에 의지할 길이 없다. 곧 신이라는 부성
원리가 그들의 심성을 지배해 내린 점이 땅이라는 모성 원리가 지배하는 한국과
다르다.
그리하여 만물은 고사하고 사람의 죽음까지도 한국에서는 단절인 perfect out이
아니라 회귀할 return to의 죽음이다. 우리말에 죽는다는 것을 '돌아간다'고 하는
것도 바로 죽음이 이 모성 원리에 의한 회귀이기 때문이다. 우리 옛 선조들이
그토록 집념을 가졌던 묘지 풍수의 형국이 곧 여성의 음부를 그대로 유감시켰음은
이 모성인 대지로의 회귀사상을 실감나게 증명해 준 것이 된다. 물론 유럽 사람들도
죽으면 땅 밑인 지하실에 저장하지만 그것은 땅으로의 회귀라는 모성 원리에서가
아니라, 신에 의한 부활을 대기하는 부성 원리에서다.
쓰레기 곧 오물을 둔 유럽 사람과 한국 사람의 의식도 바로 이 살아 있는 지력과
죽어 있는 지력의 차이에서 달라졌다고 본다. 교활한 인지에 의한 산물인 비닐 같은
화학 합성물이 아니면 어느 뭣을 아무데나 버려도 썩어 문드러져 지력으로
되살아난다. 그러기에 아무데나 버렸고, 버린데 아무런 죄악감이나 오예감을 갖질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닳아 문드러진 짚신짝을 나무에 걸어놓아도 도덕적으로
구제받는 그런 쓰레기 문화가 형성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우리 한국인이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는 그런 공해 관념이 박약한 문화적 배경이 이에 있는 것이다.
근심 걱정도 강물에 흘려보내
이같은 풍토의 자정 작용은 박테리아 활성의 대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주거지를 가로 세로 흘러내리고 있는 냇물과의 친근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온 국토의 80퍼센트가 산이랄 만큼 딴 나라들에 비해 유별나게 산이 많기로
촌락의 거의가 산비탈이나 산이 끝난 곳에 취락하는데 예외가 없었다. 그러기에
가파르고 복잡한 산비탈의 지형을 타고 '굽이 굽이 휘돌쳐 우르렁 출렁 풍풍 뒤걸러
좌르르 컬컬' 흐르는 냇물은 한국촌락 취락의 기본조건이었다.
몬순 지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강우량은 세계 평균 강우량의 두 배나 되고
유럽의 세 배나 된다. 이 잦은 비가 모든 쓰레기를 씻고 그 빗물을 쓸어 담아
흐르는 이 냇물이 바로 한국 풍토의 또 다른 자연적인 자정 작용을 했던 것이다.
또 일부러 그 냇물에다 쓰레기를 버림으로써 어느 농토에 흘러들어 거름이 되게끔
했던 것이다. 흐르는지 머물렀는지 모르게 흐르는 유럽의 냇물과는 달리 소리내어
급하게 흘러내리기에 버리면 사라져 버린다.
이 흘려서 또는 흘러서 사라지는 흐름의 사상, 흐름의 정서 역시 한국인의 심성
이해에 중요한 다른 열쇠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장성해서 무슨 근심거리나 갈등이 생겨 우울해져 있으면, 어머니는 무슨
일로 그러는가 알려하거나 물으려든다는 법 없이 조용해진 야밤을 가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박씨를 심었다. 지붕에 박이 커가는데 요강덩이만하던 것이
함지만해지고 장독만해지더니 뒤주만하게, 집덩이만하게 자꾸만 커가는 것이었다.
주인은 그 박의 쓸모를 두고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질 못했다. 근심 끝에 마을에서
가장 어진 노인에게 가서 근심을 말했더니 '허허 이 사람, 강물에다 띄워보내지
그래.' 했다는 것이다.
근심 걱정도 이렇게 흘려보냈으며, 슬픔도, 한도, 후회도, 영화도, 모두 냇물에
흘려보냈던 것이다. 낙화유수에서 종이배 띄워 보내기까지 우린 대중가요에 그토록
잦은 흐름의 정서가 읊어지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닌 것이다.
방랑 도중에 냇물가에 앉아 시를 쓰고는 그 시 쓴 종이로 종이배 만들어
흘려보내곤 했다는 매월당은 너무나 한국적인 흐름의 시인이었다.
우리 옛 선조들이 근심 걱정 등 마음의 요소를 씻어 흘려 버리는 민속으로 유월
유두날 냇물의 상류에 가서 머리를 감았던 것이다. 정다산의 "아언각비"를 보면,
요즈음 잘 깨지고 있는 '계'는 곧 냇물에 가서 마음을 씻어 흘려 버리는 '계'가 그
뿌리라 했다. 비단 유두나 계의 풍습뿐 아니라 아이들이 남의 물건을 훔쳤거나 또
처녀가 마을 총각에게 추파를 받았거나 하면 어머니들은 야밤에 냇물 속에 끌고
들어가 손을 씻기거나 머리를 씻겨 도심이나 정심을 씻어 냇물에 흘렸던 것이다.
마음도 그렇게 흘려보냈는데 쓰레기임에랴. 온통 강변이 쓰레기장이 되고 또
고기가 못 살도록 혹독한 공장 폐수를 냇물에 흘려보내고도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도 바로 이 흐름의 심성이 현대적 조건에 부정적으로 반영된 한 증명이랄
수가 있다.
버리는데 죄책감 안 느껴
한국인의 공해나 쓰레기를 둔 의식구조를 해명하는데 새뮤얼 스토퍼가 제기한
역할 갈등(role conflict)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봄직하다.
가령 이런 경우를 가상해 보자. 나의 다정한 친구 가운데 하나가 직접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앉아 고속도로를 달렸다 하자. 제한 스피드 60킬로미터로 표시돼
있는 지점을 80킬로미터로 달리다가 샛길에서 걸어 올라온 농부를 치었다고 하자.
이 친구의 재판에서 유일한 증인으로 내가 법정에 서게 되었고, 나의 증언 여부로
운전자 잘못이냐 농부 잘못이냐가 가려지게 될 판이다.
한데 사실대로 증언을 하면 다정한 친구가 옥살이를 하게 되고 친구를 위해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게 되면 시민의 정당한 의무와 양심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이
선택의 고민이 역할 갈등인 것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의 집단에 복합 귀속하고 있는
이상 항상 이 역할 갈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따지고 보면 사회 생활이란 바로 이
역할 갈등의 연속이랄 수가 있다.
만약 이 교통 사고를 둔 역할 갈등을 두고 한국인에게 어떤 역할을 택일할
것인가고 무기명으로 묻는다면 90퍼센트 이상이 친구로서의 역할을 선택, 위증을
한다고 대꾸할 것이다.
한데 아서 새뮤얼 스토퍼가 미국 대학생들에게 물었더니 90퍼센트가 정당한
시민의 의무나 양심 편을 선택한 것으로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한국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두고 그 안과 밖이라는 안팎 개념으로 파악한데 비해
구미 사람은 집이나 마을이 평등한 이웃 개념으로 파악한다는 데서 이같은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곧 담이나 울을 둔 안과 밖은 전혀 이질의 공간이요, 장승이 서 있는
마을 경계의 그 밖은 구체적인 인촌이 아니라 자신들 세계 그 밖의 존재다. 사실
이웃이라는 관념과 밖이라는 관념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집에
있는 쓰레기를 우리 집의 영역 밖에다 곧잘 버린다. 그 영역 밖에 버리면
구체적으로는 이웃 집이 있게 마련이지만 쓰레기를 버린다 할 때 이웃이란 관념은
없고 그저 밖이라는 관념밖에는 없다.
이웃이라는 관념이 있으면 죄책감이라도 가질 테지만 밖이라는 관념만이라면
죄책감도 느끼질 않는다. 곧 이것이 우리들 문화에 있어 안팎의 기본적 관계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쓰레기 문제뿐 아니라 관할 구역을 둔 강인한 안팎 관념에서
빚어지는 각종 행정이나 수사 문제가 야기된 것도 그 때문이요, 또 구미에는
노동조합이 이웃 관념인 직능별 조합인데 비해 한국의 그것은 안팎 관념인 기업별
조합인 것도 그 때문이다.
기독교에 있어 인인이란 관념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데 비해, 유교에 있어 집이란
관념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가치관의 차이 때문인지 알 수 없어도 나의 영역
이외는 밖이라는 이 한국인의 개연성이 쓰레기를 버리고 또 공해에 무심,
무감각하며 공공 공간에 있어 질서 의식이 박약한 원천적인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외 정보/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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