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이 껍데기 있는 달걀이라면 한국인은 껍데기 없는 달걀이다. 껍데기가
있으면 달걀 하나하나가 독립할 수 있지만 껍데기 없는 달걀은 유동성 때문에
독립할 수가 없다.
사대부를 예우했던 옛날에는 죄가 있어도 그 죄명을 바로 대질 않고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그 죄를 암시하는 까다롭고 막연한 말을 만들어 썼던 것이다. 이를테면
가문에 음행이 있으면 안방을 가리는 발이 정돈되지 못했다는 뜻으로 '유박불수'라
했고, 청탁을 잘 받고 뇌물을 잘 먹으면 제사 지내는 제기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보궤불칙'이라 했던 것이다.
임진 국난 때 명상인 이원익이 벼슬아치의 기강을 다스리는 사헌부에 있을 때
당시 정승이던 윤두수 대감을 '보궤불칙'했다 해서 탄핵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연후 이원익은 공사로 윤 대감을 찾아가 뵈었으나 조금도 괘씸하게 여기는
빛이 없이 , '어려운 가문 혈족들이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청탁해
오기에 그것을 들어주고 또 그것을 들어주기 위해 응분의 물품을 보내 오면
받아왔다.'고 말하고 그것을 탄핵한 것은 공의 직책으로서 사리에 당연한 것이라고
오히려 칭찬을 했던 것이다.
그런 말을 주고받는 자리에 때마침 시골에 있는 친족이 편지로 혼수를 보태어
달라고 청해온 것이었다. 윤 대감은 그 자리에서 여종을 불러 요전에 여관
아무개로부터 보내 온 비단이 있으니 꺼내 주라고 시킨 것이었다. 여종이 돌아와서
그런 물건이 없다고 아뢰자 윤 대감은 웃으면서, '저 아이들이 공이 자리에 있으니까
숨기려는 것이요.' 하고 굳이 갖고 오라 시켜 봉해 주면서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한다.
--"공사견문"
워낙 대인으로 소문났던 윤두수의 큰그릇을 엿보게 하는 고사이기도 하지만, 우리
옛 관료 사회의 청탁을 둔 어떤 개연성의 한계를 암시해 주는 고사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고사는 청탁이라는 사회악을 제거한다는 데 무엇보다도 그 저해요소가 돼
있는 의식구조상의 고질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유럽 사람이 껍데기 있는 달걀이라면 한국 사람은 껍데기 없는 달걀로 자아
모델의 차이를 들 수가 있다. 껍데기가 있으면 달걀 하나하나가 독립할 수도 있고
또 하나씩 하나씩 운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껍데기 없는 달걀은 그 유독성 때문에 낱낱이 독립할 수도, 또 낱낱이
운반할 수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용기 속에 몇 개씩을 담아 그 용기별로
독립하거나 운반할 수박에 없다. 곧 한국 사회는 '용기사회'이며 그 용기 속에 어느
범위의 집단이 몰아의 공존을 한다. 바꿔 말하면 어느 가족, 가문 또는 직장,
촌락이라는 용기 속에 들어가 개인의 이익이나 고집이나 개인의 감정을 가급적
억제하고 그 용기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 곧 구조적으로 또 전통적으로
체질화돼 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나와 사회의 중간에 위치한 이 가정이나 직장,
촌락의 중간 집단인 용기사회의 가치관이 개인의 가치관에 항상 우선하였고 이
가치관을 배반하면 생존의 위험까지 받았던 것이다.
윤두수가 껍데기 있는 달걀이라면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했듯이 동정은
죄악이요, 청탁은 범죄라는 개인의 소신을 관철할 수 있었을 것이나, 껍데기 없는
달걀로서 용기사회에 공존하는 일원인 이상 개인의 가치관보다 가족과 가문의
가치관이 우선되고 그 가치관에 따른 것이 별반 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도덕적인 찬양을 받기까지 했던 것이다.
용기사회의 가치나 윤리 지상의 전통의 입증을 몇 가지 사례로 들어본다.
인조 5년에 김홍원이란 자가 모반을 음모한 사실을 그의 아내 말치가 한글 편지로
고변을 한 사건이 있었다.
국가 변란을 미리 알리는 중대한 고변인데도 인조는 음모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도대체 남편을 고발하는 처첩이 생기는 것에 노발대발하고, 아무리 미천한
계집이기로서니 윤상을 무너뜨리는 쪽이 대역보다 중죄라 하고 말치를 잡아 가두게
했던 것이다.
또 인조는 병자호란의 국난을 극복한 일대 공신인 최명길과 완풍부원군 이서를
파면시키는 융단을 부렸는데,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이 형조에 근무했을 때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죄를, 아내를 잡아다가 남편의 죄를 입증시킨 일이 각각 뒤늦게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법보다 가족 윤리 곧 용기 윤리를 우선시킨 사실은 한국 특유의 사상적
배경이 필연이었으며, 한국 사회에 있어 수많은 가치관 가운데 가족 윤리의
가치관이 최우선되었기로 청탁이나 뇌물 같은 부정 요소도 이 가치관의 테두리
안에서 저질러지면 죄악시하지 않는 것이 통념이 돼 있었던 것이다.
당상관이면 20촌 안팎에서 청탁
옛날 고을 원님인 수령에게는 저채라 하여 이같은 가문 사람의 청탁에 사사로이
쓸 수 있는 공금이 보장돼 있었으며, 심한 경우는 고을의 부자에게 수령 명의로
저채를 떼어 금품을 약탈하는 악습마저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다산의
"목민심서"에까지도 궁한 친구나 가난한 고모, 형수, 누이들 중에서 도움을 바라는
자가 있으면 불가불 응해 주되 저채를 많이 져서는 안 된다고 쓰고 있다.
비단 벼슬아치뿐만 아니라 여느 사람도 본종은 8촌까지, 외가나 처가는 3촌까지
부양 의무를 지는 것이 상식이 돼 있었고, 또 본인이 형사나 민사 책임을 지지 못할
경우 이상의 부양 범위에 속한 친족이 연대 책임을 지게끔 돼 있었다. 벼슬이
높을수록 이 부양 친족 범위는 확대되어 정 3품의 관찰사쯤만 되면 내외
20촌까지의 친족이 찾아와서 청탁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돼 있었던 것이다.
근대화와 도시화로 한국 사람들도 껍데기가 생기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껍데기요, 심리적으로는 아직도 용기사회에 머물고 있는 그런
야릇한 형태의 달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있어 청탁 풍조의 뿌리는 이같은 용기사회의 모랄이나
가치관과 오묘한 맥락을 하고 있기에 청탁배격운동을 펼치는데 애로와 또 각자
스스로가 청탁을 배격하고 외면하는데 심적인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갈등은 반드시 현대인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평안도를 침입하자 당시 평안감사 윤훤이 이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친 죄가 전란 수습 후에 거론되었으나 인조는 이 주청을 오랫동안
윤허하지 않고 있었다.
사사로운 정과 공무의 갈등을 잘 극복
왜냐하면 윤훤은 바로 인조의 고모인 정혜옹주의 시삼촌이었으며 별나게
용기사회의 윤리, 곧 가족 윤리에 가치를 편중했던 인조였기에 자기 나름의
가치판단에서 비롯된 불허였던 것이다.
한데 이 정을 모르고 정혜옹주가 대궐에 들어와 시삼촌의 구명을 청탁하자 '일단
옹주가 대궐에 든 이상 윤의 죽음을 용서한다면 반드시 청탁에 의한 사정을 위한
것이라 할 테니 나라의 기강을 잡아야 할 나로서 못할 일'이라면서 윤을 잡아
가두게 하고 있다. 곧 용기사회의 윤리와 청탁의 갈등과의 한계를 선명하게 가르고
있음을 본다. 이 갈등의 다른 해소 유형으로 다음과 같은 뼈저린, 하지만 교훈적인
상황도 있었다.
지재 민진후가 형조판서로 있을 때 누이동생의 시집인 참봉 홍우조의 집에
들렀었다. 지재는 원래 술을 즐겼기로 누이가 술을 내왔는데 안주는 다만 김치 한
가지뿐이었다. 술맛이 매우 좋다면서 자꾸 불러 마시면서 안주 없음이 섭섭했는지,
'이른바 유주무효로구나.'를 연발했던 것이다. 실은 그 바로 전날이 시아버지인 홍
참봉의 생신날이라 술을 담갔고 또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았기로 남은 고기가
있었지만 당시는 국법으로 금육을 하고 있던 때라 민공의 법지키는 것이 겁이 나
감히 고기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비녀라도 잡혀서 안주를 마련해 오라는 말에 누이는 이 오빠의 유주무효가
안타까워 이실직고를 한 것이다. 이에 민공은 어서 불고기로 구워들이라 하여 실컷
먹고 일어섰다. 누이는 이 법을 어김을 너무 살피지 마시라고 옷자락을 붙들고
간곡히 청탁을 했지만 문 밖에 나선 민공은 밖에 대기하고 있던 아전들에게, '이
집은 범도를 했으니 이 집 종을 잡아 가두라.'고 시켰던 것이다.
잡아 가둔 다음 민 판서는 자기의 봉록 중에서 28냥의 속전(벌금)을 대납하고 그
종을 풀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홍 참봉은 '공이 법을 엄하게 지키는 것은 가상한
일이나 어찌하여 먹고 나서 금하는가.'고 그 모순을 따지자 민공은 이렇게 말했다.
"지친의 정으로 누이가 권하는데, 어찌 먹지 않을 수 있으며 그 사실이 임 내
귀에 들어온 이상 어찌 사정을 쓸 수 있겠는가."
비록 지친이라도 용서를 하거나 청탁을 받지 않으면서도 반드시 뒷일은 자기가
담당하였기로 용기사회의 모랄에서 책한다는 법이 없었다 한다.
이같은 청탁 처리 유형은 오늘날의 청탁을 둔 갈등 처리에서도 퍽이나 시사한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 밖에 오늘의 청탁 풍토에 온고이지신의 슬기를 주는
청탁 처리 유형을 몇 가지 더 들어 보기로 한다.
참판인 유의가 홍주목사로 있을 때 금정 찰방이던 다산 정약용이 편지로써 공사를
의논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회답이 오지 않아 화가 나서 들어가
따졌다. 유 목사가 시동으로 하여금 서간을 담은 상자를 갖고 오라 하여 쏟아
보였다. 그 편지들은 모두 조정 귀인들로부터의 사서들이었는데, 하나도 뜯어 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사서는 뜯어 보지 않은 것으로 청탁에서 고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산도 공사를 공문으로 하지 않고 사서로 한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다.
성종 때 덕천 원이던 양관은 부임하러 갈 때 소학과 이백의 시집, 활, 거문고
그리고 학 한 마리만을 들고 갔었다.
그리고 조정에서나 고관대작 그리고 일가 친척들이 청탁해 오면 방안에서 기르는
학을 어깨에 얹고 나아가 공손히 읍만 할 뿐 묵묵부답만 하니 무색해서 돌아가곤
했다 한다. 이 양학척청은 그 후 선비 사회의 한 법통이 돼 내렸다 한다. 오금이
가렵도록 멋있는 청탁 처리 유형이 아닐 수 없다.
정신적 원천은 선비정신에서
심지어는 청탁을 해오면 그 청탁과 정반대의 조처를 취하는 청탁 처리 유형도
있었다. 이조판서 허성이 그러했다. 어느 한 조관이 지방으로 전근될 차례가 되자
허 판서에게 남도에 보직해 줄 것을 청탁을 했다. 발령이 나고 보니 평안도의
오지인 변방 고을이었다. 어느 문사가 성균관에 보직을 청탁하자 오히려 변방의
교수직을 주는 등 반드시 청탁의 역처리를 한 것이다. 승직도 나라에서 좌우하던
때라 권모술수가 많은 일운이라는 중이 단속사에 옮겨가고자 허 판서에게 거짓
청탁하길 '경치 좋은 서도의 영명사에 옮기고 싶습니다. 만약 단속사에 가게 되면
소승의 일은 그르치게 됩니다.' 했다. 수일 만에 단속사에 옮기라는 비가 내렸던
것이다.
지금도 예외는 아닌 줄 아나 그 고을에 특산품이 있으면 그 특산품에 얽혀
공사간의 청탁이 성행하게 마련이다. 옛 선비 법도에 어느 한 고을의 원이 되면 그
고을의 특산품은 전혀 먹지 않거나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 그를 둔 청탁을 아예 할
수 없게 하는 사전 처리도 유형화돼 있었다. 기건이 연안부사로 있던 6년 동안 그곳
명물인 붕어를 한 마리 먹지 않았고 제주목사로 있던 3년 동안 복어 한 점 입에
대지 않음으로써 그에 얽힌 공사 청탁을 사전에 막았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우리 선조들의 청탁 처리 유형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실천 가능한
처리 유형인 것이다. 다만 그러할 수 있는 용기의 정신적 원천으로 옛날에는 선비
정신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그 정신적 원천이 증발되고 없는데 용기사회의 청탁
풍토만은 여전하다는 점에서 보다 고된 양심적 성숙과 용기의 시련이 요구되고 있다
할 것이다.
그외 정보/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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