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에 갔을 때 상석에 앉는 사람이 웃옷을 벗으면 좌중이 모두 따라 벗는다.
상석의 사람이 벗지 않는데 벗는다는 것은 이 동시 동조성의 한국적 생리에
배반되어 결례나 무례감이 수반된다.
한국인의 평균의식은 일상 생활 속에서 동시동조성 행위로 곧잘 나타나기도 한다.
곧 남들과 동조함으로서 평균에서 모나지 않으려 한다.
외국의 식당에 들를 때마다 항상 불안한 느낌을 못 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못 면하고 말 것이다. 그 불안감은 반드시 메뉴의
내용을 잘 몰라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구미에 맞거나 개성을 내세워 음식을 먹을 수
없게끔 되어 버린 우리 농촌사회에서 심신이 굳어 버린 전통적 자질이 그렇지 않은
자질의 문화와 부딪쳐 생긴 하나의 문화충격 때문인 것이다. 곧 외국 식당에
들른다는 것에 '문화노이로제'가 돼 있다 할 것이다.
보스턴의 하버드대학에 들른 것은 첫눈이 푸짐하게 내리던 날이었다. 그곳 교수
식당인 패컬티 룸에서 한국사 교수의 점심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이 미국인 교수는 메뉴를 들더니 하버드대학에서만 먹을 수 있는 진미라고 자랑을
하면서 말고기 스테이크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물론 메뉴에는 쇠고기도, 닭고기도,
돼지고기도 있었지만 나는 충동적으로 그 교수가 선택한 말고기를 따라 선택했던
것이다. 이전에 말고기를 먹어 본 일도 없고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품고 있는 듯한 혐오감보다 한번 먹어 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한결 웃돌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도 나는 초대자가 선택한 말고기를 선택하고서
먹는 도중이나 먹고 난 후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 미국인 초대자가 말고기 요리를 먹도록 권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말고기가 언짢으며 먹지 말도록 권했는데도 나는 나의 본심을 배신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과 동조해야 한다는 이 동시 동조성(Simultaneous Action) 행위가 필자에게
유별나게 강한지는 몰라도 구미인과 비겨서 한국인에게 보편화돼 있는 하나의
개연성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비단 구미의 낯선 식당이 아닌 한국의
식당에서도 이 개연성은 예외가 아니다. 웃사람이나 어려운 사람들과 어느 식당에
가서 메뉴를 선택한다 하자. 아마 웃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에 앞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선택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같은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결례요,
무례가 되며 버릇없다는 마이너스 이미지로 보상받게 마련이다. 상대방에게 먼저
메뉴를 선택하게끔 양보를 하고 상대방이 어떤 메뉴를 선택하면 웬만큼 개성이 강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 상대방이 택한 메뉴에 동조, '나도...' 하는 것이 상식이 돼
있다. 곧 자신의 구미를 무시하고 동조성 행위를 한다.
서양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개성이나 구미에 맞게 세분해서 가려 먹는 그
개별성은 이 동조성의 문화를 지닌 우리를 아연실색케 하고 따라서 문화노이로제에
걸리기에 십상이다. 주스 선택도 오렌지냐, 레몬이냐, 토마토냐..., 수프도 너댓 가
지,
야채에 쳐 먹는 드레싱도 너댓 가지 가운데서 선택해야 한다. 고기도 바싹 굽고
피가 익지 않도록 굽고 중간으로 굽고 하는 기호 표시를 해야 하고 커피도
아메리칸이냐, 프렌치냐, 터키냐, 선택하면 설탕은 넣느냐 안 넣느냐, 넣으면 각설탕
하나냐 둘이냐..., 끝없는 선택이 강요된다.
한국에서는 술집에 가도 누군가 상석에 앉는 사람이 웃옷을 벗으면 좌중이 모두
따라 벗는다. 상석의 사람이 벗지 않는데 벗는다는 것은 이 동시 동조성의 한국적
생리에 배반되어 결례나 무례감이 수반된다.
벗고 싶은 사람도 있고 벗기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며 감기 기운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주머니 속에 거금이 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같은 개별성이 무시되고
동시 동조해서 벗도록 강요를 받거나 또 벗지 말도록 암시적인 압력을 받기도 한다.
미국의 유치원이나 각급 학교에서 아이가 감기가 들면 여름에도 스웨터를 입혀
보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감기 기운이 있다 해도 제복 이외에는 안 된다. 짧은
바지나 감색 이외의 바지는 안 된다. 동조성에 위배되는 일은 안 되기에 학교를
쉬게 할 수밖에 없으며 굳이 보낸다면 감기에 걸렸다는 개별성이 보호받질 못하고
동조의 형식과 논리를 준수해야 한다.
수업에도 이 동조성의 논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선생님이 '알았습니까'고
물으면 교실 안의 모든 어린이는 모르는 아이들까지도 '알았습니다'고 동시에
동조하며 대답하는 것이 선생님에 대한 도리요, 도 선생님도 그 동시 동조성을
예상하고 그렇게 묻는다. 미국 아이들처럼 모르면 끝까지 모른다고 버틴다는 것은
개별성의 논리이기에 착한 아이가 못 된다.
우리나라 음악에 같은 음정, 같은 음계, 같은 음색, 같은 선율로 부르는 제창은
있어도 다른 음정, 음계, 음색, 선율로 화음을 내는 합창이 발달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동시 동조성의 논리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각기 다른 악기가 동시 동조하는 합주는 있어도 화음이 생명인 교향악이 발달되지
않은 것도 음악의 발달이나 후진과 관계없이 이같은 동시 동조성의 논리에 보다
원천적인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따지고 보면 산많고 물많은 우리 한반도는 도처가 관광지일 수 있다. 곧
산수면에서 한국의 관광지는 광역화돼 있는데도 우리 한국인은 유수한 몇몇
관광지에 집중한다. 광역 관광자원을 협역화하는 이 집중현상도 '남들이 가니까
나도' 하는 동조성이 원흉이랄 것이다. 동해안 도처가 한적한 해수욕장 투성인데
굴지의 해수욕장만이 시장처럼 들끓는다.
또한 겨울에 눈덮인 설악산이나 삼복이 지나 쇠별꽃 만발하는 지리산 능선은 다른
철에 못 느끼는 자연감과 낭만을 지니고 있다.
한데 우리 한국인은 삼복철이니 단풍철이니 어느 제한된 시한에만 동시적으로
집중한다.
각 기업체에서 겨울휴가니 춘추휴가는 별반 인기가 없고 여름휴가만을 선택하는
이 집중성도 동시 동조성의 시간논리 때문인 것이다.
각종회의에서도 개별적이고 반대하는 의사를 존중한다기보다 그 개별적이고
반대하는 의사를 동조화시키는데 시간을 낭비한다. 곧 반대의사를 변질시키는
과정이 곧 회의요, 만장일치이어야만이 선으로 여긴다. 투쟁이나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에서 반대의사는 약이 되기에 아무리 그 반대의사가 합리적이고 발전적이라
해도 지탄받고 경우에 따라 폭력으로 제재받기까지 한다. 그러기에 반대의사는 항상
침묵 속에 사장되고 만다.
유태교의 사교 회의에서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전원일치가 되는 안건은 무효가
된다는 회의 원칙이 있다 한다. 곧 반대의사가 없이는 핵심으로의 진실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개별성을 존중하는 세계의 필연인 것이다. 미국 아이들은 서로 낯선
아이들끼리 손쉽게 캐치볼하여 놀 수 있고 그것이 상식이다. 볼만 들고 집을 나가면
또래끼리면 누구나 친구가 된다. 각기 다른 음정과 선율이 화음이 되듯 또
반대의견이 반영되어 전체 의사가 이뤄지듯 개별성이 곧잘 화를 이룬다. 한데
한국의 아이들은 항상 놀던 아이가 아닌 낯선 아이는 캐치볼에 넣어 주질 않는다.
개별성은 배척받고 동조성만이 가치를 이루는 논리는 이같은 어린이들 사회에서도
기승을 부린다.
개별성의 논리는 '미이즘(meism)'을, 동조성의 논리는 '위이즘(weism)'을
탄생시킨다. 위이즘에 있어 미이즘은 배척받고 억압받는다. 모든 것이 자급
자족되는 하나의 완전 사회였던 우리 전통적 농경공동체 사회에 있어 위이즘에
어긋나는 미이즘은 배척받고 소외받는 비가치였다. 동조성의 평균인간보다 잘나도
또 못나도 그 사회에서는 소외당했던 것이다. 유별나게 머리가 좋거나 기발한
발상이나 행동을 하거나 색다른 차림새를 해도 소외당한다. 내의 없이 한복만을
입는 것이 평균인간의 옷차림이었던 예닐곱 살 때의 필자는 메리야스 내복을 속에
입었다는 것만으로 그 또래의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했던 괴로운 기억이 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버지가 서울에 다녀오면서 선물로 사온 노란 스웨터를 한사코 입지
않고 버티었던 기억도 선하다. 겉에서 보이지 않는 내복의 비동조성에만도 따돌림을
당한 판인데 하물며 스웨터임에랴. 한국인의 도시성, 동조성은 한국인이
단일민족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 역시 어느 시한 안에 어느 농사일을 반드시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비한계 벼농사구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곧 모를 심는 적기간 안에 모를 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시한성은 동시성을
요구하고 또 혼자만으로써 그 시한성의 일이 불가능하기에 한마을 사람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는 데서 동조성이 요구된다. 곧 혼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개별성 곧 미이즘을 불안케 하고 공동체로서만이 가능한 농사구조가 동조성 곧
위이즘을 조장케 한 것이다. 미이즘은 농사를 망치고 따라서 굶게 한다. 북한계의
도작 공동체사회에서의 생존조건은 위이즘이다. 또한 한 수원에서 많은 논에 물을
끌어대야만 한다는 이 수도작의 조건이 동일 시기에 공동의 물을 끌어 공동으로
평균해 나눠 갖는 동시성, 동조성의 논리를 체질화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이 동시성,
동조성이 가치화되고 가치관이 됐으며 한국인의 가장 한국인다운 한 자질을
이뤘다고 본다.
그외 정보/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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