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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추종병

by Healing New 2020. 9. 27.

  주체인 나를 일상 대화에서 증발시켜 버린 이유는 나의 의견이나 창의력이나 
행동이나 책임을 주변상황에 전가시키고 주변상황 속에 자기 자신을 극소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별나게 자주 쓰는 말로 '별수 없다, 할 수 없다. 어차피, 
차라리...'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말들은 자연이나 세상의 흐름에 내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을 포기하거나 
체념하고 되는 대로 내어 맡긴다는 말들이다. 곧 어떤 상태나 상황에 접했을 때 
개인으로서의 어떤 작용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날이 가물면 내가 가물게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의 조화이기에 그것을 
어떻게든지 극복하려 들기보다는 '할 수 없다.'고 체념해 버린 뒤 '어차피 하늘의 
뜻대로, 세상 돌아갈 대로 되겠지.' 하며 그것에 거역하고 자신의 의지를 세워 
노력하는 것을 포기한다. 의지나 노력보다 '차라리' 남들처럼 행하는 대로 동조하는 
편을 택한다.
  이렇듯 나의 의지와 나의 노력과 나의 창의력을 남이 하는 대로의 동조 속에 
소멸시키려는 성향이 한국인의 의식구조 가운데 강렬한 하나의 자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미사회에서는 '나'라는 개념이 나를 둘러싼 자연이나 세상이나 '남'들이라는 
개념보다 한결 중요하고 또한 선행된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상 대화에서 몰아적인 한국인은 '나'란 주어를 잘 쓰지 않는다. 이에 
비해 주아적인 구미 사람들은 반드시 주체인 나로부터 말이 시작된다. 나를 꼭 
내세우는 뜻은 그 행동에 책임을 지는 중심인물이 나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나는 
그 모든 행동에 최종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
  이렇게 우리 한국인이 주체인 나를 일상 대화에서 증발시켜 버린 이유는 나의 
의견이나 창의력이나 행동이나 책임을 주변상황에 전가시키고 주변상황 속에 자기 
자신을 극소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잘못된 것은 내 탓이 아니라 부모탓, 조상탓, 세상탓 심지어는 
무덤탓으로까지 돌리고 있다. 내가 일을 잘못했어도 잘못하게 된 주변 여건에 
핑계를 돌리고 내가 무엇인가를 파손했을 때도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 잘 
부숴지게 만들어 놓았거나 부숴질 만한 위치에 놓여진 것 때문이라며 외부상황에 
책임을 전가하려 든다.
  이같은 한국인의 자아증발은 마치 폭풍 속에서 배를 타고 가는 상황과 비유될 
수가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배가 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하자. 그 배에 탄 
사람들은 그 상황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달리 말하면 이때의 책임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배의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기에 이 상황 변화를 
조절할 수 없는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 된다.
  이것이 곧 한국인의 책임관이며 '별수 없다'는 사고방식의 원천인 것이다.
  이같은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세상 살아가는데 뿐만 아니라 어느 한 
기업의 부서에 속했을 때도 예외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한국인과 
한국의 기업이 이 시점에서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미국 경영학에 '전파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제1종 
인간부터 제4종 인간까지로 나누고 있다.
  제1종 인간이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변화를 즐기며 창의적인 유형의 
인간이다. 새 상품이 나오면 일단 모험적으로 사고 보는 사람이요, 새 유행이 번지면 
누구보다도 먼저 그 유행을 취하고 본다. 그들이 즐기는 말은 모험이요, 창조요, 
도전이며, 개성인 것이다. 때문에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려 하기에 위험이 
적잖이 수반되는 그런 인간형이기도 하다.
  제2종 인간도 변화나 창조를 좋아하지만 제1종 인간과는 달리 자신의 변화가 
남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고 남들이 따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그런 
변화와 창조를 추구하는 인간형이다. 새 상품이나 새 유행이 들어왔을 때 일단 
취하고 보는 제1종 인간과는 달리 관심을 두고 관망, 이 새것을 많은 사람이 채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설 때 소신을 갖고 그 새것을 채용하는 사람이다. 많은 타인을 
의식하는 창조적 인간이기에 이같은 인간층을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세일즈 사회에서는 이러한 제2종 인간층을 특히 중요시한다. 
다음으로 제3종 인간은 변화나 새로운 것을 대체로 싫어하는 인간형이다.
  그저 앞서 가거나 돋보이거나 빼어나질 않고 무난하게 나름대로 살아가려는 
인간층이다. 새 상품 새 유행도 반수 이상이 취한 후에야 남들이 다 하니까 택하는 
그런 추종자(fallower)인 것이다.
  아이들의 재능이나 소질은 아랑곳없이 남의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니까 우리 
아이도 피아노를 가르치고 아이들의 실력이나 소질과는 상관없이 많은 남의 
아이들이 법과에 진학하니까 내 아이도 법과에 진학시키는 그런 유형으로 대체로 
온건하고 착실하면 실패를 하지 않고 남들에게 신뢰받는, 그래서 사윗감으로서 
안전하다는(?) 소리를 듣는 인간형이기도 하다.
  끝으로 제4종 인간은 전통주의자로서 제1, 2, 3종 인간에 의해 시대에 뒤진 
보수주의자라고 지탄받지만 오히려 1, 2, 3종 인간들을 가볍고 줏대 없고 
채신없다고 얕보며 자신의 행동에 자부와 긍지를 갖고 있는 인간형이다.
  새로운 상품이나 유행이 거의 시들어갈 무렵에 택하거나 끝내 택하지 않는 것이 
제4종 인간의 생리인 것이다.
  이 네 가지 인간형 가운데 제1종 제4종 인간은 각기 5퍼센트 미만으로 
극소수이며 opinion leader인 제2종 인간이 20퍼센트 그리고 나머지 70퍼센트는 
follower인 제3종 인간인 거이다. 물론 나라에 따라 이 인간형별 구성비는 달라져 
미국 사람은 제1종 인간의 구성비가 더욱 커진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인들은 제3종 
인간의 구성비가 압도적으로 크다. 왜냐하면 한국인의 평균의식이 이 제3종 인간을 
양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제3종 인간층의 우세 때문에 우리 한국의 산업구조도 이 제3종성을 못 면하고 
있다. 곧 한국의 오늘날 산업은 온통 3종성뿐이다. 선두적이고 창의적인 기술 
개발은 가급적 기피하고 일단 선진국이나 다른 회사가 1종성 내지 2종성의 시행 
착오를 거친 기술 혹은 제도나 상품을 선택해 생산한다. 그러기에 노벨상에 빛나는 
출중한 학자, 경영자, 창의력 있는 기술이나 경영 기법이 탄생하지 못한다.
  요즈음 불어닥치고 있는 불황은 여러 각도에서 그 원인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우리 산업구조가 아작도 3종성을 못 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언젠가는 닥치고 말 
한계점에 우리 산업이 와 있다는 신호로서도 이 불황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불황을 극복하고 또 모든 기업이 발전하고 상향하려면 여태까지의 3종성 기업 
경영에서 2종성 기업 경영으로 발돋움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하루가 다르게 국제화되는 지구촌에서 그 존재 가치를 누리고 살려면 제3종 
인간성으로부터 제2종 인간성으로의 비약이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인 것이다. 이는 
무책임한 인간으로부터 책임 인간으로, 추종적 인간으로부터 창조적 인간으로의 
발돋움이어야 한다.
  물론 셀러리맨의 모든 일에 제2종성인 창조성만을 필요로 한다고는 보진 않는다. 
오히려 창조성 때문에 망치는 일의 분야도 있다. 이를테면 부기 같은 일에 창조성을 
발휘하여 제멋대로 장부를 만들어 놓았다가는 큰일이다. 그러나 창조성이 꼭 필요한 
기술 분야, 관리 분야, 영업 분야에까지도 우리 산업의 비대한 추종자층 때문에 
그것이 용납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게 돼 있다. 곧 창조성은 현 기업의 체제와 
대립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창조성이 좌절되지 않고 
상달되도록 체제의 체질개선도 연구개발되어야 하겠지만 종업원 각자의 창조적 
활동에 대한 고과에 보다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또 종업원들도 자신의 
의견이나 창의가 인정되지 않는다 하여 제3종 인간으로 복귀하거나 회사를 뛰쳐 
나온다면 이것 역시 모두 비창조적인 행동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리능력이라 하면 
자신의 부하관리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웃사람을 어떻게 
컨트롤하여 잘 운용하는가의 관리능력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웃사람의 이해가 
없다고 창조성을 굽힌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창조성이 결여돼 있는 증거인 것이다. 
웃사람에게 자신을 정확히 이해시키고 생각하는 법을 고치고 직장의 분위기를 
바꿔가며 자신의 창의력을 살려가는 것이 바로 자신의 창조성인 것이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하더라도 궁지에 몰릴수록 이에 도전하며 상황을 바꿔가는 것이 곧 
책임 인간이요, 제2종 인간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제2종 인간층을 확보하느냐에 따라서 기업성장의 관건이 달려 
있으며, 얼마나 많이 제2종 인간성이 성하느냐에 따라서 개인의 성공여부가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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