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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정보/버릇

비축병

by Healing New 2020. 9. 27.

  '해 묵은 쌀밥 먹는 사람하고는 말도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한 해 두 해를 
넘겨가면서 곡식을 축적해 두는 행위. 곧 그런 구두쇠하고는 상종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한말 고종 초기에 정가소라는 벙어리가 서울 남북촌의 양반들 사랑방을 
전전하면서 무엇의 팬터마임으로 당시 세태를 풍자하고 다녔다 한다.
  한말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독립과 개화운동을 선도했던 윤효정이 쓴 "최근 
60년의 비록"이란 책을 보면 이 정가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손짓 발짓과 이목구비를 형형색색으로 놀려 흉내내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혼연히 알게 하는 것이 말함과 다를 것이 없고, 오히려 말로 하는 
것보다 재미있고 자상하니 능히 여러 사람을 웃기는 고로 별명이 정가소라, 남북촌 
여러 재상의 집을 돌아다니며 당시 세태의 선악과 시비를 익살하는 것을 보면 그 
낱낱이 춘추사필의 뜻을 지닌지라. 사동대신 김병국의 집에는 정가소가 제집처럼 
드나드니 작은 사랑이나 청지기 방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포복절도케 하니, 그 중 
흥인군의 곳간점고하는 흉내는 일품이더라.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의 형 이취응으로 대원군과 사이가 나빠 대원군 집정시절에 
푸대접을 받다가 대원군이 실세한 후, 민씨 세도에 업혀 무척 재욕을 충족시켜 
소문나 있던 분이다.
  그의 집에는 이 재물을 저장하는 곳간이 아홉 개나 즐비하여 재백을 가득 쌓아 
놓고 있었으며, 새벽에 일어나면 지팡이를 짚고 이 곳간점고하는 것이 낙이었다. 
제1곳간에서 고지기로 하여금 자물쇠를 열게 하여 '두둥실'하고, 제2곳간에 들어가 
'지화자' 하며 제9고에 이르기까지 점고춤을 추며 문안을 드렸던 것이다.
  제7고에는 생치와 동태 등 생육물이 쌓여 여름철에 썩은내가 진동, 소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권해도 흥인군은, "여는 그 식물됨을 애하는가. 오는 그 적취됨을 
애할 뿐이노라." 하며 나누어 주질 않았다 한다. 정가소의 풍자 팬터마임의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초검은 흥인군의 '적취' 취미가 만인의 핀잔을 받을 
만한 공감력을 가졌다는 바로 그 점이요, 그 공감력 때문에 정가소의 소재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흥인군의 축재가 권력형 축재였다는 점에서 반감과 
핀잔의 공감력을 형성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 공감력은 비록 그의 축재가 
권력형 축재가 아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었다 해도, 그 적취해 두는 그의 
습벽에 대해서도 충분히 형성될 수 있는 공감력이다. 곧 권력형 축재와 적취습벽이 
복합하여 반감력을 팽배시키고 있다.
  대체로 우리 한국인은 정당한 재물일지라도 그것을 활용하질 않고 적취해 두는 
행위는 부정적으로 비가치화하는 성향이었다.
  구두쇠...하면 옛날 촌락공동체 사회에서는 인격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당했던 
것이다.
  '해묵은 쌀밥 먹는 사람하고는 말도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한 해 두 해를 넘겨가면서 곡식을 축적해 두는 행위, 곧 그런 구두쇠하고는 
상종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물론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은 맛을 내고자 묵히는 
것이 기에 몇 해를 넘겨도 적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옛 선조들에게는 절용은 
미덕이었지만 이 '적취'는 인색과 표리관계에 있는 악덕이었다.
  지금도 불황이다, 비상시다 할 때 임박해서 사재기하는 매점 행위가 있을 뿐, 
평상시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황이나 비상시를 대비하여 생활필수품을 비축해 
두는 집은 극소수일 것이다. 이같은 비축의 전통이 박약하기에 불황이나 비상시에 
매점 공황이 일어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가옥구조에 지하실이라는 건 없었다. 구미구조의 개량주택이 
들어서면서 지하실이 생겼으나, 전통적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에는 이 지하실의 
쓸모나 효율은 보잘것이 없었다. 
  대체로 반드시 지하실이 아니어도 되는, 연탄이나 쌓아 두는 창고 구실 이상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법은 없다.
  미국의 여러 집에 초대되어 집구경을 하고 난 다음, 비로소 지하실의 본 기능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에서 일종의 문화공백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물론 미국 
가정의 지하실도 잡다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이기도 하지만, 예외없이 그 일부는 
식품저장고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예부터 중북구에서는 지하실이란 쇠고기나 야채 등 식품을 저장하는 
식품저장고였으며, 그 전통이 살아 있어 지금도 포장된 각종 깡통 식품 음료들이 
산적돼 있었던 것이다.
  식품은 이 지하실에만 비축돼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 가정의 부엌에는 예외없이 
거대한 식품저장을 위한 폭 1미터 내지 2미터 남짓한 장이 놓여 있다. 이 장에는 
같은 종류의 식품깡통이나 건조음식이 수십 개씩 쌓여 있어 마치 슈퍼마켓의 
진열장을 보는 것만 같다.
  뿐만 아니다. 대개의 가정에는 이 지하저장고, 부엌저장고 말고 ㄷ프리저라 하여 
높이와 깊이 각 1미터, 폭이 2미터 남짓한 거대한 아이스 박스가 비치돼 있다. 
뚜껑을 열어 보면 비닐 속에 든 쇠고깃덩이를 비롯, 냉동을 필요로 하는 각종 
식품이 가득 들어 있다.
  흥인군의 곳간처럼 제9고까지는 없다 해도 대체로 제3고까지는 적취를 해놓고 
사는 것이 미국 가정 생활의 상식인 것이다.
  미국은 모든 식량을 비롯, 물자가 풍부한 나라다. 또한 바로 5__10분 동안만 차를 
몰면 산적된 슈퍼마켓에서 언제든지 식품을 살 수도 있다. 한데 왜 이처럼 대량의 
식품을 가정에다 비축해 두어야만 하는가. 오히려 물자가 빈곤하고 입수가 힘든 
우리나라에서 이 적취의 문화가 발달했음직한데 오히려 그 반대의 문화 현상이 
빚어졌을까. 이 의문을 풀어 보는 것도 한국과 구미의 문화비교의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식량결핍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못 된다. 
만약 식량결핍이 그같은 비축의 문화를 형성시킨다면, 그 잦았던 전란과 흉년을 
겪은 우리나라에서 보다 그 비축의 문화가 발달했을 것이다.
  오히려 근원적으로는 미국인의 선조인 유럽 인이 그 전통문화의 일부로서 누려온 
비축의 관습이 작용한 것일 게다.
  고대 사학자요, 지리학자였던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란 책에 보면, 게르만의 
생활 양식의 특징으로서 그들은 땅굴을 파고 식량을 그곳에 많이 비축해 덮어 
둠으로써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한다고 적고 있다. 곧 식량의 지하실 저장은 
이같은 전통적 생활 문화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식품을 
저장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고위도 지방인 중북유럽에 있어 1년이란 풍요한 
여름과 결핍의 겨울로 양분된다. 곧 1년의 절반이 양식을 구할 수 없는 겨울이다.
  북북 유럽에서 관광버스가 영업하고 있는 것은 겨우 4월에서 9월까지 6개월이요, 
나머지 반년은 완전한 휴업 상태로 들어간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그 이치가 
들어맞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중북구 지방에서는 뼈저리게 실감나는 우의성이 
있는 것이다. 곧 그 지루한 겨울을 위해 비축을 하지 않으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죽는다.
  이 중북구의 비축하는 문화가 미국 사회, 특히 고위도에 속하는 중서부의 혹심한 
기후대 속에 이민과 더불어 도입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순리가 아닐 수 없다.
  미국 개척시대의 역사를 뒤져 보면 비축의 문화 없이는 미국의 서부개척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겨울에 대비하여 땅 속 깊이 
감자를 묻어둔 것이 관리 잘못으로 썩어버려 수백 명이 아사했던 이야기, 겨울날 
사슴 한 마리를 잡아 그 고기를 땅속에 묻어 보존함으로써 아사를 면했다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 등 서부의 생활사는 어떻게 겨울을 살아내는가의 역사였으며, 이같은 
게르만 민족의 비축의 문화가 있었음으로 해서 서부 개척이 가능했다고도 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도 겨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겨울의 길이와 질이 중복구의 
그것과는 다르다. 나뭇잎이 지고 넉 달만 지나면 싹이 돋는다. 겨울에 대비하지 
않으면 죽음에 직면하는 중북구처럼 그런 심각한 겨울이 아니기에 비축의 농도가 
묽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선조 대대로 한마을에서 살아왔기에 한마을의 뉘집 뒤주 속에 들어 있는 
양식의 분량까지 서로 알고 산다. '환난상휼'이라는 향약의 가르침이 말해 주듯이 
서로 나누어 먹고, 또 언제든지 빌어먹을 수 있는 촌락사회 모랄이 확고하여 
엄동설한에 양식이 떨어졌다 해서 걱정하거나 각박해진다는 법이 전혀 없었다. 
해동하면 빌어먹은 양식을 품으로 갚을 수 있고 또 빌려준 것을 어떤 형태로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영주성 정착사회의 조건 때문에도 굳이 양식을 비축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독립된 개인의 이산이 자유자재로운 이동성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문화가 비축의 필요를 약화시켜 온 것이기도 했다.
  곧 독립적인 개인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상호적인 집단성이 지배하는 
사회이기에 가급적 생활필수품은 서로 나눠 쓰도록 하는 모랄이 발달하였으며 이 
오랜 모랄의 전통이 나눠 쓰질 않고 적취하는 행위를 악덕시하기에까지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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