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all of nothing이 아니라 alternative라고 말한 것은 처칠이다. 최선책
하나만을 들고 그것이 아니면 끝장이라는 것은 방울샘병이다. 항상 차선, 차차선책을
들고 꾸준한 횡적모색을 해야 한다.
옛날 시골에서는 올망졸망한 방울샘들을 흔히 볼 수가 있었다. 논물을 대기 위한
방죽이 오래 되면 흘러든 유사로 담수능력이 없어져 쓸모없게 된다. 그럼 몽리
농민들은 각자가 그 못 쓰게 된 방죽에다 올망졸망 샘을 파 사유화한다. 그 사유
샘들을 방울샘이라 한다. 몽리 농민끼리 서로 횡적으로 타협하여 준설을 하면
몽리수량도 많아지고 서로 좋을 텐데 몽리면적, 몽리거리 등 약간의 이해 때문에
타협 못하고 방울샘이 생겨나고 만다.
이 방울샘이 우리나라 도처에 있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 한국 사람의 횡적인
유대력이 결여돼 있다는 단적인 증거로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서로 횡적으로
타협 못하고 손해보는 것을 '방울샘 판다'고 빚댔던 것이다.
집중 TV안테나가 없는 아파트나 집합 주택을 보면 예외없이 안테나 숲이
난립하고 있음도 방울샘병의 소치다. 더불어 사는 이웃끼리 횡적 유대력이나 횡적
타협력만 작용했던들 각자가 돈들여 안테나를 세우느니 단일 안테나를 세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그 많은 약광고들을 보면 비타민제만 해도 10여 종이요,
간장약만 해도 10여 종에 이른다.
물론 메이커들은 서로 다르지만 약효는 대동소이하다. 그 약들을 수요로 하는
시장은 한정돼 있는데 서로의 시장을 빼앗고 빼앗기며 돈을 처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메이커끼리 횡적으로 타협을 하여 약종을 달리하고 서로의 약종을 침범하지
않기로 한다면 이익은 배가, 삼배가 될 것이다. 잘 알려진 일이지만 스위스에는 세
개의 세계적인 제약회사 있다. 가이기 치바, 로슈가 그것이다.
이 세 회사마다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연구소와 연구원을 거느리고 그 많은 약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세 회사 사이에 서로 중복된 약을 낸다는 법은 없다 한다. 서로
횡적으로 손을 잡고 타협해 가면서 자기네 제품의 질을 높여 세계적 메이커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갈비가 잘 팔린다면 너나없이 그 인근에 갈비집이, 주물럭이 잘 팔린다면 그
인근에 주물럭집이 난립, 서로가 원조를 내세우고 피를 보는 것도 방울샘병이
얼마큼 저변화돼 있는가의 본보기다.
일전 재벌 그룹들이 문어발 기업을 감량한다는 보도 기사를 보니 한 그룹당 3,
40개의 문어발들이 동일 업종을 두고 서로 엉켜 서로의 문어발을 뜯어먹고 있는
양상이 처절하기까지 했다. 주물럭이 잘 되면 너나없이 주물럭집을 내듯이, 세탁기가
잘 된다면 너나없이, 전기밥솥이 잘 된다면 너나없이, 그리고 자동차가 잘 된다니까
너나없이 자동차에 손을 대어 공존공생 아닌 공도공사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의 세계적 대기업 제너럴 모터스가 자동차 이외에, 제너럴 일렉트릭이 전기기기
이외의 어떤 업종에 손댔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횡적인 유대가 있고 없고가 그렇게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적에게
이겨내는 방법은 관료층이나 특권층에 결탁하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 이 정상의
역사는 횡적 타협이 어려운 우리 사회인지라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종로의 육의전 상인들이 각기 왕실에 어용물을 대는 조건으로 업종을 독점한
것이며 한양 사강의 객주들이 귀족과 결탁하고, 한말의 보부상이 보수세도의
앞잡이로 파워를 행세해 주고 상권을 독점한 것 등이 그것이다.
학문 연구에서 학제간 연구가 미진한 것이며, 노동 운동에서 단위조합별 운동으로
그칠 뿐 외국처럼 직종별 운동으로 연계돼 나가지 못한 것도 횡적유대에 미숙한
때문이다.
노래해도 제창은 있고 합창이 없었음이며, 춤을 추어도 독무는 있고 군무가
발달하지 않음이며, 창극을 해도 오페라와는 달리 혼자서 다역으로 완창한 것도
미숙한 횡적 유대력의 예술적 나타남이랄 것이다.
그 뭣보다 정치에서 방울샘병이 심각하다. 정책이나 정견 이해가 상반된
정파끼리의 횡적 타협이 바로 민주주의의 기조인데, 정파끼리 방울샘만 파고 있으니
정국이 이렇게 답답하고 앞날이 암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는 all of nothing이 아니라 alternative라고 말한 것은 처칠이다. 최선책
하나만을 들고 그것이 아니면 끝장이라는 것은 방울샘병 정치다. 항상 차선,
차차선책을 들고 꾸준한 횡적 모색을 해야 한다. '노!'로 상대방을 잘라 버리지 말고
'노, 벗...' '예스, 벗...'을 되풀이하면서 가능한 한 자기편의 정견이나 정책을 보다
질적으로 가미시켜 나가는 것이다. 카터 대통령의 이란 인질 구출작전이 실패한
것은 그 '블루라이트작전'이 실패했을 때 어떤 작전으로 전환한다는 차선책, 곧
올터너티브의 작전이 없었기 때문으로 평가, 지탄받은 것은 시사적이다. 절체절명의
확고부동한, 그러면서 퍼스트 카드인 동시에 라스트 카드란 정치적으로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또 다수결의 원리는 민주주의의 의사 결정을 하는 만국 공통의 보편적 원리이긴
하다. 한데 횡적 유대력이 강한 나라들에 있어 다수결 원리란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수렴하는 원리로 받아들이는데, 횡적 유대력이 약한 우리나라에서는 다수가 소수에
이기고 소수가 다수에 패배하는 승부의 원리로 생각한다. "장자"에 회라는 입이
둘이 있는 짐승 이야기가 나온다. 먹이가 생기면 두 입이 서로 먹으려고 싸우는
바람에 서로 먹지 못해 굶주리고 또 서로 물어뜯는 바람에 상처입어 죽곤 한다는
짐승이다. 두 입이 서로 횡적인 유대를 갖지 못하고 너 먹을 것, 나 먹을 것, 그리고
네 차례, 내 차례를 타협하지 못한 데서 오는 자멸인 것이다. "장자"의 회는 바로
한국의 방울샘병인 것이다. 왜 우리 한국인에게 방울샘병균이 기생했을까. 우리
한국 사람은 수천 년 동안 한마을에 태어나 그 마을에서 한 발짝 떠나지 않고
죽어갈 수 있었을 만큼 정착,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살아왔다. 곧 남들이나 딴
마을, 딴 고을, 딴 나라 사람과의 대화나 설득이나 교류나 교제나 타협 없이도 살 수
있는 생업체계 속에 살아왔기에 의식구조상 횡적인 유대에 익숙지 않은 독불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사회'란 말은 개화기 이후 도입된 서구의 개념으로 사람과
사람과의 교제나 교유 같은 횡적인 유대를 의미하였다. 한데 우리나라에 그같은
'사회'란 개념은 없었고, 그에 대체되는 '세상'이란 말이 있었을 뿐이다. 사회는 서로
협조해 가며 살아야 하는 객관적 공간이지만, 세상은 이 풍진세상... 하는 식으로
혼자서 살아가는 주관적 공간이다.
'사회'에서 살아보지 못하고 '세상'에서만 살아왔기에 횡적 유대에 미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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